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이정표

3장 - 시호1

Write

Article Menu

facebooktwittergoogle pluspinterestkakao storyband
  • 19:08 Jul 27, 2010
  • 3990 views
  • LETTERS

  • By 노유

1

 

집에 돌아오고 시호는 이모에게 오늘 본 것들이나 길을 잃어버릴뻔한 일이나 밴드 연습을 본 일 등을 침 튀기며 이야기 했다. 색다른 경험을 해본 것이 딴에는 자랑거리라도 되는 것 같다. 잠깐 길을 잃어버렸었다는 소리가 나오자 나는 어머니께 자못 엄한 야단을 들었다. 나는 소파에 드러누워 건성으로 예, 예, 하고 대답했다. TV에서는 토요일 오후 오락 프로그램이 나오고 있었다.

 

어느덧 날은 저물기 시작하여 압력밥솥에서 김새는 소리가 집안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나는 어머니께 아침에 싸간 도시락이 남아있으니 저녁밥 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먹다 남은 김밥은 이리저리 굴려져서 처참한 모습이었다. 어머니는 그것을 보고 그냥 밥을 먹겠다고 하셨다. 나는 만든 사람이 그것을 책임지고 소모해야 한다는 논리로 시호에게도 김밥을 먹였다. 시호는 처음에는 저항하다가 마침내는 자신에게는 저항권이 없음을 알고 순순히 받아들였다.

 

다 부서져서 급기야는 밥알 하나 김밥 속 하나를 젓가락으로 집어먹으며 도시락 통을 다 비워 가는데 인로에게서 문자가 왔다. 집에 왔으면 메신저에 접속하라고 한다. 나는 시호에게 통 정리를 맡기고 거실에 있는 컴퓨터 앞에 앉았다. 시호는 게임 시켜달라며 손도 씻지 않고 달려왔다. 나는 친구와 이야기해야 한다며 단호히 거절했다. 시호는 기름 묻은 손으로 나에게 기어오르려 했다. 나는 손 씻고 오라고 화장실로 등을 떠밀었다. 손을 씻고 나서 시호는 내 무릎 위에 앉았다.

 

인로는 메신저에 이미 들어와 있었다. 내가 접속하자 인로는 바로 메시지를 보냈다.

 

-야야야야야 오늘 못 가서 미안.

 

나는 답장했다.

 

-너 진짜ㅜ 오늘 힘들어 죽는 줄 알았다.

 

-미안미안. 갑자기 집에서 어디 간다고 해서 말야. 얘기는 잘 됐냐?

 

-그냥 그럭저럭.

 

-근데 내 명쾌한 추리력으로 세연과 네가 무슨 관계인지 추론해봐도 되냐?

 

-안돼.

 

-ㅋㅋㅋㅋㅋㅋㅋㅋ알았어. 박물관엔 나중에 또 갈거지?

 

-ㅇㅇ.. 다음엔 혹 달고 가지 말고 둘만 가서 차분히 보고 오자. 오늘은 1층도 다 못 봤어.

 

-애 데리고 다니니까 제대로 못 봤겠지. 내일도 애 봐야 되냐?

 

-그럴걸? 시호는 다음주에야 가니까.

 

“오빠. 빨라서 못 보겠어.”

 

쪽지 형식으로 주고받는 메신저라서 답장하고 나면 창이 사라져버린다. 나만큼 글을 빨리 읽지 못하는 시호는 대화를 따라올 수 없는 모양이다.

 

“근데 너 보라고 이야기하는 건 아니잖아.”

 

“이거 인로 오빠지?”

 

나는 시호도 볼 수 있게 조금 느긋하게 글을 쓰기로 했다.

 

-내일 피시방이라도 가자고 하려 그랬는데. 빨리 만렙 찍어야지.

 

-컴터를 업글해서 계정들거나 해야지, 그렇게 찔끔찔끔 하는 것으론 정말 올리기 어렵다.

 

-응. 야자하느라 피시방도 자주 못 가고.

 

-내일은 @@시 호@@나 돌봐야지 뭐. 에휴,, 이 녀석은 언제쯤이나 떨어질라나.

 

나는 구경하는 시호가 볼 수 있도록 이름을 강조해서 타이핑했다. 인로도 그 의도를 알아챈 듯했다.

 

-ㅋㅋㅋ 옆에 시호 있냐?

 

“내일 나랑 안 놀아줘도 돼.”

 

시호는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응? 무슨 말이야?”

 

“나 내일 재호 오빠네 갈 거야. 그니까 나랑 안 놀아줘도 돼.”

 

“정말이야? 웬일이야? 모처럼 일요일인데?”

 

“재호 오빠 이번에 와서 한 번도 안 봤잖아. 그래서 갈 거야.”

 

그렇다면 고마운 일이다. 나는 재빨리 인로에게 답장을 했다.

 

-내일 피시방 갈 수 있겠다. 시호가 재호네 가서 놀겠대.

 

타이핑하다 멈추고 나는 시호에게 물었다.

 

“재호네 언제 갈 거야?”

 

“음. 점심때?”

 

나는 점심때쯤 보자는 말을 마저 써 넣어 쪽지를 보냈다. 잠시 후 답장이 왔다.

 

-그래? 잘됐네. 세 시간쯤 할 수 있겠어?

 

-그렇겠지. 여차하면 재호랑 연락하면 되니까.

 

-잘됐네. 그럼 내일 보자. 11시에 가자. 점심은 피시방 컵라면ㅋㅋㅋ

 

-ㅇㅋ!

 

그렇게 대화가 끝났다. 시호는 다시 게임 시켜달라고 보챘다. 녀석이 말하는 게임은 간단한 방식의 온라인 게임이었다. 예전에 우리 집에 왔을 때 한 번 시켜줬었는데 그 뒤로 중독이라고 할 만큼은 아니지만 컴퓨터를 켤 때마다 시켜달라고 한다. 내가 초등학생일 때 막 컴퓨터 게임이라는 것이 유행하기 시작했고 나도 그때 게임을 시작했으니 녀석이 딱히 이르게 컴퓨터를 접한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컴퓨터가 사회 문제로까지 부각되는 요즘은 어린 애들이 컴퓨터에 빠져드는 것이 조금은 걱정스럽다. 이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 재호가 중독 수준으로 게임에 매달리기 때문이다. 재호가 시호와 놀아준다 하면, 온라인 게임 하는 걸 보여주거나 게임을 시켜주거나 하는 정도밖에 상상가지 않는다.

 

양육에 대한 걱정은 나중에 내 딸을 낳으면 하기로 했다. 교육은 이모가 알아서 잘 시키시겠지. 나는 시호에게 컴퓨터를 맡겨두고 내려왔다.

 

어쨌든 여러 모로 골 아팠던 토요일이 지나갔다.

 

 

 

고등학교 들어온 지 한 달 넘게 지난 지금, 야자와 함께 유일하게 적응하지 못한 것이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다. 중학교 다닐 때에는 7시 30분에 일어나면 충분했지만, 고등학교 와서는 그 시각까지 교문에 입성해야 한다. 게다가 야자를 하고 나면 왠지 내 시간을 뺏긴 것 같은 기분에 야간 활동이 늘어나서 늦게 자게 된다. 수면 시간은 이중으로 줄어드는 셈이다. 그래서 일요일만큼은 퍼질러지게 자야 부족한 수면을 조금이나마 보충할 수 있는데 이놈의 시호는 이 소중한 일요일 아침잠마저도 허락하지 않는다.

 

나는 타작 당하는 벼이삭이 된 기분으로 일어났다. 하도 흔들어대는 통에 먼지가 눈에 보일 정도로 날린다. 재호네 놀러간다고 했겠다, 얼른 시호를 보내 버리고 조금이라도 자버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몰라. 있다가 오빠랑 같이 나갈래.”

 

언제 나갈 거냐는 내 물음에 시호는 그렇게 말했다. 기왕 가는 김에 일찍 가면 좋잖아. 아차, 그러고 보면 어차피 내가 녀석을 데려다 줘야 한다.

 

“혼자 찾아갈 수 있어. 나갈 때만 같이 나가는 거야.”

 

시호는 말했다. 재호네 집은 걸어서도 갈 수 있는 거리지만 그래서 더 걱정이 된다. 익숙하지도 않은 골목길을 혼자서 걸어 다니게 둘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주택가는 거기가 거기라서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미로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시호는 자신 있게도 말했다.

 

“내가 어린앤가 뭐? 전에도 가봤으니 이번에도 갈 수 있어.”

 

초딩이 하는 말에 꼬투리 잡을 생각은 없지만, 그 말에는 시호가 재호네 집을 찾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 들어가야 인과 관계가 성립한다. 나는 인로와 함께 데려다주든가 하기로 시호 몰래 마음먹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내 머리는 빨리 다시 잠들라고 야단이었지만 시계를 보니 벌써 아홉시였다. 이정도면 시호도 많이 봐준 것이리라. 아버지는 일찍부터 마라톤 대회인가를 나가셨고 어머니도 나갈 준비 중이셨다. 나는 어머니께 어디 가시냐고 물었다.

 

“친구 만나러 가. 저녁 늦게 올 거야. 오늘 하루 시호 잘 돌봐라.”

 

나는 네, 하고 대답했다. 어머니는 상에 있는 대로 아침 챙겨 먹으라고 말하며 나가셨다. 식탁에는 신문지가 덮여 있었고 들추니 아침에 먹다 남은 듯한 부침개나 도토리묵 등이 있었다. 배는 별로 고프지 않았지만 어머니가 나가신다면 오늘 하루는 굶다시피 할 것이 분명하므로 먹어두기로 했다.

 

“야, 넌 밥 먹었어?”

 

시호에게 물었다.

 

“응. 이모랑 먹었어.”

 

시호는 소파에 앉아 리모콘을 잡았다. 일요일의 시호를 보니 생각났는데, 왜 요새는 일요일 아침 만화 영화를 안 해주는지 모르겠다. 애들이 볼 게 없으니 요즘 애들은 벌써부터 어른들 농담 따먹기 하는 것을 보며 자라야 한다. 가뜩이나 상상력 부족한 한국 사람들인데 앞으로 10년 뒤에는 어떻게 될지 심히 걱정된다. 나라는 신뢰할 만한 표본을 보더라도 만화를 봐야 창의력이 향상된다는 사실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머릿속에서 사회과학 논문을 쓰며 아침을 먹고 있는데 휴대폰 벨이 울었다. 시호가 달려가 휴대폰을 가져다준다. 고마워, 라고 말하며 폰을 받아들어 인로의 이름을 확인했다. 나는 입안엣 것을 꼭꼭 씹어 넘기고 물로 입가심까지 한 뒤 전화를 받았다.

 

-야. 있다가 11시에 내가 너네 집으로 갈게. 그때 괜찮지?

 

“응. 아무 때나 와. 난 느긋하게 씻고 있을게.”

 

-시호는 어때? 나갔어?

 

“아니. 나 나갈 때 같이 나간대. 너 잠깐 재호네 같이 가줄 수 있어? 내가 데리고 가줘야 될 것 같거든.”

 

시호는 혼자 간다니까, 하고 끼어든다.

 

-나야 상관없지. 그럼 조금 일찍 가야겠네.

 

“아무 때나 와. 집에 지금 아무도 없으니까.”

 

전화를 끊고 나는 밥을 마저 먹었다. 내가 일어나자 시호는 내 손을 잡아끌었다.

 

“갤러거 밥 주자. 이모가 밥 주랬어.”

 

“네가 주면 되잖아.”

 

“난 밥 못 꺼낸단 말야.”

 

갤러거 사료는 계단 밑 손이 잘 안 닿는 곳에 있다. 개 밥 주러 아래층까지 내려가는 건 아무래도 귀찮은 일이다. 나는 시호에게 밖에 나가는 길에 주자고 말했다. 그러자 시호는 날 현관까지 질질 끌고 가고야 만다.

 

“이모가 밥 먹고 꼭 주랬단 말야.”

 

이럴 땐 유난스럽게도 말을 잘 듣는 녀석이다. 녀석이 조금 더 어렸을 적엔 애 앞에서 거짓말도 하지 못 했다. 문제는 머리가 커가면서 내킬 때에만 말을 잘 듣는 녀석으로 변모했다는 것이다.

 

“어, 재훈아, 시호야. 안녕.”

 

아래층으로 내려가는데 누가 말을 건다. 양소란 누나였다.

 

“어디 나가요?”

 

그렇게 묻긴 했지만 누나는 아무리 봐도 외출하는 차림은 아니었다. 힙합 하는 몸집 좋으신 남성이 입을 법한 헐렁한 야구 티에 추리닝 바지를 입고 맨발에 슬리퍼를 신은 게 왠지 온 몸으로 ‘나 백수요.’ 하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무슨 패션인지는 몰라도 티의 허리 부분을 동여 맨 게 꼭 커튼을 뒤집어 입은 것 같다.

 

“만화책 빌리러 잠깐 책방에 좀.”

 

소란 누나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책방이라니, 공부 안 해요?”

 

“공부는 쉬어가며 하는 거야.”

 

누나는 해맑게 웃어 보인다. 미안한 말이지만, 그런 말을 웃으며 하면 조금 바보 같이 보인다. 누나는 기분 좋은 듯 종종거리며 대문을 나섰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햇볕이 선명하게 내려쬐는 상쾌한 날이다. 그런 날 만화책이나 보고 있다니, 재수생이란 참 가엾은 존재란 생각이 든다. 고등학생이 할 말은 아닌 듯하지만.

 

나와 시호는 개에게 밥을 주러 계단을 마저 내려갔다. 갤러거는 마당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마당에 못 뛰어넘을 정도 높인 철장을 설치하고 그 안에다 풀어 기르는 것이다. 안 그러면 송아지만한 저 덩치를 감당할 수 없다.

 

갤러거는 바닥에 배를 깔고 멍청한 표정으로 꼬리를 치고 있었다. 밥 생각은 없는지 밥그릇에 사료를 쏟아줘도 멀뚱히 쳐다보기만 한다. 이 녀석 이름 때문에 세연과 말다툼한 것을 생각하니 헛웃음이 나왔다. 이 녀석은 누가 자기 때문에 싸우든 칼부림하든 하품이나 하고 있겠지만.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니까 녀석은 슬슬 엉덩이를 빼며 꼬리 치는 속도를 가속한다. 놀아줄 것이라고 착각하는 모양인데 어림없는 소리다. 나는 밥을 먹는지 지켜보고 있던 것뿐이다. 밥은 알아서 먹겠거니 하고 집으로 들어가려 했다.

 

계단을 올라가려는데 인로가 나타났다.

 

“금방 왔네?”

 

나는 손을 슬쩍 들었다 내리고는 말했다.

 

“바로 출발했지.”

 

시호가 달려가 대문을 열어주었다. 인로다, 하고 소리 지르자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나 아직 세수도 안 했어.”

 

“대충 하고 나와.”

 

나는 나갈 준비를 마저 했고 곧 출발할 수 있었다. 시호는 혼자 갈 수 있다고 또 구시렁댔지만 인로와 함께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은 듯했다. 나가는 길에 돌아오는 소란 누나와 마주쳤다. 묵직해 보이는 비닐 봉투를 들고 있었다. 인로는 시호와 떠드는 데 소질 있는 듯했다. 어제 인로가 시호를 맡아줬어야 했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나는 한동안 접속하지 못 했던 게임 속 캐릭터를 생각했다. 얼마 남지 않은 첫 중간고사도 생각했다. 꽃가루가 날렸지만 황사는 없었다. 어제처럼 쾌정한 날이다.

 

 

시호를 인수인계하고 우리는 예정대로 PC방에 갔다. 요즘엔 PC방도 과잉 경쟁이라 시간당 요금이 무척 저렴하다. 한 시간에 500원에서 비싸봐야 700원 정도. 넉넉하게 서너 시간 앉아 있는다고 해도 한 끼 식사 값도 나오지 않는다. 대신 라면 값이 1500원이라 하니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고 해야 할지 장삿속이라 해야 할지. 어쨌든 우린 성실하게 게임을 했고 나는 레벨을 한 단계 올리는 쾌거를 달성할 수 있었다.

 

정신없이 괴물들을 무찌르고 마을을 구하고 나니 시간이 꽤 지나 있었다. 그동안 재호에게서는 아무 연락이 없었다. 시호가 돌아갈 때면 전화를 하라고 미리 일러두었었다. 우리는 적당히 끝내기로 하고 일어섰다. 인로는 우리 집에서 시간을 때우기로 했다.

마당에서 소란 누나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커다랗고 챙이 뾰족한 밀짚모자를 쓰고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게, 손에 든 것이 만화책만 아니었다면 꽤나 운치 있을 것 같았다.

 

“팔자 좋네요.”

 

그렇게 말하자 누나는 싱긋 하는 웃음으로 답해 주었다. 우리는 놀아달라고 철창에 발을 올려놓은 갤러거를 무시하고 계단을 올랐다.

전화기를 확인하니 부재중 전화가 있었다. 숫자 0만 네 개 찍힌 번호였다. 자기 번호를 감추고 정상적인 전화가 온 적은 없다. 아니, 문득 생각해 본다. 만일 동창 중에 남 몰래 나를 연모하다가 졸업하고 나서야 졸업 앨범 주소록을 보고 소심하게 전화 해본 여학생이 있지는 않을까?

 

“그보다 졸업앨범의 연락처는 사기꾼들한테 주로 쓰이지.”

 

무참하게 망상을 깨트리며 인로가 말했다.

 

그러고 보면 남의 정보를 멋대로 졸업앨범에다 넣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생각이 든다. 꼭 보이스 피싱 때문이 아니더라도 개인 정보는 보호되어야만 한다.

 

그런데 큰일 날 뻔 했다. 앞서 말했듯, 인로는 탐정을 자처한다. 조금이라도 범죄 비스끄무리한 쪽으로 대화가 흘러가면 인로는 각종 범죄 이야기나 추리 소설 이야기, 탐정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한다. 이를테면 예전에 TV에서 연쇄 살인범이 떴을 때, 나는 곁에 있던 인로에게서 연쇄살인 이라는 용어를 만든 사람이나 수사극에서 자주 보이는 프로파일링 기법의 기원, 연쇄 살인범 열전 따위의 강연을 들어야 했었다. 그런 화제가 나오지 않도록 조정하는 것도 삶의 지혜이다. 나는 재빨리 화제를 아까 하던 게임으로 돌렸고 인로의 자유 연상을 억제하는 데 성공했다.

 

 

 

평화로운 일요일 오후였다. 시호의 방문, 세연과의 갑작스런 만남으로 유난히 정신없었고 길었던 주말은 그렇게 흘러가는 듯했다. 그렇게, 아무 일도 없을 것 같은 날이었다.

 

 

 

거실에 늘어져서 재방송 버라이어티 쇼나 보고 있던 때, 집 전화벨이 울렸다. 번호를 확인해 보니 부재중 찍힌 번호와 같은 0000이었다. 하루에 보이스 피싱이 두 번이나 오는 일은 없었는데 하고 생각하며 전화를 받았다. 우체국입니다. 혹은 국세청입니다. 하는 어설픈 ARS를 기대하며 바로 수화기를 내려놓을 준비를 했다.

 

-저기…….

 

들려온 것은 사람 목소리였다. 아버지 연배쯤 되어 보이는 아저씨 목소리였다.

 

-거기 시호네 집이죠?

 

“시호요?”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말했다.

 

“시호네는 아니지만, 시호는 있어요.”

 

소파에 앉아서 책을 보고 있던 인로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래요? 전화 받는 사람은 누구죠? 시호 오빠예요?

 

나는 무슨 문제가 생긴 게 아닌가 했다.

 

“네. 일단은 그런데요.”

 

-집에 부모님 계세요?

 

나는 인로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아뇨. 안 계세요.”

 

-언제쯤 돌아오는지 알 수 있을까요?

 

“늦게 오신다고 했는데요. 아버지는 잘 모르겠고, 어머니는 친구 만나러 가셔서.”

 

-어머니 전화번호 좀 알려주세요.

 

나는 전화번호를 불렀다. 인로는 가까이 와서 수화기 등에 자기 귀를 갖다 대 본다.

 

전화는 말없이 끊겼다. 인로는 무슨 얘기냐고 물었다.

 

“글세. 시호 찾는데, 친척인가? 엄마 전화번호를 물어봤어.”

 

“누군진 말 안 하고?”

 

“응.”

 

그때, 어디선가 휴대폰 벨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 휴대폰이었다. 두고 나가신 모양이었다. 나는 안방에서 휴대폰을 발견했다. 번호는 0000이었다. 방금 번호를 알려줬으니 당연히 그 번호인 것이다. 인로는 다가와서 액정을 들여다보았다. 인로는 좀 전에도 이 번호로 왔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말했다. 인로의 얼굴이 한순간 싸해진다. 인로는 전화를 받아보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내 방으로 달려갔다.

 

“여보세요.”

 

상대는 당황한 듯 잠시 말이 없었다.

 

-아까 전화 받았던 사람이죠?

 

“네. 어머니가 핸드폰을 두고 가셨네요.”

 

상대는 잠시 말이 없었다. 나도 몇 초 입을 다물고 있다가 여보세요, 하고 불러 보았다. 그는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했다. 잠시 후, 그는 말했다.

 

-집에 아무도 없어요?

 

“네. 혼잔데요.”

 

-그럼 어머니 대신 잘 들어요.

 

나는 어머니한테 전할 말이라도 있는 건줄 알았다.

 

-시호는 우리가 데리고 있거든요?

 

“무슨…… 소리죠?”

 

좀 전부터 느꼈던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증폭됐다. 상대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시호 우리가 데리고 있다고.

 

“네?”

 

나는 되물었다. 나는 정말로 그가 내뱉은 말이 언어적으로 무슨 의미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 참. 말귀 못 알아듣네. 시호 우리가 납치했다고. 응? 알아들었어?

 

나는 TV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현실성 없는 그 말에 소리 지르고야 말았다.

 

“네? 시호가 납치됐다고요!”

 

수화기로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귓가를 비껴 나간다. 벽지가 물결무늬를 그린다. 눈앞이 새하얘져 갑자기 짙은 안개 속에 들어온 것 같다. 발이 허공을 딛는 것과 같은 기분에 나는 비틀거리며 주저앉고야 말았다.

 

인로가 다가왔다. 휴대폰을 뺏어 들어 옆구리의 포트를 열고 무언가를 끼워 넣는다. 이어폰이다. 내 방에 가서 찾아온 듯하다. 인로는 한쪽을 내 귀에 꽂아 넣고 한 쪽을 자기가 착용했다.

 

그렇게, 또다시 균열이 발생했다.

comment

권한이 없습니다.
서버에 요청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