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소설회랑

내가 이름을 바꾸게 된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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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2:30 Oct 19,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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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limo
협업 참여 동의

하진경은 백수다.

할 일 없이 인터넷 커뮤니티나 들락거리는 백수.

어느덧 8월이 다 지나가는데도 성과라고는 없다.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였다면, 진경은 오늘도 좋아하는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시간이나 때웠을 것이다.


그래, 갑자기 벽 속에서 튀어나온 저 판타지 세상 속 공주님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진 경?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시는 건가요?"


"그쪽 분을 어떻게 설득시켜서 집으로 돌려보낼지 고민 중이었죠."


"너무해요! 전 진 경을 만나기 위해 수천 차원을 넘었어요! 정말 절 이렇게 보내실 건가요?"


"아니 그러니까, 그 쪽이 찾는 진 경은 내가 아니라니까?"


진경은 답답함을 못 이겨 소리를 쳤다.

벌써 수 백 번은 한 얘기였건만, 저 겉보기만 예쁜 여자는 도통 이해할 줄을 모른다.

진경은 한 번만 더 참자고 다짐하며, 마치 유치원생에게 설명하듯 차근차근 말을 시작했다.


"좋아요. 처음부터 다시 얘기해봅시다. 그 진 경, 아니 진이라는 분이 어떤 사람이었다고요?"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푸른 머리칼의 여자가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진 경은 왕국 제일의 기사였어요. 낮은 신분으로 태어났지만, 그 검술로 신분의 한계를 극복했지요.

 언제나 약한 자를 돕고, 아무리 위험한 상황이라도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뛰어드는 기사도의 표본같은 분이었어요.

 그리고, 제 소꿉친구이기도 했고요."


"그거 참, 무슨 쌍팔년도 소설 속 용사도 아니고. 하여간, 그 진이라는 분을 찾기 위해 뭘 썼다고요?"


"탐색 아티팩트요! 세상에 2개 밖에 없는 물건인데, 찾고 싶은 상대를 찾을 수 있게 도와줘요. 설령 상대가 다른 차원에 있더라도요."


여자는 여보란듯이 길쭉한 지팡이를 진경에게 내밀었다. 이 물건 덕분에 당신을 찾을 수 있었노라 자랑하기라도 하듯.

충분히 귀여울 법한 모양이였지만, 진경은 인상만 찡그렸다.

같은 말을 몇십 번 반복해도 못 알아먹으니 아무리 귀엽게 굴어도 얄밉게만 느껴졌다.



"그래요. 이 물건이 나를 가르켰다는 얘기는 벌써 수십 번을 들었고, 그런데 이 물건은 제한이 있다고 아까 그랬잖아요? 그 쪽 기운이 담긴 물건을 상대가 가지고 있지 않으면 어떻게 된다고 했죠?"


"찾을 수 없어요! 정확히는, 찾고자하는 사람과 비슷한 조건의 사람을 수백만 명쯤 찾게 되죠."


진경은 감탄하며 박수를 쳤다.

드디어 이 아가씨를 납득시킬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요. 그럼, 우연히도 그 진 경이라는 대단하신 분과 비슷한 이름을 가진 나는 어떤 사람일까요?"


"정답! 같은 사람이다!"


"아오 씨! 야!"


진경의 고함소리 위로 천진난만하게 깔깔거리는 여자의 웃음소리가 섞였다.


*****


사태는 해가 질 무렵, 진경이 반쯤 탈진하고나서야 진정되었다.


"아오, 가뜩이나 더운데 소리까지 질러댔더니 죽을 것 같네."


"후후, 미안해요. 제가 장난이 너무 심했죠?"


바닦에 쓰러지다시피 했던 진경이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뭐요? 장난?"


"네. 장난이요."


진경이 어처구니가 없어 입을 다물지 못하는데, 여자가 말을 이었다.


"진 경이 제게 정체를 밝히지 않으려는 건 잘 알겠어요. 분명 제가 모르는 합당한 이유도 있겠지요. 진 경은 상냥하고 정의로운 기사니까 분명 절 걱정해서 그러시는 거라고 생각해요. 다 알면서도 괜히 심술을 부렸어요."


"하아..."


맥이 풀린 진경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결국 수 시간에 걸친 노력에도 불구하고 저 여자를 설득하지 못했다.


"하나만 물어봅시다."


"뭔가요?"


"대체 왜 그렇게 제가 그 진 경이라고 확신하는 겁니까?"


"얼굴이요."


"얼굴? 그것 참, 별 거 없으면서도 당연한 얘기네요. 그 진이라는 분이 저를 똑 닮아서 아주 잘 생기셨나 봅니다?"


"후후, 왜 궁전에서는 진 경이 이렇게 재밌는 분이라는 걸 몰랐을까요?"


'그야, 내가 그 진 경이 아니니까 그렇지.'


진경은 이렇게 대답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어차피 말해봤자 들어주지도 않는다는 건 수 시간의 대화로 확인한 사실이었다.

진경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여자가 노래하듯 말했다.


"진 경은 그렇게 잘 생기진 않았어요. 어린 시절의 고생이 얼굴에 담긴 탓이겠지요. 피부는 얽었고 코는 부러진 것처럼 생겼어요."


"아니 지금 그렇게 뜬금없이 앞담을 하는 겁니까?"


"하지만 그 눈빛만은 달라요. 불타는 듯한 굶주린 눈빛. 결코 꺾이지 않을듯한 신념이 들여다보이는 눈인걸요."


여자가 부드럽게 웃으며 진경을 쳐다보았다.

진경은 부끄러워서 차마 눈을 마주칠 수도 없었다.

저게 판타지 세계의 평범한 감수성인지는 모르겠지만, 진경이 감당하기에는 지나치게 오글거렸고, 또 지나치게....과분한 말이었다.


"...저는 멀쩡히 잘 다니던 대학교를 자퇴한 병신입니다."


진경은 자신이 왜 이런 말을 뱉었는지 몰랐다.

내뱉은 즉시 후회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한번 꺼낸 말은 멈출 수 없었다.


"제 수준에 맞지 않은 과분한 대학이었어요. 부모님이 절 자랑스러워하셨고, 할아버지는 동네 잔치까지 열려고 하셨어요. 그런데, 제가 병신같이 그만둬버렸어요. 고작 2년만에. 고작 그것도 못 견디고 멍청하게. 그만둔 이유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어요. 고작해야 몇 년만 있으면 졸업할 선배들의 괴롭힘이 견디기 힘들어서 그랬다고는 차마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으니까."


말을 하다 말고 진경은 자신이 왜 말을 멈추지 못했는지 깨달았다.

왜 몇 시간이나 바락바락 악을 써가며 저 공주를 돌려보내려고 애썼는지도.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라고 멋대로 오해했다가 실망하는 사람들을 더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부터 저 공주에게 말하고 싶었던거다. 난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고.

하잘것없는 일에 속절없이 무너져서 좁은 방에 스스로를 가둔 채 저급한 쾌락이나 탐닉하는 병신이라고.


당신처럼 환상적이고 아름다운 사람과 친해졌다가 당신까지 나한테 실망해서 떠나버리면, 그때는 정말 못 견딜 것 같으니까, 그래서 작년에 못다한 짓을 끝내 저질러 버릴 것 같으니까, 그냥 당신이 나타났던 것 자체를 없던 일로 하고 사라져 달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콩알만큼 남은 자존심이 그 말만은 하지 못하게 가로막고 있었는데, 결국 공주는 그 자존심마저 넘어서버렸다.


진경은 팔로 눈을 가린 채 공주에게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그쪽이 아는 진 경이라면 그런 일은 없었겠죠? 왕국 제일의 기사씩이나 되는 분이니 그런 위기쯤은 당연히 쉽게 극복하고 넘어갔겠지요. 그러니까 저는 그 진 경이 아닙니다. 이제 가세요 공주님. 진짜 진 경을 찾으러 가시던가, 아니면 왕국으로 돌아가세요."


그러나 공주는 가지 않았다.


"저기요, 저 좀 봐요."


"싫어요, 안 볼 건데요. 좀 가세요."


진경은 차마 공주와 눈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저 사람이 어떤 눈으로 자신을 바라볼지 알고 싶지 않았다.


그 때 무언가 까슬까슬한 것이 진경의 얼굴에 닿았다.

화들짝 놀란 진경이 저도 모르게 팔을 들어 그것을 치우자, 눈 앞에 공주가 보였다.


공주는 진경의 옆에 쪼그려 앉아 진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공주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진경의 얼굴을 스칠 정도로 가까이에서.


"이봐요, 진 경. 왜 그렇게 스스로를 몰아세우는 거에요? 그렇게 자기자신한테 엄격한 것까지 당신답다고는 생각하지만, 그래도 적당히 하세요. 진정한 기사라면 고작 한 번의 실패로 무너지지 않아요."


진경은 울 듯이 공주를 쳐다봤다. 정말 지긋지긋한 여자다. 사람을 세뇌하기라도 하려는지, 끝끝내 자기 의견을 바꾸지 않는다.


"저는 사실 이쪽 차원의 얘기는 잘 몰라요. 대학이니, 그만뒀다느니. 그래도 그게 당신한테 큰 상처를 줬다는 건 알겠네요. 하지만 그게 뭐 어때서요? 좀 다칠수도 있고 주저앉을 수도 있겠죠. 그래도 당신은 곧 다시 일어설 수 있을거에요. 왕국 최고의 기사, 진 경이잖아요?"


공주는 흔들림없는 눈으로 진경을 쳐다봤다.

한 점의 의심도 없이 상대를 믿는듯한 투명한 눈빛이었다.


공주가 그런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것은 자신을 그 '진 경'이라고 생각해서 그런거였다.

진경도 알았다. 분명히 이해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알았으니까 비켜봐요. 좀 앉게."


그럼에도 진경은 그 눈빛이 그렇게 싫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이 그 진 경이 되고 싶다고 느낄 정도로.


*****


진경이 화장실에서 감정을 추스르고 나왔을 때는 어느덧 밤이 깊어 있었다.

진경은 공주를 위해 침대를 양보하고 바닦에 요를 깔고 잠을 청했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그렇게 했다.


진경은 딱히 공주에게 자신이 바로 진 경이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니라고도 하지 않았다.


진경은 공주가 입을 옷을 샀고, 좁은 방을 어떻게든 둘로 나누어 공주가 있을 공간을 만들어냈다.

진경은 곧 공주의 이름이 레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왕국에서의 생활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공주는 진경이 평소 무엇을 하며 지내는지 알게 되었다. 그 일상을 공유함으로써 말이다.

둘은 함께 게임을 하고, 드라마를 보고, 웃고 떠들어댔다.


공주는 진경이 일종의 기억상실증에 걸렸거나 의도적으로 자신을 모른 체 한다고 생각하기로 한 것 같았다.

공주는 진경에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았다. 자신과 함께 왕국으로 돌아가자고 말하지도 않았다.

그저 함께 시간을 보내다가 때때로 웃으며 진경의 어떤 행동이 진 경 답다고 칭찬했을 뿐이었다.

처음 며칠은 그 말이 참 불편했지만, 진경은 곧 적응했다.

오히려 자기합리화까지하게 되었다.


'저 마법세계의 공주님이 날 진 경이라고 부르잖아. 내가 뭐 기억을 잃은 진 경이나 그런 건 아닐까? 판타지 소설에 보면 흔히 나오던데. 이세계의 용사였지만 지구로 돌아오는 대가로 기억을 잃고 뭐 그런 거. 이름도 똑같고 얼굴도 똑같으면 당연히 같은 사람 아니야?'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자, 진경은 조금 더 자신감이 생겼다.

공주에게 진 경의 일에 대해서 물어볼 정도로.


"레나, 어쩌다가 날 찾아 차원을 넘어다니게 된 거야?"


공주는 난감한 듯 고개를 돌렸다.


"으음, 이런 말은 좀 불편한데."


망설이던 공주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네가 없어진 게, 내 탓이라고 생각했어."


"응 네 탓이라니?"


"그야....내가 네 청혼을 거절했으니까."


"뭐?"


공주는 변명하듯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어쩔 수 없었어. 난 널 소꿉친구라고 생각했지, 연인으로는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너무 당황스러워서, 그래서 일단 거절했던 것 뿐이야. 설마, 그 다음 날 네가 사라질 줄은 상상도 못 했어."


진경은 잠깐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공주가 그 진 경을 소꿉친구로만 생각했다는 것이 기뻤지만, 진 경에 대한 평가는 자신에 대한 평가이기도 했다.


"아바마마께서 진 경이 죽었다고 내게 알려주셨어. 그 분과 진 경이 단 둘이 있을 때 암살자가 습격했다고, 진 경은 영웅적인 최후를 맞이했다고. 하지만 믿을 수 없었어. 진 경이 고작 암살자한테 살해 당했다고? 게다가 결정적인 증거도 있었는걸?"


공주가 무언가 주문을 외우자, 허공에 보랏빛 균열같은 것이 나타났다.

공주는 그 안에 망설임없이 손을 집어넣더니 무언가를 꺼냈다.

길쭉한 목재함이었다.


"열어 봐."


진경이 시키는대로 함을 열자, 그 안에는 화려한 보석으로 장식된 검이 검집에 박혀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건?"


"보이는대로. 진 경의 검이야. 진 경이 아닌 자가 손잡이를 만지는 즉시 몸이 불타 사라지는 마법까지 걸린 명검이지."


진경은 황급히 손을 상자에서 멀찍히 떼어놓았다.


"진 경과 같이 명예로운 기사의 장례식에는 마땅히 그가 쓰던 검을 함께 묻어주어야 해. 아무리 명검이라도 예외는 없어. 아바마마가 고작 물욕 때문에 진 경의 명예를 저버릴 분도 아니시고. 그러니 이 검이 멀쩡히 존재한다면, 결론은 하나 뿐이야."


공주가 진경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진 경은 살아있어. 여기. 이 곳에."


공주는 목재함을 진경에게 내밀었다.


"돌려줄게. 그건 원래 네 검이잖아."


진경은 침을 꿀꺽 삼키고 공주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봐도, 목재함 채로 가져가라는 말로는 들리지 않았다.


"음,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네가 보관해주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어째서?"


납득할 수 없다는 듯 공주가 외쳤다.


"그게...."


진경은 차마 검을 들어올릴 용기는 내지 못했다.

목숨의 위협 앞에서는 팽팽 잘 돌아가던 자기합리화도 동작을 멈췄다.

그래서 진경은 변명으로 위기를 넘기기로 했다.


"여긴 지구야 레나. 네가 살던 왕국이 아니라고. 여기서 검을 차고 다닐 수는 없어."


공주는 아리송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같이 한 게임이나 만화에서는 다들 검을 잘 차고 다녔잖아?"


"그건 만화나 게임이니까 그렇지.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들을 다룬 이야기라고."


공주는 어느정도 납득한 기색이었지만 여전히 불만에 차 있는 것처럼 보였다.

진경은 황급히 말을 이었다.


"그건 내 목숨같은 검이니까, 네가 맡아서 지금처럼 가지고 다녀줬으면 좋겠어. 그래야..."


순간 진경의 말이 턱 막혔다.

머릿속에 떠오른 말은 있는데, 차마 그 말을 꺼낼 자신이 없었다.

이런 진경의 속도 모르고, 공주가 말을 재촉했다.


"그래야?"


"...그래야 레이디가 필요할 때 검이 제 역할을 다할 수 있을테니까요. 마이 레이디."


"하하, 뭐야 진. 그렇게 오글거리는 건 이제 그만두기로 한 거 아니었어?"


그렇게 말하면서도 내심 기분이 좋았는지, 공주의 웃음은 멈출 줄을 몰랐다.

진경은 자괴감에 몸을 비틀어댔다.


'저 판타지 세상 공주님이랑 함께 지내는 동안 내 언어체계도 같이 맛이 갔나 보군.'


하지만 일단 이렇게 위기를 넘겼고, 또 저렇게 좋아하니까 그걸로 된 것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니 또 가슴이 가벼워졌다.

진경은 그냥 레나와 같이 웃어 넘기기로 결심했다.

당장의 문제를 또다시 미루어버린 채로.


*****


그 날 이후부터, 레나와 진경은 종종 같이 산책을 나섰다.

레나가 만화와 게임을 통해서만 지구를 보고 있던 것이 미안했기 때문이었다.


진경으로써는 굉장히 오랜만의 외출이었지만, 레나와 같이 있으니 두렵지 않았다.

둘은 함께 쇼핑을 하고, 맛있는 것을 먹으러 다녔다.

레나는 가벼운 혼동 마법으로 외모를 바꿀 수 있었고, 평범한 커플처럼 보이는 둘을 아무도 방해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 날까지는 말이다.


"어어? 이거 진경이 아냐? 야! 허진경!"


덩치 큰 남성이 별안간 진경의 등을 두들겼다.

레나가 깜짝놀라 남자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 사람은 허진경이 아니라 하진경인데요? 사람 잘못 보신 것 아닌가요?"


"아아, 그 쪽은 잘 모르시나보구나. 이 친구 별명이 허진경이거든요. 하도 허풍을 잘 떨어대서."


남자는 레나를 무시하고는 다시 진경 앞으로 다가갔다.


"진경아, 이 분은 누구셔? 너 여자친구? 야아, 우리 진경이 잘 지냈나보네. 자퇴하고 소식이 안 닿아서 걱정했는데."


레나는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건들대는 말투를 보면 썩 좋은 사람은 아닌 것 같았지만, 레나는 지구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대체 어떻게 행동해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때, 진경이 앞으로 나섰다.


"레나, 잠깐만. 아는 사람인데 나랑 할 얘기가 있나 봐."


"괜찮은 거 맞아?"


"당연하지. 그러니까 잠깐만 여기서 기다려줄래?"


"응? 응... 알았어."


불안해보이는 레나를 뒤로하고, 진경은 남자를 따라 골목길로 들어갔다.


"여자친구 예쁘다? 그간 잘 지냈나봐? 난 잘 못 지냈는데."


남자가 진경에게 이죽거렸지만 진경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남자는 더욱 신나서 진경에게 욕지거리를 해댔다.


"너 때문에 학과 사람들이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어떻게 학과를 신문사에 팔아 넘길 생각을 해? 대하일보에 명문 대학의 그림자, 똥군기 논란이라고 대서특필되게 만들고서는, 뭐? 너는 자퇴해서 쏙 빠져나와? 아주 그냥 너밖에 생각 안하지? 어?"


진경은 속으로 똥군기 맞잖아, 이 개새끼야라고 생각했다.

남을 생각하지 않아서 자퇴한게 아니라 남을 생각했기 때문에 자퇴한 거라고도.

끝까지 범인 색출이 이어졌으면 결국 모두가 고통받거나, 아니면 제보한 게 들킨 놈이 처벌히 보복당할게 뻔한 것 아니었냐고.

그럴 바에는 차라리 내가 자퇴하고 범인으로 몰려서 끝나면 다들 좋은 것 아니냐고도 생각했다.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에는 한 마디도 꺼내지 못했다.

그게 하진경이라는 사람이었으니까.


남한테 말 한 마디 함부로 못하고 벌벌 떨고, 화 내는 사람이랑 눈 마주치는 것도 겁내는 사람.

동기를 생각하느니 뭐니, 사실은 다 핑계였다. 그냥 그 상황이 무겁고 힘들어서 더 견딜 수 없었다.

나약하기 짝이 없는 하진경은 학교를 자퇴한 뒤에도 선배에게 대들 용기 한 번 낼 수 없는 인간이었다.

그래서 진경은 묵묵히, 선배가 할 말을 다 하고 떠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때, 뒤 쪽에서 들려서는 안 될 목소리가 들렸다.


"진 경! 이걸 받아요!"


진경은 얼결에 손을 내밀었다가 화들짝 놀랐다.

익숙한 검집이 두 손에 얌전히 들려 있었다.


"으, 으아악!"


진경은 화들짝 놀라 검집을 손에서 던져 버렸다.


"지, 진 경?"


당황하는 듯한 레나의 목소리를, 선배의 거친 웃음소리가 묻어버렸다.


"으하하하, 그, 그게 뭐야? 칼? 야, 진경아. 너 진짜 너랑 잘 어울리는 여자친구를 찾았구나? 진짜 둘이서 아주 쌍으로 또라이네."


선배는 레나의 어깨를 양 손으로 붙잡았다.

원래라면 충분히 도망갈 수 있었지만, 레나는 그러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탓이었다.


"어휴, 얼굴은 예쁘장한데 머리는 영 아닌가보네. 왜, 저 놈이 저걸 휘둘러서 날 어떻게 하기라도 바랬나보지?"


"그만해! 그 사람 건드리지 마!"


진경이 처음으로 목소리를 냈다.


처음으로 한 반항이었지만, 더없이 나약했다.


"그만두긴 뭘 그만 둬, 이 새끼야."


선배는 비웃음을 흘리다가 돌연 주먹을 내질렀다.

진경은 볼을 감싸쥐었다.

입에서 짠맛이 느껴졌다.


"여자친구 앞에서 그렇게 잘난 척을 하고 싶어? 어?"


"그만하세요!"


이번엔 레나의 외침이었다.

진경과는 달리, 그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아, 그만둬야지. 참! 나 약속 있었지?"


선배는 빠르게 골목 밖으로 사라졌다.

귀뚜라미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조용한 골목에는 한동안 침묵이 감돌았다.


"...간단한 최면 마법이에요. 저는 이렇게 약한 것 밖에 못 쓰지만, 진 경이라면-"


"내가 진 경 아닌 거 알잖아."


진경이 툭 말을 끊었다.

레나가 말을 멈췄다.


"난 네가 이딴 것 가져다줘도 못 써. 진 경이 아니라 그냥 진경이니까. 불타 죽는 건 무섭거든. 근데 그거 알아? 사실 아까 그 상황 해결해려면 이딴 검 쪼가리는 필요하지도 않았다?"


진경이 검집을 발로 걷어찼다.

검집이 핑글핑글 돌며 반쯤 벗겨졌지만, 레나도 진경도 신경쓰지 않는다.


"그냥 말 한 마디만 했으면 됐어. 난 더 이상 네 후배도 아니고, 경찰에 신고할 수도 있고, 네가 뭐 학교에서나 잘나가지 사회에서 그딴 행동이 용납받을지 아느냐, 쏼라쏼라 그런 거 있잖아. 그냥 그런 말 한 마디만 할 수 있었으면 이딴 식으로 날 만만하게 보지는 못 했겠지. 근데 난 그런 말 못해. 왜 그런 줄 알아? 난 그냥 병신이거든! 기사도도 모르고, 약자를 보호하느니, 레이디를 지키느니 그딴 오글거리는 것도 몰라. 난 그냥 내 몸 하나 못 지키는 나약한 병신이라고!"


진경이 다시 한 번 검을 걷어찼다.

이번에는 검집이 어쩌니 손잡이가 어쩌니 하는 건 신경도 쓰지 않았다.

아니, 불타 죽을 수 있다면 차라리 그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유감스럽게도, 진경은 죽지 않았다.

대신 검집에서 뽑힌 검이 이 세상 금속이 아닌 것처럼 번쩍거릴 뿐이었다.

마치 등대의 불빛처럼. 누군가를 부르는 듯이....


그 때, 누군가 허리를 굽혀 그 검을 붙잡았다.


"이런, 레이디. 제 검을 기껏 가져가셨으면 소중히 다뤄주셔야지요."


"뭐?"


진경이 깜짝놀라 고개를 들었다.

눈 앞에 있는 자는 검 손잡이를 잡았음에도 불타지 않았다.

그는 진경과 비슷한 키에, 진경과 같이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하고 있는....


'저게 어딜 봐서 나랑 비슷한 얼굴이야? 거의 원빈과 오징어급 차이인데!"


잘생긴 8등신의 미남이 레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지, 진 경?"


레나가 혼란스러워하며 물었다.


"예, 접니다. 설마 몇 년 못 봤다고 제 얼굴을 까먹으셨나요?"


진이 레나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레나는 혼란스러운 듯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왜 그러십니까, 레나. 설마 제가 싫어진겁니까?"


"아니, 하지만 당신... 눈빛이...."


진이 한차례 혀를 찼다.


"레이디께서는 정말, 어릴 적부터 그 능력이 정말 성가셨지요."


순식간에 덩굴 같은 것이 레나의 온 몸을 휘감았다.


"꺅! 너... 넌, 진이 아니구나!"


"제가 진이 아니라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전, 진이에요. 아가씨의 소꿉친구 진. 정의로운 기사 진이요."


진은 유감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아가씨가 제 청혼을 거절하지만 않았어도 계속 그 정의로운 진 경이었겠지요. 하지만 청혼을 거절당한 이상, 그 방법으로는 왕이 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임금을 습격했는데 설마하니 그걸 피할 줄은 몰랐습니다. 애꿎은 검만 잃고 도망쳐야 했지요. 아아, 영영 이렇게 잃어버리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외진 차원에서, 제 검을 가진 아가씨가 차원 아티팩트에 걸리다니. 역시 죽으라는 법은 없군요."


레나는 무언가를 눈치챈 듯 거칠게 저항했지만 덩굴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자, 간단한겁니다. 아가씨. 아가씨는 진 경을 좋아하지요?"


진 경의 말에 레나의 눈이 몽롱하게 풀렸다.


"그러면 얌전히 계시지요. 결혼해서 함께 행복한 왕국을 만들도록 합시다."


그 말에, 레나의 눈이 약간 흔들렸다.


"이, 이런 건, 진 경이 아니야."


진 경이 딱하다는 듯 레나의 눈을 바라보았다.


"저런, 저 말고 다른 진 경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 때야말로 진경이 나설 때였다.


"나 있는데 씹새끼야."


당당히 나선 것과는 달리, 진경의 다리는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 여자를 놔 줘!"


진경의 말에 진 경이 성가시다는 듯이 앞으로 나섰다.

덩굴은 순식간에 해제되었다.


'무슨 생각이지? 어쨌든 기회다!'


"레나, 이 틈에!"


하지만 레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마법을 쓰면 바로 도망갈 수 있을텐데도.


"나느은, 진 경을 좋아해. 진 경과 함께 있어야 해..."


절망하는 진경에게 진 경이 말을 걸었다.


"다른 차원에서의 살인은 별로 내키지 않습니다. 그냥 이대로 물러나시죠."


말과는 달리, 진 경은 날이 시퍼런 칼을 손에 들고, 진경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도망가야 했다.

진경도 그건 알았다.

하지만 도망갈 수 없었다.

레나의 눈이 생각나서.


'진경은 자신의 안위보다 약자를 우선시하는 진짜 기사잖아요?'


한치의 의심도 없는 눈으로 그렇게 말하던 레나를 생각하니까 도저히 그냥 갈 수 없었다.


"기회를 주었는데도 굳이 물러서지를 않는 겁니까?"


진 경이 막 칼을 휘두르려는 그 순간, 레나가 그 앞을 막아섰다.


"자, 잠깐만... 그러면 안 돼!"


'설마 최면이 풀린 건가?'


진이 당황해서 자신의 마법을 두 번 세 번 살펴보았다.

하지만 진경은 바로 답을 알 수 있었다.


'저건, 자신과 진 중 어느 쪽이 진짜 '진 경'인지 레나 자신도 혼란스러워하고 있기 때문에 세뇌가 통하지 않는거야!'


진경은 머릿속에서 떠오르는대로 레나에게 말을 하기 시작했다.

레나가 저를 위해 나선 지금, 이제는 더 이상 죽음도 두렵지 않은 기분이었다.


"저기요, 아가씨. 여기 진 경은 없어요."


"없어? 하지만 여기..."


레나는 두 명의 진 경을 바라보며 혼란에 빠졌다.


"여기엔  3류 만화 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악당이랑, 기껏 들어간 대학도 자퇴하고 좋아하는 여자 하나 못 지켜주는 병신 버러지 불가촉천민 밖에 없어요. 아가씨의 진 경은 분명 여기가 아니라 다른 데 있을테니까, 다른 곳으로 가봐요. 어떤 상황에서도 확실히 바라는 사람을 찾아줄 수 있는 도구가 아가씨한테는 있잖아요?"


"아, 그렇구나..."


그 순간, 레나는 사라졌다. 차원 탐색 마법이 발동된 것이다.


"아, 아니 이게 무슨! 말도 안되는 짓을!"


진경은 도망가려고 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다리에 힘이 풀려서 움직일 수도 없었다.


하지만 어차피 죽는 거라면, 적어도 이 말은 하고 죽어야겠다.


"야, 민간인한테 칼을 휘두르다니. 기사도고 뭐고 없는 새끼네. 너한테 '경'이라는 칭호는 조금 아깝지 않냐? 그냥 진 아냐?"


그 순간,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검에서 빛이 나는 듯 싶더니, 곧 검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이내 진은 잿더미가 되어서 사라졌다.


하하, 진경은 헛웃음을 지었다.


매미가 징글징글하게 우는 8월의 일이었다.


*****


하진경은 백수다.

할 일 없이 인터넷 커뮤니티나 들락거리는 백수.

어느덧 10월이 다 지나가는데도 성과라고는 없다.

최근엔 꾸준히 학원에 가서 프로그래밍을 공부하고 있지만, 잘해봤자 어느 중소기업의 코딩 노예밖에 안 될 것이다.

오늘도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였기에, 진경은 자신이 좋아하는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시간을 때우기로 했다.


[잡담] 오늘 겁나 이상한 꿈 꿨음ㅋㅋ

자고 있는데 갑자기 천장에서 이상한 여자 얼굴이 쑥 떠오르는 거임.

갑자기 내 이름 부르면서 그 사람이 너 맞냐고 물어보더라.

이름은 프라이버시이기 때문에 말씀드릴 수 없음ㅎ

하여간 나 맞다고 하니까 내가 찾던 사람은 네가 아니라고 그러고 쓱 사라지려고 하더라.

어처구니가 없어서 붙잡고 내가 그 사람인데 나 말고 누구를 찾는거냐고 물어봤더니

얼굴 살짝 붉히면서 '내 소중한 기사님' 그러고는 쓱 사라지더라.


아무런 댓글도 달려있지 않은 흔한 뻘글이었다.


'그 공주님은 아직도 그러고 다니나보네.'


진경은 복잡미묘한 심정이었다.

잘 지내고 있는듯해서 다행이었지만, 아직도 그 '진 경'을 찾아다니는 건 아쉬웠다.


'공주님이니 그 배신자는 잊어버리고 편히 살면 좋을텐데, 마법의 영향을 지우지 못했나보네.'


없는 진 경을 찾아낼 수는 없을테니, 레나는 계속 저렇게 진 경을 찾아다니다 결국에는 아버지에게 잡힐 것이다.

그러면 왕국으로 돌아가 그로써는 상상도 못할 판타지 속 세상의 공주님으로 행복하게 살겠지.


애써 마음을 정리하면서도 어쩐지 서운했다.

괜히 심통맞은 기분이 든 진경은 곧 빠른 화풀이 대상을 찾았다.


ㅇㅇ: 어? 이거 어디서 들어본 얘긴데? 너 혹시 진경이 아니냐? 너 이런 사이트 했었니? 정말 실망이다.


진경은 낄낄거리며 새로고침을 연타했다.

작성자의 당황한 반응이 궁금했다.


ㄴ 작성자: 어그로 자제 ㅡㅡ. 내 이름 김ㅎㅈ임.


'어라? 진경이 아니라 ㅎㅈ? ㅎㅈ이 뭐지?'


잠깐 골몰하던 하진경은 이내 답을 깨우쳤다.


"저 바보! 설마 하진경을 하진 경이라고 생각한거야?"


진경은 얼굴을 붉히고 그대로 침대에 쓰러졌다.

좋으면서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름이 '하진'인 사람 천만 명을 뒤져도 그를 찾을 수는 없을텐데, 대체 어쩌려고 저러는지.

한참 고민하던 진경은 결국 벌떡 일어나 외쳤다.


"좋아, 개명하자!"


하하진이 되면 또 어때?

저 여자는 차원을 넘어 나를 찾아오고 있는데.





Writer

limo

limo

f

comment (1)

limo
limo 작성자 20.10.19. 02:39
+)쓰고 보니까 기사 문학도 뭤도 아닌 씹덕 라노벨 하나 나왔는데 놀랍게도 처음 구상한 버전은 맨 오브 라만차 돌시네아랑 돈키호테 성별 반전 버전이었음. 그게 왜 이렇게 됐는지는 나도 모름.
권한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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