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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전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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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4:00 Feb 22,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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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ㄹㅍ
협업 참여 동의


지나간 전성기


“경, 다시 한번 말하지요. 도와주십시오.”


“녹슨 검은 다시 벼려지지 않는 법이지요, 대공. 내 몸은 이미 쇠락했고 검조차 잘 들지 못합니다.”

대공은 지치지 않고 내게 계속 탐사대에 참여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나의 한계는 내가 제일 잘 안다.

더 이상 무언가를 하기엔 너무 나이가 들어버렸다. 처자식은 없어도 이미 정착한 집이 있고, 이웃이 있다.

모든걸 버리고 젊은 날의 꿈을 찾아 헤매기엔 늙어버린 것이다.


“북방의 송곳니라는 경의 위명은 십 년이 지났어도 아직 빛이 바래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중앙기사단에 있는 자들은 경을 존경합니다.”

“아직 차마 은퇴하지 못한 이들만이 절 기억하겠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대공은 뜻대로 되지 않자 답답한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속으로 웃었다. 고귀한 피를 타고났다 해도 아직 애는 애였다.

나는 조용히 차로 목을 축였다. 예상이 맞다면 곧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내일 다시 찾아오겠지. 대공은 이틀째 같은 행동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건 젊은 날의 국왕과 퍽 닮아있었다. 대공의 곱상한 외모는 국왕과 닮지 않았지만.


“헤르모드 경, 저는 경이 올렸던 보고서를 하나도 빠짐없이 읽었습니다. 북쪽 설산의 너머에 있는 세계에 대해 쓴 경의 보고서 말입니다.”


“젊은 날 휘갈긴 망상일 뿐입니다.”


“북쪽으로 향한 첫 번째 탐사대가 붉은 돌을 발견했습니다.”


“그건 잘된 일이군요. 제 기억이 맞다면 그 길의 끝에는 동굴이 있으니 베이스 캠프로 쓸만할겁니다.”

“지금까지 발견한 것 중에 경의 보고서와 틀린 건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경, 아직도 보고서를 망상이라 주장하십니까?”


감회에 잠겼다. 붉은 돌, 첫 번째 이정표. 설산 너머의 세계로 들어가는 출입구.

어쩌면 탐사대 또한 자신이 봤던 세계에 도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얼마나 시간이 걸리건 대공과 같은 사람이 계속해서 도전한다면, 누군가는 그 길의 끝에 닿을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아직 그들은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대공님, 오랫동안 낮은 체온으로 있다 보면 사람의 정신이 나가는 법입니다. 보통 사람이 보는 세상과는 다른 세상을 볼 수밖에 없게 되지요. 아마 보고서에도 얼마간의 진실은 함유돼있을 겁니다. 하지만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저조차도 알 수 없습니다. 전 봤던 그대로 적었을 뿐이지만, 인간 개인의 시선이란 언제든지 왜곡되는 법이니까요.”

“경, 원하는 걸 말하십시오. 이 협상에서 대체 경이 도출하고자 하는 조건이 뭡니까?”


“저는 그저 지금 상황에 만족할 뿐입니다.”


더는 의미가 없겠군, 대공은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정 탐사대에 합류하기 싫다면 하나만 대답해주십시오.”

“제가 아는 것이라면 뭐든지 답해드리지요.”


“그곳이 정말 세계의 끝입니까?”


고민했다. 세상의 끝, 대공은 순수한 호기심에서 묻고 있었다.

그러나 그걸 세상의 끝이라고 말해도 되는 것일까, 불쑥 의문이 솟아올랐다.

장시간의 침묵 끝에 나는 대답했다.


“관점에 따라서는.”

“관점?”


“……적어도 저는 그걸 세상의 끝이라고 느끼긴 했습니다. 돌아와야겠다고 생각했으니까.”


대공은 뭔 소린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어쩔수 없었다.

내가 설명할 수 있는 건 이게 한계였다. 정 궁금하다면 본인이 직접 그 끝에 닿는 수밖에 없다.


“뭐… 알겠습니다. 헤르모드 경. 만약 생각이 바뀐다면 대공저로 서신을 보내십시오. 탐사대는 언제든지 경을 환영하니까.”

나는 알겠다고 대답했다. 서신을 보낼 생각 따위는 전혀 들지 않았지만.

대공 일행을 보내고 난 뒤 오랜만에 검을 꺼내 들었다.

창고 깊숙이 검집 채로 처박혀 있던 검은 잔뜩 먼지가 묻어 있었다.

손수건으로 대충 먼지를 털어내며 벽난로 앞에 앉아 검을 반쯤 뽑아 들었다.

거실 벽면이 푸른 빛으로 물들었다.

동시에 쏟아져 나온 냉기는 벽난로의 불길을 한순간에 집어삼켰다.

검은 아직까지도 예리하게 날이 서 있었다. 사람은 늙지만 검은 늙지 않는다.


“레바테인.”

우웅, 검이 그 소리에 화답하듯 울었다.

마검은 아직도 북쪽의 세계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피와 살이 넘쳐나는 세계를.

그러나 나는 이제 다시 그 세계에 뛰어들 생각이 없었다.

그러기엔 전성기가 지나버렸다.

다시 한번 이 검이 쓰일 날이 찾아온다면, 그걸 쓰는 건 내가 아니라 고결한 신념을 가진 누군가가 되겠지.

검집에 검을 집어넣고 벽난로를 들쑤셨다. 남은 불씨가 마른 풀을 먹고 다시 피어올랐다.


10년 전 어느날, 붉은 돌 너머의 동굴에서 나는 지금처럼 불을 지피고 있었다.




 * * *




야만인들의 추격은 거셌다. 그들은 설원 위에 남은 핏방울을 따라 끈질기게 낙오병을 쫓았다.

북쪽으로, 구전조차 전해 내려오지 않는 얼어붙은 땅으로 쫓겨났을 땐 이미 남은 건 자신뿐이었다.

애초에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도 않았다. 수만 명의 야만인을 노예로 잡은 국왕은 지나치게 오만해져 있었다.

국왕은 마치 북쪽의 평정이 끝난 것처럼 굴었다. 승리에 도취된 사내는 수많은 기사들의 간언을 제대로 듣지 않았다.

북쪽으로 진군할수록 보급선은 길어졌고, 추위 탓에 기사들은 말에서 내려 걸어야만 했다.

이후 이어진 급습은 치명적이었다. 지형정찰조차 제대로 되지 않은 땅, 익숙하지 않은 환경, 기마병의 부재.

기사들은 목숨을 걸고 국왕을 탈출시켰다. 전열은 무너졌고, 다들 뿔뿔이 흩어졌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모른 채.


쿨럭, 쿨럭.


가까스로 피워올린 모닥불 앞에 앉자 기침이 쏟아져나왔다.

한순간에 긴장이 풀린 것처럼 몸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동굴 벽면에 몸을 기댄 채 천천히 동굴 내부를 살폈다.

한 켠에 가지런히 쌓아 올려진 장작더미, 짚단, 그리고 바싹 말려진 과일. 그리고 동굴 벽면 전체를 길게 가로지르는 문양.

문양은 깊고 어두운 푸른 빛깔을 흘려내고 있었다. 그다지 높지 않은 동굴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모닥불의 붉은 빛은 벽면 문양에 닿지 못했다.

문양은 스스로 검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꼭 밤하늘에 떠오른 별 같기도 했고, 새벽녘 밤하늘 같기도 했다.

어느 쪽이건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환각을 보는건가, 나는 무심코 그렇게 생각했다.

그게 더 이성적인 판단이었다.

때때로 사람은 눈으로 보는 것조차 믿지 못할 때가 있다. 지금처럼.


그래도 모닥불은 환상이 아니길 빌었다.

이게 환상이라면 나는 죽은 목숨일테니. 모닥불에 바싹 몸을 붙이고 웅크렸다.

동굴 바닥은 생각보다 따뜻했다. 너무 지쳤다. 조금이라도 수면을 취할 수 있을 때 취해야만 한다.

나는 검을 빼들어 언제든지 휘두를 수 있게 오른손으로 검을 쥐어 잡았다.

정말로 적이 온다면 아무 의미 없는 행동이지만 그걸로 최소한의 위안은 얻을 수 있었다.

이윽고 수마가 찾아왔다.



 * * *



며칠이 지났다. 바깥에 불어닥친 눈보라는 아직도 그치지 않았다.

생활은 나쁘지 않았다. 장작은 온종일 불을 지펴도 몇 개월은 버틸 수 있을 정도로 많았다.

말린 과일도 겉에 드러난 만큼 빼내자 땅 밑으로 양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쏟아져나왔다.


그쯤 되자 동굴의 쓰임새가 몹시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사냥꾼들의 캠프라고 생각했지만 동굴을 둘러볼수록 기묘한 점이 많았다.

동굴은 몇십 분을 걸어야 끝이 보일 정도로 깊었다.

그리고 동굴 내부에는 끊기는 지점 없이 푸른 문양이 내내 이어져 있었다.

빛 한 점 들어오는 곳 없었지만, 동굴 내부는 횃불 없이도 길을 찾을 수 있을 정도로 밝았다.

걷다가 머리 위를 바라보면 꼭 달과 별이 뜬 밤하늘을 보는 것 같은 기시감이 들 때도 있었다.


그리고 동굴의 끝에는 검이 있었다.

밝게 빛나는 언덕 위에 반쯤 박힌 검은 그야말로 기묘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호기심에 검을 뽑으려 손을 대봤지만 느껴지는 한기에 화들짝 놀라 손을 떼버렸다.

손에 옷을 칭칭 둘러 시도해봤지만 한기가 느껴지기는 매한가지였다.

검이 부러진 것도 아니었기에 이름 모를 검을 뽑는 건 금방 포기해버렸다.

하지만 언덕 위의 비석에 적힌 문자를 해석하는 건 포기하지 않았다.

그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소일거리도 했거니와, 쓰여진 내용이 범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거나 □□거나 ■은 □□에 있다.]


비석에 적혀진 문자들은 고대 국어였다. 최소한 300년 전에나 쓰였을 법한 문법과 단어들.

어렸을 적에나 교양으로 배웠던 것들이었다.

인생에서 쓸 일이 없다고 생각해서 제대로 듣지도 않았지만.

짧은 소양으로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은 많지 않았지만 어떻게든 머리를 짜내 문장을 맞춰나갔다. 어떤 특정 글자는 누군가 의도적으로 지워낸 듯 움푹 패여 있었다.


이전에도 누군가 이곳에 왔던걸까?

이런저런 망상을 이어나갔지만 결론적으로 알 수 있는 건 없었다.

비석을 바라보면서 늘어난 건 고대 국어 문해 실력이 아니라, 상상력 뿐이었다.



 * * *



꽤 많은 시일이 지났다.

바깥은 아직도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었다. 처음엔 부정했지만 이젠 부정할 수도 없었다.

이곳의 눈보라는 결코 멈추지 않는다.

야만인들의 눈을 피해 돌아갈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지만 눈보라를 뚫고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이곳에 도달할 수 있었다고 돌아갈 때도 멀쩡하리라는 보장은 없으니까.


그래도 그 동안 나름대로의 성과는 있었다.

비석에 있는 마지막 문장을 해석했다. 해석이라기보다는 끼워 맞추기에 가까웠지만 의미는 틀리지 않을 것이다.


[슬프거나 기쁘거나 ■은 여기에 있다,]


의미심장한 소리였지만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무언가 여기에 있다, 중에서 가장 중요한 ‘무언가’가 지워져 있었다.

추측하건대 언덕 위의 검을 말하는 것 같긴 하지만… 이게 무슨 의미인지 도통 알 수가 없다.

나머지 문장들은 단어 자체가 해석이 되질 않았다. 어쩌면 고대 국어가 아니라 다른 언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가 됐건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하나였다. 검을 뽑아보는 것.

검을 뽑아도 집으로 돌아갈 별다른 방법이 생기지 않는다 해도 그건 어쩔 수 없다.

기사는 기사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다.


검 손잡이를 잡기 전에 고개를 내려 검의 모습을 찬찬히 살폈다.

손잡이에 새겨진 문양은 뱀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손잡이를 칭칭 휘어잡은 뱀은 손잡이 끝에서 크게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그 이빨이 향하는 곳은 검을 쥔 사용자를 향하고 있었다.

불길하기 짝이 없는 문양이다. 꼭 전설 속에 나올 마검이나 갖고 있을 만한.


비이성적인 생각이다. 나는 생각을 접고 두 손으로 손잡이를 쥐어 잡았다.

손이 금방 얼어붙을 것처럼 아려 왔다. 금방이라도 두 손의 감각이 끊어질 것 같다.


으, 아아아아-!


팔 근육이 팽창했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손의 말단부에서부터 타고 올라온 한기는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뼈가 시릴 정도로 추웠다. 피가 모두 얼어붙은 것 같았다.

어느 순간부터 두 손이 제대로 검을 쥐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고개를 젖히고 눈을 감은 채 검을 들어 올리고 있다는 말을 몇 번이나 중얼거렸다.

이윽고 대부분의 감각이 끊겼다. 어둠 속에서 나는 검을 잡고 있는 힘껏 끌어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도 내가 그러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나는 뭘 하고 있지?


[날 쥐고 있잖아.]


누군가 부드럽게 속삭였다.

어둠 속에서 파고든 목소리는 의심할 수 없을 정도로 달콤했다.

그래, 나는 그것을 쥐고 있었다.


그런데, 난 뭘 하고 있지?


[넌 선택하고 있어.]


선택?

[그래, 선택해봐. 기사. 날 계속 쥘지, 말지.]


널 쥐면 뭐가 달라지지?

[기사는 기사로서 계속 남아있을 수 있겠지. 날 놓으면, 넌 아무것도 아닌 게 될테고.]


킥킥, 웃음소리가 한 박자 늦게 들려왔다.

나는 그 속에 숨겨진 불길함을 느끼면서도 망설임 없이 검을 쥐었다.

기사는 기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만 한다.


그리고 나는 그제야 검이 뽑혀져 나왔음을 느꼈다.



눈을 떴을 땐 모든 것들이 전부 얼어붙어 있었다.

뽑혀진 검에서는 여전히 서늘한 냉기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지만 더 이상 손이 시릴 정도로 차갑지는 않았다.

손잡이에 각인된 뱀은 아가리를 닫고 예리한 눈으로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검을 손에 쥔 순간 나는 몇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 검, 레바테인을 뽑는 순간 길은 한쪽으로만 열린다.

그리고 길은 세상의 끝까지 이어진다.


나는 동굴 벽면에 그어진 균열을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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