시간의 이정표

작품 소개 "내일의 단편 경소설상"의 작품들을 소개합니다.

옛날에 하늘에서 환인과 환인의 아들인 환웅이 살았다. 환웅이 지상에 내려가 인간들을 다스리고 싶다고 환인에게 부탁하여 환인이 그 부탁을 허락하였다. 환웅은 바람, 구름, 비를 다스리는 여러 신하들과 3000명의 수하를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에 있는 신단수 아래로 내려와 이를 신시라 일렀다.
환웅은 풍백, 우사, 운사를 거느리고 곡식, 수명, 질병, 형벌, 선악 등을 주관하면서, 인간의 삼백예순 가지나 되는 일을 맡아 인간 세계를 다스리고 교화시켰다.
때마침,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같은 굴에서 살았는데, 늘 환웅에게 사람이 되기를 빌었다. 이 때, 신이 신령한 쑥과 마늘을 주면서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 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는다면 곧 사람의 모습을 가지게 될 것이다." 라고 말하였다. 곰과 범은 이것을 받아서 먹었다. 범은 얼마 후 굴 밖으로 나갔지만 곰은 끝까지 남아 몸과 마음을 갈고 닦았다. 그래서 곰은 여자 인간, 웅녀가 된 것이다.
웅녀는 자신과 혼인할 사람이 없었으므로 항상 단수 밑에서 아이 배기를 빌었다. 환웅은 이에 임시로 변하여 그와 결혼해 주었더니, 웅녀는 임신을 하여 아들을 낳아 이름을 '단군'이라 하였다.
-삼국유사


눈부신 햇볕이 대지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아직 봄이라 대기는 온화했다. 풀들이 한참 무성해진 것을 본 풍백은 희미하게 웃으며 소맷자락을 살짝 털었다. 그녀의 소매 안에서 바람이 일어나 풀들을 흔들었다. 대지의 생명력은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충만한 모양이다. 풀뿌리가 대지에 단단히 박혀 양분을 빨아들이고 있는 게 바람을 통해 느껴졌다. 이 정도라면 천계에서 가져온 곡식들도 잘 자랄 것이다. 우사가 시험 삼아 씨를 뿌린 것이 한 달쯤 전이었고, 그것들은 싱싱하게 대지를 뚫고 머리를 드러내었다. 본격적인 파종은 더 늦기 전에 슬슬 시작할 생각이었다. 그때는 삼사가 힘을 합해야 할 것이다.
환웅을 위시한 삼사와 천계인 삼천 명이 하계에 내려온 지 석 달이 지났다. 천계의 지배자 환인은 하계의 인간들도 천계의 인간과 마찬가지로 널리 이롭게 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그는 가장 믿을 만한 자신의 아들 환웅을 대리로 임명했다. 천계를 다스리기 전, 그 실력을 하계에서 키워보라는 환인의 배려……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환웅이 하계의 너른 대지를 다스려보고 싶다고 무심코 얘기하자마자 당장 준비해 내려보낸 걸 보면 팔불출 아버지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아니, 환인의 권위의 상징인 천부인까지 준 걸 보면 팔불출이 확실하다. 상당히 갑작스럽게 내려진 결정이라, 풍백은 지금도 자신이 하계에 왔다는 것이 실감나지 않을 때가 있었다.
그녀는 몸을 곧게 하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자연환경에 있어서는 하계와 천계 모두 사람이 사는 데 전혀 지장이 없었다. 천계는 구름 위에 둥실 떠 있는 환상 같은 장소가 아니라 산맥과 산맥이 만나는 자리에 솟아있는 거대한 고원이었다. 날씨가 항상 화창하고 씨를 뿌리면 오곡백과가 절로 자랐기에, 천계의 사람들은 풍족함을 바탕으로 농경, 주조 등의 발전에 집중해 큰 성과를 낼 수 있었다. 그에 비해 하계의 인간들은 하루하루 먹고 사는 데 바빴기에 아직 미개했다. 나무나 돌을 이용해 집을 만들 생각을 하지 못하고, 구덩이를 파 그 안에서 생활하는 모습은 환웅의 무리에게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삼사는 하계의 인간들에게 본을 보이기 위해, 함께 온 삼천 명에게 자신들이 살 집부터 짓게 했다. 나무와 돌로 깔끔한 집 천 채가 완성되고 제각기 자신의 집을 정해 들어가 하나의 군락이 형성되자, 하계인들이 그들의 다스림을 받고자 절로 모여들었다. 그들에게 명목적인 지배자는 환웅이었지만 환웅은 아직 어렸기에 실질적으론 삼사가 그들을 다스리고 있었다. 각종 기술을 가르치고 360가지의 법도를 몸에 배게 하며 인구를 늘리는 일까지 모두 삼사의 몫이었다. 삼사가 하계인들에게 존경받는 것은 본연의 신력 때문이기도 했지만, 자신들을 발전시켜 주는 데 따른 고마움이 더욱 크다고 해도 좋을 것이었다.
풍백은 사람들이 일하는 데 불편이 없는지를 살펴본 후 자신의 거처로 발길을 옮겼다. 사뿐사뿐 걸을 때마다 한 올 흐트러짐 없이 허리까지 내려오는 머리가 찰랑거렸다. 길에는 돌멩이가 많았지만, 그녀는 마치 몸무게가 없는 사람처럼 미끄러지듯 걸어갔다. 여자치곤 매우 큰 키와 뚜렷한 이목구비, 수수하지만 정갈하게 단정된 의복을 가진 그녀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한번씩 흘끔거리며 쳐다보게 만들었다. 그들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풍백은 싱긋 웃으며 가볍게 인사하곤 했다. 그리고 인사를 받은 인간이 황망히 답례하려 할 때쯤엔 그녀의 모습은 어느새 저만치 멀어져 있었다.
그녀가 도착한 곳은 거대한 나무 아래였다. 환웅이 '신단수'라 이름붙인 이 나무는 현재 하계에서 가장 신성한 영물이었다. 천계에서 내려온 후 어디로 갈까 고민하던 환웅 무리에게 답을 준 것이 신단수의 막대한 기운이었다. 이들은 신단수 아래 도착하자마자 이곳을 자신들의 중심으로 삼기로 결정한 바 있었다. 신단수가 내뿜는 기운은 천계의 나무보다도 오히려 월등했기에, 환웅과 삼사는 이 나무의 영기를 몸으로 받을 때마다 자신들이 하계에 있다는 사실을 망각할 정도였다. 그들은 아직 대지의 기운이 낯설었기 때문에, 대지의 기운 대신 이 나무의 영기를 몸에 축적한 후 신력으로 변환하고 있었다. 물론 조만간 대지에 익숙해지고, 대지의 기운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거대한 나무를 쓰다듬으며 잠시 상념에 잠겼던 풍백은 곧 자신의 목적을 떠올리고 나무 뒤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환웅과 삼사를 위한 거주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신단수의 가지를 이용해 만든 초막은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해지는 특수한 공간이었다. 이러한 영물을 이용하는 건 이들 넷뿐이다. 만약 사람들 모두가 그러한 것을 원해 신단수의 가지를 원한다면 신단수는 약탈 속에서 고통스럽게 죽어야 할 것이다. 그 때문에 환웅은 이곳에 내려온 첫날에 신단수를 범하지 말 것을 엄하게 선포한 바 있었다. 다행히 하계인들은 거대한 신단수를 가장 위대한 존재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조치는 어김없이 지켜지고 있었다.
"들어가겠습니다."
풍백의 긴 손가락이 초막의 입구를 제쳤다. 초막 안에는 여러 종류의 책들과 약재, 형태만으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도구 등등이 복잡하게 뒤엉켜 있었다. 하지만 초막의 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올해 열다섯인 환웅은 물건을 어지럽히는 것과 항상 어딘가를 쏘다니길 좋아했다. 그 때문에 삼사는 늘 환웅의 교육에 애를 먹고 있었다. 일단 자리에 앉혀놓아야 하계를 다스리는 법이나 농사짓는 법, 천계의 비의인 청동 주조 기술 등에 대해 알려줄 수 있을 게 아닌가.
그러나 입으로는 늘 불평하면서도 이들은 내심 환웅에 대해 감탄하고 있었다. 하계에 내려온 후 신단수 옆에 붙어살다시피 했던 삼사에 비해, 환웅은 대지의 기운에 익숙해지기 위해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몸을 적응시키는 중인 것이다.
"열다섯…… 이란 걸까."
이십 중반에 걸쳐진 자신의 나이를 생각하니 풍백은 문득 우울해졌다. 최근 운사가 풍백의 나이를 주요 농담 소재로 삼고 있기 때문에 괜히 신경쓰이는 부분이었다. 이를 얼른 잊기 위해 그녀는 환웅의 흔적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환웅이 막 말을 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녀는 환웅의 스승이었고, 이제는 환웅을 남동생처럼 생각하며 돌보고 있었다. 특히 그녀가 요새 신경쓰는 것은 환웅의 식사 문제였다.
“오늘은 또 쑥과 마늘을 어디에 처박아 두셨는지……”
늘 먹기 싫다고 구석에 처박아두었던 신령한 쑥과 마늘이 오늘따라 유난히 보이지 않았다. 풍백이 자신의 능력까지 동원해 보았지만, 약초들은 흔적도 없었다. 이를 확인한 풍백은 아까의 우울을 잊고 활짝 웃었다. 쑥과 마늘이 한꺼번에 없어졌다는 것은 환웅이 이를 모두 먹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던 것이다.
그것들은 삼사의 모든 기운이 들어간, 가히 천부인에 버금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약초였다. 무리 중 유일하게 아직 성인이 아닌 환웅이기에, 자칫 천계와 다른 하계의 공기에 해를 입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천계에서 이곳까지 오는 도중에는 이들에게 천계의 기운이 강하게 남아 있어 큰 문제가 없었지만, 그 기운은 이제 많이 옅어져 있어 더 이상 그를 보호해 주지 못할 터였다. 그래서 삼사는 신단수의 기운과 자신들의 기운까지 불어넣은 신령한 쑥과 마늘을 환웅에게 복용하게 했다. 먹기 싫다고 발버둥치는 환웅에게 억지로 이를 먹이는 것은 풍백의 골칫거리였는데. 오늘 드디어 정신을 차리고 몽땅 먹어버린 듯했다.
‘항상 이렇게 말을 잘 들으면 좋으실 것을.’
그녀는 지나치게 활달한 소년을 떠올리며, 그가 다음에 복용할 약초의 목록을 머리속에 그려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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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숲 속을 걷고 있었다. 하계의 숲은 천계에 비해 무질서하고 야만적이다. 곳곳에서 알 수 없는 생물들의 기가 느껴지고, 바람은 수상한 냄새를 몰고 온다. 하지만 소년은 무서워하지 않았다. 자신은 하계의 제왕이 될 몸이고, 이곳의 생물들은 모두 그의 아래란 사실을 자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년의 걸음은 당당했다. 잘 단련된 육체와 옆구리에 찬 청동 단검에서 뿜어지는 위엄은 사람 뿐 아니라 짐승들까지 길을 비키게 만들었다. 만약 이 자리에 하계인이 있었다면, 사나운 늑대가 땅바닥에 누워 배를 드러내는 광경을 보고 혼비백산했으리라. 모든 생물이 그를 본 순간 그가 환웅이란 걸 깨닫게 되므로, 그는 환인과 더불어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다니지 않아도 되는 고귀한 존재였다.
제왕의 위엄을 자랑하고 있는 소년은 지금 한 가지만을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하계를 평화롭게 다스리는 것? 아니면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는 것? 유감이지만 그의 생각은 이와는 거리가 멀었다.
"어디 보자…… 아니, 이곳도 무리겠군. 그들이 곧 눈치챌 거야."
환웅은 손에 든 주머니를 보며 장탄식했다. 주머니에는 신령한 쑥과 마늘이 그득하게 담겨 있었다. 다른 건 어떻게 먹겠지만, 삼사가 특별히 영기를 불어넣어 만들어낸 신령한 쑥과 마늘은 그 효능만큼이나 맛과 향도 대단한 물건이었다. 하계의 맛있는 과일과 조개, 물고기 등이 사방에 있는데 이런 것을 있는 힘껏 먹어야 한다는 건 바보 같은 일이다. 그렇다고 당당하게 '환인의 자손인 나 환웅이 이 자리에서 선언하노니, 나 이거 안먹어'라고 했다간 삼사에게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 그래서 아예 이 골칫거리를 처분해버리고 다 먹었노라고 발뺌하기 위해 들고 나온 것이다.
하지만 막상 나오고 나서 생각해보니, 처리방법이 골치였다. 워낙 신령한 물건이라 땅에 묻었다가 천계까지 닿을 만큼 쑥쑥 자라버릴 수도 있고, 불에 태웠다간 풍백이 당장 연기를 눈치 챌 것이다. 물에 던져버리면 마찬가지로 우사가 감지할 것이고…… 천계에서도 손꼽힐 만큼의 인재들이었기에, 지금의 환웅에겐 버거운 존재들이었다. 너무 잘난 신하를 두면 피곤한 법이다.
그때 환웅에게 큰 그림자 하나가 다가왔다.
"응? 넌 뭐냐?"
그에게 다가온 것은 아직 새끼 티를 벗지 못한 능손이(작가주:새끼곰의 우리말)였다. 환웅보다 고작 조금 더 클 정도의 크기도 그렇지만, 정도 이상으로 순해 보이는 표정 때문에 위압감이라곤 조금도 들지 않는 모습이었다. 게다가 능손이는 옆구리에 큰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 상처의 형태를 보아하니 같은 곰과 싸우다 당한 것 같았다. 환웅은 이를 보며 측은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사냥할 필요가 있었다면 앞장서서 어떤 짐승이든 잡았겠지만, 사냥을 하지 않을 때에는 눈앞에서 생명이 죽어가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
능손이는 그의 앞까지 오더니 힘이 다해 자리에 풀썩 엎드렸다. 이대로 놔두면 곧 죽을 게 뻔했다. 환웅은 잠시 망설이다 자루 안에서 쑥을 조금 꺼내 곰의 입에 넣어주었다. 능손이는 사양하지 않고 이를 받아먹었다. 그러자 능손이의 눈에 생기가 돌아오면서 상처에서 흐르던 피가 멎었다. 과연 삼사의 힘의 정수가 담긴 약초다웠다.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의 원인을 깨달았는지, 능손이가 주둥이로 자루를 밀며 끙끙거렸다.
"뭐? 이거 또 달라고?"
능손이가 잡식성 동물이긴 해도, 미각이 둔하진 않다. 그런 녀석이 환웅도 인정한 최악의 맛을 가진 약초를 탐내는 걸 보니, 어지간히 살고 싶었나 보다. 환웅이 어떻게 할까 고민하자 능손이는 다시 자루를 가리키며 울었다.
"곰곰~"
“뭐?”
“곰곰.”
환웅은 잠시 고민했다. 곰이 원래 이렇게 우는 동물이었나? 아직 지상에 대한 경험이 별로 없긴 했지만, 이게 뭔가 이상하다는 게 몸에 와닿았다. 다 이런 식으로 운다면 소는 소소 하고 울지 음메 하고 울 리가 없지 않은가. 아니면 곰만 뭔가 특별한 걸까? 결론을 내리지 못한 그는 나중에 삼사에게 물어보리라 다짐했다.
"희한하게 우는 녀석이네. 어쨌든 먹고 싶어하는 것 같으니, 옛다."
환웅이 다시 쑥을 약간 건네주자 능손이는 앞발로 그것을 받아 입에 넣었다. 좀 살 만하자 이제야 맛과 향이 제대로 느껴졌는지, 녀석은 몇 바퀴 구르더니 근처의 나무를 세차게 긁어댔다. 그 모습이 우스워 환웅은 박수를 치며 웃었다.
"하하하, 반응이 괜찮은 녀석이네…… 잠깐?"
소년에게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대뜸 능손이에게 따라오라고 손짓한 후 앞장서서 걸어갔다. 풀숲을 헤치고 개울을 하나 건너자 동굴이 하나 나왔다. 그는 그 앞까지 능손이를 데려온 후 자루를 열고 안에 든 쑥과 마늘을 몽땅 굴 안으로 집어던졌다. 능손이는 뭔가 자신에게 불행한 일이 닥칠 거라는 걸 느꼈는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환웅과 동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자루가 다 비자 환웅은 생긋 웃으며 능손이를 바라보았다.
"아까 맛있었지? 분명 특별한 맛이었을 거야. 하계에서는 맛볼 수 없는, 천계의 맛이지."
"곰곰……"
"자, 지금이 기회야. 저 안에 아까 먹었던 게 잔뜩 있으니, 얼른 들어가서 맛있게 먹어. 남.김.없.이."
"곰……곰……"
"뭐야, 아까 그렇게 맛있게 먹어놓고 이제 와서 싫다고 할 참이야? 얼른 들어가라니까?"
"곰곰~~"
능손이가 머리까지 흔들며 거부했다. 아까 혼난 것도 있었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 동굴에는 이 일대의 지배자인 영험한 범이 살고 있었다. 백 년을 넘게 살았다는 소문까지 있는 그 범은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동굴 안에서 도를 닦는 데 쓴다고 한다. 능손이도 부모에게 얘기만 들었지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범이 여전히 동굴 안에 있는 건 확실했다. 저 깊은 곳에서 풍겨오는 범의 냄새를 맡으며, 곰은 자신이 말 그대로 범 아가리에 얼굴을 들이미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환웅도 물러서지 않았다. 설득이 통하지 않는다면, 듣게 만들 뿐이다. 그는 기어이 품에서 천부인을 꺼내들었다. 천계의 지고한 권위를 상징하는 영롱한 도장을 보자 능손이는 자신도 모르게 엎드려 절했다. 도장에서 새어나오는 상서로운 기운과 향기는 능손이의 정신을 조금씩 지배해나갔다. 이런 달콤한 기분은 꿀을 따먹으면서도 느끼지 못했던 터였다. 이런 기분을 느끼게 해 준 자의 명령이라면 어떤 것도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능손이는 황홀한 표정으로, 환웅이 명령을 내려주기를 소망했다. 환웅은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는 손을 뻗어 동굴 안을 가리키며 위엄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들어가서 저거 다 먹어."
능손이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동굴 안에 들어갔다. 환웅은 능손이의 모습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마자 동굴의 입구를 바위로 봉하고 거기에 자신의 힘을 약간 불어넣었다. 이것으로 동굴은 삼사의 탐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삼사의 말에 의하면 저 약초들의 기운이 완전히 환웅의 몸에 흡수되는 데에는 백 일 정도 걸린다고 했으니, 환웅은 완전범죄를 위해 능손이를 백 일 동안 저기 가둘 생각이었다. 신령한 쑥과 마늘은 조금만 먹어도 며칠 동안 갈증과 공복을 없애주기 때문에 능손이가 저 안에서 굶어죽을 일은 없을 것이다. 자신은 저 쓴 걸 먹지 않아도 되고, 능손이는 저걸 다 먹고 상처를 치유할 수 있을 테니 서로 이득이라고 환웅은 결론을 내렸다. 사실 삼사가 환웅에게 의심을 품고 그의 몸을 면밀히 조사해 본다면 곧 거짓말이 들통날 테지만, 환웅은 삼사가 그 정도로 자신을 의심하리라곤 털끝만큼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콧노래를 부르며 근처에서 본 과일나무를 향해 유유히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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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입구가 막혀 어둠이 드리워졌지만 능손이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능손이에겐 오직 환웅의 명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만 남았기에, 코를 킁킁거리며 바닥에 널린 쑥과 마늘을 먹어댔다. 맛과 향은 참기 힘들 정도였지만 몸에 새로운 기운이 점점 불어나고 있다는 걸 그는 느꼈다. 몸에 좋은 건 맛도 좋다는 곰 세계의 격언이 틀릴 때도 있다는 걸 신기해하며 능손이는 우직하게 약초들을 씹어댔다.
뭔가 엄청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걸 능손이가 눈치챈 것은 바닥의 약초들이 반쯤 사라졌을 무렵이었다.
“곰곰…… 곰곰!”
능손이는 갑자기 배를 붙잡고 나뒹굴었다. 복부에서부터 엄청난 통증이 느껴졌다. 이는 방금 입었던 상처의 고통과도 비할 바가 아니었다. 벼락을 정통으로 맞은 느낌이 이와 같은 걸까? 능손이는 고통을 참기 위해 동굴 입구로 뛰어가 바위를 사정없이 앞발로 내리쳤다. 하지만 환웅의 신력이 깃든 바위는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계속 앞발로 바위를 긁고 후려치고 하다 보니 발톱이 부러져 나가고 살이 찢어졌다. 그리고 그 상처들은 능손이의 체내에 잔류하는 약초의 힘으로 순식간에 아물어갔다. 하지만 그 아픔과 정신적 고통은 지워지지 않았다. 게다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으니 상처가 나았다는 걸 알 수도 없었다.
결국 능손이는 자신의 앞발이 으스러졌을 거라 믿으며 혼절해 버렸다.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동굴의 공기가 떨리기 시작했다. 뭔가 엄청난 존재가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은 어둠 따위는 조금도 장애가 되지 않는 듯 유유히 걸어왔다. 그 당당한 걸음은 그에게 두려운 것 따윈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발걸음은 쓰러져 있던 곰 앞에서 멈추었다. 잠시 아래를 내려다보던 그 존재는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약한 아이로군. 왜 이곳까지 기어들어와 기절한 것이더냐?
게다가 이 약초들은 또 뭔가? 이 녀석이 가져온 건가?”
목소리의 주인공은 놀랍게도 인간이 아니었다. 능손이가 전해 들었던 도 닦는 범이 목소리의 주인이었다. 이 땅에서 가장 높은 성스러운 산 어귀에서 태어난 그는 인간이 되기 위해 이리저리 떠돌며 도를 닦았다. 그렇게 유랑하던 중 신단수를 보고 반해 그 일대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타고난 영력과 신단수에서 받은 정기를 차곡차곡 몸에 쌓으며 오래도록 육식을 끊고 도를 닦다 보니, 어느새 사람의 말을 하거나 여러 술법을 쓸 수 있게 되었던 것이었다. 눈에서 뿜어지는 광채만으로도 그의 얼굴이 밝게 비칠 정도였으니 그의 힘을 짐작할 만했다.
기척이 느껴져 모처럼 움직였던 범은 곰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육식을 끊은 지 오래라 곰이 자길 잡숴 달라는 자세로 쓰러져 있어도 별 감흥이 없었다. 이곳에 기어들어온 게 괘씸하긴 했지만, 능손이다운 호기심이라 생각하고 관대하게 넘어갈 생각이었다.
오히려 범은 바닥에 나뒹구는 쑥과 마늘에 더 흥미가 갔다.
“이런 엄청난 냄새라니, 맛도 무지막지하겠군…… 이거 먹어도 되는 건가?”
육식을 끊고자 일대에 난 모든 식물을 섭렵해 본 범이었다. 불안함보다 호기심이 더 강했기에 범은 바닥에 널린 쑥과 마늘을 한데 모았다. 범의 덩치가 워낙 거대하다 보니, 한입에 다 털어넣어야 맛 좀 봤다고 할 만한 양이었다. 하지만 그건 범의 성급한 판단이었다.
잠시 후, 범은 온 산이 진동할 만큼 처절하게 울부짖음으로써 본의 아니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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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웅의 짐작대로 삼사는 그의 만행을 눈치채지 못했다. 삼사가 쑥과 마늘을 잘 먹었다고 그를 칭찬했을 때, 환웅은 최초로 이들 모두를 동시에 속여넘겼다는 사실 때문에 감동했다.
하지만 지금, 그는 괜히 삼사를 속였다고 자책하며 동굴을 향해 뛰어가고 있었다.
-천계의 기운이 담긴 물건을 하계의 생물이 접하면 이변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계의 기운과 천계의 기운은 근본은 같지만 그 차이가 심하므로, 자칫하면 천계의 것도 하계의 것도 아닌 묘한 것으로 변질될 우려가 있습니다. 저희와 함께 온 삼천 명은 처음부터 천계의 기운이 강하지 않았으니 상관없지만, 환웅님과 저희 삼사는 행동거지 하나하나에 각별히 유의해야 할 것입니다……
환웅님? 웬 땀을…… 더우시면 물을 좀 드시겠습니까?
풍백의 뒤늦은 강의 덕에 생곰 하나 잡게 생겼다. 능손이를 그 안으로 밀어넣은 것에 대해선 별로 미안하지 않았지만, 만약 능손이가 쑥과 마늘로 인해 괴이하게 변하거나 혹 죽어버렸다면 환웅은 평생 이를 자책할 것이다. 살아가기 위해 생명을 해한 게 아니라 그저 반 장난 식으로 생명을 죽인다는 것은 천제의 아들인 그로서도 감당하기 힘든 죄악이다. 온화하고 너그러운 삼사지만 이런 일을 그냥 넘어가진 않을 것이다.
이미 삼칠일이 훌쩍 지난 뒤이다. 제발 능손이가 무사하기를 빌며 그는 나는 듯 달리다 아예 날아갔다. 신통력을 쓰는 데 들어간 기운은 나중에 신단수에서 보충하면 된다. 새보다 빨리 공중을 나는 그를 보며 하계인들은 황망히 엎드려 절했지만, 그는 그런 걸 볼 여유도 없었다.
이윽고 그가 입구를 틀어막은 동굴이 나타났다. 바위는 아직 동굴 입구를 막고 있었지만, 가까이 가 보니 간신히 원형만 유지하고 있었다. 그 안에 담았던 자신의 신력은 그리 많은 양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일개 능손이가 뚫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렇다면 안에 있던 능손이가 자신의 기운을 능가할 정도의 괴물이라도 되었단 말인가?
만약 그가 좀더 자세히 보았다면 그 바위가 옆으로 한번 굴렀던 흔적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동굴 안에서 무언가 빠져나갔음을 보여주는 증거였지만, 그는 거기까진 관찰하지 못했다.
‘괴물이 되었다면…… 이 손으로 처리한다.’
자신의 죄는 자신이 업보를 져야 한다. 이는 환웅이라 해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그는 허리춤의 청동검을 빼들고 바위를 베었다. 신력이 담긴 검은 바위를 단숨에 두 조각으로 쪼갰다. 그로 인해 막혀있던 동굴의 입구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자 그는 그 안으로 신중하게 들어갔다.
그가 얼마쯤 들어갔을 때 가느다란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큰 바위를 걸레로 만들어놓은 주제에, 지금 들리는 소리는 턱없이 연약해 보였다. 저 정도라면 살생을 저지르지 않고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환웅은 다소 안도하며 급히 걸어갔다.
그가 들어오며 바위를 치웠기에, 빛은 그를 따라 동굴 안으로 입장했다. 성급하게 동굴을 채워나가던 빛은 환웅보다 먼저 목표물을 발견하고 그를 포위했다. 능손이가 동굴 구석에 있을 거라 지레짐작했던 환웅은 동굴 중간쯤에서 빛에 감싸인 ‘그것’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 멈췄다.

“곰곰~”

‘곰이었던 것’은,
나른하게 곰곰 하고 울었다.

"에에... 에? 너?"
"곰곰~"
그것은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곰곰 할 때냐! 대체 어떻게 된 거야?"
"곰곰~?"
"곰곰 하지 말라니까! 말을 해! 넌 말을 할 수 있다고!"
"곰... 어라아~? 말이~?"
환웅의 앞에는 전라의 소녀가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계속 의식을 잃고 낑낑대다가 이제서야 일어난 듯하다. 막 허물을 벗기라도 한 것처럼 깨끗하고 고운 피부는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했다. 천계에서도 이 정도의 여자는 거의 없었다. 나올 곳과 들어갈 곳이 아직 완연하지 않은 소녀의 몸이지만, 엄연히 남녀의 유별이 있는 터라 환웅은 얼굴이 화끈해졌다.
가슴에서 시선을 떼어 다른 곳을 바라보니 더욱 놀라운 장면이 펼쳐졌다. 비스듬하게 누워 있는 그녀의 머리 위에 둥근 귀가 달려 있었다. 형태를 보니 곰의 귀 그 자체이다. 게다가 몸을 살짝 틀자 엉덩이 사이에 짤막한 꼬리까지 달려 있었다. 이건 누가 보더라도 전 곰이었어요, 라고 말하는 광경이다.
"저기~ 환웅님 맞죠~? 환웅님이 주신 쑥이랑 마늘, 다 먹느라 정말 고생했쩌요~"
말을 하는 게 아직 어색한지, 어눌한데다 느릿느릿하다. 하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다. 환웅은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귀를 살짝 잡아당겼다. 그녀가 얼굴을 찡그리고 짧게 비명을 질렀다. 그는 놀라서 손을 떼고 머뭇거리며 물었다.
"너, 너…… 그때 그 능손이 맞지? 어떻게 사람이…… 아니, 이렇게 변한 거야?"
"저도 몰라요~ 먹을 게 없어서 그것만 계속 먹다가, 갑자기 어지러워서 쓰러졌는데~ 환웅님이 깨워주셔서 일어나 보니 이렇게~ 그나저나 춥네요~"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더니 눈앞에 있는 환웅에게 안겨왔다. 두터운 털과 가죽이 갑자기 사라진 데다 동굴 안은 초여름인데도 꽤 싸늘했기 때문에 반사적으로 나온 행동일 것이다. 소년은 엉겁결에 그녀를 안았다. 따스한 온기가 자신의 옷 너머로 전해져 왔다. 자신을 이렇게 안아주는 존재는 천계의 가족과 삼사 이외엔 아직까지 없었다. 낯설지만 따스한 그 온기에 취해 그는 그렇게 그녀를 안은 채 멍하니 쭈그려앉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환웅은 자신이 무엇 때문에 이곳에 왔는지 깨달았다. 그는 일단 그녀의 어깨를 붙잡아 살짝 자기에게서 떼어놓은 후, 되는 대로 말을 꺼내려 했다. 하지만 환웅은 열었던 입을 다시 다물고 그녀를 다시 강하게 끌어안았다.
눈물로 범벅이 된 그녀의 얼굴을 보지 않기 위해서.
"저……흑, 어떡해요? 아빠랑 엄만 나쁜 곰에게 당해 버렸고, 전 겨우 도망쳤는데 이런 모습이 되었어요~ 이제 짝짓기도 못하고…… 꿀도 못 따먹고……어떻게 살아야 해요?"
"아니, 저…… 진정해. 울지 말고. 이렇게 되었으니 책임은 질 테니까."
환웅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애당초 해결책은 하나밖에 없었다. 만약 그가 나이를 좀 더 먹고 영리함과 교활함을 몸에 새겨 두었다면 다른 방법을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열다섯의 소년에 불과했고, 그가 지닌 우직함과 순수함은 이 방법밖에 없다고 그를 다그쳤다.
"나를 따라오지 않을래? 나랑 같이 살자. 이제 네 엄마랑 아빠랑은 함께 살 수 없겠지만, 내가 항상 함께 있어줄게."
환웅에게 미미하게 느껴지던 그녀의 떨림이 뚝 그쳤다. 훌쩍, 하고 코를 들이킨 후, 그녀는 환웅의 어깨 너머로 조심조심 말했다.
"정말~ 따라가도~ 돼요~?"
"그래."
"저어~ 많이 먹는 편인데~"
"이 몸은 환웅이다. 내가 너 하나를 먹이지 못할까?"
그녀는 천천히 환웅에게서 몸을 떼어내더니 환웅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얼굴은 눈물콧물로 엉망이었지만, 그 모습은 어느 하계인보다도 순수해 보였다. 하계의 생물이 허용치 이상으로 천계의 기운을 흡수한 첫 번째 사례는 환웅에겐 일단 최악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결과를 차선으로, 그리고 최선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앞으로 많은 노력을 해야 하리라.
그녀를 어떻게 되돌릴지, 아니면 인간으로 살아가게 해야 할지는 삼사와 상의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모습이 어떻게 되었든, 그녀는 살아 있고, 눈부신 생명력을 내뿜고 있다. 그 사실이 너무나 반갑고 고마워, 이번엔 환웅이 그녀를 덥석 끌어안았다. 그녀는 잠시 어리둥절해하다 환웅을 마주 끌어안았다. 순간 거대한 압력이 환웅의 등으로 전달되었다. 모습이 바뀌었어도 곰의 힘은 그대로 남아있는 듯했다. 그는 하마터면 신음을 터뜨릴 뻔했지만, 하계의 지배자는 이깟 일로 신음을 내면 안 된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고 압력을 버텨냈다.
"어라~ 환웅님~ 괜찮으세요? 역시~ 저를 맡으시는 게 무리이신 게~"
"……아니야. 신경쓰지 마. 넌, 내가 맡는다."
"정말이죠? 그럼~ 저, 저기~"
그녀는 고개를 조금 숙이더니 약간 빨개진 얼굴로 말했다.
"저, 꿀도~ 가끔씩 따 주시는 거죠?"
"물론!"
등뼈가 바스라질 것 같은 압박 속에서도, 환웅은 조금 수줍은 듯한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미소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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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환인의 뜻대로 흘러간다. 환인의 뜻은 그대로 진리가 되어 천계와 인간계에 퍼져 간다. 이는 훗날 환웅이 이어받아야 할 큰 사명이었다.
-세상의 진리를 만들되 세상의 순리에 거스르지 말라. 세상의 흐름은 환인이라는 존재마저 뛰어넘는 거대한 물결이다.
이는 환웅이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첫 번째 교훈이었다.
그래서일까, 환웅은 지금 세상사 흘러가는 게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환웅님! 대체 무슨 일을 저지르셨는지 설명을 해보시죠!”
“뭐, 보다시피.”
“……설령 제가 환웅님께서 신령한 쑥과 마늘을 먹기 싫다고 곰에게 억지로 먹였다가 그 반발력으로 곰이 반쯤 사람이 되어버렸다는 걸 이미 눈.치.챘.다.고.하.더.라.도 말이죠, 환웅님께서는 우리에게 설명을 해 주실 의무가 있는 겁니다.”
풍백이 평소답지 않게 얼굴을 살짝 일그러뜨리며 또박또박 말했다. 이건 보통 중대사가 아니었다. 신령한 쑥과 마늘은 환웅만을 위해 만든 것인데, 이게 몽땅 소진되어버린 것이다. 이것만 해도 큰일인데, 만약 환웅이 천부인을 사용한 게 발각나기라도 했다면 그는 한 일년정도 삼사에게 구박받으며 살아야 했을 것이다.
풍백이라면 이해해줄 거라 조금 기대했던 환웅은 풀이 죽어 말했다.
“이미 다 말했잖아. 거기에 내가 뭘 더 말하라는 거야?”
“그건 스스로 생각하실 문제입니다.”
환웅에게 상당히 어려운 질문을 던져준 후 풍백은 고개를 돌려 소녀를 바라보았다. 아직은 곰이라 해야 할지 소녀라 해야 할지 애매해 보이는, 세상의 법칙을 제대로 위반한 외양이었다. 얼굴은 비교적 멀끔해 보였지만 인간의 귀 대신 머리 위에 둥그런 곰의 귀를 달고, 엉덩이에서 꼬리를 살짝살짝 흔들어대는데다, 이제 보니 손바닥과 발바닥에 육구까지 있었다. 풍백의 계산으로는 백일 가량 동굴 안에서 신령한 쑥과 마늘을 먹으며 수행하면 충분히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있었다. 세상의 법칙을 거스른다는 것은 세상을 속이는 일이기에 빛을 피해 수행해야 하는 터. 하지만 소녀가 동굴에 있던 기간은 고작해야 삼칠일 남짓이라 이렇게 어정쩡하게 변한 듯했다. 그나마 모자와 옷으로 가리면 수습이 가능할 것도 같긴 했지만, 아직 완연히 남아 있을 곰의 성품은 어느 세월에 바꿔나가야 한단 말인가.
소녀는 풍백을 향해 쭈뼛쭈뼛 입을 열었다.
“예쁜 암컷님은 환웅님의 엄마인가요?”
“누가 암컷에 엄마라고!”
풍백은 간신히 유지하던 평정을 와장창 부숴버렸다. 안 그래도 하계에 온 뒤로 부쩍 잔주름이 많아진 듯해 신경을 쓰고 있었는데, 이 소녀가 풍백의 약점을 잔인하게 파고든 것이었다. 물론 평소의 풍백이라면 어떻게든 참아낼 수 있었겠지만, 환웅 덕분에 임계점을 진작에 넘어버린 터라 당해낼 수 없었다.
풍백이 침착을 잃자 어디선가 거센 바람이 일어나더니 풍백의 주변을 돌개바람처럼 싸고돌기 시작했다. 그 명백한 적의를 향해 환웅은 눈썹을 찌푸리며 적당히 하라고 말하려 했다.
그때 천막의 문이 젖혀졌다.
“운사, 우사 들어가겠습니다.”
거대한 남자가 입구를 비집고 들어왔다. 환웅의 두 배는 됨직한 장사였다. 남자다운 이목구비와 옷이 답답해보일 정도로 엄청난 근육을 보며 소녀는 침을 삼켰다. 그런 그의 어깨에는 그의 허벅지에나 올까말까 할 정도로 작은 소녀가 싱긋 웃으며 앉아 있었다. 귀여운 얼굴 뒤로 구름 같은 은빛 머리카락이 펼쳐져 드리워져 있었는데, 그 길이는 남자의 키와 거의 맞먹을 정도였다. 그것만으로도 특이한데,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움직일 때마다 주변의 색이 그대로 비치는 것처럼 머리카락의 색이 바뀌고 있었다.
“아…… 운사, 우사가 왔군요.”
하계 순시를 나갔던 두 사람에게 연락을 넣은 게 풍백이었다. 바람을 다루는 풍백이니만큼 그녀가 지정하는 대상을 감시하거나 그 대상에게 목소리를 전하는 건 주특기였다. 워낙 중대한 사안이라 셋이서 머리를 맞대 보자고 부른 건데, 정작 두 사람은 흥분한 풍백의 얼굴을 보더니 손뼉을 치며 웃었다.
“하하, 풍백 누님. 재미있는 일이 생겼다고 해서 왔는데, 지금 보니 누님이 제일 재밌는 걸? 저 소녀야 진심으로 한 말이겠지만, 너무 신경쓰지 마.”
“그러지 마요, 우사. 풍백 언니는 지금 저 소녀에게 엄마 취급을 당해서 마음이 찢어질 것 같단 말이에요. 세상에, 엄마 취급이라니! 풍백 언니는 지금 이보시게, 내가 엄마뻘이라니! 내가 엄마뻘이라니~! 하는 자괴감에 잔뜩 빠져 있는데, 그런 풍백 언니의 가슴에 엄마뻘이라는 소녀의 말이 진심이었다고 할 셈이에요? 물론 진심 맞다는 건 맞지만, 이럴 땐 반만 진심이었을 거라고 거짓말도 섞어서 말해줘야죠.”
“………………………………당신들 따위 필요없으니 왔던 데로 돌려보내드리죠.”
쌓이고 쌓였던 풍백의 바람이 무섭게 분출해 두 사람을 덮쳤다. 운사는 과장된 비명을 지르며 우사의 목을 두 팔로 감쌌다. 바람은 우사의 몸을 거세게 휩쓸었지만 그는 두어 발짝 물러났을 뿐 굳건히 바람을 견디어냈다. 구름은 바람에 날리지만 비는 바람과 섞이는 존재였다. 풍백이 아무리 강풍을 일으켜도 그 바람의 흐름을 읽을 수 있는 우사를 날려버릴 순 없었다.
“오오, 풍백 누님의 바람을 맞으니 땀이 말라서 좋군,”
“당신은 생각한 걸 입 밖에 바로 내는 그 습관 좀 뜯어고쳤으면 좋겠군요.”
풍백은 이를 갈면서도 결국 바람을 거두었다. 더 이상 했다간 초막이 무너져버릴지도 몰랐다. 안 그래도 초막 안은 바람 때문에 엉망이 된 터였다. 게다가 어느새 고민을 마친 환웅이 이쪽을 지그시 노려보고 있기도 했다.
“잘 한다. 여길 아주 날려버리지 그래? 거처할 곳 없어지면 신단수 위에 올라가 별이라도 세며 잘 테니까.”
“……죄송합니다, 환웅 님. 곧 정리하겠습니다.”
풍백은 손을 휙 저었다. 그러자 초막 안에 널부러졌던 물건들이 둥실 떠오르더니 거짓말처럼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 모습을 본 소녀가 눈을 빛내며 외쳤다.
“암컷님, 귀신 같아! 대단해!”
“…………이봐, 넌 잠깐 입 좀 다물고 있어봐……”
혈압이 올라 쓰러지기 직전이 된 풍백이 안쓰러운 나머지, 환웅이 그녀의 입을 다물게 했다.
자리가 좀 정돈되자 환웅은 삼사에게 그녀를 소개했다.
“이쪽은 내 실수로 사람이 되어버린 능손이다. 이 소녀를 어떻게 해야 할지 정해야겠지만, 그 전에 이 소녀가 현재 하계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너희가 가르쳐줬으면 한다.
일단 서로 잘 알아야 할 테니, 자기소개부터 하도록 하지. 참, 그전에 이름을 하나 만드는 게 나을 텐데…… 그렇지, 능손이란 이름을 좀 줄여서 소니라고 하자. 알았지?”
“소니~? 그게 제 이름인가요~?”
“그래. 삼사에 비해 네가 많이 낮은 존재니까 네가 먼저 자기를 소개하도록 해. 부담 갖지 말고 편하게.”
“네엡!”
대답은 잘했지만 여전히 긴장했는지 귀가 빳빳하게 서 있었다. 그걸 본 환웅이 한숨을 쉬며 그녀의 귀를 쓰다듬었다. 귀 좀 접고 얘기하라는 표시였지만, 소니는 환웅의 손이 머리를 쓰다듬자 ‘기분 좋아요~’하며 눈이 살짝 풀렸다. 이를 본 운사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환웅님, 이의 있습니다! 저한테는 그런 거 안 해주시면서! 하계에 내려올 때 매일 제 머리카락을 한 번씩 쓰다듬어준다고 했던 약속을 벌써 잊으셨다니요?”
“내가 생각했던 건 이마에서 정수리까지야! 넌 그 긴 머리를 몽땅 쓸어달라고 하잖아!”
운사의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을 모두 펼치면 우사의 키보다도 크다. 머리를 묶으면 자연의 정기를 받는 데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그녀는 그 머리카락을 항상 펼치고 다닌다. 신력을 머금은 머리카락이기에 장애물이 있으면 알아서 피하고 땅에 끌려도 먼지 하나 묻지 않는다. 건장한 하계인들 사이에서 유난히 작은 체구의 그녀가 반짝이는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채 걷는 모습은, 천계인이란 과연 범접지 못할 존재라는 것을 그들로 하여금 실감하게 했다.
운사가 히죽 웃으며 물러나자 그제야 소니가 정신을 차리고 자기소개를 했다.
“안녕하세요~ 지금 막 소니가 되었어요. 꿀이랑 생선을 좋아하구요~ 어서 짝짓기해 예쁜 새끼를 낳고 싶어요~”
“음음. 짝짓기란 좋은 것이지.”
씨뿌리기 담당인 우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자신의 가슴을 주먹으로 탕 치며 호쾌하게 말했다.
“맘에 든다, 소녀여. 나부터 자기소개를 하도록 하겠네.
나는 우사, 천계의 장군이자 환웅님의 호위대장이다. 난 만물의 씨를 뿌리고 그 정을 보듬는 존재다. 또 비를 뿌려 생명이 싹트는 것을 도와주지.“
소니는 황홀한 표정으로 우사를 올려다보았다. 곰의 세계에선 덩치가 곧 힘이자 짝짓기 즉시전력감이었기에, 곰 옆에 세워도 꿀리지 않을 만큼 거대한 우사야말로 그녀에게 있어 최강으로 보였다.
“정말 크시네요~ 아빠랑 싸워도 이길 것 같아요~”
“곰을 때려잡아야 한 사람의 무사로 인정받을 수 있지. 하지만 네 아빠를 때려잡진 않을 테니 안심해라.”
우사가 말을 마치자 이번엔 운사가 나왔다.
“반가워, 소니. 난 운사라고 해. 저 하늘의 구름처럼 떠돌아다니며 여러 지식을 전파하고 있지. 사람들의 괴로움을 달래 주고 아픔을 치유해주는 게 이 몸의 역할이니, 나중에 풍백 언니가 괴롭히면 내게 와서 이르렴. 참고로 환웅님의 소꿉친구이기도 하니까, 환웅님의 비밀이 알고 싶다면 언제든 말해 줄게.”
“아까부터 내 속을 너무 긁는 거 아니니, 운사?”
“운사,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마라.”
환웅과 풍백이 째릿 노려보았지만 운사는 유들유들하게 웃어넘겼다.
“이런 때 아니면 언제 풍백 언니 속을 긁어 보겠어요? 평소의 언니는 너무 재미없다구요. 그리고 환웅님은 무슨 부끄러운 비밀이라도 있어서 그런 건가요? 스스로에게 그런 비밀이 없다면, 이런 걸 걱정할 필요도 없답니다.”
참 정설이긴 한데, 운사가 말하니 깐죽거리는 걸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환웅은 이를 갈았지만 마땅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는 천계에서도 운사와의 말싸움에서 한 번도 이겨본 적 없는 불행한 소년이었다.
그렇게 환웅을 침묵시킨 운사는 다시 소니에게 말했다.
“소니, 옷을 벗어 보겠어? 지금 걸친 환웅님의 옷 말이야.”
지금 소니가 입고 있는 옷은 환웅이 아까 벗어 준 겉옷 상의였다. 아무리 그래도 바지까지 벗어줄 순 없었던 노릇이라 상의만 걸쳐주었는데, 이게 소니의 음부를 겨우 가리고 있어 민망했다.
아까 옷을 입어야 한다는 환웅의 명령이 있었던 것을 기억한 소니는 환웅부터 바라보았다. 그녀의 말없는 질문에 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그 옷이 답답했던 소니는 이제 옷을 안 입어도 된다는 말이라 생각해 훌렁 옷을 벗었다. 그러자 환웅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슬쩍 돌렸다. 반면 우사는 이를 전혀 신경쓰지 않는지, 고개를 돌리기는커녕 그녀에게 남은 곰의 특징을 살펴보며 탄성을 발했다. 그 모습이 너무 진지해서 풍백은 면박을 주는 것을 잊어버릴 정도였다.
소니가 알몸이 되자 운사는 고개를 까딱 해 가볍게 머리를 한 차례 털었다. 단지 그뿐인 행동이었지만 그녀의 머리카락은 한 가닥 한 가닥이 제각각 살아있는 듯 땅에서 일어나 복잡하게 움직였다.
“와~! 털이 움직여~!”
아직 소니에겐 어디에 난 체모이든 모두 털로 통일되는 모양이었다. 운사는 쓴웃음을 짓더니 소니를 바라보며 술법의 주문을 중얼거렸다. 그러자 허공에서 은하처럼 물결치던 머리카락은 갑자기 폭포처럼 소니에게 쏟아졌다. 깜짝 놀란 소니는 몸을 피하려 했지만, 머리카락은 그녀가 움직일 여유를 주지 않고 그녀를 고치처럼 꽁꽁 싸맸다.
“으악, 이거 뭔가요~! 알고 보니 암컷 거미였네요~! 전 맛없어요~!”
머리카락 안에서 버둥거리며 소니가 외쳐댄 소리는 상당한 파괴력이 있었다. 우사가 쩌렁쩌렁한 웃음을 터뜨리고, 환웅과 풍백도 입가를 실룩대며 운사를 바라보았다. 운사는 재미있다는 듯 입술을 핥으며 그녀를 살짝 노려보았다.
“호오……이게 바로 언니의 기분이었네요. 기억해 두도록 하죠.”
운사는 머리를 다시 까딱 젖혔다. 그러자 머리카락들이 소니의 몸에서 빠져나오더니 스르륵 기어가 운사의 뒤에 얌전히 정렬했다. 버둥대던 소니는 구속이 풀리자 눈물이 살짝 맺힌 눈으로 운사를 노려보았다.
“나빴어요! 같은 편인 줄 알았는데!”
“같은 편이라서 옷도 만들어 줬는데? 소니, 네 몸을 봐주지 않을래?”
그 말을 듣고 소니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아까까지 알몸이었던 그녀에겐 어느새 옷이 입혀져 있었다. 가볍고 시원해 보이는 흰색 윗도리와 감색 치마였다. 크기도 낙낙해서 그녀의 꼬리도 치마 속으로 폭 들어갔다.
“아앗! 가죽이 새로 생겼다!”
소니는 허둥대며 자신의 몸 여기저기를 만져보았다. 하지만 몸과 분리되는 걸 보니 아까 환웅에게 받은 옷이란 물건과 비슷한 모양이었다. 갑자기 털이 없어져 맨몸뚱이가 된 그녀에게 일반 의복은 거추장스러울 뿐이었겠지만, 운사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사용해 만들어 준 옷은 그녀의 원래 가죽만큼이나 쾌적한 느낌을 주었다.
“이거 꽤 힘드니까 옷 잘 간수하도록 해…… 그럼 이제 풍백 언니 차례네.”
운사가 땀도 안 난 이마를 슥 닦으며 물러났다.
마지막으로 풍백이 사뿐히 걸어나왔다. 기척을 느낄 수 없는 그녀의 가벼운 발걸음을 본 소니가 놀란 표정이 되었다. 아직 그녀의 오감은 곰일 때와 마찬가지로 예민했는데, 풍백의 발걸음은 그걸로도 전혀 포착할 수 없었다.
“이제야 제대로 제 소개를 하는군요. 저는 삼사의 수장이자 환웅님의 스승을 맡은 여자입니다. 제가 맡은 풍백이란 하늘과 땅의 모든 흐름을 바로잡고 만물을 있어야 할 곳으로 인도하는 자입니다. 제 바람은 삼라만상 어디에도 이를 수 있으며, 운사·우사의 힘을 더욱 강력하게 만들 수 있답니다.”
이제 완전히 평정을 찾은 풍백은 평상시처럼 고요하게 말했다. 하지만 모두의 귀에는 풍백의 나직한 말이 그 어떤 소리보다 선명하게 들렸다. 그녀가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바람은 그녀의 수족처럼 그녀를 돕고 있었다. 그녀가 맘먹고 힘을 쓴다면 신단수가 보이는 범위에 있는 모든 마을의 사람들에게 음성을 전하는 것도 가능할 정도였다.
그녀는 소개를 마친 후 소니를 빤히 바라보았다. 천계의 지혜가 내재되어 있는 그 깊은 눈길은 소니의 외양부터 그 안에 있는 모든 기운까지 한순간에 읽어내었다. 그 결과는 풍백이 그녀를 처음 보자마자 관찰했던 것과 다르지 않았다.
풍백은 그녀답지 않게 주저하다 그녀에게 말했다.
“제 얘기가 가혹하더라도 잘 들어요. 소니, 당신 때문에 환웅님이 위험해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요?”
“네에?”
소니는 당황했다. 그녀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남을 위험에 빠뜨리기는커녕 먹이를 잡는 것도 싫어서 초식으로 살아가던 여린 성품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풍백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환웅님은 그 누구보다 환인님과 가까운, 가장 신령스러운 존재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성장이 끝나지 않았기에 하계의 공기에 대한 면역력이 취약합니다. 그래서 우리 삼사는 오직 환웅님만을 위한 약초를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저희와 이 신단수의 힘의 정수. 쉽게 다시 만들 수 있는 성질이 아닙니다. 그것을 환웅님은 무책임하게 당신에게 먹인 것입니다.”
“하지만 난 멀쩡하다! 너무 애 취급하는 게 아닌가?”
소니를 돕기 위해 환웅이 나서 보았지만 역효과였다.
“멀쩡하다구요? 그것 참 대단한 자신감이시군요. 저와 내기라도 해 보시겠습니까? 삼사와 신단수의 가호 없이 환웅님이 지상의 공기에 며칠이나 견디실 수 있을지?”
풍백이 싸늘하게 웃으며 환웅을 도발했다. 환웅은 당장 거기에 말려들어 버럭 소리치려 했다. 그때 소니가 울먹이며 풍백에게 말했다.
“전 이런 거 필요없어요∼ 가져갈 수 있으면 가져가서 환웅님께 주세요~”
모든 동물들의 평생 소원은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었고, 이는 소니도 예외가 아니었다. 하지만 노력을 통해 얻은 게 아닌 이런 결과는 되려 그녀에게 혼란만 가져오고 있었다. 이제 막 기어다니는 아기가 갑자기 어른의 육체를 갖는다고 해서 행복해질 리 없는 것이다. 더군다나 자신이 인간이 된 것이 엉뚱하게도 귀한 이에게 폐가 되었다고 하니 그녀는 견디기 힘들었다.
그녀가 말을 더 잇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자 환웅이 기어이 폭발했다.
“모두 내 잘못이 맞아! 하지만 이 아이에겐 아무 책임이 없다! 그러니 잘못을 물으려면 내게 물어!”
초막이 우르릉 떨릴 정도의 신력이 소년에게서 뿜어져 나왔다. 진심으로 뉘우친다기보다는, 더 이상 시비를 걸 거면 그냥 싸워 보자는 험악한 기세였다. 항상 장난기가 많던 그가 이렇게 화난 것을 본 적이 없었기에 삼사는 동시에 생각했다.
‘삐졌다……’
사안이 사안인 만큼, 오늘은 단단히 삐진 모양이었다. 자기가 화를 낼 입장이냐고 추궁해 봤자 이런 상황에선 역효과가 날 게 뻔했다. 어쨌든 삼사는 환웅의 신하인 만큼 환웅을 질책하는 것 못지않게 그를 어르고 달래는 일에도 신경써야 했다.
분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운사가 짐짓 쾌활하게 말했다.
“진정해, 환웅님. 벌어진 일에 대해 아웅다웅하는 건, 어디까지나 일이 어떤 형태로든 마무리된 다음의 일이야. 지금은 해결책을 먼저 생각해야 하는 단계라는 거지.
묻겠는데, 환웅님은 지금 뭔가 생각해놓은 게 있는 거야?”
“아니, 없어. 그러는 당신들은?”
“우리는 지금 막 안 사실에 대해 성급하게 결론내리고 싶지 않아. 그러니 시간을 주겠어? 사흘, 그래, 사흘이면 될 것 같아. 그동안 환웅님은 소니와 함께 해결책을 찾아봐. 우린 우리대로 해결책을 찾을 테니. 원한다면 신단수 밖에서 지내도 좋고.”
“운사!”
안색이 변한 풍백이 외쳤다. 지금까지 하계의 공기가 독이라고 말하고 있었는데, 한술 더 떠 밖에서 생활하라고 하니 그녀로서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그런 그녀를 우사가 조용히 제지했다.
“누님은 환웅님에 대해선 너무 과보호적인 면이 있습니다. 이번 기회에 환웅님이 제대로 하계를 느끼게 해 보는 것도 괜찮겠지요. 그리고 환웅님이 하계에 적응하지 못할 거라는 건 어디까지나 우리의 예상일 뿐입니다. 이런 건 역시 환웅님 본인이 겪어봐야 명백해질 겁니다. 약초를 당장 다시 만들긴 힘드니, 이를 빨리 확인하고 그에 맞는 대책을 세워야겠지요.”
덩치와는 어울리지 않는 진중한 목소리였다. 우사는 평소 말이 많지 않았지만 한번 내놓은 말은 모두 이치에 맞았다. 풍백이 망설이자 우사는 손을 들어 환웅을 가리켰다. 환웅은 확 밝아진 표정으로 운사에게 ‘정말? 정말 나가서 살아도 되는 거야?’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풍백은 살짝 서운해졌다. 그녀는 자기가 얼마나 그를 걱정하는지 알아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 같아 쓸쓸한 기분까지 들었다.
“운사의 의견을 따라, 잠시 다녀오마! 사흘 후에 돌아올 때까지, 모두들 해결책이란 걸 생각해내도록!”
자신의 잘못을 어느새 잊고 삼사의 압박에서 얼른 벗어나는 것만 생각한 환웅은 대충 짐을 싸더니 소니의 손을 잡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소니는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채 질질 끌려가다시피 따라갔다. 운사는 웃으며 팔을 들더니 손을 흔들어 주었다.
둘의 모습이 초막 밖으로 사라지자 운사는 손을 흔드는 것을 멈추었다. 초막 입구에 팔을 쳐든 채 오도카니 서 있는 왜소한 소녀의 모습은 어쩐지 가련해 보였다. 풍백은 잠깐 망설이다 그녀에게 다가가 말을 건넸다.
“운사, 그런 결정을 해도 괜찮아? 비록 짐승에서 막 인간이 되었다지만 저 아이도 일단은 여자아이인데.”
“언니도 참. 제가 그 애에게 질투라도 느꼈을까봐 말하는 건가요? 제가 비록 환웅님과 소꿉친구인 데다, 당연히 그분께 시집가리라 생각해서 여태까지 모든 청혼을 거절한 가련한 미소녀이긴 하지만, 공과 사는 구별할 줄 안답니다.”
환웅이 지상에 내려오기로 했을 당시 운사의 자리는 공석이었다. 그 자리에 대뜸 지원한 것은 환웅과 동갑내기인 소녀였다. ‘환웅님은 아직 애라 내가 돌봐줘야 한다니까!’라고 기세 좋게 외쳤지만, 그녀 자신도 애이긴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오직 환웅을 따르기 위해 천계에 두고 와야 했던 많은 것들은 지금도 그녀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을 터였다. 그것이 생각나 풍백이 그녀를 달래볼까 했지만, 운사는 여전히 돌아보지 않은 채 평소처럼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그 말투를 보면 기분은 괜찮은 것 같았다.
풍백은 걱정을 털고, 그녀가 자신의 동의 없이 성급하게 결론을 내린 점을 추궁하려 했다. 삼사의 능력으로 환웅을 탐지하는 건 엄중히 금지된 사항이었기에, 지금처럼 환웅이 사흘 동안이나 행선지를 말하지 않고 나갈 경우 찾아내기 매우 곤란해진다. 그나마 그와 동행하는 소니는 추적 가능했지만, 그것만으론 불완전했다.
그때 운사가 나직하게 말했다.
“제 손으로 목숨을 빼앗을지도 모르는 아이에게 마지막으로 좋은 추억을 만들어주려는 게지요.”
풍백은 흠칫해 운사의 몸을 자기 쪽으로 돌렸다. 하지만 풍백의 예상과 달리 그녀의 얼굴에는 질투 따윈 조금도 없었다. 거기엔 오직 진한 슬픔만이 있었다.
“환웅님께 조금이라도 일이 생긴다면, 우리가 할 일은 하나뿐이죠. 소니에게 내재된 기운을 뽑아다 환웅님께 주입하는 길 외엔 선택지가 없어요. 그리고 그 과정에서 소니는 십중팔구 목숨을 잃게 되겠죠. 그 기운을 아무 준비 없이 몸에 넣고도 살아남은 것 자체가 이미 기적이고……”
뒷말은 굳이 할 필요가 없었다. 풍백과 우사는 그 내용을 짐작하고 있었으므로. 그렇지만 자신에게 다시 한번 들려주기 위해 운사는 분명하게 말했다.
“기적은, 두 번 일어나지 않기에 기적인 것이니까요..”
운사는 처연하게 웃으며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아직 아무 짓도 하지 않았지만, 조만간 이 손에 피를 묻히게 될지도 몰랐다. 그 작업은 삼사 중 가장 섬세하게 술법을 다루는 운사만이 가능했으므로. 하지만 그게 성공한다고 해도 환웅은 평생 그녀를 원망할 것이다. 그것이 환웅이었고, 그녀는 그런 환웅을 사랑했다.
그녀의 내심을 읽은 풍백은 가슴이 조여왔다. 아직 연애에 무지한 소년인 환웅과 애늙은이 수준의 정신을 가진 운사의 관계를 예전부터 보아 왔기에, 그녀는 막 조우한 소니보다 운사의 편이었다. 공과 사는 구별되어야 하겠지만 환웅도 조만간 배필을 정해야 할 터. 그녀가 아는 이 중 운사보다 적임자는 현재까지 없었다. 지위에서나 힘에서나, 그리고 무엇보다도 환웅을 향한 애정에서 그녀를 앞설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실 풍백도 원한다면 환웅의 배필이 될 자격이 충분했지만, 그녀는 환웅의 스승이란 입장이 있기에 나설 생각은 없었다.
운사에게 무거운 짐을 안기는 것만은 피하기 위해, 풍백은 해결책을 찾는 데 매달렸다. 어쩌면 아직 불완전한 상태의 소니를 완전하게 인간으로 만들어 버리는 게 최선일지도 몰랐다. 그녀가 완전히 하계의 인간이 된다면 그 순간 천계의 기운은 자연스럽게 몸 밖으로 빠져나올 것이다. 지금은 소니의 몸 안에 갇혀 있기에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지만, 밖으로 배출될 수만 있다면 그 기운은 저절로 자신의 진정한 주인인 환웅을 찾아가 흡수될 것이다. 하지만 이는 너무 비효율적인데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결국 사태가 악화될 경우 운사의 제안이 최선이란 사실을 그녀는 뼈아프게 받아들여야 했다.
‘그래도 손 놓고 있을 순 없지.’
고민 끝에 풍백은 환웅을 며칠이나마 지켜 줄 소량의 약초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삼사가 사흘 정도 밤을 새며 만든다면, 환웅에게 일주일 정도의 시간을 벌어줄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문제를 뒤로 미루는 것밖에 되지 않았지만, 운사가 소니를 해하는 것보단 나을 거라고 그녀는 애써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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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의 속박을 보상받겠다는 듯, 환웅은 정신없이 소니와 돌아다녔다. 며칠간 삼사의 잔소리를 듣지 않아도 된다는 해방감이 그를 즐겁게 했다. 다만 소니는 아직 인간의 몸에 익숙해지지 않았기에, 환웅은 아예 그녀를 들쳐 업은 채 사방팔방 뛰어다녔다. 이 기회가 지나면 멀리까지 나가지 못할 게 뻔했기에, 환웅은 망설임 없이 가능한 한 먼 곳까지 탐험할 생각이었다.
환웅의 신력이 바닥을 드러낼 때까지 돌아다니던 두 사람은 하늘에 붉은 기가 감돌기 시작할 즈음에야 비로소 냇가 근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환웅은 소니를 쉬게 한 후 먹을거리를 채집해 왔다.
“이게 네가 먹고 싶었다던 꿀이란 거지?”
나무 위에서 내려온 환웅이 코에 꿀을 묻힌 채 손에 든 물건을 내밀며 활짝 웃었다. 꿀을 채취하는 방법까진 알지 못했기에 환웅은 아예 벌집을 통째로 가져와 버렸다. 물론 벌들은 반항하기는커녕 그를 자신들의 집이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벌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며 그는 벌집을 소니에게 건넸다. 양이 얼마 되지 않았기에, 환웅 자신은 몸에 묻은 꿀 정도로 만족하기로 했다.
“잘 먹을게요~ 이거 정말 맛있어요~”
그녀는 벌집에 코를 박고 정신없이 꿀을 핥았다. 사양하는 기색 따윈 전혀 없는 그 모습에는 예절이란 존재하지 않았지만, 환웅에겐 오히려 신선한 모습이었다. 천계에서나 하계에서나 여러 의무에 매인 그로서는 소니의 자유분방한 모습이 그저 부러웠다.
벌집 안의 꿀을 깨끗하게 해치운 소니는 손에 남은 꿀을 핥아댔다. 그 손바닥에 있는 육구가 환웅의 시선을 끌었다.
“그거…… 만져볼 수 있을까?”
“그러세요~”
소니는 스스럼없이 손을 내밀었다. 환웅은 거기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그곳에선 도무지 현실 같지 않은 말랑말랑함과 따스함이 느껴졌다. 환웅은 완전히 빠져들어 한참 동안이나 이를 어루만졌다.
곰의 육구에는 엄청난 술법이라도 걸려 있는 게 틀림없었다. 환웅이 단지 ‘몇 번’ 만졌을 뿐인데,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다. 저녁의 싸늘함 때문에 소니가 가볍게 기침을 하자 그제야 환웅은 정신을 차렸다.
“넌 여기 있어. 나뭇가지를 모아 와 불을 피울 테니.”
환웅이 영차 하며 일어났다. 소니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나뭇가지는~ 많으면 좋나요~?”
“그야, 많이 있으면 불을 오래 피울 수 있겠지.”
환웅이 별 생각 없이 대꾸하자 소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맞춤해 보이는 나무를 찾아냈다. 소니는 에잇 하며 팔을 가볍게 휘둘렀다. 어린애 장난 같은 그 손짓 한 번에 나무가 우지끈 부러졌다.
“이걸 조각내면~ 많이많이 나올 거예요~”
“으, 으응.”
인간이 되었어도 곰으로서의 예민한 감각과 괴력은 여전했다. 잊고 있었던 그녀의 괴력을 다시금 확인하니, 환웅은 척추가 욱신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 심정은 전혀 모른 채, 소니는 나무둥치를 끌어안으며 활짝 웃었다.
큼직하게 토막낸 나무에 환웅이 신력으로 불을 붙였다. 어둠이 황급히 도망가자 불꽃은 신나게 춤추었다. 사방은 곧 신단수 아래의 초막 안만큼이나 따스해졌다. 이 근처는 사람의 손이 거의 닿지 않은 곳이라, 야생동물들은 불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를 두려워해 가까이 오지 않았다. 한편 소니는 불을 무서워하는 짐승의 본능과 따스해지고 싶은 욕구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아우…… 무섭고 따뜻하네요……”
“너무 가까이만 가지 않으면 괜찮아.”
보다못한 환웅이 그녀를 자기 곁으로 끌어당겼다. 잠시 꼼지락대던 그녀가 곧 잠잠해졌다. 눈앞에서 일렁대는 불은 온기 못지않게 그녀를 사로잡았다. 순리를 거스르고 밤에도 빛나는 불을 그리도 무서워했는데, 정작 가까이서 보니 이제껏 본 어떤 것보다도 아름다웠다.
둘 다 말이 없는 가운데 장작이 타닥타닥 타들어가는 소리만 사위를 메웠다. 달은 어느 때보다도 환했고 밤바람은 적당히 시원했다. 신단수의 그늘 아래를 벗어나니 흐드러지게 흩뿌려진 별들이 눈부시게 반짝이고 있었다. 불과 몇 주 전까진 일면식도 없었던 소녀와 맞은 이 밤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라고 환웅은 생각했다.
“난 말이지, 모든 것의 지배자야. 날 때부터 그렇게 정해졌지. 나의 아버지는 위대한 환인이니까.”
모닥불에 장작을 하나 던져 넣으며 환웅은 나직하게 말했다. 불을 오랫동안 멍하니 보고 있으니, 마치 마음을 조작하는 술법에라도 걸린 것처럼 내면의 말이 술술 튀어나왔다.
“하지만 이렇게 있으니 잘 모르겠어. 난 눈에 보이는 모든 걸 지배할 수 있지만, 내가 그것들을 직접 만든 건 아니야. 난 저들을 움직일 순 있어도 예측할 순 없어. 매순간 모든 것은 변해 가고, 난 아직 그 변화의 본질을 깨닫지 못했어. 그래서 난 아직 불완전한 존재야.”
자신이 노력해서 얻은 지위와 타고난 지위는 같지 않다. 환인의 품에서 벗어나자 환웅은 비로소 이를 절감할 수 있었다. 삼천 명을 책임져야 하는 막중한 위치에 올랐지만 그의 능력은 아직 부족했고, 따라서 삼사가 원래 그가 했어야 하는 일까지 도맡고 있었다. 이래서야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리란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을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난 위대한 존재라고 누가 정한 걸까? 아버지가? 삼사가? 사람들이? 하지만 난 아직 자격이 없어. 오늘 일만 해도 그래. 삼사는 날 걱정해서 그런 얘기를 했는데, 난 내 생각만 하느라 투정을 부리다 뛰쳐나왔지. 그런 내가 위대한 존재라고? 내 자신부터가 믿지 못하겠어.”
환웅이 아무리 철없이 구는 것 같아 보여도, 그는 동년배의 소년들은 도저히 가질 수 없는 묵직한 고민들을 한가득 짊어지고 있었다. 낮의 일을 지금 떠올려 보면 그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열기 때문이 아니라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그는 이를 감추려 괜히 불 가까이 다가갔다. 불이 눈부셔 그는 눈을 감은 채 열기를 느꼈다. 열이 오르자 머리로 피가 몰리는 느낌이 들었다. 이 따끈함, 그리고 푹신함…… 푹신함?
환웅은 눈을 떴다. 자신의 머리는 어느새 소니의 품 안에 있었다. 소니는 무릎베개로 환웅의 머리를 받치면서 꼭 끌어안았다. 서느런 옷 너머로 그녀의 체온이, 마음이 뜨겁게 다가왔다.
“어려운 얘기라~ 전 잘 모르겠지만~”
소녀는 자신의 아래에서 눈을 크게 뜨고 있는 소년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환웅님은~ 모두에게 소중하다는 걸 알고 있답니다~”
소니는 방긋 웃었다.
환웅은 그 말과 미소에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미사여구 하나 없이 단순한 그녀의 말에는 묘한 설득력이 있었다. 지상에서 가장 순수한 존재에게, 자신의 순수성을 입증받았다고 해야 할까? 그는 자신의 말에 지배당하는 만물의 기분이 이런 것일 거라고 생각했다. 복잡하게 고민하지 말고 단순하게 생각하기, 란 교훈을 얻은 느낌이었다.
결론을 내리자 아까까지의 그의 고민은 눈녹듯 사라져 갔다. 그녀의 앞에서 더 이상 고민을 하는 건 무의미했다. 환웅은 그녀의 손길을 받아들이며 눈을 감았다. 따뜻하고 푹신한 그녀의 무릎베개는 환웅의 머리를 점점 깊숙하게 잠겨들게 했다. 그것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쭉 여행을 하다가 이제야 집에 돌아와 자리에 누운 듯한, 포근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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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의 새벽은 싸늘했다. 모닥불은 돌보는 이가 없어 어느새 꺼져 있었다. 소니는 운사가 만들어 준 옷을 입은 채였지만, 그것만으로 새벽의 냉기를 막을 순 없었다. 오한을 느끼며 깬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무릎 위에 환웅의 머리를 올린 채 자신도 끼무룩 잠이 들었던 것 같았다. 밤새 그 자세로 있다 보니 무릎이 저려 움직이기 힘들었다. 인간의 몸이란 참 불편하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남아있는 나뭇가지를 잿더미 위에 던졌다. 하지만 불씨가 남아 있지 않았는지 시간이 지나도 그 상태 그대로였다.
“어라~ 환웅님이 한 대로 했는데~ 이상하네~”
소니는 한참을 생각하다 포기했다. 차라리 환웅을 깨워 불을 붙여달라고 하는 게 빨라 보였다. 아침이 오려면 아직 시간이 있었고, 그녀는 따뜻한 불을 쬐며 제대로 누워 자고 싶었다. 마음 내킬 때 자고 일어나는 게 그녀의 천성이었기에, 아침에는 일어나야 한다는 사고방식에 얽매여 있지 않았다.
소니의 손이 환웅을 깨우기 위해 허공에 들렸다가 멈칫했다. 그 손은 잠시 후 부드럽게 내려가더니 환웅의 머리카락을 살짝 쓰다듬었다. 그는 낯선 곳에서의 취침이 그리 편하진 않은지 미간을 찡그리고 있었다. 무슨 꿈이라도 꾸고 있는 건지, 이마에서 땀이 조금씩 배어나오고 있었다.
“환웅님~ 일어나주세요~”
그녀는 작게 속삭였다. 이 소리에 환웅이 깨지 않는다면 그녀는 그냥 이대로 날이 새는 걸 기다릴 생각이었다. 그녀로서는 일어나지 않겠지 하는 생각이었지만, 기대와 달리 환웅은 눈을 천천히 떴다.
“일찍 일어났네…… 나, 이러고 계속 잔 거야?”
“네~ 더 주무셔도 돼요~ 대신 저기 불만 좀 붙여주세요~”
“그래. 지금 붙여줄게.”
환웅은 그 자세 그대로 손만 들어 장작을 향해 가볍게 튕겼다. 그러자 신력으로 만들어진 작은 불덩이가 날아갔다. 하지만 그 불덩이는 하늘거리다 중간에서 픽 꺼져버렸다.
“어?”
환웅은 의아해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는 장작을 노려보며 주먹을 불끈 쥐고 힘차게 내질렀다. 그의 신력이 허공에서 엉겨 길다란 불줄기로 화했다. 불줄기는 기세 좋게 날아가더니, 장작을 살짝 핥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순식간에 잿더미로 만들어버렸다. 명백한 힘조절 실패였다.
“어라…… 이러려던 게 아닌데……?”
환웅의 이마에서 땀 한 줄기가 흘렀다. 그 땀은 순식간에 서너 줄기로 변했다. 줄줄 흐르는 땀을 손으로 닦자, 이번엔 코에서 뭔가 주륵 흘러내렸다. 그것을 본 소니가 환웅보다 먼저 반응했다.
“환웅님! 코피!”
“어……”
코피는 손으로 닦을 새도 없이 턱까지 흘러내려 바닥에 떨어졌다.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양이었다. 인간의 코피란 걸 처음 본 소니는 그걸 막아야 한다는 생각도 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환웅은 그녀에게 진정하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입을 연 순간 나오는 것은 격렬한 토혈이었다.
“커헉!”
환웅의 입에서 토해진 핏방울이 소니의 얼굴에 뿌려졌다. 그 피는 불덩이처럼 뜨겁게 그녀의 피부에 달라붙었다. 이를 느낀 순간 소니는 정신이 확 들었다.
환웅님이 이상하다!
“환웅님! 이상해요! 누워요! 물 떠올게요!”
다른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기에 소니는 그를 눕히고 급히 달려가 물을 한 움큼 떠왔다. 하지만 환웅이 계속해서 피를 토하는 통에 물을 삼키게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다시 돌아가더니 이번엔 입에 물을 머금어 왔다. 오직 본능이 시키는 바에 따라, 그녀는 환웅에게 입맞추고 억지로 물을 삼키게 했다. 마치 그 물이 모든 병을 낫게 하는 약수라도 되는 양, 소니는 환웅의 말캉거리는 혀를 자신의 혀로 눌러 가며 물을 넘기게 했다. 진한 피냄새 때문인지, 아니면 가장 은밀한 부위끼리의 첫 접촉 때문인지, 물이 넘어간 것을 확인하고도 소니는 한동안 입을 떼지 못했다.
“아……”
환웅이 숨쉬기 괴로워하는 듯하자 소니는 그제야 입을 뗐다. 어쩐지 얼굴이 화끈거리고 기분이 몽롱해졌다. 다시 한번 입맞춤을 하고 싶었지만, 아까보다 악화된 환웅을 보니 그런 기분이 싹 날아갔다. 물을 마셔도 낫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녀는 곧 다른 방법을 찾아냈다. 예전에 아빠가 자신에게 해 준 말이 생각났다.
‘침을 바르면 돼. 침을 바르면 어떤 상처든 나을 수 있지.’
지금 그녀가 해줄 수 있는 건 이것뿐이었다.
소니는 환웅의 얼굴로 자신의 얼굴을 가져가더니 피가 흐르는 코와 입 주변을 할짝할짝 핥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피란 상처가 나서 흐르는 몸 안의 액체였고, 따라서 상처를 핥아서 낫게 해 주면 나을 것이라 판단한 것이었다. 곰의 세계에선 충분히 통할 상식이었지만 지금은 그녀와 환웅 모두 인간이었다. 그녀의 추론이 이미 근본부터 틀렸기에, 아무리 얼굴을 핥아도 환웅의 피만 들이마실 뿐이었다.
할짝,
할짝,
츄웁.
‘피…… 환웅님의 피……!’
어느 순간부터 소니는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망각했다. 그녀는 본래의 목적을 잃어버린 채 환웅의 피를 마시는 데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남아 있는 곰으로서의 본능은 처음으로 입에 댄 피의 맛에 열광했다. 게다가 그 피는 예사 피가 아니었다. 신력이 가득 담긴 뜨거운 피는 어제 먹었던 꿀보다 더욱 달콤했고, 과일보다 향기로웠다. 하지만 코피는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그녀는 그 사실에 기뻐하는 대신 안타까워했다.
이윽고 피가 멎자 그녀는 머리를 들었다. 자신의 얼굴이 피범벅이 된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소니는 의식을 잃은 환웅을 위아래로 흝어보았다. 아직, 아직 부족했다. 목구멍이 아니라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갈증이 치밀어올랐다. 이걸 좀 더 마실 수 있다면…… 평범한 하계의 동물이라면 감히 환웅에게 이런 생각을 품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의 소니는 신령한 쑥과 마늘의 기운이 환웅의 위엄에 복종하는 본능을 상당 부분 마비시키고 있는 상태였다.
피 묻은 입술을 안타깝게 빨던 소니에게 환웅의 하얀 목덜미가 포착된 것은 하나의 계시와도 같았다.

한 모금만, 딱 한 모금만이면 된다.
환웅님도 이해해 줄 것이다.
저 흰 목에 자신의 이를 박아넣은 후……

환웅이 신음하며 목을 살짝 틀었다. 그러자 가쁘게 오르락내리락하는 목울대가 소니의 정면에 노출되었다. 더 참을 수 없게 된 소니가 입을 크게 벌렸을 때였다.
-소니.
입을 크게 벌리고 환웅에게 다가가던 소니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그녀는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환웅의 피 때문에 놀랍도록 예민해진 그녀의 감각이 이를 증명해주고 있었다. 그렇다면 어디서? 그때 그녀의 감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소니. 어디에 있나요?
“예쁜 암컷님……! 예쁜 암컷님 맞죠~!”
목소리의 정체를 알고 나니 눈물겹게 반가웠다. 그녀라면 분명히 이 상황을 타개해 줄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이토록 반가워할 줄은 몰랐는지, 목소리는 다소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풍백이라고 말해줬으면 좋겠군요. 아, 당신이 있는 장소는 이제 알겠네요. 환웅님도 함께 있나요?
“이, 있어요~! 지금 피투성이가……!”
상황을 설명하려던 소니는 문득 말을 멈추었다. 피투성이란 말은 환웅보다 오히려 그녀에게 해당되는 소리였다.
피를 흘린 건 환웅인데 어째서 그녀가 피투성이가 되었나?
그녀가 게걸스럽게 그의 피를 핥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지금 무엇을 하려고 하는 중이었나?
주인의 목덜미를 뜯으려 하고 있었다.
“아…… 아아아아아아!”
-소니? 소니? 진정해요! 환웅님께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
온몸을 덜덜 떨며 환웅에게서 물러난 소니는, 다음 순간 괴성을 지르며 그 자리에 무너져내렸다. 더 이상 풍백의 목소리는 그녀의 귀에 들어가지 않았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삼사를 대해야 하나? 그보다 환웅이 깨어나면 무슨 얼굴로 그를 봐야 할까? 혼란에 빠진 그녀의 뇌리에 문득 풍백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당신의 존재 때문에 환웅님이 위험에 처했다는 냉정한 선고. 환웅이 쓰러진 이유를 소니는 이제야 깨달았다.

자신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자신은 환웅을 물어뜯어 피를 마시려 했다.

그녀는 창백해진 환웅을 바라보았다. 그 얼굴 위로 자신이 기억하는 환웅의 모습들이 계속해서 겹쳐졌다. 씩씩하게 걷는 모습, 활짝 웃는 모습, 삼사 앞에서 토라진 모습, 자신을 위해 분노해 줬던 모습……그 하나하나를 떠올릴 때마다 소니의 가슴이 미어졌다. 그게 무슨 감정인지 알지 못했지만, 숨을 쉬기 괴로울 정도로 심장이 조여져 왔다.
소니가 헐떡이는 그 짧은 순간, 기억의 근원이 다가왔다.
거기에 있는 것은 환웅의 얼굴이 아니었다. 그건 당연했다. 환웅은 단단한 가슴으로 그녀를 꽉 끌어안고 있었으므로. 순식간에 모든 것을 잃고 절망했던 그녀에게 새로운 희망이 내려왔던 곳은 환웅의 따뜻한 품 안이었다.

-걱정하지 마. 넌 내가 책임진다!

환인의 아들 환웅이라서가 아니다.
무서운 신력을 가지고 있어서도 아니다.
정말 필요할 때 곁에 있어 준 사람,
자신을 책임져 준다고 말한 사람.
소니에겐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환웅님은…… 모두에게 소중하지만…… 제겐…… 가장 소중해요……!”
조여오던 심장이 결국 자신의 내면에 가라앉아 있던 말을 누설했다. 환웅의 앞에서 이 말을 꺼내자마자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소니는 부옇게 흐려진 눈으로 환웅을 바라보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것은 작별의 인사였다.
“원래 환웅님 거였으니까…… 다아, 가져가 주세요……”
그녀는 다시 환웅에게 입술을 포갰다. 그리고 자신의 안에 있는 기운을 끄집어내 환웅에게 밀어넣기 시작했다. 혼탁한 기운을 가진 인간과 달리 처음부터 순수한 기운을 갖고 있던 그녀였기에 그 기운은 아직 그녀의 기운과 뒤섞이지 않은 상태였다. 본래 환웅에게 가야 할 기운이었기에, 복잡한 술법을 쓰지 않아도 알아서 환웅에게 돌아가려 했다. 이 행동이 위험하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지만 소니는 멈추지 않았다. 진작 이랬다면 환웅님이 이렇게 괴로워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문득 스쳐지나갔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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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니! 대답해요!”
풍백은 다급하게 그녀를 불렀다. 환웅이 삼사와 신단수를 벗어나면 뭔가 사단이 날 거라고 예측한 것은 그녀 본인이었지만, 이렇게 빨리 흉사가 일어날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밤을 새며 신령한 쑥과 마늘을 만들다 날이 밝은 김에 안부인사 차원에서 소니를 부른 것이었는데, 잘못하다간 환웅의 초상을 치를 판이었다. 소니에게 상황을 들어야 환웅의 상태를 알 수 있겠지만, 몇 번을 불러도 대답 대신 울부짖음만 들려왔다. 사람보다는 짐승의 것에 가까운 소니의 처절한 절규를 들으며 풍백은 혼비백산했다. 그녀는 함께 밤을 새우고 초막 안에서 졸고 있던 두 사람을 깨웠다.
“운사! 우사! 지금 당장 환웅님께 갑니다! 환웅님이 위험해요!”
운사와 우사의 잠을 날려버리는 데는 그 정도면 충분했다. 셋 다 밤을 꼬박 새워 기진맥진했지만, 환웅의 위기를 접하자 실로 기민하게 움직였다.
셋이 초막을 나오자 우사가 풍백과 운사를 각각 자신의 어깨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풍백은 손을 들어 방향을 지시하며 바람을 일으켰다. 거센 바람이 자신의 등을 떠미는 것과 동시에 우사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신력에 풍백의 바람까지 더해지니 그 속도는 하계의 어떤 짐승도 흉내내지 못할 만큼 날랬다. 만약 풍백이 바람으로 자신과 운사를 고정시키지 않았다면 두 사람은 우사의 어깨 위에서 찰나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둘이 힘을 쓰는 사이 운사도 행동을 개시했다. 그녀는 눈을 감아 외부와의 소통을 단절한 후 정신을 집중했다. 그녀의 능력 중 하나는 멀리 떨어진 장소를 바라볼 수 있는 투사였다. 환웅을 직접 투사하는 건 불가능했지만, 환웅 바로 옆에 있을 소니를 투사하는 것으로 대략적인 상황을 알 수 있을 터였다.
소니의 모습은 금세 떠올랐다. 운사가 애써 만들어 준 옷은 다시 입지 못할 정도로 피에 적셔져 있었다. 운사는 오직 그곳의 장면만 볼 수 있을 뿐이었지만, 그 처참한 표정만으로도 그녀가 울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옆에는 쓰러진 환웅의 모습이 희끄무레하게 보였다. 운사는 자신들이 환웅에 대해 얼마나 낙관적으로 생각했는지를 깨닫고 자책했다. 이렇게 될 줄도 모르고, 그저 소년이 잠시나마 자유롭게 다닐 기회가 아닐까 생각했던 자신이 한없이 원망스러워졌다.
‘미안해. 미안해…… 이제부터의 일은 모두 내 잘못이라 생각하렴.’
운사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환웅의 발작은 너무 빨리 일어났다. 이렇게 된 이상 처음 생각했던 수단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보다 더 과격한 일이 될 것이다. 애초의 생각은 소니에게서 약초의 기운을 서서히 뽑아내는 것이었지만,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 조금이라도 약초의 기운이 온전할 때 한꺼번에 그 기운을 뽑아내 환웅에게 주입해야 했다.
애당초 약초의 기운은 소니를 변하게 하는 계기 정도의 역할이었기 때문에, 그녀가 곰에서 인간으로 변했다고 해서 소진되는 건 아니었다. 비록 그녀가 그 힘을 제대로 흡수하지 못했는지 원래 약초가 가진 힘의 반 정도만 남아있었지만, 환웅에게는 그 정도면 충분했다. 단, 이렇게 되면 소니는 십중팔구 죽는 게 아니라 확실히 죽게 된다.
그때 그녀가 보는 풍경이 바뀌었다.
소니가 무슨 말을 중얼거리더니 허리를 숙였다. 그녀의 붉은 입술이 환웅의 입술로 내려가더니 하나로 겹쳐졌다.
‘…………!’
운사는 비명을 지를 뻔했던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예민한 운사의 감각은 이미 그 장면을 찰나 단위로 뇌리에 새겨넣었다. 지금 본 장면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란 걸 그녀는 깨달았다. 평정을 잃었기에 투사는 깨져 버렸다. 개인적인 감정의 홍수가 그녀의 냉정한 판단을 방해했기에, 운사는 그 행위의 진정한 의도를 금방 깨달을 수 없었다.
그때 풍백이 문득 당혹스럽게 중얼거렸다.
“이상해. 기척이 둘이 아니야…… 셋인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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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떠올랐다. 환웅의 신력에 숨죽이고 있던 동물들이 하나 둘 기어나왔다. 그들은 의식을 잃고 몸을 겹친 채 쓰러져 있는 소년과 소녀를 목격했지만 그 주변에 다가가지 않았다. 그 지경이 되었어도 환웅의 신력은 미약하게나마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햇살이 밤의 냉기를 완전히 몰아냈을 즈음, 새로운 동물이 나타났다. 거대한 크기의 반달곰이었다. 반달곰의 눈은 살기로 번들번들하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는 목표물을 곧 찾아냈다. 환웅의 위에 엎드려 있는 소녀가 그의 눈에 포착되었다. 외양은 다소 바뀌었지만 냄새가 같았다.
반달곰에게는 자신만의 철학이 있었다. 자신에게 거슬리는 것은 몰살한다. 그 법칙 덕에 지금껏 패자로 군림해왔다고 그는 자부하고 있었다. 얼마 전 겁 없이 자신의 영역에 들어온 곰 가족을 참살한 것도 그였다. 그때 새끼곰을 놓쳐 뒤끝이 더러웠는데, 최근 녀석의 냄새를 다시 맡고 여기까지 추적해 온 것이었다. 그의 목표는 환웅이 아니었기에, 정신을 잃은 환웅의 미약한 신력은 안중에도 없었다.
반달곰은 팔짱을 끼고 서 있는 여인을 향해 당당히 걷기 시작했다.
‘…………!?’
곰은 급히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소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이 여인은 대체 언제 소녀와 자신의 사이에 나타난 것이란 말인가?
“안녕한가, 애송이. 이제 막 인간이 되어서 환웅님을 뵙고자 달려왔는데, 네 면상을 보니 그 기분을 잡치게 되는구나.”
자신에게 이런 무례한 말을 하는 인간은 여지껏 없었다. 곰은 화난다기보단 황당해져서 그녀를 흝어보았다. 여인은 여자치곤 큰 키에, 치렁치렁한 까만 머리를 나뭇가지로 틀어올리고 있었다. 약간 드세 보이는 눈매를 제외하면 그녀에게서 전사의 풍모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특이하게도 범의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고 있었지만, 그게 그녀가 전사라는 증명은 되지 않았다.
곰은 신속하게 결정했다.
소녀를 죽인 후 이 여자를 죽이고, 이 여자가 사는 마을 사람도 몽땅 죽인다.
그는 이를 갈며 다시 움직였다.
자신의 두 배는 됨직한 반달곰이 다가오는데도 여자는 태연히 말했다.
“내가 도를 닦은 지 백 년이 좀 넘었지만 말이지, 아가야. 저기 쓰러진…… 흠, 일단은 동생이라 해 둘까? 동생을 해치려 한 죄를 그냥 넘어갈 순 없노라.
게다가 지금 하나 더 생각났는데 말이다.”
여인은 머리에 꽂은 나뭇가지를 뽑았다.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은 단순한 나뭇가지가 아니었다. 긴 나무대롱 끝에는 그릇 비슷한 것이 달려 있었는데, 그 안에는 신단수의 이파리를 말린 후 잘게 부스러뜨린 가루들이 담겨 있었다. 여인이 손가락을 튕기자 그 안에 불이 붙더니 조용히 타들어갔다. 그녀는 이를 입에 문 채 숨을 들이쉰 후 대롱을 입에서 뗐다. 그리고 코앞까지 다가온 곰의 얼굴을 향해 후우 하고 푸른 연기를 내뿜었다. 독한 연기에 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곰은 그녀가 살려달라고 울부짖게 만들기 위해 몸을 부풀렸다.
그 순간, 여인은 포효했다.
“감히,
네까짓 놈이,
내-게-덤-빈-다-고-!”
그것은 저기 쓰러진 환웅의 미약한 신력을 상회하는, 정진정명 위대한 지배자의 것이었다. 거대한 기운을 받은 반달곰의 몸이 멋대로 휘청댔다. 포효를 한 직후, 그녀에게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태양보다 찬란한 금빛이 머리에 내리고, 이어서 커다란 눈동자를 가득 채웠다. 그와 함께 여인의 손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손톱이 쑥쑥 자라나더니, 맹수의 것처럼 길고 날카롭게 변했다. 아니, 그건 이미 맹수의 발톱 그 자체였다.
곰이 미처 반응할 새도 없이 그녀는 발톱이 달린 손을 들고 휘둘렀다. 곰과 그녀 사이에는 아직 거리가 있었지만, 그 손에서 뿜어진 기운은 대기를 찢고 날아가 곰을 순식간에 갈갈이 찢어놓았다. 곰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고깃덩이가 되어 쓰러졌다.
사방에 비산한 핏방울 중 일부가 그녀의 긴 손톱 위에 떨어졌다.
“흐응.”
여인은 요염하게 그 피를 핥았다. 참으로 즐거웠다. 오랜 세월 동안 도를 닦았지만, 그것은 오직 인간이 되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그 목적을 이룬 이상 이젠 자유롭게 살아도 무방했다. 그동안 자신을 구속했던 제약에 어느덧 익숙해져 있었지만, 그녀는 본래 사납고 자유를 사랑하는 짐승이었다. 천성을 거스르지 않고 살 수 있다는 사실은 그녀에게 무한한 해방감을 느끼게 했다.
그때 여인의 뒤에서 소니가 신음을 흘렸다. 지금의 소란에 깨어난 것일까. 여인은 손톱을 접고 머리를 다시 틀어올린 후, 대롱을 툭툭 털어 비우고 그대로 꽂았다. 그러자 금빛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다시 까맣게 돌아왔다.
아직 반인반수라 불러야 할 소니와 달리, 그녀는 완벽한 인간의 형상이었다. 자신이 먹은 신령한 쑥과 마늘의 힘을 깨닫자마자 범은 동굴을 뛰쳐나와 자신이 태어났던 성스러운 산으로 갔다. 범은 그곳의 꼭대기에 있는 신성한 물 안에 몸을 숨기고, 갑작스럽게 얻은 힘을 다스리는 데 전심전력한 끝에 인간이 되는 데 성공했다. 물론 백 년에 걸친 오랜 수행이 없었다면, 고작 삼칠일 만에 인간이 될 순 없었을 것이다.
소니가 가늘게 눈을 떴다. 그녀의 기력은 애처로울 만큼 소진되어 있었다. 그나마 환웅에게 모든 기운을 흡수당하기 전에 혼절했던 덕에 목숨은 건졌지만, 위태롭긴 마찬가지였다. 마치 죽기 직전 마지막 힘을 짜내는 것처럼, 그녀는 겨우 말했다.
“암컷님…… 누구……?”
“그 전에 하나 묻겠노라. 네 이름은?”
“내 이름…… 소니……”
여인은 눈을 찌푸렸다. 단숨에 그 이름의 연유를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소니는 인상을 구긴 그녀에게 뭐라고 말하려다 다시 혼절했다. 여인은 잠시 소니를 내려다보다 그녀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주었다.
“내가 좀 더 일찍 왔어야 했구나. 장하다. 애썼느니라.”
막 자신의 동생으로 정한 소녀에게 정을 담아 인사한 후, 여인은 그녀를 옆에 누이고 환웅을 바라보았다.
“처음 뵙겠소, 환웅님이여. 받은 것을 돌려드리러 왔소이다.”
환웅의 앞에서도 그녀는 당당했다. 타고난 지위는 환웅보다 아래지만, 그녀는 환웅이 오기 전까지 하계에서 절대적인 존재 중 하나였다. 제왕으로서의 오만함은 인간이 된 이후에도 유지되었기에, 여인은 환웅을 자신과 동등한 존재로 인식했다. 하지만 그와 진정 대등하기 위해선 갚아야 할 빚이 있었다.
여인이 환웅을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겨 안았다. 그리고 소니가 그랬던 것처럼 그와 입을 맞췄다. 그녀의 안에 있던 신령한 기운이 순식간에 환웅에게 흡수되어갔다. 하지만 여인은 소니와 달리 가벼운 피로감 정도만 느낄 따름이었다. 완전한 인간이 된 지금, 그 기운은 더 이상 그녀에게 필요없었다.
막대한 기운이 흘러들어오자 환웅의 안색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거친 숨소리가 진정된 것을 확인한 여인은 그의 얼굴을 이리저리 뜯어보았다. 남자가 되어가고 있는 소년의 얼굴은 매우 준수했고,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그의 신력은 본능적으로 그를 따르게 만들고 있었다. 수십 년간 연애와 담을 쌓은 그녀의 굳은 마음도 그를 본 순간 흔들렸다.
“과연 환웅님이구려. 이몸의 배필로 모자람이 없을 듯하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닌 듯하니 물러가겠소이다.
이대로 환웅님이 일어나면 난 ‘버미’ 따위의 이름을 얻을 텐데, 그건 싫으니까.”
그녀는 아쉬운 듯 혀를 찬 후 환웅을 소니의 옆에 다시 눕혔다. 그리고 돌아서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내 이름을 찾은 후 다시 오겠소.”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의 모습은 원래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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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단수로 만들어진 널찍한 초막 안에는 세 사람이 드러누워 있었다. 건장한 사내는 근육질의 몸매가 무색하리만큼 몸을 웅크리고 있었고, 키 큰 여인은 거무스름해진 눈 밑을 비비며 잠을 쫓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옆에는 자신의 머리카락 위에서 뒹굴다 애벌레 고치처럼 되어버린 작은 소녀가 늘어져 있었다.
“아아, 날씨 좋네요.”
“이, 이런 날에는 사냥이나 단련을 해야 마땅한데……”
두 사람이 궁시렁거리자 운사가 슬며시 말했다.
“그렇게 바깥이 보고 싶으면 잠깐 나가도 되지 않을까요? 어차피 우리의 신력은 바닥났으니, 여기서 뒹굴거린다고 해서 일을 더 할 순 없으니까요.”
“그리고 환웅님께 가자는 거겠지?”
우사가 바로 정곡을 찔렀다. 운사는 움찔하더니 꼬물꼬물 움직여 우사의 옆으로 갔다. 그리고 우사의 팔을 콱 깨물었다. 그래봤자 우사의 단단한 근육에 이빨 자국 내기도 어려웠기 때문에, 그녀는 곧 응징을 포기하고 투덜댔다.
“우사는 생각난 걸 바로 입밖에 내는 버릇을 고쳤으면 좋겠네요.”
“아, 그거 동감해.”
풍백이 웬일로 운사에게 맞장구쳤다.
셋은 결국 밖으로 나왔다. 신령한 쑥과 마늘을 다시 만드는 것은 실로 대작업이라 셋 모두 쥐어짠 걸레마냥 축 늘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래저래 한계였기도 했고, 당장 필요한 양은 확보했기에 잠깐 바람을 쐬며 재충전을 하는 게 나아 보였다.
간식거리와 약초들을 챙겨들고 나온 세 사람은 천천히 걸어갔다. 여름이 끝나가는 자리에는 누런 곡식들이 고개를 까딱대고 있었다. 하계에 내려와 첫 수확이었다. 종자가 다른 만큼 수확량은 분명 증가할 것이다. 사방에 배를 곯는 백성이 없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다스림의 첫 발걸음이다. 그런 점에서 환웅의 치세는 일단 성공적으로 보였다.
“우리가 초막 안에서 쥐어짜이고 있을 때도 세상은 평화롭게 돌아갔구나……”
운사가 다소 억울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게 좋은 거지. 우리 셋이 없다고 세상이 와르르 무너진다면 곤란하지 않겠어?”
풍백은 그 점을 지적하며 환웅을 떠올렸다. 자신들과 환웅은 다르다. 환웅이 없다면 정말 세상은 무너질 수도 있으므로.

그때 부리나케 달려갔던 삼사가 본 것은 피투성이가 된 채 나뒹굴고 있는 환웅과 소니, 그리고 불운한 반달곰의 사체였다. 풍백은 자신이 느꼈던 기척이 과연 이 곰의 것이었는지 의아해했지만, 환웅과 소니 모두 제3자는커녕 그 곰에 대한 것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사실 환웅의 몸이 멀쩡했다면 곰 정도는 충분히 이길 수 있었으므로, 환웅이 위기에 몰리자 잠재된 힘을 끌어쓴 게 아닐까 하고 그녀는 결론지었다.
며칠 뒤 환웅은 이런 말을 했다.
‘꿈에서 의식을 잃은 내게 키가 큰 여자가 다가와 입맞춤을 하더군. 설마 아니겠지만, 풍백이었어?’
‘전 정신을 잃은 사람과는 입맞춤을 하지 않습니다.’
환웅이 헷갈리라고 그녀는 일부러 묘한 상상이 가능한 대답을 했다. 얼굴이 빨개지는 소년을 보며 풍백은 왠지 어깨가 으쓱거렸다. 처음 맡았을 땐 그렇게 어렸던 꼬맹이가 어느새 자신을 여자로 바라보는 나이로 성장했구나 하는 감회도 들었다.

풍백이 대화하다 말고 어쩐지 수상하게 웃기 시작할 때, 운사도 어느새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

환웅의 상태는 생각보다 매우 양호했다. 반면 소니는 기력이 거의 고갈되어 빈사상태였다. 운사는 이제야 아까의 입맞춤이 무엇이었는지를 깨닫고 눈물을 흘렸다. 그녀가 같은 입장이었더라도 똑같이 행했을 일이었지만, 지금은 순수하게 그녀에게 감사하기로 했다.
이윽고 눈을 뜬 환웅은 소니와 삼사를 보며 상황을 파악했다.
“미안하다.”
이들을 향해 머리를 깊숙이 숙인 환웅의 첫마디였다.
“내가 어리석게도 내 몸을 제대로 돌보지 않아 너희에게 걱정을 끼치고, 소니를 상하게 했다. 모두 내 잘못이다.
그리고 하나 더 사과하마. 이 사죄는 맨 처음, 소니를 너희에게 데려왔을 때 했어야 하는 것이었다. 늦었지만 용서해 주었으면 한다.”
소년은 그새 조금 더 어른이 되어 있었다. 뺨은 하루 새 홀쭉해졌지만 눈빛은 제대로 살아있었다. 삼사는 흐뭇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주군의 성장은 신하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기쁨이었다.
환웅은 머리를 들고 팔을 벌렸다. 그것은 하늘과 대지를 아울러 포옹하는 자세였다. 환인의 아들로서, 하계의 지배자로서, 인간 환웅으로서 그는 선언했다.
“너희에게 약속하마. 난 반드시 하계의 인간 모두를 널리 이롭게 하겠다. 지금은 힘이 약하기에, 일단 내 주변의 사람들부터 이롭게 할 것이다. 그리고 시간을 들여 지상의 인간 모두가 행복해지도록 할 것이다. 반드시, 반드시!”
환웅은 길이 지상에 남을 선언을 한 후 위엄에 찬 눈으로 삼사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시선은 소니에게 향하면서 애정으로 바뀌었다. 비록 그것이 아직 남녀 간의 사랑이라 단정지을 순 없는 성격이라 해도, 운사는 가슴이 다시 조여오는 것을 느꼈다. 이 감정이 질투가 아니길 간절히 바라며, 그녀는 환웅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그 아이는 어떻게 할 거야, 환웅님? 이제 선택은 두 가지가 있어. 신령한 쑥과 마늘의 기운은 소니의 몸에서 거의 빠져나갔어. 따라서 저 아이를 곰으로 돌려놓는 것도 이젠 가능해. 아니면 소니를 수행시켜 완전한 인간으로 만드는 방법도 있지. 이건 소니에게 어떤 기운을 넣어주느냐의 문제라서, 지금 선택해야 해.”
그녀가 한 말은 환웅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녀를 다시 곰으로 만든다는 건 생각해본 적 없는 문제였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소니라는 존재가 지상의 법칙에 위배된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환인은 절대 법칙에 위배되는 행위를 하지 말라고 경고한 바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자신이 곰 세계에서 살아갈 수 없다고 슬퍼한 적도 있었다.
환웅은 고민하다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렇게 고민한 게 이 선택이었지.’
운사는 폭 한숨쉬었다. 이들은 어느새 산 어귀에 도착해 있었다. 환웅이 소니를 가뒀던 그 동굴에 삼사는 볼일이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 안에 있는 두 사람에게 볼일이 있었다.
“아직 환웅님이 나오려면 보름 정도 남았네요. 아아, 환웅님의 얼굴을 빨리 보고 싶다…… 분명 내보내달라고 울부짖으면서 눈물 콧물 다 흘렸을 텐데.”
“뭐, 평상심을 유지했던 건 처음 닷새 정도뿐이었으니까.”

환웅의 선택은 과연 그답다는 말을 할 만했다. 그는 소니를 완전한 인간으로 만들어주기로 했다. 그녀는 세상의 법칙에 위배된 게 아니라, 훗날 자신이 규정할 법칙에 가장 먼저 적용되는 대상이 될 거라고 그는 선언했다. 아울러 환웅은 그녀가 이제 의지할 곳이 자기밖에 없다는 사실도 말했다. 가까이 있는 인간부터 이롭게 한다는 말이 이런 뜻이었나 싶어 삼사는 불만 없이 넘어갔다. 다만 그들은 조건을 하나 달았다.
-소니가 삼칠일을 제한 백일을 채워 완전한 사람이 될 때까지, 동굴 안에서 신령한 쑥과 마늘을 함께 먹으며 그녀를 돌볼 것.
새롭게 깨달음을 얻어 한층 진화했던 환웅의 위엄은 그 순간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순식간에 눈물을 글썽거리며 어버버 하고 말을 더듬어대는 환웅을 보며, 운사는 그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혀를 날름 내밀었다. 그리고 천연덕스럽게 한 가지를 추가했다.
-동굴 안에서 행여라도 서로에게 음란한 감정이 생긴다면 약초의 기운이 날아가 버리니, 부디 조심하길 바랄게.
아, 환웅님은 아직 이런 거 모르니까 상관없으려나?

자신의 편식이 어떤 결과를 불렀는지 뼈저리게 느꼈기에, 환웅은 고분고분하게 쑥과 마늘을 씹으며 버티고 있었다. 소니가 매번 증명해 주었으니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삼사가 약초를 전달해주기 위해 동굴 앞에 갈 때마다 그 안에서 절절한 감정이 느껴지는 괴성이 들려오곤 했다. 그것은 환웅이 자신의 몫을 잘 먹고 있다는 증거였기에, 삼사는 매우 즐겁고 유쾌하고 상쾌한 마음으로 그 소리를 경청하곤 했다. 그 소리를 듣고 올 때마다 약초를 만드는 보람이 생긴다는 데는 삼사 모두가 동의하고 있었다. 아울러 환웅의 이런 모습은 자신들밖에 접할 수 없다는 점에서 우스운 특권의식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그 특권이란 결코 영원한 것이 아니었다.
“누가 있군.”
우사가 우월한 눈높이와 시력으로 동굴 앞의 여인을 발견했다. 풍백보다도 약간 클 것 같은 훤칠한 키였다. 머리에 꽂은 나뭇가지만 해도 하계에서 흔치 않은 장식이었지만, 호랑이 가죽으로 만든 옷이란 건 듣도보도 못한 우사였다.
삼사는 이미 하계인들에게 당분간 그 동굴 주위의 출입을 금지한 바 있었다. 하계의 인간 중 삼사의 지시를 거스르는 이는 아직까지 없었다. 그렇다면 저 여인은 누구일까? 삼사는 지친 몸을 추슬러 급히 그리로 향했다.
그들이 도착하자 여인은 대뜸 물었다.
“자네들은 누구인가?”
하계에서 환웅 이외의 존재에게 ‘자네’란 말을 들어본 적이 없던 삼사였다. 운사는 입을 딱 벌렸고, 풍백은 미간을 찡그렸다. 하지만 우사만은 평정을 유지한 채 그녀에게 진중하게 물었다.
“저희는 셋이고 그쪽은 하나이니, 그쪽의 소개를 먼저 듣는 게 맞겠지요.
그 전에 하나 묻고 싶은데, 지난번 환웅님 근처에서 사지가 찢긴 곰을 발견했는데 그건 귀하의 소행입니까? 맞다면 감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삼사 중 가장 싸움에 능한 우사는 곰의 시체가 환웅의 소행이 아님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다른 이들이 불안해하지 않도록 언급하진 않았지만, 그는 이에 대해 고민을 해 왔다. 자신과 맞싸워도 좋은 상대가 될 법한 곰이 일격에 갈갈이 찢길 정도라면 엄청난 강자가 분명했다. 하지만 정황상 그 자가 환웅의 편을 들었다고 봐도 좋을 것이기에, 우사는 그를 만나더라도 그에게 먼저 시비를 걸 생각은 없었다. 사실 지금은 그녀가 예사 인물이 아님에 주목해 넘겨짚기 식으로 떠보는 데 불과했지만, 그녀의 심기가 상하지 않도록 그는 미리 감사를 표했다.
여인은 고개를 까딱 흔들어 수긍했다.
“맞다, 인간 수컷. 저기서 날 이상하게 쳐다보는 암컷들보단 네 눈썰미가 훨씬 낫구나.”
풍백은 이러한 화법을 예전에 접했던 것을 떠올렸다. 어눌한 말을 늘어놓으며 모두를 충격과 공포에 빠뜨렸던 소녀가 기억 속에서 끄집어내졌다.
설마, 설마……
차마 직접 확인하고 싶지 않아 그녀가 망설이는 사이, 운사가 쏘아붙이듯 말했다.
“거 참, 도도함이 하늘을 찌르는 분이군요. 여기엔 무슨 목적으로 왔지요?”
여인은 시선을 운사에게로 옮겼다. 자신의 가슴 정도밖에 오지 않을 꼬맹이를 향해 그녀는 짐짓 살기어린 시선을 보냈다. 어지간한 짐승이나 인간이라면 그 자리에 선 채 기절해버렸을 테지만, 운사도 예사 인물이 아니었기에 그 시선을 당당히 받아냈다.
이를 본 여인은 흐흥 하고 코웃음쳤다.
“보기보단 제법인 암컷이구나. 안심해라. 난 여기 싸우러 온 게 아니다. 다만 환웅님을 뵈러 왔을 뿐이다.”
“환웅님을? 그렇다면 우리에게 말하지 않으면 여길 통과할 수 없어요. 우리는 환웅님의 측근인 삼사. 따라서 환웅님께 불순한 의도를 품고 오는 무리를 경계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니 이름과 구체적인 목적을 말씀해 주시죠.”
운사의 말이 이치에 맞다고 생각했는지 여인은 살기를 풀었다.
“그렇군. 환웅님의 측근들이라면 나도 자기소개 정도는 해야겠지.”
여인의 손이 머리에 꽂힌 비녀를 빼더니 그것을 입에 물었다. 머리가 흘러내리는 그 짧은 시간에, 어느새 그녀는 불이 붙은 나무대롱을 뻐끔뻐끔 피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푸른 연기를 내뿜는 것을 신호로 그녀의 외양이 바뀌었다. 금빛 섬광이 사위를 채워나갔고, 운사의 머리카락이 그 서슬에 금빛으로 반짝였다. 이를 본 우사는 자신의 심정을 한 마디로 정리했다.
“여자의 변신이란 대단하군.”
우사의 그 말을 칭송으로 받아들였는지, 여인은 불꽃처럼 아름다운 금빛 머리를 손으로 한번 쓸어 넘긴 후 자랑스럽게 말했다.
“나는 범 처녀. 하지만 이리 불리면 내 동생 소니처럼 이상한 이름으로 변질될 터라, 부득이하게 먼 땅의 언어로 직접 이름을 정했다네. 앞으로 날 호랑(虎娘:작가주-본래 호랑이는 虎狼이라는 한자어)이라 불러 주게나.”
아까의 위세 대신 애처럼 우쭐거리고 있는 호랑을 바라보며 풍백은 눈을 질끈 감았다. 과정은 몰라도 결과는 명백했다. 저 안에서 세상 모르고 반찬투정이나 하고 있는 자신의 주군을 당장 이 앞에 패대기치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느라, 그녀는 주먹을 피가 나도록 불끈 쥐었다. 그런 풍백을 위로하기라도 하듯, 여름의 끝자락을 휘돌아 온 시원한 바람이 이들에게 불어 왔다.

긴 여름이 끝나고,
이제 가을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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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온

October 15, 2011
*.110.76.104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단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미 단군신화를 써먹은 소설이 출판되어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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