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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한대] 최초의 시간 여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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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영 씨, 기분이 어떻습니까?”


기자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출발 직전의 인터뷰였다. 겨우 그런 거밖에 물어보지 못하다니, 앞을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글쎄요...”


내 모습도 보인다. 구 세대 우주유영사들이나 입었던 하얗고 뚱뚱한 보호복을 입고, 헬멧 바이저만을 올려 얼굴을 내놓은 모습이다. 나는 훈련과 공부만 반복하느라, 기자들을 상대해 본 적 없었다. 수많은 카메라들 앞에서 그저 난처한 듯 애매한 웃음만 내보이는 게 나의 한계였다.


“이번 실험이 끝나면 인류 사상 최초로 시간 여행을 한 사람으로 기록될텐데요. 소감 한 마디 남겨주시죠.”

“백년 전 과거로 돌아가서 무엇부터 하실 생각인가요?”


그 중에는 한심한 질문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바보 같은 질문들. 이번 시간여행은 철저히 과학적인 검증을 위해서 떠나는 여행이었다. 내 멋대로 탐사선 밖에 한 걸음조차 나갈 수 없는 여행이고, 과거로 가면 팔다리 하나 제대로 펴기 불편한 탐사선 안에서 실험 자료 채취나 하는게 일정의 전부였다. 분명 사전에 보도자료로 나눠줬는데.


“자 자, 기자분들. 인터뷰는 여기까지입니다. 갔다 오는 데는 순식간이니까, 시영 씨가 돌아오고 나면 마저 인터뷰하시죠. 보도국으로 이동하시길 바랍니다.”


홍보부 사람이다. 갔다 오는데는 순식간이라고?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자기도 잘 알지 못하면서 뭘 말하는 건가.


탐사선에 올라타는 내 모습이 보인다. 내가 나를 이렇게 제 3자로 바라보다니 기분이 이상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기분이 이상한 걸 느끼다니.


“시스템 올 그린.”

“동력 예비율 20%.”

“시공동조율 80%입니다. 탐사선 폐쇄.”


기술자들의 목소리도 들린다.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들, 전혀 모르겠는 말들을 바쁘게 떠드는 목소리들. 커다란 메인 스크린 앞에서, 각자 자기 업무에 따라서 모니터를 바라보며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대학교 대 강당만한 크기의 방에서.


“카운트다운 시작합니다. 30, 29, 28...”


안 돼, 시작하지 마. 멈춰.


“이번 실험 이후엔 뭐 할 거야?”


또 다시 시간선이 이동한다. 아니, 이동한다는 말은 잘못됐지만.


“글세...”

“또 얼버무리고 넘기려고 한다.”


내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아... 그녀가 보인다. 정말 귀여운 모습이다. 그녀가 내 품에 안겨있는 모습이 보인다.


“이렇게 우유부단하면서 어떻게 시공탐사자로 뽑혔는지 몰라.”

“후후.”


그녀는 알몸이었다. 나도 알몸이다. 우리 둘은 침대에 누워있었다. 나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는 웃으면서 내 품 안에 더욱 안겨왔다.


“오늘이 마지막이네. 같이 자는 것도. 내일부턴 격리실에 들어갈테니까.”

“응...”

“갔다 오고 나서도 격리된다고 했지? 한 달이랬나?”


그녀는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내 손가락이 그녀의 입술을 잡아당긴다.


“돌아오고 나선 외롭게 한 만큼 만족시켜 드릴께요, 꼬마 공주님.”

“꼬마라고 하지 말랬잖아!”


그녀가 품 안에서 바둥거렸다. 나는 그런 그녀를 제압하면서 손을 뻗었다. 아...


저 때 멈췄어야 했다. 포기했어야 했는데, 어째서 나는...


그리고 또 다시 다른 시간선으로 이동한다.


“축하하네.”


늙은 아저씨. 하얀 백발의 머리에 반무테 안경을 낀, 살집 있지만 뚱뚱하지 않고 단단해보이는 몸을 가진 사람. 남자인데도 나보다 키가 20cm는 작은, 그러나 누구도 무시하지 못했던 그 남자.


그 남자가 내 앞에서 손을 내밀었다. 나는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렇게 긴장하지 말게. 누가 잡아먹는다나?”

“아, 아닙니다!”

“허허, 하지 말래도.”


연구소의 소장이자 세계 굴지의 과학자, 노벨상을 살아서 두 번이나 받은 사람을 누가 무시할 수 있을까. 그 남자가 나에게 직접 찾아온 날이었다.


“탐사자로 선발된 느낌이 어떤가?”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완전 딱딱해졌구만, 자네.”


남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그 모습에 더욱 긴장해서 허리를 바짝 폈다. 내가 탐사자로 최종 선발된 날의 일이었다.


“남자들을 제치고 여자의 몸으로 최초가 되다니 소감이 새롭겠구만.”

“아닙니다!”

“음, 하긴, 이건 너무 구세대같은 생각이었군.”

“아닙니다!”

“허허, 참, 자네... 성격이 밝고 유들유들하다더니, 보고서가 잘못됐나?”

“아닙니... 아니에요.”

“그래, 말 좀 놓게.”


남자는 웃으면서 내 어깨를 두드렸다. 키가 작은 탓에 손을 들어올려야 했다. 황송해서 무릎을 굽힐 생각마저 했었지, 저 때는.


“고생하게.”


저 때라도, 저 사람한테 조금이라도 위화감을 말했어야 했는데. 뭔가 이상하다고 말했으면, 저 사람이라면...


“15, 14, 13...”

“후우...”


이번엔 출발 직전의 상황이다. 출발은 내가 제어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관제실에서 나오는 카운트다운 소리를 들으며, 나는 숨을 내뱉었다. 치솟는 긴장감을 흩어내기 위해서.


현실에선 일순이겠지만, 탐사선 안의 나는 며칠을 보내야 할지 몰랐다. 다리를 펴고 일어날 수조차 없는 탐사선 안에서 옷조차 벗지 못하고 견뎌내야 했다. 여자 치곤 체구가 큰 편이었지만, 그런데도 다른 남자 후보들보단 작은 키가 선정의 원인이었다는 걸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긴급정지 버튼은 있었는데. 저걸, 저 빨간 버튼을 누른다면, 그렇다면...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시공간 닻에 얽매인 내 몸은 현실에서 격리된 만큼 현실에 영향을 끼칠 수 없었다.


“10, 9, 8...”


곧 있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 채, 나는 계기판을 다시한번 흝어보았다. 지금 계기판 따위를 볼 때가 아닌데, 당장이라도 실험을 중단해야 하는데.


“6, 5, 4...”


무언가 위화감을 느낀 내 눈살이 찡그려졌다. 생각해보면 그랬다. 늘 그랬다. 시공탐사자에 지원한 직후부터, 탐사자로 최종 선발된 순간이나, 훈련을 받을 때나, 각종 기기에 대한 매뉴얼을 읽을 때나. 언제나 뭐라고 말하기 힘든 위화감이 나를 습격했다.


지금이라면 안다. 그 때마다, 내가 간절히 외쳤던 순간이었다. 그만두라고. 멈추라고. 과학자들에게 한 마디라도 했으면. 그랬으면 결과가 바뀌었을까.


“3, 2, 1, 발사.”


아무도 몰랐다. 예상조차 하지 못했다.


단 한 번의 시간여행의 성공이 전 우주의 시공간 연속성을 파괴하게 될 줄은.


과학자들, 기술자들, 기자들, 정치인들... 모두가 산산히 흩어졌다. 사랑스러운 그녀도, 위대한 작은 거인도, 모두가 사라졌다. 원자 단위로 공간이 갈갈이 찢어지면서 육체가 붕괴해버렸다.


남은 건 오직 나 하나. 비좁은 타임 캡슐의, 시공간 닻에 의해 보호된 나 하나뿐이었다. 모든 사람이 산산히 조각나버리는 모습을 볼 수 밖에 없는 나 혼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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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시간 여행, 그래서 (처음이자) 마지막.


어디서 읽은 것 같은 위화감이 드는데, 뭐였지?

comment (2)

Rogia
Rogia 18.08.15. 13:48
https://twitter.com/bahnbazi/status/898944018473664512 이게 유래인지는 모르겠지만 반바지 단편 만화 중에 비슷한 내용이 있었죠. 그러고보니 벌써 1년 전인데 1년 동안 나는 과연 무엇을 했을까 생각하니 자괴감이 듭니다... 이 댓글을 달고 있는 걸 확인하는 일 년 후의 제가 "그렇게 잘 아는 사람이 왜 또 시간을 헛되이 보냈냐"고 한탄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잘 읽었습니다!
알리미
알리미 18.08.15. 14:32
Rogia 님이 게시글에서 본 글을 링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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