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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한대] 관찰자의 딜레마

by cramer posted Mar 04, 2017 (23시 58분 43초)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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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배기사가 아닌 방문에 조금 들떠 문을 열었는데, 졸지에 고소당할 위기에 처했다.

 

"꽤 놀란 얼굴이시네요? 흥. 제가 모를 줄 알았죠?"

 

그야 다짜고짜 문앞에 처음보는 미소녀가 나타났는데, 인사는커녕 고소하겠다는 말부터 꺼내니까. 놀라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혹시 잘못찾아오신거 아닌가요? 여긴 풍산빌라 708호인데...."

 

"아하, 발뺌하시겠다? ....제가 바본줄 알아요? 애초에 동호수를 보고 찾아온게 아니라구요."

 

그녀는 빈 손이 아니었다. 꽤나 두툼해보이는 서류봉투를 안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서류봉투에서 커다랗게 인화된 사진을 한 장 꺼내 내 눈앞에 내밀었다.

 

"어때요? 딱 걸렸죠?"

 

그건 베란다에서 망원경을 사용하고 있는 나의 모습이 찍힌 사진이었다. 언제 어떻게 찍힌 사진일까. 밤이라는 것밖엔 알 수 없었다. 나는 매일 밤 망원경으로 밤하늘을 들여다보는게 취미니까.

 

"....어.... 네. 제가 맞습니다. 그런데 누가 제 사진을 이렇게...."

 

"당연히 저에요. 저요. 제가 당신 범행의 증거를 이렇게 직접 포착했어요. 이 사진을 찢어버리고 싶으시죠? 소용없어요. 이미 집에 잔-뜩 복사해뒀거든요!"

 

내가 얼빵하게 한쪽 눈을 찡그리고 망원경을 들여다보는 모습이 찍힌 확대사진. 이런 나의 사진이 남의 집에 대량으로 복사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아무리 상대가 미소녀라도 그런건 역시 조금 기분나쁘다.

 

"저기, 아직 제가 이 상황이 잘 이해가 안됩니다. 제 사진은 왜 가지고 계신거고, 왜 이걸로 절 고소하시고 싶은거죠?"

 

낯선 사람에 대한 예의를 담아 정중하게 물었지만, 저쪽은 알수없이 기고만장해서 나를 완전 아랫사람처럼 취급했다.

 

"하? 당신, 완전 멍청한거 아니에요? 증거까지 잡혔는데도 뻔뻔하게 나오시겠다는 거?"

 

"이게 뭐에 대한 증거인지, 설명이라도 좀...."

 

"안되겠네요. 당신 완전 구제불능 아니에요? 땅바닥에 바짝 엎드려 사죄할 기회를 주려고 직접 찾아왔는데. 뭐, 그정도 뉘우칠 양심이 있었다면 애초에 범죄를 저지르지도 않았겠지만."

 

"....이거 혹시 그겁니까? 매일 밤 망원경을 쓰는 제 모습을 보고 혹시 자기네 집을 훔쳐보는게 아닌가 하고 착각해버리셨거나."

 

"뭐, 뭐에요? 그럼 아니라고 할 셈이에요?"

 

정확히 맞춘 모양. 빙고라고 불이 들어오듯 이 여자는 얼굴이 빨개지도록 성을 냈다.

 

"확실히 그런걸로 오해받을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저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이 빌라에 살아온 1년동안 아무일도 없어서, 괜한 걱정을 하나 싶었는데...."

 

그리고 그 걱정은 현실이 되었다. 그것도 생각보다 훨씬 와일드한 형태로. 기껏해야 주민 반상회에서 이야기가 나오거나, 경비아저씨가 주민불만을 접수하는 정도의 해프닝을 예상했다.

 

하지만 대체 이건 뭘까. 저 여자라 불러야 할지 여자애라 불러야 할지 애매한 학생분이 들고있는 서류봉투. 제 품보다도 크고 두꺼운 것이, 상당한 양의 사진을 담고있는 모양이다. 아니면 설마 고소장이라던가.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전 아무도 훔쳐보지 않았어요. 애초에 제가 가지고 있는 망원경은 천체관측용이지, 그런 용도로 쓸 수가 없습니다."

 

"흥! 당연히 당신도 변명 한둘쯤은 있어야죠. 그정도도 제가 예상 못했을까봐?"

 

하지만 학생은 나의 해명엔 애초에 관심이 없었다. 망원경을 들여다보는 나의 어벙한 모습이 찍힌 사진. 그 사진을 손가락으로 톡톡 치며 반박하는 것이었다.

 

"이 망원경 제가 조사해봤는데, 가변렌즈 모델이죠? 얼마든지 당신의 저열한 목적을 위해 배율을 낮출 수 있는 모델이잖아요!"

 

그러고보니 정말로 그랬다. 별 말고도 달이나 은하도 관찰하고 싶은 마음에, 아무 렌즈나 갈아끼기 쉬운 모델을 장만한 것이다. 쌍안경 수준의 저배율 렌즈로 갈아끼운다면, 이 여자가 주장한대로 내가 파렴치한 관측행위를 하는 데에는 망원경의 사양이 문제가 되지 못했다. 이정도로 전문적인 지적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지만.

 

"하지만 저는 남의 집안을 들여다볼만한 배율의 렌즈를 가지고 있지 않은걸요. 제 집안을 다 뒤지셔도 좋은데, 정말로 없어요."

 

"제.. 제가 무슨일을 당하려고 당신 집에 들어가나요!"

 

아무래도 이 대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렇게 문가에 서서 이루어질 모양이었다. 벌써부터 피곤하다.

 

"그리고 당신 망원경 말고, 그 망원경에 달린 파인더! 파인더로는 충분히 남의 집 정도는 들여다볼 수 있잖아요!"

 

그 말을 듣고 머리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실로 그랬다. 파인더는 망원경 옆에 작게 달린 작은 확대경이다. 별의 대략적인 위치를 잡는데 쓰는 기구인데, 그정도 배율이면 남의 집을 들여다보기에 적합하다. 파인더의 그런 용도는 생각지도 못한 발상이었기에, 충격을 받았다. 내가 저지르지도 않은 범죄에 대한 알리바이가 하나하나 논파되는것은 신선한 경험이었지만, 결코 좋은 전개는 아니었다.

 

"하지만 저는 정말로 당신의 집을 훔쳐본 적이 없어요."

 

"흥, 그렇다면 제 집 쪽으로 망원경을 향하다가 찍힌 이 사진은 뭐죠?"

 

그녀가 기세좋게 흔들어대는 사진에서, 확실히 내 망원경은 사진찍는 사람쪽을 향해 렌즈광을 반짝이고 있었다. 이러니 착각할만도 하다.

 

"실례지만 몇 층에 사시는지 알 수 있을까요?"

 

"하! 모른척하는건 철저하네요? 10층에 살아요."

 

10층이라면 건너편 빌라의 최고층이다. 그 위치라면 관측중에 나의 망원경이 그쪽을 향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는 곳이었다. 그것도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 사진이 찍히게 된 비밀을, 전 알 것 같군요."

 

"그래요, 지금이라도 사과하신다면.... 네?"

 

"제 집에 들어오시진 못하겠다 하셨으니까. 잠깐만 서서 기다려주세요. 증거를 가지고 올테니까."

 

나는 노트북 컴퓨터와 몇가지 장비들을 들고 다시 문앞으로 갔다. 상당히 뭐가 많아서 거추장스러웠지만, 무고함을 밝히기 위해서 이정도는 감수할 수 있었다.

 

"....대체 뭘 가지고 오신거죠?"

 

"알리바이입니다."

 

"당신 노트북에 있는 자료들이야 다 당신이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는데, 제가 그걸 믿을 것 같아요?"

 

"제 자료를 믿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도 당신, 우주는 믿죠?"

 

"....?"

 

망원경으로 별을 관찰할 때, 달을 관찰할 때, 은하를 관찰할 때. 가장 성가신 공통점이 하나있다. 별, 달, 은하수. 이 셋 모두 기나긴 밤 내내 천천히 움직인다는 것이다. 하늘에 떠 있는 빛나는 것들중에, 움직이지 않는것은 북극성뿐이다. 밤하늘은 움직인다.

 

"여기 목성의 궤적이 보이시죠? 날이 갈수록 조금씩 낮아지는겁니다 이렇게."

 

이렇게 움직이는 천체들을 따라가면서 관측하는것은, 사람의 손으로 하기는 번거로운 일이다. 그래서 이런 천체들을 프로그램에 입력하면 자동으로 추적해주는 트래커라는 장비가 있다. 아마추어 천체관측자들에겐 기초적인 장비이다.

 

"제 망원경은 카메라에 연결되어 있어서, 찍은 사진들을 컴퓨터에 주기적으로 업데이트합니다. 하지만 망원경에 아무것도 잡히지 않게되면 어느시점에서 자동으로 멈추죠. 예를들어, 아파트에 가려진다던가."

 

7층에 사는 내 입장에서, 건너편의 10층 건물은 그리 큰 장애는 아니지만 간혹 망원경의 시야를 가릴수도 있다. 높이 뜬 별이라면 괜찮지만, 낮게 뜬 행성들이라면.

 

"제 노트북에 남은 기록들로 보면, 아마도 학생이 사는 아파트에 망원경이 고정된 시점이.... 어젯밤 오후 11시 경이네요. 혹시 제 망원경이 학생 쪽을 향하고 있는 그 사진. 그 사진이 찍힌 시각은 언젠가요?"

 

"....하지만 그런 건 우연의 일치일수도 있죠. 당신이 그 정교한 프로그램으로 저를 촬영하고 녹화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잖아요...."

 

사진의 시각은 들어맞았는지, 그에대한 반박은 없었다. 하지만 기세는 누그러들었다해도, 나에 대한 의심은 여전히 남은 모양이었다.

 

"그렇게 의심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지 않습니까? 조금은 믿어주시면 안됩니까?"

 

"당신의 계산이 들어맞은건 어제 하루일 뿐이라고요.. 또 그 전에도, 그 전 주에도, 저번 달에는 안 그랬을지 알 수 없는 일이잖아요?"

 

상대의 입장을 이해해보려 노력했지만, 그런 막무가내식의 주장에는 나도 쉽게 져줄수가 없었다.

 

"절 도대체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시는 겁니까? 전 아름다운 별을 관찰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지, 당신의 일거수일투족이나 당신 따위에는 손톱만큼도 관심이 없습니다!"

 

논리적인 해명만 할 생각이었지만 점점 말다툼이 되어가고 말았다.

 

"당신 고소당하고도 그렇게 뻔뻔할 수 있는지 볼거에요 제가!"

 

"고소해보시던가! 고소해보시던가!"

 

제 3자가 봤다면 무척이나 유치했을 광경이었지만, 감정이 격해지던 가운데 그녀가 들고있던 서류봉투가 일순간 손에서 미끄러진 모양이었다.

 

"아앗!"

 

우수수, 봉투에서 수북이 쏟아진 내용물은 커다랗게 인화된 사진들이었다. 거기까진 예상 범위 내였다. 하지만 내용물이 문제였다.

 

"....아니? 내가 옷 갈아입는 사진은 왜....?"

 

"아, 아닛? 이게 왜 여기에?"

 

그녀가 모든 흔적들을 주워담는 것보다는, 내가 증거 하나를 확보하는 것이 훨씬 빨랐다.

 

"그러니까 이건...."

 

내가 헐벗은 도촬사진을 두고 어안이 벙벙해진 채, 나는 할말을 잃었다. 하지만 하고싶은 말은 있었다.

 

이거, 이제부턴 입장이 완전 반대 아니냐고.

 

 

 

"죄송합니다. 고소만은 제발 하지 말아주세요."

 

역전된 입장의 통쾌함 같은건 어디에도 없었다. 오로지 혼란. 압도적인 혼란뿐.

 

"아니, 대체...."

 

죄를 지은 입장에서 쉽게 범행동기를 털어놓지는 않겠지만, 손에 증거를 들고 추궁한 가운데, 결국 일의 전말을 들을 수 있었다.

 

"처음엔 혹시나 하는 의심에 나를 감시했는데, 나중엔 되려 거기에 재미를 들려 버렸다....?"

 

"....네."

 

"그래, 내가 망원경으로 밤마다 그쪽 주변 방향으로 별을 보긴 했으니까. 내 잘못도 있긴 하네. 그런데, 이 사진은 대체....?"

 

내가 옷을 갈아입는 모습이 찍힌 사진. 정황상으로나, 단순히 그 비주얼로 보나 꺼림찍한 증거물이다.

 

"그, 그건! 우연이에요! 정말로! 정말로 우연! 그게 왜 거기 들어있었지....?"

 

가볍게 용서해주고 넘어갈 일은 아닐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녀가 어린 학생일 뿐이라는 사실 때문인지, 맞벌이 부모를 둔 탓에 할 일이 지지리도 없다는 사연 때문인지, 좀 호구같을지는 몰라도 눈감아주고픈 마음이 더 컸다.

 

"하지만 이대로 그냥 보내줄수는 없지."

 

"....역시 그건가요? 시키는 건 뭐든지 하겠다고 했지만.... 저희 집에서는 조금...."

 

"이제와서 말을 물리겠다는 거야? 널 꽤나 곤란하게 만들 증거물이 이렇게 있는데도?"

 

조금 뒤늦게 쓰레기같긴 하지만, 역전의 통쾌함을 느껴버린다.

 

 

 

"우홋! 우호옷! 굉장해! 역시 달라! 꼭대기는 다르다고!"

 

"하아...."

 

빌라의 10층. 그 어떤 장애물도 밤하늘을 가리지 않는 최고의 전망에서, 한 남자의 환호성이 울려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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