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이정표

매미와 아이스크림 - 케이민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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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려한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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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미와 아이스크림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 겁 없이 놀던 폐건물이 있었다. 15평 남짓 비슷한 크기, 비슷한 톤을 가진 집들이 다닥다닥 붙은 우리 동네에서 좀 떨어진 공터에 있던 건물로, 한창 흙장난에 빠져있을 아이들 걸음으로는 10분이 안 되고 초등학교 고학년 아이들에게는 3분도 안 되는 거리에 있었다.

내가 옆 집 짱구머리 녀석과 흙장난에 빠져있던 때에는 동네 사람들이 서로의 사정을 훤히 꿰고 있을 만큼 징글징글하게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에 동네 아이들도 자연스럽게 모두 어울려 놀고 하였다. 그리고 놀이터는 언제나 그 폐건물이었다.

아이들이 모여 놀던 폐건물은 각종 범죄의 소굴로 여겨지는 요즘의 그것과는 많이 달랐다. 지저분한 잡초가 여기저기 나있던 공터 가장자리에 휑뎅그레 서있는 그것은 문부터 시작해 앞부분의 벽이 모두 부서져 뻥 뚫려 있었고 내부는 노을이 몰려오기 전까지 햇빛이 가득한 공간이었다. 오랜 시간 동안 비바람과 계절 변화를 충실히 겪은 건물은 그 주변에서 날카로운 것들은 찾아볼 수 없었고, 아이들은 그곳에서 흙장난, 총싸움, 소꿉놀이, 얼음땡, 무궁화꽃 등을 하면서 놀았다.


그러나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봄소풍을 다녀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동네 맞은편에 유흥가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곧 유흥가 뒤편의 공터에도 환락가들이 자연스럽게 들어섰고, 밤이 올 때면 유흥의 거리 전체가 동네를 향해 뒤통수를 돌린 채 번쩍거리곤 하였다. 폐건물이 있던 장소에도 딱 봐도 건전하지 않은 업소가 자리를 잡았다. 그 이후로 동네 아이들의 대부분은 부모님의 경고아래 공터를 찾지 않았고 나 역시 다른 곳으로 흥미를 돌렸다.



쓰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

벌써부터 매미가 지구를 정복한 것처럼 울던 어느 초 여름날, 나는 부모님의 하달에 따라 어린 동생을 잡으러 돌아다니던 중 폐건물을 졸업한 지 7년 만에 다시 그곳을 찾았다. 동네와 한때 공터였던 업소건물들 사이에 조그맣게 남아있는 공터의 흔적들 위에서 어린 여동생이 6시가 다 되도록 동네 여자애들과 땅따먹기를 하고 있었다. 더위로 짜증이 난 상태에서 여름이라도 이 시간에 안 좋은 곳에서 놀고 있는 녀석이 얄미워 소리를 치니 깜짝 놀란 여동생이 금을 밟았다.

! 엄마가 밥 먹으러 오래잖아.”

가려고 했어! 오빠 때문에 졌잖아!”

손수 데리러 온 오라버니에게 9살짜리 여자애가 지른 앙칼진 소리가 어이가 없어서 잠시 할 말을 잃고 있었는데 묘한 느낌이 들었다. 홱 고개를 드니 폐건물 자리에 들어선 업소건물 벽에 한 여자가 등을 댄 채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딱 봐도 그 건물에서 일하는 여자 같았다. 줄곧 애들만 보느라 미리 살펴보지는 못했지만 내가 오기 전부터 여자애들을 보고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순간 소름이 확 끼쳐 고개를 돌려 이제야 저녁밥을 생각하고 배고픔을 느끼는 아이들을 보채 동네로 향했다.

, 앞으로 저기서 놀지마.”

안 돼! 그럼 놀 때 없단 말이야!”

너 저기 뭐하는 곳인 줄이나 알고 그러는 거야? 엄마 아빠한테 말한다. 너 아까 그 여자가 너희들 보고 있는 거 몰랐어?”

몰라, 우린 그냥 놀기만 했는데. 그리고 진짜 우리 여기 아니면 놀 때 없어. 좋은 데는 다른 애들이 이미 놀고 있단 말이야.”

그럼 집에서 놀아. 저기 사람들 다 이상한 사람들이란 말이야.”

아냐, 낮에는 아무도 없어. 엄마한테 말하지 마. 아까까지만 해도 진짜 아무도 없었어.”

골목을 도는 척 그 업소를 향해 고개를 돌려보니 그 여자는 이미 없었다. 세트로 칭얼대는 아이들을 대충 어르고 집으로 들어갔다. 저런 곳에서 잘 못 놀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갈지 모른다. 잠자리에 들기 전 나는 여동생에게 한 번만 더 그러면 바로 보고 들어간다는 엄포를 하고 매미 소리를 배경 삼아 잠에 들었다.



중학생은 초등학생에 비해서 시험에 대한 압박이 큰 것 같다. 며칠 뒤면 여름방학인데도 남은 기말고사가 위를 무겁게 했다. 첫 번째 시험을 끝내고 일찍 집으로 돌아가던 중 시험공부로 한동안 말을 붙이지 않았던 여동생이 생각났다. 예전에 엄포를 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 공터 쪽으로 길을 돌아가 보았다. 사람은커녕 개 한 마리 보이지 않아 안심했지만 바닥을 보니 별 표시가 압도적으로 세력을 떨치고 있는 선명한 땅따먹기 지도가 그려져 있었고 어린애들이 쥐고 놀기 좋은 크기에 돌들이 주변에 흩어져 있었다. 여동생이 얼마 전까지 놀다 간 것이 분명하다. 여동생은 보통 그 나이때의 여자애들과 달리 하트보다 별을 훨씬 좋아한다. 저 별표시들은 땅따먹기에서 여동생의 승전과 함께 현장에 있었음을 확실하게 알려주고 있었다.

이 기집애가..”

애들 아까 갔는데.”


흠칫.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가 들릴 리 없는 순간에 들렸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돌려보니 아까까지만 해도 아무도 없던 벽에 그 여자가 등을 기대고 있었다.

“......”

얼떨결에 대답해 버렸다. 갑자기 등 뒤에 흐르는 땀들이 엄청 생생하게 느껴진다.

니 동생 슬리퍼 노란색이냐?”

?”

니 동생 슬리퍼 노란색이냐고.”

?!”

내가 엄청 겁먹은 표정 아니면 멍청한 표정으로 대답했나보다. 여자가 말을 말자는 표정을 짓더니 뒷문으로 들어갔다가 순식간에 아주 조그마한 노란 슬리퍼를 들고 나왔다. 내 여동생 슬리퍼였다. 망할 기집애.

맨발로 놀다가 나보니까 줄행랑을 치던데.”

나는 한층 더 멍청한 표정으로 그 슬리퍼만 쳐다봤던 것 같다. 여자는 무표정으로 내 쪽으로 그 슬리퍼들을 던졌다. 나름 목표물() 앞에 떨어뜨리려고 했던 것 같은데 솜씨가 좋지 못해서 하나는 내 무릎에 맞고 튕겨져 나가고 하나는 포물선을 그리며 여동생의 별이 큼지막하게 그려진 땅따먹기 그림 안에 떨어졌다. 살면서 전혀 상상해본 적 없는 상황에 갑작스럽게 놓인 나는 뻘뻘거리며 슬리퍼를 주웠고 기어가는 목소리로 대충 감사합니다 등의 단어를 뱉었다. 그리고 혹시나 그 여자가 나에게 더 말을 걸까봐 도망치듯 그 자리를 뛰쳐나왔다. 필기구와 시험내용을 정리해놓은 노트만 들어있어 가벼운 책가방이 정신없이 덜컹거린다. 거의 쉬지 않고 집까지 뛰어가 신발을 던지듯 벗으며 여동생을 소리쳐 불렀다. 엄마가 다시 일을 나가셔서 어른은 아무도 없지만 여전히 좁은 집 안에서 여동생이 기다렸다는 듯이 울면서 달려 나왔다.


눈물이 쏙 빠지게 혼내려고 했는데 여동생이 오히려 울면서 이실직고를 하자 화가 눈 녹듯이 사라졌다. 여동생도 열심히 놀던 중 갑작스런 여자의 등장에 무척 놀랐나보다. 겁도 나고 내 엄포가 생각났는지 땅따먹기 하기 좋게 벗어놓은 슬리퍼도 잊고 집까지 뛰어왔다는 것이다. 여동생의 공포는 다른 아이들에게까지 곧바로 퍼져 친구들은 모두 집으로 가버리고 여동생 혼자 슬리퍼를 두고 왔다는 죄책감과 다시 찾으러 갈 엄두가 나지 않는 공포로 계속 울었다고 했다.

바보야. 내가 다시 가져왔어.”

오빠 내가 두고 온 줄 어떻게 알았어?”

너 혹시 거기서 놀고 있을까봐 일찍 끝난 김에 갔는데..”

순간 여동생에게 그 여자가 슬리퍼를 가지고 있다가 나한테 던져줬다는 말을 해야 하나 싶어서 망설였지만 괜한 말인가 싶어 대충 거기에 그대로 있던 걸 집어 왔다고 얼버무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여동생은 좋다고 금세 싱글거리더니 고맙다고 내게 평소 아껴먹는 노란색 별사탕을 하나 줬다. 저녁 먹을 시간에 맞춰 엄마가 돌아오셨다.

나는 내일 시험공부를 계속 하다가 아빠가 돌아오신 11시쯤에 인사를 드린 후 하나 밖에 없는 방에 혼자 누웠다. 부모님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반성하고 있는 동생의 모습을 보니 이정도면 되겠다 싶었고 밖에서 고생하신 부모님께 괜히 안 좋은 생각거리를 늘려드리는 것 같아 가만히 있었다. 피곤에 지친 아빠의 코고는 소리가 방문 너머로 들린다. 부모님은 아들 시험기간 동안만이라도 방해되지 않게 마루에서 여동생과 함께 발 디딜 틈 없이 마루를 채우며 잠에 빠져 계시다. 갑자기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졸음을 밀어냈다. 동시에 낮에 본 여자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면 아까 멍청한 표정으로 여자얼굴을 한동안 쳐다봤었다. 숨 막혔던 그 순간을 여유롭게 되돌려보니 그 여자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 같다. 여자는 TV나 영화에서 나오는 업소여자들처럼 짙은 화장이나 입으나 마나한 옷을 입고 억세거나 무서운 분위기를 풍기지 않았다. 그냥 평범한 외모에 자세히는 생각이 나지 않지만 충격적인 옷차림은 아니었던 걸로 기억한다. 표정은 딱딱하기도 하고 그냥 아무 곳에나 시선을 던진 것 같기도 했다. 길거리를 지나다니는 더위에 지쳐 보이는 여자들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그 여자는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까, 왜 그런 곳에 있을까, 그 슬리퍼는 왜 가지고 있었을까, 무서운 동물을 보듯 자신을 보던 나를 보고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가족이 있을까, 열심히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을까, 아니면 그냥 자포자기식으로 살아가는 걸까. 등등의 이런 실없이 생각을 잇던 중 어느 순간, 나는 잠이 들었다.



때애애애애애애앵

1학기 기말고사가 끝났다. 전교생이 오늘을 기념하듯 유흥가 쪽으로 몰려갔고, 나도 어울리는 친구들과 함께 오랜만에 피시방에서 해가 떨어질 때까지 게임을 하다가 더 하겠다는 친구들을 뒤로 하고 먼저 집으로 향했다. 어둠이 몰려오자 거리 전체가 본격적으로 번쩍거리기 시작했다. 내 또래 아이들은 유흥가 입구 쪽의 피시방이나 노래방으로 몰려갔고 어른들은 유흥가 안쪽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왠지 또래 애들끼리 폐건물로 몰려가 놀던 옛날이 기억났다.

, 성민아!”

, 승기. 오랜만이네.”

막 머릿속에 지나간 예전에는 곧잘 같이 놀던 짱구머리 승기가 훨씬 자란 모습으로 내게 다가왔다. 노래방에서 실컷 놀다 나왔는지 노래방 골목 쪽에서 나오고 있었다. 승기하고는 중학교를 들어가면서 거리가 좀 멀어져 한동안 마주친 적이 없었다.

집에 가냐? 되게 오랜만이네? 오늘 시험 잘 봤어? 너 공부 잘하잖아.”

어 그냥 그렇지. 노래방 갔다왔나봐. , 근데 술 먹었어?”

, 냄새나? 조금 먹었어. 친구가 아빠꺼 몰래 가져왔더라고.”

너 좀 걸어야겠다. 이대로 들어가면 부모님께 들킬 것 같은데.”

괜찮아. 우리 엄마아빠 별로 신경 안 써.”

승기랑 멀어진 가장 큰 이유는 성격 때문이었다. 중학교로 올라가면서 한 번도 같은 반이 된 적이 없긴 했지만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학교도 같고 집도 근처인 데다가 소꿉친구였다면 언제나 친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전과 달리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변해가는 승기의 모습들은 승기를 찾아가는 내 발길을 끊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리고 승기도 예전만큼 나를 신경 쓰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술 때문인지 아니면 오랜만에 만나 말을 나눈 순수한 반가움인지 승기는 꽤나 살갑게 굴었다.

우리 돌아서 가지 말고 지름길로 가자. 저기 가게들 안 쪽 골목으로 들어가면 우리 옛날에 놀던 공터 쪽으로 빠지는 길이 있어.”

, 그래? 난 그런 길 있는지도 몰랐네.”

아는 애들 별로 없어. 너는 특별히 알려줄게. 근데 너무 늦은 시간에 혼자서 가는 건 비추야. 밝을 때 가거나 아니면 오늘처럼 사람 많고 늦은 밤 되기 전까지만 가는 게 좋지.”

우리 또래라면 절대로 갈 일이 없는 술집들 사이의 골목으로 능숙하게 들어가는 승기의 뒷모습이 정말 이상했다. 주변의 어른들은 교복을 입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본채 만 채 자신들의 위치에서 벌게진 얼굴로 술을 마시거나 찌푸린 얼굴로 담배를 피워댈 뿐이었다.

너 이 근처에서 놀다가 매일 여기로 집에 가는 거야?”

. 돌아서 가면 귀찮잖아. 주변 아저씨들은 신경 안 써도 돼.”

~”

네 엄마아빠는 잘 계셔? 저번에 네 여동생이 공터 앞에서 노는 건 봤는데.”

여동생? 내 귀가시간대의 여동생은 집에 있거나 나가도 항상 집 앞에서만 놀고 있었다. 시험일처럼 일찍 끝나는 게 아니고서야 여동생이 공터까지 가서 노는 걸 보기는 힘들다. 머릿속으로 승기가 어떻게 여동생을 본 건지 생각을 굴리는 동안 어두웠던 길목이 갑자기 빨간 조명으로 가득 찼다.

, 성민아. 너 이런데 지나가본 적 있냐?”

우리는 업소들이 몰려 있는 골목의 한 귀퉁이를 지나고 있었다. 승기는 장난스레 물어보는 것처럼 행동했지만 내 귀에는 마치 먼저 경험한 자의 자랑처럼 들렸다.

아니. 됐으니까 빨리 가자. 나 화장실 가고 싶어졌어.”

급해? 급하면 여기 아무데나 들어가서 부탁해볼까?”

아니!”

분명히 일부러 그랬을 것이다. 기분이 순식간에 나빠졌다. 저 녀석은 지금 내 반응을 즐기는 것이 확실하다. 다행히 업소들이 정면으로 보이지 않으니 시선을 돌리고 경보하듯이 지나가면 될 것이다. 길도 모르는 내가 바닥만 바라 본채 그놈보다 앞서 걷기 시작했다.


.”

갑작스런 불림에 고개가 돌아가고 발걸음이 엉켰다. 엇 하는 사이 나는 볼썽사납게 넘어졌고 승기녀석이 근처에 왔다. 그러나 승기녀석은 바보 같은 자세로 넘어진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나와 마찬가지로 나를 부른 장본인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 여자는 또각거리는 구두소리와 함께 내 앞에 서더니 전의 낮과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으로 아주 이상한 생물체를 보듯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교복을 입은 두 남자아이가 붉은 조명이 가득한 거리 중간에 머물러 있자 거리를 배회하던 여자 몇몇이 관심을 보였다. 여자가 내 모습과 분위기를 살피더니 혀를 찼다.

조그마한 것들이 무서운 줄 모르고. 빨리 나가라.”

죄송합니다.”

나는 홱 몸을 돌려 다시 가는 여자 뒤에 황급히 단어를 뱉은 후 허겁지겁 일어나 곧바로 바로 앞에 보이는 골목으로 뛰어갔다. 저번에 생생하게 느꼈던 땀이 지금은 전신으로 흐르는 것 같다. 다행히 내가 뛰어간 방향이 맞았는지 승기는 묘한 표정으로 나를 뒤따라왔다. 곧 여동생의 땅따먹기 흔적이 약간 남아있는 공터가 보였다.

너 저 여자 알아?”

몰라.”

근데 왜 널 부른 거야?”

교복 입은 애들이 무서운 줄 모르고 얼쩡거리니까 겁 준 거겠지. 나 여기 처음 와보거든.”

승기는 할 말을 잊었는지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집에 갈 때까지 그 녀석은 그 길은 갈 때마다 아저씨들이나 대학생으로 보이는 남자들이 보인다는 등의 헛소리나 계속 해댔고, 결국 갈리지는 골목 앞에서 불분명한 인사를 끝으로 서로 헤어졌다. 집에 들어가자 엄마께서 수고했다며 시원한 아이스크림을 하나 주셨지만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리고 씻기 위해 교복을 벗던 중 휴대폰이 없어졌다는 걸 알아차린 후 요 근래 가장 최악의 기분으로 잠자리에 들게 되었다.


거의 비디오 시청이 주를 이뤘던 수업이 끝나자마자 나는 공터 쪽으로 달려갔다. 오늘 교실에 도착하자마 친구 폰으로 내 폰에 전화를 걸어보니 전원이 꺼져있다는 안내만 반복되었다. 잃어버리기 전 휴대폰 배터리가 거의 바닥인 상태라 예상하기는 했지만 불안감은 줄어들지 않았다. 부모님께 휴대폰을 다시 사달라는 말은 절대 할 수 없다. 방법은 다시 찾는 수밖에 없고, 휴대폰을 잃어버린 장소에 있던 그 여자를 찾아가는 것이 내가 생각한 방법의 첫 번째 순서였다. 그러나 막상 공터까지는 갔으나 차마 뒷문을 두드릴 용기는 나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다시 그려본다. 엄청 불쌍한 표정으로 뒷문을 두들긴 다음 내 휴대폰 혹시 보지 않았냐고 물어볼까? 그러면 이상한 생각을 하고 온 애처럼 안 보이겠지? 그런데 날 안으로 끌고 들어가면 어떡하지? 소리를 질러야하나? 아니면..

끼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자동적으로 고개를 들어 영원히 열리지 않을 것 같던 그 뒷문을 보니 그 여자가 다시 평범한 모습으로 막 문에서 나오고 있었다. 혹시나 해서 봤지만 그 여자 손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

이거 네 꺼지?”

여자가 반바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내 휴대폰이다.

, 감사합니다! 제 꺼 맞아요!”

발걸음을 좀 더 여자 쪽으로 향하고 손을 폈지만(또 던질까봐) 여자는 그 특유의 무덤덤한 표정으로 날 가만히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돈을 달라는 건가?

.. 그거 제 폰 맞는데 주시면 안 될까요?..”

어제 왜 거기까지 온 거야?”

?”

보니까 중학생 정도 밖에 안 보이는데, 어제 호기심 때문에 놀러온거야?”

아니에요! 친구가 지름길이라고 가자고 해서 얼떨결에 따라간 것뿐이에요. 이제 다시는 안 갈 거예요. 휴대폰 좀 제발 돌려주세요.”

진짜야?”

진짜에요!”

최대한 절박하게 굴었다. 아니 이건 연기가 아니다. 진짜 절박하다. 이 상황을 오래 끌고 싶지 않아 목이 바짝바짝 탄다. 아는 사람이라도 지나갈까봐 얼굴은 앞을 향해 있는데 온 신경은 등 뒤로 몰린 것 같다. 여자는 내 상황은 별 관심이 없다는 듯이 표정 변화 없이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뭐 진짜든 거짓이든 나랑 상관은 없지. 근데 내가 어제 이 폰 나보다 먼저 발견한 애가 판다는 거 겨우 말려서 받았거든? 맨입으로는 안 되겠는데. 꼬마라고 해도 그런 곳에 들어와서 실수를 했으면 제대로 값을 치러야지.”

.. 돈 별로 없는데..”

누가 돈 달라니? 애들 코 묻은 돈 관심 없거든?”

? 그럼 뭘?..”


여자가 요구한 값은 더위를 날려줄 베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이었다. 솔직히 베스킨라빈스는 가격이 가격인지라 가난한 중학생에게는 코 묻은 돈 뺃는 것과 다를 바 없이 느껴졌지만, 여자는 배려해 준답시고 그나마 제일 작은 사이즈로 골랐다고 하니 그냥 군말 없이 갖다 바치기로 했다. 더위를 무시한 채 헉헉거리며 아이스크림을 사가지고 와보니 여자는 담배를 피고 있었다.

생각보다 빨리 왔네.”

.... 아이스크림 사왔으니까, 휴대폰 빨리 주시면 안 될까요..?”

, 이런 구식폰 줘도 안 갖거든. 가까이 와서 받아가! 슬리퍼처럼 떨어뜨리면 이 폰 완전 병신 된다.”

쭈뼛거리며 다가가 두 손으로 아이스크림을 잡고 여자 앞에 내밀었다. 여자는 못마땅한 듯 아이스크림을 낚아채더니 휴대폰을 내 교복 앞주머니에 넣어줬다. 순간 몸이 깜짝 놀라 나도 모르게 약간 뒷걸음질을 쳤다. 여자의 눈썹이 더 못마땅한 듯 일그러졌다.

내가 너 잡아먹을 까봐 겁나니?”

? , 아뇨..”

그럼, 더럽게 느껴져서? 누가 볼까봐 무서워?”

?!”

본심이 들켜서 수그러져 있던 고개가 올라가고 목소리도 높아졌다. 그렇게 여자 눈과 딱 마주친 순간, 내가 여자와 굉장히 가까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는 표정을 짓고 있는 여자는 어제 밤처럼 화장을 안 해서 그런지 20대 후반 정도로 보였고, 눈썹만 일그러지지 않았다면 순하지도 억세 보이지도 않는 보통의 인상이었다.

너 담배 필 줄 아니?”

“..아뇨.. 죄송해요.”

뭐가?”

, 아뇨 그냥.. 아니, 감사합니다. 휴대폰 찾아주셔서....”

됐다. 가라. 앞으로 다시는 거기 오지마. 너 같은 애들이 괜한 호기심으로 이런데 왔다가 좋은 꼴 되는 거 한 번도 못 봤다.”

.. 감사합니다. 번거롭게 해서 죄송합니다..”

“...”

여자 표정이 한층 누그러졌다. 나에게 말 한다고 거의 피비 못한 여자의 담배가 긴 재가 되어 뚝 떨어졌고 여자는 담배를 그냥 버렸다. 나는 배은망덕한 본심이 들켰다는 생각에 여자에게 매우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어쨌든 날 기억해서 도와준 건데.

, 가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그 애랑 같이 다니지 마.”

?”

걔 심심하면 그 길로 다니던데, 별로 질이 안 좋아 보인다. 학교에 있을 시간에 요런데 돌아다니는 거 보면 말 다했지. 너랑도 별로 안 맞는 거 같고, 그런 애들한테 끌려 다니면 이상한 물만 든다.”

, 네 감사합니다. 이제 안 만나려고요.”

나는 이번에는 진심을 담아 여자에게 깊게 목 인사를 했고, 여자는 대충 그러나 처음 보는 꽤나 부드러운 표정으로 눈인사로 답을 하더니 뒷문을 통해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왠지 현실 같지 않은 시간이었다. 가볍게 숨이 몰아쉰 후 몸을 돌려 집으로 가던 중 앞주머니에 불룩하게 들어가 있던 휴대폰을 꺼내 보았다. 뒷면이 많이 쓸려 있었지만 그 외에는 큰 외상이 없어보였다. 휴대폰을 확인해보니 전원이 들어와 있었고 배터리도 꽉 차 있었다. 낮 동안 충전을 해준 모양이었다.



기말고사 성적이 나오고 뒤따라 여름방학도 왔다. 성적은 전보다 약간 더 올랐고 부모님은 나를 더 자랑스러워 하셨다. 아직 먼 이야기지만 부모님은 내가 서울의 대학교에 다니기를 간절히 원하신다. 하나뿐인 아들이 공부를 열심히 하고 성적도 전교 순위권-중학교이긴 하지만-이다 보니 그런 꿈은 더 꺼지시나보다. 부모님께서 미래의 등록금을 대비해 항상 무리하시면서 돈을 버는 모습을 볼 때마다 조바심이 난다. 지금보다 공부도 더 잘하고 싶고 얼른 자라서 나도 돈을 벌고 싶다. 내 꿈은 대기업에 들어가는 것이다. 의사나 변호사 등은 과정이 어렵기도 어렵겠지만 사회에서 활동하기까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나는 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최대한 빨리 대기업에 들어가 돈을 벌고 싶다. 그렇게 된다면 가족 모두가 함께 자도 공간이 많이 남는 마루가 있고 방도 2개 이상 있는 집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여름방학은 더 열심히 공부하고 시간을 잘 조정해서 간단한 아르바이트도 할 계획이다. 중학생 밖에 되지 않아 할 수 있는 일은 전단지 정도가 다겠지만 문제집 값 정도는 벌 수 있다.


여름방학을 맞아 놀러 다니는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전단지 일거리가 넘쳤다. 나는 시급이 제일 좋은 걸 고르다 보니 최근에 오픈한 룸카페 전단지를 맡게 되었는데, 3시간 만에 완전 녹초가 되었다. 룸카페에 들어갈 만한 젊은 사람들에게만 전단지를 내밀었는데 대부분이 노골적으로 귀찮다는 표정을 보이며 홱 지나갔다. 아니 차라리 홱 지나가는 건 양반이고 눈앞에서 꼭 구겨 버리거나, 여자 친구에게 위세를 떨려는 건지 내 손에 들려진 전단지를 치고 가는 남자도 있었다. 그 남자는 그대로 걸어가며 낄낄거렸고 여자는 못 말리겠다고 말하는 입과는 다르게 온 몸으로 앙탈을 부리고 있었다. 바퀴벌레보다 역겨워 보이는 커플이었다.

3일을 약속한 아르바이트라 다음 날도 전화번호부보다 두꺼워 보이는 전단지 묶음을 들고 유흥가 길가에 섰다. 아무 생각 없이 하는 게 스트레스를 덜 받기 때문에 머리를 텅 비운 느낌으로 전단지를 돌리던 중 이제는 꽤 익숙해진 얼굴의 인물이 모자를 눌러쓴 채 내 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다만 무슨 생각을 하는지 고개를 내린 채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내가 먼저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여자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봤다. 역시 낮에는 화장을 안 하는 것 같다.

뭐니?”

, 전단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어요.”

여자는 그걸 물어본 게 아니었다는 것을 표정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민망해진다. 괜히 친한 척 한 것 같다. 대충 얼버무리며 전단지 돌리는 작업을 속행하려는데 여자가 내 팔을 잡았다.

너 한가하지?”

?”


여자는 내게 또 베스킨라빈스 심부름을 시켰다. 대신 이번에는 자기 돈을 준데다가 내 몫도 살 수 있게 더 얹어 주었다. 여자는 할 일이 없는지 내가 전단지를 돌리는 모습이 잘 보이는 버스정류장 의자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나도 먹으면서 전단지를 돌렸는데 시원하고 맛있는 아이스크림 덕분인지 전단지가 어제보다 빨리 돌려지는 기분이 들었다. 여자는 아이스크림을 다 먹고 난 후 남은 전단지를 돌리고 있는 내게 다가왔다.

아이스크림 잘 먹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저번에 휴대폰 찾아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됐어. 두 번 찾아주면 절하겠네. 너 근데 별걸 다 한다? 중학생이 아르바이트를 하네? 돈 좋아해?”

용돈벌이 하는 거예요.”

여름방학이라고 실컷 놀려고?”

아뇨.. 그냥 적당히 용돈벌이 정도만 하려고요.”

너무 어렸을 때부터 돈 좋아하면 인생 재미없어진다.”

..”

할 말도 없고 옆에 사람이 있는데 전단지를 돌리자니 왠지 예의에 어긋나는 것 같아 어정쩡하게 서있는데 여자가 수고하라며 몸을 돌려 갈 길을 갔다. 뒷모습을 향해 내가 안녕히가세요를 외치자 여자가 한 손을 가볍게 든다. 여자가 가는 방향 쪽에는 내가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그 골목이 있다.


그 후 가끔 몸이 찌뿌듯하다 싶으면 그 공터가 있는 곳까지 어슬렁 걸어 다니곤 하였다. 두 번째 어슬렁을 하고 있을 때, 누군가에게 당당하게 알리기 힘든 내 행동의 동기들을 생각을 해보았다. 분명한 것은 내가 무슨 삼류 TV 드라마의 줄거리처럼 그 여자에게 연정을 품은 것은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그 여자는 나와는 전혀 다른 세계의 사람으로 느껴진다. 상상력을 아무리 발동해보아도 지나가듯 대화를 이어가는 것 외에는 그 여자와 함께 있는 나를 상상할 수가 없다. 그렇지만 여자는 착한 사람인 것 같다. 첫 만남부터 내 여동생에게 도움을 줬고 그 후에도 계속 나에게 도움을 주거나 조언 같은 것들을 했었다. 이외에도 아이스크림을 먹거나 화장을 하지 않은 얼굴로 햇빛에 나와 있는 여자는 외계인과 같은 거리감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기묘한 친숙함이나 뇌리에 남는 감정 등을 유발했던 것 같다. 슬리퍼를 찾은 날 밤 내가 실없이 떠올렸던 낯선 생각들이 점차 형체를 띄고, 불투명하지만 형태는 갖춘 여자의 이미지를 천천히 만들어 갔다.



하나밖에 없는 선풍기는 더위에 지쳐 잠든 여동생에게 양보하고, 좁고 답답한 방에서 한 자세로 계속 책을 읽다보니 자연스럽게 유체이탈을 경험하게 될 것 같아서 여섯 번째쯤 되는 어슬렁을 나가보았다. 방하고 큰 차이가 없는 열기였지만 바람이 있고 뻥 뚫린 느낌이라 살만했다.

쓰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

한 여름이라 매미들 위세가 대단했다. 여동생을 잡으러 가던 날이 떠올라 그날을 곱씹어보던 중 자연스럽게 공터에 도착했는데 여자가 건물 벽의 일부처럼 벽에 의자를 붙이고 그 위에 앉아 있었다. 막상 만나게 되니 할 말이 없어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인사를 하는데 화장 안 한 여자의 오른쪽 눈썹이 찌그러졌다.

너 요새 자주 보이더라.”

뒷문 안에서 날 본 걸까?

아하하. 그냥 산책 겸 다녔는데.. 보고 계셨어요?”

너 나한테 관심 있니?”

순간 얼어서 가만히 있자, 여자는 픽하고 웃더니 농담이라고 둘러댄다.

있어봐.”

알쏭달쏭한 말을 남긴 여자는 일어나 뒷문으로 들어가더니 곧 콘 두 개를 들고 나왔다. 아이스크림을 정말 좋아하나보다. 와서 먹으라는 듯 흔들기에 처음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쭈뼛거리며 다가가 콘을 받았다.

감사합니다.. 아이스크림을 정말 좋아하시나 봐요.”

완전 좋아하지.”

가깝지도 그렇다고 멀지도 않은 간격을 두고 두 사람이 콘을 먹는다.(내가 콘 껍데기를 뜯고 버릴 곳이 없이 허둥대니 여자가 낚아챈 후 뒷문 안으로 들어가 버리고 다시 나왔다.)

, 성격이 애늙은이 같다. 그런 말 많이 듣지 않아?”

가끔 들어요.”

내가 딱 봤네. 너 여동생한테도 잘하지? 엄마아빠 말씀도 잘 듣고 대충 봐도 모범생 스타일인데.”

.. 잘 하려고 해요.”

뭘 봐도 그냥 지나칠 성격은 아니겠네.”

예의 무심한 표정으로 우리 동네를 바라보는 여자의 옆얼굴이 보인다. 그러고 보면 난 이 여자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 생각 속에서조차 이름 대신 계속 여자라고만 불렀다. 나도 모르게 질문이 튀어나왔다.

여기 사세요?”

?”

아니, 여기서 자주 보이시길래..”

나 여기서 먹고 자고 사는데.”

, .. 죄송합니다...”

바보 같은 질문을 했다. 오랜만에 생생한 땀이 이마에서 흐르는 것 같다.

너 몇 살이니.”

너무 평이한 어조로 물어서 몇 초 뒤에야 대답했다. 여자는 갑자기 자신의 신상을 줄줄 이야기 해주었다. 나이는 29살로 원래 고향은 대구였다고 한다. 그러다 초등학교 때 수도권 여기저기를 전전했고 만약에 일이 잘 되었으면-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내 여동생만한 자식이 있었을 것이란다. 이곳에 온 것은 올해 4월 말쯤으로 얼마 되지 않았다. 가족 구성원은 우리 가족과 같았다. 소식이 끊긴지 10년이 다 되어 가지만, 엄마, 아빠, 위로 2살 차이가 나는 오빠가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이름은 권지현이었다.


지현이누나(나이차이가 좀 있지만 이모는 죽어도 싫으니 누나라고 부르라고 했다.)는 이름 소개를 끝으로 자신의 이야기는 막을 내렸다. 이번에는 내 이름을 물어봤다. ‘김성민이에요.’, ‘잘 어울리네.’, ‘..’. 그걸 시작으로 나도 묻지도 않은 내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늘어놨다. 가족 구성원, 태어날 때부터 죽 살아온 우리 동네, 그리고 원래 이 자리에 있던 폐건물 등. 지현이누나는 이제는 업소가 된 이곳이 원래 아이들의 놀이터였다는 사실에 가장 큰 반응을 보였다.

우리가 추억을 더럽힌 꼴이네.”

?, 아니에요. 어차피 이 가게 들어오기 전부터 그 앞으로 유흥가들이랑 업소들이 줄줄이 들어와서 언젠가는 사라질 줄 알았어요. 그리고 요즘은 애들 수도 점점 줄어들고 놀기에 더 좋은 곳도 많아서 괜찮아요.”

그래, 7년이라.. 요즘은 7년이면 동네가 다 바뀌지. 난 이제 일이나 해야겠다.”

지현이누나가 이란 단어를 꺼내자 부드럽게 이어진 친숙한 외계가 반전됐다. 의자에서 다리가 아주 무겁다는 듯 천천히 일어난 누나는 나에게 돌아가라는 듯 고개를 약간 흔들었다.

, 아이스크림 잘 먹었습니다.”

들어가라.”

뒷문이 닫혔다. 지현이누나가 앞문으로 다시 나올 때는 짙은 화장에 여름을 온 몸으로 주장하듯 가린 곳보다 드러낸 곳이 많은 옷을 입고 나올 것이다. 업소 골목들 사이에서 넘어졌던 날이 생각난다. 그때의 지현이누나는 여전히 다른 세계의 사람이었지만 친숙한 느낌은 없었다. 한껏 과장되고 삐뚤어지고 갈 곳 없는 외계인처럼 보였다. 생각해보니 어느 새 매미소리가 멈춰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어슬렁을 하게 되었다. 빈도수가 예전에 많이 줄었지만 누나는 어슬렁을 할 때마다 항상 만날 수 있었다. 만날 때마다 누나는 항상 아이스크림을 주었다.(나는 가끔 과자나 빵을 사갔다.) 슬며시 물어보니 아이스크림을 하루에 하나씩 먹는 게 취미란다. 뭔가 더 있는 것 같았지만 그냥 묻지 않았다. 만나서 하는 이야기는 특별한 것이 없었다. 나는 학교 다닐 때 겪었던 나름 재미났던 일이나 폐건물이 남아있을 당시의 이야기, 우리 집에서 있었던 일(주로 여동생과 관련해서)을 이야기 했고 누나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자퇴하기 전까지의 학창시절에 대한 단편적인 이야기, 좋은 여자와 나쁜 여자 구별법, 지금까지 만났던 남자들의 최악의 단점들 등을 말해주었다. 만나는 날이 쌓여갈수록 누나는 다른 세계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매일 볼 수 있는 어른여자처럼 보였고, 사람 좋은 동네누나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누나가 업소를 다니지 않는다면 정말 좋은 이웃사촌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누나도 날 편하게 대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어리기도 하고 자신과는 전혀 다른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더 편하게 대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넌 꿈이 뭐냐?”

돈 많이 버는 거요.”

너 내가 어릴 때부터 돈 좋아하면 인생 재미없다고 하지 않았니?”

그럴...수도 있겠지만, 돈 많이 벌어서 좋은 집 사고 가족끼리 잘 살면 그때부터는 인생이 정말 재미있을 것 같아요.”

어린 것도 있겠지만, 넌 원래 성격이 그런가보다.”

... 칭찬이시죠?”

그래. 그러니까 돈 많이 벌어서 가족 호강시켜 주고 싶다 이거잖아. 좋네. 내가 만나본 남자들 중에서 가장 정상적이고 가장 건전한 꿈이야.”

, 그런가요.”

그럼 뭐 의사나 그런 거 생각하고 있겠네. 너 공부 잘하지? 전교 몇 등이야?”

, 지금은 전교 4등이요. 저 의사 같은 건 안 바라요. 그냥 대기업 빨리 취직해서 돈 벌려고요.”

.. 너 진짜 조그마한 게 그런 것까지 다 생각해놨니? 대단하네. 근데 전교 4등이면 공부 엄청 잘하는 거 아니야? 장난 아니네. 내가 지금까지 만나본 사람들 중에서 네가 제일 똑똑하지 싶다.”

, 하하.. 감사합니다. 그런데 고등학교 들어가면 또 몰라요. .. .. 그럼, 누나는 꿈이 뭐예요?”

?”

.”

나 같은 사람이 꿈이 있을 것 같아?”

아 왠지 지뢰를 밟은 느낌이다. 그동안 계속 궁금해서 물어볼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데, 결국 물어보지 말아야할 것이었던가. 내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지현이 누나의 담담한 표정에서는 지금의 기분이나 생각 등을 전혀 읽을 수가 없었다.

.. 죄송해요.”

바보야. 남자애가 뭐 그리 힘이 없냐. , 꿈 좋지. 나도 한 음.. 20대 초반까지는 그래도 꿈을 생각하고 있었지. 그리고.. 지금은 그냥 산다.”

“....”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게 아이스크림이거든. 볼 때마다 내가 먹는 거 봤으니까 너도 알지?"

가을이 점점 9월 초였다.

, 엄청 좋아하시는 것 같았어요.”

내 꿈이 뭐였냐면, 내 수제 아이스크림 카페 만드는 거였어. 요즘 테이크 아웃식으로 커피숍 많잖아? 그런 식으로 괜찮지. 가게가 꼭 클 필요는 없어. 카페가 작아도 좋으니까 직접 만든 아이스크림을 파는 가게 하나 차리는게 내 꿈이었지.”

, 제 꿈보다 훨씬 건전하고 낭만적인데요.”

이제 없다니까.”

왜요?.. 생각해보니까 누나 베스킨라비니스 자주 가는 것도 그런 것 때문에 가는 거 아니에요?”

그냥 유명한 아이스크림 집이니까 먹어봤는데 맛있어서 가는 거야.”

.. 그래도, 누나 어, , 계속 이런 식으로 사시지는 않을 거 아니에요?”

조심스럽게 물음을 던졌다. 우리들 사이에 에 대한 질문은 암묵적으로 금기였다. 하지만 묻고 싶고 확인하고 싶다. 누나가 이런 곳에서 썩어가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사는 꼴이 네가 봐도 참 거지같지?”

,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에요! 그냥 누나는 좋은 사람 같고, 완전히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사는 사람 같지도 않고 그래서, 게다가 누나는 아직 젊잖아요!”

입 안이 바짝바짝 마른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지금 바로 알 수 있었다. 여름의 막바지에 서서, 배경음으로 깔리는 필사적으로 그러나 아까까지만 해도 멀리서 들려오는 듯한 매미울음소리가 이제는 가깝게 들려온다. 지현이 누나의 눈은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동시에 다른 곳을 보는 듯하다.

너 처음에 봤을 때 나 엄청 무서웠지? 무섭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한테 창녀랑 같이 있는 게 들킬까봐 조마조마했고. 그런데 몇 번 마주쳐보고 생각해보니까 불쌍한 사람 같고 안타깝고, 그러다 이야기해보니까 정들고 잘 해주고 싶고. 뭔가 좋은 것들을 전해주고 싶고. 이런 곳에서 살지 말고 더 행복하게 살라고 용기도 주고 싶고.”

뜨거운 열기를 품은 바람이 겨드랑이를 훑고 지나간다. 누나는 나보다 나이도 많고, 나는 상상도 못할 별의별 일들을 겪어오며 이 자리에 서있다. 나 같은 중학생 애들 머릿속 생각은 표정만 봐도 쉽게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무슨 생각을 하며 매 주마다 나와 마주앉아 이야기를 한 것일까.

요 몇 년 동안 만나본 사람들 중에서는 네가 제일 낫다. 착하고 아직 어린 만큼 순수하고. 사는 게 다 그런거지라고 살아왔던 내가 옛날이 원망스러워지고 나도 원망스럽고, 그리고 다시 해볼까하는 이상한 충동 같은 것들이 생길만큼 좋은 애야.”

죄송해요. 저 사실 누나 말대로 처음에는 누나가 무섭고, 슬리퍼 받은 날 밤에 왜 이런 데서 살까하는 생각도 했었고, 휴대폰 받으러 갈 때도 다른 사람들이 볼까봐 걱정도 했어요. 죄송해요.”

됐어, 정상적인 거니까. 됐고, 내 말 들어봐. 직접 안 봐서 잘은 모르겠지만 너하고 내 어렸을 적 환경은 비슷했을 거야. 사람들은 전혀 달랐지만. 이런 후미진 달동네 같은 데서 집은 좁아터지고, 돈은 죽어라 벌어도 언제쯤 나아질지 앞은 캄캄하고. 그런데 그 안의 사람은 전혀 다르지. 내 엄마 아빠는 자식새끼들에게 별 관심이 없었어. 틈만 나면 싸우고, 일 년 중 술을 안 마신 날이 손에 꼽았지.”

제 엄마 아빠도 예전에는 싸우신 적 많았어요.. 아빠 한 때 술 많이 드시고 엄마는 만날 운적도 있었고..”

지금은 아니잖아. 엄마든 아빠든 한 분이 정신 차리고 다른 한 분 잡아서 둘 다 정신을 차렸거나 아니면 둘 다 같이 정신 차렸거나. 또 아니면 성민이 네가 워낙 똘똘하니까 널 보고 미안해서라도 정신 차리신 걸 수도 있고. 하여튼, 내 부모님은 그런 노력이 없었다. 그리고 하나 밖에 없는 오빠라는 인간은 더 심했지. 정말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살았으니까. 개망나니도 그런 개망나니가 없었다. , 나도 잘한 건 없었어. 집에서 제대로 된 인간이 없으니 빨리 나가서 어디서든 사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지. 그래서 돈 좀 만들게 대충 핑계 만들어서 고등학교 2학년 때 자퇴한 다음 아르바이트로 여비를 좀 모아서 아예 나와 버렸지. 그 인간들이야 애가 집에 있으면 괴롭히는 것 밖에 재주가 없고, 나가면 그대로 관심 뚝이니 그 후부터는 자연스럽게 연락도 안 되고.”

“...”

아마 누구라도 한 번이라도 죽었다 생각하고 기다려주고 잡아줬다면 내가 지금 이렇게 되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해. 그때 엄마나 아빠가 아니면 오빠라도 잘 해보자고 노력하자고 했으면, 같이 버텨보자고 하고 친척집이나 갈수 있는 데는 다 가보면서, 혼자 도망갈 필요 없다고 알려줬으면 그 고등학교 2학년짜리가 겨우 모은 이삼십만 원을 들고 지하철역으로 도망가는 일은 없었겠지. 그때는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잘 모르겠다. 네 가족과는 다르게 우리 가족들은 누구 하나라도 먼저 희생해서 잡아주려거나 기다려주려는 노력이 없었지. 이때까지는 팔자려니 생각했는데 열심히 사는 널 보니까 후회스럽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고 그러네.”

갑자기 많은 말들을 한 번에 내 뱉은 누나는 뒷문으로 들어가더니 물 한 컵을 떠서 나왔다. 열린 문으로 누나를 부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는데 누나는 무시한 채 뒷문을 닫았다.

저는.. 저는, 누나가 노력하면 이 자리에서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글쎄, 된 다해도 언제쯤 가능할지 모르겠네. 그때까지 계속 버티면서 노력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누나가 노력하고 싶은 마음 계속 유지할 수 있게 제가 이렇게 한 번씩 와서 이야기 나누고 좋은 소식들도 전해드릴게요. 잘해보자는 충동이 그냥 충동이 아니라 계속 유지될 수 있게...”

됐어. 넌 아직 어리니까 가능할 수 있겠지만, 우리 같이 반평생을 포기하면서 살아온 사람들은 죽을 만큼 힘든 일이야. 내가 그런 충동을 느끼면서도 널 지금까지 보고 이야기 나눌 수 있는 것도 내가 느낀 감정들이 그냥 감정으로만 끝날 걸 알기 때문에 그랬고.”

그렇지만... 그래도..”

그만. 언젠가 이런 이야기가 나올 것 같기는 했지만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네. 네가 생각하는 세계의 사는 사람이 아니야, . 너는 그렇게 마음먹고 노력하면 마음먹은 대로 될 수도 있는 사람이지만, 난 이미 바닥보다 낮게 떨어졌다. 그럴 마음을 먹기엔 너무 늦었어. 7년이나 6년 전에라도 이런 말을 들었다면 조금은 달라졌을 수도 있겠지만.”

누나는 이제 가야겠다는 듯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다만 급하게 일어섰는지 물컵 안에 남아있던 물이 튀어 올라 바닥에 떨어졌다.

우리, 우리 엄마아빠가 정신 차리고 잡아주신 것처럼, 저도 누나를 잡아드릴게요! 누나 그런 화장하는 거 하나도 안 어울려요! 옷도 이상하고, 누나는 이렇게 그냥 보면 정말 평범해보여서, 이런 곳에는 안 어울려요. 제 휴대폰 번호 알려드릴게요. 제가 계속 연락할게요! 진짜 주마다 아니면 더 자주 올 수 있어요. 누나, 포기하시면 안돼요! 평생 폐건물 위에 지어진 가게 안에서 살 수는 없잖아요!”

뒷문이 열린다. 누나의 왼쪽 다리는 벌써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열린 틈새 사이로 이번에는 더 뚜렷하게 누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다.

앞으로 여기 오지마. 이렇게 된 건 내 잘못이 크지만, 너도 이제 그만해. 지친다. 난 하루하루만 보고 사는 사람이야. 현재가 버틸 만하면, 그것도 상관없어. 그동안 즐거웠어. 살면서 너처럼 괜찮은 남자 이제는 볼 일 없지 싶네. 내가 전에도 말했지만 좋은 여자 만나라. 너라면 충분히 가능할거야.”

문이 닫혔다. 내 눈에서는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엉엉 울고 싶은데 그럴 힘조차 나지 않는다. 뒷문이 닫히는 소리가 내게는 한 사람의 꿈과 인생의 행복함이나 가능성들이 닫히는 소리로 들린다. 그냥 멍청하게 뒷문 옆에 치우지 않은 의자만을 보며 볼썽사납게 꺽꺽거릴 뿐이었다. 꺼져가는 매미소리 사이로 무언가 튀는 소리가 들렸지만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다. 얼마나 그 자리에 서있었는지 모르겠다. 다만 멍하니 서있던 중 울리는 휴대폰 너머로 부모님이 나를 찾는 소리가 들리자 뒷문을 두드릴 용기가 없어 그대로 몸을 돌려 집으로 돌아갔을 뿐이다.



2학기가 올 때까지 매일 전에 만나던 시간에 맞춰 공터까지 어슬렁을 갔다. 물론 아무도 없었고 의자마저도 다음 날부터는 볼 수 없었다. 나는 그냥 그렇게 예전에 슬리퍼를 무릎으로 받았던 위치에 서서 뒷문을 적게는 10분이 좀 넘게, 많게는 30분 가까이 쳐다보다가 왔을 때 모습 그대로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2학기가 왔다.

학교를 다닌 후에는 항상 공터 앞을 지나쳐 집으로 갔다. 여전히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2학기를 시작한 지 2주 째, 승기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 김성민. 너 대단하더라.”

아직 더위가 가시지 않은 날씨인데다가 점심으로 배가 불러 붕 뜬 머리로 복도를 걸어가는데 야비한 웃음을 띈 승기가 다가왔다. 좋지 않은 느낌이다. ‘, 그래.’ 하며 대충 받아치고 가는데 끈질기게 달라붙는다.

, 내가 처음에 보고 긴가민가했는데 계속 기다려보니까 너 맞더라고. 큭큭, 너 그 공터에 있는 업소의 창녀랑 친한 거야? 잤냐? ?”

뱃속이 싸해진다. 이 새끼가 방금 뭐라고 한 거야?

?”

아니, 여름방학 때 네가 그 여자가 뒷문인가로 들어가는데 그 뒤에서 우는 걸 봤거든. 처음에 너무 놀라서 착각인줄 알았는데, 너 요즘 계속 거기 앞을 지나쳐 가더라? 남은 방학 때도 거기 앞에 서있는 모습도 몇 번 봤고. 뭐야~ , 전에 처음 가보는 것처럼 행동하더니. 아니면 그 후에 관심이 생긴 거야?”

닥쳐, 너랑 상관없는 일이야.”

, 너 말이 좀 심하다? 거기 내가 알려준 건데. 아니다, 그때 너한테 말 걸었던 여자가 그 여자구나? 맞지? ~ 대박. 보통 사이가 아닌 것 같더니! 너 설마 그 창녀랑 사귄 거야? 진짜? 나이 존나 많아 보이던데! 근데 요즘은 차였나봐?”

지나가던 애들이 잘못 들었나 하고 흘낏흘낏 보며 지나간다. 살면서 이렇게 사람이 싫었던 적이 있던가? 실실거리며 웃고 있는 승기새끼의 얼굴이 클로즈업 돼서 보인다. 나도 모르게 몸이 딱딱하게 굳어지고 주먹이 쥐어진다.

, 얌전한 고양이가 어?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니! 어땠어, ?”


그 다음의 일들은 기억이 잘 이어지지 않는다. 주변에서 말리는 친구들의 말을 들어보면 내가 그 새끼에게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었고, 얼굴만 집중적으로 때렸다는 것이다. 나는 승기보다 몸도 작고 힘도 약하다. 그래서 당황한 그놈이 몇 대를 맞은 후에는 내게 반격을 가해 내 코를 부러뜨리고 배를 발로 차 바닥에 넘어뜨렸다. 내 얼굴은 곧 피투성이가 됐지만, 나는 그렇게 충격을 받아도 뭐에 홀린 듯 그놈의 얼굴만 때렸다고 한다. 주먹이 안 되면 손톱으로, 그것도 안 되면 내 머리로 받고 나중에는 그놈의 볼을 이로 세 개 물어 피부가 찢어질 때가지 늘어졌다고 했다. 결국 질린 그놈이 소리를 지르며 미친 듯이 나를 밀어냈고 주변 친구들이 복도에 피가 낭자한 것을 보고 죽기 살기로 말리고 선생님들을 불렀다. 나는 순식간에 학교에서 가장 유명한 학생이 되었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후 대기실로 나오는데 부모님께서 담임선생님과 함께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나는 담임선생님께 담담하게 인사를 드린 후 부모님과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부모님께서는 집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그 새끼가 선생님께 전부 말했을까? 그리고 선생님이 부모님께 그대로 알려드렸을까? 모르겠다. 만약 다 알려드렸다면, 모범생이라고 믿었던 아들이 학교 안에서 창녀와의 추문으로 동급생과 맞붙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부모님은 어떤 기분이셨을까.

저녁에 엄마가 하나뿐인 방으로 슬며시 나를 부르며 친구와 무슨 일로 싸웠는지는 모르겠지만 친구와 화해를 하라고 말씀을 하셨다. 병원비는 걱정하지 말라며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다고 선생님 말씀과 내 성격을 봤을 때 친구가 먼저 잘못한 것 같은데 그래도 용서하라신다. 선생님께서 말씀을 안 하셨거나, 선생님께서 그 놈의 말을 믿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다음 날 교실에 들어가니 같은 반 애들의 눈빛이 흔들리더니 곧 나를 위로한다. ‘야 그 5반의 이승기가 하는 새끼가 너한테 말 함부로 했다며’, ‘그 새끼 완전 날라리처럼 하고 다니더니 일 낼줄 알았다.’, ‘괜찮아? 근데 너 그때 좀 대단했어. 하긴 나라도 그런 말 들으면 화나겠다.’,

아무도 그 놈이 한 말이 사실이라고 믿지 않나보다. 하긴, 평소 얌전하고 공부만 하는 가난한 중학생이 그런다는 건 얘네들 머릿속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일수도 있겠다. 하지만 담임선생님은 그냥 넘어가지 않으셨다.


성민이 코는 좀 괜찮니.”

. 어제는 죄송했습니다.”

됐다. 그 이승기라는 놈은 원래 건들거리던 놈이라 안 그래도 일 한번 터뜨릴 것 같았지. 걔는 볼을 좀 꿰맸는데 그놈 부모님이 별로 신경을 안 쓰시더라. 네 부모님이 치료비 낸다고 하니 알아서 하라고 하시던데.”

.”

그래 그럼 그 치료비 문제는 됐고... 내가 이승기를 병원에 데려갈 때 들었던 말인데. 너무 말이 안 되는 내용이라 어이가 없기도 하지만, 혹시나 해서 말이다.”

.”

담임선생님은 나쁜 분이 아니시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항상 관심을 쏟으시는 열혈 교사도 아니셨다. 곧 정년퇴임을 앞두신 분으로 아무쪼록 무사태평한 것을 제일로 여기시는 분이시다. 그리고 중학생이긴 하지만 나에게 꽤나 높은 기대치를 품고 계신 분이셨다.

네가 사는 동네가 특성상 유흥가와 매우 가깝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단다.”

. 제 집에서 10분도 안 되는 거리에 있습니다.”

그래.. 그런데, 그 이승기가 하는 말이, 네가 그 업소의 여자들 중에 한 명과 관계를 가졌다고 하더구나. 네가 그 여자와 함께 있는 모습도 봤다던데...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거지만, 당연히 아니겠지?”

선생님의 업소의 여자라는 말은 창녀를 완곡히 돌린 말이라는 것을 단어는 물론 어투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만약 관계는 가지지 않았지만 자주 만나 이야기하던 사이였다고 한다면 뭐라고 하실까?

그런 적 절대 없습니다.”

만난 적도 없다는 거지?”

만난 적은 있습니다. 이승기 때문에 업소 골목길을 억지로 가다가 폰을 떨어뜨렸는데 그걸 한, 여자 분이 주어주셔서 받은 적이 있습니다.”

담임선생님은 내 대답에서 미심쩍은 부분을 발견한 것처럼 나를 쳐다보셨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리고무덤덤한 표정으로 선생님의 눈빛을 되받아쳤다.

그래, 알았다. 들어가라. 이승기는 전에 무단이탈한 전적도 몇 번 있고 동급생을 괴롭힌 전적도 있어서 이번에 며칠간 아예 나오지 말라고 했다. 한 동안은 마주칠 일 없을 거다. 신경끄고 평소처럼 생활하거라.”

담임선생님께 인사를 드린 후 교실로 돌아갔다. 친구들은 오전보다는 시들해진 반응으로 날 맞이하면서 담임선생님에 대해 몇 가지 물어보았는데 내 대답이 그다지 자극적이지 않자 갈수록 관심이 시들해지는 것이 눈에 보였다. 아마 며칠 후에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지내게 될 것 같다.


생각보다 길게 느껴진 학교의 하루가 끝나고 집으로 가는데, 눈물이 났다. 지현이 누나는 그곳에서 나오지 않는 한 평생 이런 취급을 받을 것이다. 누나는 가본적도 없는 곳에서,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들에게 마음껏 우롱당할 것이다. 누나를 찾아가는 사람들도 돈을 주고서 누나를 우롱하는 것이다. 누나도 알고 있을 것이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교무실에서 담임선생님이 나를 주시하던 눈빛이 생각났지만 상관없다. 나는 공터로 쉬지 않고 달려갔다. 그리고 그동안 두드리지 못했던 뒷문을 정신없이 두드렸다. 그렇게 한 2분 정도 흐르자 뒷문이 난폭하게 열렸다.

뭐니 꼬마야! 여기 너 같은 애들이 올 곳이 아니거든? 심심하면 다른 곳에 가서 놀아!”

지현이 누나 좀 불러주세요!”

?!”

지현이 누나 좀 불러주세요! 지현이 누나 여기 있잖아요! 5분이라도 좋으니까 불러주세요!”

지현이? .. 네가 그 꼬마구나. 애들이 지현이가 웬 꼬마랑 노닥거리는 걸 봤다더니 진짜였네. 나 참... , 꼬마야, 여기는 장난으로 놀러오는 곳이 아니거든? 지현이가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모르겠는데, 너 같은 애들 놀러오는 곳 절대 아니니까 빨리 가라. 우리 일하는 데 엄청 방해되거든?”

저 장난치는 거 아니에요! 진짜 급해서 그래요. 누나한테 그냥 저 왔는데 진짜 급하다고만 전해주세요, ?!”

, 꼬마야. 나도 장난 아니거든... 그리고 지현이 이제 여기 없어. 말도 없이 갔나본데. 지현이 이제 여기 없다. 앞으로도 올 일 없을 것 같고. 지금 우리도 걔 찾다가 포기했는데, 무슨 오 분이야.”

? 지현이 누나가 없다고요?”

생각치도 못한 대답이라 벙졌다. 그 여자 말로 지현이 누나는 일주일 전 쯤 손님과 잠시 나간다 싶더니 그 후 안 돌아왔다고 한다. 아무리 찾아도 없다는데, 가게에서는 이미 아예 다른 지역으로 갔다고 여기고 있단다. 그 외의 이야기는 더 이상 들을 수 없었지만 지현이 누나가 이 가게, 그리고 이 동네에 없다는 것은 확실했다. 업소에서 나간 것이다.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났다. 우리 학교는 겨울방학을 맞았다. 내 성적은 전보다 올라서 전교 2등이 되었다. 고지가 멀지 않다. 그리고, 당연하겠지만 이때까지 누나에게서는 어떠한 연락도 없었다. 겨울방학이라 시간이 많이 남는다. 방안이 답답해 밖으로 나왔다. 올해 들어 가장 추운날씨라고 하더니 예보가 맞았다고 증명하듯이 하늘에서 보송한 눈들이 내렸다. 하늘이 조금씩 찢어져 내리는 것 같다.

지현이 누나가 눈 내리는 하늘 아래서 무얼 하고 있을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누나가 왜 나갔는지 모르겠다. 그 남자 손님과 눈이 맞았거나 아니면 그냥 업소 일에 신물이 나서 도망을 갔을 수도 있다. 혹은 아이스크림 카페의 꿈을 이루기 위해 나간 것일지도 모른다.

잘 됐으면 좋겠다. 누나가 마지막으로 내게 말했던 그 후회의 감정들과, 지쳤다거나 현재만 버티고 살 뿐이라거나, 포기에 익숙한 삶이라는 등의 절망의 말들을 다시 반복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 평범한 모습 그대로 평범하게 살기를 바란다. 나를 보고 느꼈던 그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마음과 꿈에 대한 충동으로 업소를 나온 것이 정말 다행이었다고 말하길 바란다. 그리고 누군가 좋은 사람이 누나를 잡아줘서 이후에는 행복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이제 공터를 찾아가는 어슬렁 습관은 버렸다. 다만 매미가 시끄럽게 우는 날이면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누군가의 행복을 비는 습관이 생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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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려한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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