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소설회랑

[라한대] 기사는 검으로, 도적은 교수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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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3:43 Oct 18,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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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Eglantine
협업 참여 동의 아니오

처형대 위에 무릎 꿇린 사형수가 쥐어짜듯이 외쳤다.

  

“국왕 전하 만세! 자칭 발루아 왕인 루브레 백작은 지옥에나 떨어져라!”

  

철썩.

  

물에 젖은 천 뭉치가 부딪히는 듯한 소리와 함께 그 마지막 사형수의 목이 잘려나갔다. 

  

머리를 잃은 몸뚱이가 자신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고 처형대 위로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움직이지 않았다. 피웅덩이만이 새빨갛게 넘쳐흐를 뿐이었다.

  

“저런.”

  

발루아 왕의 원수(元帥)이자 셰르 공작의 참모인 올리비에 드 트레메르 경은 급조된 처형대 위를 굴러다니는 일곱 개의 머리를 바라보면서 안타까운 신음을 흘렸다. 모두 이 지역의 명망 높은 신사들이자 왕을 거역한 반역자들이었다. 


저 어리석은 반역자들을 동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곳 리비에르 지방은 그의 고향에서 200리유(lieue)나 떨어져 있었고, 귀족 신분이라 할지라도 현지인 중에 그가 모르는 먼 친척이 있을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사실상 외국인들이나 마찬가지다.

  

대신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은 기사 3명과 향사 4명의 몸값으로 다른 반역자들에게서 최소 2,000리브르를 받아낼 수 있으며, 그 돈이면 잘 무장된 기병 300기를 한 달 동안 고용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군인들은 숫자를 좋아한다. 

  

귀족이든 평민이든 예외는 없었다.

  

만약 군인들에게 '내가 판금 갑옷을 입고 준마를 탄 키 크고 용감한 기사를 치열한 전투 끝에 사로잡았어'라고 말하더라도 군인들은 그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 위업을 이루었는지 상상해내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몸값 1천 리브르짜리 기사를 포로로 잡았어'라고 말해야 한다.

  

그러면 그들은 '아, 정말 명예로운 무훈을 떨쳤구나!'라며 감탄할 것이다.

  

지난 수백 년 동안 서부 대륙과 인근 지역들에는 수십, 수백 번의 크고 작은 전쟁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암묵적으로 합의된 전통에 의하면 포로로 잡힌 기사의 몸값의 적정 가격은 500리브르 이상, 그리고 향사의 몸값은 100리브르 이상이었다. 

  

리브르 금화 한 개는 평범한 농민 가정의 한 달 치 생활비이자, 도시의 하층민 노동자가 보름 동안 쉬지 않고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이었다. 

  

요즘같이 어려운 시절에는 가난한 신사 집안의 연수입이 40리브르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으므로, 수백 리브르는 귀족이든 평민이든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기에 충분한 금액이라고 할 수 있었다. 셰르 공작같이 돈이 썩어 넘치는 일부 대귀족들을 제외하고.

  

셰르 공작이 남부의 반역자들을 정벌하기 위해 모집한 군대는 무려 1만에 달하는 대군세였고, 이를 유지하는 데만 해도 올리비에 같은 가난한 남작은 상상도 못 할 막대한 비용이 소모되고 있었다. 

  

전쟁은 원래 돈이 많이 드는 일이라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변두리 산골 지방을 평정하는 것치고는 너무 많이 들었다. 그리고 지금 왕과 그의 왕국의 안전을 위협하는 적들은 남부의 반란군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다음 군사작전을 대비해서 예산을 최대한 아껴야 한다는 것이 왕의 충성스러운 신하이자 군사 전문가로서 그가 내린 판단이었다.

  

“공작 각하. 진정으로 저들을 모두 죽여야만 했습니까?”

  

“물론이네. 이대로 아무 대응도 하지 않고 물러나면 성벽 뒤에 고개를 처박고 숨어 있는 저 겁쟁이 놈들이 기고만장해질 것 아닌가?”

  

공작이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셰르 공작은 현 발루아 왕의 동생이자 남부 왕령지의 총독으로, 지위에 걸맞은 능력을 갖췄지만 신분에 걸맞게 자존심이 강했다. 수만 리브르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군비조차도 자기 체면을 지키는 것에 비하면 가치가 없다고 여길 정도로.

  

그리고 그는 지금 수만 리브르를 잃고 체면도 잃었다.

  

남부 반역자들의 거점인 오리옹 성을 공략하기 위해, 공작과 휘하 지휘관들은 우선 배후지를 정리하고 안전한 보급로를 확보하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그래서 본격적인 공성전은 1만 대군이 지역에 도착한 지 2개월이 지난 뒤에나 시작될 수 있었다.

  

공성용 사다리를 타고 성벽을 넘는다는 작전은 가장 먼저 기각되었다. 지역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군사 거점답게 성벽이 높아도 너무 높았다.

  

땅굴을 파서 낮은 지대의 성벽을 무너트리는 작전은 단단한 암반층 때문에 실패했다.

  

성문을 봉쇄해서 수비군을 굶겨 죽이는 작전은 실제로 거의 성공할 뻔했다. 언덕 아래에 있는 유일한 식수원은 만 명이나 되는 압도적인 머릿수로 밀어붙이니 간단히 점령되었다.

  

하지만 만물을 지배하시는 주님께서는 반역자들을 위해 가을비를 넉넉히 내려주셨고, 포위전이 시작되기 전 2개월의 준비기간 동안 반란군들에게는 창고에 식량을 비축하고 여자나 아이들 같은 ‘쓸모없는 입’들을 다른 곳으로 피신시킬 시간이 충분히 있었다.

  

대형 투석기를 건설해서 성벽을 직접 타격하는 방법이 아직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작업에 또 얼마나 많은 준비가 필요한지, 얼마나 시간이 소모될지 아직 계산조차 되지 않았다. 

  

비록 총독으로서 관할 지역의 백성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의무 때문에 무리한 원정에 나섰지만, 셰르 공작은 이런 변방에 반년 이상 묶여 있기에는 너무 중요한 인물이었다. 

  

“이럴 때일수록 신성한 왕권의 위엄을 똑똑히 보여줘야지. 아무리 고귀한 신분이라도 자신들의 정당한 군주에게 칼을 겨눈 반역자들이 맞이할 운명은 죽음뿐이라는 사실을 말이야.”

  

왕에 대한 충성심을 증명하는 일이라면 올리비에 경도 누구보다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셰르 공작은 종종 왕의 권위를 실제로 가지고 있는 것이 자신의 형님인지, 아니면 자기 자신인지조차 헷갈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거북한 느낌을 애써 무시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하지만 저 무도한 반역자들도 이미 똑똑히 깨닫고 있을 겁니다. 비록 주님의 섭리인지 악마의 장난인지 모를 가을비 때문에 저 요새 하나만은 끝까지 함락되지 않았지만, 우리는 이미 세 개의 성을 무너뜨리고 도시 하나를 불태웠으니까요.”

  

“올리비에 경의 말이 맞습니다. 어쩌면 주님께서 저들에게 비를 내리신 것 역시 자신들의 잘못을 참회하고 이곳에서 목격한 왕의 위엄을 자기네 동포들에게 증언하게 하기 위함인 것일지도 모르겠군요.”

  

같은 참모부의 일원이자 아마추어 신학자인 피에르 경이 그의 말에 동의했다.

  

공작의 사형집행인인 고티에가 처형용 대검을 어깨에 걸친 채 처형장을 떠나자, 근처에 대기하고 있던 하인들이 반역자들의 시신을 장대에 높이 매달았다.

  

너무 멀고, 또 높아서 잘 들리지 않았지만, 성 내부에서 어떤 소란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확실해 보였다. 분명 수비군 중에 처형당한 기사들과 향사들의 가족이나 친척이 있었을 것이다.

  

공작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고, 올리비에 경도 기분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 그는 포로들을 처형하는 것을 줄곧 반대해왔지만, 어쨌건 지금 고통을 받고 있는 자들은 지난 수개월 동안 자신을 고생시킨 적들이었으니.

  

열이 뻗친 적들에게 반격을 당할 걱정은 없었다. 리비에르 지방에는 나무가 넘치게 많았기에, 포위군은 근처 숲에서 베어온 나무들로 만든 목책으로 숙영지를 철저히 방어하고 있었다. 수비군이 무리해서 기습을 시도해봤자 열 배나 되는 아군에게 역습당해서 박살이 날 것이다.

  

“근데 저기 성문 위에 서 있는 사람들은 누구야?” 

  

셰르 공작이 중얼거린 혼잣말에, 올리비에 경은 성문 위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얇은 회색 참회복 외에는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은 건장한 체격의 죄수들이 성문 방어탑 위에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저거 베르트랑 경 아니야?”

  

  

  

* * *

  

  

포위군이 미처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포로들의 처형이 신속히 집행되었다.

  

양 손이 묶이고 목에는 올가미가 걸린 채, 발루아인 포로들이 방어탑에서 성문 아래로 천천히 ‘내려졌다.’ 밧줄이 목을 조이면서 천천히 질식사하는 고통스러운 처형법이었다.

  

산소 부족으로 사고능력을 상실한 채, 본능적으로 발 디딜 곳을 찾으면서 몸부림치는 사람들의 모습은 몇 번을 봐도 익숙해질 수 없는 충격적인 광경이긴 했지만, 결코 보기 드문 광경은 아니었다. 조금 큰 도시에서는 살인자, 반역자, 강간범 등의 중범죄자들이 적어도 한 달에 한 명씩은 성문 앞에서 그런 방식으로 처형되었다.

  

문제는 지금 그렇게 죽어가고 있는 것이 하층민 출신의 이름 모를 무법자가 아니라 선량한 이웃이자 명망 높은 신사들이며, 그들의 친척이거나, 친구거나, 아니면 적어도 서로 얼굴은 익힌 사람들이라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포위군의 기사들과 향사들은 처음에는 공포와 무력감, 그리고 더 나중에는 분노에 휩싸였다. 

  

포위군 진영은 어지간한 대도시에 비견되는 크기였지만, 소문은 순식간에 전 부대로 퍼져나갔다.

  

“저 똥개울에 파묻어버릴 놈들이!”

  

이 정도 수준의 반응은 비교적 온건한 축에 속했다.

  

나름대로 산전수전을 다 겪었다고 자부하는 올리비에 경마저도 한순간 이성을 잃을 뻔했다. 지휘관으로서의 책임감이 없었더라면 정말로 어떻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성안의 악사들이 마치 포위군을 조롱하는 듯한 활기찬 운율의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짧은 연주가 끝난 뒤, 투구를 제외하고 완전히 무장한 남자 하나가 계단을 통해 방어탑 위로 올라왔다. 오리옹 성의 악명 높은 부대장 중 하나인 ‘몽티롱의 사생아‘였다.

  

그가 화살 사거리 밖에서도 들릴 정도로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감히 발루아의 왕을 참칭하는 반역자 루브레 백작의 부하들은 들어라.

이곳은 안젤론의 군주이자 발루아의 정당한 계승자인 에두아르 왕의 영지이며, 그에게 임명받은 리비에르의 집사(執事) 아르노 드 레스카르 경의 관할지다.

너희들은 지금까지 왕의 영지에 무단으로 침입해서 왕국의 주민들에게 폭력, 상해, 고통을 가하며 그들의 재산을 부당하게 갈취하였다.

또한 왕의 재산인 성읍과 도시들을 공격해서 보물을 약탈하고 살인과 방화를 자행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의 개선을 요구하기 위해 여러 차례 사절들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행위가 고쳐지기는커녕 오히려 불법행위가 더해갔다. 

그러므로 오리옹의 성주이자 왕의 충성스러운 신하인 아르노 경은 신성한 왕권의 대리인으로서 이러한 행위들을 더 이상 인내할 수 없었다. 

이 순간부터 우리는 너희를 왕의 평화를 해치는 무법자로 알 것이며, 앞으로 너희들이 받을 것은 오직 교수대뿐이리라.”


이 말을 끝으로 쇠살문이 열리고 도개교가 내려갔다. 

  

그리고 수백 명의 중장병들과 궁수들이 성문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전열의 궁수들이 목책 안쪽으로 화살을 날려대기 시작하자 포위군 진영 곳곳에서 쇠뇌수를 찾는 다급한 외침이 울려 퍼졌다.

  

하지만 쇠뇌수들이 제대로 반격을 시작하기도 전에 수비군의 중장병들이 목책선으로 육박해왔다.

  

올리비에 경은 휘하 부대장들에게 자리를 잘 지키고 있으라고 지시한 뒤, 직접 백여 명의 수행단을 이끌고 최전선으로 향했다.

  

셰리 공작은 투구를 쓰고 말을 탄 채 후방에서 지휘관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성 조르주께서 우리를 보호하신다!”

  

“국왕 전하 만세! 세르뉴의 성 드니여!”

  

수십 명의 중장병들이 서로를 향해 장창을 질렀다. 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입거나 바닥에 쓰러졌다. 넘어진 자들 중 일부는 다시 일어섰고 일부는 일어나지 못했다. 

  

백병전에서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면갑을 올리고 있는 경우가 많았기에 얼굴 부분이 가장 취약했다. 얼굴이나 손가락, 팔꿈치, 겨드랑이에 공격을 당한 중장병들은 비교적 가벼운 타격에도 간단히 무력화되곤 했다.

  

곧 선두의 중장병들이 장창을 내던지며 도끼나 검을 집어 들었고,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수비군의 기습 부대는 결국 목책선을 돌파하지 못했다. 후방에서 정비를 마친 부대들이 하나둘씩 지원을 오기 시작하면서 도리어 밀려나고 있었다. 

  

지원부대 중 일부는 대형 방패를 든 채 궁수들의 화망을 통과해서 적 부대의 측면으로 우회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그다지 철저히는 아니더라도 어쨌건 지난 수개월 동안 꾸준히 대비해왔던 것이다.

  

성문의 방어탑 위에서 트럼펫을 든 악사들이 퇴각 신호를 울렸다. 

  

올리비에 경은 예비대와 교대하고 잠시 후열로 물러서서 전장 전체를 관망하고 있었다. 그는 장장 한 계절 동안 이어진 포위전의 끝이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의미 없는 화풀이를 마친 수비군은 이대로 물러나서 다시 성벽 안에 틀어박히고, 양측은 몇 차례의 형식적인 협상 끝에 평화협정을 맺게 되리라.

  

하지만 안도감을 느낄 새도 없이 또 다른 이변이 일어났다.

  

“에두아르! 성 조르주!”

  

포위군 진영의 후방에서 반란군의 전투 함성이 들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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