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소설회랑

Banishment this r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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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1:54 Jul 21,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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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아님이
협업 참여 동의

“아아.”


문득 탄성에 고개를 돌리자, 수예가 허공을 보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어째서 몰랐을까.”


여기서 잠시, 내게도 변명의 기회가 필요하다.


우선 시간이 문제였다. 약간 넘은 아홉시. 대한민국 고등학생들이라면 모두가 가지고 있는 그 병, 야자 3교시 주의력 결핍 증후군이 발작하는 시간대 아닌가. 나 역시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고등학생. 눈은 활자의 바다를 헤엄치지만 마음은 잡생각의 우주를 방황하는, 그런 상태였다는 말이다.


그리고 솔직히, 마음 한구석에 그런 생각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차피 공부도 안되는데 뭐 어때, 라고. 그야말로 마음의 군살이지. 나도 안다. 하지만 수예를 만난지 이제 고작 네달 남짓. 충분한 수양을 쌓기에는 부족한 시간이었다.


어쨌든 이정도면 내 다음 행동에 대해서 이해심을 발휘해 줄 수 있으리라 믿는다.


나는 수예에게, 진지하게 이렇게 묻고 말았던 것이다.


“왜? 뭐 잊어버렸어?”


수예가 앉은 자세 그대로 천천히 시선을 창 밖으로 돌렸다.


“오늘밤은 이렇게나, 달이, 아름다운데.”


나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을 느끼며 수예를 따라 창 밖을 바라보았다.


장마전선이 북상하는 계절이다. 좀 더 남쪽에서는 태풍이 태어날 준비를 하고 있겠지. 날씨가 불안정했다. 하루종일 비가 오락가락했고 지금도 하늘은 먹구름으로 가득했다. 이런 날씨에 뜬금없이 달타령이라면.


“나의 사도여,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가.”

“달이 안보이는데.”

“후후후, 이몸은 고귀한 진조의 핏줄. 구름의 권속 따위는 이몸과 달의 숭고한 연결을… 잠깐, 반석아? 손 위치가 좀 이상한 것 같은데?”

“딱 대십시오, 고귀한 진조이시여.”

“아우으윽!”


수예는 이마를 부여잡고 침몰했다.


야자감독 선생님은 뭐하고 있냐고? 장홍식이라면 삼반에서 인터넷 바둑 삼매경이다. 직접 본 건 아니지만 아마 확실하겠지. 일교시때는 일반, 이교시때는 우리반이었으니까. 교육청에서 그러라고 사 준 컴퓨터가 아닐텐데!


뭐, 그렇다고 해서 갑자기 장홍식이 야자감독의 본분에 충실해졌으면 하는건 아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수예랑 노가리까는게 공부보단 재밌으니까.


굳이 말하기도 새삼스럽지만, 수예는 그거다. 옆나라에서는 중학생때 발병해서 보통 고등학교 입학할때쯤엔 낫는다는 그 병. 수예는 아직 그 병을 완치시키지 못했을 뿐이다. 여기서 완치라는 단어사용에 주의하시길. 수예도 중2병 증상은 거의 다 나았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완치가 아직 되지 않은 것이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수예가 헛소리를 하는 것은 오직 나뿐이다. 다른 애들이랑 대화할때는 완벽하게 정상이다가도, 나랑만 있으면 설정이 줄줄줄 풀려나오는 것이다. 자기 말로는 내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는데.


“기왕이면 얼굴이 마음에 든다고 해줬으면 얼마나 좋아…”

“응?”

“아무것도 아니야.”


수예가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가 다시 나를 불렀다.


“그나저나, 나의 사도여.”


태클 걸기도 지겹다.


“왜.”

“우산 가져 왔지?”

“당연한 거 아냐? ...혹시 우산 안 가져왔어?”


수예가 어색하게 내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기가 막혀서 재차 질문했다.


“대체 왜?”

“아, 아침에는 비 안왔거든? 흐리기만 했고?”

“유치원생이냐…”


이런 주제에 나보다 성적은 좋다니. 정말 대한민국의 교육 시스템 이대로 괜찮은건가?


창 밖에서 빗방울이 통통거리며 떨어진다. 막 쏟아지는 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저걸 그냥 맞고 가면 속옷까지 쫄딱 젖겠지. 수예가 얼굴이 빨개진 채로 중얼거렸다.


“크흠, 고귀한 혈통에게 봉사하는 것이 사도의 의무일 터.”

“말이 건방진데? 우산 쓰기 싫어?”

“으으… 우산 좀 씌워주세요.”


킥킥거리면서 웃다가 문득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지금껏 매일 집에 같이 갔지만, 우산 같이 쓰고 간 적은 한번도 없었구나.


나는 수예를 바라보았다.


수예는 창 밖을 보고 있었다. 비가 얼마나 오는지 살피고 있는 거겠지. 단정한 숏컷 밑으로 드러난 목덜미가 새하얬다. 나는 황급히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쩌지.


같은 우산을 쓰고 가면 저걸 계속 봐야 할텐데.


그때, 수예가 말했다.


“어? 비 거의 그쳐가는 것 같은데?”

“에에엥?”


진짜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들려오던 통통거리는 소리가 어느새 멎어 있었다. 나는 황급히 일어나서 창문 밖으로 팔을 쭉 뻗어보았다. 공기는 습했지만, 확실히 빗방울이라고 할만한 것은 전혀 없었다.


등 뒤에서 수예의 해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와, 잘됐다! 마침 집에 갈때되니까 딱 맞게 비가 그치네.”


결국 내 접이식 우산이 가방 속에서 나오는 일은 없었다.


하교길은 평소대로였다. 수예는 진조의 예지능력 어쩌고 하는 소리를 하며 나를 놀려댔고, 나는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서 수예의 입을 막았다. 물론 내 입도 막았고.


평소와 다른 점이 있었다면 집에 도착하고 나서다.


수예의 새하얀 목덜미가 어른거리는 바람에, 나는 누워서도 한참동안 잠을 이루지 못하고 침대에서 뒤척거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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