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한대

[라한대] 안녕, 인생절단기

by Pip posted May 08, 2017 (23시 52분 48초) Replies 0 Letters cou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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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업 참여 동의

ㄹㅇ루다가 한시간 오십분동안 의식의 흐름을 겪었다

시발

진짜 존나 급하게 쓰니까 양 자체는 존나게 많이 나오네 ㄷㄷ

앞으로 이렇게 좀 써봐야겠다.

-----------

너네는 별로 인내심이 있는 놈들같아 보이진 않으니까, 빨리 정리하겠다.
 
나는 지금 대저택의 한가운데에 있다. 다른 건 모르겠다. 서재였다. 뒷집 영감님을 기어코 골탕먹이고야 말겠다-라는 거창한 계획을 가지고 들어왔으면 좀 으스댈 수라도 있겠는데, 아니다. 공 주우러 왔다. 흔한 사건이지?
 
문제는 이 공이 문제였다. 공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이거 비싼거거든. 진짜 가죽으로 된 야구공이니까.
 
집 안에서 위아래로 툭툭 건드릴때는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이 놈이 요 앞 공터에 등판할 때가 문제였다. 분명히 나는 북쪽을 보고 던진다. 저 앞에 방망이를 들고 으스대는 놈의 장딴지를 향해서. 요놈. 한번 조져봐라. 하면서. 그리고 던진다. 피융!
 
쨍그랑!
 
이 개 같은 놈의 공의 문제는 그거였다. 난 북쪽을 향해 던지는 데 남쪽에 있는 저택의 창문을 깨먹는다는 거. 왜인지는 몰랐다. 별명도 있었다. ‘등골 절단기’. 내가 공을 한 번 던지면 여지없이 뒷집 창문이 깨지고, 뒷집 영감님이 문앞에서 쾅쾅거리고, 우리 엄마의 등골 하나가 쑥 빠져나간다. 여간 더러운 공이 아니다.
 
그런데도 난 이 공을 던졌다. 이 공이 없었으면 애들이 안껴줬으니까. 애들이 노는 공터에 나도 비렁비렁 걸어갈 즈음에 저 너머에서 소리치는 게 들렸다. ‘야아. 느그 엄마 등골 안녕하시냐-’ 그러면 나는 또 거기에 분이 나서, 왜인지 모르게 그 공을 들고 거기로 달려나가는 것이다. 애들이 날 골탕먹이고 싶어서 그런다는 것 쯤은 나도 안다. 애들은 날 진짜로 싫어하니까. 그래도 나는 달려나간다. 그 날은 우리 엄마가 사고 싶어 하던 신발이 허공으로 푹. 하고 사라지는 날이다.
 
오늘도 그랬다.
 
조금 다른 게 있었다면, 이번에는 내 실수였다는 거. 각설하고 말하면 나는 공을 ‘정확히 남쪽의 저택을 향해’ 던졌다. 중간 과정은 묻지 말았으면 한다. 되게 쪽팔리는 얘기니까. 어쨌거나, 그래서 지금 나는 얼굴이 반쯤 허얘져가지구 이 저택을 헤집고 있다. 이번엔 진짜 내 잘못이거든. 지금까지는 ‘아니 저 공이 이상해가지구’ 따위 이야기라도 할 수 있었다만, 이번에는 진짜 내 잘못이었다. 난 그게 정말 싫었다.
 
그래서 저택의 깨진 창문을 헤집고 공을 찾고 있다. 아니, 이 개같은 놈의 공은 분명히 벽에 맞아 떨어졌을 건데 어디있는거야?
 
아마도 부엌인 곳과 아마도 거실인 곳을 뒤졌지만, 공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눈에 쌍심지가 켜졌다. 다행히 영감님은 집에 없는 것 같다.
 
나는 서재의 문을 열었다.
 
뒷집 영감은 참 이상한 책을 많이 보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여기저기에 참 일관성 없는 책들이 꼽혀있었다. ‘現代 哲學의 深化와 知識人의 姿勢’, ‘골상학 개론’, ‘기계 유닛의 구조학적 발상과 그 실현에 관하여’, ‘날 읽어라, 꼬마야’, ‘愛馬婦人의 人生과 性慾’...
 
어?
 
뭔가 이상한 책이 있었던 거 같았다. 다시 눈을 돌렸다. ‘기계 유닛의 구조학적 발상과 그 실현에 관하여’, ‘이상한 책 아닌데’, ‘愛馬婦人의 人生과 性慾’...
 
뭐야. 이거. 싶어서 책을 책장에서 뽑았다. 공은 머릿속에 여전히 머물고 있었지만, 일단 신기한 건 신기한 거였으니까. 책의 등에는 아주 멋드러진, 서예체로 그런 글씨가 써있었다. ‘이상한 책 아니라고.’ 방금까지 다른 이름이었던 거 같기도 한데.
 
책의 표지에는 등에 그려진 것처럼 아주 단아한 꽃 그림이 수놓아져 있었다. 그리고 표지에는 단 한마디가 적혀있었다.
 
공 찾고 싶지?
 
나는 책을 폈다. 한 페이지만 보고 싶었다. 뭔가 신기해서.
 
아니 말을 좀 하던가 해라 좀
 
응.
 
나는 입밖으로 그 소리를 굳이 꺼냈다. 바보가 된 기분이다. 다음 페이지에는 또 다른 문장이 적혀있었다.
 
그럼 벽난로 쪽으로 와봐. 책 닫지 말고.
 
나는 고개를 들었다. 과연, 한눈에 ‘서재’라는 말을 할 수 있는 방이라면 꼭 있을 법한 게 저 너머 벽에 박혀있었다. 벽난로였다. 불은 타고 있지 않았다. 나는 벽난로쪽으로 걸어가, 그 앞에 섰다. 사진 몇 장이 있었지만 별로 영감님 어릴 적을 보고 싶진 않았기에 책에 다시 눈을 돌렸다.
 
이제 그 옆에 양초 꼭지 있지? 그거 돌려봐.
 
공이 왜 거깄어?
 
거기 있다니까.
 
아니 저 앞에 창문에 던졌는데 공이 여기 있는 것도 좀 이상하지 않아?
 
안 이상해.
 
됐어. 없는 셈 칠래.
 
이건 거짓말이었다. 뭐라고 해야하나. 어느새 나는 ‘책과 대화하고 있었고’, 더 중요한 것은 그게 전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별로 의문을 제기하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재미는 있었다. 그걸 깨달은 순간 나는 꼭 해보고 싶은 일을 했다. 놀려먹기.
 
아 진짜 좀
 
한번만 믿어봐라
 
아니 야 진짜로 가냐
 
너 그 문으로 가면 가만 안놔둔다
 
가만 안놔두면 어떡할건데?
 
몇 장의 페이지가 공백이었다.
 
영감님 부를거야
 
넵. 죄송합니다.
 
이 동네 으뜸가는 마법사라는 영감님한테 걸리면 우리 엄마 등골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나는 양초꽂이를 잡아끌었다. 더러운 책. 벽난로가 벽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소용돌이처럼. 슈우웅. 그 안에 승강기가 하나 나타났다. 승강기를 한번 바라본 나는 책의 다음 장을 넘겼다.
 
드럽게 꾸물거리네 진짜
 
죄송합니다. 금방 갑니다요.
 
승강기에는 단추가 참 많았다. 하지만 딱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공이 있는 곳으로 가는 단추가 뭔지는. 버튼들 맨 아래쪽에는 ‘공 찾으러 오는 사람만 누를 것’ 이라는 단추가 있었다. 나는 책에 대고 말했다. 이젠 좀 자연스러워졌다.
 
니가 한 거야?
 
말하는 꼬라지 봐라?
 
니가 한 거에요?
 
네. 그니까 빨리 타세요.
 
나는 버튼을 눌렀다. 승강기는 아주 잠깐 덜컹이다 기어내려가기 시작했다.
 
(null)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공을 찾긴 찾았다.
 
얼마나 아래로 내려갔는지 모르지만, 어쨌거나 공은 있었다. 지하실에. 조금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이 놈의 등골 절단기가 드디어 미쳤나?
 
간단한 문제가 있었다면, 그건 그 공의 위치였다.
 
정말 위험해보이는, 지하실 한 가운데에 딱 하나 켜진 조명 아래에 떨어져 있었으니까. 아무리 나라도 이건 좀 위험해보였다. 가운데에 뭐 함정이라도 설치되어있는 거 아니야? 라는 생각이 아주 잠깐 들긴 했지만, 뭐. 괜찮을 것 같았다. 뒷집 영감님이 마법사라고 해도 그럭저럭 준법정신은 있는 사람이거든. 아무것도 안보이기도 했다. 나는 조명 근처로 종종걸음을 쳤다. 그리고 조명에 책을 뻗었다. 책은 뭐라고 하려나?
 
이게 니 공 맞지?
 
맞긴 한데, 이게 왜 여기까지 왔대요?
 
그게 뭔 상관이야. 얼른 집어들어.
 
그렇긴 하네요.
 
나는 책을 덮고 공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밝아졌다. 내 눈 앞에는 의자 하나가 놓여있었다. 조금 이상한 의자였다. 뭔지 모를 뼈들이 드글드글하게 붙어있었다. 거기엔 로브를 쓴 누군가가 앉아있다. 아. 그쪽이 책이십니까. 싶었다. 그래서 당연하게 물었다.
 
그 쪽이 책이에요?
 
그렇다-
 
근엄한 억양의, 긍정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목소리가 너무 애 같은데?
 
로브 벗어봐요.
 
싫다-
 
뭐, 알았어요. 갈게요.
 
기다려봐라-
 
뭐가 이렇게 싱거워? 나는 뒤를 돌려다가, 다시 의자를 바라보았다. 넘어간 로브의 후드에는, 여자아이의 얼굴이 있었다. 어렸다. 나보다 한 두 살은 어려보이는 것 같은데.
 
뭐야.
 
뭐가 뭐냐-
 
꼬맹이네? 너도 마법사야?
 
꼬맹이가 아니다-
 
왜 책에서는 그렇게 깐죽거렸으면서 엄격하고 근엄하실까?
 
벌을 받았다- 이곳에 갖혔다- 지금은 이렇게밖에 말하지 못한다-
 
누구한테? 영감님?
 
그렇다-
 
영감님 손녀인가보다. 그런데 영감님도 참 징글징글하게 악취미다 싶다. 이렇게 어린 애를 지하실에 가둬?
 
불쌍하게 됐네. 이제 가도 되지? 공은 고맙고.
 
기다려라-
 
왜.
 
기왕 온 김에- 나의 저주를 풀어주지 않겠느뇨-
 
혼자는 못풀어? 아까 책으로는 말 잘했잖아. 마법을 못쓰는 건 아닐 건데.
 
아이는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나는 그 아이를 바라보았다. 음. 지루한데.
 
혼자는 못푼다- 벌로써 내려진 것이기 때문에-
 
그래? 그러면 풀어줘?
 
부탁한다-
 
음. 어. 그러면. 음.
 
나는 머리를 조금 굴렸다. 뭐라고 해야하나. 이해타산적이라고 하면 할 말은 없는데 나름 저 쪽은 나한테 부탁하는 입장이잖아. 애초에 나도 위험을 무릅쓴 거라고.
 
영감님한테 내가 네 친구라고 말해줘. 그리고, 또 뭐야. 이거 공도 네가 한거라고 이야기하고.
 
알았다-
 
맞다. 하나 더.
 
뭔가-
 
풀려나서 제대로 이야기할 수 있으면 말이야. 오빠라고 부르고 좀 살갑게 좀 굴어. 책에서 하는 짓 보니까 아주 버릇이 없어. 내가 너보다 다섯 살은 많아. 임마.
 
다섯 살까진 아니었다.
 
진심인가-
 
어. 진심인데.
 
신기하군. 그런 말까지 할 수 있다니-
 
그래서 한다고 만다고?
 
한다- 대신에- 나와 그대의 약속은 절대적이다- 그러므로- 절대 깨지지 않는다-
 
어. 그래. 알았고. 이제 어떻게 하면 되는데.
 
나를 초대해라-
 
응?
 
그대의 세계에- 나를 초대해라-
 
뭐.. 이리로 오시겠습니까? 나의 세계에? 이렇게?
 
그렇다- 대신에 마음을 담아라-
 
열 다섯 쯤 되어보이는 꼬마가 뭐 못하는 말이 없어. 나는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아주 근엄한 소리로 입을 열었다. 누가 보면 총사가 뉘집 영애한테 구애하는 것 같겠어.
 
오오. 나의 그대. 내가 말을 건네는 그대여. 지금 나의 세계에 발을 담구어, 나와 함께 즐거운 길을 걷지 않으시겠습니까아.
 
마음은 하나도 안 담겼고, 사실 대사도 교회에서 배운 이야기였다. 그런데 저 아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나보다.
 
빛이 나고 있으니까.
 
갑자기 눈 앞이 환해졌다. 빛에 눈이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대. 하찮은 미물아. 나 하스파탐이 그대와 약속을 매개로 그대의 세계에 발을 담구어, 이 세계에 나의 꽃들을 피어보이겠노라- 그러므로, 그대는 고개를 들 지어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눈 앞에 있는 형상을 보았다. 알고보니까 그 빛은 하얀 빛은 아니었다. 아주 빨간 빛이었다. 지옥불인가, 하는 그런 것처럼. 그 형상을 내가 알아볼 수는 없었다. 구더기 비슷한 게 기어다니는 것 같기도 하고, 염소 뿔 같은 게 막 박혀있는 것 같기도 하고, 사람 해골같은게 주렁주렁 달려있는 거 같기도 하고. 그런데 별로 무섭진 않았다. 그냥 좀 이상하게 생긴, 이족보행 도마뱀같다고 생각했다.
 
나는 눈을 감았다. 뭔가 좀 피곤했다.
 
네네. 알았어요.
 
나는 대강 말을 이었다. 졸렸다.
 
(null)
 
여기저기 녹슨 자욱이 보인다. 얼마 전에 본 곳인데. 맞다. 승강기 안이었다. 나는 좁은 승강기 안에 새우처럼 쪼그려 누워있었다. 손에 익숙한 감각이 느껴졌다. 앗. 돌아왔구나. 등골 절단기!
 
일어났냐.
 
그 아이였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나보다 머리통 하나 하고도 반은 더 작다. 다른 생각은 딱히 들지 않았다. 그냥, 공을 들지 않은 손을 가볍게 들어서, 그 아이의 정수리를 찍었다. 꽁.
 
아. 뭐냐!
 
말 똑바로 안해?
 
뭐가!
 
너 막 절대적인 약속이라며 말 막한다?
 
무슨 약속 말이냐?
 
오빠라고 부르고, 살갑게 대하고, 영감님한테 이거 니가 한 거라고 하고, 뭐 그런거.
 
그녀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뭐냐. 그 예상 밖이라는 표정은?
 
으그긋. 다 기억하네.
 
내가 한 말인데 기억 못하겠냐?
 
대개는 기억 못하거든. 나랑 한 약속은.
 
난 아닌데.
 
뭐. 알았다. 그러면.. 음.
 
아주 한참이 지났다. 끼릭거리는 승강기 소리가 거의 멎어갈 만큼. 문이 열렸다. 서재가 눈이 들어왔다.
 
오빠. 고마워요.
 
갑자기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나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빙글거리면서 웃는 얼굴에 눈웃음이 가득 져있다. 뭐야. 이 이상한 느낌 뭔데. 살짝 귀여운 것 같기도 하고.
 
그래야지.
 
나는 서재로 들어섰다. 뭐라고 해야하나. 꽤나 괜찮은 하루였다. 예쁘장한 여자아이를 만나서, 영감님이 그렇게 욕만 먹을만한 사람은 아니란 것을 깨달았고(또 생각해보니까 그 아이를 지하실에 가뒀다. 역시 영감님이 다 그렇지.) 공도 찾았다. 저 아이가 말만 잘해주면, 나는 이제 무죄였다. 우후!
 
적어도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서재를 나가는 문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영감님과 눈이 마주쳤다.
 
아니 영감님 그게 아니라
 
영감님은 갑자기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오른 손을 들었다. 지팡이가 들려있었다. 그리고 그 지팡이의 끝은-
 
이 아이를 향하고 있었다.
 
어.. 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영감님이 진짜 화가 많이 났나보다.
 
네.. 네 이 놈...!
 
저.. 죄송합니..
 
기어이.. 봉인을 깨고 나왔단 말이냐..!
 
응? 나는 그녀와 영감님을 돌아보았다. 영감님은 얼굴이 시퍼래져서 손을 떨고 있고, 이 여자애는 싱글거리고 있고. 어떻게 되가는거야?
 
응. 나왔어.
 
돌아가라..! 이 세계는 그대를 담기에는..!
 
날 처음에 이 세계로 부른 것도 당신이야. 그렇지 않아?
 
영감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아주 작은 말소리가 들렸다. 그게 뭔지는 알고 있었다. 축제때 이따금씩 마법사들이 하던 것이었으니까.
 
주문을 영창하는 소리였다.
 
아니 영감님..!
 
영감님이 사라졌다. 나는 고개를 돌려 여자아이를 바라보았다. 그녀도 나를 바라본다. 아니, 나를 바라보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녀의 시선이 향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영감님이 서있었다. 내 어깨를 꼭 붙잡고.
 
눈 앞이 확 변했다.
 
처음 보는 방이었다.
 
자네는 안전하네.
 
영감님이었다. 얼마나 혼날지 몰라 일단 무릎을 꿇었다. 죽을 만큼 때리려나.
 
아니, 안전하지 않군. 단단히 홀렸으니까 말이야.
 
예? 뭐가 홀려요?
 
그런데, 또 이상해. 오히려 그 기운을 자네의 것으로 삼고 있으니까 말이야.
 
영감님은 내 위아래를 훑었다. 조금 부담스럽다.
 
그래. 그것이군! 그것 때문이었어!
 
영감님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는 등골 절단기가 있었다. 내 손에 들린 채로.
 
그것의 기운을 담은 물건을 오래 만져서 그것의 기운을 흡수했어! 그리고 그것에 홀렸지만, 동시에 그것에 저항하고 있어! 참 다행이군.
 
아니, 영감님. 지금 무슨 말씀이세요.
 
자네는 지금 건드려선 안될 존재를 건드린거야. 그래도 자네를 탓하지는 않겠어. 그 기운을 막지 못한 내 탓이네. 이젠 끝이지만.
 
아니. 영감님. 뭐가 끝이에요. 그것보다 여긴 어디에요. 그리고 왜 나를 혼내지 않는 건데요?
 
그 말을 입에서 꺼내려는 순간에, 굉음이 들렸다. 아래쪽이었다. 그리고 몸이 기울어진다. 아예 방이 무너지고 있었다. 나는 따스한 손길을 느꼈다.
 
영감님이 나를 꼭 그러안고 있었다. 방이 무너진다. 몸이 붕 떠오른다. 영감님의 손길이 나를 뜨겁게 붙들고 있따. 영감님 부담스럽다니까아아아
 
방이 무너졌다. 먼지가 피어오른다. 무너진 벽 너머로, 달빛이 비쳐들어온다. 그녀는 달빛을 함뿍 머금은 채로, 우리를 바라본다. 영감님은 번개처럼 몸을 일으켰다. 다시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나, 이스마엘은 그대와의 결속을 끊어, 내가 내어준 것을 취하겠..
 
영창의 뒷부분은 들리지 않았다. 내 눈앞에 큼지막한 불덩어리가 생겨났다. 조금만 더 커졌다간 뼈도 못 추릴 정도로!
 
불덩이가 날아갔다. 정확히 그녀를 향해. 아니 영감님, 뭐하는 짓이에요!
 
그녀는 불덩이에 삼켜진다.
 
- 영감님! 손녀잖아요!
 
손녀 아냐!
 
나는 일단 소리를 내고 봤다. 생각해보면 이 상황에서 하기 적당한 말은 아니었는데, 일단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뱉어내긴 했다.
 
그녀가 서있던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아무것도 없지 않았다. 그녀의 발치에 무언가가 흩어져있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내가 보기에 그것은..
 
그녀의 몸뚱어리들이었다. 팔과 다리, 몸통, 어깨, 그리고 머리.
 
여기서 끝났다면 그저 그런 잔혹한 살인이었겠지만, 조금 더 이어졌다. 그녀의 몸통이 흩어진 곳에서 엄청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스마엘, 나의 이스마엘! 그대의 힘은 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잊었는가!
 
하늘을 찢을 것처럼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울려퍼졌다. 그저 그런 잔혹한 살인은 여기서 일어났다.
 
내가 고개를 돌려 영감님을 바라보았을 때는, 이미 영감님의 머리가 터져버렸으니까. 나도 피를 흠뻑 썼다. 으엑. 나는 피를 닦아냈다. 딱히 더럽다거나 무섭지는 않았다. 생각해보니까 아까부터 되게 무서운 상황이 많았는데 전혀 무섭지가 않네. 한참이 지났다. 머리를 굴려서 상황을 정리해보려고 했지만, 아무것도 정리되지 않는다.
 
저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어이- 이봐아-
 
그녀의 목소리였다. 그쪽으로 걸어가야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대강 얼굴에 묻은 것들을 닦아내고, 그쪽으로 천천히 걸었다. 목소리는 점점 커지다가, 갑자기 줄어들었다. 그리고 갑자기 어투가 확 바뀌었다.
 
오빠 빨리 와아아아-
 
간다. 가.
 
나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null)
 
손이 빠르게 움직인다. 나는 지금, 평소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일을 하고 있다. 대못처럼 날카로운 바늘에 털실을 꿴 것도 모자라서, 그걸로 몸을 ‘뜨개질’ 하고 있으니까. 한참이 걸렸지만, 아이의 몸을 거의 다 기웠다. 몸을 기우다보니까 느낀건데, 이 아이의 몸은 전부 짝짝이였다. 팔도, 다리도, 몸통도, 얼굴도. 아주 살짝씩 크기가 달랐다. 그러니까, 그 영감님이 이 녀석을 살려냈다고 했으니까.. 아마도..
 
우웩.
 
...그래서. 지금까진 내가 네 지배를 받고 있었단 말이지?
 
네에...
 
막 이상한 상황을 보고 그래도 아무렇지 않았던 건?
 
제 시각을 빌려갔으니까요...
 
근데 너 되게 공손하다. 영감님 머리도 터트려놓고.
 
저도 오빠 죽이고 싶거든요..? 막 귀찮고 짜증나고 그래요. 저 할 일 많거든요..
 
근데?
 
살갑게 대해달라면서요.. 그래서 그러는 중이에요..
 
그것 때문에 날 못죽이는 거야?
 
네.. 그니까.. 오빠도 좀 쓸모있어져봐요.. 아. 거기 아니야..
 
나는 뜨개질하던 손을 멈추었다. 목을 꿰메던 중이었다. 목소리가 흐트러지는 것을 보니 성대를 찌른 것 같다. 나는 바늘을 뽑고 다시 꿰었다. 이번엔 맞아들어갔다.
 
그 전까진.. 안죽을 거에요..
 
누구, 너?
 
오빠요..
 
왜?
 
나랑 약속했으니까..
 
약속의 내용이 뭐였더라?
 
머리를 굴렸다. 내가 뭐라고 했더라. 뭐 내 세계에 발을 담구고 뭐? 그녀의 귀가 보였다. 붉게 달아올랐다.
 
몰라요. 말 안해줘요.. 쓸모없이..
 
너 지금 되게 말에 가시 돋혀있는 거 알아?
 
알아요.. 그런데 안죽이고 안죽게하고 존댓말하고 하면 살가운거지.. 뭘 더 바래요..
 
아니. 좀 뭐야..
 
뭐요..
 
귀여운 맛이 좀 있어야지.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아니. 목을 꿰는데 고개를 돌리면 어떻게 해. 덕분에 고개가 반쯤 돌아갔다.
 
좀 더.. 쓸모있어지면 생각해볼게요..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고개를 원래대로 돌려놓았다. 똑바로 있어준 덕분에 금방 그녀의 몸을 기울 수 있었다. 관절마다 파란색 털실이 박혀있는 여자아이라니. 좋아.
 
다 됐다.
 
방금 막 새로운 재능을 찾았다. 그녀는 나에게 책 한권을 건네었다. 알 수 없는 짐승의 가죽으로 만들어진 책이었다. 아니, 알 것 같긴 한데 굳이 말하고 싶진 않은데.
 
제 경전이에요.. 읽으면.. 쓸모있어질 수 있어요..
 
나는 그것을 받아들었다. 말을 꺼내기도 전에, 나는 그녀를 꼭 붙잡았다. ‘몸 수선’이 끝나자마자 그녀는 타고있던 빗자루를 저 하늘 높이 날아올렸다.
 
나는 한 손에는 그녀의 경전을, 그리고 다른 손에는 그녀를 꼭 붙잡은 채로 하늘을 가르고 있었다.
 
달이 밝다.
 
내가 세계 멸망을 삼십 육만년 정도 앞당겼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리 멀지 않은 미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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