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한대

뽑기의 정석

by О. posted Feb 27, 2017 (05시 44분 12초) Replies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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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켓 참여 동의


기계에 불이 들어왔다. 집게가 움직였다. 요란한 전자음을 뚫고 인형들 위를 한참 맴돌던 집게는 잠깐을 멈춰 있다 아래로 내려갔다. 길죽한 집게발이 인형 사이로 파고들었다.

"제발, 제발!"

주위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크레인을 보며 소리쳤다. 그 소리를 들은 것일까, 집게는 도라에몽 인형을 잡고 위로 올라갔다. 집게가 인형을 집고 있는 그 짧은 시간이 영원한 것처럼 느껴졌다. 아아, 부디 힘을 잃지 마. 이번이 마지막이란 말야. 하지만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집게는 투입구 가까이에 와서 힘없이 인형을 놓고 말았다.

"아아아!!"

나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또 다시 만 원을 날렸다. 이제 몇 번째인지 셀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미어지는 가슴으로 인형뽑기 가게를 나서자 정신이 번쩍 들기 시작했다. 만 원이면 5천원짜리 볶음밥이 두 그릇, 3천 5백원짜리 아메리카노가 세 잔, 천 팔백원짜리 고로케가 다섯 개, 만 원이면... 그 액수의 구체적인 가치를 상상할수록 더욱 속이 쓰렸다.

어쩌다 이렇게 된건지 몰랐다. 그렇다고 인형을 그렇게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오히려 나는 그런데 어릴 때부터 별로 흥미를 안 두는 쪽이었다. 이게 다 그날 단 한 번의 경험 때문이었다. 새로 산 휴대폰을 깨 먹고 기분이 최악이었던 지난 겨울의 어느 날, 나는 서비스 센터에 들렀다 집으로 돌아오며 충동적으로 집 앞 인형 뽑기 가게에 들어가 돈 천원을 밀어 넣었다. 몇번 조이스틱을 움직여 버튼을 누르자, 집계는 인형을 척 하고 집어 투입구로 가지고 왔다.


구멍 아래로 손을 집어 넣으니 귀여운 토끼 인형이 잡혔다. 얼추 보아도 가게에서 만 원은 주어야 살 수 있을 법한 괜찮은 물건이었다. 그건 의외로 짜릿한 경험이었다. 어, 이게 이렇게 쉬웠나. 다들 하는걸 보니까 잘 안 잡히는것 같던데. 어쩌면 내가 여기에 소질이 있는 게 아닐까. 그 인형을 보자 신형 휴대폰을 깨먹은 걸로 받았던 스트레스가 눈 녹듯이 날아갔다. 나는 내가 실력이 있어서 그걸 뽑았다고만 생각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굉장한 행운이 겹쳐서 일어난 일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불운의 시작이었다.


그 다음부터 거짓말처럼 인형은 뽑히지 않았다. 같은 가게, 같은 장소에서 도전하는데도 기계는 나를 철저히 외면했다. 돈을 만 원씩 집어 넣어도 허탕을 치기 일쑤였고, 거의 대부분은 액수와 상관 없이 빈손으로 그 날의 도박이 끝나곤 했다. 이것도 취미의 범주에 넣는다면 인형 뽑기는 대단히 가성비가 낮은 취미였다. 그런데도 인형 뽑기를 포기하지 못했던 것은 간간히 가뭄에 콩나듯 건져올리는 그 쾌감이 굉장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잃은 액수가 높을 수록 그 쾌감은 올라가는 듯 했다.

인형 뽑기를 잘할 수 있는 방법이 있나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았으나 별다른 비법들은 나오지 않았다. 뽑기를 잘하기로 유명한 달인이 출연한 TV 쇼의 한 에피소드를 보아도 딱히 소득은 없었다. 거기에서 그 달인은 '탑 쌓기', '레버 돌리기' 등의 테크닉을 선보였다. 하지만 탑 쌓기는 애당초 돈을 많이 투자해야 대강이나마 흉내낼 수 있는 기술이었고 나는 그 정도 자금 투자를 작정하고 뽑기방에 간 적이 없었다.

인형 뽑기를 꽤 잘한다는 친구에게 비법을 듣기도 했다.

“원래 뽑기 기계의 집게는 투입구에서 멀리 떨어질수록 힘이 세지는 거야. 그러니까 가까운 걸 잡는 것보다 멀리 있는 걸 잡는 것이 더 효율이 높지. 그리고 투입구 바로 앞에서는 정말로 힘이 약해지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집게가 인형을 들어올릴 수 없어.”

친구는 노트를 펼쳐 그림을 그려가며 설명했다.

“이를테면, 이쪽 위치보다는 이쪽 위치가 더 좋은 거야. 그리고 x축으로 움직일 때는 힘이 유지되지만 y축으로 움직일 때는 힘이 확 떨어지니까 세로 방면에 있는 건 웬만해서는 잡으면 안 되고.”

나는 그의 조언을 새겨듣고 다시 도전해 보았다. 이건 생각보다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형편없이 낮은 인형 뽑기의 확률을 크게 올려줄 수 있을만한 묘수는 아니었다. 여전히 나는 뽑기에 많은 돈을 잃었고 그런 식으로 제대 후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뽑기로 인한 손실은 그대로 생활에 영향을 미쳤다. 아직까지는 그런대로 여유가 있는 편이었으나, 불필요한 지출로 인한 정신적 데미지가 상당했으므로 온종일 인형 뽑기에 날린 돈을 생각하게 되었다. 매일 같이 조금씩 날린 그 돈이 그대로 있었으면 아버지에게서 받은 고물 차 도색을 새로 했을 텐데. 다음 학기에 입고 다닐 옷 걱정은 안해도 될 텐데. 기본 세팅밖에 안 되는 구형 디지털 피아노를 바꿨을 텐데. 기타 등등. 후회가 쌓이고 심적으로 피폐해지면서 나는 드디어 결심을 했다.

‘마지막으로 딱 한번만 하자. 그리고 깨끗하게 손을 터는 거야.’


나는 뽑기방에 가서 천원짜리 스무장을 바꿨다. 그리고 피카츄 인형이 가득 들어있는 기계 앞에서 비장한 마음으로 지폐를 넣었다. 열여덟, 열일곱, 열여섯.. 돈을 한 장씩 먹으며 집게는 바쁘게 움직였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리고, 남은 지폐가 셋. 둘, 하나.
나는 인형을 하나도 뽑지 못했다.


“으아아악! 이건 사기야, 사기!”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난 소리를 질렀다. 애당초 여기에 오는 게 아니었다. 결심을 했으면 그냥 끊었어야 했는데. 오기를 부리다 이만원을 더 날렸다고 생각하니 더욱 속이 상했다. 뒤를 돌아서다 나는 공연한 미련에 뽑기 기계를 돌아보았다.


그 때였다.


교복을 입은 여학생 하나가 가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내 어깨 높이 정도 될까, 작은 키의 그 여학생은 아무 망설임 없이 빠른 걸음으로 곧장 내가 이만원을 날린 기계 앞에 섰다. 거기에 천 원짜리 지폐를 밀어넣는 것을 보자 괜히 짖궃은 마음이 들었다. 어디 너는 한번 잘 하나 보자. 그 기계는 말야, 무려 이 만원이나 먹은 놈이라구.


그런데 그녀가 집게를 움직이자 바로 인형이 딸려 올라왔다. 내가 이만원씩 처넣도록 미동도 하지 않던 바로 그 피카츄였다. 그녀는 아무런 동요 없이 구멍에 손을 집어 넣어 큼지막한 인형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허탈한 광경이었다. 그 꼴을 보고 있자니 더 약이 올랐다. 결국 기계가 아니라 내가 문제였다는 건가. 그렇게 돈을 투자하고도 조금의 실력도 올리지 못 하다니. 괜한 자괴감에 집에 돌아가서도 하루 종일 우울해 했다. 설상가상으로 자포자기한 심정이 되어, 그 때의 굳은 결심을 뒤로 하고 나는 인형 뽑기에 계속 돈을 쓰게 되었다.

그렇게 며칠을 보내며, 나는 뽑기방에서 내가 처절하게 망하던 날에 인형을 뽑아간 그 여학생을 몇 번 더 보게 되었다. 조용히 다녀가는 사람이었지만 한번 눈에 들어오니 그 존재가 꽤나 신경 쓰였다. 그녀의 패턴은 항상 같았다. 갑자기 가게에 들어와 아무런 망설임 없이 기계에 돈을 넣어 한번에 인형을 뽑고 나가는. 그녀는 실수하는 법이 없었다. 일타 일피. 마치 마법을 부리는 것처럼 그녀는 단번에 인형을 낚아챘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지 않고 홀연히 사라졌다.


매일 만원, 이만원을 날리고 절망하는 내 앞에서 누군가 그런 묘기를 부리니 허망하기까지 했다. 세상에 저런 고수가 있구나. 저 사람은 대체 어떻게 저렇게 하는 걸까. 저런것이 바로 신출귀몰인가. 그렇다고 뭔가 특별한 기술을 발휘하냐면 그런 것도 아닌것 같았다.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허탕을 치고 있을 때 그 여학생은 다시 가게에 나타났다. 이번에 그녀가 도전한 기계는 상당히 난이도가 높았다. 여느 인형들보다 세 배 정도는 큰 곰인형이 들어 있는, 보통 집게로는 웬만해서는 들어올릴 수 없는 대형 인형 전용 기계였다. 하지만 그녀는 이번에도 그 인형을 번쩍 들어올렸다. 자기 팔뚝만한 인형을 구멍에서 뽑아 들고 나가는 그녀를 보며 나는 결심을 했다. 대체 어떻게 저렇게 할 수 있는지. 비법을 물어보기로.


“저기요!”


여학생은 뒤를 돌아보았다.


“저 본적 있으시죠?”
“네..”


그녀의 눈빛에는 경계심이 어려 있었다. 하긴, 나 같은 아저씨가 갑자기 말을 거는데. 당연히 무섭겠지. 나는 그녀가 놀라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다른게 아니라요. 인형을 너무 잘 뽑으시는것 같아서요. 어떻게 그렇게 뽑을 수 있는지 좀 어쭤보려구요. 방법이 있으실것 같은데..”
“그런거 없어요.” 그녀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대답을 했다.


“아뇨, 저기… 그게 아니라.”
“그냥 정확하게 조준해서 움직이세요. 방향이 틀리니까 인형을 못 잡죠.”


그럴 리가 없었다. 뽑기를 하면서 내가 제일 신경쓰는게 방향 조작이었다. 뒤돌아 가는 그녀를 나는 민망함을 무릅쓰고 쫓아갔다.


“저기, 학생. 제발 부탁입니다.”
“그런 방법 정말 없다니까요?”
“제가 너무 간절해서 그래요. 이것 땜에 홧병이 날 것 같다고요.”


나는 애절하게 말하며 가방을 열어 다이어리를 보여주었다.


“이것 좀 보세요. 제가 계획적으로 지출을 하려고 이렇게 계속 기록을 했는데요. 인형뽑기를 시작하고 난 뒤부터 엉망이 됐어요. 지난 달에만 삽십 만원, 이번 달에는 오십 만원. 석 달동안 합해서 백만 원이 넘는다고요. 돈 날린건 그렇다 쳐도 마음이 쓰려서, 어떡해야 될지도 모르겠고.. 제발 사람 하나 살리는 셈 치고…”


읍소가 먹힌 것일까. 구구절절 사연을 늘어놓는 나를 보며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알았어요. 그만 하시고, 따라 오세요.”

그녀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인형 뽑기방의 맞은편 건물 층계참이었다. 그녀는 계단에 앉아 옆자리를 손으로 가리키며 내게 말을 했다.


“여기 앉으시고요. 저기 가게 보이시죠?


그녀는 주머니에서 조그만 쌍안경을 꺼내 내게 주었다.


“이걸로 뽑기방 보시면서 하나씩 보고 쓰세요.”
“뭘 쓰라고요?”


“그러니까 기록을 하시라는 거죠. 저기 뽑기방은 기계가 열 대잖아요? 그 열 대를 순서대로, 한 기계가 집게를 얼마나 움직이는지 기록하는 거에요. 체크 표시를 하셔도 좋고.”


이상한 주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토를 달지 않고 시키는대로 하기로 했다.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내 옆에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그녀는 내 노트를 슬쩍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됐네요. 이제 갑시다.”
“네? 어디를요?”
“어디긴요. 인형 뽑기방이죠.”


그녀는 나를 데리고 뽑기방으로 가더니 기계 한대에 돈을 밀어넣고 바로 인형을 뽑았다. 그 신묘한 능력에 나는 다시 한번 감탄했다.


“그리고 이쪽.”


그녀는 뒤를 돌아보더니 다른 뽑기 기계에 돈을 넣어 또 하나를 뽑았다. 오늘따라 그 기량에 더욱 물이 오르는것 같았다.


“됐어요. 이제 나가요.”


그녀는 다시 가게 밖으로 나가서 맞은편 건물 층계참으로 갔다.


“다시 기록하세요.”
“지금 이게 뭐 하는 건가요? 이건 왜 쓰는 거고 인형은 어떻게 뽑으신 거죠?”


그녀는 내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 정도 하면 눈치챌 법도 한데…”
“무슨 눈치를 챈단 말입니까?
“이렇게 둔하니까 그렇게 돈을 잃었지. 제가 지금 하는게 횟수를 세는 거잖아요. 이걸 왜 셀것 같아요?”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


그녀는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저기, 지금까지 그냥 돈 넣고 방향 조준만 잘하면 뽑히는 줄 알았죠?”
“네. 원래 그런거 아닌가? 그러니까 집게가 있고 방향 키가 있죠.”


“그런게 아니라니까요? 하긴, 이렇게 순진한 사람들이 있으니 장사가 되는 거겠지만.”
“그럼 아닌가요?”


선문답을 하는데 지쳤다는 듯 그녀는 그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얼핏 봐서는 표가 안 나지만, 인형 뽑기 기계는 횟수 설정이 돼 있어요. 그러니까 매번 집게에 가해지는 힘이 같지 않은 거죠. 보통은 집게의 힘이 약하지만, 한번씩 주기적으로 강해지는 타이밍이 있거든요. 열 번째라든가, 서른 번째라든가. 이걸 미리 세팅을 하는 거고 그럼 기계는 그 주기대로 움직이는 거죠.”
“네?” 듣도보도 못한 소리였다. “정말인가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집게가 인형을 잡아도 힘있게 끌어올리지 못하는 거에요. 그러다 한번씩 힘이 세지는 주기에 집게가 인형을 들어올리면 뽑는 사람 입장에서는 마치 자기 실력으로 건진 것처럼 느껴져서 혹하는 거죠. 사실은 횟수 놀음에 놀아나고 있을 뿐인데.”
“그랬군요…”
“이게 또 기계마다 다르고 날마다 달라요. 이걸 느슨하게 설정해서 한번씩 잘 뽑히게 만들어 놓다가, 사람들이 붐빈다 싶으면 다시 타이트하게 조절해서 많이 실패하도록 하고. 그래서 최대한 많은 헛손질을 유도하면서 이게 뽑히는 승부라고 믿음을 심어 주는게 저 게임의 목적인 거죠.”


그 말을 듣다 보니 왠지 화가 났다.


“아니, 그러면 사기 아닌가요? 우리는 그런걸 모르고 돈을 넣는 거잖아?”
“뭐, 저분들도 먹고 살아야죠. 저걸 단속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
하긴 내가 여기서 화를 내봐야 소용이 없었다.

“어쨌든, 그래서 여기서 횟수를 세고 계셨던 거군요.”
“네. 기계마다 어떤지 기록을 하고, 집게가 강해지는 타이밍에 달려가서 재빨리 뽑고 오는 거죠.”


각 기계의 집게가 강해지는 주기를 파악해서 그 때 승부를 거는 것.
이게 그녀의 비결이었다.


“근데 학생도 집념이 대단하네요. 그렇게 하려면 최소 두어 시간 이상은 매일 죽치고 있어야 되는 거잖아요. 안 피곤하고 안 심심하세요? 성장기의 학생이 이렇게 죽치고 있어도 되나?”
“석 달동안 뽑기로 백만원 날리신 분이 하실 말씀은 아닌 것 같은데요?”


하긴. 정상이 아닌건 내 쪽도 마찬가지였다. 차라리 이쪽은 성과라도 올리고 있으니 나보다는 훨씬 나은 입장이었다. 나는 묵묵히 노트에 집게의 추이를 기록하며 그녀를 따라 인형을 뽑았다. 그 날 뽑은 인형만 다섯 개. 인형 뽑기를 시작한 이후 최다 성과였다.


다음 날 같은 시각에 나는 뽑기방 대신 맞은편 건물 층계참으로 갔다. 그녀는 이미 계단에 앉아 뽑기방의 기계 움직임을 기록하고 있었다.


“벌써 와 계시네. 안녕하세요!”


내가 반갑게 인사를 하자 그녀는 달갑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하긴, 그동안 혼자 잘 해먹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합세하는게 즐겁진 않겠지. 하지만 나는 나대로 본전을 뽑아야 할 이유가 있었다.


“이래서 안 가르쳐 주려고 했었는데…”
“에이, 그렇게 빡빡하게 굴지 말고 같이 먹고 삽시다.”


나는 그녀와 함께 건너편의 뽑기방을 보며 기록을 했다. 처음에는 성가신 기색이었지만, 사람이 둘이 되자 훨씬 효율이 높아졌으므로 그녀도 이내 태도가 바뀌는 것 같았다. 오늘은 어제보다 더욱 성과가 좋았다. 나는 그녀와 함께 인형을 뽑아서 드나들기를 반복했다. 한참을 열을 올리다 보니 배가 고팠다.


“저기 출출한데, 뭐라도 시켜 먹읍시다. 짜장면 어때요? 아니면 짬뽕?”
“그럼 나는 짜장면…” 그녀의 대답을 듣고 나는 바로 중국집에 전화를 걸었다.


배달원이 도착하자 그녀는 주섬주섬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나는 재빨리 제지를 했다.


“아뇨, 괜찮아요. 제가 낼게요.”


그래도 내가 연장자이고 빚진게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 밥을 사게할 순 없었다. 다행히 인형 뽑기로 전 재산을 떨어먹은건 아닌지라, 내게 그 정도의 여유는 있었다.



며칠간 나는 그런 식으로 그녀와 함께 인형을 뽑았다. 몇 시간씩 죽치고 뽑기를 하다가 허기가 지면 그 자리에서 배달 음식을 시켜 먹었다. 그 메뉴는 중국 음식이 되었다가 치킨이 되고 피자가 되기도 했다. 처음엔 사양하는 기색이었던 그녀는 나중에 직접 메뉴를 고르는 열성까지 보여주었다.


“아니, 오늘은 족발이라고요? 얻어먹는 입장에서 너무 적극적인거 아닌가?”
“누구땜에 이 정도 자존감 찾으셨는데, 이 정도면 레슨비로 싼거 아니에요?” 그녀는 한마디도 지지 않았다.

 
며칠을 그렇게 보내다 나는 그녀에게 다른 제안을 했다.


“저기 학생. 우리 원정 갑시다.”
“원정이요?”
“네. 계속 여기서만 뽑는거 심심하기도 하고, 한 군데서만 이러면 의심 사기 쉽잖아요. 저한테 차가 있으니까. 다른 괜찮은 데를 물색해서 다니는 거죠. 요즘 이거 유행이라 뽑기방 많잖아요.”


그녀는 잠깐 망설이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대답했다.


“그럼 그럴까요?”


그 날부터 시내 전체가 우리의 영역이 되었다. 우리는 자루를 들고 다니며 잘 뽑힐만한 가게를 골라서 죽치고 앉아 그 동네의 이름난 배달 음식을 시켜 먹고, 내내 인형을 뽑았다. 그래도 지나치게 폐가 되지 않도록 한 가게에서 너무 많은 인형을 뽑지 않는다는 규칙은 세워 둔 상태였지만, 그 외에는 자유로웠고 거칠 것이 없었다. 나는 인형을 계속 뽑으면서 그동안 상처받았던 마음이 조금씩 낫고 있음을 느꼈다.


“근데 학생은 왜 그렇게 인형 뽑는걸 좋아하는 거에요?”


방송에도 나온 맛집이라는, 만두피가 돼지 가죽처럼 두꺼운 배달 만두를 입에 밀어넣으며 나는 그녀에게 물어 보았다.


“어릴 때부터 인형을 좋아했는데, 집에서 잘 안 사주셨거든요. 그러다 인형 뽑기 기계를 해 봤는데, 인형이 바로 뽑히는 거에요. 그 기분을 잊을 수가 없어서... 근데 또 그 다음부터는 계속 실패하니까 더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내가 이걸 잘 하고야 말겠다. 그러면서 계속 연구하다 방법을 찾은 거죠.”
“앗, 나랑 거의 비슷하시구나. 나도 처음에 한번 너무 잘 돼서, 그 기분 잊을수가 없어서 계속 했어요. 그러다 코 끼어서 백만원 넘게 날렸지만.”


커다란 만두를 열심히 씹고 있는 그녀를 보며 나는 계속 말을 했다.


“근데, 학생 집에 인형 진짜 많겠다.”
“많죠. 지금 오빠가 군대 가고 없는데, 오빠 방을 내가 인형으로 꽉 채워 놔서, 엄마가 얼른 남 주거나 버리라고 난리라니까요.”
“근데 그럴 생각은 없는 거에요?”
“없죠. 다 내 소중한 애기들인데…”


그녀가 웃는 것을 보자 순간 만두가 무슨 맛인지 느껴지지 않았다.


다음 날, 나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뽑기방 맞은 편의 층계참에서 그녀가 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녀는 오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나…’


나는 혼자서 쌍안경과 노트를 들고 뽑기 기계의 움직임을 기록하며 인형을 뽑았다. 하지만 그 짜릿하던 인형 뽑기가 왠지 별 재미가 없었다. 30분동안 앉아서 인형을 두어 개 뽑다가 그만두고 나는 그냥 집으로 갔다.


다음 날, 그 다음 날도 그녀는 오지 않았다. 나는 인형 뽑기를 하지 않았다. 그냥 층계참에서 그녀가 오는 것만 기다리다 집에 가기를 반복했다. 분명 인형 뽑기를 하러 온 거였는데, 왠지 인형 뽑기가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나는 그녀의 전화번호는 커녕 이름도 몰랐다. 혹시라도 나이 많은 사람이 집적거리는 것처럼 보일까 계속 신경썼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녀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학교밖에 없었다. 우리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인문계 고등학교였다.


나는 차를 몰고 학생들이 하교하는 시간에 맞추어 그녀의 학교 앞에 가 보았다. 그러나 딱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대강의 몽타주를 그려서 학생들에게 이 학생 아느냐고 물어보거나 한다면 분명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볼 것이다. 그렇다고 이름도 모르는 학생을 수소문해서 찾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최대한 의심스럽지 않을 정도의 위치에 차를 세워 두고 학교에서 나오는 학생들을 하나하나 살펴 보았다. 모두 교복을 입고 있어서 그 얼굴이 그 얼굴 같았다.


한참을 기다리다 겨우 그녀를 찾을 수 있었다. 그녀는 가방을 메고 정문 쪽으로 혼자 걸어 나오고 있었다. 다행히 별 일은 없는 모양이었다. 무척 반가웠지만 갑자기 뛰어가면 놀랄 수도 있으니까, 최대한 태연하게 나는 그녀를 향해 다가가 아는 척을 했다.


“저기 학생.”
“앗. 안녕하세요?”


그녀는 놀란 눈치였다. 혹시라도 무례한 사람처럼 보일까 두려웠다.


“어떻게 여길…”
“아, 요즘은 인형 뽑기 안 하러 오시길래, 혹시나 무슨 일이 있나 싶어서 와 봤어요. 별일 없어서 다행인것 같고…”
“네, 저 별일 없어요.”
“그렇군요. 다행이다…”


나는 괜히 머쓱해졌다.


“그런데 왜 요즘은 인형 뽑기하러 안 와요?”
“아.. 그건. 지금 여기서 이런 말을 하기는 좀 그런데.”
“아니, 왜요?”
“뭐, 이제 모르는 사이도 아니니까, 그냥 말씀드릴게요.”


그녀는 잠깐 망설이더니 생각지도 못한 말을 했다.


“돈이 없거든요.”
“돈이요?”
“네. 뽑기 한판에 천원씩이라 비싸니까, 한 보름 정도 하다 보면 용돈이 다 떨어져서 그 달은 못 해요. 다음 달 용돈 받을때까지는 그냥 비워놓는 거죠.”
“아… 네.”


그랬구나. 하긴, 그녀는 학생이었고 나처럼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벌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내가 항상 밥을 사 주었고, 같이 원정 다니면서 쓰는 비용을 거의 내 쪽에서 내긴 했지만 그런 것들도 그녀에게는 부담이 될지도 모르는 터였다.


“근데 여기까지 찾아온거 보니까, 나 많이 걱정했구나?”
“그.. 그런거 아니거든요? 그냥 궁금해서 그런 거지. 매일 오던 사람이 안 오니까.”


갑자기 내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럼 이제 돈은 하나도 없는 거에요? 다음 달 용돈 받을때까지는 굶으시는 거고?”
“그럴 리가 있나요. 인형 뽑기에 쓸 돈이 없다는 거지 다른데 쓸 용돈은 있어요.”


그녀는 살짝 나를 쏘아보았다.


“누구처럼 계획 없이 뽑기에다 백만원씩 쓰는건 아니니까.”
“….”


“그럼 다음 달까지는 뽑기를 못하시는 거네요?”
“그렇죠. 아쉽지만 다음 달에 같이 놀아요.”
“많이 섭섭한데…”


문득 나는 다른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돈을 만들면 되지 않나?”
“제가요? 저 지금 아르바이트도 안되는데 무슨 수로 돈을 만들어요?”


그 대답을 듣자 나는 약간 웃음이 났다.


“학생, 지금까지 모은 인형 있잖아요.”
“인형이요?”
“그걸 싼값에 팔면 되죠. 어차피 어머니께서도 눈치 주신다면서요. 처리 좀 하라고.”
“그건 내가 소중하게 모은 애기들인데, 그걸 어떻게 팔아요?”
“허허, 이것 참…”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은 태도였지만, 나는 그녀를 설득해 보기로 했다.


“사실 그렇게 많으면 일일이 다 정 주기도 어렵잖아요. 저도 계속 쌓이기 시작하니까 다 짐이던데. 어차피 인형 뽑기라는게 뽑을 때 느낌이 최고인 거지 뽑고 나면 그만큼은 의미가 없죠. 베스 낚시랑 비슷하달까. 거기다 학생은 오빠 방에다 인형 모아두고 있다는데, 오빠 제대하시면 어떡할 거고요. 그러니까, 제일 예쁜 애들만 남기고 나머지는 팔아서 또 자금 마련하고, 그걸로 뽑기 하면서 놀다가, 모이면 또 팔고 하면 되는거죠.”
“….”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그녀를 보며 나는 말을 이었다.


“제가 도와 줄게요. 학생 혼자서 그 많은거 처분하기는 힘들잖아. 그리고 내 것도 같이 팔면 되고.”
“….알았어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토요일 아침이었다. 며칠을 준비한 우리는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목을 물색해서 좌판을 펼쳤다. 그녀는 교복 대신 편한 활동복을 입고 왔다. 봄바람에 나부끼는 하늘색 스카프가 보기 좋았다.


며칠간 나는 그녀의 집에서 함께 인형을 분류하는 것을 도왔다. 막상 정리가 시작되자 그녀는 의외로 거침없이 대부분의 인형들을 처리 물품으로 내 놓았다. 사실 겹치는 인형들이 많아서 그것만 정리해도 전체 물건의 4분의 3은 빠질 정도였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물량은 상상 이상이었다. 그것만 팔아도 1년간 인형 뽑기 비용 및 용돈을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될 지경이었다.


나는 인터넷에서 인형들을 검색하고 그보다 반의 반 정도 가격을 책정해 가격표를 붙였다. 빠른 처분이 목적이었으므로 굳이 제값을 받아야 할 이유는 없었다. 노점을 하는 만큼 한번에 눈에 확 띄게 싼 가격을 붙이는 것이 중요했다.


다행히 물건을 팔러 나간 날은 날씨가 맑았다. 따스하게 내리는 봄햇살을 맞으며, 나는 좌판에 인형들을 보기 좋게 늘어놓고 소리를 높여 보았다.


“인형 사세요, 예쁜 인형이 쌉니다. 반의 반값이에요!”
“어이, 거기 가시는 부모님, 애들한테 인형 좀 사 주세요. 인형이 예뻐요!”


어디서 이런 능글맞은 기운이 나오는지 몰랐다. 하지만 왠지 옆에 그녀가 있다고 생각하니 힘이 났다.


“어? 이거 텍 붙어있는 메이커 인형 아니야? 아저씨, 이거 왜 이렇게 싸요?”
“문제있는 제품 아니니까 안심하고 사셔도 됩니다. 이거 4천원에 파는데는 여기밖에 없어요!”


조금씩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하나를 못 뽑아서 병이 났었지만, 이제 나에겐 차고 넘칠 정도의, 팔아도 팔아도 끝없는 인형이 있었다. 한참 물건 설명을 하다 옆으로 고개를 돌려 보았다. 그녀는 내 옆에서 바쁘게 돈을 받고 계산을 했다. 상기되어 있는 그 모습을 보자 왠지 내 가슴이 두근거렸다.

며칠 전에 인형을 정리하며 그녀와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근데, 저 뭐라고 부르면 돼요? 아저씨? 오빠? 나이도 있으신데 계속 그쪽이라고 하면 이상하지 않나?”
“아저씨라고 해도 뭐 상관없긴 한데, 사실 나이 차이가 엄청나게 많이 나는건 아니잖아요? 근데 또 오빠는 내가 뻘줌하고.. 그냥 부르기 편하신 대로..”
“그럼 차차 생각하죠 뭐.”
“저 근데 학생.”
“네?”


눈을 동그랗게 뜨는 그녀를 보니 살짝 웃음이 났다.


“저 아직 학생 이름을 몰라요.”
“아, 그런가? 나는 교복에 명찰이 있어서 당연히 이름을 아는 줄 알았어요. 그러고 보니 2학년 올라오면서 명찰을 뗐네. 그게 뭐 별거라고.. 근데 이름 알려주면. 이름 부르실 거에요?”
“글쎄요. 그것도 생각해 봐야겠네요. 우리가 뭐 반말하는 사이는 아니니까.”


내 말을 듣는 그녀의 눈이 반달 모양으로 귀엽게 접혔다.


“제 이름은요.”


그녀는 입술을 움직여 이름 석자를 얘기해 주었다.
그녀의 모습과 잘 어울리는 예쁜 이름이었다.

  • profile
    Rogia 2017.03.01 01:33
    전 인형뽑기는 해 본 적이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그와 비슷하게 확률 장난으로 놀아나는... '가챠'의 무서움은 뼈저리게 느끼고 있죠. O. 님의 [뽑기의 정석]은 인형뽑기의 확률에 희생된 '나'와 인형뽑기의 달인인 소녀와의 이야기 입니다. 만약 이 이야기가 인형뽑기 mode에 대한 언론 보도가 없을 때에 읽었다면 좀 더 신선하게 받아들여졌을 거라 생각합니다. 대중적으로 한 번 화제가 된 소재인 만큼, 나름 흥미로운 묘미가 될 법 했던 소녀의 인형뽑기 파훼법이 인상 깊게 다가오지 않아서 아쉬웠어요.
    학교에 뜬금 없이 나타난 '나'를 보고 여주인공이 스토킹이 아닌가 겁부터 덜컥 날 줄 알았는데 예상보다 상냥한 전개였습니다. 어떤 사건에 휘말리고 위기가 닥쳐 오는 글이기 보다는 일상을 살아가는 생활감 중심으로 맞춰진 글이었고, 전체적으로 안정된 분위기에서 진행되는 내용이었습니다. 좀 더 극적인 (클라이맥스가 있는) 작품이 취향이긴 하지만 이런 류의 글도 간만에 읽다보니 좋네요. 잘 읽었습니다!
  • profile
    Fredrica 2017.03.04 03:24
    다음 편을 써라 핫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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