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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한대]지키지 못한 숙제

by 티로백 posted Jul 30, 2017 (22시 55분 01초) Replies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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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업 참여 동의 아니오

 휴학 5년째, 교수님에게서 이메일이 왔다.

설마 개인적으로 만나자는 건 아니겠지. 두려운 마음으로 클릭하자 가슴을 쓸어내렸다.
1학년 여름방학이 시작된 직후. 여름방학 숙제를 내준 그때의 내용과 똑같은 것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학교 홈페이지를 들어갔으나 난 여전히 휴학 중이다.
'요즘은 이메일로 내는구나.'
모종의 이유로 내게 보내진 모양이다. 교수가 조교에게 시켰더니 전날에 술을 먹은 탓에 잘못 보냈던가. 무간지옥에 갇혀버린 나머지 미쳐버렸다던가.
혹은, 복학을 바란다거나.
일단 아니라는 쪽에 걸기로 했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싶으니까.
주변을 둘러보니 모텔이다. 티슈가 담긴 상자엔 배달 음식마냥 여자를 시킬 수 있는 번호가 적혀있다.
전국 이곳저곳을 떠돌며 타지생활도 5년. 사회경험도 5년.
나는 일을 하고 있다.

고된 일은 맞지만 누군가에게 설명하기엔 부끄럽다.
내게 이 일을 알려준 형도 모교 근처는 절대로 가지 않는다. 하지만 난 어디든지 간다. 가봤자 망할거 뻔한 지역은 말고.
그래서, 이번엔 고향을 찾았다. 그럭저럭한 매장답게 수익도 그만큼 나오지만 간혹 쏠쏠하게 '대박'이 터진다.
내일이면 3주의 일정을 모두 끝내고 1주일의 짤막한 휴식이 기다린다. 아니, 사실 오늘로 끝이라면 끝이다. 마지막 날은 짐싸는 날이니까.
'이번엔 뭐하지.'
육체의 피로보다 공허함이 걱정되었다. 암만 힘들어도 날잡고 자버리면 새것으로 되어버린다. 멀찍이 떨어져있는 형은 그게 젊음이라고 말했었다.
멍하게 천장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자 핸드폰이 울렸다. 엄마였다.
대충 모자가 할만한 대화를 나누고, 가까우니까 끝나면 곧장 간다고 말했다. 엄마는 내가 오기전에 상을 차려놓으신다고 말하셨다.
다행히 싸우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성격이 상당한지라 마찰이 있었더라면 내게 불똥이 튀었을 거니까.
문득 집기가 날아다니던 옛날이 떠올랐지만 고개를 저어 잊어버렸다. 생각할 수록 나는 바보가 되어버린다. 입이 있지만 말을 못하게 되며 움츠린 몸은 앞서지 못하고 누군가의 뒤에 숨으려한다.
그리고 지금의 나를 다시 그때로 되돌리려고 한다. 초등학교 시절의 숙제. 내 짝꿍과 약속 하나를 하고, 그것을 지키라는-
"씨발."
순간 짜증나는 기억이 떠올랐다.

컨디션이 좋지않다.
철수고 뭐고 밥상을 뒤엎고 싶지만 습관이 되어버린 입은 사람좋은 미소를 지으며 항상 감사하다 말하고 서류를 받아 빠르게 물건들을 내뺀다.
'400 나오는 매장에서 1000. 괜찮았다.'
단위는 만. 내 수익은 12%. 1주일에 120만원과 꽁쳐놓은 꿀단지를 합치면 상당하다.
바로 전화가 올 정도로. 받자 차장님이 말했다.
"유배지에서 한탕했네. 수고했다."
"네. 다음 매장이 부천이었죠?"
"응. 거긴 내가 본사직원 붙여줄게. 여자야."
이 바닥에서 여자는 아줌마다. 여사겠지.
"참고로 젊어."
아닐수도 있군.
"네?"
"젊다고. 너랑 동갑."
"그냥 여사님 보내주시면."
"아니야. 현장에서 뛰고 싶다더라. 네가 사람 만들어줘."
에어컨 쳐맞는 사무직이 안 맞다니. 이게 뭔 지랄인지, 하마터면 욕이 튀어나올 뻔 했다.
"알겠습니다."
"그래. 잘 쉬고."
전화가 끊겼다. 여자. 번듯한 여자가 이 시궁창으로 내려올 일은 없다. 필히 성격이 더럽거나 남자보다 덩치가 클 것이다.

1주일 전엔 그렇게 생각했었다. 차장님께 전화를 걸었다.
"직원 분이면 보통 출퇴근 아니에요?"
"야. 네가 좀 내줘라. 부천이면 방값 밥값 다 내줘도 엄청 남잖아."
맞는 말이다. 그렇지만 없으면 그 만큼 더 남는다.
어휴. 중소가 그렇지.
"알겠습니다."
"그래. 수고해."
그래. 고개를 끄덕이며 뒤돌아보자 케리어를 끄는 여자와 마주쳤다.
"방. 식비는 다 제가 내겠습니다. 오픈하는 건 아시죠?"
"처음이라 모르겠어요."
거 씨벌.
형이 날 가르칠때 이런 심정이었구나. 아, 형보고 싶다.
"일단 열쇠 여기있고. 아예 처음인것 같으니까 제가 대강 설명해줄게요. 제가 하영씨 방으로 갈까요? 아니면 하영씨가 오실건가요?"
여자가 이래서 귀찮다. 남자면 입이 씰룩이는 대로 말해도 될 것을 선택지까지 던져줘야 한다. 앞으로 1주일간 이래야 한다니.
"그냥 방 하나로 잡아줘."
뭐?
아. 그거로군. 직장내 성폭력. 나한테 돈을 뜯어보시겠다. 게다가 반말까지.
"댁이 무-"
"나 기억안나?"
누군-
"나야. 짝꿍."
아.

처음으로 사귄 친구가 이성이다.
이 얼마나 만화에 나올법하고, 병신같은 설정인가.
근데 난 진짜야.
"오랜만이네."
"응."
그리고 눈앞에 있고.
얼굴을 보니 그때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맨날 여자들에게 갑질당하며 살다보니 여자라는 존재에 본능적으로 진저리가 났던것 같다.
"미국 갔다며. 근데 어쩌다가 여길."
"다 끝내고 왔지."
이제야 알겠다. 오버스펙 수석사원이 얘였구나.
"날 어떻게 찾았는진 모르겠지만, 여긴 별 볼일없는 회사야. 이쪽 일 배워봤자 네 학력과 전공으로 하는 것만 못해."
"동창들 덕분에. 그리고 그건 나도 알아."
"그럼 왜."
설마 나. 때문이라는 대답이 나오진 않겠지. 아마도 사장 아들이 띨띨하니까 회사를 삼켜보려는 것 같은데.
"너 보려고."
그래. 좋은 꿈이야.
"이거 처음엔 존나 다리 아프고 힘들거든. 네 심심풀이는 시간날때 해줄거니까 지금이라도 다 때려치고 나가."
"일주일은 같이 해볼께."
부정할수록 달라붙는 법. 그래야 내가 더 비참해지니까.
"여름방학 때. 기억나?"
"아니."
"방학이 끝날 때까지 같이 있기로 했잖아."
"그랬나."
"그래서."
"그래서?"
"약속 지킬려고."
크, 씨발. 터졌다.
당황한 표정이다. 그래. 그렇겠지. 왜냐하면.
"난 여자 싫은데."
평생 혼자 살기로 했으니까.

1일차, 오후 11시.
아침조인 하영은 피곤했던지 침대에서 곤히 자고 있다. 예상을 깨지 않고 침대 한 가운데를 차지했다.
난 바닥에 잠자리를 폈다.
'손이 너무 느려.'
다른건 다 제쳐두고 손이 너무 느리다. 이게 너무 신경쓰인다. 내가 10분이면 해치울 일을 하영은 40분에 처리한다. 이래서야 써먹겠나.
하지만 뜻밖에 사람들이 몰렸다. 아마도 얘 덕분인것 같은데. 나중가면 알겠지.
씻고, 나도 잠에 들 준비를 했다.
전화가 오지 않았더라면 잠들었다. 발신자는 누나. 담배와 라이터를 들고 방을 나갔다.
"무슨 일인데."
왜. 라고 말하면 말을 왜 그따구로 하냐며 화낸다. 그러면서 자기는 남발하지만.
돈 빌려달랜다.
"나도 빡빡해."
식충이 하나가 달라붙었으니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제발 도와달란다.
"아니. 독립했다고 부모님이랑 연락끊은게 누군데."
"니가 그 새끼랑 똑같지 않다면 좀 빌려줘."
그 새끼. 아버지다. 이 년의 말은 항상 이런 식이다.
"그렇게 싫으면 똑같이 굴지 말던가. 나보다 누나가 더 닮은거 알아?"
불같이 화낸다. 동생한테 빌면서, 무릎하나 제대로 못 꿇지. 병신년.
"응. 만수무강 하시고."
끊고, 방에 들어가 잠을 청했다.

2일차, 오후 10시.
대청소 날이다. 덕분에 일찍 숙소로 도착했다.
"안녕."
하영이 과자를 먹으며 티비를 보고 있었다.
"빨리 자. 지각하지 말고."
"그 동안 어떻게 지냈어?"
감이 온다. 대답하지 않으면 절대로 안자려 할거다. 세상 존나 편하게 살았으니까.
"너 미국가고? 집가면 부모님들 쳐 싸우지. 학교가니 따돌림 당하지. 대학교 갈때까지 그렇게 살았어."
또 기억이 스멀거리며 올라왔다. 대학교는 고등학교와 다를거라고 생각했던 나.
"그러다 휴학 내버리곤 아는 형이랑 일해서, 성격 개조해고 독립한 이후로 지금까지. 이게 끝이야."
"아."
멍한 표정이다. 내가 꽃길 걸으면서 룰루랄라 했으리라 여겼나보다.
"난-"
"재밌게 살았겠지. 이 바닥에 있다보니 어지간한 사람은 그냥 보고도 알거든. 넌 꽃길 걸었어."
바닥에 누웠다.
"이만 자자."
"응."
소등후 얼마 지나지 않아 곤히 잠든 하영이 새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곧 잠들었다.

3일차, 오후 12시.
토템이 생각 이상으로 재값을 한다.
보통 말할때 실수를 해버리면 비웃음을 사기 일쑤지만, 오히려 남자들이 몰려들어 만원쯤 하는 미끼를 물곤 말 몇 마디 나눈걸 위안으로 생각하며 돌아선다.
평일 치곤 상당한 소득이고, 하영 덕분인게 분명해서 고기를 사주었다.
병신같은 아침 드라마에서 삼겹살 먹고 역겨워서 토하는 금수저 2세가 생각났지만 다행히 얘는 잘 먹는다.
고기가 뱃속에 들어서서 불러버렸다. 허나 깨작거리는 하영은 아직도 식사중. 기다리기로 했다.
"천천히 먹어."
 전화가 왔다. 발신자는 아버지.
"별일 없죠?"
"응. 너는 잘있냐?"
"네."
"그래. 알았다. 몸 조심하고."
끊겼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힘이 빠지는게 느껴졌다. 엄마와 나. 누나. 가족을 공포에 떨게했던, 가식에 잔뜩 찌든 유교적 가장은 이제 없었다. 남은 건 갈수록 부양이 절실해지는 노인 뿐.
사람의 목소리에서 장난인지 경멸인지 알 수 있게 된 이후로 아버지는 날 진심으로 걱정하게 되었다. 옛날부터 그랬으면 좋았을 것을.
"계산 내가 했어."
"왠일이래?"
진짜 의외였다. 지금까지 과자. 음료수. 다 자기꺼만 골랐던 애다.
"이제 들어가자."
약간의 헛소리가 있었지만 무시하고 방으로 돌아왔다. 내일은.
'아. 내일 쉬는 날이지.'
깜빡했었다. 정기휴일. 하지만 중간에 휴일이 껴있는걸 감안해도 오늘 수익이 짱짱하긴 하다.
"내일은 쉬는 날이야."
"진짜?"
"응. 하고 싶은거 해."
기뻐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로하고, 난 잠에 들었다.

꿈속.
초등학교의 여름방학이다. 그때의, 그 시절.
어린 남자애와 여자애는 배경을 비롯해 모든 것이 달랐지만 이것만은 똑같았다. 부모들의 다툼.
상처를 끌어안은 둘은 한없이 가까워졌다. 길거리의 값싼 사랑을 어린 풋풋함으로 감싸 한없이 숭고하게 피워내고 있었다. 그리곤 풀잎으로 반지를 만들어 서약했다.
여름방학이 끝나는 날, 우리끼리 결혼식을 올리자고.
약속하며 정신없이 의미 모를 입맞춤을 반복하다 해가 지고서야 집으로 들어갔다. 그 날, 난 늦었다는 이유로 각목에 맞아 다리가 부러졌다.
다음날, 여자애는 엄마를 따라 미국으로 가버렸다.
"씨이발. 에어컨 끄지말."
더워서 깨버렸다.
에어컨은 억울하다는 듯이 소래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내가 깬건 하영의 몸.
'미친년.'
경악하며 몸을 빼자 나 대신 이불을 끌어안았다.
'내가 좆같은 짓을 했구나.'
공교롭게도 꿈을 통해 내가 했던 짓거릴 떠올렸다. 멋모르고 입을 맞춰서 한 여자를 병신으로 만들어놓다니.
'그래. 이제 알겠어. 말하자. 내가 그때 그랬던건 널 좋아해서가 아니라 그냥 도피처가 필요했다고.'
흔들어 깨우려했다. 잠꼬대를 듣기 전까진.
"싫어요. 미국."
울먹였다.
"가기 싫어요. 싫, 아."
흐느끼다 눈을 떴다. 나와 마주쳤다.
기나긴 침묵이 오가고, 고였던 눈물이 사라져서야 간신히 입을 땔수 있었다.
"나가서 밥먹을래?"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당장 꺼지기를 빌었던 나였지만, 그 밝던 표정이 사라지자 걱정이 되었다. 아니, 그때의 전말을 알아버려서 그런건지. 그보다 내가 지금껏 여자를 경시했던게 믿겨지질 않는다.
나는 그저 자기 삶을 위해서 미국으로 간줄 알았다. 어제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고.
숙소로 돌아오자 말라버린 입술이 열렸다.
"미국에서 아시아 사람이 어떤 취급받는지 알아?"
안다. 최근에 여러 사건이 있었지.
"우리들은 원숭이야. 그리고, 엄마의 남자들에겐 먹잇감이었고. 자칫하면 강간당할 뻔한 적이 참 많았어."
그랬던가.
"대학에서는 달라질줄 알았어. 그 동안 이어졌던 무시. 경멸. 이런게 다 사라질줄 알았어."
나도 그랬지.
"아니었어."
운다.
"엄마가 떠나고 간신히 대학을 졸업할 돈밖에 남지 없었어. 그러다보니 네가 떠올랐지."
"너 덕분에 난 버틸수 있었어. 힘든 시간동안 너만을 생각했어. 그런데 넌, 이미 여자가 질릴 정도로 해버린 거야? 난 잊어버렸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한테 반지를 준건 너잖아."
사죄하려면 대가리를 쳐박아야 할것 같지만, 이상하게 몸은 다가갔다. 울먹이는 여자는 날 쳐냈다.
"내가 평생 살아봤자 돈쪼가리 밖에 못 모은다는걸 알아. 내가 자식을 낳으면, 똑같은 일이 반복되겠지. 그래서 난 여자가 싫었던 거야."
무어라 이어야 할지 몰라서 그냥 떠오르는 대로 말했다.
"그리고. 내가 뭔, 여자를 사귈수 있다고 봐? 당장 거리에서 스쳐지나가는 여자가 날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도 모르면서, 김칫국 뚝딱하곤 여자가 싫다며 헛소리 찌껄이는데?"
웃는다. 그래. 제대로 자폭했다.
"나랑 입 맞춘건 너뿐이야."
그리고, 진실.
우린 서로를 끌어안았다. 

사흘이 지나고, 차장님께 전화를 걸었다.
정말 죄송하지만 1주일 더 쉬겠다고 싹싹 빌자 오히려 일벌레가 왠일이나며 당황하곤 휴가를 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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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 터오르자 우린 발가벗은 몸으로 서로에게 사랑하노라며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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