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이정표

5장 - 세연2 (2)

Write

Article Menu

facebooktwittergoogle pluspinterestkakao storyband
  • 10:43 Jul 28, 2010
  • 4661 views
  • LETTERS

  • By 노유

2

 

우리 집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을 걷고 있었다. 언덕길이 있었는데 겨울에 눈이 얼면 동네 꼬맹이들이 썰매를 타기도 할 정도로 약간 가파른 길이었다. 비탈길 끝자락 다른 골목과 만나는 곳에 사고가 난 듯했다. 두 사람이 넘어져 있었고 길 가던 사람 몇몇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고개 돌려 지켜보고 있었다. 구경꾼 몇몇이 말을 걸었다가 그대로 지나치는 것을 봐서는 크게 다친 것 같지는 않았다. 세연이 갈 길은 그쪽이 아니었지만 세연은 한번 보고 가자고 했다.

 

놀랍게도 쓰러져 있는 것은 인로였다. 게다가 곁에는 자전거가 내동댕이쳐져 있었는데 그것은 내 자전거였다. 세연은 인로를 알아보고 달려 나갔다. 나도 바로 뒤따라 달렸다.

 

"인로야!"

 

세연은 상체를 일으켜 앉은 인로 앞에 가 쭈그려 앉았다. 인로는 세연을 보고 약간 놀란 표정을 짓더니 나를 올려봤다.

 

"너 여기서 뭐 하는 거냐? 그리고 저건 내 자전거지?"

 

인로는 실실 웃으며 말했다.

 

"미안, 잠간 빌렸다. 어, 경찰서에 자전거 타고 다녀왔거든. 세연이는 안녕. 결국 이런데서 만나네."

 

자전거를 돌아보더니 다시 씩 웃는다.

 

"괜찮아? 다치진 않았어? 아니, 다쳤네! 피 나잖아!"

 

세연은 소리 높여 말했다. 인로의 팔꿈치에 피가 맻히고 있었다.

 

"경찰서가 자전거 타고 갈 수 있는 거리냐? 암튼 저 사람도 다친 것 같은데. 병원부터 가자."

 

나는 손을 내밀었다.

 

"그래. 병원 가자. 저기도 괜찮아요?"

 

세연은 엎어져서 꿈틀대는 사람에게도 말을 건다.

 

"어, 아냐, 아냐. 난 멀쩡해. 나 일어날 수 있어."

 

인로는 팔로 세연을 가로막더니 비틀거리며 일어서 본다. 아무리 봐도 멀쩡해 보이지는 않는다. 인로는 이어 말했다.

 

"너넨 어디 가던 길 아니었어? 가던 길 가. 난 저 사람이랑 둘이 해결할게."

 

"가던 길 가라니. 네가 다쳤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나는 말했다.

 

"맞아. 우린 그리고 그냥 지나가던 길이야. 같이 병원 가자."

 

세연이 말했다. 하지만 인로는 손을 내젓는다.

 

"괜찮다니까. 저 사람이랑 우선 사건의 선후관계부터 따져야지. 너네랑 상관없이 매우 오래 걸릴 거야. 병원에도 같이 가야 되고. 그러니까 가던 길 가줘."

 

"그래도……."

 

인로가 그렇게 말하자 세연은 말을 흐렸다.

 

"난 정말 괜찮아. 아마 부모님도 오시고 많이 귀찮을 거야. 너넨 너네 일이 있잖아. 그리고 재훈이는 오늘 너무 많은 일을 했잖아."

인로는 왠지 우리 일을 오해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한사코 우리를 보내려는 것 같았다. 어쨌든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같이 있어줄 수는 없을 듯하다. 인로는 나를 떠밀듯 어깨를 두드렸다. 나는 세연에게 어쩔 수 없지 않느냐는 시선을 보냈고 세연도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괜찮아. 이건 내가 해결할 일이야. 또 난 아까 할 일도 있다고 했잖아."

 

우리는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결국 그 자리를 떴다. 인로는 아무리 봐도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언덕을 다시 올라 골목을 꺾어질 무렵, 인로가 자전거를 세우고 쓰러져 있던 사람에게 말을 거는 것이 보였다.

 

 

 

3

 

"무슨 일일까."

 

다시 세연의 집으로 걸으며 나는 말했다. 세연은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말했다.

 

"무슨 일이 있긴 있는 것 같아."

 

"무슨 일일까."

 

"같은 말 재탕하지 마."

 

"미안."

 

세연은 다시 앞서갔다. 세연은 뒷모습마저도 무표정해 보였다. 기타 가망 너머 세연의 뒤통수가 보일 듯 말듯했다.

 

"인로가 과속하다가 그 사람을 친 건 아닐까?"

 

나는 가설 하나를 꺼내 보았다.

 

"인로는 일어설 수 있었는데 그 사람은 계속 끙끙댔잖아. 내가 아는 인로라면 누구보다도 정의의 편인데 그런 사고를 냈다는 걸 밝히고 싶지 않았던 거지."

 

"인로가 정의의 사자 타입이었던가?"

 

세연은 말했다.

 

"추리 매니아라고 했잖아. 인로는 스스로를 명탐정이라 자칭할 정도로 그런데 관심이 많아. 당연히 그런 쪽 아니겠어?"

 

“탐정이라고?”

 

“응. 자기를 명탐정 박인로라고 불러 달래.”

 

세연은 풋 하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러고 보니 탐정 같은 분위기를 내곤 하긴 했어. 생각할 때 서서 턱을 괸다든가 탐정 모자를 쓰고 학원에 온다든가.”

 

탐정 모자라니, 나도 본 적이 없는 모습이다. 내가 인로를 만나는 곳은 주로 학교니까 본 적이 없던 거겠지.

 

세연은 이어서 말했다.

 

“딱히 정의 운운하는 건 아니었는데. 평소에 중얼거리던 말이 있었어.”

 

“진실이 언제나 답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동시에 인로의 말을 읊었다. 내가 입을 다물자 세연은 그 뒷부분을 마저 암송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진실을 추구해야 한다. 하고 말이야.”

 

의미심장한 말이다. 같은 반이었을 때, 인로가 언제나 입에 달고 다니던 말이었다. 고등학교 들어와서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말이기도 했다. 다소 역설적인 그 말의 속뜻을 나는 여러 번 물어봤었지만 대답을 들은 적은 없었다. 세연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그 말은 진실이 맘에 들지 않더라도 항상 진실만을 추구해야 한다는 뜻 아닐까? 진실이 정의가 아닐 수도 있잖아. 탐정 중에서 착한 사람만 있는 것도 아니고.”

 

세연은 말했다.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어차피 추측일 뿐이니까. 인로의 심성이 어떨지도 우리는 추측할 수밖에 없다. 사실 사람의 속내는 다른 사람이 함부로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인로를 안지 3년째 되었지만 아직도 인로를 완전히 안다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인로는 탐정을 자처한다. 비밀보다는 폭로에 더 관심 있는 것이 탐정이다. 그래서 비밀을 오래 간직하고 있지는 않는다. 때가 되면 인로는 비밀을 털어놓는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인로를 대할 때 기다리는데 익숙하다. 그리고 인로는 스스로 입을 열기 전까지는 누구에게도 속내를 들키지 않는다.

 

“요즘 세상에 탐정이라니, 한국엔 추리소설도 없다고.”

 

나는 말했다.

 

“그러게 말이야. 그럼 명탐정 박인로가 해결한 사건 같은 건 있어?”

 

세연은 물었다.

 

“있긴 있지만 밀실 살인이나 미궁에 빠진 사건 같은 건 없었어.”

 

세연은 그래? 하고 대답했고 대화는 다시 끊겼다. 우리는 다시 말 없이 걸었다. 해가 저물 무렵이었다.

 

나는 다시 할 말을 찾아 우물거리다가 말했다.

 

"저, 가방 들어줄까?"

 

기타 가방을 보며 말했다. 배낭처럼 메어진 가방은 세연의 머리 위로 솟아 있다.

 

"됐어."

 

어느새 큰길에 다다랐다. 교회는 횡단보도 너머에 있다. 세연은 뒤로 돌아 루비콘 강을 앞둔 장군처럼 이야기했다.

 

“이제 됐어. 더 안 따라와도 돼.”

 

“으응.”

 

신호등 불이 파란색으로 바뀌고 세연은 나풀거리듯 손을 흔들고는 그대로 건너가 버렸다. 세연의 뒷모습은 점점 작아지다가 버스와 지나가는 차에 가리우더니 어느덧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는 신호가 몇 차례나 바뀌고 나서야 발걸음을 돌렸다. 나는 세연과 무슨 이야기를 하려던 걸까 되짚어 보았다. 뭔가가 입턱에 막혀 튀어나올 듯하면서도 결국 그대로 속에 가라앉은 말. 나는 그 말을 미처 하지 못했다. 너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고백에 대한 진짜 대답은 무엇인지를 나는 묻지 못했다. 그것이 조금 아쉬웠다. 이렇게 둘만이 나란히 걸을 기회가 또 찾아올까? 아니, 그때가 오더라도 나는 다시 한 번 용기를 낼 수 있을까?

 

나는 집으로 돌아갔다.

 

 

 

그날 저녁. 나는 온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낮에 있었던 일을 브리핑 했다. 이번에는 인로와 소란 누나의 도움까지 자세히 이야기할 수 있었다. 어머니는 그래도 용감히 잘 대처했다고 격려해 주셨고 아버지는 어머니 카드를 마음대로 꺼낸 것과 아버지한테 먼저 연락하지 않은 일을 꾸짖으셨다. 그리고 시호는 가벼운 주의를 받았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번 일의 가장 큰 피해자는 다름 아닌 나인 것 같다. 범인의 말대로 뛰어다닌 것도 나고 범인과 대화하느라 진땀 흘린 것도, 가장 걱정을 많이 한 것도 나이다. 소란 누나는 돈을 찾을 수 있을 테고 시호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겪지 않았다. 나중에 경찰 아저씨들을 만나면 이 피해를 보상받을 길은 없는지 물어봐야겠다.

 

어머니는 아래층의 소란 누나를 집으로 불렀다. 어머니는 몇 차례고 고맙다고 말했고 누나는 그에 맞춰서 열심히 손사래 쳤다. 저녁 늦게까지 전화 사기며 범죄에 관한 이야기가 이어졌고 어머니는 수험생을 너무 늦게 까지 잡아두는 게 아니냐는 말로 누나를 내려 보냈다.

누나가 내려가고 나서 나는 방에 들어갔다. 아직까지 인로에게서 연락이 없었다. 경찰서에 간 일이나 범인에 대한 일이나 아까의 사고 일 같은 얘기를 해줄 법도 한데 문자 메시지 하나 없다. 대신 방에 들어서자마자 문자가 하나 왔다.

 

'똑똑. 창밖을 봐요.'

 

소란 누나였다. 나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전통 가옥으로 따지자면 행랑채 역할을 하는, 창이 현관문과 같은 방향을 보고 있는 방이 내 방이다. 내 방에서 창밖을 보면 마당과 골목이 내다보인다. 누나는 마당 의자에 앉아 있었다.

 

"뭐 해요?"

 

나는 고개를 내밀고 말했다.

 

"달빛 받아."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상현인지 하현인지 애매한 모양의 달이 떠 있었다.

 

"별로 밝지도 않구만."

 

"마음으로 받는 거지. 달은 15일중 대부분의 날이 그림자 저 있기는 하지만 원래의 달이 조각나거나 하는 건 아니잖아."

 

"그건 그렇긴 하죠."

 

그렇다면 보이지 않는 한쪽 귀퉁이를 마음으로 본다는 뜻일까?

 

"시호 데리러 가서 세연이 만났지?"

 

누나는 말했다. 그림자 져 얼굴이 잘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나를 비스듬히 올려다보는 것 같다. 내가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나도 고개를 아슬아슬하게 내밀어야 누나의 위치가 보인다.

 

"네."

 

나는 대답했다.

 

"어때, 오늘은 진전이 있었어?"

 

"전혀요."

 

"역시 그랬구나."

 

"역시라뇨, 그럼 내가 말도 못할 걸 예상이라도 했단 얘기……. 아니, 그런데 왜 오늘 이야기를 하죠? 난 어제 일도 보고를 안 했는데."

 

어둠 속에서 입초리가 살짝 올라가는 것이 보인다.

 

"어제 이야기가 밍숭맹숭하게 풀렸다는 걸 인로에게서 들었거든. 인로랑 둘이 남았을 때 물어봤지."

 

인로와 단둘이 남았을 때라면 내가 은행으로 죽어라 내달렸을 때일 것이다. 그 상황에서 잡담이 나오다니. 생각해 보면 사실 아까의 사건에서 가장 침착했던 사람은 인로도 아니고 소란 누나였던 것 같다. 지금 누나는 이미 납치 사건 따위는 잊어버린 듯했다. 사건 당시에도 천하태평이었으니 이미 끝난 일 따위는 신경도 안 쓰는 것이겠지.

 

"기회는 많으니까요."

 

나는 말했다.

 

"바로 옆 학교 다니는데 언제든 만날 수 있겠죠. 또 대답을 못 듣는다 해도 뭐 어때요. 잘 안 풀린다면 시간이 가면 다 잊혀질 텐데요."

 

"너 아직도 세연이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누나는 심장을 찌르는 것처럼 말했다. 나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내가 지금 이렇게 고민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다. 내가 세연에게서 마음을 접었다면 그날의 대답 때문에 지금 이렇게 혼란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 마음이 여전히 세연을 좋아한다고 장담할 수도 없었다. 나는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무엇이 문제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처음에는 그저 오해만 풀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닥조차 잡을 수 없었다.

 

누나는 어둠 속에서 말했다.

 

"쉽게 말할 수 없단 거야, 말하기 부끄러운 거야?"

 

"전자예요."

 

"그렇다면 다행인 일이야. 너는 이미 한번 용기를 냈었고 그 뒤로도 용기를 잃지 않았으니까. 이제 남은 일은 기다려보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해."

 

"기다린다고요?"

 

나는 물었다.

 

"세연이의 비밀이 좀 더 밝혀질 때까지. 그리고 재훈이가 좀 더 용기를 얻을 때까지. 어쩌면 다시 고백할 그야말로 완벽한 타이밍이 올지도 모르지. 너무 초조하게 생각하지 마. 너희들의 연애는 그저 자연스러운 게 좋은 거니까. 너희들이라니까 마치 내가 잔뜩 나이 먹은 것 같이 들리네."

 

누나는 소리 내 웃으며 말을 마무리 했다.

 

"누난 이제 들어갈게. 내일 학원 가려면 일찍 자야 하거든. 안 풀리는 생각이 있으면 언제든 다시 물어봐줘. 친절하게 대답해 줄게."

 

소란 누나는 검지를 가볍게 튕기더니 집으로 들어갔다.

 

초초해 하지 마라. 역시 그것이 답인 것 같다.

 

 

comment

권한이 없습니다.
서버에 요청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