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이정표

작품 소개 "내일의 단편 경소설상"의 작품들을 소개합니다.

14 Oct, 2011
능력자배틀물

Cal tax

NOX&LUX 조회 수 3426 추천 수 4 목록
비가 많이 내리는 밤이었다. 하지만 장마철처럼 쏟아 붓는 비는 아니었다. 그저 도로를 적시고 흙을 물게 만들 정도의 비였다.
산 아래에는 마을이 있다. 경사진 산을 깎아 만든 경사진 마을, 그곳에는 겨우 수백이 살고 있었다. 산의 중턱에는 도로가 나 있었다. 그곳을 트럭 한 대가 지나가고 있다.
거대한 대리석을 차곡차곡 쌓은 트럭은 빠르게 젖은 도로를 지나갔다. 트럭 운전수는 노래를 들으며 흥얼거리고 있다.
흥얼~흥얼~, 트럭 운전수는 음악에 심취해 운전을 하며 캔콜라를 들이켰다. 그때 급커브가 나왔다. 미처 예상치 못한 커브길에서 트럭 운전자는 거칠게 핸들을 돌렸다. 끼이익 하는 굉음과 함께 트럭은 멈췄다.
하지만 너무 헐겁게 묶었던 탓일까? 운반하던 대리석하나가 원심력을 버티지 못하고 산 아래로 떨어졌다. 심장이 떨어질 듯 놀랐던 운전자는 밖으로 나와 떨어지는 대리석을 발견하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이런 제길, 저게 얼만데...”
월급이 많이 깎일 것을 생각하니 기분이 나빠진다. 하지만 큰 사고가 나지 않은 것이 어디냐며 자신을 위로하고 길을 떠났다.
대리석은 산길을 따라 굴러 떨어졌다. 중간, 중간 나무에 걸렸지만 산은 비로 인해 묽어져 있었고, 대리석의 무게는 엄청났다. 나무들은 뽑히거나 부러지며 대리석과 함께 떨어졌다.
나무만이 아니었다. 돌, 흙, 그것들이 지지대를 잃은 듯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하나의 대리석이 만든 산사태는 그렇게 마을을 향해 내려갔다.
그 마을은 항상 산사태를 대비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큰 산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었지만 워낙 지리적으로 위험하기 때문에 울타리를 쳐놓았다. 웬만한 큰 산사태가 아닌 이상 충분히 버텼다.
그리고 만일 비가 많이 와 큰 산사태가 예상되면 경보를 울렸지만 그날은 울리지 않았다. 울타리를 밀어 낼 만큼의 산사태를 일으킬 비가 아니었다.
하지만 고작 운반 트럭이 흘린 거대한 대리석 하나가 만든 산사태에는 무용지물이었다.
부리가 깊게 박혀있던 나무도 뽑아 버리며 내려오던 대리석은 이윽고 울타리를 부시고서야 멈추었다. 각이 져 있었기 때문에 평지로 내려오자 순식간에 멈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몰고 온 다른 것들은 그러하지 않았다.
윤택의 가족들은 저녁을 먹으며 TV를 시청하고 있었다. 밖은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바로 앞의 강의 물이 올라오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생기는 밤이었다.
쿠르르르!!
“어머, 저거 산에서 뭔 일 일어나는 거 아니야?”
굉음에 윤택의 어머니는 화들짝 놀랐다.
“번개였던 모양이네.”
“어우, 그런가 보네. 이놈의 집은 왜 강가에 지어서. 윤택아 나가서 강 좀 봐라. 물 얼마나 올라왔는지.”
“걱정도. 네~! 알겠습니다.”
윤택은 우산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마당을 나와 두 걸음, 강이 보였다. 강은 어머니의 걱정과 다르게 잔잔하고 수위도 높아지지 않았다. 비가 온다고는 하지만 흐르는 강의 수위를 올릴 정도는 아니었다. 윤택은 안심을 하고 뒤로 돌아섰다.
쿠르르르르르르!!!!
천둥보다 더 섬뜩한 소리, 윤택은 등이 싸늘해짐을 느꼈다. 갈색 빛을 낸 파도, 그 속에 뿌리째 뽑힌 나무와 거대한 돌들이 보였다.
윤택은 할 말을 잃었다. 갈색의 파도가 집을 삼키는 것이 보였고, 이윽고 윤택을 덮쳤다. 윤택은 머리를 얻어맞았다.
죽는 것인가,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이 스쳐갔다. 이것이 주마등이구나, 어머니와 아버지는 괜찮을까?
첨벙!
윤택은 강에 빠졌다.


* * *
정신이 돌아옴에 따라 윤택은 눈을 떴다. 자기 자신이 병원에 누워 있는 것이 보였다. 숨은 쉬고 있었다. 눈은 붕대로 칭칭 감겨 있었으며 옷은 환자복이다.
내가 죽은 걸까? 죽으면 자기 자신이 보인다는 이야기는 흔한 이야기였다. 윤택은 무서워졌다. 사후세계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머리를 스쳤다.
몸은 어디 있는 것일까, 아무리 둘러봐도 영혼은 보이지 않는다. 시야는 360도가 돌아가도 그곳에 몸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윤택은 살아있을 때와 전혀 다르지 않은 느낌에 안심했다.
그때, 문을 열고 간호사가 들어왔다. 간호사는 윤택의 상태를 흘깃 보더니 크게 놀라며 의사를 호출했다.
“선생님! 선생님! 허윤택 환자 의식이 돌아왔습니다.”
의식이 돌아왔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윤택은 아직도 하늘에 시야를 둔 그대로였다. 하지만 의사가 들어오고 의사가 팔을 잡으며 말을 하자 살아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팔에 느껴지는 촉감, 그것은 그대로였다.
“정신이 드십니까? 허윤택씨?”
“네, 어떻게 된 거죠?”
말도 나온다. 그렇다면 이 말도 되지 않는 시야는 뭐라 설명을 해야 될까.
“기적적으로 살아남으셨습니다. 잘 버티셨습니다.”
뭐라고 지껄이건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이 혼란을 어떻게 이해할 설명이 필요했다.
“눈은 어떻게 된 거죠?”
“죄송합니다. 시력은 되찾을 수 없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윤택은 그 어이없는 말에 할 말을 잃었다.
“일단 안정을 취하십시오.”
의사는 그렇게 몇 마디 더 알 수 없는 설명을 하더니 밖으로 나갔다. 홀로 남은 윤택은 생각에 빠졌다. 이 시야는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눈을 잃었다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인가? 이러한 고민들로 시간을 보내던 중, 한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남자는 평범하게 생긴 중년이었다. 평상복에 문병을 온 듯 손에는 선물도 들려있었다. 하지만 문제점은 그가 아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남자는 윤택의 옆에 앉더니 말했다.
“갑자기 혼란스럽겠군. 난 교환자 협회에서 나온 사람이다.”
남자는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였다. 하지만 여러 가지로 혼란스러운 것은 사실이었다.
“지금 너의 상황에 대해 말해줄 수 있나? 내가 도와 줄 수 있는데.”
윤택은 입을 다물었다. 다짜고짜 찾아와서 하는 말에는 신빙성이 없었다.
“뭐 좋아, 일단 말해주지. 이 세상에는 원칙이 있어. 수 많은 원칙 중 교환자들이 알아야 할 것은 단 하나, 등가교환의 원칙이다.”
남자는 유택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윤택이 아무 말 하지 않자 말을 이었다.
“세상에는 나비효과라는 것이 있어 운명을 뒤바꾸는 대참사가 가끔 일어나고는 하지. 말 그대로 운명을 바꾸는 것이야. 죽지 않아야 할 자들이 죽는 것이지. 너희 마을이 그러했고, 죽은 자들은 삶대신 안식을 받았어. 잘은 모르지만 전부 좋은 곳으로 갔겠지. 하지만 그 대참사에서 넌 눈을 잃었어. 그렇기 때문에 등가교환 원칙이 발동되어 눈 대신에 어떤 능력이 주어졌어. 그것이 뭔지는 몰라도 뭔가, 특별한 거 말이야.”
윤택은 판타지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지금 자신의 특이한 시야는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궁금한 거 있나?”
윤택은 머릿속이 복잡해져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럼 퇴원하면 연락하게나. 여기 명함. 교환자로서 살면 좋은 혜택이 많네. 뭐 일도 그에 맞는 것을 하면 되고, 돈도 많이 주고. 우리에게 오고 안 오고는 선택이지만 잘 생각해 봐.”
남자는 명함을 윤택의 손에 쥐어주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며칠 되지 않아 윤택은 퇴원했다.
윤택이 처음으로 향한 곳은 자신의 마을이었다. 나무와 흙으로 뭉게져 완전히 폐허가 된 그곳을 바라보며 윤택은 슬픔보다는 허무함이 치밀어 올랐다.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는 걱정도 생겼다.
자신의 능력은 아무래도 눈이었다. 눈을 잃고 더 좋은 눈을 얻은 것이다.
윤택은 공중전화로 가 명함의 적힌 곳으로 전화를 했다.
“저기, 허윤택이라고 합니다. 교환자...라고 하죠.”


* * *
“전방에 적이 있습니다. 조심해서 들어가시고, 아무래도 적의 별동대는 우측 산길로 기습을 할 예정인 듯싶습니다.”
분쟁 지역, 안전한 곳에 있는 윤택은 이런저런 지시를 내렸다. 그가 지시하는 것은 전부 그가 본 것. 구애 받지 않는 눈이라는 능력 덕분에 전투, 첩보 등 많은 분야에서 최고가 되었다. 독순술까지 배워 웬만한 대화는 알아들을 수도 있었다.
마을이 몰살 장한 지 4년이 지났다. 그때의 기억은 대부분 잊었지만 눈에 난 상처만큼은 사라지지 않았다. 덕분에 윤택은 선글라스보다는 눈에 두건을 칭칭 감는 것을 선호했다.
분쟁 지역에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윤택은 교환자 협회, 줄여서 교회로 돌아왔다. 윤택은 지팡이를 여기저기 짚으며 걸었다. 어차피 눈이 없어도 다 볼 수 있었기 때문에 평범한 장님과는 속도가 천지차이였지만, 그래도 난 능력자다 하며 광고를 할 필요는 없었다.
‘교회’에는 십자가가 달려있었다. 정체를 숨겨야하는 집단인 것은 맞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름처럼 진짜 교회로 치장할 필요까지야.
윤택은 교회에 들어서자 귀찮은 듯 지팡이 짚는 것을 그만두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2층으로 올라가, 다시 굳게 닫힌 문을 열쇠로 열고 3층으로 올라갔다. 그곳에는 한 붉은 머리로 염색한 여성이 앉아 있었다.
“허윤택, 돌아왔습니다.”
“돌아오셨어요? 여기 성공 보너스랑, 월급, 그리고 미션 피(fee)입니다. 그리고 팀장님께서 부르십니다.”
“감사.”
통칭 붉은 머리라 불리는 여성은 안내자였다. 이름도 붉은 머리인지 명찰에도 그리 적혀있었다. 저 머리는 확실히 염색한 것인데, 노란 머리가 되면 이름도 노란 머리로 바뀌는 것인가?
윤택은 항상 그것이 궁금했다.
팀장은 방에 없었다.
윤택은 사무실로 가 팀장에게 전화를 했다. 전화 저편에서 중년의 남성 목소리가 들렸다.
-어! 윤택인가? 일은 잘 끝냈지?
“일이라니 무엇입니까? 그리고 지금 어디계십니까?”
-아아, 일 때문에 지금 차이나에 와 있지. 정말 곤란한 일이 생겼다네.
“그러겠죠, 터져야 될 슬롯이 안 터지니까 정말 곤란하겠네요.”
-아하하하! 눈이 여기 있나? 어떻게 찾았지? 어디 있나?
“그건 상관없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 일은 무엇입니까?”
-아, 자네가 너무나도 힘든 임무만 맡는 것 같아서 이번에는 전쟁보다는 좀 편한 임무를 주려고 해서 말일세. 아! 또 안 터졌네. 이번엔 십만 원을 한 번에 돌렸는데!!
“말은 끝내주십쇼.”
-아무튼, 어렵긴 하지만 좀 편한 임무라네. 쉽게 말하면 천재 소녀 꼬시기라네.
“꼬시기라..., 눈에 두건이나 두르고 다니는 저로서는 힘들 것 같은데요.”
-아니, 아니. 그 여자 동정심이 장난 아니야. 장님이 편할 걸?
“네네, 어차피 까야하는 거니까요. 그럼 정보는?”
-붉은 머리한테 받아. 임무 넘버 104라고 하면 줄 거야. 아 그리고 그 여자 앞에서 서툰 거짓말은 하지 마. 거짓말은 귀신 같이 알아 맞춘다고 하더군. 또 위험한 놈들이 노리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그거 조심하고. 다른 걸로는...
윤택은 팀장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바로 붉은 머리에게 가 말했다.
“그 여자 꼬시기 파일 줘. 내가 하기로 했어.”
“아, 여자 꼬시기 넘버 104 인가요?”
“어쨌든 그거.”
“그거 설명이 꽤 긴데, 어떻게 하실래요? 직접 읽어 보실래요? 제가 어머니처럼 무릎 배게 해서 들려 줄 까요?”
“무릎 배게도 필요 없고, 읽어 줄 필요도 없어. 그냥 통파일로 줘. 읽어볼게.”
윤택이 손을 내밀자 붉은 머리는 책상서랍을 열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처리 중, 뚜뚜뚜뚜뚜. 처리 되었습니다.”
항상 이 일을 할 때마다 이상한 효과음을 낸다.
“여기 파일이요.”
노란 폴더에 들어 있는 파일을 받아든 윤택은 다시 사무실로 돌아갔다.
폴더를 열어보자 열쇠가 속에서 툭 하고 떨어졌다. 윤택은 열쇠를 집어 들고 주머니에 넣은 뒤 파일을 차례차례 읽었다. 파일 맨 위에는 이름과 몰래 찍은 듯한 사진이 있었다. 금발 머리에 편해 보이는 와이셔츠를 입은 소녀. 이름은 이하나였다.


* * *
이삿짐센터의 사람들이 집 안에 짐을 들여 놓는다. 윤택은 지팡이에 의지한 채 기대어 서 자기가 살게 될 집을 바라보았다.
3층짜리 주택, 그다지 넓지도 않은 곳이었다. 조직의 말에 따르면 바로 위층에 하나가 살고 있다고 했다. 윤택은 이사를 끝낸 뒤 TV를 키고 의자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먼저 어떻게 접근을 할까? 떡이라도 돌려야 하나? 하지만 장님이라는 특성상 먼저 접근하기는 무리가 있었다.
윤택은 가슴이 답답해져 TV를 끄고 밖으로 나가 담배를 폈다. 담배가 반쯤 줄었을 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윤택은 담뱃불을 끄며 문을 열었다.
“누구세요?”
윤택은 눈을 사용했다. 그곳에는 금발에 아직은 성숙하지 않은 얼굴을 가진 하나가 서 있었다. 묘한 매력이 느껴지는 소녀였다. 하나는 집에서 방금 나왔는지 편해 보이는 추리닝을 입고 있었다.
“이봐요! 베란다에서 담배피면 위로 연기 올라와서 빨래에 담배 냄새 밴다고요.”
윤택은 의도하지 않은 방법으로 하나와 첫 번째 대면을 해버렸다. 좀 좋은 상황이었으면 좋으려만, 상황은 극악이었다. 이렇게 해서는 친해지고 뭐도 없다. 윤택은 이왕 이렇게 된 거 문을 활짝 열었다.
윤택은 고개 숙여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막 이사를 와서...”
“어머.”
하나는 놀란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사를 온 사람이 눈에 두건을 하고 있는 장님이었다. 하나는 처음의 기세가 살짝 눌려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그러세요? 그래도 조심해 주세요. 그런데 눈이...?”
“아, 사고 때문에 잃었습니다.”
“힘드시겠네요. 전 요 위층 사는 이하나라고 해요. 이름이 뭐에요?”
“저는 허윤택이라고합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하나는 인사를 하고는 다시 위로 올라갔다. 윤택은 어떻게든 시작된 관계에 만족하며 문을 닫았다. 하지만 곧 하나가 다시 문을 두드렸다.
“어쩐 일이십니까?”
“아, 저녁때가 아직이라... 저 이사 오셨으면 떡이라도 드릴까 해서요.”
“보통은 이사를 온 사람이 주는 것 입니다만.”
“에이, 신경 쓰지 마세요.”
윤택은 떡을 받아 들었다. 그 순간 하나의 표정에는 묘한 웃음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윤택은 그 웃음을 단순하게 넘겨버렸다.
“저, 안 구경 좀 해도 될까요. 이른바 집 구경.”
윤택은 어떻게든 하나와 가까워지고 싶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런 생각 없이 집 구경을 허락했다. 하나는 폴짝 뛰며 집 안으로 들어와 여기저기 바라보다가 말했다.
“음, 평범하네요.”
“네, 뭐.”
“저녁 혹시 드셨어요? 제가 해드릴까요?”
처음 보는 사람의 집에 와서 저녁까지 해주겠다니, 오지랖이 보고대로 넓긴 넓은가보다. 윤택은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네, 괜찮으시다면.”
“저야, 괜찮죠. 저 냉장고 좀 쓸게요.”
하나는 냉장고로 달려가 안을 살폈다. 간단한 계란이라던가, 양념, 그리고 고기 다진 것들이 있었다. 하나는 대충 몇 가지를 집은 뒤 쌀독이 있는 곳으로 가 밥을 짓기 시작했다. 윤택은 그녀의 모습을 모두 관찰하며 꼬시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이윽고 밥이 다 지어지고 달걀과 몇 가지의 반찬으로 이루어진 상이 차려졌다. 윤택은 지팡이를 짚으며 일어나 자리에 앉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하나는 빤히 윤택을 쳐다보았다. 윤택은 눈이 안 보이는 자신이 민망해하는 것도 이상해 버텼다.
“저, 물어볼게 있는데요.”
“네?”
윤택이 아직 한 숟가락도 입에 넣기 전, 하나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장님 아니죠?”
그 순간 윤택은 머리를 철퇴로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누가 봐도 이정도로 두꺼운 두건을 두르고 있다면 장님으로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윤택은 속을 진정시켰다. 아직 미션이 실패한 것은 아니다.
“장님 맞습니다.”
“호오, 그래서 TV가 있었구나. 집에.”
“그건 가끔 오는 동생이 보는..”
“가끔 동생이 오는 데 방도 하나 밖에 없는 집을 구했구나.”
“같이 자면 되니까요.”
하나는 피식 웃더니 한 숟가락을 퍼 먹었다.
“우물우물.”
지긋이 바라보는 하나의 눈빛이 더욱 민망하게 느껴졌다. 그 순간 하나는 김치와 달걀후라이가 담겨 있는 접시를 가리키며 말했다.
“어느 쪽이 달걀 후라이일까요?”
윤택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해 다시 물었다.
“네?”
“어느 쪽이 달걀후라이일까요?”
윤택은 생각에 잠겼다. 만약 정말 장님이라면 찍을 것이다. 그러면 맞출 확률은 50%, 맞추어도 이상한 것이 없고, 틀려도 이상한 것이 없었다. 하지만 맞출 경우, 보이니까 맞추었다며 밀고 갈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므로 틀린다. 일부러 틀렸다고 하더라도 맞출 확률은 겨우 50%인데 틀릴 수도 있다고 할 수 있었다.
“오른쪽?”
“땡! 왼쪽이 달걀후라이.”
하나는 밥을 다시 퍼먹었다. 그러고는 달걀후라이를 쭉 찢어 입에 넣었다. 잠시 아무 말도 없는 대치 상태가 되자 윤택은 안심했다. 별 이상함을 못 찾은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하나는 바로 입을 열었다.
“오른쪽, 왼쪽은 어떻게 아셨을까? 위, 아래일 수도 있는데.”
아 난 바보였구나.
하나는 왼쪽, 오른쪽 따위 말하지 않았었다. 윤택이 당황해 제대로 된 판단을 못하는 것을 이용한 허점을 찌른 것이다. 윤택은 눈으로 하나를 바라보았다. 하나는 이겼다는 미소를 지으며 윤택을 바라보고 있었다.
윤택은 머릿속으로 상황을 정리했다.
일단 들켰고, 그럼 거짓말 싫어하는 저 여자에게서 동정심 같은 건 기대하기 힘들고, 또 장님이라고 우기기도 힘든 상황.
윤택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말했다.
“장님이 아닌 건 어떻게 아셨어요?”
“사실 찍었어요. 찍어보고 반응 보려고 했죠. 옷차림도 보통 장님답지 않게 스타일 좋고, 집에도 TV가 있고, 냉장고에는 먹기 쉬운 인스턴트가 아닌 요리해야 하는 재료들, 그리고 아까 떡을 한 번에 받아 든 것까지.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장님이 아니라는 것이 티가 팍팍 나서 사실 놀랐죠. 이토록 허술한 연기가 다 있나! 하고.”
윤택은 한숨을 쉬었다. 이거 뭐 천재가 아니어도 이상하게 느낄 것들 투성이였다. 하나는 본론으로 넘어갔다.
“자, 이제 장님이 아니라면 어떻게 보는 지 알려드릴까요?”
“네?”
“그 두건 사이로 본다고 할 수는 없죠. 그러기에는 너무 두껍게 동여맸으니까요. 그럼 다른 것으로 본 다는 것인데.”
“꼭 말해야 하나요?”
“목표는 뭔가요? 저죠?”
하나는 윤택이 당황한 표정을 짓자 피식 웃었다.
“당연히 저겠죠. 지금까지 저 스카웃하려는 놈들이 얼마나 왔었는데.”
“아닙니다. 저는 그냥 진짜 이사를 온 평범한...”
“눈 없이 보이는 것부터 평범하지 않네요. 그럼 제가 말하죠. 교환자죠?”
다 들켰다, 다 들켰어. 교환자의 존재까지 알고 있다. 완전히 전라로 앞에 나타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윤택은 어쩔 수 없이 전부 솔직하게 말하기로 정했다.
“네, 교환자입니다. 능력은 제가 가지고 있는 전부니 안 말해도 되겠죠.”
“네, 마음대로. 그럼 목적이 뭔가요. 목적에 따라 대우가 바뀔 테니까요.”
“제 임무는 당신과 친해지기, 그리고 스카웃입니다. 다른 미션으로는 당신의 보호가 있겠군요.”
“보호? 살해가 아니라?”
하나는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윤택을 쳐다보았다.
“살해라니요? 보호일 뿐입니다.”
하나는 잠시 윤택을 살펴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호든, 살해든 마음대로 하세요. 전 필요 없습니다.”
“안됩니다. 다른 교환자들도 하나씨를 노린다고 했어요.”
“뭐, 어차피 개들은 저 못 죽여요.”
“아니, 그래도.”
윤택은 말을 흐렸다. 하나는 너무나도 자신만만했다. 윤택은 나가려는 하나의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말했다.
“제가 지켜드리겠습니다. 스카웃 말고, 지켜주기만. 어떻습니까?”
“그럼 전 아무런 감사 없이 당연히 여기면 되는 겁니까?”
하나의 말에 윤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상태에서 무리한 걸 요구하다가 하나가 완전히 돌아서면 끝이다.
임무 실패, 실패 피(fee)와 함께 실적 깎이고, 그렇게 되면 월급도 깎인다. 어떻게든 성공 가능성을 올려야했다.
하나는 윤택의 생각을 아는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럼 보디가드씨~. 수고해주세요.”
하나는 윤택의 손을 뿌리치고 밖으로 나갔다. 윤택은 하나가 나간 자리만 쳐다보며 멍하니 서 있었다. 어떻게든 지푸라기는 잡았다.


* * *
다음 날, 하나가 출근하는 것을 윤택이 뒤따르고 있었다. 하나는 괜찮다며 따라오지 말라고 했지만 윤택의 막무가네였다.
하나가 출근 한 곳은 편의점, 자기가 점장으로 있는 곳이었다.
“아니, 편의점이 왜 문을 닫는 겁니까? 간판에는 24/7이라고 적혀 있는데요. 저거 낚시 아닙니까?”
“참 말 많네. 보디가드씨. 제가 점장이니까 마음대로 해도 되요.”
하나는 셔터를 올린 뒤 안으로 들어갔다. 윤택은 뒤를 쫄래쫄래 따라 들어가 컵라면을 먹는 곳에 앉았다. 하나는 앞치마를 입은 뒤 카운터에 섰다. 은근히 잘 어울렸지만 아무리 봐도 알바를 하는 고등학생 날라리일 뿐이었다. 윤택은 가만히 있기 심심해 컵라면을 뜯은 뒤 물을 끓였다.
“돈 내고 먹어요!”
“매정하네요. 어제는 떡도 가져다주고 했으면서.”
윤택이 투덜거리자 하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건 떠보기 위함도 있었고, 혹시 진짜 힘든 사람이면 도와주는 의미도 있었죠.”
하지만 윤택은 돈을 내지 않고 컵라면에 물을 따랐다. 그 순간 살기가 그의 등을 간질였다. 윤택은 볼멘소리로 말했다.
“고작 컵라면 먹었다고 그렇게 매섭게 노려볼 필요는...”
“저 아닌데요.”
하나는 어느새 컵라면 하나를 뜯고 있었다. 하나도 아침을 먹지 않았기 때문에 컵라면 냄새를 이길 수 없었다. 윤택은 하나의 말에 눈을 밖으로 돌렸다. 아침 출근 시간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붐볐지만 감시 엘리트인 윤택은 쉽게 수상한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스포츠머리의 남자는 편의점이 보이는 조금 먼 전봇대 뒤에 숨어 있었다. 그곳에서 하나와 윤택을 노려보고 있었다. 윤택은 다시 눈을 돌린 뒤 하나의 손을 잡았다. 덕분에 하나는 컵라면 스프를 바닥에 뿌렸다.
“아! 뭐에요!”
“도망쳐야 해요. 누군가 이곳을 보고 있어요.”
윤택은 하나의 팔을 끌었다. 그러자 하나는 윤택을 뿌리치며 말했다.
“뭐 보고 있는 것쯤이야. 제 아름다운 미모 때문에 그럴 수도 있고.”
“살기가 담겨져 있다고요!”
“그런 걸 어떻게 아세요?”
“전쟁터에 3년 있으면 알게 됩니다. 빨리 가죠.”
“상관없어요. 어차피 재들은 절 못 죽으니까요.”
하나는 태연하게 대걸레를 들고 와 바닥을 밀었다.
윤택은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이 금발의 꼬맹이는 자기가 무슨 상황에 처한지 모르는 듯싶었다. 윤택은 대걸레를 빼앗아 빨리 밀면서 말했다.
“다 밀었으니까 도망가죠.”
“아, 그러니까 재들은 저 못 죽인데도.”
“빨리!”
윤택이 악을 쓰자 살짝 주춤한 하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에이, 그럼 뭐 도망치죠. 일단 먹고.”
하나는 새로 컵라면을 가지고 와 물을 따랐다. 윤택은 억지로 끌고 갈 수 없어 한 젓가락에 컵라면을 먹고 하나를 보챘다.
식사를 끝낸 뒤 하나는 열쇠를 가지고 나와 문을 잠그고 셔터까지 내리는 여유를 보여줬다. 당장에 뛰어 나가도 감시가 붙을 텐데. 이렇게 여유를 부리며 나 이제 퇴근한다! 까지 보여주면 당연히 저쪽에서도 준비를 하고 따라 붙을 거 아닌가.
윤택은 다시 눈을 사용해 남자를 찾았다. 남자는 이미 그 전봇대 뒤에는 없었다. 어딘가로 이동해 감시하고 있는 것은 확실했다.
“자, 가죠.”
하나는 열쇠를 윤택에게 던지고 천천히 걸었다. 그러자 윤택은 하나의 손목을 잡아채고 달렸다.
“어어!”
하나는 얼빠진 소리와 함께 윤택의 속도에 맞추어 열심히 뛰었다.
“잠시만요. 헥헥. 죽겠어요. 좀 쉬죠.”
하나가 지쳐 숨을 헐떡이자 윤택은 멈춤과 동시에 눈을 다시 이동시켰다. 아까와는 다름 남자가 모자를 눌러쓰고 감시를 하고 있었다.
도대체 몇 명이나 감시를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제길, 한 명이 아니네요.”
“천리안, 그런 능력이군요.”
하나는 윤택을 바라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대충.”
“아, 힘들다. 물 좀 사 와주실래요?”
윤택은 태연하게 1000원 지페를 건네는 하나를 바라봤다.
“지금 처한 상태 몰라요? 상대는 우리가 여기 있는 걸 안다고요.”
“아! 못 뛰겠다. 물만 마시면 뛰겠는데.”
“젠장!”
윤택은 1000원을 신경질적으로 받은 뒤 달렸다. 근처 슈퍼에 들어가 물을 산 그는 다시 돌아가려 했지만 익숙한 얼굴이 길을 막았다.
방금 발견한 모자를 쓴 남자, 그가 입구에 서 있었다.
윤택은 지팡이를 짚으며 최대한 장님인 척 했다.
“뛰는 거 다 봤다.”
윤택은 되는 일 하나 없는 상황에 마리가 지끈 아파왔다. 윤택은 가만히 서 있다가 앞으로 뛰며 지팡이를 휘둘렀다. 하지만 남자도 미리 예상을 했는지 쉽게 피했다. 슈퍼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보았다.
물론 윤택은 눈이 없지만.
남자는 주머니에서 나이프를 꺼내더니 윤택에게 말했다.
“저 여자한테서 손을 때라. 그럼 살려주지.”
“지랄.”
윤택은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자신 있게 말했다. 남자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더니 윤택에게 달려들었다.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시간은 이미 지났다고는 하지만 엄청난 인파가 구경을 하러 모였다.
윤택은 나이프를 피하며 지팡이를 휘둘렀다. 사람들은 윤택이 나이프를 피할 때마다 오! 하며 탄성을 뱉었다. 몇몇은 경찰에게 전화를 하는 듯싶었다.
윤택은 빨리 끝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그것은 남자도 같았는지 둘은 더욱 치열하게 싸웠다. 이윽고 윤택이 남자의 머리를 철재지팡이가 휠 정도로 강하게 쳤고, 남자는 쓰러졌다. 윤택은 그때를 놓치지 않고 남자를 밟았다. 마무리로 숨을 끊었어야 하지만 그러기에는 구경꾼들이 너무 많았다.
남자는 몇 대 밟힌 뒤 나이프로 허공을 그으며 인파속으로 사라졌다. 사람들은 남자가 달려들자 길을 비켜주었다. 윤택은 남자를 쫓으려다 경찰차 소리를 듣고는 도망쳤다.
당장 하나에게 달려가자 하나는 쀼루퉁한 표정으로 말했다.
“물을 융합해서 만들었나? 왜 이렇게 늦었어요?”
“일이 좀 있었어요.”
윤택은 땀을 닦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사용해 남자를 찾아보았지만 이 근처에서는 그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그 대신 이번에는 어떤 여자가 자신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빨리 움직이죠.”
윤택은 여자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도망이 아닌, 감시를 잡으러 간 것이다. 계속해서 감시가 붙는 다면 도망의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감시하는 여자는 근처까지 다가가자 갑자기 인파속으로 들어간 뒤 사라졌다. 그리고 몇 분 되지 않아 다른 남자가 자신들을 감시했다.
윤택은 머리를 긁적였다. 도대체 어떤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감시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왜 그러세요?”
“감시자가 계속 사라집니다. 인파속으로 섞이더니 갑자기 증발해버립니다.”
“그럼 그 쪽도 교환자네요.”
윤택은 하나의 말에 또 다시 자신의 멍청함을 인지했다. 하지만 다른 문제는 어떤 능력다라는 것이었다.
“능력은...?”
“아무래도 상황으로 봤을 때, 순간이동, 투명, 많은 걸 생각할 수 있지만 거의 100% 이거군요. 모습 바꾸기.”
하나는 검지를 치켜들며 말한 뒤 까르르 웃었다. 하나는 승리의 브이를 보여주며 으스댔다.
“정말 바보 아니에요? 앞으로 잘 모르는 거 있으면 저한테 말하세요.”
윤택은 민망해져 머리를 긁적였다.


* * *
“뭐든지 식후에 하라는 말이 있지요. 금강산도 식후경, 참 괜찮은 말인 거 같아요.”
“네.”
하나는 열심히 떠들었다. 하지만 윤택은 그녀의 말을 들어 줄 생각이 없었다. 하나는 건성으로 대답하는 윤택에게 화를 냈다.
“저기, 듣고 있어요? 뭘 먹어야죠! 서울 시내를 이렇게 돌아다니고 밥도 안 먹을 생각이에요? 말도 안돼! 도망치다가 배가 고파서 쓰러질 거에요.”
하나는 투정을 부렸다. 시간은 12시가 조금 지났다. 벌써 추격전을 시작한 지 3시간이 지났다. 뛰고, 걷고, 쉬고, 또 뛰고. 그렇게 3시간은 컵라면 하나로 버티기에 너무나 힘들었다. 윤택도 배에서 에너지를 달라고 아우성이었다.
결국 하나는 참지 못하고 주저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윤택은 한숨을 쉰 뒤 백화점을 가리켰다.
“저기 맨 위층 가서 먹죠. 사람들도 많고 공간도 한정되어 있어서 감시도 쉬우니까요.”
“저...저기 위층이요.”
하나는 10층짜리 백화점을 보고는 하얗게 질리더니 말했다.
“저기 말고 딴 곳.”
“딴 곳은 다 식당이라, 밖에서도 감시가 가능하고 인공위성처럼 감시를 해야 하기 때문에 자세한 정보전달이 되지 않아요. 그에 비해 저 위층은 아래층만...”
“그런 건 다 좋은데, 사실... 제가...”
하나는 얼굴을 붉힌 뒤 말했다.
“고층 건물에 못 들어가요.”
윤택은 이마를 짚었다.
“고소공포증?”
“아니요. 그냥 고층 빌딩 공포증.”
윤택은 이왕 이렇게 된 거 빠르게 포기했다.
“설렁탕집이 앞에 있네. 거기로 가죠.”
“네!”
하나는 초롱초롱하게 눈을 밝힌 뒤 설렁탕집으로 들어갔다. 윤택은 아직도 감시당하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하지만 살기는 많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 걱정할 수준은 아닌 것 같았다. 설렁탕집은 손님이 하나도 없었다. 오로지 주인아주머니만 카운터를 지키고 있었다.
“설렁탕 2개 주세요.”
설렁탕집 아주머니가 주문을 받아 주방으로 들어가자 하나가 입을 열었다.
“아직도 감시하는 사람이 있나요?”
윤택은 눈을 움직여 찾아보았지만 일단 감시하는 사람은 사라진 것 같았다.
“없는데.”
“음, 그렇구나. 천리안으로도 못 찾는 구나.”
하나는 비아냥거리며 피식 웃었다.
“뭔가 열 받는데.”
“뭐, 감시가 없을 수도 있지요.”
“아니, 감시는 있어요.”
“어떻게 알아요?”
“느낌. 너무 막연한가요?”
윤택은 민망해했다.
때 마침 설렁탕이 나오자 하나는 잘 먹겠습니다를 외치고 밥을 말아 푹푹 퍼 먹었다. 어지간히 배가 고팠는지 먹는 다기보다는 흡수를 하고 있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였다. 그러던 중 하나는 갑자기 아주머니를 부르더니 말했다.
“저, 가위 좀 가져다주세요.”
가위를 가져다주자 하나는 김치를 자르기 시작했다. 윤택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원래 설렁탕은 그렇게 큰 김치랑 먹는 겁니다.”
“알아요, 이번만 특별히. 이 가위에는 다른 용도가 있어서요.”
식사가 끝나고 설렁탕 집 아주머니가 와 그릇을 치우려고 하자 하나는 아주머니에게 말을 걸었다.
“아주머니, 장사가 잘 안 되시나봐요.”
“다 저기 백화점가서 먹으니까 그러죠.”
“아하.”
하나는 갑자기 가위를 들어 아주머니의 배에 찔러 넣었다. 얼마나 세게 찔렀는지 가위가 아주머니의 배에 박힌 채 쓰러졌다. 윤택은 깜짝 놀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하나에게 외쳤다.
“무슨 짓이야!”
“가만 있어보세요.”
하나는 윤택을 진정시키고 아주머니를 가리켰다. 그러자 아주머니의 모습이 점차 변하더니 처음 자신들을 감시하던 까까머리 남자가 되었다. 윤택은 흥분해 일어났다.
“이 자식!”
“본 적 있어요?”
“맨 처음에 감시하던 놈.”
“와~! 역시 제 예상이 맞았네요.”
하나는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더니 정색을 했다.
“뭐해요? 보디가드씨? 우리를 노리는 이 녀석에게 물어 볼게 있지 않나?”
윤택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쭈그려 앉았다.
“이봐, 노리는 게 뭐야?”
남자는 말이 없었다. 윤택은 가위를 잡고 더 짓눌렀다. 하지만 고문은 거기까지였다. 순간 어떤 여자가 문을 부서지도록 열어젖히며 들어왔다. 여자의 손에는 소음기를 낀 권총이 들려 있었다.
윤택은 여자의 손에 들려 있는 권총을 확인하자마자 하나를 끌고 테이블 뒤로 숨었다. 여자는 거침없이 총을 쏘아댔다.
“젠장! 저건 또 뭐야!”
하나는 윤택의 어깨를 찰싹 때렸다. 그러면서 여자를 발견 못한 윤택을 질책했다.
“천리안 아니었어요?”
“정확히 말하면 천리안은 아니지.”
윤택은 말과 동시에 하나를 끌고 주방으로 간 뒤 뒷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다행히 상대는 동료를 챙기는 것에 만족했는지 따라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윤택이 식당 안을 눈으로 둘러보았을 때, 남자와 여자는 사라진 뒤였다.
“위!”
하나의 외침과 함께 눈은 윤택에게로 돌아왔다. 지붕 위에서 아까 총질을 한 여자가 목검을 들고 뛰어내렸다. 윤택은 하나를 밀어내고 자신도 옆으로 피했다. 윤택은 지팡이를 들었다. 상대는 목검, 자기는 휘어진 지팡이. 상황이 좋지 않았다.
윤택은 상대를 주시하며 하나에게 갔다.
“어쿠쿠...”
하나는 엉덩이를 만지며 일어났다. 윤택은 하나의 손목을 잡고 냅다 뛰기 시작했다. 그러자 목검을 든 여자도 뒤를 쫓았다. 윤택은 대로로 나가 택시를 잡았다. 다행히 기다리고 있던 택시가 있었고, 윤택은 바로 올라탔다.
하지만 하나가 올라타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 뒤로 여자가 미친 듯이 달려오고 있다.
절체절명의 순간, 윤택은 택시에서 내려 하나에게 외쳤다.
“뭐 해!”
“차... 무서워서... 못 타는데요.”
“무서운 거 더럽게 많다! 저런 미친년이나 무서워해라. 이런 평범한 거 말고!”
윤택은 반쯤 미쳐 마음에 있는 말을 다 토해낸 뒤 하나를 끌고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전거를 타고 가는 고등학생을 발견, 멈춰 세웠다.
“빌려줘!”
고등학생이 대답할 새도 없이 빌려(?)탄 윤택은 하나를 뒤에 태우고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마치 올림픽 사이클 경기를 보듯이, 차도로 내려가 자기가 낼 수 있는 최고 속도를 냈다. 하나는 어느새 멀쩡해졌는지 한손을 높이 들고 외쳤다.
“야~! 달려라!”
천진난만, 자기를 살해할 수도 있는 자들에게 쫓기는 데 이 무슨 플레인가.
여자는 어느새 똑같이 자전거를 타고 따라오고 있었다. 윤택은 방향을 획 꺾어 어떻게든 추격을 따돌린 뒤 멈춰 섰다.
몰랐는데, 한계까지 힘을 빼 쓰다 보니 다리가 후들거렸다. 너무 힘을 주고 있어서 어깨와 목도 뻐근하고 숨도 차올랐다. 하나는 헥헥거리며 숨을 고르고 있는 윤택에게 마시다 남은 물을 건네주며 말했다.
“잘했어요.”
“고층 빌딩도 못가, 차도 못타. 무슨 과거에서 오셨습니까?”
“어머, 어떻게 아셨나?”
“진짜요?”
“아니요.”
하나는 피식 웃었다.
“옛날에 일이 좀 있어서요.”
윤택은 벌컥벌컥 물을 들이키며 일어났다. 추격은 뿌리쳤지만 아직 위험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지하철은 탈 수 있죠?”
“네! 탈 수는 있는데. 지하를 못 들어가요.”
“그게 그거잖아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윤택은 민망한 듯 배시시 웃는 하나에게 뭐라 하지 못했다.
“그럼 일단 이 동네를 벗어나죠. 어디 모텔이라도 잡아서 작전을 짜죠. 아니면 저랑 같이 교회로 가실래요?”
“교회? 교환자 협회, 뭐 그런 곳은 아니죠?”
“맞습니다.”
“네임 센스하고는.”
“그래서 갈 겁니까? 안 갈 겁니까?”
“안 가요. 거기가 어딘 줄 알고 따라가요?”
하나는 아직 윤택을 완전히 믿고 있지 않았다.
“그럼 다른 곳으로 가죠.”
윤택이 자전거에 타자 하나는 그 뒤에 앉은 뒤 외쳤다.
“그럼 출발~!”
어린애 맡은 기분. 윤택은 절대로 전쟁보다 편한 임무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 * *
“방 하나를 잡은 건 도대체 무슨 생각이신가요?”
하나는 방 하나를 잡은 것에 대해 불만을 표하고 있었다. 하지만 방 두 개를 잡을 만큼 여유롭지 않았다. 돈도 여유롭지 않았으며, 상황도 그러했다.
하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내내 멀리 떨어져 팔짱을 끼고 자기 보호 상태로 돌아가 있었다. 윤택은 최대한 믿음직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다 보호 차원에서...”
“제가 아는 보호와는 거리가 먼데요. 그 보호를 하려고 다른 위험을 주시잖아요.”
윤택은 말을 멈췄다. 더 이상 말을 섞어봤자 말이 이어나가지 않았다.
모텔 방으로 들어가자 하나의 적대심은 더욱 거세졌다. 화장실의 문에는 안이 훤히 보이는 유리만이 붙어 있었고, 침대는 더블이오, 그 앞에 거대한 TV에는 성인프로그램이 민망할 정도로 큰 소리를 내고 있었다.
앙~앙~
하나는 얼굴이 붉어져 급히 TV를 끄고 침대에 앉았다. 그리고 윤택이 다가오자 침대에 앉아 있기도 민망했는지 일어나 컴퓨터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이 건물은 괜찮아요?”
“다섯 층 아래면 뭐.”
하나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공포증이 몇 개 있는거에요? 차, 빌딩, 그리고 지하. 더 있어요?”
“아니요, 그게 다에요.”
윤택은 더 이상 택시 때와 같은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 말했다. 하지만 괜히 궁금해졌다. 어떤 일이 있었기에 공포증이 생긴 것일까.
하나는 윤택이 빤히 쳐다보다 미소를 보였다.
“궁금해요?”


* * *
하나가 7살이었을 때였다. 그날은 초등학교 입학식 전날. 하나는 새로운 책가방을 사러 어머니와 함께 시장으로 향했다. 어린 하나에게 온갖 물건들이 있는 시장은 정신을 빼놓을 만큼 흥미로웠다. 항상 동네 슈퍼나 문방구만 다니던 그녀였다.
하나는 흥미를 이기지 못하고 여기저기 누군가에게 홀린 것처럼 돌아다녔다. 그러던 중 불행히도 어머니를 놓쳐버렸다.
하지만 불행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길을 잃은 조그마한 여자아이에게 두 명의 남성이 다가왔다. 두 남자는 하나의 눈높이에 맞게 쭈그려 앉아 물었다.
“얘, 길을 잃었니?”
“네.”
하나는 훌쩍거리며 대답했다. 두 남자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하나에게 다가왔다.
“오빠들이 엄마 찾아줄게. 따라올래.”
거기서 따라갔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어렸던 하나는 엄마를 찾아주겠다는 말에 속아 두 사람을 따라갔고, 인적이 드문 곳에서 묶여 트렁크에 갇혀졌다.
차는 빠르게 도로를 달려 어느 빌딩 안으로 들어갔다. 지하에 차를 댄 두 사람은 하나를 다시 확인 한 뒤 전화를 걸었다.
“일단 시키신 대로 했습니다. 정말 그냥 여기서 저희는 돈만 받고 풀어주면 되는 거지요?”
두 남자는 확인했다.
-맞다.
전화기 너머의 여자는 간단히 대답 한 후 말했다.
-일단 목표를 사진 찍어 보내라.
두 남자는 묶인 하나의 사진을 여자에게 보냈고, 곧 여자에게서 문자가 왔다.
확인했다. 마음대로 해라.
두 남자는 킬킬거리며 웃었다.
“야, 이거 하나 하는데 돈 3천이다. 그리고 애 부모한테서 5천만 더 뜯자.”
남자는 하나의 입을 막은 테이프를 뜯어 낸 뒤 물었다.
“꼬마야, 엄마 전화번호가 뭐니?”
“꺄아앆!!”
하나가 다짜고짜 소리를 지르자 남자는 하나의 볼을 후려쳤다. 짝하는 소리와 함께 하나는 입을 다물었다.
“전화번호가 뭐니?”
엄마의 전화번호, 알았었는데 생각이 나지 않는다. 하나는 우물쭈물 말을 못했다. 남자는 답답했는지 하나가 가지고 있던 손가방을 뒤졌다. 그곳에는 작은 아이용 지갑이 있었다.
그 안에서 전화번호를 발견한 남자는 당장 주차장 구석에 있는 공중전화로 가 전화를 했다.
“애는 우리가 데리고 있으니까, 신고할 생각 말고 당장 한성빌딩으로 튀어와. 돈 5천 준비해서 오고. 자 목소리 들려줄게.”
“엄마!!”
하나는 전화기까지 끌려가 외쳤다. 하지만 하나의 부모님이 뭐라 하기 전, 남자들은 전화기를 뺐었다.
“빨리 와.”
남자는 자신이 할 말만 하고 딱 끊었다. 두 남자는 전화를 끝낸 뒤 트렁크 문을 닫고 위로 향했다.
혼자만 남겨진 하나는 벌벌 떨고 있었다. 그 어린 소녀는 어른도 버티기 힘든 미칠 듯한 공포를 경험하고 있었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두 남자가 차에 타는 소리가 들렸다.
“야, 완전 호구 아니냐? 크크크.”
“그러게, 5천을 주고 바로 딸 찾으러 가네. 여기 있는데. 그나저나, 재 어떡하게?”
“뭘 어떡하냐? 팔아야지. 어린 것들한테 미친놈들 많다. 얼굴도 귀엽상하잖아.”
“에이, 저 나이는 뚱뚱하지만 않으면 귀여워.”
두 남자는 낄낄거리며 웃었다. 곧 있으면 엄마를 만날 줄 알았던 하나에게는 너무 큰 절망이었다. 그 순간 천둥과 같은 소리가 났다. 그리고 엄청난 충격과 함께 차가 앞으로 기울었다. 하나가 들어 있던 트렁크의 아랫부분도 갑자기 내려앉았다. 이윽고 귀를 멎게 할 만한 소리와 함께 건물이 무너졌다.
참사의 생존자는 트렁크에 갇혀 있던 한 소녀밖에 없었다. 운이 좋게도 트렁크만은 그 어떤 파편에도 깔리지 않았다. 소녀가 갇혀 있던 시간은 3일, 도저히 이 작은 소녀가 버틸 수 있을 만한 시간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생존했다.
생존이 좋은 것은 아니었다.
하나의 부모님 또한 미처 빌딩을 벗어나지 못하고 사고에 휘말렸다. 졸지에 고아가 되어버린 소녀는 보육원에 맡겨졌다.
“이런 뻔한 스토리죠.”
“전혀 뻔하지 않아요.”
윤택은 뭐라 말을 해야 할지 생각나지 않았다. 그 어린 나이에, 오히려 자신보다 더욱 더 심한 절망을 느낀 것이다. 가족이 다 죽고, 혼자만 살아남는 다는 절망을 하나는 윤택보다 수십년 일찍 경험한 것이다.
“힘드셨겠어요.”
“뭐, 나쁘지 않아요. 옛날 일이라 무의식에서 신경 쓰는 거 말고는 생각도 거의 안 나고. 이거 다 아는 것도 제 몇몇 기억하고 신문에 난 정보를 합해서 말하는 거니까요.”
하나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래도 그 두 놈의 얼굴은 생생히 기억나요.”
처음으로 하나의 말에서 살기가 피어나왔다. 윤택은 마음을 졸였다. 뭐라 화제를 바꿀 수 없을까.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아요. 그런 절망...”
“샤워라도 하실래요?”
“에! 저 유리 다 보이는 곳에서 지금 샤워하라고요? 어머 웃겨 정말.”
하나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때 윤택이 뜬금없이 말했다.
“그 절망, 다시 안 느끼게 해 줄게요.”
윤택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하나는 윤택의 말에 얼굴을 붉히면서 말했다.
“그럼 씻어 볼까요? 능력 쓰지 마세요.”
하나는 상큼하게 웃어 보이며 샤워실로 들어가려했다. 하지만 그 순간 대문이 부서지며 아까 목검을 들고 달려오던 여자가 들어왔다. 윤택은 급히 하나와 함께 침대 뒤로 숨었다. 여자는 또 다시 총을 난사했다.
“어떻게 안거에요?!”
하나는 흥분해 외쳤다. 감시자가 중상을 입었기 때문에 추격은 불가능하다 생각했었다. 하지만 여자는 그런 예상들을 보란 듯이 무시해줬다.
윤택은 괴력을 발휘해 총이 멈춘 사이를 노려 이불을 던졌다. 여자는 갑작스레 이불이 덮쳐오자 피하지 못하고 뒤집어썼다. 윤택은 하나를 데리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모텔의 계단으로 맨 아래층까지 내려 문을 열고 나섰다.
하지만 하나는 윤택과 함께 문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여관 주인이 그 까까머리의 남자로 변해 있었다.
까까머리 남자는 하나의 목을 졸라 맨 채 윤택에게 싸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 개자식이!”
윤택은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어느새 내려온 여자가 윤택을 쳐 냈고, 윤택은 바닥을 나뒹굴었다. 윤택이 넘어져 있는 사이, 적은 하나를 데리고 오토바이에 올라탔다.
윤택은 허겁지겁 일어나 보았지만 오토바이를 쫓는 것은 불가능했다.
윤택은 당장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붉은 머리, 지원군 요청한다, 준비시키고 내가 좀 있다가 말하는 곳으로 보내!”
-아, 지금 쉬는 요원이 없는데요. 어떡하죠?
“팀장이라도 달려오라고 해!”
윤택은 버럭 소리를 지르고 핸드폰을 닫았다. 눈은 이미 오토바이를 쫓고 있었다. 하지만 눈이 그들을 쫓을 때까지, 윤택은 진짜 장님이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가만히 앉아서 감시뿐이었다.
“젠장, 완전히 속았어.”
속았다, 보통 사람 입장에서 보면 중상일지 몰라도, 사지를 넘나드는 교환자들의 임무에서는 배에 가위 꽂힌 거 정도야 참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방심이 화근이었다.
윤택은 지팡이를 짚고 일어섰다. 그리고 대로로 가서 손을 들었다. 진짜로 장님이 된 기분, 그런 윤택 앞에 한 대의 택시가 섰다.
윤택은 몇 번 헛손질을 하다가 택시에 올라탔다.
“앞으로 쭉, 꺾을 곳은 알려 줄 테니까.”


* * *
윤택이 도착한 곳은 야심한 산이었다. 벌써 시간은 7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고작 하루 같이 있었지만 만약 하나가 옆에 있었다면 배가 고프다고 칭얼거릴 시간이 분명했다.
윤택은 눈을 사용해 다시 한 번 하나가 있는 곳을 체크했다. 하나는 두 교화자들 옆에 누워 있었다. 기절을 시킨 듯싶었다.
윤택은 눈을 돌리고 산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반쯤 올라가자 핸드폰이 울렸다.
붉은 머리, 윤택은 급하게 핸드폰을 받았다.
“지원은?”
-아, 그게. 우리 팀장님께서는 사라지셨고, 나머지 분들은... 에이 아시면서.
“알긴 뭘 알아! 이 샹크스 짝퉁아!”
-헐, 그게 뭐에요? 저는 샹크스가 아니라 빨간 머리 앤에서 따온...
“급해, 지금 급하다고! 알아들어? 장난치자는 거 아니야.”
-음, 그럼 어떻게든 해 볼게요. 장소는요?
“관악산, 중턱에 있는 어느 판잣집이야.”
-뚜뚜뚜뚜뚜, 알겠습니다. 찾아보죠.
붉은 머리와의 전화를 끊은 윤택은 산길에서 벗어나 판잣집으로 향했다. 이미 어두워져 앞이 보이지 않았지만 핸드폰이라도 켜 손전등으로 사용했다.
온 몸의 오감을 집중시키며 걷던 윤택은 갑자기 들린 부스럭 소리에 흠칫 놀라 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웬 토끼 한 마리가 튀어나올 뿐이었다.
윤택은 안도의 한숨을 쉬고 다시 걸어가려 하다가 멈췄다.
그는 천천히 걷다가 뒤쪽으로 단검을 그었다. 뒤에는 까까머리의 남자가 놀란 표정으로 윤택의 단검을 막은 채 서 있었다.
“놀랐다, 안 속네.”
“내가 바보냐? 관악산에 산토끼는 무슨 산토끼야!”
윤택은 악을 지르며 남자를 밀어냈다.
“너희들 뭐야.”
“소개하지, 나는 교환자 이창용이라고 하지.”
창용은 정중히 인사를 한 뒤 말했다.
“이제 둘 중 하나는 죽을 테니 이름 좀 알자.”
“난 허윤택이라고 한다.”
통성명이 끝나자마자 남자는 달려들었다. 부상자였지만 남자는 윤택과 비등한 전투실력을 보여주었다.
윤택은 남자의 단검을 막아내기 급급했다. 밤이어서 멀리서 보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눈으로 쓸 수 있는 전략도 많지 않았다.
윤택은 창용을 피해 달리기 시작했다. 창용은 그 뒤를 바짝 쫓았다. 윤택은 도망가는 척 판잣집을 향하고 있었다. 창용도 그것을 알기 때문에 죽을힘을 다해 윤택을 쫓았다. 그 순간 윤택이 넘어졌다. 창용은 기회다 싶어 윤택을 덮쳤다.
하지만 윤택은 바닥에 깔린 낙엽, 흙을 집어 창용에게 던졌다.
그와 동시에 윤택은 단검을 들어 창용의 목에 꽂았다. 창용은 낙엽과 흙에 시야가 가린 상태에서 윤택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했다.
“크윽.”
윤택은 창용을 밀어내고 일어났다. 옷에 묻은 흙을 툭툭 털어낸 윤택은 창용의 목에 있는 단검을 뽑았다. 죽은 창용의 얼굴에는 화상자국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참사에서 얼굴의 화상을 입은 대신에 얻은 변장 능력이었다.
윤택은 다시 단검을 꽂아 넣었다.
“악역이 된 느낌이군.”
얼마 되지 않아 판잣집에 도착한 윤택은 안을 확인했다. 하나는 어느새 묶여 있었고, 하나를 납치해간 여자는 손톱을 정리하며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했다.
윤택은 정직하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여자는 윤택을 힐끗 보더니 말했다.
“창용이가 졌나보네.”
“하나를 돌려줘라.”
윤택은 다시 단검을 뽑아냈다. 여자는 윤택의 행동에는 신경 쓰지 않고 계속해서 손톱을 관리했다.
“뭔가 틀렸어. 우리가 먼저 노르고 있던 애야. 네가 돌려줘야지, 왜 내가 돌려주냐?”
“너희도 하나를 스카웃하러 온 거냐?”
“빙고!”
“하지 못할 경우에는 죽이고?”
“그것도 맞췄어. 똑똑하네.”
여자는 손톱을 훅 불었다. 하나가 말하던 보호가 아닌 살해가 아니냐는 질문은 이들 때문이었다.
“이런 똑똑한 것이 라이벌 세력에 들어가는 것만큼 무서운 건 없으니까. 내가 못가지면 아무도 못 가지는 거지.”
윤택은 이를 갈았다. 사람 목숨이 이득, 손해로 죽이고 살리는 것인가?
“내 이름은 김소연이라고 한다. 너는?”
“허윤택이다.”
“소속은?”
“뭘 그렇게 알고 싶은 게 많아? 그냥 빨리 하나 일로 넘겨!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걱정 마, 자고 있을 뿐이야.”
소연은 피식 웃었다.
“그런데 내거라니까. 내가 만들었고, 내가 가장 먼저 노리고 있고, 내가 가장 공들였어. 그러니까 내꺼지.”
소연은 뭐라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였다. 윤택은 화가 치밀어 올라 달려들었다.
“이 개년이!”
소연은 총을 꺼내들었다. 그러자 윤택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일단 엄폐물을 찾아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소연은 윤택을 향해 총을 쐈다. 윤택은 타이밍을 노리고 있었다. 제 아무리 총을 쏴대도 장전을 할 시간은 필요했다. 그 순간 달려들어 접근 전을 펼치면 승산이 있었다.
이윽고 총성이 멈추고 윤택은 눈으로 장전을 확인한 뒤 달려들었다.
소연은 예상했다는 듯이 목검을 꺼내 들었다.
윤택은 가까이 붙어서 공격을 늦추지 않았다. 상대의 검이 훨씬 긴 이상 거리를 주는 것은 치명적이었다.
두 사람의 무기가 만났을 때 소연이 말했다.
“내 능력도 모르면서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
윤택은 흠칫 놀라며 뒤로 빠졌다. 그러자 소연은 깔깔 웃었다.
“야, 그 한마디에 거리를 두고. 유리한 거 다 날렸네.”
상대의 능력을 모르는 이상 윤택이 할 수 있는 것은 제한되어 있었다. 그때 소연이 목검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그쪽 능력은 아마도 보는 거지? 장님이 이렇게 움직이는 것은 말이 되지 않으니까.”
윤택은 긴장했다. 소연의 능력이 나올 타이밍이었다.
“내 능력은 말이지, 내가 5분 이상 본 사람은 눈을 깜빡이는 순간 잠이 드는 거야. 그럼 잘 자.”
소연은 까르르 웃었다.
미친 듯이 강한 능력, 인간이란 눈을 깜빡이지 않고 살 수 없는 동물이었다. 하나도 그 능력에 당해 자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윤택은 무너지고 있었다. 소연의 능력 때문인지 점점 자세가 무너져 버리고 있었다.
소연은 웃으며 말했다.
“이제 그만 죽어.”
소연이 다가온다. 하지만 윤택은 휘청거리며 반격할 자세를 못 잡고 있었다. 윤택의 바로 앞까지 온 소연은 목검을 들어 내려쳤다.
하지만 윤택은 갑작스럽게 움직이며 소연의 품속으로 들어갔다. 휘청거리다가 쓰러진 것이 아닌 파고 든 것이었다.
소연은 화들짝 놀라며 뒤로 몸을 뺐지만 윤택은 계속 따라왔다. 그리고 단검을 소연의 배에 꽂아 넣었다.
푸욱!
소연은 싸늘한 쇠붙이가 몸속을 쑤시며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이윽고 배의 한부분이 뜨거워졌다.
“난 눈 안 깜빡여.”
윤택의 눈은 항상 뜨고 있다. 2분도 채 못 뜨고 있는 인간의 눈이 아니었다. 윤택은 소연을 발로 차더니 마지막 일격을 가했다. 하지만 소연은 목검을 휘둘러 윤택을 쳐냈다.
윤택은 머리 부분을 얻어맞았지만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하나에게로 달렸다. 묶인 줄은 단검으로 쉽게 끊을 수 있었다.
하나는 아직도 잠에 빠져 있는 지 옆으로 툭 쓰러졌다.
“그거 내거라니까 그러네.”
소연은 어느새 일어나 있었다.
아직 배에는 단검이 꽂혀져 있었다. 소연 역시 그것은 버티기 힘들었는지 약간 휘청하며 말했다.
“어이, 교환자가 만들어지는 법을 아나?”
“운명에서 비켜난 참사?”
“그래, 잘 아네. 저 이하나는 내가 만든 거야. 그러니까 내가 가져야지. 안 그래?”
소연은 히죽거렸다.
“내가 납치하라 시켰고, 내가 그 빌딩을 폭발시켰어. 그리고 폭삭 내려앉게 했지. 그 상황에서 내 친구들이 저 년을 지켰고, 그래서 저 년은 교환자가 되었어. 천재적 두뇌를 가지고 있는 교환자로!”
소연은 깔깔거리며 웃었다. 윤택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자고 있는 하나를 쳐다보았다. 이하나, 어린 천재로 불리는 이 여자는 교환자였다. 과거 이야기를 들을 때 눈치를 챘어야 했다.
소연은 말을 이었다.
“힘들게 만들어서 남 줄 수는 없잖아.”
“그러니까, 고작 교환자를 만들려고 얘 부모도 죽이고, 그 빌딩 안에 있던 사람들도 다 죽인 거네.”
“고작 교환자라니, 말이 너무 심하다. 저 아이의 능력은 타임머신도, 세이트라이트 빔도, 다 만들 수 있다고.”
“그게 고작이지!”
“너였냐?”
윤택과 소연은 화들짝 놀라며 하나를 쳐다보았다. 하나는 어느새 잠에서 깨 소연을 노려보고 있었다. 소연은 이를 악물었다.
“이런, 우리 편은 절대 못되겠군,”
“그래, 너무 떠들었다 미친년아.”
하나는 살기등등한 표정과 함께 욕을 뱉었다.
그 순간 윤택은 화를 못 이기고 소연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소연은 윤택을 무시하고 앉아 있는 하나에게로 달렸다.
윤택은 아차 하고 바로 몸을 돌렸다. 하지만 소연은 이미 목검의 날 부분을 밀어내며 진검으로 바꿨다. 윤택은 급하게 달려갔지만 너무 늦었다.
하나는 피식 웃었다.
그와 동시에 소연은 아래에서 위로 하나를 후려쳤다. 그러자 윤택의 눈앞에, 하나의 몸이 떠올랐다. 윤택은 잠시 굳어 있다가 미친 사람처럼 소연에게 달려들었다.
“야!!!!”
소연은 만족한 표정이었다. 윤택이 덮치자 소연은 그대로 넘어갔다. 윤택은 소연의 얼굴을 수십 번 후려쳤다.
헥헥...
윤택은 지칠 만큼 소연을 때리고 나서야 멈추었다.
윤택은 고개를 돌렸다. 뒤쪽에는 상체와 하체가 나누어진 하나가 있었다. 윤택은 하나의 상체로 달려갔다.
살아 있을 리가 없었다.
하나는 숨을 쉬고 있지 않았다. 이제는 진자 고깃덩이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뭘 못 죽여!!!”
윤택은 억울했다.
하나는 상대가 자신을 못 죽인다며 잘난 척을 해 왔다. 하지만 꼴이 이게 뭔가? 도망치자고 했을 때도 협조적이지 않았다. 윤택에게는 슬픔도 있었지만, 분노도 있었다.
눈물은 나오지 않는다. 이미 눈물샘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하지만 눈물로 슬픔을 표현하지 못하는 만큼 더욱 크게 울부짖었다.
윤택은 하나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담배 한 대를 폈다.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윤택은 그렇게 뒤 돌아서 문을 열었다. 하지만 그 순간 뒤에서 여자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디 가요?”
윤택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분명 상하체가 분리되었던 하나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윤택은 귀신을 본 사람마냥 놀라며 뒷걸음질 치다가 말했다.
“아직 안 죽었었냐? 이창용!”
이창용이 변신 한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하나는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봐요, 저 못 죽여요. 안 죽으니까.”
윤택은 하나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뭐라고?”
“저 교환자에요.”
“그건 알지만... 능력은 그 천재적 두뇌 아니었나?”
“네, 하지만 제가 잃은 건 죽을 수 있는 권리였죠.”
3일간 살아 있었다, 물도, 식량도 없이. 그 어린 아이가. 손이 묶여 있어 자살도 불가능, 혀를 깨무는 것도 불가능했다. 정말 스스로 죽을 권리조차 박탈 당한 채 살아 있던 것이다. 참사의 현장에서 하나를 가져간다, 그리고 그것을 보상해 준다.
하나가 빼앗긴 것은 죽을 수 있는 권리였다.
하나는 정말 기쁜 듯 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근데 정말 필사적이네. 진짜 보호가 임무였나 봐요.”
“당연하지!!”
윤택은 짜증이 나 평소에 하던 존댓말도 잊었다.
“아 그럼 말을 하지! 와, 나 어이가 없어서.”
“스카웃도 임무라고 했죠? 뭐 보디가드가 있는 곳도 나쁘진 않을 거 같은데.”
하나는 장난 섞인 미소를 지었다. 윤택은 바보가 된 기분이 들었다.
“됐어, 오지 마.”
“윤택씨! 지원군입니다!”
타이밍도 참 개 떡 같다. 붉은 머리는 상황이 모두 끝난 뒤 수륙탄 투척 뒤에 굴러 들어오듯 심각하게 들어왔다.
“에, 뭡니까? 끝났습니까?”
윤택은 붉은 머리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그래 끝났다. 저기 저 누워 있는 여자나 챙겨.”
“네! 알겠습니다.”
붉은 머리는 소연을 챙겼고, 윤택은 하나를 뒤로 하고 나갔다. 윤택이 무시를 하자 하나는 민망했는지 윤택에게 달려가 옆구리를 찔렀다.
“왜 그래요? 같이 가 준다니까.”
“아! 오지 마!”
“에이, 그러지 말고. 같이 가준다니까요.”
“아!! 짜증나!!”
윤택의 인생에서 가장 허무한 순간이었다.


1년 뒤,
“진짜 이곳으로 오는 거 맞아?”
“맞아요.”
윤택과 하나는 어느 방에 틀어 박혀 길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위를 오토바이를 탄 남자가 지나가고 있었다. 윤택은 타이밍을 맞추어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도로에 설치 된 폭탄이 쾅하고 터졌다.
“진짜네.”
윤택은 고개를 갸웃한 뒤 말했다.
“이게 다 내가 지리 설명하고 해서 그런 거 알지?”
“네네, 압니다.”
하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팀 해드아이, 윤택과 하나 콤비 팀의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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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uxcross

November 04, 2011
*.232.228.206

재밌었습니다. 만화책 중에 죽음이 두사람을 갈라놓을 때까지였나? 그거랑 비슷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무래도 주인공이 장님이라서 그랬나봅니다. 느낌이 비슷하다는 것이지, 내용이 비슷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작품은 참신하고 좋았습니다. 탐정물+스파이물이라는 느낌이네요. 앞으로도 좋은 작품 기대하겠습니다.
그런데 왜 능배물이라는 소개가 붙었는지 조금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저는 능배물이라고 하면 블리치나 원피스, 혹은 블랙캣같은 작품이 떠오르는데 이거랑은 비슷한 점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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