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이정표

2장 - 세연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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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22 Jul 27,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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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노유

2

 

선사실까지 순회를 마치고 나니 시호는 배고프다고 칭얼댔다. 한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발해실에서 선사실까지 일층의 반을 돌아보았다. 전시실은 3층까지 있으니 전체의 6분의 1을 돈 셈이었다. 적어도 한 층은 보고 끝내고 싶었지만 시호 녀석 눈치가 슬슬 지루해 하는 것 같았다.

 

“그럼 점심이나 먹을까? 더 구경할지는 먹고 나서 생각해 보고.”

 

처음 통로를 가로질러 끝까지 갔고 전시실을 따라 거슬러 올라왔으니 우리가 있는 곳은 입구 앞이었다.

 

“그러자. 근데 여기 식당이 있나?”

 

세연이 말했다. 박물관으로 들어오면서 세연도 봤겠지만, 이 일대에는 꼬치 따위를 파는 포장마차 빼고는 달리 먹을 것이 없다. 건물 안에 식당은 있었던 것 같긴 한데, 나는 굳이 말을 꺼내지 않았다.

 

“아, 내가 도시락을 싸왔어. 네 것까지.”

 

“내 것까지?”

 

나는 묵직한 사이드팩을 두드렸다. 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연못가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좀 전에도 느꼈지만 소풍 나오기에 너무나 이상적인 날씨였다. 밖에 나와 앉아있으려니 바람도 선선하게 불었다. 또 나무들 사이로 으리으리한 현대식 건물과 호수가 운치 있게 눈에 들어오는 이 공원도 아주 좋았다. 나는 귀중한 토요일 잠까지 반납해 가며 만든 도시락을 펼쳤다. 김밥에 샌드위치에 과일, 코코아까지 보기만 해도 속이 다 뿌듯해지는 그야말로 완벽한 소풍용 도시락의 모범이라 할 수 있는 도시락이다. 세연 것까지 쳐도 조금 많은 듯한 양이지만 뭐 어떠랴. 세연은 제법인데, 하고 오늘 처음으로 내 칭찬을 해주었다. 가슴 속으로 흐르는 기쁨의 눈물을 닦으며 식사 개시를 선언하려는 차, 시호의 손이 눈앞을 가로지른다. 녀석은 신호도 보내지 않고 정신없이 김밥을 소멸시키기 시작했다.

 

“야. 아직 상 차린 감동이 채 가시지 않았는데! 조금은 감상 하고 먹으라고.”

 

세연은 샌드위치를 집어 들며 말했다.

 

“어차피 먹을 건데 감상은 무슨.”

 

요리보다 데코레이션에 더 신경을 썼다는 사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을 것이다. 장식이 흐트러지지 않게 걸을 때도 조심조심 걸었건만.

 

“이거 아침에 오빠랑 내가 만든 거다!”

 

시호는 다람쥐처럼 입 안 가득 음식물을 물고 말했다.

 

“그래? 요리까지 할 줄 알고 시호도 대단하네.”

 

아니다. 만든 사람은 100% 나이고 시호는 옆에서 재료나 쏟는 등 방해하기만 했다. 하지만 시호는 뻔뻔하게도 남의 공을 가로채간다.

 

“응! 시호가 만들었어. 오빤 시호 없으면 일어나지도 못한다니까.”

 

그래도 양심은 있는지 화제 바꾸기로 은근슬쩍 넘어가 버린다.

 

“오빠가 돼서 동생한테 깨워 달라고까지 하냐?”

 

세연은 말했다.

 

“맞아. 내가 없을 땐 만날 지각할거야.”

 

“어쩐지 3월 내내 등굣길에서 못 마주치더라. 요샌 시호 와서 일찍 일어난 거구나.”

 

모함이다. 이건 음흉하고 더러운 모함이다. 나는 어느 부분에서 항변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나를 헐뜯는 소리를 듣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오빠가 얼마나 지저분한지 알아? 어떨 땐 교복도 안 갈아입고 그냥 잔다.”

 

“그래? 어쩐지 교복이 늘 구겨져 있더라. 그 옷 그대로 학교 온다는 거 아냐. 교복이라고 다 똑같은 줄 아나봐. 오빠는 옷도 잘 못 입지? 뭐, 오늘 입은 것만 해도.”

 

“응. 교복 안 입을 때도 만날 똑같은 옷만 입어. 옷 입을 줄 모르는 것 같아.”

 

나는 한숨을 내쉬고 묵묵히 김밥을 입으로 집어넣었다. 나는 힘겹게 웃음 지었다.

 

“그만, 제발 좀 살려주라…….”

 

얘네, 아무래도 재미 들린 것 같다. 여자애가 둘이 모이면 도저히 대화에 끼어들 수가 없다. 생각해보면 나는 중학교 때에도 여자애들에게 둘러싸이면 꼼짝도 하지 못했던 것 같다. 딱히 여자들과 친하게 지낸 것은 아닌데 귀찮은 일이나 심부름 같은 것이 있으면 여자애들은 내가 거절 못하는 것을 알고 나를 부려먹곤 했다. 거절을 못한 것은 내 심성이 착해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그냥 여자애들을 편히 대하기 어려웠을 뿐이다. 다만 세연은 그중에서도 예외였다. 이상하게 세연과는 말을 많이 했었다. 좋아해서 그럴 수 있던 것은 아닌 듯했다. 오히려 일반적 여자애를 좋아했다면 더 얼어붙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또 세연 이외에도 대화가 잘 됐던 여자애가 있었던 것을 보아도 그래서 그런 것은 아님은 알 수 있다.

 

그런 세연을 내가 어려워하기 시작한 것은 아무래도 그날 이후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오늘 자리를 마련했다. 그런데 좀처럼 기회가 생기질 않는다.

 

“그리고 말이지. 네 오빤 말야. 맺고 끊는 것이 분명하지 않다니깐.”

 

잠시 딴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험담은 이어지고 있었다.

 

“뭔갈 마음먹었으면 확실하게 해치우든가 해야지 늘상 우물거리고 멍청하게 있는단 말이야.”

 

세연은 시호와 이야기한다는 점을 강조하기라도 하듯 시호를 정면으로 쳐다보고 말하고 있었다.

 

“네 오빤 그런 종류의 사람이야. 어물쩍대다가 기회 다 놓쳐버리고 후회하는. 보통 그런 사람은 다음엔 안 그래야지 하면서도 쉽게 못 고친다니까.”

 

그 말은 마치 나에게 하는 말인 듯했다. 아니, 확실히 그랬다. 그뿐만 아니라 앞선 모든 험담도 그랬다. 이렇게 내 아둔함을 뼈저리게 느낀 적이 없었다. 세연은 말하면서 나와 눈을 마주친 적이 없었다. 생각해보면 꽤나 흔한 수법이 아닌가. 내가 답답하게 할 얘기를 제대로 못하고 있는 것을 세연은 질책하고 있던 것이다. 물론 상대해주는 시호는 아직 이런 문학적인 뒷담화를 모르겠지만.

기회고 뭐고 없다. 매순간이 그저 말할 기회였던 것이다. 그저 나는 그 때 그 일 말인데, 하고 말을 꺼내면 될 따름이다. 말을 막고 있던 것은 나 자신이었다.

 

그래서 나는 바로 세연에게 말을 하기로 했다.

 

“세연아, 있지.”

 

하고 나는 말을 꺼냈다. 마침 둘의 대화도 소강상태인 듯했다.

 

그때, 어디선가 비명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일제히 소리가 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니, 그것은 비명이라기보다는 자지러지는 환호성이었다. 사람들이 어느 한 곳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내가 가볼게!”

 

시호가 쪼르르 달려갔다. 아주 좋은 타이밍이다. 이렇게 적절히 김이 샐 수가 없다. 난 한숨을 내쉬며 상황을 지켜보았다. 여자들의 비명은 몇 차례나 더 들려왔다. 자세한 광경은 보이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큰 이벤트를 열거나 유명인이 나타난 듯했다.

 

시호는 곧바로 자리로 돌아왔다. 별일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세연이 무슨 일이었냐고 시호에게 물었다.

 

“이승기 닮은 사람이 있었대. 근데 아니었다나봐.”

 

정말 아무 일도 아니었다. 뭔 특별한 게 있다고 연예인이 떴다 하면 그리도 난리를 피우는지 원. 세연도 별 관심이 없던 듯 그래? 하고 말았다.

 

“난 또, 내한한 노엘 갤러거라도 온 줄 알았네. 뭐, 사람들이 알아볼 리는 없겠지만.”

 

세연은 뭔가 내가 아는 이름을 언급했다. 나는 별 뜻 없이 말했다.

 

“갤러거? 그거 우리 개 이름인데.”

 

그러자 세연은 눈을 치켜떴다. 눈에서 빔이라도 나오는 양 나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그게 왜 네 개 이름이야?”

 

“응? 그냥, 내가 지은 건 아닌데…….”

 

“노엘 갤러거가 왜 너네 개 이름이냐고.”

 

세연은 추궁하듯 말했다.

 

“그렇게 지어졌으니까 그렇겠지. 개 이름에 달리 뭔 이유가 있을 리가.”

 

“오아시스가 한국 밖에선 얼마나 거물인지 알아? 한국 사람들이 우물 안 개구리인 거라서 외국 음악을 잘 모르는 거라고.”

 

“아니, 그게, 걘 개라니까.”

 

나는 답답해져서 말했다. 하지만 동어 반복밖에는 나오질 않는다.

 

“갤러거가 왜 개야!”

 

세연은 정말로 화난 듯 소리 질렀다. 문맥상 오해가 있는 듯하다. 그러니까, 갤러거는 진짜 우리 집 알레스카 말라뮤트 종 개의 이름이다. 나는 다시 조심스레 말했다.

 

“갤러거는 우리 집 개인데, 그러니까 헥헥거리고 짖고…….”

 

“갤러거가 어딜 봐서 헥헥거린다고 그래? 아직 쌩쌩하거든?”

 

“아니, 개라니깐…….”

 

정말 울고 싶은 지경이다. 개 이름이 외국 가수 이름과 우연히 겹친 걸 난들 어쩌라고! 아니, 이름의 기원을 생각해보면 어쩌면 우연은 아닌지도 모르겠다.

 

세연은 갑자기 표정이 굳어지더니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입을 열었다.

 

“너, 개 키우는데 그 개 이름이 갤러거란 소리야?”

 

응, 응! 나는 헤드벵잉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세연은 시선을 돌리더니 부르르 떠는 듯했다. 고개를 푹 숙인 것이 안색이 안 좋아 보여 들여다보자니, 샌드위치가 내 얼굴로 날아왔다.

 

“그런 건 진작 말해야지!”

 

세연은 소리쳤다.

 

“처음부터 말했잖아. 우리 집 개 이름이라고.”

 

“누가 이름을 그렇게 지으래! 개한테 멋있는 사람 이름 붙이는 게 어딨어?”

 

안 멋있는 사람 이름은 붙여도 된다는 뜻인가?

 

“말했잖아. 내가 안 붙였다고.”

 

나는 눈물처럼 흘러내리는 마요네즈를 닦으며 말했다.

 

잠시 후 조금 진정된 세연은 헛기침을 하더니 물었다.

 

“개 이름은 왜 그렇게 지은거야?”

 

“이름은 인로가 지었는데…….”

 

“인로가?”

 

“응. 아는 사람이 요크셔테리어 하나를 맡겨뒀었는데, 돌려줄 때 그 사람이 개 한 마리를 키우지 않겠냐고 했고 그래서 받아왔어. 인로가 그때 붙인 거야. 요크셔를 기르는 집에서 왔으니 이름은 갤러거로 하자고. 난 지금까지 갤러거가 무슨 뜻인지도 몰랐어.”

 

내 이야기를 들은 세연은 말했다.

 

“갤러거는 영국 밴드 오아시스의 두 형제 이름이야. 형이 노엘, 동생이 리암 갤러거. 영국 밴드니까 바로 떠오른 이름 붙였나보네.”

영국이라. 영국에 요크셔라는 지방이 있었던 것 같다. 갤러거라는 이름은 어감이 좋아서 나름 마음에 들어 했었지만 생각해보니 너무 성의 없는 이름이 듯했다. 차우차우 키우는 집에서 왔다고 이름을 마오쩌둥이라고 짓는 것과 다름없잖은가.

 

“그 요크셔테리어는 이름이 톰 아니었을까?”

 

세연은 말했다.

 

“어? 어떻게 알았어?”

 

그 요크셔테리어의 이름은 정말 톰이었다.

 

“뻔하잖아. 요크셔니까 톰. 톰 요크에서 따온 거잖아. 그래서 네 개 이름을 뮤지션 이름으로 붙인 거고. 인로는 충분히 그럴만 해.”

 

“톰 요크는 누구야? 마찬가지로 영국 가수?”

 

“라디오헤드 보컬.”

 

그 이름은 나도 들어봤다. 듣고 보니 나름 일리 있는 이름인 것 같다.

 

“아, 크립 부른?”

 

“넌 크립밖에 모르지?”

 

세연은 그것도 맞췄다. 난 외국 음악은 거의 모른다.

 

그나저나 세연도 그렇고 인로도 그렇고 음악에 관심 있을 줄은 몰랐다. 세연이야 그런 데 관심 있으니 밴드부에 들었기도 했겠지만.

 

“어쨌든, 뭐, 오해해서 미안.”

 

세연은 점잖게 말했다. 시호는 뭐가 그리 재밌는지 우히히 하고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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