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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욘드 더 월

by Pip posted Apr 02, 2017 (23시 43분 34초)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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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배애애!

학생회실의 문이 열렸다. 여자아이는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 손에 들린 종이 두 장이 낯익었다.

- 지금 이게 무슨 짓이에요!

그녀는 종이 한 장를 나에게 들어보였다. 나는 안경을 고쳐썼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종이에는 썩 눈이 좋지 않은 사람도 볼 수 있을 만큼 큰 글씨가 적혀있었다. 경고.

- 왜. 회칙 잘 읽어보고 하라고 했잖아. 난 적혀있는대로 했을 뿐이야.

나는 써내려가던 윤리 수행평가 옆에 놓인 회칙을 폈다. 전전대 학생회장은 이런 일을 한번도 겪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기호 1번이었던 나도, 2번이었던 아이도 회칙을 펴들게 할 일은 없었으니까. 이 녀석은 달랐다. 나는 더듬더듬 수칙이 적혀있는 페이지를 찾았다.

- 봐. 급식실과 교무실 등 학생 주체가 아닌 장소에는 홍보물 못 붙이게 되어있어.

- 아니 선배님. 그건.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내 등뒤로 돌아가 수칙을 읽었다. 그리고 확인했다. 제23조 2항. 선거활동의 제한.

- 넘어갈 수도 있는 거잖아요. 선배님 왜 그렇게 딱딱해요. 공무원처럼.

- 너-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까까지 등뒤에 있어서인지 그녀의 얼굴이 가까웠다.

- 그때 농담 한번 했다고 되게 물고 늘어진다.

그녀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고개를 홱 돌리고서 그녀는 학생회실 한 구석을 바라보았다. 할 말은 없겠지. 학생회 서기로 있었다고 해도, 학생회장 선거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뭐 정 많은 다른 전대 학생회장이자 예비 사무국장이라면 도움을 줄 수 있었겠다만-

- 난 분명히 말했어. 교칙 지키면서 하라고. 너 그럴 시간에 민준이는 쌩판 모르는 반도 들어가서 유세하고 있어. 이럴 시간에 너도 좀 그래라.

상대가 나인 것이 문제였다. 내가 괜히 학생회장하면서 별명이 학생주임이었겠냐. 이 것아.

- 벽보는 알아서 떼왔네. 다음부터 조심하고. 수행평가 해야되니까 좀 가줄래?

- 그래도.. 나 진짜 하고 싶단 말이에요. 학생회장.

그녀는 한참 벽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화도 조금은 가라앉은 것 같았다. 나는 연줄같은거 대주는 사람 아니야. 그거 알아둬. 그녀는 떼어온 선거 벽보를 내 책상 위에 올려두고 문밖으로 걸어갔다. 여전히 발소리가 시끄러운 것이, 분이 완전히 가라앉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녀는 문 밖에서, 몸을 홱 돌렸다.

- 선배는 아무것도 몰라요.

그녀는 문을 닫았다.

내가 서기부터 학생회장까지 했어. 이젠 사무국장해서 수시쓸건데, 모르긴 뭘 몰라. 나는 책상에 놓인 그녀의 벽보를 읽었다. 기호 2번. 박도예. 새로운 학교를 만들겠습니다. 연애금지 철폐, 두발자유 폐지, 전교생 열람실 개방.

아무것도 모르는 건 너지. 이렇게 빨간 공약들 올려서 선생들이 잘도 좋아하겠다.

나는 그녀가 떠난 자리를 바라보았다.

----

 따지고보면 도예는 썩 그리 나쁘진 않은 아이였다. 선후배간에 예의도 잘 지키고, 그럭저럭 동급생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있는 아이였다. 서기 일도 수시 점수를 위해서보다는, 좋아서 한다고 할 정도로 열심히 해주었고. 그러니까- 그래. 꽤나 괜찮은 아이였다. 덕분에 도움을 많이 받았었다. 굳이 단점이 있다면, 그건

 의욕이 조금 과했다는 거지. 나를 잘 따르는 편이었지만, 아니다 싶은 건 아니라고 말하는 아이였다. 학생회의때 회의록 쓰다 말고 끼어들고. 괜히 제언이라고 몇 시간씩 떠들 줄이나 알고. 4월 16일에는 학생회실에 대문짝만한 노란 리본을 걸어두고, 5월 18일에는 영화 ‘28년’이나 보자고 하고 있고.

좋게 말하면 정의감과 의욕이 넘치는 아이였고, 나쁘게 말하면, 어. 뭐라해야해. 여기저기 벌집을 찌르고 다녔다. 사고뭉치라고 하는 게 낫겠다. 성향이 나랑은 좀 많이 달랐다. 빨갰다. 그것도 그럭저럭 괜찮았다. 묵인해줄 수 있었다.

퇴임사때부터 애가 좀 변했다. 좀 더 격렬하게. 방학 전날에 나름대로 학생회 회식을 가지던 무렵이었다. 분위기는 좋았다. 전대 사무국장, 그러니까 이제 수능을 마친 중기 형은 상위권 학교에 수시 전형을 넣어두고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나는 형한테 그랬었다. 

- 아 형. 부럽다. 난 이제 어떡해요. 공부만 해야하는데. 

그때 도예가 치고 들어왔다.

- 선배님 사무국장하시잖아요. 수시 넣으시면 되지.

- 아. 그렇네.

나는 머리를 긁적거렸고, 다른 부원들의 애정어린 야유를 받았다. 부학생회장도 마찬가지였다. 어쨌거나, 자기소개서를 적을 때 부학생회장보단 학생회장이 몇배는 나았으니까.

- 그래도 내신 챙기긴 해야지. 수시는 놀고만 있어도 되냐. 맘놓고 공부하려면 학생회장이 일을 잘해줘야하는데.

그때는 아무런 생각이 없이 그런 말을 뱉었다.

- 니가 학생회장할래? 너 일 잘하니까 잘할 거 같은데. 좀 더 자주 보기도 하고.

그래. 그 말을 했으면 안됐다. 그 녀석이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 뭐, 뭐야. 안해요. 그런거. 라고 하면서 손사래를 칠 때, 쐐기를 박아넣으면 안됐다.

- 괜찮잖아. 호흡도 잘 맞고.

농담이라는 것을 도예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이전에 일도 있고. 그 녀석, 그래도 성적은 중위권이라서 학생회장하기엔 좀 그랬으니까.

그게 여기까지 와버렸다.

그 녀석은 학생회장 입후보기간이 되기가 무섭게 찾아왔다. 내신 최상위권에 학생회장을 내준다는 암묵적인 전통은 개라도 주라는 듯이. 제일 놀랐던 것은 나였다. 애초에 전통을 떠나서, 대개 그런,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기 좋아하는’ 아이는 정작 학생회 중추업무같은 무거운 일은 영 좋아하지 않아서, 적당히 피해간다고 생각했으니까. 

이 아이는 아니었다. 내신 최상위권인 민준이가 후보로 등록한 지 몇분이 지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도예는 박살낼 기세로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가 펜을 쥐고 후보 등록 서류를 써내려간 뒤에 나를 보고 하는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았다.

- 잘부탁해요. 회장 선배. 아니다. 사무국장님.

그리고, 그 이후로는- 글쎄다. 보시다시피였다. 문제덩어리였다.

-----

도예와 민준이의 선거 노선은 아예 달랐다. 어느정도로 달랐냐면, 글쎄.

민준이가 ‘선거 운동’이었다면, 도예는 ‘민중 봉기’였다. 민준이는 반을 차례로 돌면서 반 아이들과 악수를 하고, 공약을 이야기하고, 반을 나섰다. 진짜 정치인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모범적인 선거 운동이었다.

그에 반해 도예는. 음. 뭐라고 해야하나. 시끄러웠다. 여기저기에 벽보가 나붙었다. 밥을 대강 먹고 친구들과 교사 정문으로 향할 즈음이면, 신관 언저리의 단상에 와글와글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면 어김없이 도예가 있었다.

- 학생 여러분- 학교의 주인은 학생이고- 학교의 미래도 여러분입니다아- 언제까지 교칙에 매여있을 겁니까- 우리는 일어서야합니다-

신기하게도, 그런 작전이 어느정도 먹히기도 했다. 그 낡은 표어가 먹힌다는 것이 상상은 안됐지만, 적어도 꽤나 먹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도예는 눈엣가시였다. 애초에 전통이란 전통은 다 깨부수고 있었으니까. 제재를 가해야했다. 그 이후의 패턴은 거의 항상 똑같았다. 도예는 미친 듯이 달려오는 나를 보거나, 저 너머에서 소리지르는 ‘진짜’ 학생주임을 보고 꽁무니를 빼버린다. 그녀가 교무실로 소환되거나, 학생회실의 문을 열고 나면 여지없이 쏘아붙였다.

- 혈기 왕성한 학생들이 언제까지 묶여있어야해요? 솔직히 그런 선거도 지겹잖아요. 전 이것도 문제없다고 보는데요.

내가 교무실을 들락거리는 횟수도 자연스럽게 늘었다. 학생주임이었다. 나까지 욕을 먹는 셈이었다. 야. 너 얘 관리 안할거야? 학생회 서기였잖아. 둘이 친할 거 아냐. 좀 어떻게 진정 좀 시켜봐.

그때마다 나는 그렇게 이야기하곤 했다. 말을 안듣는 걸 어떡해요. 선생님. 저도 이제 고3이라구요. 한가하진 않잖아요.

도예와의 추격전은 계속되었다. 이게 참 그런게, 나름대로 선거활동이라면 선거활동이었다는 점이다. 따지고 보면 막 큰 잘못을 한 것은 아니기도 하고, 그렇다고 선배들한테 방해가 될 정도도 아니었다. 애초에 도예는 선배들을 기가 막히게 구워삶았다! 선배들, 그러니까 내 동급생들도 그냥 그 아이를 재밌는 아이정도로 치부하고 넘어가는 모양이었다. 그게 나에겐 더 스트레스였다. 미꾸라지같은 아이였다. 정확하게 ‘지적하면 쫌생이 소리 들을 것 같은’ 미묘한 부분을 건드리고 있었다.

그 덕분에, 그 아이를 떠맡고 있는 시간만 늘어갔다. 학생회만 쓸 수 있는 학생회실에, 기어이 그 녀석을 앉혀두고 훈계를 해야했기 때문이다. 신기하게도 그 녀석은 그럴 때면, 빙글빙글 웃으며 과자와 음료수를 사왔다. 뭐하자는 거야. 아니, 사실은 뭐하자는 건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하지는 말았어야 했다는 거다.

그 아이를 잡느라, 내 눈도 점점 뻑뻑해져가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회칙을 다 외워버린 셈이다. 나는 이를 갈고 있었다. 언젠가 쓴 맛을 보여줄 거라고.

기회는 선거 삼일 전에 찾아왔다. 후보간의 공약 발표 시간이었다.

----

나는 그 녀석을 학생회실로 불렀다. 이번에는, 조금 무거운 일이었다. 도예도 그것을 알고 있는 듯이, 이번에는 고개를 내리 깔았다.

- 너. 이번엔 너무 갔어.

도예는 가디건에 튀어나온 올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렇게 눈길 피한다고 뭐가 될 것 같냐.

- 옆에 있는 후보는 성적은 뛰어날지 몰라도, 인간성은 의심이 돼? 박도예.

- ...네..

힘없이 내리깔리는 목소리 아래로,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죄책감에 물들었다기보단, 장난치다 걸린 아이같은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화가 났다.

- 야. 박도예.

- 네.

- 이거 장난 아니야. 진짜. 학생회장 개나 소나 되는거 아니라고. 여기가 대통령 선거야? 네거티브하게?

- 죄송해요. 제가 좀 감정이 격해져서..

- 너 이거 후보 자격 박탈까지 갈 수 있다는 거 알지?

진짜로 그랬다. 학생주임 선생은 나에게 그 영광을 기꺼이 맡겼다. 우리 ‘작은 학생 주임’이 일을 더 잘해주는데, 알아서 결정해라. 라면서. 그제서야 그녀는 고개를 떨궜다. 그래. 이제 좀 알겠냐-

그리고 눈물을 흘렸다. 어. 이게 아닌데.

- 선ㅂ..어흑..선배...나..나..흐으..진짜로..흑..잘할려구..어흑...했는데...

- 아니 야. 거기서 또 울면 나는 뭐가..

- 그깟....전통이..뭐라고..

- 미안해. 미안한데..

- 그때..선배님이..흑..그랬잖아요..

응?

- 교칙...바뀌면..흐으..만나준다고..

지금까지 내가 학생회 일을 하면서 얼굴이 빨개진 적이 딱 두 번 있었다.

두 번 다 이 녀석 때문이었다.

하여간 얘가 문제였다.

 

무슨 얘긴지는 알고 있었다. 작년 여름방학 직전이었다. 날이 더웠다. 나는 에어컨을 틀어놓고- 감사하게도, 학생회의 또 다른 특권이었다- 책에 집중하고 있었다. 아마도 수리였던 걸로 기억한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았으니까. 고개를 들었을 때, 그녀가 옆에 앉아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개념원리가 들려있다.

- 선배님 공부하세요?

- 응.

- 같이 공부해도 되요? 에어컨이 여기만 나와서.

그때까진 아무 일도 없는 줄 알았다. 그래. 그랬다. 그녀는 내 옆자리에 조용히 앉아 책을 폈다. 한줄로 흐르던 사각거리는 소리가 두 줄이 되었다. 꽤나 상쾌한 기분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사각거리는 소리가 멎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신에 흐음.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 왜?

- 아뇨. 그냥.

나는 다시 책으로 눈을 옮겼다. 이젠 좀 정확히 기억난다. 상용로그였다. 지금도 토가 나오는 문제지. 그거. 그녀의 다음 말에 몸이 얼어붙은 게 좀 더 기억나지만.

- 내가 어쩌다 선배같은 사람을 좋아하게 됐나 해서.

위태롭게 흐르던 한줄의 사각거리는 소리마저 멎었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뭐?

- 어.. 뭐?

- 혹시 만나볼 생각 있어요?

- 뭘?

- 저요.

도예는 옅게 웃었다. 개념원리는 덮어버린지 오래였다. 그 아이는 끼었던 팔짱을 책상에 대고 고개를 묻었다. 눈은 나를 향해 있었다.

- 잠깐만. 좀 당황스럽다?

- 나도 좀 당황스러워요.

그때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솔직히 말해서-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차가운 주인공따위는 없다. 아무런 감정이 없던 사이라고 해도, 상대편이 먼저 움직이면

조금은 움직이게 되어있다. 일단은 궁금해졌다.

- 내가 어디가 좋은데?

- 글쎄요. 시작은 외모였던 거 같은데.

내가 잘생겼던가? 여드름 없는 거 빼고는 자랑할 게 없는데. 몸도 그냥저냥이고, 생긴 것도, 저녁에 거울 볼때만 괜찮게 생겼다 싶은 정도인데.

- 농담 하지 말고.

- 아 진짜라니까 그러네요.

- 뭐 그래. 취향이라고 치자. 그 다음은?

- 음. 그건요.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크게 미소지었다. 그 입꼬리가 올라간 것이 귀여웠다. 그리고, 그 눈은 한없이 진지했다. 얼굴이 붉어졌다. 이때가 처음이었다. 학생회 일을 하면서 얼굴을 붉힌 건.

- 느낌이죠. 뭐.

그래. 이야기는 그렇게 흘러갔더랬다. 그리고 나는 한참을 고민했다. 아니, 정말로 한참을 고민했다. 거기에는 거절하게 된다면 이 아이를 어떻게 봐야하나. 이 뜬금없는 건 뭔가. 라는 생각부터 받아준다면 얼마나 만나야하나. 고등학생인데. 라는 생각까지 포함되어있었다. 저울에는 추들이 쌓여가기 시작했다. 받아줘? 좋지. 귀엽고 예쁘장하지. 몸매는 어땠더라. 그냥 깡마르기만 했던 것 같은데. 말아? 근데 난 내년에 고3인데. 어떡하려고. 대학 가야지. 대학 가면 또 어떡해.

저울질의 끝에, 나는 답을 내놓았다. 꽤나 정중했다. 그리고 멋진 책임 회피였다.

- 미안. 교칙 때문에 안되겠네. 

도예는 웃었다. 

- 그럼 어쩔 수 없죠 뭐.

며칠 뒤에 내놓은 답을, 도예는 수용했다. 이후에 별로 서로를 대하는 데 변화는 없었다. 그쪽도 변화가 없었고, 나도, 변화는 없었다.

그렇게 흘러가야 맞았다.

--------

- 너 설마 그때 그거..

- 네...

- 민준이한테 해달라고 하면 됐잖아.

- 걔도...흐으..꽉..막혔단 말이에요..

도예는 가디건 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소매에 살짝 묻어난 눈물이 빛났다.

- 선배처럼...

선배처럼.

전통을 중시하고, 법에 책임을 전가하고. 그녀의 마음이 조금 이해가 간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아니, 할 수 있는 일이 단 한 가지 있었다. 그게 일반적인 사람이 생각하는 일이 아니라서 문제지. 교칙을 빌어 거절한다면, 교칙을 깨버리면 된다. 도예는 그걸 하기로 한 셈이다.

 다 듣고 나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난 그 중에서 그나마 낫다고 생각한 선택을 했다.

도예의 눈물이 내 셔츠의 오른쪽 가슴팍을 적셨다. 머리를 한참을 쓰다듬어줬던 것 같다.

- 너. 교칙 바뀌고 나서도 내가 안받아주면 어떻게하려고 그랬어?

- 해보긴..흑끆.해봐야죠.

그녀는 이제 울음 대신 딸꾹질을 토해냈다. 웃음이 나왔다. 해보긴 해봐? 지금까지 그랬던 게, 단지 한번 더 해보려고 했던 거라고?

나는 웃었다. 오래 웃었던 것 같다. 딸꾹질을 대강 잠재운 그녀가 나를 보고 왜 웃어요. 하고 부끄럽게 쏘아붙일 때에야, 나는 말을 할 수 있었다.

- 알았어. 알았으니까. 들어가.

그녀는 불어난 얼굴을 가디건으로 가리고 자리를 떴다. 글쎄. 이번 고민은 조금 짧게 끝났던 것 같다.

- 야. 박도예.

- 네?

문 앞에 그녀가 나를 돌아보았다.

- 투표때 어디 가지 마라. 실격될라.

그녀는 한참동안 나를 바라보다가, 학생회실 밖을 달려나갔다. 이렇게 나오면 도리가 없잖아. 이것아.

------

선거 투표 당일은 생각보다 별 일이 없었다. 내가 해야할 일도 없었다. 투표 전에 단상에 올라 공정한 투표 바랍니다. 여러분. 이라는 말을 했을 뿐.

-----

도예는 상기된 얼굴로 책상을 내리쳤다.

- 아니, 사무국장님. 뭐가 안된다는 건데!

- 너 말이 좀 짧다?

- 앗. 아. 죄송해요. 왜 안되는 건데요?

그녀는 빠르게 말을 고쳤다. 아무래도 스타트가 문제였다. 첫 학생회의부터 이러면 어떡해. 이러면 내가 애들한테 우리 전(前) 서기 좀 신경써달라 한 이유가 없잖아.

- 서기까지 한 애가 그걸 몰라? 선생님들 결재 다 받아야지 된다고. 이 정도 건은.

- 아우. 참. 일 엄청 복잡하네.

그녀는 회의 안건을 담은 서류를 내려놓았다. 학생부로 올라갈 건의는 시작부터 화끈했다. 그녀는 교내 연애 허용을 어떻게 ‘그나마 덜 불건전하게’ 표현할지를 다들 생각해보라고 말하며 회의를 마쳤다. 찬성파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새로운 서기도, 학생부원도 모두 자리를 비우고 그녀가 자리를 뜨게 될 때 즈음이었다. 나는 말했다. 이 말은 해야할 것 같았다.

- 너 내가 회장 될 때 말했지? 쉽지 않을 거라고.

도예에게는 미안하지만, 고생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 네. 저. 그런데요. 사무국장님.

도예가 내 팔을 휘감았다. 그녀의 왼손이 나의 오른손에 흘러들어와, 깍지를 낀다.

- 많이 도와주셔야해요?

그래도 지켜봐주기로 했다. 조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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