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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 진화

by Loodiny posted Apr 02, 2017 (23시 59분 59초)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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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하계 내에서 문명 단계 3기, 즉 성간 교류가 가능하나 물질적 대사에 속박된 문명은... 아무튼 많이 존재한다. ‘아무튼 많이’라고밖에 서술할 수가 없다는 것에 양해를 바란다. 예컨대, 단독으로는 단순한 사칙연산조차 불가능하지만 특정 기생체에 감염되었을 때만, 그것도 기생체의 종류에 따라 상이한 방향성으로 발달하는 지성을 타고난 수많은 숙주형 외계인들의 경우, 이들은 숙주의 종과 기생체의 종 중 어느 쪽으로 머릿수를 세어야 하는가?
 이런 골치 아픈 경우가 너무 많은 고로, 대부분의 외계생물학자는 ‘분류’ 자체가 자신의 종 중심적일 수밖에 없으며 실상 이 우주를 정확히 묘사하는 데 전혀 쓸모가 없다는 것을 언젠가는 알아채게 된다. 결국 그는 자신의 과업을 포기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 특수한 이미지를 보는 것으로 신경계를 마비시키거나, 물을 마시거나, 30cm 높이에서 떨어지거나, 20% 농도의 기체 산소에 노출되는 등등 - 자살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디나 자신의 기준을 억지스럽게 밀고 가는 뻔뻔한 개체는 있는 모양으로, 내가 그 때 읽고 있었던 이 텍스트의 저자는 3기 문명들을 다음과 같이 분류했다. 47%는 탄소 기반 화학 대사 문명, 12%는 규소 기반 화학 대사 문명, 23%는 그 외 방식의 화학 대사 문명, 11%는 강한 핵력 기반 대사 문명, 나머지 7%는 이 범주에 들지 않는 예외적 방식으로 생명을 구가하는 문명이라고.
 이 분포 비율 덕분에, 이 ‘학교’의 본교 - 즉 오렌지색 왜성으로부터 네 번째 궤도를 도는 지구형 행성 - 은 인류 대표인 나에게는 상당히 쾌적했다. 이 ‘쾌적’이라 함은 기압이 대략 14만 hPa이며 평균 기온은 약 300K에 달하고 지표 중력가속도는 약 24m/s²이고 대기 조성에서 산소의  질량비는 약 13%에 못 미친다는 뜻이다. 물론, 이것은 수많은 생명유지장치를 달고 있는 우주복을 입고 활동하기에 어려움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30K 이상의 온도에서는 산 채로 삶아지는 규소 기반의 외계인들도 우주복을 입고 도서관을 드나들지 않는가.
 불편한 사람이야 저 대기권 멀리 보이는 주성의 쌍성... 그러니까, 나보다 2주기 먼저 이 ‘학교’에 입학한 항성 선배님이겠지. 강한 핵력에 의한 물질대사를 바탕으로 오랫동안 진화해 온 결과, 고등의 지성을 발달시키고 따라서 성간 여행까지 가능해진 사람이다. 물론 ‘선생님’들이 아니고서야 이 성계의 중력 균형이 완전히 박살나지 않을 수 없었겠지만. 아니, 근데 어차피 수업을 들으려면 소형의 원격 육체로 갈아타야 하는데, 대체 왜 직접 몸을 여기로 옮긴 거야? 우리 인간들이야 여전히 학교에는 등교를 해야 한다는 고루한 관념이 남아 있지만, 저 양반이야 학교가 뭔지도 여기서 처음 배웠을 거 아닌가.
 내가 이런 소리까지 하고 있는 이유는, 분명 저 양반의 시각이 이 행성 표면에 있는 정보 도서관까지 닿지 않는다는 말을 동기들로부터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걱정을 치울 수 없었던 탓이다. 말이 쉽지, 의식이 있는 항성 같은 게 머리 위에서 매 자전 주기마다 눈에 들어온다고 생각해 보라. 심지어 출석을 부를 것을 예측하고 미리 플레어를 일으켜서 그 빛이 행성 표면에 제때 입사되도록 하는 양반이라고.
 하지만 그 때, 탄소계 문명과 규소계 문명의 학생들이 도서관에서 몰래 모여 밀담을 나누고 있다는 사실이 결코 그 사람에게 들켜선 안 되었다. 우리가 지금, 학생회장 선거를 위해서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을, 항성 선배를 어떻게 떨어트릴지 논쟁 중이라는 것은 결코 들켜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나는 결코 학생회장이 될 수 없었을 것이므로.


 ‘학교’는 4기 문명 소속의 ‘선생님’들이 3기 문명들로부터 파견된 대표들을 가르치는 항성계다. 여기서 가르치는 것은 간단하다. 4기 문명으로 발전할 수 있는 방법, 그리고 그 방법을 익히기 위한 과정인, 신학과 고등수학이 합쳐진 괴이한 초능력 이론.
 4기 문명권은 물질과 에너지에 의한 대사의 속박에서 해방된 존재들... 인류를 포함한 일부 상상력의 풍부한 문명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신’에 해당하는 존재들이다. 그리고 그들 중 일부는 그들의 수준에 미치지 못한 3기 문명들을 계도하여, 그들이 무의미한 전쟁을 겪지 않고 빠르게 4기 문명의 영역까지 발전하도록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니, 사실 그들 중 일부는 2기 문명들에게도 텔레파시를 통해 종교의 형태로 문명들을 계도하려고 시도한 모양이었으나, 우리 인류의 경우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그리 효과적이진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학교 같은 시스템이 나올 수밖에 없지. 선생님들이 직접 이 우주에 현현하여 칠판 하나에 수련 과정을 설명하는 것이, 예언자가 시키는 대로 명상 수련을 반복하는 것보다 훨씬 더 효율이 좋을 테니 말이다.
 물론 이것은 선생님들의 입장으로, 정작 당사자들인 3기 문명들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수많은 호전적인 문명들의 역사를 통해서 익히 증명되어 왔듯이, 평화란 다른 방식의 전쟁을 뜻할 뿐이다. 활동영역이나 의사소통 방식의 차이, 혹은 단순한 기술력의 부족으로 서로 교류할 수 없었던 문명들이 전부 한 자리에 모였다면, 이건 미래에 일어날 대전쟁을 현재의 외교전으로 바꿔버린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다.
 더더구나 4기 문명의 기술력은 명백히 그들 모두보다 우위에 있었다. 물론 실제로 학교에서 가르치는 거라고는 복잡한 수식을 계산하는 기묘한 명상법이었지만, 당장 다음 학기 커리큘럼에 ‘초능력을 이용한 위상 대포 만들기 실습’이 나올지도 모르는 노릇 아닌가. 선생님들은 더욱 확실한 위협이고. 그들이 평화를 수호한다는 이야기는, 그들이 우주의 평화를 위해 무력도 쓸 수 있다는 소리니까.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들이 학생 자치를 장려하기 위하여, 학생회장 선출 선거를 도입한다고 발표했을 때, 온 은하는 문자 그대로 혼란에 빠졌다. 선생님들이 제안한 학생회장의 권한은 상당히 막강했으며, 학생들의 건의를 추합한 결과 더욱 막강해졌다. 사실상의 ‘은하연합사무총장’ 같은 느낌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졸지에 은하계 외교의 중심이 될 학생회장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문명들 사이의 치열한 외교전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 외교전은 곧 의미를 상실하게 되어 버렸는데, 이는 선생님들이 투표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로 공리주의를 선택했기 때문이었다. 은하계 대다수의 문명권은 윤리학의 발전 과정에서 공리주의, 즉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의 원리를 연구한 바가 있었다. 자, 그런데 전술했다시피, 은하계 내에서 문명 단계 3기, 즉 성간 교류가 가능하나 물질적 대사에 속박된 문명은, 아무튼 많이 존재한다. 기생충들과 융합하여 하나의 지성을 이루는 종족이라던가, 군체 의식을 가진 종족이라던가, 수명이 대략 지구 시간 5시간밖에 되지 않으나 자식을 통해 계속 지식을 이어가는 종족이라던가도 무수히 많다. 그렇다면, 대체 ‘다수’는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가?
 우리 선생님들의 가르침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공했다. 입자 하나하나가 곧 의식이라. 다시 말해, 질량이 크다는 것은 즉 다수라. 그리고 그 구절의 의미는, 의식을 가진 고질량 천체들의 표가, 다른 생명체들과 비교해서 99%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여기서 한 마디 말을 붙이자면, 천체 생명체들과 화학 대사 생명체들 사이에서는 매우 큰 반목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겠다. 우리의 항성 선배는 매우 오랫동안의 연구를 통해, 천체 생명체로는 드물게도, 번식의 기술을 익혔다. 아, 물론 별이 섹스를 한다는 소리는 아니다. 항성에 특정한 에너지를 주입하여 그 항성을 또 하나의 생명체로 만들어내는 기술을 확보한 것이다. 덤으로 대부분의 번식 행위가 그렇듯이, 이 과정은 많은 쾌락을 수반했다. 이에 따라 대부분의 천체 생명체들을 이 우주를 천체 생명체들로 가득 메우기를... 즉, 의식 없는 별들을 마구잡이로 강간하고 돌아다니기를 원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대부분 행성 위에서 삶을 구가하는 화학 대사 생명체들의 입장에서, 자신들의 모성이나 식민 개척한 별들의 항성이 기분 안 좋다고 자기 폭풍을 뿜어대는 것은 상당히 곤란한 일이었다. 이런 와중에 학생회장이 은하의 국제법을 만들 수 있을 정도의 권력을 가지게 되자, 천체 생명체들은 자신들의 시대가 왔다는 것을 느꼈다. 이제 우주는 새로 태어난 항성들의 울음소리로 가득 차리라. 물론 그게 우주 전체 입장에서는 민폐가 따로 없을 터였지만 말이다.
 그런 고로, 우리 화학 대사 생명체들은 전부 뭉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뭉친다’는 표현은 조금 어폐가 있는데, 대부분의 문명들은 인간처럼 모든 개체가 독립적으로 사고하고 자유롭게 행동하는 식으로 진화하지 않았다. 거대한 초지능에 모든 개체의 의지를 귀속시키거나, 생물학적인 기관을 바탕으로 집단 전체의 의사를 하나로 모으는 식의 진화가 보편적이었던 것이다. 인간의 이기심과 왕따 기질은 우주에서 상당히 유별난 재능이었고, 덕분에 나는 완전히 수평하고 무질서한 방식으로 외계 종족들을 한데 모으는 것은 물론, ‘투표’가 어떤 시스템인지 이해시키는 것도 가능했다. 투표 같은 원시적인 정치제도를 유지하고 있던 종족은 인간이 유일했다.
 그 덕분에 나는 선생님들께, 투표 제도를 경험해 본 유일한 학생으로서, 일부 미생물 종족들과 양자 생명체들의 의사가 사실상 전혀 개입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의견은 그들 귀에도 꽤나 합당하게 들렸는지, 그들은 종족을 대표하는 개체별로도 대량 질량 몇 kg에 상당하는 표를 더 받을 수 있다는 발표를 했다. 물론 누군가는 그냥 양자 생명체들의 ‘질량’이라는 것이 워낙 모호해서 어쩔 수 없이 수용한 거일 거라고 주장했지만.
 만약 완전히 머릿수 기준의 투표를 하려 했다면, 천체들의 필사적인 반대에 부딪쳐 선거 자체가 파행을 거듭했을 것이다. 하지만 언뜻 보기엔 무의미한 저항을 천체들은 받아들여 주었다. 사실 그렇게 해 봤자 천체들의 질량은 워낙 압도적이라, ‘아무튼 많이 존재하는’ 종족들 하나하나당 표를 다 모아봤자 별 하나의 질량에는 당연히 미칠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이 내 노림수였다. 화학 대사 생명체 중에는, 거대한 유체 생명체가 하나 있었다. 이 유체 생명체는 미생물처럼 그 유체 속을 떠다니는 무수한 뇌세포 비슷한 것으로 사고능력을 얻었다. 그리고 그는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능력, 이분법의 번식 능력 역시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매우 적절하게 번역된, 대헌장과 권리 장전, 그리고 미국 독립선언문 구절을 들려주었다. 그리고 ‘민주주의 만세!’ 라는 구절도. 그는 이 구절을 전부 받아들였다. 그 구절 하나하나가, 관련된 생각 하나하나가 뇌세포의 형태로 나타났다. 서로 완전히 이질적인 형태의 뇌세포로.
 그리고 그는 분열했다. ‘민주주의 만세!’가 ‘ㅁㅣㄴㅈㅜㅈㅜㅇㅡㅣㅁㅏㄴㅅㅔ!’로 쪼개지고, 더 쪼개서서 점 하나로 분열되고, 더 작게, 더 작게, 사고라는 것이 가능할 만큼 작게 쪼개질 때까지.
 그 모두는 서로 다른 사고를 담고 있는, 서로 다른 생명체였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막대한 표를 번 나는 우주의 학생회장이 되었다. 그리고 천체 생명체들은 당연히 이 야바위에 시비를 걸었고, 곧 내전이 발생했다.
 그리고 그제야 우리는 선생님들의 진정한 의도를 알 수 있었는데, 내전이 격화됨에 따라 전쟁통에서 자연스럽게 초능력을 각성한 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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