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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한대] 혈기사가 너무 덜 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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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27 Oct 18,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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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하유지
협업 참여 동의

마왕 헬페리온의 심장에 검을 꽂아넣었을 때, 모든 게 끝난 줄 알았다.

[13번째 퀘스트. 동료 모크를 살해하십시오. 난이도: ??? 제한시간: 30분 진행도 99.9 %/ 100% 보상: 지구 귀환]

메시지를 보기 전까지는.

*

심장에 꽂힌 검을 뽑았다. 살결을 헤집는 역겨운 감각과 함께 검이 선혈을 뿌렸다.

많은 것을 희생한 전쟁이었다. 마왕 헬페리온. 녀석의 방식은 잔혹했다. 셀 수 없이 많은 인간들이 그의 계략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최후의 결전에서는 동료들마저 전부 명을 달리했다.
모크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툭, 칼끝이 지면에 추락했다. 오른팔에 힘이 없었다. 손 끝에서 지면을 향해 내달리는 검이 무게추처럼 무거웠다. 마왕의 시신을 면전에 두고서, 나는 서서히 고개를 뒤로 돌렸다.

“모크.”

목덜미에 느껴지는 감각이 서늘했다. 그러나 위협적이진 않았다. 검신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고개를 완전히 돌려, 내 목에 검을 겨누고 있는 녀석의 두 눈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너도냐?”

[13번째 퀘스트. 동료 매론을 살해하십시오. 난이도: ??? 제한시간: 30분 진행도: 99.9%/100% 보상: 지구 귀환]

시선을 내리자 녀석의 메시지가 보였다. 좌우가 반전되어 있었으나 내용을 읽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검 내려.”
“매론.”
“다른 방법이 있을거야. 나를 믿어.”

“웃기지마.”

녀석은 꼴사납게 닭똥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목에 닿은 칼날의 떨림이 심해졌다.

“우린 여태까지 메시지의 내용을 따라왔어. 거부한 녀석들은 몸이 터져 죽었고, 순응한 놈들만 살아남았지. 마지막이라고 해서 다를 것 같아? 시간이 30분도 채 남지 않았어, 매론. 만약 방법이 있다고 해도 이 짧은 시간 동안 네가 뭘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것은 말이라기보다 울음에 가까운 음성이었다. 녀석은 가까스로 목소리를 짜내 말을 이었다.

“네가, 마왕만 죽이면 다 끝난다고 했잖아. 이 빌어먹을 메시지가 마왕의 농간이라고. 그런데 아니었어. 개자식. 너 떄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는지 알기나 해!”
“그건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어.”
“닥쳐!”

녀석의 폼멜이 뺨을 후려쳤다. 헬페리온에게 모든 힘을 쏟아낸 몸은 충격을 버티지 못한 채 힘없이 쓰러졌다.

모크가 내 멱살을 잡아올렸다.

“모두가 너를 믿고 따랐어, 거인족을 토벌하고, 드래곤로드를 사냥하고, 마침내 마왕까지 잡아냈지. 그런데 우리에게 남은 건 뭐지?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죽었고, 이제 대륙에는 사람보다 시체가 더 많아.”

멱살 채로 지면에 내팽겨쳐졌다.

“나까지 이렇게 죽을 수는 없지. 그동안 군말없이 네 말에 따랐잖아. 그러니.”

칼을 힘껏 들어올렸다.

“이번에는 네가 양보해줘야겠다.”

칼날이 단전에 내리꽂히는 순간이었다.

[패시브 ‘죽음의 권능’이 발동되었습니다.]

혈기사의 고유 패시브, 일순 두뇌가 가속했다. 시야가 트였다. 식물인간이나 그에 준하는 무언가였던 전신에 온통 활기가 돌았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 모든 일련의 행위가 찰나의 순간에 이루어졌다.

순식간에 모크의 뒤로 이동해 녀석의 목덜미를 내려쳤다.

윽, 하는 소리와 함께 녀석이 쓰러졌다. 죽인 것은 아니었다. 단지 기절시켰을 뿐.

숨을 한껏 들이마신 뒤 주위를 둘러보았다.

헬페리온이 쓰러지는 순간, 미세한 마나의 파동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메시지창이 갱신되었다는 사실 역시 알았다.

악취미군. 이를 갈았다. 숨어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어. 이곳 어딘가에 있다. 위치는? 기감을 넓게 뿌렸다. 그러나 모든 것이 고요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마치 아무도 없는 것처럼. 아니야. 고개를 저었다. 분명 이곳에 있어. 조금만 더. 무수히 얇아진 기감이 그물망처럼 넓게 내부를 둘러쌌다.

고요해진 정신이 내부의 모든 것을 파악했다. 벌레 기어다니는 소리가 클락션처럼 컸다. 그리고 마침내.

“찾았다.”

순식간에 달려들어 벽에 검을 꽂아넣었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벽면이 갈라지고 녀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신 베르무트.”

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마기덩어리가 음산한 웃음을 흘려댔다. 시뻘건 눈과 입이 헤벌쭉 올라가며 커다란 웃음을 토했다.

“네가 범인이었군.”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거인족의 왕도, 드래곤 로드도, 헬페리온도 아니었어.”

제한시간은 10분. ‘죽음의 권능’의 유지시간이었다. 그 시간이 지나면 손가락 하나 까딱 못하게 된다.

비틀거리는 몸을 이끌고 녀석의 앞으로 향했다.

“방법이 있을 거라고 했잖아, 모크.”

검을 들어올렸다.

“시간 안에 끝내주마.”

*

어린시절 내게 기사란 항상 동경의 대상이었다.

조국을 사랑하고, 약자를 존중하고 지키며, 적 앞에서 등을 돌리는 일이 없으며, 항상 부정과 악에 맞서 ᄊᆞ우는 정의의 투사처럼 묘사되는 이들.

중세 유럽 관련 문학들의 화려한 문체와 미사여구는 당시 중학생이었던 내게 환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따라서 게임을 할 때면 항상 직업으로 기사를 택했다. 21세기에 창을 들고 방랑여행을 떠날 수도 없는 노릇이니, 가상 세계에서라도 그 욕구를 실현하고 싶었다.
그것은 10년 지기 친구 김태현도 마찬가지였다.
근묵자흑이라고, 기사 문학 덕후였던 나를 따라 녀석도 같이 이 세계에 빠져든 것이다.

최초의 가상현실게임 발로란의 오픈 당일.

“이름이 모크가 뭐냐, 모크가.”
“시꺼, 새끼야. 너야말로 매론이 뭐냐? 메론도 아니고 ‘매’론?”
“메론은 이미 있는 닉네임이라는데 어떻게 해.”
“나도 목마로 하려고 했는데 이미 있는 닉이라더라. 시발, 무슨 가상현실게임이 병신같이 닉네임 중복도 안 돼.”

우리는 서로의 우스꽝스러운 이름을 보며 낄낄거렸다. 근묵자흑. 10년 지기 친구라고, 다른 닉네임을 놔두고서 꼭 두 글자 닉을 고집하는 것도 똑 닮았다.

당연하다는 듯이 우리는 기사로 전직했다. 나는 혈기사, 모크는 성기사였다.

둘이서 대륙의 모든 곳을 탐험했다. 동부부터 서부까지, 북부부터 남부까지. 광활한 세계였지만 10년이라는 세월은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했다.

그리고 정확히 10년이 지났을 때, 우리는 완전히 이 세계의 일부가 되었다.

“경수야.”
“왜.”
“나 로그아웃이 안된다.”
“지랄하지마.”
“아니, 진짜야. 혹시 넌 되냐? 이거 나만 이런거야?”
“어, 진짜 안 되네.”
“그렇지? 이런 적은 처음인데. 서버가 맛이라도 갔나.”
“...이거 뭐야. 퀘스트?”
“오크 로드를 죽이시오? 이벤트 같은건가. 아니, 그보다 운영자 어디갔어. 유저가 로그아웃이 안되는데 이딴 메시지나 띄우고, 대체 어디서 뭘 하는거야?”

상황을 파악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제한시간을 초과한 한 유저의 신체가 폭발을 일으켰다. 동시에 우리는 이것이 단순한 버그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혼돈. 살기 위한 발버둥이 시작되었다.

비슷한 처지에 놓인 유저들을 규합했다. 대륙을 돌아다니며 만든 인연을 빌려 이 빌어먹을 세계를 탈출하기 위한 여정에 나섰다.

거인족을 토벌하고, 드래곤 로드를 사냥했으며, 마왕 헬페리온을 잡아냈다. 그러나 이 빌어먹을 메시지는 망령처럼 달라붙어 지워지지 않았다.

베르무트를 발견했을 때 회의감이 들었다. 살아남는 게 더 이상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만약 여기서 녀석을 살해한다 해도, 희생된 유저들을 되돌릴 방법은 없다. 무수한 목숨의 무게를 짊어지면서까지 내가 살아낼 가치나 자격이 있나 의문이 앞섰다.

다만, 한 사람은 부디 그래주었으면 했다. 작은 소망이었다. 그 사람은 그럴 자격이 있었다.

외톨이였던 한 중학생의 옆자리를 지켜주었던 사람.
바보같은 취향도 편견없이 어울려 이해해주었던 사람.
어리석은 지휘도 군말없이 함께 해주었던 사람.

그 사람은 반드시 살려 보내리라 다짐했다.

*

시야가 흐릿했다. 목전의 풍경이 겹쳐보였다. 쿨럭, 하고 피를 토하자 이내 눈앞이 선명해졌다.

베르무트는 그저 웃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일까. 이래저래 악취미였다.


“스테이터스 오픈.”

[패시브 ‘죽음의 권능’이 활성화 상태입니다. 남은시간: 90초]

간신히 목소리를 짜내 주어진 시간을 확인했다. 시간이 없어. 만신창이인 몸을 일으켰다. ‘죽음의 권능’이 활성화 상태인데도 전신에 힘이 없었다.

기왕이면 같이 돌아가고 싶었는데. 헛웃음을 쳤다. 너무 욕심이었나봐. 허리춤에서 단검을 꺼내들었다. 땅을 박차 모그에게 다가서 관자놀이에 훅을 날렸다.

“시간 끌지 말걸 그랬다, 태현아.”

단숨에 단검을 내 몸에 쑤셔넣었다.

“네가 원하는대로 나둬야했어.”

가까스로 정신을 붙들었다. 모그의 손을 잡아 단검의 손잡이에 갖다댔다.

“마지막까지 허튼 짓만 하는구나, 나는.”
“...매론? 권경수? 잠깐. 뭐하는…….”

정신을 차렸는지 음성에 당황한 기색이 어렸다. 한계였다.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다.

“행복해라.”
“잠깐…….”

[13번째 퀘스트 완료. 동료 매론을 살해하셨습니다. 진행도 100%/100%]
[모든 퀘스트를 완료하셨습니다. 보상을 지급합니다.]
[발로란 대륙을 떠나 지구로 귀환합니다.]


*


꿈을 꾸었다.
아주 긴 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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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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