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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한대] 너 밖에 없어

by MonMon posted Apr 30, 2017 (23시 55분 30초) Replies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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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고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여자를 떠올려 보아라. 나의 경우, 기다란 생머리에 뽀얀 피부, 약간 창백한 입술을 가진 소녀이다.

이제 눈을 떠 보라. 아마 당신이 상상한 이상형은 연기처럼 사라졌을 것이다.

그런데 내 소녀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날 나는 부모님 손에 이끌려 정신병원을 찾아갔다. 나에게는 너무나도 생생한 그녀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전혀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환자 분께 심각한 환각 증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얘가 환각이라고요? 만질 수도 있는데?” 나는 시범 삼아 여자애의 머리카락을 만져 보았다. 그러자 그녀가 고개를 훽 돌리더니 내 손등을 찰싹 때렸다. “아야!” 고놈의 기집애. 만진다고 닳는 것도 아닌데.

어떤 환각인지 자세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 그게, 어떤 여자애가 보여요.”

아는 사람입니까?”

아니요.” 아는 사람일 리가. 내가 머릿속으로 상상한 인물인데.

아까 만질 수도 있다고 하셨지요? 어느 정도 생생한가요?”

잠시만요.” 나는 그녀의 볼을 잡아당겨 보았다. 너무 뽀얘서 한 번 만져보고 싶었다. 그런데 세상에, 비단을 문지르는 것 마냥 살결이 부드러웠다. 내가 넋을 잃고 한동안 여자애의 볼을 만지작거리자 소녀가 참다못해 내 손가락을 뒤로 꺾어 버렸다. 볼이 온통 새빨개져 있었다. 뭐야, 부끄러워하는 건가? 그 생각이 스쳐지나간 직후 여자애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내 뺨을 후려 갈겼다. , 그냥 뺨이 아파서 그런 거구나.

내가 얼얼한 뺨을 어루만지고 있자니 의사가 심가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방금 환각한테 뺨을 맞으신 겁니까?”

, ...” 나는 말을 아꼈다. 여자애한테 뺨 맞은 일이 자랑할 일은 아니지 않는가. 의사는 나를 가만히 보더니 전화기를 들어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지시했다.

그러고는 나와 부모님께 통보했다.

아드님께 정신분열증의 증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한동안 입원해서 집중 관리를 받아야만 합니다.”

나와 그녀는 그렇게 정신병원에 갇혔다.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내 방은 독방이었다. 아니, 얘도 있으니 독방이라 하기는 그렇겠다만. 나는 하루 종일 이어졌던 검사로 지친 몸을 침대를 향해 내던졌다. 세제냄새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새하얀 배게에 얼굴을 파묻으니 마비되었던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돌려 문편에 서 있는 여자애를 쳐다보았다. 한나절동안 익숙해질 만도 되었지만, 아직도 그녀를 볼 때마다 가슴이 벌렁벌렁 뛰었다. 소녀는 내가 설렐 수밖에 없는 얼굴을 가졌다. 여자친구 하나 없이 살아온 내게 나타난 완벽한 이상형이 하필이면 환각증세일 줄이야. 여자친구는 정녕 상상 속의 동물이란 말인가.

나는 문득 소녀한테 이름이 있나 궁금해졌다.

저기, 너 이름이 뭐야?”

그걸 이제 와서 물어보니?”

그러고 보니 이게 만나고 나서 처음 나눈 대화였다.

은정이야.”

그녀의 대답을 듣고 나는 그녀가 환각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은정이라니, 내 이름 정은을 그냥 뒤집은 거잖아. 이렇게 비참한 작명 센스는 내 뇌의 작품인 게 틀림없었다.

그러게. 누구 머리 덕분인지.”

너 아까부터 내 생각 읽는 것 같다?”

내가 누구 머리에서 나왔는데!”

하긴, 맞는 말이었다.

, 거기다. 아까는 막, , 만져대고! 아팠단 말이야!”

지금 볼 잡아당겼던 이야기 하는 거지? 그나저나 참 부드럽기는 했다.

입으로 말해! 지금 귀찮아서 생각으로 대답하는 거지!”

아니, 근데 이거 남이 보면 나 혼자서 허공에다 중얼대는 거잖아...” 새삼스레 발견한 부끄러운 사실에 등허리가 수치심으로 따끔거렸다.

허공에다 문질대고 뺨 얻어맞을 때는 언제고?”

그러고 보니 부모님과 의사 앞에서 도대체 무슨 꼴불견을 보여준 것일까. 얼굴이 화끈했다.

? 근데 환각도 아픈 걸 느껴?”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내가 의사냐? 모르니까 묻지!”

그럼 환각인 내가 알 리가 없잖아!”

맞는 말이었다. 할 말이 없어진 나는 다시 침대 위로 드러누워 그녀의 얼굴을 차분히 감상했다. 보면 볼수록 내 의상형인 얼굴이었다. , 얼굴은 이상형이라도 성격은 전혀 아니었지만. 내가 저렇게 화만 내는 여자를 좋아할 리가 없잖아.

, 누구 때문에 화를 내는데! 아까부터 아무 말 없이 자, 자꾸, , , 만져대고!”

그러고 보니 아까 검사할 적에 간호사들의 지시에 따라 은정의 몸 이곳저곳을 만지긴 했었다. ? 그럼 내가 쓰레기였네?

고개를 들어 은정을 쳐다보니 그녀는 사과 받을 준비가 된 얼굴로 팔짱 낀 채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의외로 사랑스러운 그 모습에 나의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미안. 내가 잘못했다.”

, 왜 웃는 건데!”

네가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내 생각이 분명히 들렸을 터이지만 그녀는 못들은 체 고개를 돌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이번만 봐주는 거니까 그렇게 알아둬! 다음번엔 국물도 없을 줄 알아!”

이렇게 나와 그녀의 정신병원 생활이 시작되었다.

 

정신분열증. 요즘은 조현병이라고 부르는 이 정신질환은 환각과 망상 증세를 동원하며, 환자의 인간관계와 거기 속한 사람들을 피폐하게 만들기로 유명하다. 많은 환자들이 돌발행동을 저지를 위험성을 보유하며, 실제로 몇몇 경우는 살인과 자살로 이어지기도 한다. 내가 걸린 정신질환은 이렇게나 위험할 터인데....

맛있냐?”

은정은 말없이 젓가락으로 참치 대뱃살 초밥을 입으로 가져갔다. 나는 그녀를 째려보며 맛없어 보이는 병원식을 숟가락으로 휘휘 저었다.

우리가 일주일동안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알아낸 사실이 몇 가지 있다. 첫째로, 은정은 생명체를 제외한 대부분의 물체를 환각으로 구현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 여기에는 그녀가 지금 먹고 있는 초밥도 포함된다. 둘째로, 그녀가 만들어낸 물체는 나와 그녀에 한해 현실의 물체와 구별이 불가능하다는 점. 다시 말해 내가 지금 저 초밥을 먹으면 생선의 풍미와 쌀, 고추냉이의 조화를 온전히 느끼며 배부르게 식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환각으로 된 음식을 먹으면 나는 배부른 채로 굶어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야 내가 아무리 초밥을 먹었다고 착각한들 실제 들어간 영양소는 전혀 없으니 당연한 일이기는 하다. 물론 이건 어제 쓰러지고 영양제를 주사 받고 난 뒤에야 깨달았지만.

정말 얄밉다 너.”

무슨 말인지.” 은정이 입에 있던 초밥을 삼키고 대답했다. “모르겠는데?”

나는 분통을 터뜨리며 흰죽을 한 번에 들이켰다. 위장까지 퍼지는 싱거움에 메스꺼움이 위로 올라왔다. 나는 간장을 퍼먹으며 속을 달랬다.

고개를 들어보니 그녀가 내게 아이스크림을 내밀고 있었다. “단짠단짠?”

단짠단짠.” 나는 아이스크림을 받아 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딸기맛이었다. 한입 베어 무니 달콤한 행복이 온 몸에 퍼졌다.

있잖아.”

안 돼.”

너 대답 너무 빠른 거 아니야?”

너무 뻔하잖아그녀가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또 나가서 같이 살자고 하려고 했지?”

나는 말없이 그녀의 눈을 쳐다보았다. 의사의 처방은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그녀의 존재가 사라져 가는 것이 날이 갈수록 크게 느껴졌다. 이대로 가다가는 그녀가 사라져 버리고 말리라.

그럼 평생 공짜밥 먹으면서 살려고 했어? 양심이-”

그거 때문이 아니란 거 알잖아.”

나는 똑바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나 너 좋아해.”

마음이 다 읽히는 와중에 에둘러 표현할 필요 따윈 없었다.

네 얼굴, 네 성격, 네 모든 게 너무 좋아.”

그녀는 나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나의 마음은 전부 읽으면서, 나한테는 그 마음의 한조각도 보여주지 않는 점이 너무나도 얄미웠다. 그 얄미움조차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사랑스러웠지만.

연기든 뭐든 해서, 일단 같이 나가자, ? 대답은 나중에 들어도 좋으니까.”

은정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입 다문 채 안절부절 못하는 그 모습은 마치 생각을 정리하는 듯이, 감정을 가다듬는 듯이 보였다.

, 무슨 말 한 건지 알고 있는 거야?”

알다마다.

나랑 같이 살면 너 이제 결혼도 못해.”

어차피 이제 너 이외의 여자 따위는 눈에도 들어오지 않게 돼버렸어.

사람들이 뒤에서 수군댈 거야. 미친놈이라고. 혼자 살면서 유령한테 홀려 지낸다고. 평생 정상적인 생활은 절대 못하게 될 거야.”

그딴 건 다 필요 없어! 네가 없는 것보다는 몇 천배는 나아!”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엔 물기가 서려 있었다.

네가 그런 취급받는 건, 내가 못 참겠어...”

직후 나와 그녀 사이에서 커다란 벽이 솟아났고, 소녀의 모습은 그 뒤에 가려 사라졌다. 이 또한 환각으로 만들어낸 것이리라. 이게 진짜 벽이라면 나 따위는 도저히 넘어갈 수가 없겠지만, 이것은 가짜, 환상일 뿐이다. 실제 방 안에는 공기만 떠다니고 있겠지.

나는 숨을 가다듬고 벽을 향해 뛰어들었다. 저 너머에는 은정이 있을 것이다, 그리 믿고서.

벽을 향해 뛰어든 직후, 머리가 깨지는 것과 같은 통증과 함께 몸이 뒤로 넘어졌다.

산산조각이 나는 정신의 끄트머리를 놓아버리기 바로 전에, 그녀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리고 나는 정신을 잃었다.

 

내가 다시 깨어난 것은 그로부터 사흘이 지난 뒤였다. 의사의 말에 따르면 나는 밥을 먹던 도중 갑자기 정신착란을 일으켜 병원 벽을 향해 뛰어들었고, 머리를 들이받아 그대로 자리에 쓰러진 모양이었다.

사흘을 기절한 상태로 보내고 깨어나니, 나의 정신분열 증세는 전부 사라져 있었다. 의사 또한 이렇게 깔끔하게 조현병이 치료된 경우는 전무하다고 놀랐으나, 애초에 발병부터가 느닷없었다는 점에서 그러려니하는 수준에서 넘어가는 것 같았다.

병상에 누운 채로 나는 한동안 은정의 모습을 찾아 복도와 창밖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모습이 나타나는 일은 없었고, 나는 퇴원해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꽤 오랜 세월이 지난 요즘, 친구들과 부모님으로부터 미팅이나 맞선 얘기가 나오는 것이 늘었다. 물론 은정을 만나고 난 나에게는 누구도 기대에 차지를 않았다.

그때 만약 내가 벽을 향해 뛰어들지 않았더라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정말로 연기를 해서 병원을 탈출하려고 하지는 않았을까? 그러고는 점점 은정이 환각일 리가 없다는 집념에 사로잡혀 나와 그녀를 병실에 처넣은 의사를 먼저 죽이러 찾아갔을 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은정이 참 사람 목숨 여럿 살린 셈이었다.

나는 도저히 그녀를 잊지 못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제 이 세상에서 사라졌지만 나의 글귀 속에서는 자유로이 살아가고 있다.

내가 그녀를 작품에 등장시킬 때마다 잊지 않고 집어넣는 문구가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너 밖에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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