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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한대] 변증법적 아가씨

by 콩사탕 posted Apr 30, 2017 (23시 26분 25초) Replies 1 Letters cou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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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전용 차에서 내리자 제복을 빼입은 장병들이 차례로 나에게 경례했다. 나는 손을 들어 거기에 화답하며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리고 거대한 옛 총독부 건물에 들어섰다. 내가 베레모를 고쳐쓰며 수령의 집무실로 천천히 걸어나갔다. 겨드랑이에는 서류뭉치가 끼워져 있는 채였다.

집무실 문 앞에 도착하니 어쩐지 냉기가 느껴졌다. 그럴 만도 했다. 지금부터 내가 만나려는 사람은, 6000만의 목숨과 전 국토의 자산, 노동을 오로지 하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절대 과장이 아닌 것이, 당정군(黨政軍)에서 모두 최고직위를 꿰차고 있는 것이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적당한 세기로 노크했다.

한참이나 기다렸지만 답이 없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노크하려는 때에,

"아아, 들어와."

청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문을 밀었다. 그러자 머리를 싸매며 일 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몇 번이나 봤지만 볼 때마다 그녀의 직책과는 괴리감이 느껴지는 인상이었다.

나이는 33살로, 지도자치고는 젊지만 아주 납득못할 수준은 아니다. 문제는 지나친 동안이었다. 짧은 단발에, 건장한 군인의 2/3도 안 미치는 키, 거기에다 간드러지는 고양이 목소리까지. 내가 영관급 장교로 처음 이 집무실에 들어왔을 때, 꼭 그 딸인줄 알았다. 향후 1억을 세어갈 국토의 볼셰비키 지도자의 인상은 절대 아니었던 것이다.

뭐, 이런 말을 본인 앞에서 하면 그대로 숙청일......

 

"야, 수령 앞에서 뭐하냐? 속으로 호박씨 까냐?"

젠장맞을, 속으로 궁시렁거리다가 태클을 먹고 말았다. 지금 그녀는 매우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눈을 질끈 감고 경례를 하며, 이 나라 인민이라면 몇 번이고 외워야 하는 말을 소리쳤다.

"당군 대원수이시며, 대한 공산당 서기장이시며, 대한 소비에트 사회주의 인민공화국의 위대한 수령 '이서현'동지를 뵙습니다!"

"그래, 그래. 진즉 그렇게 나올 것이지. 한 번만 봐준다. 크큿."

그녀는 내가 당황하는 꼴이 우스운지 낄낄 웃었다. 얼굴이 창피함으로 약간 붉어졌다.

"경례 끝났으면 그렇게 낯간지스러운 존댓말 안 써도 돼. 그냥 최소한의 예만 갖추라고."

그녀가 으레 하는 말이었다. 도저히 의중을 알 수 없는 이서현 수령동지였지만, 이 말은 대체로 진실이었다.

"아...... 네......"

나는 엉거주춤 손을 내렸다. 그리고 겨드랑이에서 서류뭉치를 빼내 그녀의 책상 위에 올려다 놓았다. 그녀는 맨 위의 서류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또 반동새끼들이 반란 일으킨거야?"

"뭐, 그렇죠."

"서류 들춰보기 전에, 대략 어디어디서 반란인지 말해 봐."

서현 동지는 짜게 식은 눈을 했다.

"이북으로는 함경도, 이남으로는 전라도, 충청도요."

"흐미, 세 곳 연달아? 6개월 전 이래로 최대인데......"

"그래서 수령님 명령받으러 온 거 잖아요. 회유할지 밀어버릴지."

"내 스타일 알잖아? 확 밀어버려. 어짜피 반동분자랑 같은 하늘 이고 살 것도 아니고."

그녀는 불끈 주먹을 쥐어보여 내게 내밀었다. 확고히 쓸어버리겠다는 결의였다.

"하아, 그럴게요."

"엥? 왜 한숨 쉬어? 반동 죽여버리기 싫은 거야?"

누그러졌던 그녀의 태도가 다시금 사나워졌다. 내 무기력증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리라. 이럴 때는 조곤조곤 논리적으로 설명해야 했다.

"누구든 그 놈들 죽이고 싶지 않겠나요, 현실이란게 있잖아요. 우리 당군이 사방팔방 생겨나는 게릴라들 잡으려고 아주 녹촌데 거기서 총공격은 피해가 크다구요."

"피 없이 혁명하냐?"

갑자기, 그녀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지도자의 아우라가 작은 체구에서 풍겨져 나오고 있었다. 

 

그녀의 어린 체구만 보고 깔보는 눈빛을 하는 트로츠키주의자들, 아나키스트들이 전부 숙청당해버린 이유가 여기 있었다. 일견 연약해 보이는 이서현 동지는, 속에 능구렁이를 100마리는 키우고 있는 것이다. 수령의 지위를 얻기 이전, 좌파연대 속에서 그 암약하는 구렁이를 숨기며 세를 불려갔다가 마침내 서열 싸움에서 승리를 얻고, 영도당의 영도자가 된 이래로는 독기를 마음껏 발산하는 여자가 이서현 동지였다. 그녀는 삶의 투쟁과 행동과 변혁을 통해 이루어진 변증법적 인간이었다. 그렇기에 코민테른도 그녀를 이 땅의 정신으로 간택한 것이겠지. 여기선 이서현 동지의 비위를 최대한 맞추어주어야 한다. 나는 최대한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생각이 짧았습니다. 시정하겠습니다."

"그래야지, 나랑 어느정도 말 놓는다고 나약해지진 말라고?"

하여튼 수령 앞에 서기만 하면 내 주장이 관철되지 못한다. 전라-충청-경상의 군세를 담당하러 지방에 내려간 내가 서울에 올라온 이유가 허사가 되어버렸다. 당초 예상했던 피해가 곱빼기 되어버린 것이다. 속으로 굉장히 침울해졌다.

이서현 동지는 자리에서 읏차,하고 일어서더니 기지개를 펴며 하품을 했다. 눈동자를 돌려 시계를 쳐다봤다. 시침은 오후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점심이 늦었고만, 일은 나중에 해야지."

그러더니 책상 앞으로 걸어나와 밖으로 향했다. 나는 그 등 뒤를 뒤따랐다. 그녀를 앞질러 문을 열어주었다. 가급적이면 그녀에게 최대한 점수를 많이 따 놓는 게 좋았다.

"오오, 감사."

손을 대충 들어 감사를 표하곤 이서현 동지가 빠른 걸음걸이로 멀어져갔다. 나는 멍하니 서서 한참이나 있었다. 수령을 만나는 건 언제나 극심한 스트레스를 동반한다.

그녀가 안 보일 즈음해서, 문을 닫을려는 때,

"야, 나랑같이 밥 먹을래?"

복도 멀찍이서 카랑카랑하고 명료한 목소리가 들렸다. 눈길을 돌려보니 밀짚바구니에 도시락을 바리바리 싸든 이서현 동지가 있었다. 그녀는 우선권이 있어 저렇게나 금방 배급을 받은 것이었다.

거절한다면 무슨일이 일어날지 몰랐으므로 멀리서도 보일만큼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녀는 재빠른 종종걸음으로 내게 달려와 다시 나를 방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간이형 탁상을 대충 방바닥에 놓더니 도시락을 꺼냈다. 방금 핀잔을 들은 참이어서 그것을 공손히 받았다.

 

"......솔직히 말해 봐, 나 원망했지?"

그녀는 품에서 맥주병을 꺼냈다. 그녀가 잔에 술을 따라 자신의 앞과 내 앞에 놓았다.

"......그럴 리가 있겠어요, 당의 무오류를 원망하다니......"

"무오류는 개뿔, 그런 거 미신이야."

"......"

얼굴을 애써 태연히 했으나 속으로는 미칠 지경이었다. 도대체 변덕이 몇 번째인가, 내가 조금의 틈이라도 보인다면 그것이 10년 20년 뒤엔 숙청의 대상이 될 것이다. 나는 내 눈앞의 여자가 시행하는 충성심 시험에 걸려들지 말아야 한다.

"아까 전에 내 명령, 나도 무리한 거 알아. 게릴라 놈들이 그렇게나 활개하고 있다는 것도 이미 보고받은 사실이야."

이서현 동지가 술을 한 잔 들이키곤, 거의 뻗어버리듯이 등을 죽 폈다. 끄으으,소리를 하고선 다시 날 바라보았다.

"그래도, 이런 명령 밖에 내릴 수 없는걸. 투쟁이 교리이고, 폭력이 교조이니깐......"

그렇게 말하는 서현의 눈에는 슬픔이 슬며시 번득였다.

"......!"

그 눈에서, 짐작되는 것이 있었다.

 

이서현 동지는, 자신의 모든 것을 비워내고 이념만을 다시 채워넣었다는 것.

 

그렇기에 그녀는 고독하고, 항상 혼자이며, 그렇기에 단련될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이 자신을 단련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그 운명은 필연이었다. 자신이 이 위치에 올라서려는 의지가 없었다만 어쩌다보니 6000만의 절대 정신이요 존엄이 되어버렸다. 그렇기에 그녀의 슬픔은 깊었다.

 

"이런 말 하면 체면에 안 맞는건데, 사석이니까 할게, 미안해."

"......"

아마도 그녀가 미안할 필요는 없겠지. 세상이 그녀를 위로 올린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역사적 소행을 하고 있다. 교리로서는 완벽하지만 개인으로서는 비합리적이다.

 

"크으으, 이제 일할 시간이네."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서현은 무릎을 털어내며 일어섰다. 코 끝이 찡한 게 보였다. 나도 맥주를 들이킨 참이라 살짝 얼굴이 벌개져 있었다.

"푸념 좀 해 봤어, 꼴 뵈기 싫었으면 속으로 욕해도 돼."

"아, 아니요...... 인간적이라고 생각하는데에......"

내가 엉거주춤 일어서서 다시 밖으로 나설 준비를 했다.

"후우, 인간적. 좋지이."

그러더니 바싹 몸을 붙이며 다가왔다. 너무도 갑작스러운 변화에 나는 당황했다.

"저, 저어......?"

 

그리고,

휘둥그레졌던 눈이 다시 감기기도 전, 동지의 입술과 내 입술이 살짝 부딪혔다. 하지만 거기까지, 1초도 안 되어 두 입술을 떨어졌다. 그래도 세상이 경천동지할 정도의 놀라움을 주기엔 충분했다.

"......!!!"

"가 봐."

어느새 등을 돌린 서현은 책상으로 향하고 있었다. 당황한 나는 천방지축 밖으로 튀쳐나왔다. 내가 문을 세게 닫고, 숨을 헐떡였다.

"으, 으으으으, 으으으?"

멍청한 표정을 하고는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포개어지던 그 감촉이 아직까지도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

 

......2일을 뒤척이고, 동료 정치장교에게 알아보니, 그 키스가 위대한 이서현 수령이 부하들을 옭아매는 방식이라는 것이었다. 결국, 그녀는 술에 취하면서도 정치적이었던 것이었다.

어쩐지 흥분감이 식고, 실망이 커지는 감이 있었지만,

 

그래도 그 기분좋은 감촉이 아직 입가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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