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이정표

5장 - 세연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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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45 Jul 28,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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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노유

4

 

창문을 닫고 휴대폰을 보니 또 문자가 와 있었다. 모르는 번호였지만 내용은 기겁할만 한 것이었다.

 

'난 네가 좋아. 어제 처음 봤지만 첫눈에 반했어. 나와 교제해 줄 수 있겠어?'

 

이게 무슨 소리냐? 이런 난데없는 고백 문자라니? 나는 요동치는 심장을 누르며 몇 번이고 그 문구를 다시 읽었다.

 

머릿속으로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떠올랐다. 우리 반 녀석들이 장난치는 것일까? 일단은 그쪽이 가장 가능성 높아 보였다. 일단 오유리를 비롯하여 욕구 불만을 이런 자학적인 장난으로 풀만한 녀석이 잔뜩 있으니까. 하지만 나는 문자에서 어제라는 단어를 주목했다. 어제 처음 만난 사람이라면 귀쓰바였던가 하는 세연이네 밴드부원밖에 없다. 설마 진짜로 나에게 반한 것? 아니, 그보다 밴드부가 나에게 장난치려 한다는 가능성이 더 높다. 내가 뭐라고 반하기까지 한다는 것이냐.

 

나는 답장 버튼을 눌렀다. 조심스럽게 누구세요라고 써 본다. 당황한 마음을 좀 더 담아 누, 누구세요? 라고 고쳐 본다. 잠시 심호흡 후, 전송 버튼을 눌렀다.

 

문득 다른 방법이 떠올라 재빨리 취소 버튼을 눌렀다. 보낸 편지함을 확인해 보니 다행히 제때 취소된 듯했다. 나는 그 번호를 메모한 뒤 오유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차례의 신호음 뒤, 유리는 전화를 받았다.

 

-어, 뭐야.

 

나는 대뜸 물었다.

 

“너지?”

 

-응?

 

즉각적인 대답이었다. 이는 내 질문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데에 의한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나는 녀석을 용의선상에서 제했다.

 

“야, 너 누나 있지?”

 

나는 물었다.

 

-응? 어, 어. 있는데, 너 어떻게 알았냐? 난 말한 기억 없는데.

 

“너네 누나네 밴드 연습하는 거 구경했거든.”

 

-뭐야? 네가 어째서?

 

“근데 너 누나 말이야.”

 

생각해보니 녀석을 통해 뭔가를 캐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말을 접었다.

 

“아니다. 됐다. 끊어.”

 

나는 악을 쓰는 녀석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전화를 끊었다.

 

친구들에게 일일이 전화해 확인하는 것도 시간 낭비일 듯했다. 나는 세연을 통하며 밴드부원이 장난을 쳤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세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세연은 바로 전화를 받았다.

 

"세연아. 혹시……."

 

밴드부에 내 번호 가르쳐준 적 있니? 이 번호 혹시 아니? 뭐라고 물을까 잠시 고민했다.

 

"끝번호 3324라는 번호 혹시 알아?"

 

전자는 아무래도 의심하는 어감이 베어있을 듯했다.

 

세연은 말했다.

 

-3324? 응. 알아. 우리 밴드부원 번혼데?

 

나는 예상이 맞았음에 안도와 불안을 동시에 느끼며 다시 물었다.

 

"그거 누구 번호야? 방금 그 번호로 문자가 왔는데. 혹시 내 번호 가르쳐 줬어?"

 

-그래? 안 가르쳐 줬는데. 어떻게 알았지? 기다려봐. 확인하고 알려줄게.

 

휴대폰으로 통화중 번호 검색이 가능하다. 버튼 누르는 소리가 몇 번 들리더니 세연이 다시 전화를 받았다.

 

-그거 아령이 번호야. 뭐라고 왔는데?

 

아령이라면 나와 이야기도 한번 안 나눠본 사람이다. 그런데 어째서? 나는 잠시 뒤 다시 전화하겠다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나는 답장을 해야 했다. 그것도 서둘러야 할 것 같았다. 이를 수상하게 여긴 세연이 홍아령에게 전화를 걸어볼지도 모른다. 나는 다시 문자를 확인했다. 당연하게도 메시지는 토씨 하나 바뀌지 않고 그대로였다. 나는 다시 한 번 내용을 숙지한 뒤 답장 버튼을 눌렀다.

 

초조함을 느끼며 나는 메시지 보낼 문구를 생각해 보았다. 먼저 장난인지 아닌지부터 밝혀야 한다. 당연히 장난 쪽으로 중심을 두는 것이 합당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진심일 가능성을 아예 무시할 수는 없다. 나는 고심하여 문장을 만들어 냈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완벽한 대답이었다.

 

'잘못 보내신 것 아닌가요?'

 

이러면 상대의 반응도 끌어낼 수 있고 양쪽 가능성에 모두 대답할 수 있다. 나는 답장을 기다렸다.

 

진동이 오자 나는 반사적으로 휴대폰을 열었다.

 

'네? 누구세요?'

 

내용은 그게 다였다. 나는 처음 문자를 받았을 때보다도 더 당황하여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나는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한참을 고민했다. 단 하나 확실한 것은, 적어도 처음의 그 문자는 진심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나는 당신과 안지 얼마 되지 않았고 대화 한 번 나눠 본 적 없으므로 이렇다 할 감정이 없다. 그래서 이렇게 다짜고짜 고백 문자를 보내면 내가 당황할 수밖에 없다. 당신의 이런 태도는 상당히 즉발적인 면이 있으므로 우리 관계는 시간을 두고 차분히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따위의 답변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방금 살얼음판을 건넌 것과 같지 않은가. 만일 한 번 더 살펴보자는 생각을 하지 않았더라면 필히 몹시도 민망한 꼬락서니가 됐을 것이다.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릴 수 있었다. 분명히 누군가가 그 번호를 사칭하여 나에게 장난을 한 것이다.

 

나는 굴러오는 돌을 피한 존스 박사가 된 기분으로 세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통화중이었다. 아마 홍아령에게 전화를 건 것이리라. 잠시 후 다시 걸었고 연결이 되었다.

 

-야, 너 뭐하는 거야? 아령이 번호는 어떻게 안 거야?

 

"이야기를 좀 들어봐. 그 베이시스트랑 이야기해 봤어?"

 

-그래. 네가 이상한 소리를 해서 걔한테 전화를 해봤어. 그러니까 이상한 문자가 왔다는 거야. 확인해보니 네 번호더라고.

 

"아무래도 누가 장난친 것 같다. 걔 번호를 사칭해서 누가 나한테 문자를 보냈어."

 

-그으래? 정말이지? 네가 먼저 장난친 건 아니지?

 

"당연하잖아. 내가 처음부터 걔 번호를 알았을 리가 없는데."

 

-처음에 무슨 문자가 왔는지 말해봐.

 

나는 목을 가다듬고 말을 했다.

 

"어제 처음 봤는데 나한테 반했다는 문자였어."

 

세연은 잠시 기다렸다가 말했다.

 

-우리 밴드에서, 그런 장난을 할 사람은 연희, 유미, 소라 셋인데 그중에서 드럼은 너랑 얘기도 잘 안 했으니 제하고, 소라 언니나 유미 언니 둘 중 하나일 거야.

 

좋아. 간단하게 추려졌다. 그 둘이라면 이런 장난을 칠 법도 하다.

 

-아마 번호는 내가 휴대폰을 엠프 위에 놓고 돌아다닐 때 몰래 봐서 알아냈을 거야. 이것들을 그냥……. 내가 단단히 주의를 줄게.

 

"아니, 내가 말해볼게. 나한테 건 장난이잖아."

 

-그럴래? 그런데 둘 중에선 누구지? 그건 직접 물어보지 않고는 모르겠는데.

 

나에게 생각해둔 것이 있었다.

 

"아마 소라 누나일거야."

 

-어째서?

 

"너한테 전화하기 전에 우리 반 놈한테 먼저 전화했었거든? 걔 장난일지도 몰라서. 그, 유미 누나 동생 말야. 그런데 걘 내가 누나를 만났다는 걸 모르더라고. 유미 누나는 번호를 동생에게 물어보면 되니까 굳이 장난까지 하려고 후배 휴대폰을 뒤적거릴 필요는 없어. 그러니까 유미 누나는 아니야."

 

-그럴싸하다.

 

세연은 내 추리를 곱씹는 듯 천천히 말했다.

 

-그럼 소라 언니 번호 알려줄게 네가 전화 해봐. 아니라고 하면, 내가 따로 설명하면 되니까.

 

"그래."

 

세연은 내가 한 것처럼 통화중 번호 검색을 해서 번호를 불러주었고 나는 책상에 놓인 종잇조각에 받아 적었다. 그리고 소라 누나에게 걸기 위해 통화를 끊었다.

 

나는 받아 적은 번호를 올바르게 입력했는지 꼼꼼히 확인해가며 번호를 입력했다. 잠시 뜸을 들이고 통화 버튼. 상대는 신호음 하나가 채 울리기도 전에 전화를 받았다.

 

-우와! 성공했다아!

 

전화기 너머에서는 느닷없이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나는 살짝 놀라 귀에서 휴대폰을 잠시 뗐다가 다시 붙였다. 소라 누나는 말했다.

 

-전화 걸 줄 알았어! 어때? 어때? 내가 이겼지?

 

그 말은 옆의 누군가에게 한 말인 듯했다. 나는 말했다.

 

"저기, 제가 전화 잘못 건 건가요?"

 

-아니지! 이 소라 님의 계략대로 재훈이가 누나한테 전화를 걸어 줬잖아.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장난 문자 보낸 게 누나였어요?"

 

-응. 내가 아령일 사칭해서 문자를 보냈어.

 

주위에서 누군가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와 나를 가지고 내기를 했다면 밴드 맴버 밖에는 없을 것이다. 나는 같이 있는 게 누구냐고 물었다.

 

-유미랑 둘이 있어.

 

다시 알아들을 수 없는 실랑이 하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의 소란 후, 유미 누나가 휴대폰을 뺏은 듯 유미 누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설명해줄게. 소라 이 녀석. 교활한 수를 쓰다니.

 

설명하자면 이렇다. 소라 누나와 유미 누나는 연습 끝나고 소라 누나네 집에 갔다고 했다. 거기서 소라 누나는 내가 자기를 못 잊어 전화를 하게 될 것이라고 장담했다고 한다. 당연히 유미 누나는 콧방귀 꼈고 소라 누나는 두고 보라고 말하면서 문자를 하나 보냈다고 했다. 물론 소라 누나는 미리 세연의 휴대폰을 뒤져 내 번호를 알아냈었고 나는 그들의 번호를 모르는 상태. 나는 갑작스런 고백 문자에 답장을 하게 되고 그러다가 상대 번호가 홍아령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장난의 근원을 찾아 전화를 하게 될 것이라는 계략이었다.

 

그 계략이 맞아 떨어졌다는 사실이 더 신기하다. 두 사람이 같이 있었다는 것이 밝혀져 결국 내 추리 과정도 엉터리가 되었다. 가장 중요한 전화한 동기 또한 맞지 않는다.

 

다시 소라 누나가 전화기를 받아 말했다.

 

-어쨌든 이렇게 재훈이 번호 알아냈으니 됐어. 앞으로도 연락하고 지내자.

 

"네, 네……. 좋을 대로 하세요."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앞으로도 이들 밴드와 자주 엮이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나저나 어제만 해도 존댓말을 쓰던 소라 누나는 은근슬쩍 말을 놓는다. 나야 뭐 상관없는 일이다.

 

-아차, 그러고 보니 나도 모르게 내가 반말을 하고 있네. 괜찮…… 지요? 재훈 후배님?

 

내 생각엔 소라 누나는 이렇게 사람을 스스럼없이 대하는 것이 몸에 벤 듯하다.

 

“아무렴요. 그리고 엄밀히 말해서 후배는 아니지 않은가요? 학교는 엄연히 다르니.”

 

-그것도 뭐 어때. 좋잖아? 다른 애들에겐 없는 여선배를 갖게 됐으니.

 

“그것도 나름 괜찮네요……. 하하.”

 

-그보다 재훈아. 내일 점심시간에 잠깐 나올 수 있어?

 

“점심시간에요?”

 

-응. 너넨 12시 정각에 끝나지? 우린 10분에 끝나니까 점심 먹고 15분쯤에 나오면 되겠다.

 

갑자기 만나자니, 무슨 꿍꿍이일까.

 

“나갈 수는 있는데, 무슨 일이죠?”

 

-할 얘기가 있어서 그래.

 

“15분이라면…… 누나는 밥 안 먹어요?”

 

-응. 난 밥 안 먹어.

 

“할 얘기라면…….”

 

-꼭 나와야 돼. 안 나오면, 음, 안 나오면 어떻게 할까.

 

“네……. 꼭 나갈게요.”

 

-잠깐만! 안 나오면 징벌이 있어야 돼. 뭐 적당한 거 없나 유미야?

 

둘이서 떠드는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나를 놔두고는 저들끼리 떠들어댄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그럼 끊을게요.”

 

끊으라는 건지 기다리라는 건지 알 수 없는 소리가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에 섞여 들어왔다. 나는 조금 기다리다가 용건이 있다면 다시 전화하리라 믿고 전화를 끊었다.

 

결국 그날 인로는 연락을 하지 않았다. 딱히 들을 이야기는 없었지만 그래도 최종 보고는 해주는 것이 도리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조금 아쉬웠다.

 

 

 

5

 

다음날, 시호는 왠일로 늦잠을 잤다. 물론 내가 등교하는 시각까지 안 일어났다는 것이니 일반적인 초등학생에 비추어 보면 늦잠이라고 할 것 까지는 없다. 이틀 연속으로 싸돌아다녔으니 피곤하기는 했을 것이다. 나는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자고 있는 시호를 내버려두고 등교를 했다.

 

학교에 가서 가장 먼저 나를 반겨준 사람은 오유리였다.

 

"너 이 자식, 나도 안 가본 누나 밴드 연습실 구경을 가다니!"

 

녀석은 또 내 자리에 앉아 있다가 다짜고짜 내 멱살을 잡는다.

 

"이거 놔. 너야말로 그런 미인 누나를 두고서 여자, 여자 하고 앉아 있었냐?"

 

"누나는 누나고 여자는 여자지. 그리고 그런 괴상한 성격의 여자는 트럭으로 갖다 줘도 싫다."

 

"네 성격은 어떻고. 근데 내가 여자 친구 사귀는 법을 알아냈는데 들어볼래?"

 

녀석은 자리를 비켜주며 웨이터처럼 공손하게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앉으십시오. 재훈님."

 

나는 녀석의 단순함을 비웃으며 내 자리에 앉았다. 녀석은 생사를 여기에 걸기라도 한 것 같은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그 비책이란 무엇입니까. 소인에게만 살며시 말해 주시지요, 대감."

 

나는 그 자리에서 훌륭한 비책 하나를 생각해 냈다.

 

"자네가 여자 친구를 사귈 가장 빠른 방법이란 바로 자네가 대통령이 되는 것이라네."

 

"무슨 말씀이신지?"

 

"대통령이 되어 법을 바꾸는 거야. 남매간 결혼이 가능하도록. 그다음 지위를 이용해 네 누님을 꼬시는 거지."

 

"으악! 너 이 자식 죽을래?"

 

녀석은 울 것 같은 표정을 하며 달려들었다. 녀석에겐 너무 가혹한 농담이었나?

 

 

 

점심시간, 나는 급식을 대충 뱃속에 밀어 넣고 운동장으로 나갔다. 그런데 밖으로 나가고 나서야 나는 우리가 정확한 약속 장소를 잡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 큰 운동장은 아니었지만 운동장에는 땀 냄새 풍기며 뛰어다니는 남고생으로 가득했고 여학생들도 건너편운동장 곳곳에 산개해 있어서 쉽사리 서로를 찾을 수는 없다. 물론 남녀고가 붙어 있다 보니 만남의 광장 역할을 하는 곳이 자연스럽게 마련되어 있긴 하다. 하지만 그곳 분위기는 조금 부담스럽다. 거기서 여학생을 만나려고 서있자면 왠지 눈치 보이고 아는 녀석이라도 만나면 곤란해진다. 전화를 해야 할까 고민하고 있었다. 나는 누나처럼 내가 먼저 친한 척 하는 데에 익숙하지 못하다.

 

밖에 나오면 먼저 전화하겠지, 하고 기다리자니 문자가 왔다. 역시나 만남의 광장에 있다고 했다. 나는 그곳으로 걸어갔다.

 

“재훈아! 여기!”

 

소라 누나는 나를 부르며 손을 흔들었다. 당연히 다른 녀석들이 우리 쪽을 쳐다본다. 뭘 잘못하는 건 아니지만 역시 그 시선들이 부담스럽다.

 

“할 얘기가 뭐죠?”

 

“뭘 그리 급하게 그래. 천천히 산책이나 하자.”

 

누나는 예와 같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산책할 곳이, 학교에 있기나 해요?”

 

학교의 구조란 상당히 단순해서 운동장 한 가운데에 서서 사방을 죽 둘러보면 눈에 들어오는 그곳이 바로 학교의 전부이다. 그것도 만남의 광장을 중심으로 양 옆으로는 남녀가 함께 걷기에는 음양의 조화가 맞지 않는 구역이다.

 

“그럼 밖으로 나가면 되지.”

 

간단한 해답이었다. 우리는 교문 밖으로 나갔다. 학기 초에는 학생 선도랍시고 교문을 막곤 했지만 지금은 그냥 열려 있어서 맘대로 드나들 수 있다. 교문 밖에는 공식처럼 군것질거리를 파는 문방구가 있다. 누나는 나를 그곳으로 이끌었다. 아이스크림 냉장고를 열고 하나 집어보라고 말한다.

 

“누나가 사주는 거야.”

 

나는 기꺼이 하나를 집어 들었다. 계산을 하고 문방구를 나섰다.

 

“어디로 가죠?”

 

“그냥 시간 닿는 데까지.”

 

우리는 학교 주변 길을 걷기 시작했다. 우리 학교는 주변 환경이 좋지 않은 학교이다. 물론 언제까지나 우리들 기준으로는. 어른들이 보기에는 학생들을 유혹하는 유흥시설 하나 없는 공부하기 적격한 학교일 것이다. 즉, 주변에 학생들이 여가를 보낼만한 시설이 없다시피 하다. 산책이라고 해도 정말로 걸어 다니는 것 말고는 할 게 없다.

 

그래도 좋은가 보다. 어제처럼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들릴 듯 말 듯한 콧노래를 부르며 걷는다.

 

“무슨 얘기 하려고 그래요?”

 

누나는 갈림길에서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키는 것으로 대답을 피했다. 누나는 변죽임에 분명한 이야기만을 던졌다. 적당히 말상대를 하며 빙글빙글 돌다보니 학교 주변을 한 바퀴 돌게 되었다. 나는 학교 주변이라 해도 등하굣길 말고는 다니는 곳이 없는데 누나는 이곳저곳을 이미 누벼본 것 같다. 혼자서라면 평생 지나갈 길 없어 보이는 뒤쪽 담장 밑 길까지 돌아서 마침내 다시 교문 앞길에 다다랐을 때 누나는 말했다.

 

“재훈아. 너 세연이 좋아하지?”

 

나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말문이 막혀 김새는 신음만 흘릴 수밖에 없었다. 갑작스럽게 그것을 지적당하니 뭐라 대꾸할 바를 찾을 수 없었다. 무언가 아주 치명적인 광선에 내 심장이 노출당한 기분이었다.

 

“정말인가 보네? 식은 땀 흘리는 걸 보니.”

 

식은 땀 흘리는 게 보일 리가 없잖아요, 하고 대꾸하려다가도 나는 목소리를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누나는 계속 말했다.

 

“역시. 수상한 데이트를 하고 연습실에서 세연만 뚫어지게 쳐다봤을 때부터 알아봤어.”

 

“아, 아뇨, 그, 그건…….”

 

“숨길 필요 없어. 난 도와주려고 말하는 거니까.”

 

누나는 걸음을 멈추고 날 올려다보았다.

 

“도와준다고요?”

 

“응. 재훈이랑 세연이가 이어지도록 최선을 다해 도와줄게. 내 사랑하는 후배의 일이니 그냥 넘어갈 수는 없지.”

 

“그래도, 그게…….”

 

“내가 정보를 줄게.”

 

“정보라고요?”

 

정보라는 말에 귀가 솔깃해졌다. 어떤 정보라도 정보가 있다면 세연에게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세연이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네, 네에?”

 

그건 나를 도와주는 정보가 아니잖아요! 경악하고 있는 사이 누나는 말했다.

 

“실망하지 말고 잘 들어. 세연이는 발렌타인 초콜렛을 준비했던 것 같더라고.”

 

“발렌타인 데이면, 입학하기 전이잖아요.”

 

“응. 세연이네 집에 갔을 때 포장지를 발견했었어. 틀림없는 발렌타인 초콜렛 포장지였지.”

 

“그, 그게 어째서 정보란 거죠? 좋아하는 애가 있다면 그건…….”

 

“그건 그 대상이 네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야.”

 

내가 세연이가 좋아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그건 분명히 희망적인 소리지만 나는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를 원했다. 나는 이미 한 번 거절을 당한 상태이지 않은가. 졸업식은 2월 12일. 발렌타인 데이는 그로부터 이틀 뒤이다. 나에게 초콜렛을 줄 생각이었으면 그날 그렇게 거절했을 리가 없다.

 

“난, 이미 세연에게 고백을 했었거든요.”

 

나는 말했다.

 

“어머, 정말?”

 

“졸업식날요. 발렌타인 이전이죠. 당연히 거절당했고요.”

 

“흠, 그랬다 이거지.”

 

누나는 팔짱을 끼고 조금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곧바로 말했다.

 

“그럼 이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 세연이가 먼저 고백하려 했지만 네가 먼저 고백해버려 당황해 버린 거야. 그래서 얼떨결에 거절하고 만 거지.”

 

“그렇게 만화 같은 일일라고는…….”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너무 편한 전개가 아닌가.

 

“우움……. 분명 이유가 있을 거야. 분명히.”

 

누나는 고개를 숙이고 제자리를 맴돌았다. 시계를 보니 점심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저기, 혹시 별 이유는 없는데 괜히 그렇게 생각해서 짜 맞추려 하는 건…….”

 

“아니야! 아니야! 기다려봐. 분명 근거가 있었다구!”

 

누나는 고개를 치켜들며 말했다. 아무리 봐도 그 모습은 빈약한 근거로 주장하다가 예기치 못한 반론에 끙끙대는 모습인데요. 나는 관대하게 기다려 줬다.

 

“그래, 생각났다. 세연이는 초콜렛을 못 전해줬어. 그렇겠지?”

 

누나는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렇다고 했지요.”

 

“그럼 왜 못 전해줬을까. 생각해봐. 기껏 초콜렛을 준비했는데 상대가 선공으로 고백해오는 걸 차버렸단 말이지. 그러면 뻘줌해서 초콜렛을 전해줄 수 있었을까? 아무리 나라도 그렇겐 안 될 거야. 그래서 세연이는 초콜렛을 전해주지 못한 거지.”

 

누나는 쉴 새 없이 말했다.

 

“바로 그것이 널 좋아한다는 근거야. 초콜렛을 주지 못한 다른 이유는 도오저히, 눈곱만큼도 생각할 수 없어!”

 

거기까지 생각해 냈다는 것이 뿌듯한 듯 활기 찬 미소를 지어 보인다. 나는 어디서부터 반론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그 말이 미리 생각해둔 것이 아니라 내 반론에 짜 맞추었을 뿐이라는 사실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그냥 다른 녀석에게 주려는 걸 용기 못 냈다고 말하는 게 더 쉬운 설명 아닐까요?”

 

움찔. 역시 스스로도 자기 말이 허술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누나는 뒤통수를 긁으며 실실 웃는다.

 

“에이, 너무 어렵다.”

 

“괜히 설렜잖아요. 안 그래도 관계가 어정쩡해졌는데.”

 

예비종이 울렸다. 남고가 먼저 점심시간이 시작됐으니 저 종은 나를 부르는 종이다. 소라 누나는 시계를 들여다보고는 말했다.

 

“그런데 그것만이 아니야.”

 

“아니라뇨?”

 

“감이란 게 있잖아. 남녀 관계는 꼭 그런 분명한 증거보다는 눈치 같은 걸로 주로 파악되거든. 재훈이가 세연에게 눈길 준다는 건 맞췄잖아. 그냥 딱 보면 그렇고 그런걸 알 수 있단 말이지.”

 

“……역시 그런 건가요.”

 

“이 누나를 믿어! 세연이가 남자 친구 없는 건 분명하니까 푸시만큼은 든든하게 해줄게!”

 

내 등을 치면서 이야기한다. 믿음이 가지 않으면서도 오묘하게 기운이 나는 말이었다.

 

우리는 교문으로 들어갔다. 자주 문자 보내라는 말과 함께 누나는 여고로 들어가 버렸다. 나도 학교로 빨려 들어가느라 땀조차 닦지 못한 남학생들 무리에 섞여 교실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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