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한대

[라한대]새로운 길을 찾는다는 것

by Pip posted Apr 30, 2017 (23시 22분 41초) Replies 1 Letters cou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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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려. 느려. 느려어어어.

그녀의 한숨이 울려 퍼졌다. 그는 걷는다. 아주 천천히. 풀숲이 그의 몸을 스치는 동안 잎새는 그녀의 몸을 불쾌하게 때린다.

- 당신.

그의 걸음이 멈춘 것은, 그녀가 분에 못 이겨 다시 소리를 지를 준비를 할 무렵이었다. 그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 왜?

- 너무 느려.

그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참동안 답이 없다.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핀잔이 돌아올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눈길은 힐난하는 눈길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그의 느림’이었다. 그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 참아.

기어이 그녀는 소리를 지르고야 말았다.

- 참기는 뭘 참아! 미치겠어! 미치겠다고! 이게 도대체 얼마동안 이러는 거야! 해가 몇 번을 뜨고 졌는지 알아?!

그녀는 말을 맺었다가, 잠시 뒤에 말을 이었다.

- 그렇다고 멈추지는 마.

그는 잠시 멈칫, 했다가 다시 걸음을 옮긴다. 그는 말이 없었다. 그녀를 처음 만나던 순간 그녀의 미덥지 못한 눈길이 떠올랐다. 그녀는 어머니에게 되물었다. 정말로요? 그녀의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를 바라보았다. 쓸모없이 큰 덩치에 어수룩해보이는 표정, 큰 소리가 난 한참 뒤에 그녀를 바라보는 것까지. 그녀는 그와 함께 걷는 수 밖에 없었다. 여행길이 얼마나 되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시간을 때우기 위해 소리 내어 눈앞을 지나는 나무들의 개수를 세었다. 하나. 하나. 하나. 하나....

- 차라리 이럴 거면 그만 갈래. 내려줘.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멈출 만큼 중요한 말이 아니었다.

- 안돼.

- 왜?

한참 뒤에 그의 대답이 들려왔다.

- 내가 보기에 좋은 곳에 데려간다고 약속했으니까.

- 그런 게 어딨어어. 여기저기가 다 좋지! 하늘을 이불 삼고, 땅을 벗 삼아서 살면 그게 좋은 거 아니야?!

- 아니야.

그녀의 눈앞이 노래진다.

- 아니 왜. 뭐가 문제인데 여기는?

- 여기 있으면 들짐승들한테 잡아 먹힐거야.

그는 걸었다. 이번에는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고개를 돌렸다. 풀숲이 드디어 끝났다. 그녀는 눈앞에 보이는 나무의 숫자를 추가할 수 있었다. 둘.

- 몸이 반쪽이 나버릴걸.

그녀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 부분에 대해선 반박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이 곳의 생활이 어떻다 말할 수 있는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다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는 걸었다. 큼지막한 나뭇잎 사이를 적시는 빛에 노란색이 흩뿌려진다. 그녀의 길잡이는 고개를 돌렸다.

- 왜. 당신. 힘들어? 쉬자구?

그녀의 목소리에 한숨이 가득 찼다. 추측은 틀렸다.

- 아니. 물 마실거냐고.

- 으익. 당신 물은 더럽단 말이야. 그냥 가.

그녀의 길잡이는 느렸지만, 체력이 없지는 않았다.
 

----



그는 걸었다. 풀숲을 지나 이제는 눈앞이 어둑어둑해졌다. 울창한 나무들이 눈앞의 길을 빼곡하게 가린다. 그녀는 불평도, 질문도 하지 않았다. 심심함을 달래기 위해 저건 뭐야. 라는 물음을 던졌을 때, 그 질문을 잊어버릴 만큼 긴 시간이 지났을 때에야 그는 고개를 돌렸으니까. 대신에 그녀는 입을 열었다.

- 당신. 나 돌아보지도 말고, 계속 걸으면서 대답해줘.

그녀는 속으로 숫자를 센다. 하나. 둘. 셋. 넷...

스물 일곱.

- 응.

- 어쩌다 엄마랑 만나게 된 거야?

하나. 둘. 셋. 넷. 이번에는 시간이 조금 더 길었다. 하지만 그 이후의 답변은 의외로 빠르게 이어졌다.

- 내가 네 어머니를 만났을 때.. 그 분은 자식들을 낳을 준비를 하고 있었어.

- 그래서?

- 산책을 갔다 오니까 네가 있었고.

- 약속은 언제 했는데?

- 산책가기 전에.

- 무슨 약속이었는데?

- 혹시 떠나지 못하는 아이가 있다면, 내가 데리고 가고 싶은 곳에 데려 가달라고.

- 당신 지금 며칠째 걷고 있잖아. 힘들지?

다시 시간이 조금 느려진다.

- 그건 왜.

- 당신, 우리 엄마가 뭘 해준다고 했어? 솔직히 말해봐.

- ..싫어.

- 빨리. 안 그러면 계속 소리 지를거야.

- 상관없어.

- 이으익. 그러면..

그녀는 그의 등을 후려쳤다. 그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는 이 정도로 꿈쩍하지 않는다. 무의미한 저항이었지만, 의지 정도는 보여줄 수 있었다.

- 여기에 쓰러져서 안 갈거야.

- 끌고 갈 건데.

- 아 그냥 말해주면 안돼? 이제 엄마는 영원히 안녕이란 말이야. 당신도 이제 우리 엄마는 못볼 거 아니야.

그의 다음 말이 나오기까지는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녀가 대답을 듣는 것을 포기할 만큼. 정말 대답하기 싫은가봐. 하면서 그녀가 결국 다시 하늘을 바라본 지 한참을 지났을 때였다. 나무 하나를 지났다.

- 그녀를 가지게 해달라고 했어.

이번에는 그녀의 대답이 느려졌다. 그녀는 한참을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 변태.

- 동의했는 걸. 그 분도.

- 정말 당신이랑 같이 가기 싫어졌어. 이제.

- 네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은 아니야.

- 알아. 그냥 그렇다고.

- 상관없어.

그는 걸음을 옮겼다. 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진 숲 속에서, 그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딱히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무언가를 할 도리도 없었다.
 

----



그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자매들이 이미 흩어질 대로 흩어져서, 그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부아가 치민다. 어쩔 수 없었다. 여전히 그녀의 머리 위에는 숲이 우거져 있었으니까. 그녀는 이제 물음을 바꾸었다. 어디까지 가야해? 그가 답한다. 이 숲만 지나면 돼. 그게 얼마나 되는데? 몰라.

 그가 고개를 돌렸다. 좀 쉬고 갈 거야? 라는 물음에 글쎄. 라는 대답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 큰일났다.

그녀는 그의 몸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평소보다 더. 그의 걸음이 눈에 띄게 빨라졌다. 그녀는 물었다.

- 왜? 무슨 일이야. 말해줘.

그는 입을 열었다. 빠른 답변이었다.

- ...비가 올거야.

- 그걸 어떻게 알아?

- 그냥 알아. 서둘러야해.

- 알았어. 빨리 가.

그녀가 그를 어떻게 생각하던 간에, 그녀의 길잡이는 경험이 많았다. 그가 바람이 불 거라고 이야기 할 때 즈음에는 바람이 불었고, 땅이 울린다. 숨어야 해. 라는 말이 나오면 어김없이 들짐승이 지나갔다.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녀는 그의 말을 믿기로 했다.

비바람이 몰아쳤다.

옅은 여우비에서 가랑비로, 가랑비에서 장대비로, 장대비에서 폭풍으로. 빗발은 점점 거세어진다. 그는 그녀를 그러안고 나무 틈새에 몸을 숨겼다. 그의 몸이 들어가기 딱 알맞은 구멍이었지만, 그녀를 짓뭉갤 수는 없어 그의 몸이 틈새 밖으로 비어져 나왔다.

- 당신, 괜찮아?

- 괜찮을 거야. 걱정하지 마.

그녀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등과 머리 너머로 물이 스미어온다. 그는 고개를 쳐들었다. 그녀에게 물이 닿지 않았다. 그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빗소리에 그녀의 소리가 반쯤 묻혀들어갔다. 그녀는 소리쳤다.

- 여기로 좀 더 들어와.

- 괜찮아.

그녀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몸이 그녀의 몸에 아슬아슬하게 맞붙어있었다. 그가 몸을 더 붙이면 그녀가 위험할 수도 있었다. 특히나 비가 온다면.

그녀는 입을 열었다. 그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보는 표정이 드러났다. 고통이었다.

- 내가 반이라도 막게 해줘. 당신 이러다가 죽어.

- 가만히 있어.

그는 여전히 그녀를 바라본 채로, 틈새를 온몸으로 막고 있었다. 한참 뒤에 그의 말소리가 다시 들렸다.

- 그래야지 네가 사니까.

그녀는 겁에 질려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그녀를 이끌어온 길잡이가 사라진다면, 그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런 곳에서는 더더욱. 빗소리는 계속된다. 으드득하는 소리를 들은 것은 빗소리가 익숙해질 무렵이었다. 그녀는 그의 비명소리를 들었다. 그의 몸속에서 끓어올라오는 고통을 그녀는 온몸으로 받아내었다.

- 왜 그래. 당신. 말을 해봐.

- 아무것도 아니야.

-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지 마.

그녀는 그에게 몸을 붙였다. 그의 몸이 떨리고 있었다. 그녀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떨림이었다.

- 하나도 안 괜찮으면서.

그녀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미소 지었다. 눈가는 비틀려있었지만, 여전히 그녀는 미소를 읽을 수 있었다.

- 다 괜찮을 거야.

밤은 지독히도 길었다.
 

----


비가 멎었다. 그녀가 눈을 떴을 때, 그녀의 길잡이는 나무 틈새 밖에 쓰러져있었다. 그녀는 그가 비명을 질렀던 이유를 볼 수 있었다.

그의 등이 흉측하게 찌그러져있었다. 그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그녀는 그를 불렀다. 처음으로 드는 불안감이었다. 그가 그녀를 떠나갈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그리고-

그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예감.

- 당신. 당신. 대답을 해봐. 제발.

그녀는 계속해서 소리쳤다. 비가 그치고 나무 틈새로 비쳐들어오는 햇살에 눈이 부셨다. 그녀는 그를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그가 움직일 때 그녀는 움직일 수 있었다. 그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녀는 움직일 수 없었다. 그녀는 길잡이를 애타게 불렀다.

- 일어나. 당신이 없다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다 괜찮을거라고 했잖아. 그러니까. 제발.

그녀는 그의 몸이 꿈틀거리는 것을 보았다. 그녀의 외침이 더욱 커졌다.

- 당신, 괜찮아? 말해봐. 나 무서워. 빨리.

- 괜찮아.

그의 대답은 느릿느릿한 시간과 함께 들려왔다. 그녀는 물었다.

- 정말로? 당신 등을 봐. 어떡해.

- 정말 괜찮아. 걸을 수 있어.

그는 그녀를 안아 올렸다. 그녀는 그의 몸이 떨리는 것을, 그리고 눈에 띄게 느려진 것을 느낀다.

- 걸을 수 있는 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당신 하나도 안 괜찮아.

그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것이 대답을 생각하는 시간인지, 단지 그녀를 바라보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의 등의 무너진 부분을 감싸 안았다.

- 우리 조금만 쉬자.

- 도착이 느려질 거야.

- 당신이 죽으면, 출발도 못해.

- 약속을 했어.

- 그 약속도 당신이 살아야 지키는 거잖아.

그녀는 그의 등에 들러붙어서 속삭였다. 그것은, 이전과는 격이 다른 굳건한 의지 표현이었다.

- 나, 당신이 낫기 전에는 안 움직일 거야. 발랑 누워버릴 거라구. 당신 지금은 힘없어서 나 끌고 가지도 못할걸.

그는 고개를 돌린 채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알 수 있었다. 이번의 기다림은 ‘대답을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는 입을 열었다.

- 알았어. 조금만.

- 잘 생각했어. 조금만이야.

그녀는 그의 등을 꽉 부여잡았다. 그의 등이 악화되지 않을 정도로만. 그것이 낫기를 기도했다.
 

----


- 당신, 약속이 그렇게 중요해?

며칠이 지났다. 어둑어둑한 밤에 눈이 익는 것도 이제는 익숙해졌다. 그녀는 그의 등을 톡. 하고 건드렸다.

- 그럼.

- 우리 엄마는 이제 죽었어. 아마도 그랬겠지. 그래도 상관없어?

- 그 분은 가장 소중한 것 나에게 주었어.

길잡이는 한참 동안 답을 하지 않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 그렇다면 나도 가장 소중한 것을 걸어야 해.

- 바보 같아.

그녀는 그의 등을 감싸 안은 채 이야기했다. 고개를 들어 바라본 밤하늘은, 나뭇새에 가려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밝게 빛나는 별이 흐드러졌다.

- 나 원래 당신 되게 싫어했거든. 그거 알지?

- 알아.

- 그래도 믿음직한 것 같아. 당신.

- 고마워.

- 바보 같고, 남의 속 신경 안 쓰고, 자기 할 일만 하는 걸 빼면.

그녀는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았다.

- 대답하지 마.

그녀는 무언가 부끄러운 것을 말한 것 같아 그의 대답을 막았다. 그리고 그의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것에 만족했다. 밤이 깊었다. 그녀는 그에게 말을 건네었다.

- 자자. 이제.

- 그래. 잘 자.

- 응. 당신도.

대답 뒤에, 그녀는 잠에 드는 대신에 별을 바라보았다. 하늘이 그리는 그림이 어찌나 예쁜지, 그 그림을 오롯이 눈 안에 담고 싶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길잡이도 그런 생각을 했을까?

그녀는 그것을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생각을 잇는 대신에, 그의 등을 그러안았다.

상처가 아물어 간다.
 

----


그녀는 저 너머 지평선에서 숲의 끝을 보았다. 그녀는 그의 등을 두드렸다. 그에게서 한참 뒤에 답이 돌아온다.

- 왜?

- 저게 당신이 말한 그거 맞지? 숲이 끝나는 곳.

- 맞아.

- 저기까지 가면 이제 끝이네, 그렇지?

- 그렇지.

그는 부지런히 몸을 움직였다. 시야를 전부 가릴 만큼 큼지막했던 나무들이 사라지고, 가느다란 가지를 뻗은 나무들이 빼곡하게 들어찼다. 그녀는 한참동안 숲의 끝을 바라보았다.

- 당신, 나를 데려다주고 나면 어떻게 할 거야?

그녀는 한참동안 답이 없는 것을 기다렸다. 이제 그녀는 ‘답을 받을 수 있는 질문’ 과 ‘받을 수 없는 질문’을 알고 있었다. 이번에는 전자였다. 기다림 뒤에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 돌아갈까.

- 돌아가면 뭘 할 건데?

- 그냥.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거지.

그녀는 그의 등을 바라보았다. 반쯤 찌그러진 등은 이제 다 아물었다. 그녀는 그 등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그의 등 뒤로는, 그의 발자취가 새겨져있었다. 그녀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거리를 지났다. 그녀는 어머니가 있는 곳이 어땠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그녀는 그에게 이야기했다.

- 당신. 나 마지막으로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 응.

- 저 끝에 마지막 나무 있잖아. 그 가지에 올라가줘.

- 엄청 높은 걸.

- 못해?

- 할 수는 있어.

- 부탁할게.

그녀는 그의 발걸음과 자취를 느꼈다. 그것은, 빠르고 느림과는 다른, 하나의 선이 되었다.
 

----


그녀는 가지에 올라섰다. 숲의 끝 너머로 펼쳐진 평원에는, 어두운 빛깔의 흙들과 야생화들이 여기저기 피어있다. 그것은 낙원이었다.

- 너무 예뻐.

- 응.

그는 조금 더 가지의 끝을 향해 움직였다.

- 당신, 나를 이런 곳으로 데려오고 싶었던 거야?

- 응.

- 왜 그렇게까지 한 거야?

- 내가 보기에 좋은 곳으로 데려 가달라는 약속이었으니까.

- 그렇구나.

그녀는 그의 느린 발걸음 뒤에서, 평원이 가까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 걸음에 끝에는 새 생명이 있고, 존재의 즐거움이 있다. 그리고-

이별이 있었다.

가지의 끝에 다다랐다.

그녀는 그에게 말을 건네었다.

- 당신, 나를 안아줄래? 앞으로.

길잡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등에서 그녀가 미끄러져 내려왔다. 그녀는 그의 몸 끝에 매달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도, 그녀를 바라보았다.

- 이제 엄마랑 약속은 끝인 거네.

- 그렇지.

- 그러면, 당신.

- 응.

- 나랑 약속 하나만 할래?

- 무슨?

- 내가 꽃을 피우면, 나를 찾아와줘.

- 그리고?

그녀는 한참 동안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몸은 굳건하게 가지에 매달려, 평생 그곳에 있을 것만 같았다.

- 내 곁에 있어줄래?

- 날 싫어한다고 했잖아.

그녀는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 그냥. 재밌을 거 같아서.

- 뭘 줄 건데?

- 뭐, 글쎄. 줄 게 따로 있겠어.

대답하는 데에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그녀의 어머니가 주었던 것이다.

- 내 꽃잎을 줄게.

그녀는 가장 소중한 것을 약속했다. 길잡이는 잠깐 생각하다 말했다.

- 알았어.

그녀는 머리칼이 평원을 향해 흩날리는 것을 느꼈다. 미약한 바람이, 그녀를 좋은 곳으로 실어가줄 것 같은 기분 좋은 예감이 든다.

- 바람 분다. 이제 가야겠어.

- 응. 그래. 잘 가.

- 가기 전에 잠깐만.

- 응?

- 당신. 이름이 뭐야?

그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느낀 것 중에 가장 긴 기다림이었다.

- 그냥. 복족이라고 불러.

- 복족이. 잊지 마. 날 찾아와.

- 알았어.

그녀는 그의 손을 떠났다. 바람에 실려 가는 그녀에게서 마지막 외침이 들려왔다.

- 바보같이 다쳐도 계속 걷지 말고오-

달팽이는 민들레 씨가 떠나갈 때까지 바람이 부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가지를 거슬러 나무를 내려갔다.

다음 목적지가 정해졌다.

달팽이는 바람이 부는 방향을 기억했다. 그리고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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