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소설회랑

[라한대]곱등이와 시지푸스를 논함.

Write

Article Menu

facebooktwittergoogle pluspinterestkakao storyband
  • 00:38 Sep 12, 2010
  • 6397 views
  • LETTERS

  • By 호워프
언제부터인가, 우리 집에는 곱등이가 살기 시작한 것 같다.
큰 피해는 없었으나 창문가에서 과일을 먹으며 TV를 보고 있
을 적이면 창가에서 기어오는 것이 퍽 속을 좋잖게 했다.
벌레 퇴치 전문회사 세스코에 물어보니 곱등이는 들어오거나
나갈 틈을 주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고 했다.

"그래서 한 겁니까!"

"그래서 했다."

그렇다. 그래서 나는 실리콘으로 구멍이란 구멍은 전부 막아버렸다.
겨울에 늘 추웠던 집안이 적잖이 따뜻한 것이 난방비도 줄 것 같고,
어딘가 깨끗한 것이 여러모로 기분이 좋았다.

"좋은 겁니까!"

"좋은 거다."

정말로 좋다. 평소 퍽 청결한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역시 청결한
것이 더러운 것보다는 좋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는 벌레가 싫으니
까.

"싫은 겁니까!"

"싫은 거다."

"아버지를…… 단지 싫어한단 것만으로!"

하고 찡얼거리는 이녀석, 편의상 곱돌이라고 부르도록 하자. 이
보기만 해도 소름끼치는 녀석과 만난 것은 방금 전의 일이다. 실리
콘 앞에서 휘적거리며 돌아갈 줄 모르던 곱등이를 빗자루로 박살낸
다음, 체액을 정리하기 위해 휴지를 가지고 돌아와보니 곱등이의
시체 앞에 바로 이녀석이 있었다. 보기는 다른 곱등이와 다를 바가
없어 대번에 빗자루를 치켜들 뻔 하였지만 결국 내리지는 못했다

이녀석이 곡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곱등이가 부르는 상여가를 듣는 기분은 최악이었다. 녀석은 까만
눈망울에서 눈물을 흘리며(분명 그것이 불가능할 텐데도) 내게
대들었다.

"대체 왜!"

그녀석은 그렇게 물어왔다. 그리고 나는 인생 처음으로 접하는
기괴한 상황. 즉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통곡하는 곱등이를 향해
죽음의 이유를 설명하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아버지는 훌륭한 곱등이셨습니다. 좋은 일꾼이자 올바른 가장……."

"곱등이도 일을 하나?"

"그럼요. 그렇고 말굽쇼. 정말로 훌륭한 분이셨는데. 당신이!"

하며 앞다리로 눈물을 훔치곤, 제 부모의 살갖을 파먹는 녀석.
그 모습에 다시 한번 소름이 끼쳐온다. 녀석을 경계하게 된다.

"그러면서 왜 먹는 건데?"

"내버려두면 고기낭비잖습니까."

입맛까지 다시며 쩝쩝 체액을 빠는 곱등이 녀석. 아무튼, 이제
살려둘 필요는 없겠지.

"잠깐, 뭐하는 겁니까!"

"널 죽이려고 빗자루를 쳐든 거다."

"아니요아니요! 그러시면 안되잖습니까."

"왜?"

"저에게 저희 동족을 왜 그리 싫어하는지 이유를 설명해주셔야죠!
그러기로 동의했잖습니까."

아아, 그랬었지. 하지만 그건 단 한마디면 끝나는 문제 아닌가.

"말했잖아. 싫다고."

"싫다뇨?"

"너희 존재가 싫어. 죽으면 체액을 더럽게 튀기는 것도 싫고.
번들거리는 갑각도 싫고, 더듬이도 싫고, 다리도 싫고, 더러운
습성도 싫으며, 모든 것이 혐오스러워. 몇번이고 말했다. 이제
이유는 다 설명해줬겠지."

"아니요!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았다니까요! 몇번이고 말했잖습니
까! 그건 바르지 않다고!"

"바르지 않다고?"

강변하는 곱등이의 말에 조금 흥미가 돋았다.

"그래요. 일단 생각해보죠. 그런데 당신 여자에요?"

"아니. 스물네 살의 건강한 남자다. 얼마 전 전역했지."

"대학생?"

"응. 요 근처 의과대학에 다니는데."

"평소 진화심리학 책 많이 읽죠?"

"그렇다."

"그렇군요. 그런데 그러면 이상한 것을 못 느끼시겠어요?"

"뭐가?"

"당신은 왜, 저를 싫어하냐는 거죠."

곱등이의 강변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좋고 싫음에 이유가 필요한가?"

"필요한 건 모르겠지만 이유는 그래도 있을 거 아닙니까!
당신은 왜, 나를 싫어하는 겁니까?"

곰곰히 생각해봤지만 별로 답이 안 나오는군.

"……싫어서?"

"하, 참. 이 나라의 의학이 걱정되는군요. 잘 들으세요 미래의
의사 양반. 당신은 지금 순환논증의 오류를 범하고 있어요."

"순환논리겠지."

"아무튼요! 당신이 저를 싫어하는 것엔 근거가 없어요. 있다면
사악한 진화기제 때문이겠지요."

"진화기제?"

"네. 당신네들은 우리들을 병균을 옮기는 존재라고 생각하질
않습니까. 아주 예전부터요. 그러니까 당신네들은 저를 혐오하는
인자와, 문화적 요인들을 발전시켜왔었던 거죠. 하지만 그러한
기제가 저처럼 생각하고 말하는 곱등이들을 죽여야할 정당성을
주지는 않습니다. 그런 구세대의 악습은 벗어나야죠."

"음?"

"제가 처음에 당신이 여자 아닌가 물었었죠? 그건 당신이
채집과 양육, 생산 기능을 담당하는 계급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그럴 경우 위생에
대한 진화 기제가 더욱 커지거든요. 제 말을 다 듣기도 전에
절 박살낼 확률이 농후하죠. 하지만 다행히 당신은 아무래도
사냥과 제작에 특화된 계급인가 보군요. 그러니 이해할 겁니다.
당신의 혐오감이 그저 신석기 시절 당신네 조상이 남겨준 진화
기제일 뿐이고, 이는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요."

"그렇군 잘 들었어. 너에 대한 혐오감을 극복할 수 있다."

"하, 이해한다니 다행이군요. 이렇게 대화를 통한다면 우리는
서로 이해를 하고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겁니다."

"그래. 혐오감을 극복하고 맨손으로 널 잡을 수도 있겠군."

"그래요. 당신네들이 악수를 하는 것처럼, 제 앞다리와 당신의
앞다리가 촉각교감을 나누겠지요."

이건 더는 참을 수가 없군. 나는 주먹을 들었다. 당황해하는
곱등이를 주먹으로 박살낸 다음 손에 튄 체액을 바라보았다.
뭐야. 정말로 극복할 수 있잖아. 정말로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어……째서."

머리만 남은 곱등이의 물음에 조금 생각하다가 답했다.

"아무튼, 네가 싫으니까."

나는 녀석을 완전히 부수었다. 그리고 그날 밤, 좋은 꿈을 꾸며 기분좋게 잠들었다.

comment

권한이 없습니다.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이제 텔레그램에서도 알림을 받으세요! file Admin 2017.01.19. 478
공지 라한대 주최자 분에게 건의사항 드립니다 (4) Admin 2016.08.14. 766
공지 라한대(라이트노벨 1시간 쓰기 대회) 공지사항 - 대회신청은 여기 댓글로! (182) file 수려한꽃 2012.06.02. 86725
15 라한대 [라한대기간넘음] 곱등이 vs ○갤러 (1) 눈팅러4948 2010.09.12. 14803
14 라한대 [라한대기간넘음]곱등이는 곱등곱등해! (4) 호워프 2010.09.12. 6634
13 라한대 ─────라한대 여기까지 마감입니다(오늘 밤까지는 번외작 인정합니다)───── 수려한꽃 2010.09.12. 6682
12 라한대 [라한대] 곱등이맨: 오리진 김능력무 2010.09.12. 5583
11 라한대 [라한대]함께 엑자일 2010.09.12. 5692
10 라한대 [라한대] 별미 곱등이 위래 2010.09.12. 6373
라한대 [라한대]곱등이와 시지푸스를 논함. 호워프 2010.09.12. 6397
8 라한대 [라한대] 당신과 사랑을 나누고 싶었다. 엔젤김쨩 2010.09.12. 6069
7 라한대 8월 14일자 라한대 감평입니다. (1) 수려한꽃 2010.08.14. 8462
6 라한대 ─────라한대 여기까지 마감입니다───── 수려한꽃 2010.08.14. 7642
5 라한대 [라한대] 제목 없음. (2) 케인로드 2010.08.14. 6346
4 라한대 [라한대] 9 to 5 데꼬드씨 2010.08.14. 5579
3 라한대 [라한대]라노베. 그건 사랑. (1) 라노베짱 히노 2010.08.14. 7997
2 라한대 [라한대]뒤집힌 전학생 (2) 하늬비 2010.08.14. 7149
1 라한대 [라한대] 리-스라는 소녀 나쁜 소녀. (3) 광망 2010.08.14. 7325
prev
이동할 페이지 번호 입력 후 엔터
('157'이하의 숫자)
of 157
서버에 요청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