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이정표

외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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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51 Jul 28,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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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노유

1

 

나는 시호가 납치당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보이스 피싱일 가능성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재훈이에게는 좀 더 침착하게 전화를 받을 수 있도록 다른 경우의 존재 가능성을 암시해 줬을 뿐이었다. 그래서 재훈이가 이름표를 언급했을 때 나는 한순간 패배감에 잠시 판단을 그르칠 뻔했다. 나는 눈앞에 적나라하게 너부러져 있는 정황 논리를 그대로 무시한 채 갑자기 던져진 해답만 편히 삼키려 했었다. 부끄럽게도. 내 추리가 틀린 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 덕분에 중요한 범죄 사실이 묻혀버릴 뻔했다는 것이다.

 

시호가 납치당했으리라는 생각의 근거로 내가 이야기한 것들은 대부분 시호의 이름표로 설명이 된다. 하필이면 친척집 놀러 온 시호를 타겟으로 삼은 점, 리스크를 감수하고 한 타켓만을 노린 점, 이 동네에 앉아서 범행을 저지르다가 경찰의 추격을 허용한 점, 즉흥적인듯하면서도 치밀한 작전을 세웠다는 점 등의 의문은 우연히 주운 이름표를 보고 충동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는 설명으로도 모두 해소된다. 하지만 범인의 지능 등까지 갖다 붙여 무리해가며 설명하려 해도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시호가 초등학생이라는 것은 어떻게 알았을까?

 

이름표에는 이름과 집 전화번호와 주소만 적혀 있었다. 길거리에서 샀다는 그 이름표의 주인이 왜 이름표를 착용했는지 범인은 판단할 수 있었을까? 이름표를 찼던 사람이 유치원생일 수도 있고 갓난아기일 수도 있고 조금 넓게 생각한다면 중학생일 수도 있으며 조금 더 과히 생각하면 성인이 물건을 표시하기 위해서 적어놓은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범인은 자신이 초등학생 여자 아이를 데리고 있다고 분명히 말했다.

 

나는 잠시 혼란에 빠졌다. 이름표의 존재. 그리고 이어서 온 시호로부터의 전화. 나는 얼핏 정황이 맞아 떨어지는 줄로 잠시 착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곧 그 사실을 깨달았고 어쩌면 사건의 전말은 좀 더 다른 형태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납치 가설과 이름표와 안전한 곳에 있는 시호. 순간적으로 머릿속을 휘감는 생각이 있었다. 모든 정황을 만족시키는 단 하나의 가설을 세울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알아채고야 말았다.

 

시호는 이름표를 잃어버린다. 그리고 누군가가 그 이름표를 줍게 된다. 하지만 그 누군가는 산책이나 하던 동네 건달이 아니다. 그는 시호 또래의, 혹은 나이는 더 어릴지 모르는 여자애였다. 그 여자애는 아마 주인을 찾아줘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목걸이를 목에 걸었을 것이다. 처음부터 그 여자아이가 목표였는지 우연히 물망에 들어간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 아이는 납치되었다. 범인은 이름과 전화번호를 알아내는 수고를 덜 수 있었고 재훈은 그들의 전화를 받았다.

 

하지만 나는 그 추리를 이야기할 수 없었다. 우선 그것은 그저 추리일 뿐이니 실상이 그러리라는 확증은 없었다. 어차피 경찰이 그들 기지를 기습할테고 내가 그것을 말해본들 범인이 잡히는 것은 달라지지 않을 터였다. 그래서 강 형사에게만 그런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살짝 알려주고 말았다. 무엇보다 나는 재훈이에게 그것을 말할 수 없었다. 재훈이는 내 가장 친한 친구이다. 나는 재훈이가 무엇을 지키려고 하는지 알고 있었다. 무엇으로부터 그토록 도망치려 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나는 친구로서 재훈이가 지키려는 것을 지켜줘야 했다. 재훈은 사건을 원하지 않는다. 재훈에게서 사건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여기다 무언가를 덧붙인다면 그것은 녀석에게 고통이 될 것이다. 이것은 중학교적부터 지켜온 우리만의 관습이었다. 어쩌면 나 혼자만 아는 규칙인지도 모른다. 재훈은 나에게 많은 것을 감춘다고 생각하고 있고 나는 재훈이 생각하는 것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이렇게 감추고 감추는 관계가 친구 사이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녀석을 감싸줄 생각이다. 스스로 나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한, 나는 스스로를 짊어지기로 한 녀석의 결정을 지지해줄 생각이다. 그리고 그동안은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을 정리해주고 여파가 녀석의 삶에 미치지 못하게 막아준다. 그것이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이다.

 

재훈과 함께 시호를 데리러 세연의 집으로 가고 있었다. 나는 강 형사에게 범인을 붙잡거나 문제가 있으면 바로 연락 달라고 말해 뒀었다. 그래서 나는 재훈과 걸으면서 한시도 휴대폰에서 신경을 끊지 못했다. 어느덧 전화가 왔고 나는 재빨리 전화를 받았다.

강 형사는 조금 안 좋아진 상황을 전해 주었다.

 

-총 세 명 검거하고 한 놈 놓쳤어. 네 말이 맞았어. 한 놈이 아이를 데리고 도망쳤어.

 

나는 재훈 몰래 이를 악물었다. 강 형사는 놓치게 된 경위를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 도망친 자는 경찰이 본거지를 습격할 당시 인질과 함께 차에 타고 있었다고 했다. 인질을 풀어주러 가는 길에 경찰이 들이닥쳤던 모양이었다.

 

나는 잠시 후 다시 연락하겠다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미안한데, 나 가봐야겠다.”

 

범인이 인질을 데리고 도망쳤다면 다시 전화를 해올 것임이 분명했다. 나는 재훈이 어머니 휴대폰을 빌리고 재훈이와 헤어졌다. 이제는 내가 범인을 상대해야 했다.

 

나는 가볍게 걸어가는 듯하다가 재훈이와 어느 정도 멀어지자 내달리기 시작했다. 다시 강 형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미안해. 좀 더 주의를 했어야 하는데.

 

"그정도 상황까지 예측하기는 어렵죠. 잘 했어요. 이제 제가 놈을 어떻게 해볼게요."

 

-네가? 어떻게?

 

"분명 범인은 경찰들이 몰려오는 것을 봤을 거예요. 당연히 재훈이가 신고했다고 생각하고 연락해올 것이 분명해요. 제가 유인할게요."

 

-안 돼. 위험해. 인질까지 위험해질 수 있어.

 

"이제 놈은 제 말을 좀처럼 안 믿을 거예요. 경찰 없이 상대하는 게 나아요. 전화 오면 연락은 드리기는 할게요. 형사 님은 형사 님 대로 추적을 하세요."

 

나는 전화를 끊고 재훈의 집으로 달렸다. 이름표에는 재훈의 집 주소가 적혀 있다. 경찰을 두려워하여 그러지 않을 가능성도 있지만, 재훈의 집으로 범인이 찾아올 수도 있었다. 일단 형사들은 이름표에 주소가 적힌 것을 모른다. 나는 범인과 대면하려면 그편이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인질을 데리고 도망쳤다면 쉽사리 해하지 못할 것이다. 자신의 안전을 담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협상을 요청해 올 테고 그렇다면 경찰 없이 내가 혼자 하는 편이 낫다.

 

재훈의 집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 생각대로 재훈이 어머니의 휴대폰이 울었다. 공중전화로 건 듯했다.

 

"네."

 

나는 태연히 말했다.

 

-너 이 새끼, 죽고 싶어? 이 dog's 새끼가 경찰을 부르다니.

 

범인은 험한 욕을 마구 뱉어댔다. 좋다. 녀석은 흥분해 있다. 그리고 목소리를 높여 숨기려 할 만큼 두려워하고 있다.

 

"쳇, 하나를 놓쳐버리다니, 경찰은 영 믿을 수 없다니까."

 

나는 이렇게 도발하고 본다.

 

-야이 Sibal 새끼야. 너 경찰에 신고해 놓고 말 듣는 척 한 거지? 네가 애 죽인 거야. 알았어? 그리고 나 너네 집 주소도 알거든? 애 죽여 놓고 조만간 너 새끼도 담가버리러 찾아간다. 기다려라.

 

"좋을 대로 하셔. 애 죽든 말든 나는 상관없으니까. 그리고 그렇게 협박하면 무서워서 또 경찰 부를 텐데. 경호 해달라고. 안 잡히고 나 건

드릴 수 있겠어?"

 

그는 제 분을 못 이기고 소리 지른다. 나는 더 건드리면 진짜로 위험하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보다 오해 하나를 풀려고 하는데."

 

놈이 쉴 새 없이 뱉어대는 욕설에 말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좀 들어봐봐. 댁이 데리고 있다는 애 말야. 이름좀 물어봐주지 않겠어?"

 

-뭐? 시호 아냐. 네 동생 시호! 네 동생을 죽이겠다는데 배짱 부릴 여유가 있냐? 엉?

 

"배짱이 아니라, 네가 아까부터 착각하고 있던 거라고. 걘 시호가 아니야. 시호는 지금 다른 데 있어."

 

그는 잠시 말을 멎었다. 아무리 아이와 의사소통이 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아이는 자기 이름 정도는 밝혔을 것이다. 그는 아마 그것을 아이가 잔꾀 부리는 것 정도로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다시 말했다.

 

"목걸이가 있었지? 이름표라는 게 꼭 주인이 착용하라는 법은 없지. 난 네가 무슨 애를 데리고 있는지도 몰라."

 

-그, 그럼……. 네가 날 갖고 놀았다는 거냐?

 

위압을 입 안 가득 담으려 했지만 다소 힘이 빠진 것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그건 아니니 걱정 마. 시호가 안전한 건 방금 확인 했으니까. 그리고 계속 눈치 못 채는데, 아까 전화 받은 건 내 친구야. 난 옆에 있었던 사람이고."

 

-다, 닥쳐. 그럼 이 애는 죽어도 된단 거냐?

 

"내 알 바 아니지."

 

놈은 초조해하고 있었다. 자신의 안전을 담보할 수 있는 것은 인질 뿐이었다. 그런데 그 인질이 인질의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초조한 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정말로 그 인질이 어떻게 되든 알 바 아닐 리가 없잖은가. 내 목적은 놈의 패가 쓸모 없어졌음을 인지시켜주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저 인지하게 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더 나아갔다가는 놈이 무슨 짓을 할지 예측할 수 없다. 줄다리기를 하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어떡할래? 감옥에 간 네 친구들이 네 신원을 안 불 거라는 보장이 있어?"

 

놈은 뭐라 말을 하려 한다. 나는 말을 끊고 재빨리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교환을 하자."

 

-교환? 무슨 교환?

 

나는 이것이 협상이라는 인상을 주지 않도록 주의하며 말했다. 협상의 최상 조건은 상대가 이것이 동등한 거래라고 인지하지 못하게끔 하는 것이다.

 

"아까 찾은 돈은 오백이 다가 아니었거든? 그 시점에 이미 경찰에 연락했기 때문에 돈은 얼마든 맡겨놨어도 상관은 없었지만 아무래도 아까워서 말이야. 오백정도를 남겨놔서 지금 내가 갖고 있는데. 이거랑 그 애랑 바꾸는 거야. 아무리 남이라도 애가 다치면 나도 조금은

가슴이 아프거든."

 

놈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말했다.

 

-웃기지 마. 함정이 아니라고 어떻게 믿지?

 

예상한 반응이었다. 나는 여기서 신뢰를 줘야 한다.

 

"네가 교환 방법을 제시하면 되잖아."

 

-내가 장소를 정해도 그 자리에 경찰이 잠복해 있으면 그만 아냐?

 

"참, 나. 머리를 좀 쓰라고. 방법은 얼마든지 있잖아. 정 못하겠으면 내가 방법을 생각해 볼까? 그걸 듣고 그대로 할 지 안 할 지 정하는 건 네가 하면 되고."

 

-……좋아.

 

나는 들리지 않도록 주의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그럼, 나는 지금 혼자라고 주장하지만, 안전 거래란 불신을 전제로 하는 거래이기 때문에 경찰이 이 통화를 듣고 있다고 가정하고 들어도 좋아. 애를 먼저 너만 아는 곳에다 가둬두는 거야. 아님 엄마가 여기로 데리러 올 테니 가만히 서 있어야 돼, 하는 말 정도로 묶어놔도 좋아. 그다음 우리 둘이 만나서 내가 돈을 건넨다. 애가 있는 장소는 추후에 그쪽에서 가르쳐 주는 걸로. 이러면 불만 없겠지?"

 

그는 잠시 뜸을 들였다. 나는 그가 체계적인 판단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틀림없이 내 말은 그럴싸해 보이고 그는 대안을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경찰을 대동한다 쳐도 인질이 어딨는지 모르면 쉽사리 그쪽을 건드리지 못할 거 아냐. 그쪽은 자신이 안전해졌다고 판단한 뒤에 인질 위치를 알려주면 되고."

 

놈은 잠시 말이 없었다.

 

“이제 도망 다녀야 되는데 도피 자금은 있어야 하지 않겠어? 너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재워줄 친구 많아?”

 

-좋아.

 

그는 말했다.

 

-그렇게 하자. 애를 숨겨둘만한 장소가 있다. 숨겨둔 다음 내가 다시 연락한다. 그다음엔 어디서 만나지?

 

"내 친구네 주소 알잖아. 근처로 오면 내가 정확한 장소를 말해 줄게."

 

-좋아.

 

그는 전화를 끊었다.

 

일이 이렇게까지 잘 흘러가자 오히려 두려움이 생겨났다. 놈이 다른 계략을 세워두거나 하지는 않겠지. 갑자기 마음이 바뀌어 아이를 헤치고 도망가 버리지는 않겠지 하는 생각이 맴돌았다. 나는 지금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놈이 임무를 다하고 다시 전화할 때까지. 초조하다만 나는 내 판단을 믿을 수밖에 없다.

 

기다리기 적당한 장소를 물색했다. 나는 재훈의 자전거를 빌렸다. 아직 지난번에 빌렸던 열쇠는 내 주머니에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돌며 지리를 익혔다. 차가 진입할 수 있는 곳이나 일방통행로 등을 점검하며 작전을 가다듬었다. 자전거 위에서 나는 머릿속으로 다음에 놈에게 할 말과 행동을 천천히 구상했다.

 

나는 깜빡 잊고 확인하지 않은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재훈이 어머니 휴대폰을 열어 통화 기록을 확인했다. 다행히 비밀번호는 걸려 있지 않았다. 전화가 걸려온 시간에서 통화 시간을 더해 통화가 끝난 시간을 알아냈다. 5시 10분에 통화가 끝났었다. 이제 되었다.

 

나는 근처 화장품 가게로 들어갔다. 놈과 마주치려면 겉모습을 조금 감추지 않으면 안 되었다. 놈이 내 본 모습을 기억하지 못하게끔 해야 했다. 마스크를 쓰던가 하면 오히려 수상하게 여길 터였다. 간단한 변장으로 인상을 바꿀 수 있고 내 외모에 대한 정보를 왜곡할 수 있다. 나는 왁스를 집었다. 계산을 하고 그 자리에서 거울을 보며 머리를 만졌다. 나는 평소에는 왁스를 바르지 않으니 충분한 변장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서투른 손으로 비죽비죽하게 세운 머리가 영 어색하기만 하다. 화장품 가게 주인 아주머니가 대충 손 봐 줬지만 역시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나는 머리를 올백으로 넘겨보았다. 아주머니는 이 왁스는 그런 식의 머리에 쓰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일회용 변장으로는 오히려 적절하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뒷부분을 조금 만져달라고 하고 영 못마땅한 주인의 얼굴을 뒤로 하고 가게를 나섰다.

 

그다음은 안경이었다. 평소에 안경을 쓰지는 않지만 나는 시력이 좋은 편은 아니다. 칠판 볼 때나 멀리 있는 것을 보거나 할 때에 필요하기 때문에 늘 안경을 갖고 다닌다. 안경을 쓰고 차 유리를 통해 만족해하는 내 얼굴을 비춰 보았다. 스스로 칭찬하고 싶어지는 변장이었다. 이 정도면 한 번 마주치는 사람의 눈은 충분히 속일 수 있다는 자신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동네에서 뛰어노는 아이 하나를 붙잡았다.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아이였다.

 

"야. 너 지금 집에 가야 되냐?"

 

녀석은 나를 멀뚱히 올려다보더니 말했다.

 

"네. 그런데요?"

 

"바빠? 할 일 있어?"

 

"할 일은 없는데."

 

"그럼 내가 만원 줄게 간단한 부탁 좀 들어주라."

 

"뭔데요?"

 

녀석은 의심하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눈을 빛냈다. 나는 5천 원짜리를 먼저 내밀었다.

 

"나머지는 심부름 마치고 나면 줄게. 미소 슈퍼 있는 골목 알지? 그쪽 골목 끝에 우성 빌라 있잖아. 거기 가서 앉아 있다가 내가 거기로 가면 뒷짐을 지고 슈퍼 가로질러서 한 블록정도 더 가면 돼. 그리고 기다리고 있다가 내가 보이면 나한테 와서 잔금만 바로 받고 집에 가버려. 어때, 할 수 있겠어?"

 

녀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돈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누가 말 걸면 무시해. 알았지? 지금 가 있어."

 

녀석은 내가 말한 곳으로 달려갔다. 나는 설마 5천원에 만족하고 그냥 가버리진 않겠지 하고는 페달을 밟았다.

 

그다음 할 일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나는 전화가 올 때까지 순찰 삼아 자전거로 동네를 돌았다. 이곳 지리는 익숙했다. 놈을 불러들일 장소는 이미 생각해 두었다. 나는 그 근방을 돌며 놈이 나타날 경로를 이리저리 시뮬레이션 했다. 머릿속에서 다음 작전을 몇 번이고 곱씹고 재생하고 변수를 검토했다. 일이 언제나 최선으로 흐르지는 않는다. 모든 것을 예측할 수는 없다. 두려움이란 거기에서 연유한다. 제아무리 나라도 고작 1분 뒤의 상황을 알지 못한다. 제아무리 철저한 작전을 세우더라도 사람은 모든 변수를 생각할 수 없다. 극단적인 경우라면 느닷없이 출몰한 트럭에 치여 작전이고 뭐고 날아가 버리는 수도 있다. 다만 나는 타인 역시 불확실성에 노출되어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것이 내가 사람과 맞부딪히는 모든 상황에서 유리한 유일한 점이다.

 

잠시 후 전화가 왔다. 나는 시계를 확인했다. 15분 정도 지나 있었다. 그는 분명히 차를 타고 이동했을 터. 만일의 경우 이 시간이 수색 범위의 기준이 될 수 있다. 나는 자전거를 세우고 전화를 받았다.

 

-아이를 가뒀다. 어디로 가야 되지?

 

다소 차분해진 목소리였다. 나는 대답했다.

 

"집 주소 있지? 그 근처로 와. 음, 어디가 좋을까."

 

나는 생각하는 척 했다.

 

"아, 미소 슈퍼라는 동네에서 유명한 구멍가게가 있거든? 그 앞 골목으로 와. 온 다음 다시 연락해. 지금 근처에 있으니까 바로 뛰어갈게."

 

-어떻게 알아보지?

 

"뒷짐을 지고 있는 건 어떨까. 그러고 있다가 서로 먼저 발견한 사람이 접근하는 걸로."

 

-좋아. 잠시 후 다시 연락한다.

 

그는 전화를 끊었다. 나는 근처 문방구를 찾아 달려갔다. 마지막 도구가 필요했다. 적당한 물건이 있나 찾아보았다. 마침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우산을 집었다. 길고 줄기가 가장 굵은 것이 적당했다.

 

그리고 내 휴대폰으로 강 형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놈이 연락해 왔어요. 재훈이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미소 슈퍼라는 가게가 있는데 상호 보고 찾아올 수 있나요?"

 

나는 강 형사가 전화를 받자마자 말을 쏟아냈다.

 

-응? 으응. 범인이 그쪽으로 간다고?

 

"네. 유인하는데 성공했으니 어서 잡으러 오세요. 아참, 이번에 올 때는 사이렌을 동네가 떠나가도록 켜고 오세요."

 

-그건 왜?

 

"암튼 그렇게 해주세요."

 

나는 간단하게 작전을 설명했다. 강 형사는 작전에 동의해 주었다. 전화를 끊고 곧바로 재훈이 어머니의 전화가 울었다. 나는 시간을 확인하고는 전화를 받았다.

 

-도착했다.

 

"빠르네. 거기서 어슬렁거리고 있어. 어때, 수상한 사람은 안 보이지?"

 

-지금은 그런데, 경찰 냄새만 나기만 해봐라.

 

그럼 어쩔 건데? 하고 묻고 싶은 것을 참았다. 나는 곧 달려가겠다는 말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약간 시간이 안 맞았다. 아직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나는 두 가지 경우를 생각했다. 놈은 차 밖에 나와 있을 수도, 차 안에서 상황을 먼저 살필 수도 있었다. 전자라면 대리인을 내보냈을 위험이 있다. 그럴 경우 슈퍼 앞에서 뒷짐 지고 있는 사람을 확인하고나서 주변을 더 살펴봐야 한다. 시동을 걸어놓은 빈 차 혹은 그 골목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사람이 탄 차가 있는지 확인하면 된다. 후자라면 미리 준비해 놓은 미끼로 놈을 끌어낼 수 있다. 나는 다시금 그 경우들을 되새기며 만전을 기해 현장으로 달려갔다.

 

나는 물론 돈을 넘겨줄 생각이 없다. 아예 돈은 갖고 있지 않았다. 내가 놈에게 한 제안은 사실 빈틈이 있는 거래 방법이었다. 그것도 누더기마냥 흉하게 찢어진 빈틈이다. 얼핏 들으면 인질의 위치를 알고 있는 범인만이 유리한 거래 방법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거래 상대방이 룰을 준수해 준다는 가정 하에나 유리하다고 할 수 있다. 인질을 자기만 아는 곳에 숨겨놓으면 뭐하는가. 그냥 놈을 체포해버리고 심문해 알아내면 그만 아닌가. 놈의 이동 시간을 계산해서 진술의 진위를 판단할 수도 있다. 물론 다소 위험이 따르는 방법이다. 놈이 독하게 마음먹고 인질 위치를 불지 않는다든가 지인에게 맡겨놓고 새로운 인질극을 벌인다면 곤란해진다. 하지만 나는 사법적 협박의 가능성을 생각했다. 체포됐으면서도 고의로 인질을 해하려는 악의를 보인다면 처벌이 무거워질 것임은 틀림없었다. 또 경찰도 실체가 분명한 악에 대해서는 굳이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는 않을 것이다. 이는 강 형사에게도 확인한 사실이었다. 나는 좀 전의 통화에서 그 사실을 확인했다.

 

"만일 잡힌 범인들이 도망간 범인을 안 불면 어떡하죠?"

 

-그땐 말야. 잠시 경찰 배지를 벗어놓으면 되지.

 

다소의 위험이 따르더라도 나는 이 방법이 녀석을 유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판단했다.

 

그리고 계획대로 놈은 내 눈앞에 왔다. 자전거를 타고 천천히 슈퍼 앞 네거리를 지나치며 나는 운전석에 누군가가 앉아 있는 승합차 하나를 발견했다. 그는 골목길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고 차 안에는 그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골목길에서 뒷짐 지고 서 있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골목을 뱅 돌아 아까 꼬맹이한테 일러뒀던 우성 빌라로 가 보았다. 다행히도 녀석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나는 녀석에게 지금 걸으라고 말했다.

 

녀석은 비탈길을 천천히 내려갔다.

 

학교 앞 골목만큼은 아니지만 상당히 가파른 비탈길이다. 우리 동네는 산동네는 아니지만 지역마다 고저 차가 심해 종종 골목이 이렇게 비탈져 있다. 비탈길은 또 일직선으로 죽이어져 아랫동네 번화가까지 닿는다. 그 꼭대기 주택 밀집 지역이 바로 우리 동네이다. 그리고 그 길의 Sibal점은 바로 우성 빌라 앞이다. 우성 빌라에서 미소 슈퍼까지는 약 50m. 나는 비탈 꼭대기에서 꼬맹이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과연 그 승합차에 타고 있던 자가 범인일까.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뒷짐 진 사람을 알아보고 놈은 분명 차에서 내릴 것이다. 나는 일부러 차에서 내려 있으라고 말을 했었다. 놈은 분명 나름 신중하게 생각하여 최대한 상황에서 우위에 서고자 했겠지. 하지만 나는 그것을 노렸다. 놈이 먼저 미끼에 접근하고, 나는 덮친다.

 

기말고사 시간에 시험지를 배부 받는 순간보다도 더 긴장된 몇 초였다. 나는 한 사내가 꼬맹이에게 접근하는 것을 보았다. 좀 전 승합차에 타고 있던 그 자였다. 지금이다.

 

나는 페달을 내리 밟았다. 기어를 최대한 돌리고 있는 힘껏 가속했다. 좀 전에 산 우산을 들었다. 이것으로 과연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미 방아쇠는 당겨졌다. 바람이 얼굴에 와 부딪친다. 고개를 숙이고 나는 말을 탄 전사가 된 기분으로 놈에게 돌진했다.

우산 끝이 바람을 가른다.

 

놈이 꼬맹이에게 소리를 지르는 모습과 주변을 둘러보는 장면이 만화의 컷 하나하나처럼 눈에 들어왔다. 나는 오로지 한 점만을 보며 달렸다. 우산 끝과 그 끝이 노리는 표적에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놈은 나를 보지 못했다. 나는 골목 한가운데 선 놈의 가슴에 우산 끝을 찔러 넣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 묵직하게 충격이 그대로 팔에 전해졌다. 나는 명중했음을 느꼈다. 그리고 놈이 멋지게 나가떨어지는 장면을 생각했다.

 

하지만 우산이 놈에게 닿자마자 나는 중심을 잃고 말았다. 오른손은 우산을 놓치고 말았고 왼손은 핸들을 놓치고 말았다. 앞바퀴가 비틀렸고 상체도 크게 돌아갔다. 잠시 사지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구름 위에 떠있는 듯한 청량감이 귀밑 언저리에서부터 온 몸으로 퍼져 나갔다. 눈코입을 모으듯이 찡그린 놈의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그다음 내 상태를 확인했을 때, 나는 바닥에 누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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