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이정표

2장 - 세연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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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19 Jul 27,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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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노유

1

 

세연은 가자미눈을 하고 날 흘겨봤다. 시호도 볼에 바람을 넣고 날 쏘아봤다. 맹세컨대 나는 일이 이렇게 흘러갈 줄 알지 못했다. 인로가 갑자기 집에 일이 생겼다고 연락한 것이 오늘 아침이었다. 그렇다고 약속을 깰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덕분에 우리의 모임은 상당히 어정쩡하게 되었다. 원래의 목적도 사라져버리고 시호를 돌봐줄 사람이 없으니 나 혼자 각기 다른 목적으로 온 두 사람을 상대해야 했다. 그렇다면 이건 전적으로 인로 책임인데 왜, 왜 내가 비난을 받고 있는 거지?

 

“인로 오빠가 가니까 이런 데 와주겠다고 한 건데 이게 뭐야?”

 

시호는 애초부터 노는 것이 목적이었는데, 박물관은 녀석이 생각하던 곳이 아니었나보다. 얌전히 따라오겠다고는 했지만 어제부터 내내 그것이 불만이었던 것 같다. 그러다 인로가 안 온다는 소리를 듣고 옳다구나 하고 심통을 부렸다. 인로를 언급하는 건 떼 쓸 구실을 찾는 것뿐이리라.

 

“인로도 안 나올 거였다면 이렇게 만날 이유가 없었지. 차라리 점심시간에 보거나 학교 끝나고 잠깐 보면 되지 뭣하러 놀토에 이런 데까지 나오겠어?”

 

뭐, 세연은 셋이 만날 겸 해서 나오겠다고 한 거니까 나올 목적이 사라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도 이해는 간다. 그래도 그 얘기는 내가 마치 덤 취급 받는 것 같단 말이야.

 

우리는 이촌역에서 만났다. 용산에 있는 국립 중앙 박물관이 인로와 내가 가려고 한 곳이었다. 주말에 박물관에 놀러간다니 남들은 참 고풍스럽고 재미없는 취미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런 인식 때문에 인로 아니면 같이 갈 사람이 없다. 놀더라도 유익하게 놀고자 하는 게 잘못은 아니잖은가. 하지만 두 사람은 그것도 트집 잡았다.

 

“그리고, 박물관은 인로랑 네가 가려던 데잖아. 인로가 빠졌다면 적당히 만날 곳을 조정할 수도 있는 거 아냐?”

 

세연이 말했다.

 

“맞아, 맞아. 우린 박물관에 안 가도 되니까!”

 

시호도 맞장구쳤다.

 

“그렇게도 여자 둘 데리고 갈 데가 없냐?”

 

“여자를 만나봤어야 알지. 언니, 재훈 오빠 여자들한테 인기 없었지?”

 

“인기는 무슨. 여자애들은 얘 이름도 몰랐을걸?”

 

“이런 무대책적인 남자, 인기 없을 타입이야.”

 

나는 두 여자의 무자비한 공세에 입만 벙긋거릴 뿐이었다. 왠지 내 값어치가 부모님께 죄송해질 만큼 떨어지는 것 같다. 그만 좀 봐주라. 칼과도 같은 혀에 내 심장은 갈기갈기 찢겨나갈 것만 같았다.

 

“그럼…… 돌아갈까?”

 

나는 조심스레 말을 꺼내보았다.

 

“안! 돼!”

 

역을 통과하는 KTX같은 속도와 음압으로 동시에 호통이 쏟아졌다.

 

“여기까지 불러놓고 돌아가겠나? 정말 못 봐주겠네. 수준 이하야.”

 

세연은 연속해서 나의 가슴에 칼집을 낸다.

 

“그럼, 어…… 용산역에라도 갈래? 뭐, 전자상가라도…….”

 

“그런데 가서 뭐하게? 여기까지 왔는데 차라리 박물관에 가는 게 낫지.”

 

나는 시호 쪽을 보았다. 시호는 세연을 올려봤다. 서로 동의를 구하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더니 둘은 홱 돌아서 걸어가 버렸다. 뭐야, 결정된 거야? 속으로 물어보며 나는 그들 뒤를 따랐다. 그들은 개찰구를 나섰다. 나는 우물거리며 뒤처지다가 같이 가, 하고 힘없이 외친 뒤 뒤를 따라잡았다. 어쨌든 다행이다. 이대로 헤어졌다면 그야말로 최악이었을 것이다.

 

둘은 오늘 처음 보는데도 금방 친해진 듯했다. 둘은 손을 잡고 걸었다. 그들은 맞장구치고 끄덕이고 깔깔대며 나를 일부러 따돌리기라도 하듯이 걸어 나갔다. 물론 주 화제는 내 흉이었다. 나는 세연이 나에게, 나에 대해 스스럼없이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챘다. 관계가 서먹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나뿐이었던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면, 세연은 일부러 그러는 것일 것이다. 일부러 예전과 다름없이 장난스레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연은 내가 편히 말할 수 있도록 나를 배려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쩌면 세연은 조금 다른 의미에서 화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기껏 기회가 생기고 이야기를 들어줄 준비까지 되었는데 내가 어리벙벙해 있으니 말이다.

 

“또 약속장소를 이렇게 잡는 놈이 어딨냐? 가장 빨리 만날 수 있는 근처 역 같은데다 잡아야지.”

 

세연은 뒤따르는 나에게 들리도록 말했다.

 

“미안해요…….”

 

어쨌든 세연은 기분은 그리 나쁘지 않아 보인다. 시호도 언제 뾰로통해 있었는지 모를 만큼 활기차게 걸었다. 하늘이 텅 빈 게 소풍 온 기분이었다. 마침 도시락까지 싸왔다. 세연 것까지 넉넉하게 담아 왔는데 마침 세연은 빈손이었다. 나는 점수를 딸 기회라고 생각했다. 이야기가 잘 되면 혹시 아는가? 예상치 못한 진전이 있을지.

 

박물관 정문에서 본관 건물까지도 한참 걸어야 했다. 매표소는 그 중간에 있었는데 우리는 일단 매표소를 지나쳐서 광장까지 가보았다. 왜 매표소가 건물에 외따로 떨어져 있는지는 곧 알 수 있었다. 국립 중앙 박물관에는 처음 와본다. 사실 학교에서 단체로 가는 것 말고 별도로 박물관을 찾은 것도 처음이었다. 그래서 박물관하면 으레 한산하고 고요한 곳이겠거니 하고 생각했었다. 상황은 생각하던 것과 정 반대였다. 일단 박물관부터가 상상을 초월하여 컸다. 건물 크기만 우리 학교의 몇 배는 돼 보였고 입구 앞 공터는 운동장만했다. 그리고 그 안에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기념품점이나 간이 편의점 따위가 늘어져 있고 사람들은 그 앞을 시장 오가듯 서성거렸다. 그곳은 박물관이라기보다는 콘서트장 입구 같았다. 사람들의 모습은 공연장에 입장하기 전의 들뜬 모습 딱 그대로였다. 또 그 넓이가 쉬이 짐작되지 않는 부지에는 녹음이 우거져 있고 커다란 연못도 있어 동네 사람들이라면 박물관이 목적이 아니더라도 나들이삼아 자주 찾을 것 같았다.

 

우리는 매표소로 돌아갔다. 매표소의 줄은 뱀처럼 길었다. 자세히 보니 줄이 두 종류였다. 하나는 일반 전시관이고 하나는 기획 특별전이었다. 입구가 아예 다른 듯했다. 기획 전시관에서는 이집트 문명전을 열고 있었다. 이집트 문명전의 줄은 매표소에서도 길었지만 입장하기 위한 줄도 매표소 근처까지 늘어져 있었다. 그렇다면 사람이 안에 가득 차서 그 사람들이 나올 때까지 바깥사람들이 기다리는 것인가? 기가 질릴 정도의 방문객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언제부터 이렇게 문화에 관심을 뒀는지 모르겠다.

 

“나 저기 갈래!”

 

시호는 투탕가맨 관이 인쇄된 커다란 플랜카드를 가리키며 말했다.

 

“음, 난 일반 전시관을 보러 온 건데.”

 

일반 전시관에는 국내 유물이 있다고 들었다. 국내 최대 규모라고 한다. 인로와 나는 거기서 교과서에 나오는 유물들을 확인하려 했다. 어차피 처음의 목적이 와해된 이상 거길 고집할 필요는 없었다. 흔하지 않은 이집트전이니 사람이 많더라도 한 번쯤 가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거긴 가격이 비싸네. 대인 만원.”

 

세연의 말에 나는 곧바로 투탕카맨에게서 시선을 뗐다. 나는 시호 입장료까지 내줘야 한다. 소인은 8천원이지만 둘 다 치면 만만지 않은 금액이다.

 

“흐음, 저긴 사람이 너무 많은 것 같아. 조금 한가한 일반 관으로 가는 게 어떨까?”

 

세연은 상관없다고 했다. 하지만 시호는 한 번 투정을 부리고야 만다.

 

“싫어. 이집트 보고 싶어. 거긴 미라도 있을 거 아냐.”

 

“신토불이라고, 우리 유물부터 먼저 보는 게 좋지 않겠어? 시호도 중학교 가면 국사 배울 건데 미리 봐두면 많이 도움될 거야.”

 

“신토불이는 돈 쓰기 아까울 때 쓰는 말이 아닐 텐데?”

 

세연이 말했다. 협조 좀 해주면 어디 덧나냐.

 

“이집트 볼래. 피라미드 보고 싶어.”

 

시호는 계속 보챘다. 시호야. 아무리 큰 박물관이라도 피라미드는 안 들어가. 나는 말했다.

 

“알았어. 솔직히 저긴 너무 비싸. 내가 생각한 지출 범위 밖이야. 나중에 오빠가 돈 벌면 진짜 이집트 데려가 줄게.”

 

그런 사탕발림은 먹히지 않고 딱 자기 떼만 쓸 줄 아는 시기가 바로 녀석 또래인 듯하다. 시호는 내 손을 붙들고 흔들며 계속 노래 불렀다.

 

“안 데려가주면 혼자라도 가버릴 거다!”

 

세연이 나섰다. 세연은 허리를 숙여 시호에게 얼굴을 가까이 대고는 말했다.

 

“시호야. 언니도 일반 전시관 가고 싶어. 거기도 재밌는 거 많다. 거기엔 3층 높이만한 탑도 있대.”

 

시호는 세연을 마주 보며 말했다.

 

“3층짜리 탑?”

 

“응. 계단 올라가서 봐야 되는 큰 탑.”

 

관심이 가는 듯 시호는 입을 동그랗게 모으고 세연을 바라보았다.

 

“나 그럼 거기 갈래.”

 

시호는 고개를 크게 위아래로 흔들며 말했다. 왜 세연의 말은 그렇게 금방 듣는 거냐?

 

“이게 협상 기술이지.”

 

입을 벌리고 서있는 나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찌르며 세연이 말했다.

 

세연 덕분에 우리는 줄을 설 수 있었다. 일반 전시실은 한 사람당 천원이었다. 나는 시호 표까지 2천원을 꺼냈다. 줄은 특별 전시관 줄보다는 훨씬 짧았다. 그런데 놀토에는 청소년 무료입장이라고 했다. 나는 입장권 세 장을 받고 돈은 집어넣었다.

 

우리는 입장하기 전에 기념품점을 돌아보았다. 엽서나 유물 관련 완구나 음료수 등을 팔고 있었다. 별로 볼만한 건 없었는데 나는 그중 무언가를 발견하고 한 가게로 들어갔다. 세연과 시호는 밖에 서서 기다렸다.

 

“그게 뭐야?”

 

세연이 물었다. 나는 사온 물건을 보여주었다. 비닐 끈이 달린 목걸이형 이름표였다.

 

“이름표. 사람이 많으니 주소랑 전화번호랑 이름이랑 적어서 시호가 차고 다니는 거야.”

 

“뭐어? 나 그런 거 싫어. 유치원생도 아니고.”

 

시호는 말했다.

 

“나도 학교 교복에 이름 달고 다녀. 길 잃어버리면 어쩔 거야. 이모 집 찾아올 수 있어?”

 

“전화하면 되지.”

 

“전화번호는 알아?”

 

“가르쳐줘.”

 

나는 번호를 말해주고 자, 외워봐. 하고 말했다.

 

“공이 오오오에…….”

 

시호는 우물거렸다.

 

“못 외우겠지?”

 

“치, 적어줘.”

 

“적는 김에 여기다 적는 게 낫지. 주소까지.”

 

나는 목걸이를 흔들었다. 시호는 마지못해 하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호는 뭘 치렁치렁 달고 다니는 걸 싫어하는 듯했다.

 

“목걸이 싫어. 목에 뭐가 걸린 것 같단 말야.”

 

“목에 뭐가 걸렸으니까 목걸이지.”

 

나는 목걸이에서 종이를 빼내 이름과 우리 집 주소와 전화번호를 적었다. 좋아, 이제 녀석을 잃어버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한 가지를 더 덧붙였다.

 

“집합 장소를 정해두자. 서로를 놓치고 연락이 안 된다면 일단 정문에서 모이도록.”

 

정말로 알았는지 어쨌는지, 시호는 큰 소리로 대답하고는 얼른 들어가자고 보챘다. 우리는 드디어 박물관 안으로 입장했다.

 

 

 

“와아! 탑이다!”

 

시호는 들어서자마자 무언가를 보고 달려갔다.

 

“소리 지르지 마! 뛰지 마!”

 

나는 박물관 안이라 목소리를 높이지도 못하고 새는 소리로 외쳤다. 먹잇감을 발견한 녀석의 귀엔 들리지 않는 듯했다. 시호는 실례되게도 발소리를 내며 탑까지 달려 나갔고 세연과 나는 천천히 뒤따랐다. 재밌는 건 가장 마지막에 맛봐야 한다는 인생의 지혜를 이 녀석은 알지 못한다.

 

“이게 탑이야? 별로 안 큰데?”

 

시호는 사람 키보다 큰 석등 앞에 가 멈췄다. 나는 녀석의 어깨를 밀어 조금 옆으로 옮겨주었다. 녀석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것처럼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더 멀리 복도 끝에 진짜 탑이 보였다. 녀석은 다시 달려 나갔다.

 

“뛰지 말라니까!”

 

탑은 정말로 3층 높이까지 솟아 있었다. 이렇게 큰 탑이 있었는지는 들어보지도 못했다. 탑이라고는 다보탑 정도를 10원짜리 동전에서 본 것이 전부였으니까 말이다. 경천사 10층 석탑이라는데 실제 탑을 해체하여 옮겨왔다고 한다. 시호는 연신 감탄사를 내뱉으며 탑 주위를 빙빙 돌았고 세연은 가만히 서서 탑을 감상했다. 시호에게는 적잖은 충격인 듯했다.

 

우리는 시호 때문에 몇 분을 더 탑 앞에 못 박혀 있었다. 시호는 목이 꺾어져라 탑을 올려다보다가 말도 없이 옆의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나는 황급히 녀석을 뒤쫓았다. 시호는 3층 난간에 매달려 이번에는 탑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행여 녀석이 탑을 향해 목을 빼고 있다가 기우뚱 난간을 넘어가 버리지 않을까 어깨를 붙잡고 있었다.

 

시호는 신대륙이라도 발견한 것 같은 얼굴을 하고 말했다.

 

“이거 멋있어! 학교 가서 본 거 자랑할 거다!”

 

“그래, 자랑해라. 근데 딴것도 보지 않을래? 되도록 많이 보고 많이 자랑해야지.”

 

“응. 이제 작은 탑 보러 갈래.”

 

탑은 더 없으리라 본다만. 나는 간신히 시호의 발을 떼어낼 수 있었다. 세연은 계속 1층에 서 있었다. 우리는 1층으로 내려갔다.

 

탑에서 가장 가까운 전시실은 발해실이었다. 건물이 꽤나 넓은 통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기는 번거롭다. 시호는 전시실 안에서도 뛰어다녔다. 혼자서 전시실 안을 맴돌다가 눈에 들어오는 유물이 있으면 거기다 닻을 내리고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달리 감독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녀석은 걱정처럼 떠들지는 않았고 혼자서 사라져버리지도 않았다.

 

세연과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전시실을 돌았다. 가장 방해될 것 같았던 시호가 제 볼일 찾아다니느라 바쁘니까 오히려 말할 기회가 잡히질 않는다. 괜히 열심히 유물을 감상하는 척하고 전시실에서 전시실로 앞서 가는 시호를 핑계 삼아 바삐 돌아다닐 뿐이었다. 나는 눈치를 보다 조심스레 말을 꺼내 보았다.

 

“저, 세연아.”

 

세연은 응? 하며 돌아본다. 갑자기 머릿속이 텅 빈 것처럼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는다. 허겁지겁 되는 대로 주워 내뱉었다.

 

“앗, 저기 바퀴벌레가!”

 

“박물관에 바퀴벌레가 어디 있어?”

 

이건 농담거리도 안 되는 것 같다.

 

“발 조심해! 밑에 개똥이!”

 

더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세연은 나를 흘겨보며 걸어 나갔다. 대화 한번 시작하기가 이렇게 힘들 줄이야.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음 지으려 하는데 나도 모르게 이가 악물어진다.

 

우리는 가야관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시호와 세연은 투구가 진열된 곳에 나란히 서서 진열장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날개 모양 장식이 달린 투구는 우리 땅에서 난 것임이 분명한데도 이국적으로 보인다. 진열장 유리로 입을 동그랗게 만 시호의 얼굴이 비춰 보였다. 시호는 뭔갈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또다시 어딘가로 쪼르르 달려가 버렸다. 세연은 그 자리에 계속 있었다.

 

세연은 이미 다 녹슬어 장식용으로 걸어놓기도 뭣한 투구가 썩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오른손으로 턱을 괴고 왼손으로는 오른팔을 받치듯 팔꿈치 밑에 댄 모습이 전시실에 설치된 조형물이라 해도 좋을 듯했다. 작품명은 ‘감상하는 소녀.’ 세연이라면 진열장 안에 서있어도 제법 어울릴 것이다. 고대인이 섬기던 여신의 미라 정도면…… 아니, 내가 지금 무슨 바보 같은 생각을 하는 거지? 먼저 정신을 차린 세연이 내 얼굴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괜히 시선을 피했다.

 

“시호는 어디 갔지?”

 

나는 딴청을 부리며 물었다.

 

“옆방으로 앞서간 것 같은데, 뭔 생각을 한 거야? 멍하니 서가지고.”

 

“아무것도 아냐. 그냥 잡생각. 어, 근데 말이야.”

 

“응.”

 

나는 하려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꺼내려 했다.

 

“그날 말야…….”

 

“응. 그날?”

 

자연스럽게. 자연스럽게.

 

“어…… 광개토왕이 신라를 도와 왜구를 정벌한 게 몇 년도지?”

 

“400년.”

 

“아.”

 

이걸 물어보려 한 것이 아닌데. 말이 또 헛 나와 버렸다. 우리는 시호의 뒤를 따라 다음 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뭐, 기회는 아직 많이 남았을 것이다.

 

시호는 전신 무장을 한 마네킹 앞에 서 있었다. 가야 갑옷 복원품 이라고 한다. 작은 조각조각을 끈으로 하나하나 묶어 조립한 갑옷이었다. ‘만지지 마시오’라고 코앞에 떡하니 적혀 있는데도 시호는 손을 대보고야 만다. 모조품이고 굳이 바깥에 진열해 놓은 걸 보니 어린애가 잠시 손댄다고 크게 문제될 것 같지는 않지만 나는 일단 시호의 손을 제지하고 보았다.

 

“나 이거 입어볼래!”

 

손을 봉쇄당한 녀석은 말했다. 이 녀석, 아무래도 일부러 이러는 것 같다. 나는 간단히 말했다.

 

“안 돼.”

 

“피.”

 

녀석은 간단히도 단념하고 다른 진열창 앞으로 달려갔다.

 

“그래도 재밌어 하는 것 같네.”

 

세연이 말했다.

 

“응. 못 보던 걸 보니까 그렇겠지. 넌, 어, 지루하진 않아?”

 

“박물관이 그럼 짜릿하고 흥미진진하겠냐?”

 

“아니, 뭐. 열심히 구경하길래.”

 

“기왕 왔으니 다리품 값은 해야 할 거 아냐. 이런 데서 무슨 이야기를 한다고…….”

 

세연은 뒷부분을 흘리듯이 말했다.

 

“응? 뭐라고?”

 

나는 되물었지만 세연은 앞서 걸어가며 말했다.

 

“시호 또 사라진다. 빨리 가자.”

 

나는 으응, 하고 대답하고는 세연을 따라 다음 방으로 갔다.

 

영상실이 있었다. 고대인의 생활을 짤막한 3D영상으로 만들어 상영하는 곳이었다. 시호는 스크린 앞 의자에 앉아 있었다. 의자는 몇 안 되었고 다 차 있었다. 세연과 나는 옆방에 가 있기로 했다. 시호에게는 다 보고 오라고 일러두었다.

 

“너, 하려던 이야기가 뭐야?”

 

세연은 통로를 걸으며 말했다. 그 말에 흠칫, 등허리가 떨려 왔다.

 

“할 말 있어서 만나자고 해놓고, 계속 내 눈치만 보고 질질 끄는 거 보는 내가 다 답답하다. 말해 봐. 뭔 얘길 하고 싶은 거야?”

 

그렇게 나오니 나는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무슨 이야기를 할지는 어제, 그제부터 생각해 왔었다. 세연이 본 내 모습을 하나하나 설명해야 할지, 아니면 그날 이후의 행동을 해명해야 할지, 또 변명 논조로 해야 할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해야 할지 생각이 실타래처럼 섞이고 꼬여 무엇부터 풀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무엇보다 말을 꺼내기가 어려운 게, 그 말을 시작하려면 내가 고백했던 그날을 언급해야 한다. 이미 퇴짜 맞은 고백을 당사자 앞에서 다시 꺼내드는 것은 생각만 해도 무안하고 얼굴이 화끈거리는 일이다.

 

“말 안 할 거야? 무슨 일이냐니까?”

 

막 입을 열려는 차, 시호가 나를 부르며 달려왔다. 영상실에서는 1분도 앉아있지 않았던 모양이다. 녀석은 삼국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투구와 갑옷을 입고 있었다. 나는 숨을 집어 삼킬 듯 놀라 말했다.

 

“야, 그걸 입고 나오면 어떡해!”

 

“우히히힛. 나 멋있지?”

 

녀석은 보란 듯 한 바퀴 돌아 내 앞에 섰다.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머릿속에서는 관리인에게 큰 호통을 받고 급기야는 부모님에게까지 연락이 가 두고두고 야단맞는 광경이 저절로 펼쳐졌다. 누가 보면 어떡하나, 빨리 돌려놓아야 하는데, 나는 녀석을 붙잡으려 했다. 그런데 갑옷이 이상했다. 아까 본 갑옷은 작은 조각들이 이어진 갑옷이었는데 시호가 입고 있는 건 널찍한 판으로 돼 있었다. 게다가 몸에도 딱 맞았다.

 

“저기서 입어보라고 한 거다.”

 

알고 보니 고대 복식을 체험하는 코너에서 입고 온 것이었다. 난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그것도 역시 입고 돌아다니면 안 되잖아!

나는 시호를 체험관으로 연행해 투구와 갑옷을 돌려줬다. 내가 고개 숙여 사과하고 주의까지 단단히 받은 건 물론이다. 시호는 꿀밤을 맞고 단독 행동 금지 형을 받았다. 다시 관람을 시작하며 세연에게 눈짓했다. 할 수 없다는 뜻이었는데 적절히 알아들었는지 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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