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이정표

2장 - 세연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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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33 Jul 27,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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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노유

4

 

난 호흡을 포기하면서까지 달렸건만, 세연과 시호는 솜사탕을 뜯으며 여유롭게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둘을 들이 받을 것처럼 치달리다가 가까스로 그 앞에서 멈춰설 수 있었다. 나는 바닥에 주저앉고야 말았다.

 

“오빠! 누가 나 잃어버리래! 그렇게 부주의해서야 어디 동생 돌보겠어?”

 

시호는 솜사탕을 지휘봉처럼 휘두르며 말했다. 나는 숨이 차서 대꾸도 하지 못하고 손가락으로 시호만 가리킬 뿐이었다.

 

“아무튼 오빠가 돼서 동생보다 칠칠치 못하니…….”

 

세연은 솜사탕을 뜯으며 말했다.

 

“야……. 가장 가슴 졸인 건 나라고.”

 

다리에 힘이 풀렸다. 긴장하면 나도 모르게 다리가 굳어진다. 그것이 풀리면 곧바로 드러눕고 싶을 만큼 나른해진다.

 

“어련하겠어. 지금도 얼굴이 심슨 마냥 노래져 있는데.”

 

세연이 말하자 나는 얼굴을 더듬어 보았다.

 

“만진다고 뭘 아냐? 그 얼빠진 표정이나 어떻게 해봐. 시호는 찾았어도 네 정신머리는 아직 가출 중인 것 같다.”

 

시호는 킥킥대며 웃었다. 방금 전까지 미아였던 주제에.

 

어쨌든 다행이다. 어떻게 됐든 시호를 찾지 못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렇게 순조로이 찾을 수 있던 건 행운이라고 할 수 있었다. 사실 정문에서 만나자고 한 말은 별 생각 없이 순간적으로 떠올린 것이었다. 그래서 특별히 염두에 두고 있지도 않았던 것이다. 시호가 그것을 기억해준 것이 다행일 따름이다. 이 일에서 교훈을 찾자면 ‘내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다.’ 정도?

 

“그럼 어떡할래?”

 

세연은 말했다.

 

“뭘?”

 

“계속 구경 할 거야? 지금 다시 들어가기도 그렇잖아. 너도 제정신 아니고 또 시호도 지루해 하는 것 같고.”

 

나는 박물관 쪽을 돌아보았다. 피곤해서 그런지 건물이 아득하게 높게 느껴진다. 미처 다 못 본 부분에 대한 미련은 잊어버린 지 오래다. 시호는 집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그럼 오늘은 돌아가자. 난, 뭐, 원래 오기로 한 사람과 나중에 다시 오지.”

 

바로 결정. 돌아가기에는 조금 이르지 않나 싶지만 벌써 오늘 분의 체력은 다 써버린 것 같다. 우리는 정문을 나섰다.

 

돌아가는 광경도 들어올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세연과 시호는 손을 잡고 앞장서 걸었고 나는 뒤따랐다. 둘은 꼭 친자매 같았다. 세연에게 그대로 손잡고 데려가 달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이제는 시호 녀석 때문에 골머리 앓고 싶지 않다. 시호는 화요일이면 내려가지만, 내일이 고비이다. 이제까지는 야자라고 피해 있을 수 있었지만 일요일은 어떻게 버티란 말인가.

 

한숨을 내쉬니 바람이 불어왔다. 우리보다 먼저 도착했던 열차가 떠나는 소리가 들렸다. 전철역은 박물관보다 한적했다. 우리는 볼록 거울이 보이는 플랫폼 끄트머리로 갔다. 지상의 전철역 플랫폼은 사실 서울 구경을 할 수 있는 숨겨진 명소이다. 돌아다니는 동안은 아무래도 풍경을 여유롭게 보지 못한다. 서서 전철을 기다리는 동안은, 사실 별 볼 건 없지만 도시의 한 면을 차분히 구경할 수 있는 것이다. 이촌역에서는 서울 타워가 보인다. 시호는 어딜 보는진 몰라도 멀찍이 시선을 던져놓고 있었다.

 

잠시 후 열차가 들어왔다. 시호는 빈자리를 노려 달려 들어갔다. 나는 의기양양하게 자리를 차지한 시호의 무릎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갈아탈 무렵에는 나와 세연도 잠시 앉을 수 있었다.

 

갈아타고 나서는 셋이 나란히 앉을 수 있었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시호가 가운데에 끼었다. 시호는 세연과 재잘재잘 떠들다가 어느새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세연은 시호의 고개를 자기 쪽으로 뉘어 주었다.

 

세연과는 같은 역에서 내린다. 우리는 도착할 때까지 그대로 앉아있어야 했다. 바퀴 덜컹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열차가 지상에 있을 때에는 건너편 창을 통해 풍경이라도 구경했지만 지하로 들어가니 갑자기 할 일이 없어진 것 같이 느껴졌다.

 

“이제 됐어.”

 

“응?”

 

세연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네가 원래 그런 애가 아니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으니 해명하려 더 애쓸 필요는 없어.”

 

“으응.”

 

세연은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그날의 세연의 말을 잊을 수가 없다. 난 널 믿을 수 없어. 에코처럼 머릿속에서 반복되던 말이었다.

 

“하지만 전엔…….”

 

“그날엔 나도 뭔가 일이 있었고 달리 할 말이 없어서 그렇게 튀어나왔던 거야. 오늘 말해 준 것으로도 됐어.”

 

세연의 이 말은 이 주제로는 그만 이야기하자는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대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내 이야기는 아직 다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좀 전에 내가 세연에게 물어본 것의 대답도 듣지 못했다. 그런데 이어서 세연은 미리 대답하기라도 하는 듯이 말했다.

 

“누구나 말하고 싶지 않은 비밀이 있으니까.”

 

그게 자신에 대한 이야기인지, 나에 대한 이야기인지는 판단할 수 없었다. 난 그저 그렇구나, 하고 대답할 뿐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오늘 묻고 싶었던 또 하나의 질문을 지금 꺼내도 좋을까? 가장 중요하지만 미처 꺼내지 못했던 질문. 그날에도 대답을 분명하게 듣지 못했던 질문이 있다는 걸 나는 한시도 잊지 않았다. 그것은 고백에 대한 대답이다. 내 별명 때문이란 건 핑계일 뿐이라는 것은 잘 안다. 하지만 나는 대답을 분명하게 해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나는 물어보지 못했다. 세연이 무엇을 알고 있는지, 무엇을 감추고 있는지 나는 짐작조차 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내가 미처 말해주지 못한 사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쇳소리만이 덜컹거리는 열차 안에서 우리는 말없이 앉아 있었다. 그날의 일이 제대로 해명된 것인지 나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세연에게 할 말이 달리 떠오르지 않은 것이 그 증거일 것이다.

 

 

 

5

 

내리는 역이 가까워질 무렵, 나는 세연에게 말을 건넸다.

 

“집에 가는 거지? 그럼 내리는 곳도 같나?”

 

세연은 말했다.

 

“아니. 지금 어디 가야돼.”

 

“약속 또 있었어?”

 

“밴드 연습. 조금 이르기는 하지만.”

 

어깨에서 어깨로 고개를 번갈아 누이던 시호는 어느새 깨어나 물었다.

 

“밴드 연습? 밴드가 뭐야?”

 

세연은 시호를 내려다보았다.

 

“악기 연주하는 거야.”

 

“악기? 밴드로 연주하는 거야?”

 

“밴드가 연주하는 거지.”

 

“그럼 밴드가 노래도 불러?”

 

“노래 부르는 언니는 따로 있긴 하지만.”

 

“그럼 밴드가 연주하고 노래는 다른 언니가 불러?”

 

“노래 부르는 언니까지 밴드라고 불러.”

 

“그럼 언니는 뭐해?”

 

“일렉 기타.”

 

“응?”

 

시호는 이해 못 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보았다. 아무래도 둘이 상상하는 바가 각기 다른 것 같다.

 

“전혀 감이 안 잡히는 모양인데.”

 

나는 말했다.

 

세연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말했다.

 

“한번 구경해 볼래? 설명하는 것보다 직접 보면 바로 알 텐데.”

 

“응! 구경 갈래!”

 

시호는 힘차게 소리쳤다. 잠깐, 그렇다면 나도 따라가야 하는 건가? 세연이 기타 치는 모습은 보고 싶긴 하다. 세연은 나에게는 따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역시 보호자로서 자연스럽게 따라붙게 되는 것일까? 분명 시호만 데리고 가지는 않을 거라 생각한다.

 

혼자서 고민하는 와중 세연과 시호의 대화는 몇 턴이 지나가 버렸다. 내가 빤히 바라보는 걸 느꼈는지 세연은 내 쪽을 힐끗 보더니 말했다.

 

“너도 가야겠지?”

 

으응, 왠지 탐탁지 않은 표정이다.

 

“원래 연습 안 보여줘. 시호 때문에 끼워주는 줄 알아.”

 

원래 보여주지 않는다면서 시호는 괜찮은 건가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따졌다가는 핀잔만 들을 게 뻔하므로 입을 다물기로 했다. 세연의 연습 장면을 볼 수 있는 것만 해도 어디인가.

 

시호는 태엽을 되감아놓은 듯 완전히 살아났다. 둘이 떠들고 열차가 목적지로 흘러가는 동안 나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연습실은 세연이 다니는 교회 안에 있다고 했다. 지하철에서 내려서 우리 집과는 조금 벌어지는 각도의 방향으로 걸어가야 했다. 교회는 꽤나 컸다. 흔히 생각되는 교회 건물과는 다르게 반투명한 초록색 유리와 대리석으로 된 외관이 세련되게 미끄러진 보기에도 시원한 건물이었다. 실내는 새로 지은 역사나 고급 아파트처럼 깔끔하고 화사했다. 뭐랄까, 여름이나 겨울에도 항상 쾌적한 온도를 유지할 것 같은 건물? 아무튼 그런 건물이었다. 큰 교회라서 그런지 토요일인데도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았다. 나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의 습성을 잘 안다. 여기서 처음 온 것처럼 두리번거리고 있으면 분명 친절하게 말을 걸어올 것이다. 친절은 좋은데, 입교 권유 같은 것은 사양이다. 나는 세연의 뒤를 바싹 따라다녔다. 세연은 우리를 지하로 안내해 주었다.

 

지하로 내려가서 세연은 잠시 기다리라고 말했다. 라디오 잡음 같은 소리가 복도를 떠돌고 있었다. 밴드부의 연습 소리인 듯했다. 세연은 이런저런 볼일이 있었는지 나와 시호를 복도에 두고 돌아다녔다. 그 사이 나는 이 문 저 문을 기웃거려 보았다. 종교 같은 건 믿지 않아서 교회 안에 들어온 것도 교회 내부를 자세히 구경하는 것도 처음이었다. 그래서 지상 1층에서 지하 2층까지 이어진 대예배실을 들여다보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콘서트홀을 방불케 하는 어마어마한 공간이 그 안에 있었다. 일요일마다 나와 상관없는 수천 명의 사람이 이 안에 모이겠지. 그들이 사는 세계는 아마 나와는 조금 다를 것이다. 그러니까, 그 말은 나와는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 그렇게나 많다는 말이 된다. 이렇게 많은 사람의 믿음도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니 문득 세상이라는 것이 얼마나 넓은지 실감이 갔다.

 

조금만 더 생각했다면 철학자가 한 명 탄생했겠지만 곧 세연이 나를 불렀다.

 

주방용 냉장고 같은 두꺼운 문 안이 연습실이었다. 문의 유리로 안을 들여다보니 다른 밴드부원들이 연주하는 모습이 보였다. 세연이 문을 열자 가득 차 있던 물이 쏟아지듯 소리가 나에게 덮쳐 왔다. 그 소리에 그만 휩쓸려 넘어지는 줄 알았다. 내가 들어가고도 연주는 계속 됐다. 실제 악기 소리를 들어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털이 곤두서는 듯한 음압에 나는 잠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부원들은 고개를 돌려 인사를 하면서도 연주를 멈추지 않았다.

 

내가 들은 부분은 피날레였던 모양이다. 드럼이 화려하게 부서지며 소리가 절정에 달하고 길게 늘어지는 듯하더니 각 악기가 하나 둘 하차하여 마침내는 다소곳하게 모든 울림이 멈추었다. 나는 손뼉이라도 쳐야 하는 것 아닌가 하고 쭈뼛하게 서 있다가 우선 모두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나도 일찍 온 건데 다들 와 있었네?”

 

세연은 말했다. 기타를 치던 사람은 세연에게 말했다.

 

“전부 주말에 할 일이 없으니까. 데이트 하느라 바쁜 세연이랑 다르게 말야.”

 

“아니야. 데이트 따윈. 그냥 동창 만난다고 했잖아.”

 

세연은 단호하게 말했다.

 

연습실 안에는 네 명이 있었다. 드럼, 기타, 베이스, 키보드 각각 한 명씩이었다. 그들은 소개를 요구하는 양 세연에게 시선을 모았다. 내 정체를 공표해 준 것은 시호였다.

 

“난 시호고 얘는 내 사촌 오빠야.”

 

우리의 정체에 대한 설명이 전혀 되지 않은 말이었다.

 

“귀여운 애내.”

 

기타리스트가 시호에게 다가와 말했다. 고데기의 효과임으로 짐작되는 웨이브가 등까지 내려오고 자그마한 선글라스를 썼으며 가죽 재킷을 입고 있던 사람이었다. 아마 그를 처음 본 사람은 열이면 열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평가를 내릴 것이다.

락커다. 이 사람은 락커가 틀림없다.

 

도저히 여고생이라 믿어지지 않은 소화력이었다. 외국의 유명한 락커라고 아무에게나 가서 소개해줘도 믿을만한 강렬한 인상이었다.

 

"이재훈이에요. 세연이랑은 중학교 동창이고 남고에 다녀요."

 

당연한 말이겠지만 여기 세연의 동료들은 전부 여자이다. 여자들은 한마디씩을 했다.

 

"세연이랑은 무슨 사이예요?"

 

"당연한 거 아니겠어? 우리도 떼놓고 데이트하는 걸 보면."

 

"귀엽게 생겼다아. 세연아, 왜 미리 안 소개시켜줬어?"

 

`나는 남학생들 무리에 들어온 여학생이나 젊은 여교사가 어떤 대우를 받는가에 반추해서 여기서 내가 어떤 취급을 받을지 생각했었어야 했다. 나는 '그게 아니라'하고 입안에서만 웅얼거릴 뿐이었고 세연은 양팔을 뻗어 세차게 흔들었다.

 

"언니들이 생각하는 그런 사이 아냐. 누가 여기 남자 데려오기만 하면 다 이래."

 

"전에 연희 언니가 데려온 사람은 애인 맞았잖아."

 

베이스를 잡은 사람이 드러머 쪽을 보며 말했다. 베이시스트는 키가 크고 안경을 쓰고 보이쉬한 짧은 머리를 하고 있었다. 드러머가 '연희 언니'인 듯했다. 드러머는 대답했다.

 

"그땐 아니었어. 데리고 온 다음부터 사귄 거지."

 

드러머는 세연 정도의 짧은 머리에 파마머리였는데 땀에 젖어 가닥가닥이 얼굴에 달라붙어 있었다. 잘은 모르지만 드럼은 연주하는 데에도 적잖은 에너지가 필요한 것 같다.

 

"그럼 세연이도 다음 진도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 어차피 마음 있으니까 데려온 거 아니니?"

 

키보드를 치던 사람이 눈알을 굴리며 말했다. 세연만큼 자그마한 체구에 눈웃음이 인상적인 사람이다. 기분이 좋은지 잘 웃는 성격인지 연주할 때부터 얼굴에서 웃음기를 떼질 않는다.

 

"아, 아냐! 그냥 친구일 뿐야. 얘 사촌 동생이랑 놀아주다가 구경 시켜주러 데려온 것뿐이야."

 

세연은 나를 돌아본다. 나는 황급히 말을 받았다.

 

"아, 네. 그래요."

 

나는 애써 웃으며 세연을 쳐다봤다. 세연은 화제를 돌려 말했다.

 

"어쨌든 친구 왔는데 소개도 안 해줄 거야?"

 

"맞아. 우리 소개를 안 했지."

 

기타리스트가 소개를 시작했다.

 

"우리 밴드 소개부터 할까? 세연이가 많이 얘기해 줬을라나?"

 

"아뇨. 세연이 밴드 한다는 말도 그저께 들었어요."

 

"그래? 그럼 이름부터. 우리는 '귓가에 스치는 바람'이야. 줄여서 보통 귀쓰바라고 불러. 스쿨 밴드가 늘 그렇듯, 카피곡 위주로 하는 밴드지."

 

뭔가 미묘한 이름이다. 평범한 이름이기는 하지만 밴드 이름으로는 평범하지 않아서 오히려 독특해 보이는 이름이다.

 

"일상의 말을 쓴 아무 특색 없는 이름이지만 역으로 밴드 이름으로 씀으로써 오히려 비 상식적이게 보이는 이름이야. 줄이면 왠지 있어 보이는 발음도 나오고. 괜찮지?"

 

내 예상이 맞아떨어진 건 요 근래에 와서 처음인 것 같다. 기타리스트는 계속 말했다.

 

"난 밴드 리더 오유미. 풍광 여고 2학년이야. 보다시피 기타 및 보컬을 맡고 있어."

 

나도 모르게 이름을 듣는 순간 큰 숨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 이유는 그 이름에 의한 작용 연상 작용 때문이리라.

 

"왜 그래? 이름이 너무 예뻐서?"

 

시답잖은 농담을 하는 것까지. 나는 그 녀석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뇨. 우리 반에 비슷한 이름을 가진 애가 있어서요."

 

설마설마 했다.

 

"자네 2반이야? 오유리?"

 

"유리 누님이셨어요?"

 

유미 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재밌네. 그 녀석, 조금 특이한 놈이지?"

 

"조, 조금요……."

 

솔직한 감상으로는 그 누나에 그 동생인 것 같다. 이런 누나를 뒀다면 그 녀석이 그런 특이한 성질을 갖게 된 것도 이해는 간다. 다만 차이점이라면 누나는 특이하면서도 무척 멋있어 보이지만, 녀석은 그냥 찌질해 보인다는 정도?

 

"다음 소개로 넘어가자. 저쪽은 베이스 치는 홍아령. 세연이랑 같이 유일한 1학년이야."

 

홍아령은 연주로 자기소개를 대신 했다. 구름다리를 비틀거리며 걷는 느낌의 프레이즈였다.

 

"드러머 서연희!"

 

연희 언니라고 불린 것을 봐서는 2학년이겠지? 그는 환호성을 지르며 신나게 드럼을 두드렸다.

 

"다음은 키보드의 소라! 우리 팀의 마스코트야."

 

젓가락 행진곡이 장난스럽게 펼쳐졌다. 뭐가 그리 재밌는지 푹 숙인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시질 않는다. 그런데 유미 누나는 그의 성을 말해주지 않았다. 괜히 궁금해진다. 왜 소라 누나만 성을 안 불렀을까. 성이 ‘소’이고 이름이 ‘라’라든가, 아니면 라 씨인데 영어식으로 말한 것이라든가?(말이 되냐…….) 모르겠다. 나중에 직접 물어보면 되겠지.

 

"세연이는 뭐, 알겠고. 얘는 누구라고 했지? 자네들 애라고 했니?"

 

유미 누나는 시호를 가리키며 말했다.

 

“애가 좀 많이 큰데? 이때까지 어떻게 숨겨 뒀어?”

 

연희 누나도 한 마디 한다.

 

“아까 들었잖아! 얘 사촌 동생이라고!”

 

세연이 소리쳤다. 나는 시호 귓가에 너도 소개해야지, 하며 속삭이고는 등을 떠밀었다.

 

“난 아까 말했잖아.”

 

하며 녀석은 나를 돌아본다.

 

“재훈군, 못써요. 아이를 이용해서 위기를 타개하려 하면.”

 

유미 누나가 나를 보고 말했다.

 

“네에, 죄송해요.”

 

나는 뒤통수를 긁을 수밖에 없었다.

 

"노래해. 노래해."

 

그때, 소라 누나가 손을 모아 작게 외친다. 시선이 모이자 무안한 듯 딴청을 피운다. 뒤따라서 드러머 서연희 누나도 외친다.

 

"노래해! 노래해!"

 

"무, 무슨 노래예요, 하하."

 

나는 뒷걸음질 치며 말했다.

 

“와아! 노래해라!”

 

시호도 덩달아 외친다.

 

"우리 공연을 봤으니 관람료를 내야지?"

 

유미 누나가 마이크를 내민다. 이러면 난감하다. 나는 맨땅에 부를 수 있는 노래도 없고 남들 앞에서 뭔가를 하는 것도 익숙하지 못하다. 하지만 여자들은 박수에 환호성까지 쳐가며 나를 한가운데로 떠민다. 세연에게 눈길을 보냈지만 세연은 의자에 앉아서 흥미로운 듯 구경할 뿐이다.

 

"우리가 반주해줄까? 신청곡 말해봐. 우리가 연주할 수 있는 곡이면 해주고 못해도 대충은 맞춰줄 거니까."

 

"아는 노래 하나도 없어요."

 

내 말은 무시된 채 보채기는 계속 됐다. 마이크를 입가에 대자 박수 소리는 더욱 커졌다. 나는 궁지에 몰린 기분이었다. 여기서 끝까지 내빼면 분위기는 대번에 싸해질 것이다. 세연과도 분위기가 안 좋아질 것이다. 그렇다면 뭘 불러야 하지? 난 노래를 잘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되는 대로 온 힘을 다해야 할까, 망가질 것을 각오하고 아무거나 질러야 할까. 당장 가사가 떠오르는 곡도 없다. 뭘 불러야 하나. 대중적인 곡을 해야 좋아할까, 락밴드이니만큼 락 같은 걸 불러야 할까.

 

나는 '말 달리자'를 불렀다. 타당한 선택이었다. 혼자서 애처롭게 '닥쳐'를 외치고 있으려니 드럼과 기타가 합세해 줬다. 난데없는 간이 밴드가 탄생했고, 정신없이 두들겨대는 소리 속에서 나는 간신히 신고식을 마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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