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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한대] 훈수

by YangHwa posted Mar 05, 2017 (00시 01분 01초) Replies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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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길을 걷다가 웬 미친년한테 걸렸다. 
그녀는 길거리에 서서 다급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저 주위의 이 상황 모든 것이 믿겨지지 않는다는 듯이 무차별적으로 시선을 주고 있었다. 
경로를 바꾸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대로 걸어가면 그 이상한 여자 옆을 스쳐지나갈 거라고 눈대중으로도 알 수 있었지만, 몇 가지 이유가 있어서 바꾸지 않았다. 자존심이라든가, 습관이라든가, 그런 자잘한 이유들도 몇 가지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녀가 멀리서 얼핏 보기에도 너무나 예뻤기에, 가까이서 몰래 힐끔 훔쳐볼 작정이었기 때문이다. 
벌 받았나? 
그녀가 옆을 스쳐 지나가는 내 팔을 덥석 잡았을 때에는, 심장이 터져버리는 줄 알았다. 
죄송합니다. 이건 요즘 유행하고 있는 그 시선 강간이라는 게 아닙니다. 가슴이나 허벅지는 고사하고 얼굴 잠깐 본 것뿐이에요. 소매치기는 더더욱 아닙니다. 사실 스치지도 않았잖아요, 우리. 손도 안 대고 지갑을 훔치는 기술은 없습니다. 그건 기술이 아니라 초능력이죠. 
그녀가 정신이 회까닥 한 여자라는 걸 깨달은 것은, 그래. 그녀가 내게 첫마디를 건네자마자 알았다. 
“혹시 살아 계세요?”
“…네?”
그럼요. 당연하죠. 
하지만 대답을 하기 전에 나는 망설였다. 혹시 이게 단순히 평소에 쓰이는 살아있다는 뜻이 아니라, 뭔가 문과적으로 고차원적인 의미에서의 살아있다는 질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살아있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최근의 삶을 떠올렸다. 집, 랩실, 집, 랩실, 랩실, 랩실, 집, 랩실, 랩실, 랩실……. 어서 논문을 작성해라, 이 노예야! 강의 프레젠테이션은 매주 미리미리 업로드 하라니까! 똑바로 서라, 핫산! 어째서 실험 결과를 차트로 정리하지 않았지? 너희 연구생들은 이래서 안 돼! 달랑 숫자만 써 놓으면 될 줄 알았나? 왜 중간고사 채점이 아직 끝나지 않은 거지? 아직 과제 채점도 남아있다! 
……음. 아무래도 살아있는 게 아닌 것 같네. 
나는 노예, 아니면 기계였다. 살아있음이 아니라 아직 기동하는가, 아니면 고장났는가로 판단되는 그런 물건. 내가 선택한 진로였지만 이건 아닌 것 같다. 
고심 끝에 나는 이렇게 대답하기로 했다. 
“아니요.”
뭐 이런 질문에 진지하게 대답을 해주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미친년이 아니라면 분명히 어디 종교에서 나온 사람일 것이다. 하느님을 믿는 게 아니면 살아 있는 게 아니라고 말하는 그런. 아무래도 상관없다. 이런 미인에게 속을 수 있다면야. 늙은 아저씨한테 착취당해 죽으나, 젊은 미인에게 도움이 되고 죽으나. 후자가 훨씬 건설적이다. 
하지만 몹쓸 짓을 해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질문에는 일반적으로 할 대답을 해주는 것이 예의다. 말꼬리를 잡고 뭐지? 왜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이지? 철학과시? 방금 개소리를 한 사람은 뺨을 대시오. 이렇게 반응하는 건 친구 없는 찐따들이나 하는 짓이니까. 
그러나 그녀는 예상 외로 환하게 웃었다. 아마 어느 종류의 대답에도 대답할 수 있게 준비된 프로 전도사인 모양이다. 
“와! 정말 다행이에요!”
아무튼 그녀는 진심으로 안도했다는 듯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을 이었다. 
“처음 여기 왔을 땐 정말 깜짝 놀랐어요. 설마 두발로 걸어 다니는 생물이 있을 줄은 몰랐거든요!”
뭐야, 이거. 그러는 댁은 네발로 기어 다니는 곳에서 왔나봅니다? 
“보통은 두발로 걸어 다니죠…….”
“아, 그렇죠. 여러분께는 그게 당연한 거겠죠. 저도 참. 실수를 했네요. 아하하.”
말하는 게 조금 이상한 여자였다. 
뭐, 이쯤이면 슬슬 됐다. 이쁘장한 얼굴도 계속 보니 물리고, 엮여서 좋을 것 없는 독자적인 정신세계를 갖고 있으니, 원. 게다가 아까 보였던 근심어린 모습인 어디에도 없다. 나는 맡은 바 역할을 다한 셈이다. 
“잠시만요!”
떠나려는 나를 그녀가 붙잡았다. 아, 이건 은근히 기분 좋다. 내게 아쉬워하는 여자라니. 여태까지 그 어떤 여자도 내게 안달내지 않았는데. 
“확실히 하기 위해서 몇 가지 질문 좀 더 할게요. 이 별에는 당신 같은 분들 밖에 없는 거죠? 그러니까, 두 발로 걸어 다니는.”
“……네.”
네 발로 걸어 다니는 인간이 있다면 지구 반대편에 있더라도 뉴스에서 한 번쯤 봤을 거다. 
“정말 잘 됐어요! 처음 이 별에 왔을 땐 깜짝 놀랐지 뭐에요. 저는 또 여러분이 50억 년 만에 새로 생겨난 생물인 줄로만 알고……. 하긴, 그럴 리가 없죠! 역시 다른 별에서 던져 놓은 유사유기생명체인 거죠? 하하. 이런 변두리에 쓰레기를 던져 놓다니. 아무리 공과금 내기 싫다지만 이건 장난이 지나쳤네요. 어느 족속들인지, 당신들을 버린 망할 부모는 제가 꼭꼭 잡아서 족쳐드릴게요! 그러니까 안심하세요.”
음……. 
미친년이군. 
“그럼 여기 철거동의서에 사인 해주세요. 형식적으로 있는 칸이기는 한데, 입주민의 동의가 있어야 하거든요. 물론 이런 판자집 같은 행성에서 사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지만요. 그래도 잘 꾸며놓고 사셨네요! 근데 남의 땅에 몰래 들어와서 살았으면 강제로 쫓겨날 각오도 하셨어야죠. 아, 참. 여러분은 버려진 거였지.”
그녀는 내게 빨간 인주와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알 수 없는 그림 같은 것들이 네모난 틀 안에 빽빽이 가득 차있었다. 그 와중에 빈 공간이라고는 하나 밖에 없었다. 여기에 찍으라 이 말인가? 
하지만 아무리 인생이 고되고 힘들다 할지언정 잘 알지도 못하는 서류에 함부로 지장 찍을 정도는 아니다. 
아니, 뭐, 아까는 미인을 위해서라면 이런 인생 던져도 된다고 하지 않았냐고? 그건 이 여자가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사연을 가진 처량한 미인이었을 경우다. 이렇게 정신이 이상해서야 얼굴이 아무리 번듯해도 차라리 리얼돌이 낫다. 쉽게 말해, 그녀는 내 시선에서 OUT되었다. 
“저어, 죄송하지만 도장은 못 찍겠네요.”
“네? 왜요? 아, 갑자기 이렇게 나오시면 저희도 곤란하거든요? 변덕 부리시는 게 꼭 살아있는 것 같네.”
그녀는 한술 더 떠서 내 볼을 꼬집기까지 했다. 
“와, 이거……. 뭐지? 한두 푼 할 소재가 아닌데요? 뭐 실리콘이나 넣어서 만든 유사피부인 줄 알았는데……. 이건 거의 단백질이네요? 이걸 그냥 갖다 버릴 정도면 어느 철딱서니 없는 부잣집 도련님인지 딱 각이 나오네요.”
나는 그녀의 손을 치우며 한 마디 했다. 설마 내 입으로 이런 당연한 소리를 의미심장하게 말하는 일은 없을 줄 알았지만……. 
“저, 살아있는 거 맞거든요?”
그렇게 말하자, 그녀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리고 다시 실실 웃으며, “에헤이. 농담도~.” 라고 말하며 내 몸을 이곳저곳 만지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이나 귀, 입술과 손목까지. 점점 표정이 굳어가며 그녀는 내 가랑이를 움켜쥐었다. 
“새, 생식기!!”
“야?!!”
헉. 큰 소리를 내고 보니 어느새 주변의 이목이 쏠려 있다는 걸 깨달았다. 게다가 여자가 남자의 국부까지 쓰다듬은 상황. 이건 주변 사람들에게 보이기 좋은 꼴이 아니었다. 수군거리는 인파가 늘어나려 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냅다 달렸다. 아무튼 그 장소에서는 먼, 그리고 조용히 얘기하기 좋은 골목으로. 
“이게 무슨 짓입니까?”
“우우, 이제 시집 못 가…….”
아, 이 미친년이 진짜. 
하지만 그녀는 역으로 내게 화를 냈다. 
“모두 당신 때문이잖아요! 살아있는 게 아니라면서요!”
“아, 그건 뭐……. 생물학적으로는 살아있지만 그, 보다 깊은 문학적 의미로는 살아있는 게 아니랄까. 요즘 삶이 즐겁지가 않았달까. 그런 뜻인데요.”
구차한 변명에 그녀는 또 엄청 놀랬다. 
“그 정도 지적능력이 있어요?!”
“……그 정도는 있습니다.”
그러자 그녀의 표정이 싸하게 변했다. 그리고 내가 있다는 것도 잊었다는 듯이 바닥에 주저앉고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좆됐다. 아무래도 좆됐어. 이건 아주 좆된 것 같은데.”
시집 못 가게 되셨다면서 그런 말은 잘도 내뱉는군. 
아무튼 한참을 혼자서 중얼거렸다. 내버려두고 도망칠까 싶었지만, 숨을 고를 때 까지는 있어주기로 했다. 그리고 그녀의 생각 정리가 근소하게 빨랐다. 
“저어, 거주민.”
“뭐요.”
“혹시 ‘고’라는 게임 할 줄 아세요……?”
조심스레 묻는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나는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그녀의 표정이 풀어졌다. 
“들어본 적도 없는데요?”
그녀의 표정이 삽시간에 무너졌다. 아, 이거 꽤 기분 좋다. 내가 원하는 대로 여자의 표정을 주무르는 일이란. 
“아, 진짜! 이래서 좆망 변두리 행성은! 아, 아니지. 저, 거주민. 이게 어떤 게임이냐 하면요. 그 커다란 판때기에 돌을 하나씩 번갈아 깔면서 따먹는 그런 게임인데요…….”
그녀의 설명은 시원찮았다. 하지만 요즘 부쩍 유명해진 게임이라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그거 바둑이잖아. 
그러고 보니 바둑의 영어 이름이 go였다. 알파go. 
“대충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그 게임이 왜요?”
“어, 사실 그 게임의 ‘돌’이라는게 조금 커서 말이에요…….”
“어느 정도로?”
“요만큼.”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땅바닥을 가리켰다.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다. 지면밖에는. 
“설마…….”
“그 설마입니다. 사실 당신들 행성은 이 게임에서 사용되는 요소입니다.”
“그런데요? 혹시 철거라고 했던 걸 보니, 혹시…….”
“그 혹시입니다.”
그녀는 대통령이, 아니 미국 대통령이 들어도 까무러칠 말을 그렇게나 진지하게 내뱉는 것이었다. 
“이 행성은 사면이 둘러쌓여 따먹힐 겁니다. 곧, 파괴됩니다.”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러자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나는 뭔가를 결심한 게 아니다. 아, 결심한 건 맞지. 
그래. 더는 이 얘기를 못 들어주겠다고 결심한 참이었다. 
“재밌는 얘기였네요. 예.”
“아, 아니! 당신들 얘긴데 몰입하자구요!”
“예, 예. 그래서 그러면 뭐 어째야 하는데요? 부순다면서요? 내가 뭐 변신이라도 해서 막아야 하나.”
장난으로 꺼낸 얘긴데 그녀의 표정이 다시 사뭇 진지해졌다. 
“막으러 가죠.”
“네? 아니, 나야 당사자니까 그렇다 치고. 댁은 왜?”
“유기생명체가 거주중인 행성을 파괴하면 우리들 입장도 난처해져요. 그러니까, 막으러 가요.”
“그거 참 눈물 나게 고마운 오지랖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게임을 하고 있는 플레이어를 찾아가는 거예요. 이 행성의 주인인 플레이어에게!”
그래서 싹싹 빌기라도 하는 건가? 
하지만 그녀는 대단한 야심이라도 발표하듯이. 
“그리고, 잔뜩 훈수를 둬서 이 별이 파괴되는 걸 막아봐요!”
그렇게 말했다. 
“함께!”
배시시 웃으며. 
이것이 내가 우주 최고의 바둑 기사가 되게 된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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