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이정표

4장 - 시호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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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 Jul 27,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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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노유

2

 

어째서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가스요금 고지서 따위에 나오는 실종 아동 광고의 주인공이 나와 가까운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비극은 언제나 이야기 속에서나 존재한다고 믿어 왔다. 물론 영원히 아무런 역경도 겪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은 아니다. 다만 조금 억울할 뿐이다. 길거리를 걷다가 간판이 머리 위로 떨어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범죄의 대상이 되는 데에는 아무런 이유도 없다. 그저 범인이 노려보는 곳에 시호가 있었던 것뿐이다. 왜 하필이면 시호인가. 왜 하필이면 내 사촌동생이란 말인가.

 

마음이 앞서 페달에서 발이 미끄러지기도 수차례, 나는 아슬아슬하게 은행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은행 코앞에서 행인을 피하려다가 속력을 주체하지 못하고 넘어지고 말았다. 발목을 약간 접지르고 팔꿈치가 까였지만 머뭇거릴 수 없었다. 자전거를 세우고 잠글 여유도 없었다. 누가 가져가든 말든 내버려두고 절뚝거리며 은행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늦지는 않은 듯했다. 휴일이라 당연히 영업은 하지 않았고 ATM앞에는 두 명이 서 있었다. 그중 하나는 내가 지시받은 ATM 앞에 있었다. 잠시 기다리며 숨을 고르자니 머리에 열이 올라오고 상처가 욱신거렸다. 곧, 전화벨이 울렸다. 앞에 있던 사람은 볼일을 마치고 비켜섰다. 나는 전화를 받으며 기계 앞에 가 섰다.

 

-제 시간에 왔네.

 

목소리는 말했다. 급격하게 펌프질을 가속했던 심장은 좀처럼 진정될 줄을 몰랐다. 나는 거칠어진 호흡으로 말했다.

 

“네, 왔어요, 이제, 뭘 해야 하죠?”

 

목소리는 간사하게 웃는다.

 

-은행 안을 둘러봐.

 

놈은 말한다. 은행 안에는 이제 나를 포함해 둘뿐이다. 그는 전화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래도 공범일 가능성은 있다. 혹은 방금 전 밖으로 나간 사람이 감시인일 수도 있다.

 

-구석에 문이 하나 있지?

 

나는 시선을 사람에서 내부 구조로 옮겼다. 구석에 쪽문이 하나 나 있었다. 방범장치 비슷한 것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아 고객이 드나들 수 있게끔 한 문인 듯했다.

 

-그 문 밖으로 나가.

 

나는 네? 하고 되물었다. 놈은 같은 말을 거센 말투를 담아 되풀이했다. 나를 다른 곳으로 끌고 갈 계획이었다. 나는 이대로 끌려가면 안된다는 것을 알 수 없었다. 인로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장소를 옮기면 인로와 경찰은 나를 놓쳐버리게 된다. 버텨야 했다.

 

“은행은 여기잖아요. 어디로 가라는 거죠?”

 

-닥치고 내가 하라는 대로 해!

 

“나까지 납치할 생각인가요? 그러면…….”

 

-닥치고 빨리 안 나가?

 

놈의 고함에 나는 마지못해 천천히 문으로 걸어갔다. 문은 역시 열려 있었고 문밖으로는 상가 내부를 연결한 통로가 나 있었다. 문을 열자마자 놈은 말했다.

 

-오른쪽으로 나가서 시장 안으로 들어가.

 

내가 문을 연 타이밍을 쟀을 리는 없다. 즉, 누군가는 나를 감시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렇다면 나는 놈의 말을 거역하기 힘들어진다. 은행 정문을 다시 흘끔 쳐다보았다. 인로는 아직도 보이지 않는다. 지나치게 시간을 끌려한다면 놈은 수상쩍게 여길 것이다. 나는 문 너머로 한걸음 발을 내딛었다.

 

결국 인로의 추리력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인로라면 나를 추적할 수 있으리라고 믿고 놈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나는 단서를 남겨놓기로 했다. 우선 쪽문을 활짝 열어놓았다. 문이 열려있는 것을 보면 자연스럽게 그 문으로 나갔다고 생각할 것이다. 상가 통로는 두 갈래였다. 하나는 은행 정문과 같은 방향으로 나 있었고 다른 하나는 시장 쪽으로 나 있었다. 쪽문으로 나간 뒤에 정문과 같은 방향으로 나갔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시장으로 나가면서 일부러 가장 가까이 앉은 행상인의 발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인로는 나를 추적하기 위해 탐문을 할 것임이 틀림없었다. 지나치는 사람들에게 나를 똑똑히 기억시켜야 했다. 나는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그와 확실히 눈도장을 찍었다. 그는 나를 기억해줄 것이다.

 

-무슨 소리야?

 

주위가 시끄러워지자 놈이 물었다.

 

“지나가는 사람과 부딪혔어요. 별일 아니에요.”

 

-시장 안으로 계속 걸어.

 

나는 골목을 따라 걸었다. 시장의 큰 줄기와 만나는 갈림길이 나오자 놈은 왼쪽으로 꺾으라고 말했다. 가게와 가게가 모여 그 사이로 사람들이 계곡 물처럼 흘러다니는 시장 속을 나는 표류하듯 걸었다. 놈은 목적지를 묻는 내 말에는 일절 대답해주지 않았다. 이 동네에 자주 오는 것은 아니지만 근처에 은행이 하나 더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쪽으로 가는가 했더니, 놈은 은행 가까이에서 엉뚱한 방향으로 틀라고 말했다. 나는 새로운 골목 안으로 들어갔고 거기서 또 방향을 몇 차례나 틀었으며 한적한 주택가와 시장 골목을 정신없이 오가다보니 마침내는 내 위치를 가늠할 수 없게 되었다. 갈림길을 지나오며 나는 가능한 모든 사람들과 눈을 마주쳤다. 강렬한 시선을 보내거나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내는 등 내 인상을 남기기 위해 처절하게 애를 썼다. 과연 그게 효과가 있을지는 자신할 수 없었다.

 

나는 어느 한적한 골목길에서 멈춰 설 수 있었다. 거기에는 이름 없는 편의점이 하나 있었다. 벽 밖으로 ATM 하나가 나 있었다. 놈의 목적은 바로 그곳이었다. 나는 놈의 지시에 따라 ATM앞에 가 섰다.

 

“앞에 왔어요.”

 

-엄마 가드를 꺼내서 돈을 찾아. 모조리. 양심에 맡기는데, 최소치는 500이어야 할 거야 아마.

 

“돈을 인출하라고요?”

 

-시키는 대로 해. 잡소리 하지 말고.

 

인로가 나를 찾을 수 있을까. 기약이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나는 얼마나 시간을 끌어야 하나. 인로가 날 찾는데 실패한다면 시간을 끌어도 의미가 없다. 상대의 의심만 살지 모른다. 나는 주머니만 뒤적이며 우물거렸다. 일부러 카드들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부자연스럽게 보이지는 않았을까 조금 걱정했다.

 

-빨리 찾아. 이상한 짓 하지 마. 다 보고 있다.

 

놈은 그저 지루한 듯한 목소리로 보챌 뿐이다. 나는 우선 대화를 해보기로 했다.

 

“저, 제가 참견할 일은 아니지만 계좌 이체가 더 빠르지 않을까요?”

 

-닥쳐!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는 거야.

 

대꾸할 말은 달리 생각나지 않는다. 영화 같은데서 보면 주인공이 능숙하게 범인을 홀리던데 그런 건 다 거짓말이다. 나는 그 이상으로 말을 끌 수가 없었다. 나는 카드들을 뒤적이다 마침내 어머니 카드를 손에 들고야 말았다.

 

“저기, 돈을 인출한 다음에 그쪽 계좌로 다시 돈을 입금하라는 거죠? 계좌 번호는 몇 번이죠?”

 

상대는 대답했다.

 

-계좌는 돈을 찾은 다음 알려준다. 빨리 돈이나 찾아!

 

나는 심호흡 한 번을 하고는 어머니의 카드를 삽입했다. 터치스크린의 인출 버튼을 눌렀다. 비밀번호를 입력하라는 메시지가 뜬다. 나는 비밀번호를 모른다. 아무 번호를 눌렀다. 설마 우연히 번호를 맞추는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 하며 초조하게 기다렸다. 당연하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모니터에 뜬 오류 메시지를 소리 내 읽었다.

 

“비밀번호 오류라는데요?”

 

-잘못 입력한 거 아냐? 다시 해봐.

 

카드는 배출되었다. 나는 카드를 다시 삽입하고는 다시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그래도 주사위의 신이 강림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에 같은 숫자만 연속으로 네 번 눌렀다. 좀 전과 같은 메시지를 본 것은 물론이다.

 

“저기, 마찬가지예요…….”

 

-뭐 이 새끼가! 동생 살리기 싫어?

 

“분명 비번은 이게 맞아요. 아무래도 엄마가 번호를 변경한 것 같은데요?”

 

-수작부리지 마, 새끼야. 다시 해. 이번에도 안 되면 동생이고 뭐고 없을 줄 알아라.

 

수화기 너머로 시호의 비명이 들려왔다.

 

“자, 잠깐만요. 한 번 더 틀리면 카드를 아예 못 쓰게 돼요!”

 

-그럼 번호 똑바로 쓰란 말야!

 

그는 소리쳤다. 시호의 울음소리는 계속 들려왔다.

 

“그럼 아버지께 전화로 물어볼게요. 어차피 그렇게 비밀번호 알려고 한 거잖아요.”

 

생각보다 잘 되고 있다. 이렇게 손끝의 힘까지 다하여 시간을 끌다가 가진 패가 고갈되면 그때엔 소란 누나의 카드를 쓰면 된다. 나는 머릿속으로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가늠해 보았다. 아버지께 전화하는 척하며 인로에게 전화를 걸 것이다. 감시인이 대화를 듣는다는 가정 하에 인로에게 위치를 알리고 지시사항을 전달받는다. 그러고 나서 카드 몇 장을 더 소모한다면 인로가 날 발견할 때까지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것이다. 변명거리는 생각해 뒀다. 아버지가 알려준 비밀번호에 해당하는 카드가 이것이 아니었다고 말하면 된다. 말은 가급적 천천히. 틈틈이 놈에게 말을 거는 것도 잊지 말자.

 

-좋아. 3분 준다. 3분 있다 전화할 때 못 받거나 못 알아내면 그걸로 끝이다.

 

전화를 끊었다. 나는 다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다시 얻기 힘든 기회일 것이다. 인로에게는 아버지께 말하는 척 하면서 시장 근처 편의점이라는 단어만 전달하면 적당할 듯했다. 내가 들고 있던 전화는 어머니의 것. 인로의 번호는 저장돼 있지 않지만 다행히 나는 번호를 외우고 있었다. 나는 인로의 휴대폰 번호를 신중히 입력했다.

 

‘고객이 통화중이어서 소리샘으로 연결 됩니다…….’

 

제길! 어쩐지 일이 잘 풀린다 했다. 재차 전화를 걸고 또 내 휴대전화로도 걸어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난 소란 누나의 번호는 외우지 못한다. 주어진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이렇게 소중한 기회를 보내 버리는 것인가 하니 울컥한 마음이 들어 벽에 발길질을 해댔다. 옆에서 누군가와 통화하며 떠들던 녀석은 내 처지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이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해가지고 발 깨지겠어? 기왕 차는 김에 발이 깨지든 벽이 깨지든 끝장을 봐야지.”

 

나는 무심코 그쪽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나는 다시 한번 당황하고 말았다. 내 바로 왼편 상가 건물 입구 계단참에 앉아 인로는 통화를 하고 있었다. 나는 감시가 있을지 모른다는 말을 떠올리고는 재빨리 두리번거리는 궤적에 시선을 담아 회수했다. 지금 경찰이나 소란 누나와 연결 중인 듯했다. 그래서 인로가 통화 중이었던 것이다. 녀석은 전혀 이어지지 않는 말들을 아무렇게나 내뱉어대고 있었다.

 

녀석이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나는 전혀 낌새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내가 묻고자 하는 말에 미리 대답하기라도 하듯 인로는 말했다. 나에게 하는 말에는 힘을 줘서 나에게 충분히 들리게끔 말한다.

 

“전화 끊기 조금 전부터 있었어. 응. 트릭은 나중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일단 할 일은 다 마쳤다고 말해줄게.”

 

경찰도 이곳에 도착했다는 뜻일까? 녀석은 계속 말했다.

 

“걔가 뭘 바라는지 네가 차근차근 말해줬음 좋겠는데. 그래야 일을 어떻게 풀어갈지 결정할 수 있어.”

 

범인의 요구사항을 전해달라는 소리였다. 그러려면 전화가 다시 와야 할 것이다. 나는 전화를 기다렸다. 인로가 옆에 와줬다는 것이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 녀석이 뭘 준비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시장 통에서 나를 찾아낸 인로다. 분명 뭔가 방책을 준비해놨을 것이다.

앞뒤 없고 두서없고 전후 없는 인로의 떠드는 소리, 왠지 중간에 은근슬쩍 내 욕이 들어가 있기도 한 것 같은 소리만이 울리는 한적한 골목이었다. 박동치는 내 심장소리와 함께 다시 휴대폰이 울었다.

 

“네.”

 

-비밀번호는 알아냈겠지?

 

“아버진 통화중이세요.”

 

-이 새끼가 장난 하냐!

 

나는 말을 끊듯이 되받았다.

 

“통화중인 걸 어쩌라고요!”

 

-너 간댕이가 부었구나? 나 성질 급하다. 애 따위야 또 납치하면 돼.

 

잠시 말을 끊는다.

 

-너, 경찰에 신고하거나 한 건 아니지?

 

“그럴 리가요! 그럴 시간도 없었는데요! 말좀 들어보세요. 카드를 한 장만 가져온 게 아니에요. 최근에 만든 거라 번호를 분명히 기억하고 있는 카드를 갖고 왔단 말예요. 그걸론 그쪽이 시킨 대로 현금을 충분히 인출할 수 있단 말예요.”

 

나는 숨도 쉬지 않고 말을 뱉어냈다. 인로에게 말뜻이 전해졌는지는 당장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왜 미리 안 꺼냈지?

 

“지금 생각났을 뿐이에요.”

 

-그래? 그러 해봐. 진짜 이번이 마지막이다, 너.

 

나는 인로 쪽을 곁눈질하며 주머니를 뒤졌다. 그런데 그 자리에 인로는 보이지 않았다. 녀석은 내 뒤로 스쳐 지나가며 말을 흘렸다.

“됐다. 이제 됐어. 아빠가 시키는 대로나 해라.”

 

나는 뒤를 돌아볼 뻔 한 것을 간신히 억눌렀다. 정말 그러면 된다는 것인가? 그게 작전이란 말인가? 인로는 어디론가로 사라져가며 한마디를 마저 남겼다.

 

“날 믿어.”

 

이제는 믿는 수밖에 없잖은가.

 

나는 범죄를 저지르는 기분으로 소란 누나의 카드를 기계에 집어넣었다. 출금 버튼을 눌렀다. 기계는 비밀번호를 물었다. 나는 그 번호를 기억하고 있다. 0923. 차분히 숫자를 눌렀다. 문득 이 숫자가 생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쓸데없는 생각. 출금 액수를 선택해야 한다. 최대 액수는 100만원이었다. 출금 반복으로도 시간이 꽤 흐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터치스크린의 100만원 버튼을 지그시 눌렀다. 명세표를 받겠느냐는 메시지. 아니요를 눌렀다. 카드를 뽑으면 현 금이 지급된다는 메시지가 떴다. 카드를 뽑고 나로서는 평소 만져보기 힘든 두꺼운 지폐 다발을 집어 들었다.

 

“나왔어요. 백만 원. 이게 한 번에 뽑을 수 있는 최대예요.”

 

-잘했어. 이제 그렇게 끝까지 뽑아. 다시 말하는데, 만족할 만큼 안 나오는 건 안 한 거랑 마찬가지야.

 

나는 카드를 다시 삽입했다.

 

누나는 돈을 어떻게 써도 좋다고 말했지만, 더럭 겁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그래도 괜찮을까. 나는 또다시 버튼을 눌러 백만 원을 빼냈다. 돈의 두께다 두 배로 늘어나니 마음의 무게도 두 배로 늘어난 것 같았다. 역시 부모님께 알렸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른이라고 납치, 협박 전화에 달리 방도가 있겠냐마는,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어른들 몰래 일을 꾸민다는 것의 불안감, 지금의 선택만큼은 청소년의 굴레에서 벗어난 나의 권한이고 책임이라는 압박감이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나는 지금 범죄 행위를 돕고 있다. 아무리 협박받고 있다 하더라도 내 손으로 범인에게 돈을 건네는 것이다.

 

-몇 번이나 뽑았지?

 

“이백……. 더 해야 하나요?”

 

-끝까지 해.

 

나는 다시 카드를 집어넣었다. 세 번째로 돈을 인출하고 또 집어넣었다. 네 번째. 이번에도 오류 메시지 한번 없이 돈뭉치가 뿜어져 나왔다. 소란 누나는 대체 얼마를 가지고 있던 것일까. 마치 돈 만드는 기계 앞에 서 있는 것 같았다. 다섯 번째에는 명세표를 끊어 보았다. 잔고가 얼마나 있는 건지, 들여다보고는 재빨리 그것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아직도 계좌에는 2천만 원 이상이 남아 있었다. 재수생이 뭔 돈을 그렇게 많이 갖고 다니는 거지?

 

그 돈을 모조리 인출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나는 거기서 그치기로 했다. 이정도면 범인도 충분히 만족할 것이다.

 

“다 했어요.”

 

-얼마지?

 

“5백이요.”

 

-정말 그거밖에 없어?

 

나는 상대가 확인할 수 없음을 알았지만 저항하는 것처럼 말했다.

 

“몇 십만 원밖에 안 남았어요. 나머지도 다 찾아드려요?”

 

-됐다. 거스름돈은 팁이다. 크큭.

 

농담으로 말했는지 그는 혼자서 웃었다. 당연히 나는 맞받아줄 기분이 아니었다.

 

범인은 다시 말했다.

 

-이제 다 끝났어. 앞으로도 말 잘 들으면 시호는 살 거야.

 

“네. 이제 계좌를 불러주세요.”

 

-아니. 너는 지금 돈을 모두 봉투에 담는다.

 

현금지급기 옆에는 현금을 담을만한 봉투가 있었다. 나는 영문은 몰랐지만 시키는 대로 했다. 지폐 다발은 봉투 두 개에 나뉘어 들어갔다.

 

-이제 봉투를 꼭 잡는다. 떨어트리면 안 돼. 그러고 그대로 오른쪽 큰길로 나가.

 

나는 봉투를 오른손으로 들고 왼손으로는 휴대폰을 받친 채 큰길가로 나갔다. 차도와 맞닥뜨리고는 왼쪽으로 돌았다. 나는 인도를 따라 또다시 기약 없이 걷기 시작했다. 놈은 이번에도 목적지를 알려주지 않았다. 나도 묻지 않았다. 마주 오는 찻바람에 꽃나무 잎들이 휘날렸다. 환장하도록 좋은 날씨였다. 나는 티끌이 들어간 눈을 비비며 금방이라도 새파란 물감이 머리위로 뚝뚝 떨어질 것만 같은 하늘을 올려 보았다. 꽃잎이 그 파란 하늘을 수놓으며 일시 점묘화를 그렸다.

 

머얼-리서 모터 소리가 가까워왔던 것 같다. 눈을 돌렸을 때 나는 검은 헬멧이 나로부터 고개를 돌리는 광경을 스냅샷처럼 볼 수 있었다. 손을 무언가가 세차게 치고 지나갔다. 오토바이는 그대로 등을 돌리고 멀어져 갔다.

 

의아해한 것은 잠시였다. 나는 놈이 현금을 들고 나오라고 한 일로부터 그 오토바이의 정체를 어렵지 않게 유추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뭔가 묘한 느낌이 드는 걸 지울 수 없었다. 내 역할이 이걸로 끝났다는 것이, 쉽사리 납득이 되지 않았다.

 

-좋아. 시호는 한 시간 뒤에 풀어준다. 잘 해줬어. 네가 동생을 구한거야.

 

전화는 아직도 연결 중이었다. 그 말을 끝으로 놈과의 통화도 끝났다. 그는 그렇게 격려해줬지만 그런 말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나는 달궈져 증발하기 직전인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아, 번호판이라도 볼걸 그랬다. 아니, 이 정도로 준비한 자들이라면 번호판 정도면 진작 처리해 뒀겠지. 자문자답하면서 나는 우두커니 서서 오토바이가 사라져간 방향만을 바라보았다. 문득 영화의 마지막 장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크레딧이 올라가고 패배자는 영원히 마지막 장면에 남겨진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소란 누나와 인로가 내 앞에 서 있었다. 여기가 어딘가 둘러보니 여전히 길 위였다.

 

“잘 했어.”

 

인로는 말했다. 그 말이 빈정거리는 것만 같이 들렸다. 하지만 항의할 수는 없었다. 나는 눈을 뻔히 뜨고 소란 누나의 돈을 빼앗겨 버렸으니까. 나는 고개를 숙이고는 말했다.

 

“미안해.”

 

하지만 인로는 말했다.

 

“아니, 정말 잘 해줬어. 네 덕분에, 범인을 잡을 수 있을 거야.”

 

뭐라고?

 

나는 그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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