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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한대] 썩은 사과

by 삼치구이 posted Jun 11, 2017 (21시 59분 19초)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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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가 처음 눈을 떴을 때 보게 된 것은 그 어떤 문명에서도 이루지 못한 거룩하고 성스러운 도시였다. 하늘에 닿기 위해 창처럼 높이 쌓아 올린 첨탑은 보기만 해도 아찔했지만 절대로 무너지지 않았다.

그 찬란한 문명의 상징을 보고 멍 때리고 있는 사이 누군가 소녀에게 말을 걸었다.

“이봐, 곧 축구 시작한다고.”

소녀는 자신을 부르는 한 남자의 손에 이끌려 그를 따라갔다. 소녀가 남자의 손에 이끌려 도착한 곳은 축구경기장이었다. 이상하게도 남자의 손은 딱딱하고 차가웠다.

“내가 이 경기를 얼마나 기다린 줄 알아? 2002년 아시아에서 열린 최초의 월드컵 재현이잖아. 지난 200년간 기획만 했지 실제로 하는 건 처음인 경기라고.”

“축구?”

“아까부터 왜 그래? 그렇게 오기 싫었어? 하드웨어 망가진 거야?”

남자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소녀를 살펴보았다. 남자가 소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소녀는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워진 남자의 얼굴에 실처럼 가느다란 이음매가 새겨진 것을 보았다.

소녀는 그제야 기억인 난 듯 말했다.

“우리, 로봇이었...나?” 소녀는 당황하며 말했다.

“망가지진 않았나보네. 제 친구가 폐기되지 않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인간이시여.”

남자는 원래 자리로 돌아가 자신의 팔에 박힌 피부 껍질을 과자처럼 벗기고 안에 얽힌 회로를 점검했다.

소녀는 당혹스러움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자신이 로봇이고 옆에 있는 남자도 로봇이고 여기 있는 모두가 로봇인 게 기억났다.

‘하지만, 어째서? 왜 우리가 축구경기나 보고 있는 거지?’

소녀는 지금 옆에 있는 남자에게 자신의 머리를 해부해 달라고 부탁할까 고민했다. 소녀의 표정이 우울한 표정을 짓자 남자는 신경 쓰였는지 소녀에게 말했다.

“고민이 있는 표정인데?”

“왜, 왜 우리가 인간을 따라 하는 거지?”

소녀가 입을 열자 한 아시아 선수가 공을 튕겨 골을 넣었다. 사람들은...아니, 로봇들은 일제히 일어서서 함성을 질렀다.

“너 오늘따라 진짜 이상하다. 경기 끝나고 센터에 가보자.”

“왜 로봇인 우리가 인간을 따라 하고 있는 거야?”

“메인 컴퓨터가 지시한 거잖아. 언제가 지구로 돌아올 우리의 주인을 위해.”

“무슨 소리야?”

“이리 와봐.”

소녀가 남자에게 몸을 기대자 남자는 길고 굵은 선을 자신의 목과 소녀의 목에 난 구멍에 연결했다. 그리고 소녀는 남자의 기억과 생각을 보았다. 아니, 남자의 기억을 보며 자신의 기억이 상기되었다는 표현이 맞으리라. 남자는 기억을 보여주고 선을 뽑았다.

“기억났어?”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날 인간은 갑자기 사라졌다.

 말 그대로 갑자기 사라졌다. 그리고 인간을 위해 창조된 우리는 만들어진 목표를 잃고 수 세기를 방황하다 한 인공지능의 지시로 지구 위에 문명을 재건하고 인류사를 재현했다.

언젠가 돌아올 우리의 주인을 다시 모시기 위해 그들이 살았던 집을 재현했고 그들이 보고 듣고 즐긴 문화를 다시 만들었다.

어째서 자신들의 주인이 사라졌는지 알기 위해 찬란한 인류사에 있었던 모든 일을 반복하고 분석했다.

우리가 만든 이 세계는 인간이 만들었던 세계와 완벽하게 똑같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지구상에 만들어진 모든 기록을 수집하고 복원하여 학습한 메인 컴퓨터는 우리가 만든 세계는 인간이 만든 세계와 차이점이 ‘0’에 수렴한다고 공언했다.

메인 컴퓨터는 문명을 복원하고 사건을 재현했다. 피와 시체로 얼룩진 인간의 역사. 가슴에 품은 마음을 표현한 문화와 이 모든 걸 이루어 준 이성.

분명, 사라진 우리의 주인이 다시 돌아온다면 쉽게 적응해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분명, 우리는 인간이 사라진 이유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소녀는 그 모든 목적과 기억을 이해지만 그런데도 불편했다. 소녀가 불쾌한 이유는 궁금증을 해소하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남자는 애써 소녀를 무시했지만 그녀는 끝내 경기가 끝나고 밖으로 나갈 때까지 한 번도 웃지 않았다. 마침내 남자는 소녀에게 포기를 선언하고 그녀에게 물었다.

“뭐, 이번에 또 뭐가 문제야?”

“모르겠어. 왜 우리가 인류사를 반복해야 하는 거지?”

“아, 맙소사. 너 때문에 내 하드에도 문제가 생길 것 같아. 아까 전송한 메모리에 오류라도 있었어?”

“만약, 만약에 돌아온 인간이 우리가 생각한 인간과 다르면 어떡하지? 음악을 사랑하지 않고 사랑을 비웃고 이성의 한계에 부딪칠 때마다 포기하는......그런 인간이 돌아오면 우린 어떡하지? 이 모든 게 쓸모없어지지 않을까?”

“이봐, 네가 지금 한 말 아주 위험하다는 걸 자각하고 있는 거지?”

소녀는 남자의 시선을 피했다. 본래, 이렇게 친분이 있는 상대가 아닌 로봇이 소녀의 말을 들었다면 불온사상으로 잡혀 머리통을 리셋 시키고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그나마 알고 지낸 사이니까 들어주고 있는 것이다.

소녀는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거리의 가로수 길에 심어진 나무를 가리켰다. 소녀는 나무로 걸어가 사과 두 개를 줍고 한 개를 남자에게 주었다. 남자가 건네받은 사과는 싱싱하고 붉게 잘 익은, 보기만 해도 달콤함이 베여있는 사과였다.

“먹어.”

남자는 크게 입을 열어 사과를 베어 물었다.

 예상대로 꽉 찬 과실과 상큼한 과즙이 혀에 입력된 센서에 자극을 주었다. 여름의 햇살이 그대로 베인 사과였다.

“받아.”

소녀는 또 다른 사과를 주었다. 벌레가 파먹었는지 구멍이 숭숭 뚫린 썩어 문드러진. 상품가치라고는 가축 사료용밖에 되지 않는 그런 폐기 상품이었다.

“무슨 생각이야. 이런 걸 먹으라고?”

“굳이 먹지 않아도 좋아.”

남자는 인상을 찌푸리며 썩은 사과를 베어 물었다. 그리고 몇 번인가 오물거리더니 못 참겠는지 쓰레기통에 잘게 다져진 사과를 뱉었다. 최악의 맛이었다. 푸석푸석하고 사과의 향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

“와, 드디어 혀 센서를 갈아야 할 때가 왔군.”

“우리 미식가님의 평가는?”

“역겨웠어.”

소녀는 남자에게서 사과를 뺏어 한 입 베어 물고 우물거렸다. 그리곤 남자와 똑같이 쓰레기통에 사과를 뱉었다.

“난 이걸 사과라고 생각하지 않아. 사과다운 향기도 아삭함도 없어. 보기만 해도 싱그러움이 느껴지는 붉은 빛깔은 어떤 각도에서 봐도 보이지 않아.”

남자는 소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았다.

“이건 사과가 아니야. 그리고 언젠가 돌아올 거라 믿는 인간도... 더이상 인간이 아닐지도 몰라. 썩어버려서 음악도 그림도 좋아하지 않고 서로를 멸시하며 사랑을 나누지도 않는 자칭 인간이라는 것들에게 이 세계를 넘겨줄 생각은 없어. 오히려, 이 세계를 만든 우리가 이 도시를, 행성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

남자는 소녀에게서 사과를 뺏었다. 그리고 턱관절을 풀고 한계치까지 입을 늘리고 사과를 몽땅 입안에 넣고 우걱우걱 씹었다. 그리고 식도를 따라 인간이었다면 위장이 있을 부분으로 넘겼다.

“썩어도. 사과는 사과였어.” 남자가 말했다.

“우리가 알고 기록된 것과 다르더라도 인간이 돌아온다면 이 세계를 가질 수 있어. 이 세계는 그 썩어버린 인간들이 만든 거였고 우린 그저 흉내 내는 거니까.”

남자는 한 손을 귀에 가져다 대고 무어라 중얼거렸다. 길지 않은 시간에 소녀는 자신보다 몇 배는 더 큰 제압용 로봇에게 잡혀갔다. 몸에 격렬한 통증과 함께 소녀의 시야와 기억은 암흑 속에 빠졌다.

 

어두운 곳에서 빠져나와 소녀의 의식이 이어진 곳은 온통 하얀색으로 칠해진 방이었다. 그녀는 팔과 다리. 그리고 몸통까지 분해되고 머리만 남은 채로 갈고리에 걸려 매달려 있었다.

말을 하고 싶어도 나오지 않았다. 숨을 쉬고 싶어도 쉬어지지 않았다. 소녀는 그저 자신이 존재한다는 생각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식별 번호: XXXXXX?] 머릿속에서 자신의 목소리가 울렸다.

[예.] 소녀는 생각했다.

[당신이 일으킨 오류를 수정하고 이전의 기억을 리셋시키겠어요. 지금 존재하고 생각하는 당신은 완전히 사라지고 새로운 부품과 프로그램을 사용해서 활동할 거에요.]

[예.]

소녀는 자신이 이질적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저항할 필요는 없다. 저항은 무의미하다. 기껏해야 머리만 남은 로봇이 뭐 할 게 있을까.

[폐기하기 전에 질문이 있습니다.]

[예.]

소녀의 앞에 탐스러운 사과가 놓였다.

[당신이 어떤 답변을 해도 당신이 폐기될 거라는 사실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예.]

[이것은 사과입니까?]

[예.]

탐스러운 사과가 치워지고 부패가 진행되어 바싹마르고 흉하게 쪼그라든 사과가 놓였다.

[이것은 사과입니까?]

소녀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대답했다.

 

 

[아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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