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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한대] 시인과 농부

by Bugstrin posted May 08, 2017 (20시 24분 05초) Replies 1 Letters cou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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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죽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하지만, 적어도 나한테는 그 말이 와닿지 않는다. 지금은 몇 번째일까, 백 번은 넘겼을지 생각하던 와중, 꿈틀거리는 감각이 흩어진 신체를 통해 전해져온다.


'합쳐진다."


생각을 하던 중 혀가 붙어 말이 나왔다. 곧이어 상체, 흩어진 내장들, 심장, 폐가 날아왔고, 나머지 잡다한 부위들이 붙어 꿈틀거린다. 요란한 소리와 대비되는 잔잔한 고통이 지나간 후, 나는 일어나 몸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바닥에 내팽겨진 쟁기를 잡았다.


"원, 이런 능력을 가지고도 농부나 해야 하다니. 재능 낭비가 아닐까?"


언제나 하는 헛소리를 내뱉고는, 이내 그럴 리 없다는 표정을 내었다. 애당초 농사나 짓던 내가 불사능력을 가지고 용사라고 나서봐야 마물들에게 평생 고통받을 것이 뻔하고, 모험이 끝난 뒤에 이 능력을 탐내는 왕국에 의해 여러 실험을 당할 것이다. 망상이 아니냐고 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어디까지나 안전하게 사는 것이 좋은 것이다. 사실 지금도 안전한 삶은 아니지만서도.


"그럼, 다시 밭을 갈아볼까?"


"그건 안 되겠는데요, 아저씨?"


갑작스럽게 들려온 낯선 목소리에 뒤를 바라보았다. 얼굴을 드러낸 로브에 손에 쥔 현악기. 음유시인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굳이 이런 곳까지 올 사람들은 아니다.


"도시의 시인들인가. 하, 어린 아가씨가 이런 험한 곳까진 무슨 일이지?"


"왜냐면 지금 전 길을 잃었거든요! 아저씨는 이 귀여운 저를 하루 재워줄 의무가 있어요!"


...아무래도 세상 물정 모르는 아가씨였나보다. 나는 도구를 내려놓고 거친 발걸음으로 음유시인 앞에 섰다. 내려다보니 머리 한개 반 정도 차이가 났다. 아무래도 좋은 말로 달래서 마을로 내려보내던가 해야 할 것 같다.


"이봐, 꼬마 아가씨가 귀여운진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부양해야 할 의무는 없는 것 같은데?"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꼬마는 가방을 뒤지더니, 이내 양피지를 꺼내 내 앞에서 자랑스럽게 꺼내들었다.


"이거면 되겠죠, 농부?"




..  ....   ..... .... .   ......



"굳이 이걸 꺼내게 해야해요? 인심 좋게 그냥 받아줄 수 도 있잖아요?"


"...미안하군."


꼬마가 품에서 꺼낸 양피지는 음유시인 길드에서 발급한 보증서였다. 황금빛 겉테두리와 독수리 문양은 길드마스터가 특별히 발급한 것이라는 설명과 함께 여자는 막무가내로 자신을 받아들여달라고 했다. 마땅히 거절할 이유도 없었기에 그녀를 집으로 안내하였다.


"그나저나 혼자 사는것 치고 좋은 집이네! 우와, 이건 총 아니야? 농사꾼이 무슨 총?"


"...멧돼지나 이리 등 들짐승들을 쫓아내기 위한 거다. 가끔 사냥도 하고."


내키진 않았지만 성실히 답해주었다. 보증서에는 특수한 마법이 새겨져있어, 꺼낸 사람이 만족한 등급에 따라 돈을 차별지급한다고 하였다. 나쁘게 보여 돈을 덜 받고 싶지는 않다.


"흐응? 근데 이 총, 마법이 새겨져 있지않아? 어디... 위력 증폭, 사거리 증가, 마물퇴치까지? 이거 비싼거잖아!"


"...마법사, 인가?"


"아니, 그런거 아닌걸? 나는 그냥 시인이야. 노래에 마력을 실어서 활력을 돋우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거잖아? 그냥 흐름이 보인다고 말하면 되려나?"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하는군. 자기과시인가?"


"그러는 아저씨도 대단한걸! 고기반죽이 되어도 다시 살아나는 농사꾼이라니, 흥흥... 좋은 노랫거리가 되겠는데?"


시인의 말이 끝나자마자 나는 총을 들어 그녀에게 겨누었다. 실수였다. 재생의 후유증으로 판단이 온전하지 못했다. 그녀 같은 시인들에게 들킨다면 조용한 삶은 금방 끝이 날 것이다. 보증서도 무엇도 필요없다. 이 삶이 파탄난다면....


"그만둬, 아저씨. 말 안할테니까."


끼릭.


"그 말을, 어떻게 믿지?"


방아쇠에 올려진 손가락에 한층 힘을 더한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쏠 참이다.


"...콰르토 마니우스 데르플람. 여기에 맹세를."


시인은 대답 대신 조용히 말을 읊조렸다. 방아쇠의 손가락을 누르려 했으나 움직이지 않았다. 의식만이 남은 채 공간이 멈춘 느낌이다.


"나, 시인 엘프람이 위대한 마력 앞에 약속하노니, 앞의 농부가 죽음의 문턱에서 다시 돌아왔다는 것을 발설하지 않겠노라. 발설의 댓가를 두 눈으로 치르노라."


신비한 느낌이 끝난 후에, 여자는 털썩 주저앉았다. 마법을 모르는 나도 방금 계약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늘 처음 본 나를 위해 위험할수도 있는 계약을 내뱉은 것을 보고 기가 찼다.


"이러면 믿을 수 있지?"


"......"


"침묵은 곧 긍정이지! 우선 졸리니까 잘래."


엘프람은 헤실헤실 웃더니 털썩 쓰러졌다. 그녀를 업고는 침대로 옮긴 후, 나는 책상에 앉아 양초를 켰다. 그리고는 맥주를 꺼내 방금의 어처구니 없는 사태를 정리하고자 했다.


... ...  ..  ....  .....  ... 



멀리서 닭이 우는 소리가 들린다. 눈을 떠 보니 햇살이 집을 살며시 들추고 있다. 눈을 비비고 책상을 보니 종이 몇 장이 놓여있었다.


"뭐지..?"


종이들을 집었다. 맨 위는 어제의 보증서다. 찬란하게 빛나는 독수리 위에 계약완료라고 적혀져 있었고, 음유시인 길드에 가져다 주면 보상을 해 준다고 적혀있다. 다음장은 편지다. 꽤나 악필로 적혀 있어서 읽는 데 시간이 꽤 걸렸다.


"친애하는 농부 씨, 마력 잘 회복하고 갑니다... 맘족할만한 잠자리였습니다. 계약서에 매우 만족이라고 평가했으니 두둑히 돈을 받을거에요. 참, 아침식사 미리 먹고갑니다. 엘프람."


알 수 없는 아가씨다. 그녀에 대한 생각을 하다가, 이내 접어두었다. 오늘은 오늘의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그럼, 다시 밭으로 가야지."


오늘도 나는 악마를 만나러간다.



.... ... .   ....   ....



"계약을 이행하러 왔다."


"필멸자 주제에 꾸준하군. 도망가도 금새 붙잡히지만 말이지."


눈 앞의 악마는 내게 불사를 준 근원이다. 언제었던가, 술을 마시고 한창 취했을 무렵 멋모르고 말을 뱉었다가 이렇게 되었지.


"몇 번째지?"


"어디...축하한다. 오늘로 백 번째 죽음이군. 이제 265번 더 다른 방법으로 죽음을 맞이해야하는군."


악마는 불사를 주는 대신, 내게 1년동안 다른 모습의 죽음을 보여달라고 했다. 계약을 듣고 말도 안된다고 항변하자 악마는 내 감각을 거의 차단해버렸다. 통증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이러한 현실에서 도망가보기도 했지만, 다음 날 아침 나는 고통을 생생하게 느낀 채 끔찍하게 죽었다.


"오늘의 죽음을 말하라."


"어디...화형은 어때?"


"그건 27일째 이미 했다."


"...물 속에서 질식사."


"52일째."


"압사는?"


"63일째다."


"그럼 복상사는 어때?"


"그건 안했...너는 누구냐?"


고개를 뒤로 돌려보니, 간 줄 알았던 엘프람이 있었다. 어제와 똑같이 악기를 쥔 모습이었다.


"너, 크라운아... 이 장소를 누구에게 발설했느냐?"


"아니...나는..."


"널 토벌하러 온거지, 악마야! 나는 아니고 이 농부가 할거지만."


뜬금없는 선언에 나와 악마는 잠시 침묵하더니, 이내 각자 큰 소리를 내었다. 악마는 웃음을, 나는 당혹감을.


"크하하하... 이런 농부가 날 죽인다고? 가능할 리 없지. 지금도 이렇게 손바닥만 쳐도 짜부러질 것이다. 아, 이건 85일째 했다."


"그건 무슨! 지금 저 말을 듣고도 내가 토벌할 거라는 말이 나와?"


"물론 나오지."


엘트람은 총을 나에게 던지더니, 푸른 마력을 휘감으며 노래하기 시작했다.


"난 시인이니까. 이야기를 들려줘, 농부."


머릿속으로는 거절하지만, 푸른 대기는 내 마음을 고동치게 만든다. 나는 손에 쥔 총을 굳게 잡고, 악마에게 한 방 먹여주겠다고 생각했다.


"재미있군. 와라."


악마는 크게 손짓했고, 나는 그것을 신호로 방아쇠를 당겼다.


탕 ------




..... ....  ...    .....    ..




"허억...허억..."


악마는 죽었다. 아니면 거의 죽어가던가. 그 증거로 반파된 내 몸이 재생되지 않고 있다. 흐린 시야 가운데, 놈의 입이 달싹거리는 것을 보았다.


"대단한 시인이군. 일개 농부가 그렇게 강해질 줄은 몰랐다."


"아니, 이건 농부가 원래 가지고 있던 힘이야. 나는 그걸 깨워줄 뿐이지."


"계약으로 영혼 좀 벌어보려 했더니, 실패했군..."


마지막 말을 마치고는 악마는 한 줌의 재로 돌아갔다. 어느새 해는 산을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대단하네, 아저씨!"


"너, 치료도 가능한가?"


"물론."


녹색빛의 향기가 난다. 몸에 새 살이 돋아나더니 어느새 내 몸에는 생채기 하나도 남지 않았다.


"왜 날 도운거지?"


"말했잖아. 마나가 보인다고. 악마에게 잡힌 영혼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는 없잖아? 자, 아무튼 도와줬으니, 너도 나를 도와줘."


"어떻게 말이지?"


"우선 따라와. 우리 길드로."


시인과 농부는 서로를 보고 멋쩍게 웃더니, 석양을 뒤로 한 채 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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