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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한대]산다는 것

by Skuld posted Jun 13, 2016 (00시 03분 07초) Replies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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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잔잔한 목소리와 함께 환한 조명이 켜졌다. 그와 동시에 웅성거림이 잦아들었다. 조명이 비추는 것은 커다란 원탁, 그리고 그 주위에 앉은 양초와 매미 그리고 청년이었다. 원탁의 위에는 새까만 정장이 퍽 잘 어울리는 불꽃이 강단에 선 것 마냥 꼿꼿이 서있었다. 


"네 분 모두 이렇게 제 초대에 응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꾸벅-


심심한 감사인사와 함께 그가 정중히 몸을 숙였다. 그런 그의 태도에 원탁에 앉아있던 자들도 두리번 거리는 것을 멈추고 하나 둘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청년은 옆 자리의 양초 아가씨와 대화하던 것을 멈췄다. 양초 아가씨는 여전히 영문을 모르는 표정이었고, 매미 씨는 궁시렁 거리며 머리에 쓴 중절모를 고쳐썼다.


"여러분들을 이렇게 한 자리에 모시게 된 것은 별다른 이유가 있어서는 아닙니다. 이것은 당연한 절차이며, 응당 모든 것들이 그 끝을 맞이하기 전에 해야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마치 연극의 배우마냥 한껏 팔을 벌려 말을 내뱉는 불꽃의 몸에서 잠시간 불길이 크게 일렁였다. 그들이 끝을 맞이했다는 불꽃의 말에 원탁에 모인 자들의 반응은 가지각색이었다. 


양초 아가씨는 예쁜 얼굴을 한껏 구긴 채 흐느끼며 촛농을 떨궜고, 중절모를 쓴 매미 씨는 덤덤히 콧수염을 만지고 있었지만 나머지 다리로는 책상을 불규칙적으로 툭툭 두드렸다. 그런 매미 씨의 맞은 편에는 한 청년이 올 게 왔다는 듯 침음성을 흘리며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었다. 그리고 불꽃은 인자한 눈빛으로 그런 그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자, 모두들 너무 슬퍼하지는 말아주세요. 해가 지고 달이 뜨면 다시 해를 맞을 준비를 하듯이, 이 자리는 그러한 목적을 위해 마련된 자리니까요."


새로운 시작을 암시하는 말은 이미 끝이라는 말을 듣고 좌절하던 이들에게 제법 효과가 있는듯했다. 어느새 흐느낌은 잦아들고 책상에서 나던 툭툭 소리도 조용해진걸 느끼며 불꽃은 다시 제게로 집중되는 시선을 인식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여러분이 하실 일은 아주 간단합니다. 그저 삶의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지 제게 얘기해주시면 되는 법이죠."


"어떤 사명을 띠고 살아왔는가 말이오?"


"제 삶에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 말입니까?" 


점잖게 물어오는 매미 씨의 목소리와 다소 격양된 느낌의 청년의 목소리가 겹쳤다.


"아뇨, 말 그대로입니다. 어떤 무엇을 위해 살았는지 제게 말씀만 해주시면 됩니다. 간략하게 말하셔도 되고, 길게 풀어서 말하셔도 됩니다. 제가 알고자 하는 것은 그저 여러분이 어떻게 살아왔는가입니다."


"흠, 그럼 나부터 말하겠소."


잠시 고민하던 매미 씨가 당당히 말했다.


"사실, 삶이라는 거창한 단어까지도 필요없겠군. 유충때부터 15년간 나무의 수액을 먹고 자라난 뒤 성충이 되어 한 달 동안 노래를 불렀지. 날이 갈수록 점점 내 목소리가 예전같지 않다는 것이 느껴지더군. 우렁차던 소리는 날이 갈수록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줄어들었고 이윽고 목소리가 더이상 나오지 않더군. 그렇게 끝을 생각하며 잠을 청하고 눈을 떠보니 지금 여기 이 자리에 있는걸세."

"흥."


청년이 콧방귀를 끼었다.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말을 하는 첫 타자인것치고 그의 답은 다소 싱거웠고 심심하게 들렸으나 불꽃은 한껏 몸을 기울인 채 그의 말에 성실히 집중했다. 그에겐 아직 더 할 말이 있어보였다.

"여기 계신 분들 모두 내가 허탈한 삶을 살았다고 지레짐작 하거나 수십년의 기다림 끝에 고작 한 달 만에 그 끝을 맺어 내게 동정을 보일 수도 있겠군."


그의 말에 양초 아가씨와 청년 둘이 몸을 움찔거렸다.


그가 잠시 주위를 둘러보더니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건 무의미한 것이오, 매미란 원체 그런 생물이니까. 비록 수십년간을 기다림 속에 지내더라도 한 달의 울음을 우리는 일종의 사명처럼 여기네, 한 달을 못채우는 녀석들도 많지. 때문에 나는 내 사명을 퍽 충실히 이행했다고 보네. 그렇기에 자네가 무엇을 위해 삶을 살아왔느냐 물었을 때에도 울며 보냈느라 당당히 말할 수 있었지."


"그게 내 사명이었으니까."


찌르르- 찌르르-


매미 씨는 얼굴에 한껏 미소를 띄운 채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 웃음소리에 다른 이들이 잠시 움찔했지만 그의 말이 끝나고 원탁 주위의 분위기는 한껏 풀어져있었다.


"그렇군요. 아주 인상적입니다."

그런 그를 마주보는 불꽃도, 환한 미소를 띤것마냥 이전보다 한껏 붉게 타올랐다.


"좋아요, 아주 좋아요. 자신의 사명을 위해 일생을 산다는 것, 정말 멋진 일이라 생각합니다." 

불꽃이 흡족스럽게 두 손을 마주 비비는 와중에 놀랍게도 양초 아가씨가 조용히 손을 들었다. 매미 씨의 이야기에 긴장이 한껏 풀린 탓일까, 이전보다 풀어진 얼굴로 고운 얼굴에 살짝 미소를 띤 채 입을 열었다.


"...저, 이번엔 제가 말을 해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제 얘기는 한 가정집에서부터 시작해요."


추억을 회상하듯 꿈을 꾸는 표정을 짓는 양초 아가씨의 말에 모두들 귀를 기울였다.


"제가 있던 곳은 아주 가난한 가정집이었죠. 아주 가난한 가정집이라 불도 잘 안들어왔어요. 그 집에는 귀여운 아기와 힘들어도 항상 웃음을 잃지 않는 아이 엄마가 있었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스스로의 처지에 원망도 많이했고 가난한 가정집에 살고있는 그들을 원망하기도 했어요. 좋은 시설에 있는 양초는 고급스럽게 촛대에 장식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양초 친구들에게 들은 적이 있었거든요."

그렇게 말하는 양초 아가씨의 얼굴에는 철없던 어린 시절을 생각하는 것마냥 희미하게 미소가 걸려있었다.


"그 사실을 잘 알면서도 모녀를 위해 자신의 몸을 태워가면서도 뭐가 그리 좋은지 활발하게 웃던 그들의 모습이 잘 이해가 안가기도 했지요. 그렇게 하루 이틀이 지나고 제 차례가 왔어요. 사실 그쯤에는 이미 저도 체념한 상태라 '이렇게 가는구나.' 라고 생각한 채로 아이 엄마의 손에 잡혀 아이의 방까지 들려갔죠."


양초 아가씨는 어느새 본인이 활짝 웃고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재잘거림을 이어나갔다.


"놀라운 일은 그 뒤에 생겼죠. 세상에, 아이와 엄마가 저한테 고맙다고 인사를 하는 게 아니겠어요. 그들은 당연히 제 존재를 모를텐데 말이죠! 그렇게 인사한 아이에게 엄마가 다정히 속삭이기 시작했어요. '항상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렴. 이 양초가 있어서 너는 밤중에 부딪힐 일도 없고 넘어질 일도 없을거란다.' 그러자 아이는 활짝 웃으며 엄마에게 미소로 응답했죠."


쿡쿡, 소리죽여 웃으며 말을 이어가는 양초 아가씨의 얼굴에는 이전과 같은 근심은 없어보였다.


"그때, 그 아이의 미소를 보자 모든 게 이해되더군요. 자신의 몸을 불태우고 점점 약해져가는 불꽃 속에서도 끝까지 웃던 친구들이, 그리고 제가 이 아이를 위해서라면 저도 마찬가지로 그들처럼 웃으며 제 한 몸을 불사를 것을. 그렇게 저는 제 몸을 삼아 환하게 방을 밝히기 시작했고, 점점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불은 약해지고 점차 흐려져갔지만 다행히 그때는 날이 밝은 뒤였죠. 곱게 자는 아이의 모습을 보며 조용히 웃으며 제 이야기는 끝납니다. 그래요, 저는 그 아이의 웃음을 위해 살았다고 할 수도 있겠네요."

양초 아가씨의 말이 끝난 후 방에는 잠시 정적이 맴돌았다.


"아름답군요. 타인을 위해 살아가는 삶이라, 아주 훌륭했습니다."


정적을 깨며 조용히 말을 꺼내는 불꽃의 몸이 촛불처럼 잔잔하게 일렁거렸다. 

다시 잠시간의 정적이 흐르고, 청년은 이내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부루퉁한 표정을 유지한 청년은 말을 꺼내기 싫지만 무엇인가 말을 꺼내려는듯 몇 번씩 입술을 들썩이다 입을 열었다.

"제겐 여러분들처럼 무엇을 위해 살아본 적이 없습니다. 양초 양처럼 남을 위해 살아본 적도 없고 매미씨처럼 자신의 사명을 위해 살아본 적도 없죠."


조용히 끝맺는 청년의 말은 어째서인지 무거운 한숨처럼 들렸다. 그런 청년을 불꽃은 안쓰러운 눈빛으로 쳐다봤다. 그런 불꽃의 눈빛과 마주치자 청년은 잠시 울컥한 뒤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제 삶에 목표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저 또한 화가가 되고자 노력했었던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림을 배우고 저는 이내 꿈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죠."

그렇게 말하는 청년은, 마치 누군가에게 변명하는 듯이 보였다.

"막상 그림을 배우기 시작하니 제가 그렸던 그림들은 모두 어린애 장난처럼 보이더군요. 세상에는 이미 저보다 훨씬 뛰어난 사람들이 널려있었습니다. 심지어 같이 그림을 배우던 친구조차 저보다 잘 그렸죠. 한 번 그렇게 생각하자, 제 의지란 것은 한없이 초라해지더군요. 한 때는 그렇게 크게 타오르던 의지가 점점 줄어들기 시작하고... 굳건하던 의지가 희미해져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는 경험은 썩 즐거운 경험이 아니었습니다."

청년은 우울한 얼굴로 말을 계속했다.

"그래서, 모든 것에 기대를 하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굳이 무엇인가를 위해 살아야 할 필요는 없죠. 사람들은 모두 무엇인가를 위해 사는 사람들보다는 그것을 포기하고 평범한 삶을 향유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습니다. 그들도 알기 때문이죠, 꿈이 얼마나 쉽게 꺾일 수 있는지. 그렇게, 남들처럼 공부를 하고 대학을 가고 직장에 취직하고 괜찮은 배우자를 만나 결혼했습니다. 나쁘지 않은 인생이었죠, 결혼기념일날 제게 달려드는 트럭만 없었다면요. 제 얘기는 여기서 끝납니다."

그렇게 말을 마친 청년은 의자에 등을 기대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으음. 아쉬운 이야기군요."

불꽃이 곤란한듯이 침음성을 흘리며 말했다. 그 때, 매미가 청년에게 말했다.

"자네는 정말 화가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 진심을 다한 것이 맞는가?"

"물론입니다. 당시의 제 꿈은 진실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 꿈을 이어나가지 않았는가."

"제가 말씀드렸을텐데요, 세상에는 저보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수두룩했고 그건 제게 큰 좌절감을 안겨주었죠."

청년은 쏘아뱉듯이 사납게 말했다.

"하지만, 자네는 그들도 노력하고 수많은 연습끝에 그 경지에 이른 것이라 생각하진 않는가?"

"그건..."

"내가 보기에 자네는 그저 발을 내딛는 것이 무서워 섣불리 포기한 겁쟁이로밖에 안보이네."

"..."

청년은 얼굴을 잔뜩 구겼지만 그 입으로 말이 나오지는 않았다.

"자네가 진심으로 화가가 되고자했다면 거기서 포기했으리라 생각하진 않네."

"..."

매미 씨는 잔뜩 얼굴을 구긴 청년에게 타이르듯 말했다.

"하지만, 다시 시작해보는 것은 어떤가. 아까 불꽃 씨가 말한것마냥 해는 한 번 진다고 다시 떠오르지 않는 것이 아닐세. 비록 자네 의지가 사그라들어 꺼졌지만, 새로운 불은 이미 타던 불이 온전히 사그라들어 꺼지고 난 뒤 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말하며 그는 청년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청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표정은 전보다 한결 나아보였다.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불꽃이 목을 숙이며 매미 씨에게 인사를 하자. 매미 씨도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매미 씨 말씀대로입니다. 무엇인가가 점차 사라지는 것은 슬픈 일이죠. 하지만 사라지고 난 뒤에 새로 시작하는 일도 있는 법입니다. 부디 너무 낙심하지 말아주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말하는 불꽃의 몸의 불은 점점 사그라들고 있었다.

"그럼, 나머지 세 분은 모두 말씀을 마치셨군요. 이제 네 분 중 남은 건 딱 한 분뿐이군요."

불꽃이 고개를 들어 천천히 당신을 바라본다. 나머지 셋의 시선도 당신을 향하기 시작한다.

"자, 당신은 무엇을 위해 살아오셨나요?"

  • profile
    설명충-극혐 2016.06.14 11:39

    본능대로 살아온 매미가  성실하게 산 인간보고 지랄하네

  • profile
    1590 2017.05.28 21:04
    이제와서 사과하기엔 늦은 것 같습니다만, 위의 댓글은 지나쳤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당시엔 판갤과 경소설회랑을 동일시 하고 있어서 저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적은 것 같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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