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소설회랑

[라한대] 당신과 사랑을 나누고 싶었다.

Write

Article Menu

facebooktwittergoogle pluspinterestkakao storyband
  • 00:35 Sep 12, 2010
  • 6069 views
  • LETTERS

  • By 엔젤김쨩
손이 움직인다. 고인 물에 잠긴 손이 활발히 움직이며 맞은편 손에 묻은 이물질을 닦아낸다.

-박박 닦아.

목소리에서 명령하는 대로 팔에 묻은 핏방울까지 깨끗이 씻어낸다.

-아직 피가 남았어.

그녀의 흔적이 하나둘씩 사라져간다. 그럴 때마다 목소리는 신이 나서 떠들어댄다.

-좋아. 이제 다리를 씻는 거야.

목소리의 명에 따라 손이 다리에 묻은 피를 닦는다. 하지만 그건 내 의사가 아니다. 또한, 이 피를 묻힌 것도 내 의사가 아니었다.


설마 데이트 중에 뜬금없이 그녀의 뒷다리를 물어뜯게 될 줄은 그녀도 나도 몰랐다. 그건 머릿속에서 들려온 목소리의 지시였다.

-뒷다리를 뜯어버려.

그녀는 갑작스런 상황에 놀라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믿을 수 없다는 듯 쳐다본 그 눈빛이 아직까지 생생히 기억난다. 내 이빨자국이 남은 뒷다리의 비뚤비뚤한 절단면에서 갈색 피가 철철 흘러넘친다.

-반대쪽 뒷다리도 뜯어.

목소리는 그녀의 다리들을 하나씩 뜯어낼 것을 지시했다. 그녀는 찢어져라 비명을 질러댔고, 안달이 난 나는 최대한 저항해보려 했지만 내 몸은 이미 내 통제를 벗어난 상태였다.

-몸을 뒤집어.

모든 다리가 뜯겨나간 채, 그녀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그 눈빛에 담긴 내 모습이 찰랑거리며 흔들리고 있었다.

“가, 갑자기 왜 이러는 거예요?”
“모, 몸이…, 말을 듣지 않아.”

그녀는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모든 걸 알았다는 듯, 모든 걸 체념한 듯, 지그시 눈을 감았다. 아마 깨닫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죽여. 그년을 죽여 버려!

목소리가 살해 명령을 내릴 거라는 걸.

“미안해….”

몇 번을 되뇌었는지 모른다.

“정말 미안해…….”

몇 십 번을 후회했는지 모른다.

“나, 난…….”
“괜찮아요.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오히려 그런 날 위로해준 그녀.
내 턱이 그녀의 물컹한 목줄기를, 질긴 힘줄을 물어뜯을 때까지, 그녀는 저항은커녕 단말마조차 지르지 않았다.

“아아….”

내 입가에 묻은 피가 흘러 가슴을 흠뻑 적시도록…, 흙바닥을 까맣게 물들인 그녀의 피가 식어 말라붙도록…, 난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물가로 가.

목소리가 내게 지시를 내리기 전까진….


나를 움직이는 목소리의 주인은 연가시.
우리 곱등이들에 기생하며 몸을 조종하는 기생충이었다.

연가시의 숙주가 되어 끌려 다니다 죽음을 맞이하는 것.
어쩌면 이것이 곤충의 사체를 먹고 사는 우리 곱등이들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왜 하필 지금이었을까?
그녀를 만나기 전이었다면, 차라리 그녀를 떠나보낸 후였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왜지?”

목소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하염없이 내 몸에 묻은 그녀의 피를 닦아내고, 또 닦아낼 뿐. 그것이 화가 나 소릴 질렀다.

“왜냐고!”
-나한테…, 말한 거야? 정말 나한테?

목소리는 조금 놀란 눈치다. 설마 한낱 숙주 주제에 자신에게 말을 걸어올 줄은 몰랐을 테지.

“너 말고 누가 있어!”
-나한테 말한 거였구나…. 미안. 처음이라 조금 놀랐어. 한데 뭘?

그녀의 살해를 명할 때의 격한 분노와는 천차만별인 천진난만한 말투. 어이없어 감정이 식어버렸다.

“…왜, 나를 죽이지 않지?”
-왜냐니…, 그야…. 너, 다, 당신은 내가 죽여주길 바라?
“이상한 질문을 하는군. 연가시가 숙주의 몸을 장악하는 건 물가로 유인해 죽이기 위함이 아닌가?”
-그건 그래. 하지만 당신도 이상한걸? 보통은 살려달라고 비는 게 정상이잖아?

얼마 전이라면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며칠이 지나 가슴의 온기가 사라질 즈음이면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내겐 더 이상 살아갈 이유가 없어. 바로 네가 내 손으로 부숴버렸으니까.”

고고한 분노를 머금은 내 말에 목소리는 잠시 입을 다물은 듯 했지만, 이내 덤덤히 폭언을 내뱉었다.

-그년은 잊어버려.
“못해. 내 몸은 지배할 수 있어도, 내 마음까지 지배할 순 없다.”
-몸의 통제권을 돌려준다면 어때? 이전까지처럼 나와 함께 살아가는 거야. 당신에겐 아직 1년이 넘는 시간이 남아 있잖아?

어째서 그렇게까지 날 살리고 싶어 하는 걸까? 연가시에겐 날 살려둘만한 가치가 있는 걸까?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내겐 그렇게까지 살아남아야 할 이유가 없다.

“그 시간을 함께 하고 싶었던 여인이 죽었는데 무슨 소용이냔 말이야.”
-그렇게 그년이 좋아? 죽어도 못 잊겠어?

그 목소리엔 나와는 다른 종류의 분노가 깃들어 있다.

‘왜 화를 내는 거지? 화를 낼 사람은 네가 아니라 나다.’

-아니, 잊지 못한다면 차라리 죽이겠어.

진심이다. 물에 잠긴 앞발을 들어 깊은 곳으로 들이미는 시늉을 한다. 이대로 가면 진짜 나를 죽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정도로 겁먹을 상태의 내가 아니었다.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
-알았어. 네가 원한다면….

이윽고 내 다리가 물속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익숙한 대지를 떠나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깊은 물속으로…. 발이 잠기고, 다리가 잠기고, 이내 가슴이 잠겨, 숨을 쉬지 못하게 되었다. 본능대로라면 필사적으로 발버둥을 쳐야 함에도, 연가시에 지배당한 나는 조용히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걸로 마지막인가….’

의식이 희미해져갈 즈음, 느슨해진 항문 사이로 뭔가가 빠져나오는 느낌과 함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적어도 한 번쯤은, 내 눈으로 네 모습을 보고 싶었어.

내 항문을 통해 빠져나오고 있는 긴 물체. 머리와 꼬리가 구분되지 않는 흉한 몸뚱이.

저것이 연가시.
그것은 내게 믿지 못할 작별 인사를 고했다.

-사랑해.

내 사체를 감싸 안은 구정물이, 가슴 시리도록…,
차갑다….

comment

권한이 없습니다.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이제 텔레그램에서도 알림을 받으세요! file Admin 2017.01.19. 493
공지 라한대 주최자 분에게 건의사항 드립니다 (4) Admin 2016.08.14. 787
공지 라한대(라이트노벨 1시간 쓰기 대회) 공지사항 - 대회신청은 여기 댓글로! (182) file 수려한꽃 2012.06.02. 86747
15 라한대 [라한대기간넘음] 곱등이 vs ○갤러 (1) 눈팅러4948 2010.09.12. 14803
14 라한대 [라한대기간넘음]곱등이는 곱등곱등해! (4) 호워프 2010.09.12. 6639
13 라한대 ─────라한대 여기까지 마감입니다(오늘 밤까지는 번외작 인정합니다)───── 수려한꽃 2010.09.12. 6682
12 라한대 [라한대] 곱등이맨: 오리진 김능력무 2010.09.12. 5583
11 라한대 [라한대]함께 엑자일 2010.09.12. 5692
10 라한대 [라한대] 별미 곱등이 위래 2010.09.12. 6373
9 라한대 [라한대]곱등이와 시지푸스를 논함. 호워프 2010.09.12. 6397
라한대 [라한대] 당신과 사랑을 나누고 싶었다. 엔젤김쨩 2010.09.12. 6069
7 라한대 8월 14일자 라한대 감평입니다. (1) 수려한꽃 2010.08.14. 8462
6 라한대 ─────라한대 여기까지 마감입니다───── 수려한꽃 2010.08.14. 7642
5 라한대 [라한대] 제목 없음. (2) 케인로드 2010.08.14. 6347
4 라한대 [라한대] 9 to 5 데꼬드씨 2010.08.14. 5579
3 라한대 [라한대]라노베. 그건 사랑. (1) 라노베짱 히노 2010.08.14. 7997
2 라한대 [라한대]뒤집힌 전학생 (2) 하늬비 2010.08.14. 7152
1 라한대 [라한대] 리-스라는 소녀 나쁜 소녀. (3) 광망 2010.08.14. 7331
prev
이동할 페이지 번호 입력 후 엔터
('157'이하의 숫자)
of 157
서버에 요청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