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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한대] 세계를 멸망에서 구해내고 몇 백년이 지난 지금, 역사로 남겨진 저를 알아보는 여자아이를 주워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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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09 Feb 16,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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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현안인
협업 참여 동의

 "식사를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소녀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남자가 건네는 염소 젖을 받아 마셨다. 남자는 말했다.


 "먼 길을 걸어 왔구나. 정말로."


 소녀는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길게 뻗은 화상 자국이 눈을 타고 입 주위까지 내려왔다. 하지만 온화하게 내려앉은 입꼬리 덕분에 무서운 인상으로는 다가오지 않았다.


 소녀는 그렇게 쳐다보는 것이 결례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급히 모닥불로 시선을 되돌렸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아르케멘, 맞으시죠."


 남자가 그 단어를 듣자 멈칫하더니, 소녀에게 시선을 향했다.


 "아르케멘을 찾고 있는 거니?"

 "당신의 그 흉터. 모르려 해도 모를 수가 없어요. 맞죠?"

 "터무니없는 이야기구나. 나는 그저 유목민일 뿐이란다. 몇백 년 전의 인물과 비교해도 할 말이 없어."


 소녀는 남자의 말을 귓등으로 흘린 채 남자에게 따가운 시선을 보내었다.


 남자는 생각했다. 소녀는 이 초원에서 가축도, 가족도 없이 홀로 떠돌고 있었다. 분명 많은 일이 있었겠지.


 "피곤해 보이는구나, 이만 자는 게 좋겠다. 불은 내가 보고 있으마. 천막에 들어가렴. 천이 얇지만 이슬 정도는 막아줄 수…."


 "이야기가 하고 싶어요."


 소녀는 남자가 무엇을 말하기 전에 선수를 쳤다. 남자는 기르는 소와 염소만을 말동무로 두던 차였으니, 이야기라면 환영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을 아르케멘이라 여기고 있는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얘야. 나는 아르케멘이 아니란다. 그 사람은 이미 과거에 묻혀 없어졌어. 난 같은 곳에 흉터를 입었을 뿐…."

 "제 언니를 구해주세요."


 소녀는 입을 열었다. 남자는 그 말에 이끌려 천막을 정리하던 손을 멈추고 불가로 다시 돌아갔다.


 모닥불이 타오르는 소리가 어느 정도 간격을 두고 일정하게 터졌다. 남자는 꺼져가는 불에 염소 똥을 말린 것을 집어넣었다. 곧 그것은 주황색 불꽃으로 화했다.


 "…언니라고?"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닥불에 비친 눈가가 촉촉했다.


 "에트의 꿈꾸는 사람들이, 저희 레블의 상자를 향해 전쟁을 일으킨 건 알고 계시죠."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은 과거의 이야기가 주는 교훈을 잊고 또다시 죄악을 반복하고 있었다. 세상을 구한 것은 의미가 없었다. 남자가 불을 바라보았다.


 불은 일렁거리는 혓바닥을 내밀며, 무언가를 그려내었다.


 불타는 마을이었다. 그가 아르케멘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었을 시절이었다.


 "끄응."


 남자는 앓는 소리를 내며 불을 뒤척였다. 그 환상은 곧 지워졌지만, 불길이 자리를 잡음에 따라 다시 떠올랐다.


 이번에는 좀 더 확실하게, 불에 타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전격이 몸을 관통하는 감각이 뒤를 이었다. 지팡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어두운 그림자는 악신의 부활을 꿈꾸었다. 남자는 그림자로부터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그 노력은 보답 받지 못했다.


 남자는 강했으나, 모든 사람을 지킬 정도로 강하지는 못했기 때문이었다.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 불꽃에 비쳐간다. 망막에 새겨진 그 얼굴들은 남자를 원망하는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남자는 그들 하나하나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헤리안, 베네프, 또 이안까지. 모두가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제 언니가 볼모로 잡혀갔어요."


 소녀가 '볼모'라는 단어를 강조한 덕분에 그는 환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녀가 계속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볼모로 잡혀갔다면, 죽지는 않을 것 아니냐. 그 정도의 위치라면 그녀를 구할 시도도 할 수 있을 테고."


 남자는 퉁명스럽게 말을 던지며 소녀를 훑어보았다.


 "하지만, 아르케멘…."


 그녀의 옷은 심히 찢어지고 더러워져 있었지만, 허리춤에 달린 예식용 단검과 길게 늘어진 소매가 그녀의 높은 지위를 짐작케했다. 


 겁도 없이 저 칼 하나에 의지해 초원을 걷다니, 분명 세상물정 모르는 규중처녀일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도달하자 그는 그녀를 향한 약간의 멸시감을 가지게 되었다.


 "다시 말하지만, 난 아르케멘이 아니란다. 네 여행은 헛되었구나."

 "거짓말하지 마요."


 소녀가 덜컥 화를 내며 남자를 쏘아보았다. 남자는 그 분노 속에서 절망의 파편을 꿰뚫어 볼 수 있었다.


 "아르케멘은 이야기 속 인물에 불과해."


 남자는 다시 불꽃을 보고, 지팡이로 불을 뒤척였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는 끝났어. 만약 내가 아르케멘이라면, 자신의 차례는 끝났다고 말해줄 테지."

 "제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어요."


 소녀는 남자에게서 지팡이를 뺏어 들고, 불씨를 뒤적였다. 서툰 몸짓이었지만, 그녀는 불을 다루는 법을 아는 듯했다. 남자는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제 지쳤어. 누군가의 용병이 되고 싶지도 않을 거고, 될 수도 없다."


 남자는 말했다.


 "무엇에 그렇게 지쳤다는 거죠?"

 "모든 것에." 남자는 덧붙였다. "큰 짐을 졌고, 아직도 괴로워하고 있으니까."

 "세상을 구했잖아요. 대체 무엇에 괴로워하는 거예요?"


 남자는 한숨을 쉬었다.


 "그는 배신당했어. 가장 친하던 자가 악신에게 홀려 있었지. 믿고 있던 모든 것이, 우르르 무너지는 기분이었을 거다."


 남자는 찢어지는 심정으로 고백했다.


 "누구나 배신은 당해요. 아르케멘이 배신을 당했다는 사실은 저도 노래로 들었고요."


 남자는 홱 고개를 돌려 소녀를 노려보았다. 남자의 온화했던 얼굴은 어디에도 간 데가 없었다.


 "가볍게 이야기하지 마. 아들과도 같은 존재의 숨통을 스스로의 손으로 끊어야 했단 말이다. 나는 밤마다, 아직도 그 감각을 느낀다. 내 손끝에서 스러져가는 마지막 맥박을. 그 부드러웠던 목줄기를."


 남자는 격앙해 주먹을 쥐었다. 이 아이는 끝없이 그의 신경을 건드렸다. 이렇게까지 이야기를 꺼낸 것은 그로서도 처음이었다.


 "그런 희생을 치르고 구한 세상이, 스스로 자멸의 길을 걷고 있다. 이번에는 또 무엇을 희생해야 세상을 구할 수 있을까? 세상이란 건, 그런 값을 치르고 구할 만한 걸까?"


 남자는 자신이 아르케멘임을 숨기는 것도 잊은 채 말했다. 소녀는 조용히 몸을 떨고 있었다. 그녀는 말을 더듬으며 말했다.


 "저, 저는 세상을 구해달라고 부탁하러 온 것이 아니에요. 그저, 제 언니를 구해주세요."


 "내게 자신을 도와달라고 간청했던 자가 너뿐인 줄만 아느냐? 아니, 수도 없이 많았고, 나는 다 물리쳤다. 내가 어째서, 무엇때문에 너의 말을 듣고 너를 도와야 하는가?"


 침묵이 흘렀다. 소들이 남자의 호통소리를 듣고 불가를 바라보았다. 그에 남자는 헛기침을 하더니 소녀를 향해 말했다,


 "오늘은 밤이 늦었으니, 자고 떠나거라. 레블의 상자로 가는 길을 가르쳐주마."


 남자는 등을 돌려 일어나고, 소녀도 따라 일어섰다.


 "도와주세요."


 남자는 그 말에 소녀를 바라보았다. 소녀는 그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장식이 달린 자그마한 칼날을 그에게 겨눈 채로.


"그깟 칼날로, 나를…."


 남자는 말을 멈추었다. 소녀는 단검을 재차 쥐었다. 자루를 아래로 내린 단검이 그에게서 소녀의 목을 향했다. 서슬이 퍼런 칼날이 빛났다.


 "안 그러면, 당신의 죄책감을 더 늘려줄 테니까."


 소녀는 말했다. 결연한 표정이었다.


 "너…!"


 남자는 경멸하는 눈빛으로 소녀를 바라보았다. 소녀가 흠칫거리다 소리를 높였다. 단검이 목의 끝을 찌른 것이다.


 "넌 그러지 못할 거다. 칼에 찔리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지 몰라."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한 게 당신뿐인 줄만 아세요?"

 "뭐?"


 소녀가 작게 웃었다.


 "그 아픔에 비하면, 이건 애들 장난도 아니죠."


 소녀가 칼을 더 찔러 넣었다. 핏줄기가 목을 타고 흘러내리며 달에 빛났다.


 "알겠으니, 제발. 거기서 멈춰."


 그는 다급해져서 말했다.


 "멈출 수 없어요. 제 이야기는 이제 시작되었거든요. 곧 끝날지도 모르지만."


 소녀는 눈을 감으며 칼을 깊숙이 박아 넣었다. 그러나 단검은 더 나아가지 못했다. 남자가 소녀의 작은 손을 붙잡은 것이다.


 남자는 곧장 단검을 빼앗아 바닥에 내리꽂았다. 단검은 마른 흙바닥에 꽂혀 부르르 떨었다.


 "도와주실 건가요?"


 소녀는 남자의 팔에 밀쳐져 쓰러졌다. 남자는 분을 삭이지 못해 몸을 떨다가 쓰러진 소녀를 향해 말했다.


 "너는 내게 새로운 절망을 안겨주려 하는구나."


 소녀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넘어진 것도 개의치 않았다.


 "그게 꼭 필요한 일이라면요."


 한 생명을 구한다는 의미는, 그 생명에 대한 책임을 온전히 지겠다는 의미다.


 소녀는 그것을 알고 옅게 미소 지었다. 소녀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고, 그는 결국 손을 잡았다.


 남자는 소녀에게 단검을 다시 건네주었다.


 "내가 널 돕는 것과는 별개로, 너는 들어가 휴식을 취해야 한다. 불꽃은 내가 보고 있으마."


 바닥에 놓인 지팡이를 주우러 남자가 허리를 숙인 순간, 소녀의 손이 그것을 함께 잡았다.


 "저도 불 정도는 볼 수 있어요."


 소녀는 지팡이를 빼앗아 들고 주저앉아 불을 만지작거렸다. 치마가 더러워지는 건 이미 상관하지 않는 모양새였다.


 남자의 지팡이는 소녀의 손을 타고 모닥불을 빛내었다. 어째서인지 소녀가 만지는 불꽃에서는 그들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귀한 아가씨로는 있을 수 없으니까요."


 남자는 그 말에 멍해졌다.


 그녀는 달랐다, 지금까지 남자에게 찾아온 사람들과는 모든 것이 달랐다.


 도움받기를 원하면서도, 스스로 서려고 한다.


 한없이 연약하면서도, 그런 만큼 굳세었다.


 저런 모습을 보고서 가만히 있는 것은 세상을 구한 자로서 해야 할 도리가 아니다. 다시금, 그의 의무를 행할 때가 온 것이다.


 남자,  아르케멘은 입을 열었다.


 "거기서 그대로 움직이지 마라."

 "네?"


 소녀는 갑자기 변한 아르케멘의 분위기에 당황해 말을 얼버무렸다.


 아르케멘은 불가에 쌓아놓았던 짐을 뒤지더니 연고를 꺼내어 소녀의 목에 발랐다.


 "비전으로 내려오는 연고다. 상처에 효과가 좋아. 다만 흉터는 조금 지겠지."

 "아, 아. 네. 고마워요."

 "이름이 뭐지?"


 아르케멘이 불쑥 고개를 들며 물었다. 


 "에리프요."


 에리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다 엄지 두덩으로 눈을 비볐다. 터진 눈물은 계속 흘렀다.


 자신의 목에 칼날을 겨눠야 할 만큼 몰렸던 상황. 계속 불안했을 것이다.


 아르케멘은 소녀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말거라."


 에리프는 울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어서 자렴. 네 가족을 찾기 위해서는 내일부터 많이 걸어야 할 테니까. 네가 귀한 아가씨든 아니든, 지금 무리하면 내일 일정에 영향이 갈 수밖에 없어. 불은 내일부터 지켜도 된다."


 "아…."


 소녀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마지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가 천막에 들어가고, 얼마 안 가 새근거리는 소리가 그 속에서 들렸다.



 아르케멘은 자신의 이름을 나지막이 불러보았다. 수많은 자책에 포기했던 이름. 시간의 모래에 쓸려 사라지길 바랐던 이름. 그 이름이 돌고 돌아 다시 그에게 돌아왔다.


 "…전부, 끝난 줄 알았는데."


 일반 사람들보다 몇십 배를 오래 산다고는 해도, 그 또한 언젠가는 죽을 터이다.


 그저 이렇게 초원을 떠돌다 죽을 줄만 알았던 삶에, 장애물이 하나 끼어들었다.


 세상과 아르케멘을 다시 이어주는, 에라프라는 이름의 톱니바퀴.


 저 고결한 소녀에 의해 아르케멘의 톱니바퀴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그 누구도…."


 아르케멘은 노란 불꽃을 바라보다가, 빛이 비치지 않는 어둠 속을 보았다. 저 곳으로 소녀를 따라 가리라.


 이 세상이 지켜낼 가치가 있는지, 이 눈으로 확인하겠다.

comment (1)

현안인 작성자 20.02.16. 18:10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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