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이정표

5장 - 세연2 (1)

Write

Article Menu

facebooktwittergoogle pluspinterestkakao storyband
  • 10:37 Jul 28, 2010
  • 4325 views
  • LETTERS

  • By 노유

1

 

녀석은 천연덕스럽게도 말한다.

 

-아이 참, 갑자기 소리는 왜 지르고 그래?

 

나는 거의 울먹이기 직전에서 소리쳤다.

 

“너,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어디 가려면 말을 하고 가야 될 거 아냐!”

 

-전화 할 때마다 통화중이었던 게 누군데 그래!

 

“아오, 진짜,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고…….”

 

납치 전화가 온 것이 녀석 탓이라 할 수도 없으니 더 윽박지르지도 못한다.

 

나는 사건의 경위를 밝힐 마지막 실마리에 대해 물어 보았다.

 

“너, 어제 준 이름표 어쨌어?”

 

-목걸이 이름표?

 

“응. 주소랑 전화번호 적힌 거. 그거 아무데나 버렸지?”

 

-아안 버렸어.

 

녀석은 초등학생스럽게도 발뺌하고 본다.

 

“거짓말 마. 그거 버렸잖아. 내가 땅에 떨어져 있는 거 봤어.”

 

나는 거짓말로 추궁해 보았다. 녀석은 한층 수그러든 목소리로 으응, 하고 말했다. 나는 수화기를 잠시 떼고 인로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었다. 인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쯤 되면 굳이 인로가 해설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시호는 주소와 전화번호가 적힌 이름표를 길에다 버렸고 그것을 우연히 주운 할 일 없는 사기꾼들은 거기 적힌 번호로 전화를 한 것이다.

 

“동생이 확실해?”

 

강 형사가 물었다.

 

“네. 지금 제 친구랑 같이 있나 봐요.”

 

“다행이네.”

 

소란 누나는 가슴에 손을 얹고 한숨을 내쉬었다. 인로도 안도한 표정이다. 시호도 마냥 큰소리치지는 못한다. 제가 자세한 사정은 알지 못하더라도 멋대로 사라져버린 죗값은 알고 있을 테니 말이다.

 

이제 정말로 끝이다. 범인은 곧 붙잡힐 것이다. 돈도 당연히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물속에 한참 동안 들어가 있다 나온 기분이다. 가슴을 조여 오던 무언가로부터 일순 해방된 느낌이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긴장은 그렇게 허무하리만치 가볍게 해소돼 버렸다. 다행이다. 몹시 다행한 일이다. 나는 마음속으로 신에게 감사 인사를 올렸다. 신이란 자도 하루 만에 날 잊어버리진 않겠지. 이 순간만큼은 누구에게라도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로, 다행이다.

 

“너 지금 세연이랑 있는 거야?”

 

세연과 함께 있으니 세연의 전화로 걸었겠지만 나는 물었다.

 

-응! 언니네 와서 놀았다!

 

“네가 세연이랑 연락이 됐을 리는 없을 텐데. 어제부터 약속했던 거냐?”

 

-응. 오늘 오빠 떼놓고 둘이서만 놀기로 했어.

 

그 말에서 약간의 소외감을 느꼈지만 개의치 않기로 했다.

 

“그래, 그래서 재호네 간다고 뻥까지 치고?”

 

-가긴 갔어. 금방 나왔지만.

 

시호는 잠시 우물거리더니 말했다.

 

-왜 그래? 많이 걱정 했어?

 

“걱정하고 자시고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거든? 아니, 됐다. 세연이나 바꿔줘 봐.”

 

-언니 지금 화장실에 있어.

 

“그래? 그럼, 있다가 다시 전화 할게. 세연이네 집이야?”

 

-응.

 

“있다 전화 할 거지만 내가 데리러 간다고 전해줘. 거기서 꼼짝 말고 있어야 돼.”

 

-알았어, 알았어. 그런데 내가 사라졌으면 언니랑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한 거야?

 

그래. 둔해서 미안하다.

 

전화를 끊고 나는 사람들에게 정황을 설명해 주었다. 어제 박물관에 가서 주소와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힌 이름표를 달아준 일과 시호가 그것을 아무렇게나 내버려 버렸다는 것. 당연하게도 모두들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트렸다.

 

“그럼 결국 보이스 피싱이었다는 거네?”

 

소란 누나가 말했다.

 

“그런 셈이죠. 우린 좀 더 쓸데없이 허둥댔지만요.”

 

“조금 어이없지만, 이걸로 사건은 끝인 것 같네. 다행이지 정말.”

 

강 형사도 말했다.

 

“재훈아. 그 이름표에 뭐가 적혀 있었는지 전부 말해줘 봐.”

 

인로가 말했다.

 

“말한 게 전부야. 시호 이름, 집 전화번호, 집 주소.”

 

“잘 떠올려 봐. 그것 말고는 전혀 없어?”

 

나는 그렇다고 말했다. 인로는 알았다고 말했다.

 

“이제 바로 범인 체포에 들어가는 건가요?”

 

나는 강 형사에게 물었다.

 

“그렇지. 인질도 무사한 것으로 확인됐으니 말야. 애초에 인질도 아니었지만.”

 

“시호도 괜찮은데 제가 할 일이 또 있나요?”

 

강 형사는 숨을 크게 들이키며 대답했다.

 

“너넨 그만 돌아갈래? 피해자 진술을 해야 하지만 그것도 우리가 대충 하면 되지. 아, 돈은 찾아가야지?”

 

“저도 일단 집에 갈게요. 돈은 나중에 혼자서 찾으러 가죠. 바쁘실 테니까요.”

 

소란 누나는 말했다.

 

나도 당연히 돌아가겠다고 대답했다. 귀찮은 일을 면해준다는데 마다할 수야 없지. 나는 어서 돌아가 쉬고 싶을 뿐이었다. 내 생에 가장 피곤했던 주말이었다. 정신적 스트레스가 이토록 체력을 갉아먹을 수 있다는 것을 이번에 와서 처음 알았다.

 

“그래? 그럼, 도 형사님.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겠네요.”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바뀐 것은 하나도 없는 것 같다. 세연과는 결국 아무 일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시호가 두 번이나 사라지긴 해도 해프닝으로 그치고 말았으니 말이다. 그렇다. 아무 일도 아니다.

 

도 형사는 강 형사의 지시에 투덜대며 차를 돌렸다. 우리 때문에 오가게 되어 조금은 죄송스럽기도 하지만 강 형사에 따르면 경찰은 국민의 충실한 심복이어야 한다니 그 권리를 누릴 수밖에.

 

경찰들은 다시 우리를 집에 데려다 주었다. 나는 고맙다는 인사를 몇 번이나 한 뒤 차에서 내렸다. 강두원 형사는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오늘은 고생 많았으니 푹 쉬라는 말도 곁들여 준다. 강 형사는 소란 누나와 인로에게도 한 마디씩을 건네고야 차에서 내보내 주었다. 정말 사람 좋고 직업 정신이 투철한 경찰이었다. 모든 경찰이 그와 같다면 한국은 아마 세상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가 될 테다.

 

인로는 문을 닫으려 손잡이를 쥐고서 강 형사와 뭔가 이야기를 나눴다. 잠시 후, 문을 닫는 소리와 함께 차가 출발했다.

 

“또 경찰한테 시킬 게 있었어?”

 

나는 골목길로 들어서며 인로에게 물었다.

 

“응? 아, 나중에 범인이랑 사건 경위를 자세히 알려달라고.”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아?”

 

우리가 겪은 일로도 사건의 진상으로서는 충분하지 않느냐는 소리였다.

 

“범인의 동기랑 심리나 자세한 계획 같은 건 우리가 모르잖아.”

 

누가 탐정병 환자 아니랄까봐. 녀석은 내일 세상이 멸망한다면 그렇게 만든 범인을 찾으려 할 놈이다. 당연히 나는 범인의 행적 따위에는 관심 없다. 그저 지금 할 일을 다 하고 빨리 쉬고 싶을 뿐이다. 해야 할 일이란 물론 시호를 데려오는 것이다. 아무 일이 없었다고 해도 혼자 멋대로 놀러 나간 녀석을 오빠로서 챙길 필요가 있다. 부모님께는 저녁 때 한 자리에 있을 때 말씀 드릴 생각이다. 아무 것도 아닌 일로 걱정 끼쳐드릴 수는 없으니까. 시호 녀석을 만나면 독단적 행동이 얼마나 주변 사람들을 피곤하게 하는지를 개인정보의 중요함을 곁들여 설교해 줘야지.

 

“아차, 이거 돌려줘야죠.”

 

나는 소란 누나에게 은행 카드를 내밀었다. 그리고 말했다.

 

“그리고 정말 고마웠어요. 이렇게 선뜻 카드까지 빌려주시고, 또,”

 

“우리 사이에 뭘. 고마우면 나중에 맛있는 거나 사줘.”

 

누나는 카드를 받고는 확인조차 하지 않고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누나는 들어갈 거죠? 난 시호 찾으러 갔다 올게요.”

 

“그래. 다신 동생 잃어버리지 마라.”

 

누나는 대문을 닫고 집으로 들어갔다. 대문 앞에 서있는 우리를 보고 낑낑대고 있던 갤러거가 대문 소리에 한 번 짖어 본다. 녀석에겐 미안하지만 밥은 시호를 찾으러 다녀와서 줘야겠다.

 

“넌 어쩔 거야? 집에 갈래?”

 

인로에게 말했다. 인로도 피곤했는지 좀 전부터 표정이 좋지 않았다. 인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 가야지. 오늘 할 일도 남았는데.”

 

“난 할 일이고 뭐고 시호 데려오고 바로 잘 거다. 지금 몸이 말이 아니야.”

 

“그래…….”

 

인로는 할 말이 남은 듯, 뭔가 신중히 생각하는 것 같은 표정을 하고는 말을 줄였다. 그러다가 말했다.

 

“아니다. 시호 데리러 같이 가자.”

 

“그럴래?”

 

“응. 아무래도 그 시호가 진짜 시호인지 확인해봐야겠다.”

 

나는 피식 웃으며 세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는 세연이 우리 집과 멀지 않은 곳 어딘가에 산다는 것만 알 뿐이지 자세한 집 위치는 모른다. 이번에 전화를 받은 것은 세연이었다.

 

“아.”

 

-어.

 

우리는 동시에 말을 하려다 동시에 멎었다. 나는 순서를 주워 담듯이 말을 했다.

 

“시호 데리고 있지?”

 

-응.

 

“갑자기 사라져서 잃어버린 줄 알았다고.”

 

-그래? 난 말하고 온 줄 알았어.

 

“지금 돌려받으러 가도 돼?”

 

-조금 늦었지? 내가 데려다줄게.

 

“아냐, 번거롭게 뭘. 내가 데리러 갈게. 어디야?”

 

-집.

 

“나 너네 집 어딘지 모르는데.”

 

-그니까 내가 간다니까. 어차피 있다가 나가야 돼.

 

“내가 갈게. 어떻게 가는지 알려줘.”

 

-뭐, 그럼. 중학교 때 한 번 오지 않았어? 과제 하느라.

 

그러고 보니 세연과는 조별 과제를 함께 했던 추억이 있었다. 우리 조가 세연이네 집에서 모이기로 했었는데, 그날 나는 모종의 이유로 함께하지 못했다. 그때가 유일한 기회였다. 내가 세연이네 집에 갈 수 있었던.

 

세연은 집 위치를 담박하게 알려주었다. 나는 가는 길을 대략적으로 그릴 수 있었다.

 

-왜, 무슨 일 있어?

 

세연은 물었다. 있다마다. 나는 오늘 있었던 일을 성토해보려다가 직접 만나 얘기하는 게 낫겠다 싶어 관뒀다. 나는 곧 그리로 가겠다고 말했고 세연은 알았다고 했다.

 

“근데 너 세연이랑 아직도 어색하냐?”

 

전화를 끊자 인로가 물었다. 나는 뭐라 대답할지 알 수 없어서 솔직하게 말했다.

 

“모르겠어.”

 

“옆에서 보니까 넌 세연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것 같다.”

 

“그런가?”

 

그렇게 보이나 보다.

 

“나 몰래 누구랑 치정극이라도 벌였냐?”

 

“무, 무슨 소릴…….”

 

차라리 그런 깔끔한 일이었으면 좋겠다. 무엇이 문제인지 알 수 없는 관계였다. 어떻게 해야 세연과 자연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아니, 그전에 자연스러운 관계란 대저 무엇이었을까. 나는 중학교적 우리 사이를 기억하려 해 보았다. 하지만 그때도 딱히 특정지어서 설명할 수 있는 사이는 아니었던 것 같다. 세연은 누구와도 무난히 어울렸고 누구에게나 똑같은 표정을 지었으며 누구에게나 사랑받았다. 수많은 친구들 중에서 내가 특별히 위치할만한 자리는 없었다. 그래도 고백하기 이전에는 이렇게 의식하거나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좋아한다고 느끼고 있었다 하더라도 지금처럼 불편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역시 의혹이 나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아서인 것 같다. 나는 세연에게, 세연은 나에게 우리는 서로의 눈을 반쯤 가리고 있다. 이 목구멍에 무언가가 걸린 듯한 답답함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리라. 세연이 대답을 닫아버린 이상, 새로이 화제를 꺼내기는 힘들다. 그렇다면 나는 언제까지 이 상태를 견뎌내야 하는 걸까?

 

그렇게 걷고 있을 때, 인로는 전화를 받았다. 나직하게 대답을 몇 번 하던 인로는 전화를 끊고 나서 말했다.

 

“미안한데, 나 가봐야겠다.”

 

“뭔 일인데?”

 

“범인 검거했다는데 진술이 엇갈리는 데가 있어서 내가 증인으로 몇 가지를 더 대답해 줘야 한다나봐.”

 

“난 필요 없고?”

 

“응. 한 명만 오면 된대. 내가 더 말을 잘 할 테니까 내가 가는 게 낫겠지?”

 

그건 그렇다만 사건 당사자는 인로보다 나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인로는 기어코 혼자 가겠다고 했다. 왠지 인로가 내 사정을 보주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더는 사건에 관여하고 싶지는 않지만 친구로서 미안한 일이다.

 

“괜찮다니까. 넌 빨리 시호나 보러 가. 경찰서 구경도 내가 해보고 싶었던 일이야.”

 

그렇게까지 말하면 나는 거절의 형식을 띨 수가 없다. 그래서 인로만 보내기로 했다.

 

손을 흔들고 등을 돌리려는 차, 인로가 말했다.

 

“아차, 어머니 휴대폰 좀 잠시 빌려줄 수 있어?”

 

“응? 이건 왜?”

 

“통화 내역 조사할 때 필요할지도 몰라.”

 

나는 어머니의 휴대폰을 넘겼다. 인로는 그것을 받아 잠시 내려다보고는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인로는 내 눈을 한 번 들여다보고는 몸을 돌려 걸어 나갔다. 문득 지나가는 얼굴에서 내게 무언가를 말하려는 표정이 비춰진 듯했다. 기분 탓이었을까. 나는 무슨 뜻일까 고개를 갸웃하다가 다시 갈 길을 걸었다.

 

 

세연의 집은 우리 집 같은 다층 주택이었다. 우리 집을 처음 찾은 사람이 겪는 고충, 어느 층 어느 문이 찾으려 하는 집인지 알 수 없다는 고충을 나는 그대로 느꼈다. 두 초인종 중 어느 것을 누를까 고민하던 차,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깡통 굴러가는 것 같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몇 발짝 뒤로 물러서서 나오는 사람을 보았다. 역시나 시호의 목소리였다. 나는 이름을 부르고 손을 흔들었다. 시호에 이어서 세연이 따라 나왔다. 기타를 메고 있었다. 오늘도 연습이 있는 모양이었다.

 

“오빠아!”

 

시호는 소리를 지르며 달려 나왔다. 대문을 열고, 내 앞에 섰다. 나는 넘어지듯 녀석을 덮쳐 끌어안았다. 갑작스런 포옹에 녀석은 어리둥절, 나를 밀치려 했지만 나는 놔주지 않았다. 시호였다. 시호다. 납치당해 울고 있는 시호가 아니라 이렇게 밝게 웃고 아무런 걱정 없이 떠드는, 진짜 시호다. 나는 울어버릴 것만 같았지만 간신히 참아내었다. 이 말썽쟁이가 이토록 반가운 것은 갓 태어나 꼼지락대던 녀석을 처음 봤을 때 이후로 처음이다. 나는 몇 번이고 녀석의 손이며 볼갗을 조물거리며 확인했다. 이건 틀림이 없었다.

 

“뭐야. 몇 년은 못 본 것처럼.”

 

세연도 내 곁에 와 섰다. 고작 몇 시간 헤어져 있었지만 나는 몇 번 정도가 아니라 평생을 못 볼 줄 알았다. 그렇게 한참동안 시호를 피부로 실감하다가 비로소 일어났을 때 세연은 다시 말했다.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심각한 일이야?”

 

"아니. 심각한 일인 건…… 아니, 그렇긴 한데, 심각한 일은 아니야."

 

"무슨 말이야?"

 

"들어보면 알아."

 

나는 사건의 인과를 밝혀서 말해줄까, 내가 겪은 대로 극적 효과를 넣어서 말해줄까 잠시 고민했다. 그러다 내게 말주변이 별로 없다는 것을 떠올리고는 그냥 결론부터 말해주기로 했다. 어제 시호에게 적어준 이름표를 잃어버린 일, 그것을 손에 넣은 사기꾼들이 보이스 피싱을 걸어온 일, 인로의 활약으로 범인을 소탕할 수 있었던 일, 인로는 나머지 진술을 하러 경찰서로 보내고 나는 시호를 찾으러 여기로 왔다는 것까지 차례로 이야기해 주었다. 시호는 내 말을 이해했는지 어쨌는지 입을 동그랗게 모으고 고개를 끄덕였고 세연은 놀라움을 감추지 않은 표정으로 내 이야기를 경청했다.

 

"걱정 많았겠네. 내가 시호를 말없이 데려가서."

 

"무지 걱정했지. 이틀 연속으로 심장을 떨어트리는 줄 알았다니깐."

 

세연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굳이 따지자면 오늘 소동의 원인은 세연에게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탓할 생각은 없었다.

 

"널 탓하려는 건 아냐. 그냥 오늘 이런 일이 있었다고 말해주는 건데……."

 

나는 책임을 추궁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비칠까봐 서둘러 말했다.

 

"그래도, 미안해. 미리 연락을 줬어야 했는데. 너무 늦기 전에 전화 하려고 했는데 그만 깜빡 잊었어."

 

"사과할 거 없어. 어쨌든 아무 일 없잖아. 또 나쁜 건 그 놈들이고."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시호가 말했다.

 

"오빠. 그럼 나 납치됐던 거야?"

 

초등학생이면 아직 보이스 피싱 개념을 이해하지 못 할라나? 나는 시호에게 보이스 피싱 사기를 대충 예시를 들어가며 설명해 주었다. 설명을 들은 시호는 말했다.

 

"우와. 똑똑한 놈들이네."

 

누군지는 몰라도 가장 처음 이 사기를 생각한 녀석은 똑똑한 녀석이긴 할 거다. 나는 어린이에게 올바른 가치 판단 기준 확립에 도움이 되는 말을 해주었다.

 

"똑똑한 머리를 좋은 데다 써야지. 이렇게 나쁜 사람이 똑똑하면 우리 같은 선량한 사람이 더 피해를 본다."

 

좋아. 이 정도면 훌륭한 오빠 역할은 다한 거겠지? 하고 의기양양해 있는데 시호는 내 가르침이 무색해지도록 말한다.

 

"속는 놈이 바보 아냐."

 

그게 걱정해준 오빠한테 할 소리냐?

 

어쨌든 우리는 걷기 시작했다. 차림새대로 세연은 밴드부 연습을 간다고 했다. 나는 공연을 하느냐고 물었고 세연은 이번 달 안에 지역 문화센터 행사에 참여한다고 했다. 평일 수업 결과 내고 가는 거니 올 생각은 말라고 못을 박는다. 세연이네 밴드는 작년에 발족해서 지역 사회 내에서 꽤나 인지도를 쌓고 있는 밴드라고 한다. 다른 학교 밴드가 축제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반면, 학생 행사가 전무하다시피한 우리 학교에서는 동아리 활동을 하려면 외부로 나가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실력만 봐도 유명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대화 도중 의미심장한 키워드를 발견했다. 우리 학교에 축제가 없다고?

 

“있긴 있어, 그런데 만화 같은데 나오는 걸 기대하지는 마. 언니들 말로는, 학예 발표회 수준이라니까.”

 

음, 딱히 고등학교 축제를 기대하거나 상상했던 것은 아니지만 조금은 실망스럽다.

 

그래도 네 공연은 볼 수 있겠지? 하고 말하려다 입 언저리가 가려워져서 그만두었다. 그것으로 대화가 끊겼고 우리는 별다른 말없이 집에 도착했다. 도착하고 나서야 생각하는데, 우리 집으로 오면 세연이 갈 교회와는 조금 멀어지게 된다.

 

"뭐 어때. 걷고 싶었는걸."

 

나 때문에 돌아 온 것이 아니냐고 묻자 세연은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걸 핑계 삼아 세연을 좀 더 바래다주기로 했다. 세연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한 뒤 시호를 데리고 집에 올라갔다. 어머니가 와 계셨다. 휴대폰을 못 봤느냐고 물으시길래 나는 경찰에게 맡겼다고 말하고는 잠시 나갔다 와서 설명해 주겠다고 하며 시호에게 초벌 설명을 맡겼다. 어차피 아버지 오셨을 때 다시 설명 드려야 할 테니까 맡겨 놔도 되겠지.

 

이제 단둘만 남았다. 우리는 말없이 걸었다. 세연은 기타 가방을 맨 채 묵묵히 걸을 뿐이었고 나는 그런 세연을 힐끔거리며 약간 뒤쳐져서 따라 걸었다. 침묵이 조금 무거워서 들고 가기가 힘들다. 시호가 있을 때에는 조금 조용해질라치면 녀석이 알아서 떠들어 줬지만 둘이서는 이야기가 이어지지 않는다. 뭐라도 이야깃거리를 만들어야 했다. 무슨 이야기? 화젯거리는 많이 있다. 시호가 없으니 시호에 대해 떠들 수도 있고 오늘 사건을 자세히 이야기해줄 수도 있고 밴드부 이야기를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어제 하다 만 이야기도 있다. 소란 누나가 분명히 물어보라고 했던 그 이야기가 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세연이었다.

 

"죽다 살아난 기분이었지? 시호를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으니까. 그것도 두 번씩이나."

 

당연한 것을 묻는다. 나는 별다른 수식 없이 응, 하고 대답했다. 세연은 또 말했다.

 

"보이스 피싱이란 게, 피해자가 애초에 대꾸를 안 했으면 다 되는 거잖아. 물론 전화 받는 입장에서는 앞뒤 따지기가 어렵겠지만."

 

"응. 인로라서 알아챌 수 있었지."

 

"인로가 그런 쪽으로 두뇌 회전이 빠른가봐?"

 

"말 안 했나? 인로는 추리 매니아야."

 

세연은 몰랐었다고 말했다. 학원에까지 가서 탐정 운운 하지는 않았겠지.

 

트럭 하나가 우리 곁을 지나갔다. 그 소리에 잠시 대화가 끊겼다. 기분 나쁜 매연 냄새에 나는 잠시 숨을 멈췄다. 조용해지자 세연은 말했다.

 

"만일 네가 돈을 범인에게 줘버렸다면 많이 억울했겠지?"

 

작전의 자세한 정황은 설명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세연은 돈을 뺏겼다는 사실을 모른다. 하지만 다시 되찾은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굳이 정정해줄 필요는 없다.

 

"그랬겠지."

 

"결국 넌 아무 것도 아닌 일에 괜히 걱정한 거잖아."

 

세연은 계속 말했다.

 

"살다보면 그런 일이 꽤 많지 않을까. 무지 심각해 보이는데 실상은 아무 것도 아닌 일. 별일 아닌데 엄청난 비밀이 숨어 있을 것 같은 일."

 

아무 일도 아니다. 그렇다. 아무 일도 아닌 것이다. 어제 일도, 그리고 오늘 일도. 큰일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모두 내 착각이나 두려움에서 비롯된 일일 뿐이었다. 그래서 어른들은 우리를 비웃는 건지도 모른다. 너희의 고민은 누구나 다 겪는 것이다. 지나고 나면 추억거리밖에 되지 않는 널리고 널린 이야기일 뿐이다. 그렇다면 그런 어른들을 그들보다 더 세상사에 초연해진 어른이 본다면 뭐라고 말할까? 그들이 우리에게 말한 것과 똑같은 말을 하게 될까?

 

모르는 일이다.

comment

권한이 없습니다.
서버에 요청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