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이정표

밀랍 - 타니아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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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려한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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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랍


언젠가 널 여기서 데리고 나갈 거야.

어느 날 불쑥 너는 그렇게 말했지.

, 바로 이 창문으로.

마을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고, 너는 서리가 낀 창틀에 걸터앉아 유리창에 네 손바닥을 대보고 있었어. 아주 추운 날이었지. 난로의 불꽃이 못생긴 아기처럼 딱딱 울어댔어. 쟁반 위에 얹어진 네가 먹다 남긴 사과는 표면이 얼어붙은 채 새파랗게 질렸고, 우리 둘 중 아무도 손을 대지 않은 식빵은 바위덩어리처럼 딱딱하게 굳어있었어.

우리는 하루 종일 아무 것도 먹지 않았지. 너는 원래도 하루 종일 거의 아무 것도 먹지 않았는데 말이야. 네 야윈 뺨과 푸석한 머릿결, 그리고 바다색 눈은 꼭 예수님을 닮은 것 같았어. 네가 성경에서 그토록 찾아 헤매던 분이, 네가 낮에도 호수 위를 떠다니는 저 달에 계실 거라고 굳게 믿고 있던 분이, 사실은 네 곁에 있다는 사실에 나는 별로 놀라지 않았단다.

너는 천사였어, 요한. 나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단다. 너는 비록 행색은 지저분했지만 마음가짐은 순결했고, 올발랐고, 무구했어. 너는 어떤 명화보다 아름다웠단다. 나는 심지어 까슬까슬한 네 뺨의 면도 자국에서마저도 구름 냄새를 느꼈어. 그리고 네 눈은, , 네 눈은…….

내 신께 맹세하건데, 네 눈에 담겨있던 그 깊고 광대한 우수는 분명 내가 범접할 수 없는 아주 높은 곳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그런 종류의 것이었어. 너는 들키지 않았다고 생각했겠지. 완벽하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난 알고 있었단다. 요한, 난 전부 알고 있었어.

그도 그럴게 넌 하늘에서 내려왔잖니! 나는 아직도 그 첫 만남을 기억하고 있단다. 넌 푸르죽죽한 얼굴로 테라스에 서서 내 골방의 창문을 두드렸지. 달걀 모양의 가죽 모자에 두껍고 볼록한 기묘한 안경을 쓰고, 온 몸이 벨트투성이였어. 하지만 등에는 철사로 된 날개를 달고 있었지. 비록 그 날개는 펄럭거리지 않았고, 깃털 하나 없이 민둥민둥하긴 했지만 말이야……. 그래도 난 그게 천사의 날개였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단다. 물론 넌 가짜라고 내게 못 박았지. 하지만 내가 보기에 너의 그 말은 네 스스로에게조차 진실성을 확신 받지 못하고 있었어.

게다가 넌 그 날개가 가짜지만 적어도 하늘을 날 수는 있다고 말했잖아! 나는 말이지, 지금도 정말 너에게 묻고 싶은데, 대체 하늘을 날 수 있는 날개를 앞에 두고 너는 어떤 면에서 그것이 가짜라고 느꼈던 거니? 네가 진짜라고 믿던 하얗고 보드라운 깃이 달린 날개 속에도 혹 철심이나 나사못이 들어있을 줄 누가 알겠니? 너는 눈앞에 진실을 두고도 믿지 못하는 조금 이상한 사람이기도 했단다, 요한. 내가 몇 번이나 말해주어야 했지. 아주 당연한 진실들에 대해서, 몇 번이나.

어쨌건 너는 그렇게 홀연히 하늘에서 내 테라스로 내려왔지. 나는 그때 막 손님을 내보내고 혼자 자리를 정돈하고 있었어. , 그러고 보니 그날 온 손님에 대해서 네게 얘기해 준 적이 없구나. 난 그날의 일은 지금도 아주 사소한 것까지 모조리 다 기억하고 있단다. 그날 내가 몇 명의 손님을 받았는지, 몇 명이 약지에 반지를 꼈는지, 몇 명이 내게 몇 번의 키스를 했는지, 몇 번이나 엉덩이를 흔들어댔는지조차 전부! 왜냐면 그날은 내 인생의 전부였으니까, 요한, 오직 그날 하루만이 내 인생 모두를 통틀어 본질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던 유일한 날이었으니까. 그날을 겪은 나는 이제 내가 인간이 아니라 오직 그 찰나를 위해 태어난 하루살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단다. 나는 너라는 천사를 만나기 위해 태어난 작은 벌레에 불과했던 거야. 그리고 그 사실을 지금이나마 깨닫게 되어 너무 행복하단다…….

그날 네가 하늘에서 내려오기 바로 직전에 왔던 손님은 아주 얌전하고 조숙한 사람이었어. 테가 없는 둥그런 안경을 끼고 머리를 군인처럼 깎았는데, 안경 너머로 날 보는 눈길이 정말 오싹했지. 그는 침대에 걸터앉아 내 허벅지를 쓰다듬으며 자기 직업이 교사라고 말했지만, 나는 단박에 그가 범죄자라는 걸 알아맞혔어. 그것도 아주 위험천만한. 하지만 내 일은 그를 신고하는 게 아니었단다. 내 일은 그저 침묵하고 그의 물건을 빨고 다리를 벌리는 것뿐이었어. 마치 인형처럼. 그렇게만 하면 그가 내게 해를 가할 일은 전혀 없다고 믿었단다. 그러니 내가 그 위험천만한 범죄자에 대해 끝까지 함구한 걸 용서해주렴. 그가 이후에 내게 했던혹은 하려했던가혹한 짓들은 전부 나도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으니까.

첫날엔 좋은 인상을 심어주려 했는지 팁도 많이 주고, 다정하게 키스를 하고, 그 짓을 하는 내내 나를 연인이라도 보듯 그윽하게 바라봤단다. 부끄럽게도 당시의 나는 그자가 좀 소름끼치긴 하지만 그래도 꽤 격식이 있는 남자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그 손님을 보내고도 한동안은 기분이 좋았단다……. 물론 그뿐이었어, 정말로.

이윽고 손님은 조용히 내 방을 떠났고, 나는 침대 시트를 새 걸로 갈아 끼우고 새 향수를 뿌렸어. 바로 그때 네가 창문을 두드린 거야! 시퍼런 호수가 훤히 내다보이는 내 테라스에서! 내 심장은 하마터면 멎을 뻔했단다. 너의 등장은 너무나 문학적이고 독창적이었어. 그리고 내가 항상 마음에 그리고 있던 꿈과 쏙 빼닮아 있었지. 믿기 어렵겠지만 난 항상 언젠가 천사가 나를 데리러 그 테라스에, 바로 그 자리에 나타날 거라고 생각했거든.

너는 해괴망측한 모습이었지. 얼굴의 반을 김이 서린 안경이 뒤덮고 있었잖아. 그 안경은 내 팔뚝만 했고, 옆에 손잡이를 당기면 렌즈를 세척해주는 필터가 따로 끼워져 있었어. 너는 연신 그걸로 안경에 낀 서리를 제거했고.

안경 아래로 보이는 부르튼 입술로 뭔가를 외치며 너는 내 창문을 두들겼지. 반만 보이는 네 얼굴은 꼭 비강으로 뇌를 끄집어낸 직후의 미라 같았단다. 너무 가여워보였어!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자물쇠를 풀고 문을 열었어. 너는 등에 맨 철사 날개를 마구잡이로 접은 다음그건 놀랍게도 접히더구나!등에서 떼어내 내 방으로 집어던졌지. 그리고 너도 기어서 창틀을 넘어와 방바닥에 떨어졌어. 네 몸은 얼음장 같았고, 무서울 정도로 떨고 있었어.

나는, 의사를 불렀어야 했는데, 나는……. 그냥 창문을 얼른 닫고 너를 난로 앞으로 데리고 갔어. 네 모자와 안경을 벗기고 새로 씌운 시트와 이불보를 모조리 가져와 네 머리에 덮은 다음 나도 그 안으로 들어갔지. 네 목덜미를 뒤에서 끌어안은 뒤 계속 따뜻한 숨을 불어넣었어. 마치 내 생명을 나눠주는 것처럼, 나는 정말로 그런 맘으로 너를 안았어.

이불 안에는 우리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밖에는 들리지 않았지. 너는 차츰 떨림이 멎었고, 졸음이 오는 듯 뒤척거렸어. 내 품에는 마치 커다랗고 피둥피둥 살이 찐 아기가 있는 것 같았고, 나를 계속 보채는 듯했지. 나는 너를 재우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어. 내 자장가가 서툴러서인지 너는 팔꿈치로 내 가슴을 연이어 두들기고 시트의 모서리가 난로에 잔뜩 그을리고 나서야 잠이 들었단다.

네가 잠이 들자 세상은 조용해졌어. 빗자루 털 같은 네 머리와 옷 속에는 아직 서리가 남아있었고, 나는 조용한 가운데 그것들을 하나씩 떼어냈지. 그러면서 생각했어. 이 애는 대체 누굴까? 어떻게 내 테라스에 눈을 맞으며 서있었던 걸까? 어쩜 이렇게 사랑스럽고 기이한 걸까?

뒤늦게 본, 안경을 벗은 네 얼굴은 비록 굶주림으로 볼이 홀쭉했지만 아주 여리고 예뻤단다. 너는 심지어 나보다도 어린 앳된 소년이었던 거야! 가죽과 벨트에 둘러싸인 송아지 무릎 같은 뾰족한 어깨, 내 숨으로 새빨갛게 달아오른 하얀 목덜미, 스쳐가듯 봤던 에메랄드색 눈동자. 너는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름다운 아기의 모습을 하고 있었단다. 그런 네가 돌돌 말 수 있는 철사 날개를 등에 매고 하늘을 날아왔는데, 내가 감히 너를 나와 같은 인간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겠니? 내가 감히?

다행히 그날은 더 이상 손님이 오지 않았어. 네가 마지막이었지. 호수 가장자리가 꽁꽁 얼어붙을 즈음이면 손님이 줄어든다는 건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니까, 나는 너를 이대로 계속 방에 두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단다. 설령 너 이외의 마지막손님이 비밀스럽게 노크를 한다고 해도 문을 열어주지 않기로 했어. 나는 더 이상 영업을 할 생각이 없었으니까.

얼마나 지났을까, 나도 널 따라 잠이 들었어. 다시 일어났을 때는 내 품에 네가 없었지. 나는 네가 난로에 너무 가까이 있어서 녹아버린 줄 알았단다. 너는 아무런 기별도 흔적도 없이 너무나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거야. 그런데 고개를 돌리자 거짓말처럼 꽃병들을 올려뒀던 서랍장에 꽃병 대신 예의 커다란 날개를 올려놓고 만지작대고 있던 네가 있었고, 손님들이 병 채로 선물해준 하루살이꽃들은 모포를 덮은 채 잠든 내 머리맡에 늘어서 있었어. 나를 추도하듯이.

빨갛고 점투성이인 꽃잎이 바로 내 코를 간질일 정도로 가까이 있는 게 보였지. 나는 아찔한 오색가지 향기와 졸음으로 정신이 몽롱했어. 이불 속에서 반쯤 뜬 눈으로 한동안 네 등을 바라봤단다. 이윽고 너는 내 기척을 감지하고 고개를 돌렸고, 나를 내려다봤지.

안녕.

너는 말했어.

잘 잤어?

마치 나와 한 바탕 즐기고 나서 창가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손님들처럼 뻔뻔하고 자연스러운 얼굴로. 덕분에 나는 혹시 내 기억에서 사라져버렸을지 모르는 열적이고 환상적인 시간을 떠올리기 위해 끙끙대야 했단다. 결국 그런 건 없었지만.

일어났으면 몇 가지만 물어봐도 될까?

너는 내가 보는 앞에서 재빨리 만지고 있던 날개를 접어서 치웠지. 꼭 부끄러운 물건을 숨기는 것처럼! 너는 눈치 채지 못했겠지만 너의 그런 행동들이 나를 더욱 야릇한 기대로 물들게 했단다.

그래. 물어봐.

나는 일어나 모포를 몸에 감고 앉았어. 너도 창문 아래의 까슬까슬한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지. 그제야 우리는 네가 내 방에 들어오고 나서 처음으로 서로를 똑바로 마주봤단다.

여긴 어디야?

너는 물었어.

내 방이야.

나는 대답했고, 너는 전혀 만족하지 못한, 내 언어 능력을 아주 말초적인 부분에서부터 의심하는 그런 눈길로 나를 바라봤지.

네 이름은 뭐야?

한나. 너는?

요한.

너는 이름을 밝히고 한동안 침묵했어. 네가 다음으로 무슨 질문을 할지 고민하는 동안 나는 일어나서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찬장에서 마른 자스민 잎을 꺼내 차를 끓일 준비를 했지. 배가 움푹 파인 양철 주전자를 거꾸로 털자 까만 재가 떨어졌고 너는 기겁을 했어. 나는 아랑곳 않고 거기에 물을 담아서 난로 앞의 받침대에 끼웠단다.

차 마실 거니?

한동안 손도 대지 않은 유리병의 마개를 열자 하고 큰소리가 나서 너는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지. 너는 이 모든 것들을, 내가 항상 몸담고 있는 방 안의 따스한 물건들을 의심스런 눈길로 바라보았어. 대나무를 잘라 그 안에 든 물을 마시는 원주민이라도 보는 양!

그리곤 절박한 목소리로 물었지.

그걸 마실 거야? 그 주전자에 든 물에 타서?

맛있을 거야. 난 차 끓이는 솜씨가 좋거든.

물론 너는 내 차 끓이는 솜씨를 의심하는 눈치는 아니었지. 넌 아직도 주전자에서 떨어진 바닥의 재를 보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난 그런 너의 심정을 모른 척하는 게 즐거웠단다. 그 둥그렇고 귀여운 눈동자란.

물이 주전자 안에서 튀는 소리를 낼 무렵 너는 모든 걸 포기하고 곁으로 다가왔지. 서랍장 위를 흘낏 보자 네가 몸에 붙이고 왔던 많은 소지품들이 아주 작아진 채로 모여 있었어. 필터가 달린 네 멋쟁이 안경도. 내가 그것들을 보는 걸 의식한 너는 어색하게 화제를 돌렸지.

그 물은 몸에 안 좋을 거야.

괜찮아. 물은 5분 이상 끓이면 안에 들어있는 세균이 전부 죽거든. 해독된 물에 차를 타서 마시는 건 건강에 해롭지 않아.

나는 기다렸다는 듯 네게 말했지. 너는 조금 감탄했고, 또 조금 부끄러워했고, 또 조금 질투했지.

그런 걸 어떻게 알아?

손님이 말해줬어.

손님?

네가 물었을 때 때마침 주전자에서 증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고 나는 대답하고 싶지 않았던 그 질문을 피할 수 있었어. 왜일까? 나는 내 일이 조금도 부끄럽지 않았는데, 어째서인지 네게는 밝히고 싶지 않았단다. 그건 역시 네가 내게 특별한 존재였기 때문일 거야.

부지깽이를 주전자 손잡이에 걸쳐서 들어 올린 뒤 조심스레 탁자에 놓았지. 너는 멀뚱히 보고 있었어. 내가 차를 끓인다고 말했는데도! 나는 그제야 처음으로 네 무례에 대해 조금 꼬집어 말했단다. 네가 내 테라스에 멋대로 들어와 있던 건 무례한 일이 아니었지만, 내가 쇠막대기로 끓는 물이 담긴 주전자를 옮기는 걸 보고도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건 분명 무례한 일이었어.

가만히 있지 말고 저기 대야에서 씻어놓은 찻잔을 꺼내와! 두 개.

너는 내 호통에 불에 댄 듯 놀라며 구석으로 뛰어갔지. 그리고 수공예로 만든 울퉁불퉁한 둥그런 찻잔 두 개를 우선 가져오고, 뒤이어 과일을 담는 커다란 쟁반을 받침대랍시고 가져왔지. 나는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었지만 너는 필사적으로 움직이느라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았어. 내가 그랬단다, 요한. 난 그때 화를 냈던 게 아니라 네가 동분서주하는 모습을 보며 웃고 있었어.

고마워.

준비를 마친 너는 안도의 숨을 쉬며 내 침대에 털썩 앉았지. 나는 맞은편 테이블로 이동해서 너에게 차를 타는 시범을 보였단다. 차관에 자스민과 함께 끓인 물을 붓고, 첫 번째 우린 물을 내 컵에만 따르고 나머지는 버렸지. 두 번째 우린 물도 버릴까 하다가 그냥 네 컵에 따랐어. 방 안에는 겨울에 어울리는 그윽한 자스민 향이 가득해졌지. 너는 예상대로 향에 강하지 않았어. 이마를 오므리며 어린애처럼 툴툴 댔지.

이 방엔 향이 너무 많아.

손님들은 대개 선물로 꽃이나 차를 주거든.

나도 모르게 또 손님에 대한 얘기를 해버렸다는 걸 알고 나는 입을 다물었단다. 다행히 너는 그저 자스민 향에 온 정신을 빼앗긴 채였어.

, 마셔.

네게 두 번 우린 자스민차를 건넸어. 찻잔을 받아든 네 표정을 보고 나서야 두 번쯤은 더 우려냈어야 했다는 걸 깨달았지. 너는 세균보다 더욱 해로운 무언가를 보는 눈으로 잔에 담긴 차를 보고 있었어. 게다가 결국 너는 그걸 반도 마시지 않았단다.

그래서.

하지만 나는 그 모든 걸 그 당시에는 무시했어. 나는 뜨거운 찻잔을 두 손으로 꼭 안고 네 옆에 앉았어. 침대가 흔들리자 방 안의 많은 것들이의자와 테이블, 네가 짐을 올려둔 서랍장, 그리고 네 눈동자까지흔들렸지. 너와 내 어깨가 부대꼈고, 너는 있는 그대로 경험 없는 소년처럼 쭈뼛거렸어.

충분히 차분해졌으면 이제 너에 대한 얘기를 내가 들어봐도 될까? 네 입으로.

「…….

너는 찻잔을 떠다니는 자스민 이파리가 우글우글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조급하게 얘기를 시작했어. 너는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던 거지.

나는 저 산 너머에서 왔어. 정확히는, 산 위에 있는 작은 마을인데…….

산 위에? 거긴 양떼들밖에 안 사는데. 넌 양치기니?

아니야! 난 양치기 따위가 아니야. 물론, 저기, 내 삼촌이랑 삼촌이 기르던 개들은 그랬지만, 난 아니었어. 나는……. 양하고는 아무 관련도 없었어.

너는 마치 양치기라면 질색이라는 듯이 부정했다가, 이내 그것을 무안해하며 다시 양치기인 삼촌을 감쌌다가, 그래도 역시 자신은 양치기인 삼촌과는 아무 관련도 없다고 못 박았어. 내가 볼 때 너는 생각하는 것과 말하는 것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사람 같지는 않았단다. 너는 솔직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지, 요한.

그럼 넌 어떤 사람이었니, 요한? 무슨 일을 했어?

나는…….

너는 말하며 서랍장 위를 흘낏 봤어. 그 시선처리가 내 질문에 대한 모든 대답이란 걸 알았단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어. 아무 일도 하지 않았고……. 가끔 양털을 깎거나 마을 사람들에게 치즈를 일일이 나눠주긴 했지만, 그건 일이 아니었으니까.

너는 여전히 횡설수설했어. 너는 아무래도 좋은 말들만 늘어놓았을 뿐 정말로 하고 싶은 얘기는 숨기려 했단다. 나는 네 창피함을 덜어주기 위해 물었지.

정말 그것뿐이었니?

나는 무의미하게 이리저리 흩뿌려지는 네 시선을 내게로 모았단다. 네가 내심은 말하고 싶었던 것들을 그 눈으로 내게 전해주길 바랐어. 침묵처럼 아주 조용히.

정말로?

「…….

나는 침대에 올라와 있는 네 손등을 아주 느리게 감쌌어. 너는 그제야 내 눈을 똑바로 봤지. 내가 빙그레 웃자, 너도 칠칠치 못한 얼굴로 따라 웃었지.

사실은 저런 걸 만들었던 게 아니야? 그게 네 일은 아니었니?

내가 서랍장 위를 가리키자 너는 막다른 골목에 몰린 사람처럼 초조해졌어.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비밀을 누군가가 알아줘서 기쁘고 흥분된 것 같기도 했단다. 너는 얼른 그 물건들에 대해서 내게 설명해주고 싶은 듯 다리를 떨었지만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였어. 나는 찻잔을 들고 일어나 네 대신 서랍장으로 갔지.

그리고 거기에 있는 네 소지품들을 보았어. 그 날개는 네가 등에 매고 온 배낭과 한 몸이었지. 날개를 말아서 배낭 안에 넣을 수 있도록 말이야. 날개 외에도 네 가방에는 치즈가 담긴 주머니와 헤지고 닳은 성경 한 권이 들어있었어. , 정말 겉표지에 동물 가죽을 덧댄 성경 같은 건 그때 처음 봤단다! 아마도 넌 오래 보관하기 위해 그런 짓을 한 거겠지……. 그리고 배낭 주변에는 네가 옷에서 풀어놓은 수많은 쇠고랑이 달린 벨트들이 있었어. 그 벨트들에는 작은 포켓이 주렁주렁 달려있었고, 그 옆에는 네가 벗어둔 모자, 부츠, 장갑, 그리고 안경이 있었지. 그래, 그 안경.

처음부터 신경 쓰였던 그 가죽 밴드가 달린 안경을 내가 들어 올리자 너는 반사적으로 말을 걸었어.

그건 보안경이야.

너는 마침내 침대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왔어. 이윽고 내 손바닥에 올려져있던 독특한 안경은 처음으로 내게 자기소개를 했지.

높은 산을 오를 때 주로 써. 쌓인 눈에서 반사된 햇빛은 각막을 상하게 할 수 있거든. 그걸 방지하기 위해 쓰는 거야. 그리고 눈보라로부터 눈을 보호하기 위해 렌즈 주위에 가리개가 있고, 렌즈에 묻은 이물질을 빨리 닦기 위해 필터가 달려있어. 이 필터는 내가 발명한 거야. 내가……. 그러니까, 나는…….

네가 이걸 만들었구나.

나는 망설이는 네 대신 얼른 말을 끝맺었지. 너는 내가 그토록 담담하게 너의 위업을 인정한 것이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이었어.

「……맞아.

멋진데?

나는 시험 삼아 안경을 써봤지. 조금 답답했어, 꼭 어딘가 좁은 곳에 갇혀있는 기분이랄까. 두꺼운 렌즈 너머로 네가 겸연쩍게 머리를 긁는 모습이 보였단다.

멋지다구?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그럼. 뭔가를 창조해낸다는 건 아주 멋진 일이야, 요한.

나는 시험 삼아 손잡이를 당겨 필터가 렌즈의 이물질을 엉성하게 닦아내는 모습을 내부에서 지켜봤어. 그건 아주 훌륭했지. ‘뽀드득하고 소리가 났다니깐! 네가 말리지 않았다면 내가 그 줄을 몇 번이나 당겼을지 나조차도 모르겠어…….

고마워.

너는 불쑥 그렇게 말했지. 어딘가 멍한 얼굴로 먼 곳을 보면서 말이야.

그렇게 말해준 건 네가 처음이야.

, 당연히 그랬겠지.

네가 고향인 산골 마을에서 얼마나 멸시를 받으며 이 필터에 기름칠을 하고 조임쇠를 조였을지 굳이 네 입으로 들을 필요도 없었단다. 네 태도가 모두 대변해주었으니까.

넌 내가 알던 여자들하고는 좀 다른 것 같아.

너는 여전히 경탄과 흥분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내가 조금은 듣고 싶었던 칭찬들을 늘어놓기 시작했어.

생각이 깊다고 해야 할까……. 아는 것도 많고, 이해심도 많은 것 같아. 거기다 말도 굉장히 조리 있게 하고, 차분하고……. 마을에 있는 여자애들은 다 바보였거든. 그런 주제에 날 바보 취급했어.

그보다 더한 비극은 없다는 듯 너는 열변했어. 그제야, 너는 너에 대해서 진솔하게 말할 준비가 된 것 같았단다.

우리는 다시 침대에 가 앉았지. 너는 네가 말한 그 보안경이라는 물건을 손에 꼭 쥔 채 말했어.

우리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에 나한테 창고를 물려주셨어. 그 창고에는 아버지가 만들다 만 복엽 활공기滑空機가 있었는데…….

활공기가 뭔데?

비행기의 일종이야. 엔진이 없는 비행기지.

비행기는 뭔데?

그 질문을 했을 때, 너는 마치 미개인을 보는 선교사 같은 눈을 했단다. 물론 나는 비행기나 활공기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지만, 내가 모르는 편이 더욱 너를 기쁘게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 예상은 빗나갔지.

비행기라는 건, 하늘을 나는 마차 같은 거야. 사실 네가 모를 수도 있어. 아니, 네가 모르는 게 당연하지. 지금까지 엔진을 단 비행기가 하늘을 나는 걸 성공한 적은 한 번도 없었거든……. 다른 것도 다 마찬가지지만.

나는 네 말을 이해하려 열심히 노력했단다. 하지만 내가 필사적으로 끙끙대는 모습에, 너는 내가 자신이 상상했던 이상적인 여성과는 역시 조금 거리가 멀다는 걸 눈치 채고 실망스러워 했어. 물론 내가 더더욱 너의 실망을 사게 된 건 바로 얼마 뒤 내 직업이 너에게 들통 났을 때였지만.

어쨌든……. 네 말은 그 마차가 하늘을 난다는 거지? 새처럼?

맞아. 새처럼 날개가 달리기도 했어. 고정익固定翼이라고 해. 이렇게 길고 평평한 거야.

그래도 그때는 네 실망이 그리 크지 않았는지 너는 이내 다시 내게 설명하기 시작했어.

아버지는 창고에 있던 그 활공기를 내가 대신 완성하길 원하셨어. 그래서 그 창고를 내게 주신 거야. 이듬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는 그의 뜻대로 활공기를 만들기 시작했지. 친지들은 아무도 이해를 못했어. 나더러 왜 그런 걸 만드는 거냐고, 너도 도시의 머저리들처럼 비싼 기계로 초원에 박치기를 하고 싶은 거냐고 물었어. 물론 나는 그런 바보들 말은 신경도 쓰지 않았지만.

왜 제대로 대답해주지 않았니?

?

네가 왜 그 활공기라는 걸 만드는지, 제대로 대답해줬다면 사람들도 이해해주지 않았을까?

내 말에 너는 불만스럽고 답답한 표정을 지었어.

말했어. 한 번은. ……네가 오해할까봐 단언해두는데 그 사람들은 무슨 이유를 댔건 내가 하는 일을 이해 못했을 거야. 그 사람들은 내가 절대로 활공기를 완성시키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내가 뭣 때문에 활공기를 만드는지는 아무래도 좋았다고!

너는 침대 머리맡의 장식장을 주먹으로 두들겼어. 커다란 과일 쟁반 위에 올려진 네 찻잔이 바르르 몸을 떨었지. 너는 면목 없다는 얼굴이 되어 고개를 떨어트렸고, 나는 네 저린 팔을 잡아 내게로 가져왔어.

그럼 그 이유를 내게도 한 번 말해줄래? 난 아마 이해할 수 있을 거야. 넌 무엇 때문에 그걸 완성시키려고 했니? 단지 아버지가 물려준 일이라서?

아니야. 나는…….

말해보렴. 난 널 비웃지 않아.

내 손가락이 네 손가락의 사이사이를 파고들었어. 네 살은 아주 연하고 부드러웠지만, 장갑을 벗은 네 손가락들은 온통 굳은살과 반쯤 아문 생채기로 가득했단다. 내가 그 상처들을 쓰다듬자 너는 촉촉해진 눈망울에서 눈물이 떨어지지 않도록 눈에 힘을 꽉 주었어. 너는 결국 울지는 않았지.

나는……. 그걸로 달에 가고 싶었어. 본 적 있어? 하늘에는 가끔 낮에도 달이 뜨는데, 그건 거기 계시는 예수님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기 때문이래.

내가 아는 성경이랑은 얘기가 많이 틀리구나.

나는 후후 웃었어. 동물 가죽을 덧댄, 종이가 쭈글쭈글해진 네 성경에도 아마 그런 내용은 없었겠지. 하지만 난 네 말을 믿었단다. 다름 아닌 네가 하는 말이었으니까. 베드로의 후계자인 주교님보다도 너는 더욱 그분에게 가까운 존재였어. 왜냐면 너는 그분에게 다가갈 날개를 가지고 있었잖니. 우리 중 아무도 가지지 못한 그 날개를, 오직 너만은…….

그럼, 활공기라는 건 그렇게 높은 곳까지 날 수 있는 거니? 달까지도?

「……아직은 아니야. 하지만 언젠가는 그렇게 될 거야. 아마 그때는 엔진이 필요할 거고, 더 이상 활공기가 아니게 되겠지만…….

그렇구나.

사실은 활공기보다 더 안정적이고 높이 날 수 있는 항공기가 있기는 있어. 기구氣球라고 해. 비행기하고는 구조가 다른데, 가스의 정적부력을 이용하지…….

너의 세심하고 깐깐한 수업에 집중하는 것이 나는 즐거웠지만, 그때만큼은 네 말을 도중에 끊을 수밖에 없었단다.

그 기구란 게 더 높이 날 수 있다구? 그럼 넌 왜 그걸 만들지 않는 거니?

「…….

너는 기다렸다는 듯 입을 다물었어. 마치 내게서 그 질문을 도출해내기 위해 기구 얘기를 꺼낸 것 같았지.

왜냐면 이제 와서 새로 기구를 만들기에는 돈이 부족했기 때문이야. 활공기는 아버지가 창고에 남겨둔 물건들로 어떻게든 만들 수 있었지만, 기구는 그럴 수 없었어. ……게다가 기구도 아직 달까지 다다르지 못한 건 마찬가지야. 아직 제대로 뜨지도 못하는 비행기보다 더 치명적인 약점이 있거든.

그래?

나는 그다지 납득할 수 없었지만, 네가 그 문제로 얼마나 우울해하고 고민했을지 어렴풋이 짐작이 갔기에 더는 캐묻지 않았단다. 덧붙여 네가 말한 기구의 치명적인 약점은, 물론 정당한 근거에 따른 말이었지만, 나는 네가 오래 전 다른 여지가 없어 했던 선택기구가 아니라 활공기를 고른 것의 정당성을 위해 억지로 꾸며낸 말이라고 생각했지.

어쨌든 그래서 난 활공기를 계속 만들었어. 그러던 중 기체의 중량이 처음 기획했던 것보다 가벼워야할지도 모른다는 걸 깨달았지.

너는 드디어 네가 어째서 내 테라스에 나타나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단다. 아주 긴, 하지만 흥미로운 서두였어.

내가 만든 활공기는 기체 자체의 무게에 내 몸무게를 더한 총량을 안고 뜰 수 있어야 했어. 그게 첫 걸음이었지. 우선 비행기를 띄워야, 어떻게 더 높이 날 수 있을지도 고민할 수 있었어. 하지만 아버지의 도안대로라면 그 활공기는 절대 뜰 수 없었어. 당연해. 아버지는 무척 신중하게 여러 번 반복해서 계산하셨지만……. ‘실험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으셨으니까.

실험?

그래. 그래서 난 실험을 하기로 한 거야.

침대에서 일어난 너는 서랍장으로 가서 예의 그 배낭을 가져왔어. 안에 접힌 철사를 꼬깃꼬깃하게 접었다가 다시 휘어지도록 세게 펼쳤지. 날개는 조금 삐뚤빼뚤하게 변해있었어. 어딘가 부러졌구나, 나는 직감했지.

애초부터 적절한 단계를 거치지 않고 무작정 그렇게 큰 비행기를 만든 것 자체가 무모한 일이었어. 작은 것부터 차근차근 만들어나가는 게 옳은 방법이었지. 아버지도 나도 그걸 너무 늦게 깨달은 거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너는 네 과오를 이미 오래 전부터 깨닫고 있었던 눈치였단다. 네 솔직한 눈이 내게 다 말해주었어. 아마 너는, 어쩔 수 없이 기구를 포기했을 때처럼 몹쓸 돈 문제에 부딪쳤던 거겠지.

이제와 지금까지 만든 것들을 다 뒤엎을 수는 없었어. 예산도 부족했고……. 활공기를 마저 완성하기 전에 반드시 필요한 몇 가지만 확인하기로 했지.

너는 풀죽은 얼굴로 철사를 삐걱삐걱 움직였어. 그 일련의 행동은 너의 실험이 생각만큼 잘 풀리지 않았다는 걸 내게 사유하게 했단다.

마을 사람들은 내가 활공기를 만드는 걸 잠시 중단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놀려댔어. 나는 다른 실험을 하는 중이라고 설명하는 것조차 지쳤고, 그냥 실험을 하기에 적합한 바람이 불 때까지 며칠을 기다렸다가……. 산을 내려왔어. 예산을 쪼개서 만든 이걸 들고.

날개 말이지?

그래, 날개. 정확히는 소형 개조 행글라이더지만…….

맨 처음 내가 그런 고유명사들을 알아듣지 못했을 때 너는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는 은근슬쩍 내 우위에 서는 것이 즐거운 듯한 얼굴이 되었단다. 마치 지금처럼! 너는 못 말리겠다는 듯 나를 보며 웃고 있었지.

웃는 너를 보고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져 물었어.

그럼, 넌 그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나는 실험을 한 거니?

맞아.

흐음…….

나는 네게서 건네받은 그 날개를 찬찬히 다시 살펴봤단다. 멀리서 보기만 했던 때와 달리 직접 철사를 쓰다듬어 보기도 하고, 접어보기도 했어. 이윽고 내가 갖게 된 그 날개에 대한 인상은, 아마 너에겐 무척 유감스러운 것이었을 거야. 마치 내가 네가 살던 마을의 우둔한 여자들하고 똑같이 보일 정도로 말이지.

왜냐면 가까이서 살펴본 그것은 물론 멋진 날개 모양이긴 했지만, 동시에 그냥 그럴 듯한 철사 쪼가리로밖에 보이지 않기도 했거든. 그리고 너도 인정했듯 정말로 그건 두꺼운 철사를 새의 날개 골격 모양으로 이어 붙여놓은 것에 불과했지.

그래, 정확히는 그걸 두고 철사 쪼가리라고 생각한 건 문제가 아니었어. 문제는 내가 너의 모자란 천적들과 마찬가지로 그 철사 쪼가리가 네 날개의 완전한 모습이라고 생각했다는 거였단다.

나는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그 날개의 메커니즘을 이해하기는커녕 이해한 척을 할 수도 없었고, 이윽고 쭈뼛거리며 네게 물었어.

있잖아, 괜찮으면, 네가 정말 귀찮지 않다면 말이야. 이 날개가 대체 어떻게 하늘을 날 수 있는 건지 내게 설명해주지 않겠니?

너는 눈을 홀쭉하게 뜨고 나를 바라봤지. 알만하다는 듯 말이야.

이건 날 수 없어. 이대로는 날 수 없다구.

네 대답은 무기력하고 담백했단다.

이 뼈대에 고무를 입힌 천을 덧대는 거야. 아주 커다란 천을. 그럼 비로소 뜰 수 있지. 하지만 그 천은 아까 이 집의 지붕에 있는 방향계에 걸려서 찢어져 버렸어. 더 이상 쓸 수 없었으니까 잘라내서 버려두고 왔지.

, 그렇구나.

나는 의기소침해졌고, 너는 다시금 실험의 일을 떠올리고 어깨를 축 늘어트렸어.

나는 있잖아. 이 실험을 하기로 마음먹었을 때부터 엄청 절박했던 것 같아. 왜냐면 자칫 이 실험 결과에 따라 더 이상 활공기를 완성시키는 게 무의미해질 수도 있었으니까. 만약 그렇게 되면 마을 사람들은 보란 듯이 날 비웃어댈 테고, 난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 채 모든 걸 그만뒀을 거야.

네가 그렇게 심경을 토로하기 시작했을 때 방 안에는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을 만큼 역하고 두터운 색깔의 공기가 내려앉기 시작했단다. 마치 뱀처럼 천천히 내 숨통을 조이는 것 같았지.

실험을 하려고 저 호수 건너편의 언덕까지 내려왔을 때, 나는 아무런 계획도 없었어. 바람은 처음보다 더 거세지고 눈까지 내려서 도저히 실험을 할 수 없는 상태였지. 하지만 나는 그냥 호수 건너편만 뚫어져라 보고 있었어. 그리고 도움닫기를 했지. 나는……. 정말로 아무 계획도 없었던 거야. 호수를 건너지 못하고 도중에 떨어진다면 나는 죽을 테고, 무사히 건넌다면 마찬가지로 무사히 돌아오는 것도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어. 그것뿐이었어. 무모했지.

하지만 결국 넌 성공했잖니? 왜 기운이 없는 거야?

그건 순전히 운이었어. 날 호수 밑바닥에 처박을 수 있을 정도로 바람이 셌다구. 거기다 거센 눈보라까지! 나는 자살행위를 한 거야. 그런데 우연히 살아남았고, 날개는 망가져버린 거지…….

날개는 다시 만들면 돼, 요한.

그 순간 너는 아주 듣기 싫은 소리를 들은 양 눈살을 찌푸렸어. 나는 개의치 않고 네 손을 잡았단다.

돈이 부족하면 내가 보태줄 테니까. 다시 만들어서, 맑은 날에 다시 실험을 하면 돼.

18노트의 바람, 구름이 조금 낀 하늘, 예수님이 계신 낮달, 철사로 만든 날개……. 나는 너에게 필요한 것이 오로지 그것들뿐이라고 생각했단다. 그건 진실이었어. 하지만 실패로 얼룩진 네 마음은 보다 값비싸고 보다 너를 안심시켜 줄 물건들을 필요로 했지. 그리고 그것들 없이는 다시는 활공기를 만들 수 없을 거라며 절망하고 있었어.

그러나 다행히 너는 내 근거 없는 단언에 아주 조금이지만 기운을 되찾았단다. 병상에 몸져누운 사람처럼 지치고 누그러진 웃음을 지었지.

너는 정말 좋은 여자야.

네 말투는 어색했지만, 전혀 건방져 보이지는 않았어. 아마 다른 남자애들이 너처럼 말했다면 나는 기가 막혔겠지.

너는 대뜸 날 좋은 여자라고 말하더니 한동안 우두커니 앉아있었어. 너는 어떤 말을 입에 담아놓은 채 처음 네 예수님에 대한 얘기를 할 때만큼 부끄러워하고 있었지. 나는 차분히, 눈보라가 내 창문을 두들기고 석탄이 난로 속에서 부서지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기다렸단다. 너는 이윽고 말했어.

사실……. 아까 호수를 건널 때 너무 추워서 아주 잠깐 정신을 잃었었어.

그리고 너는 놀랍게도 네 쪽에서 먼저 내 손을 잡았단다. 생각보다 훨씬 더 차가웠던 그 손으로.

지붕에 곤두박질 쳐서 깨어났을 때, 일순 여기가 내가 그토록 바라던 천국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네 손은 스르르 내 살갗을 더듬어갔지. 네 차가운 손끝이 지나간 자리마다 묘한 열기가 남아 나를 끓어오르게 했단다.

물론, 여긴 호수 건너편의 싸구려 여관건물이었고, 천국이 아니었지만……. 이상하게 너랑 얘기하다 보니 점점 그곳에 가까워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그러니까, 천국 말이야. 물론 내가 생각했던 것하고 다르긴 하지만…….

네 손은 내 팔뚝 언저리에 멈춰 한동안 그곳을 뜨겁게 달구었어. 그리고 너는 한 쌍의 바다색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보며 가늘고 포근한 미소를 지었단다.

고마워, 한나. , 다시 날개를 만들게.

그래,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었어. 나로 인해 너는 추락했던 자신감을 반추하듯 끌어올렸고, 다시 한 번 그분을 향해 나아가기로 마음먹었지. 그러나……. 동시에 그건 내게 슬픔이기도 했단다, 요한. 나는 떠나는 연인에게 잘 가라고 짚신을 신겨준 셈이었으니까.

그뿐이 아니었어. 네게는 내가 준 짚신 말고도 멋진 철사로 된 날개가 있었고, 내 곁을 떠날 때 너는 그걸로 손이 닿지 않는 너무 먼 곳까지 가버렸단다. 나는 네게 줄게 많았지. 네가 이곳에 머무른 그 짧은 시간 동안 전부 나눠주기에는 턱없이 부족할 정도로, 내게는 너에게 줄 사랑이 많았단다, 요한…….”


기억하니, 요한? 네가 내 테라스에 새처럼 날아들기 바로 직전에 왔던 그 소름끼쳤던 손님. 어느 날 그 손님은 전과 비슷한 시간에 찾아와 전과 똑같은 팁, 전과 똑같은 미소를 내게 건넸단다. 그는 내 단골이 되려 했어.

그 손님이 세 번 네 번 반복해서 찾아오기 시작했을 때, 나는 불안했지만 한편으론 기뻤단다. 그 손님은 기분 나빴지만 팁을 많이 줬고, 네 생활비를 충당하려면 그게 필요했으니까.

후에 그가 정말로 어느 미션스쿨의 교사이며, 아내와 네 살배기 딸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도 나는 그에게 살랑살랑 꼬리를 쳤단다. 그가 더 자주 찾아오길 바랐지.

하지만 그게 실수였던 거야. 차츰 시간이 지나고 그는 내 바람대로 점점 더 자주 찾아오게 되었지만, 어느 순간 고삐가 풀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집요하게 변했단다.

이번 주 토요일에 우리 집에 와. 아무도 없으니까.

안 돼요. 전 출장은 안 가요. 주인아줌마도 별로 안 좋아하고…….

내가 말끝을 흐리자 그는 파충류 같은 눈으로 나를 잠시 흘겨봤지. 그리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팁을 시트에 던져놓은 채 떠났어. 그의 행동은 나를 아주 불안하고 신경질적으로 만들었단다.

일단은 주섬주섬 돈을 챙겨서 아래층에 있는 널 만나러 갔어.

너는 그날 이후 내 아래층의 창고 옆 작은 방에 살고 있었지. 내가 대신 방세를 지불하고 빌린 그 방에 말이야. 너는 네 몸과 날개를 호수 밑바닥에 묻으려다가 우연히 여기에 왔을 뿐이라 돈이 한 푼도 없었고, 매일 손님이 들락거리는 내 방에 널 재울 수는 없었단다.

앞날에 대한 계획도, 심지어 마을로 돌아가기 위한 경비조차 없던 너는 내게 빌린 작은 돈으로 다시 날개를 만들기 시작했어. 며칠에 걸쳐 호수를 빙 둘러가는 것보다 올 때처럼 그 위를 가로질러 가는 게 더욱 간편하고 싼 방식이라고 넌 생각한 거야.

그날 이후 묘한 자신감이 붙은 너는, 절대로 네가 호수에 빠질 거라고는 믿지 않았단다. 너는 호수 너머의 언덕보다 더 높은 곳까지도 얼마든지 갈 수 있을 것처럼 의기양양했어.

네가 돌아갈 준비를 하는 걸 내가 도울 수 있고, 그동안 줄곧 네가 내 곁에 있다는 사실이 나는 몹시 기뻤단다. 그래도 가끔은 허전한 마음에 조금은 날개가 늦게 완성되기를, 네가 작업을 잠시 중단해야할 만큼의 가벼운 화상이나 찰과상을 입기를 바라기도 했어.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바람들은 모두 이루어지지 않았지. 너는 물론 작업을 하면서 수없이 다쳤지만, 결코 작업을 멈추지는 않았어.

나는 너를 위해 1층에서 빵과 그걸 찍어먹을 스프를 가져왔지. 문을 열자 방 안은 아주 어렴풋하고 낭만적인 주황색 조명에 둘러싸여 있었어. 사실 그건 가장 값이 싼 전구가 끼워진데다가 양철 덮개에는 녹이 슨 낡은 조명의 빛이었지만, 나는 그 빛깔이 아주 맘에 들었단다. 전구 안에서는 찌르르하고 우는 작은 벌레가 정신 사납게 날갯짓을 했지.

이것 좀 들고 해.

거기 놔둬. 고마워…….

너는 아래층의 주인아저씨가 신문을 볼 때 쓰는 근시 안경을 빌려와 쓰고 있었지. 그게 너하고는 전혀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는지 내게는 안경 쓴 정면 모습을 절대 보여주지 않으려 했어. 그래서 넌 내가 올 때마다 안경을 벗었고, 적어도 내가 방에 머무르는 동안에는 작업을 할 수 없었단다. 내가 왜 널 그렇게 자주 찾아갔는지 이제는 알겠니?

물론 이유는 그것뿐만이 아니었지만…….

요즘 바쁜가보구나. 내 방엔 전혀 들르지 않고.

너는 내 퉁명스런 말투가 의아했는지 물었던 빵을 도로 뱉어냈지.

이제 다음 주면 다시 띄울 수 있을 것 같거든. 그동안 너한테 신세를 너무 많이 져서, 얼른 갚아주고 싶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어서 활공기를 완성시키는 것뿐이니까…….

아니,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보다 훨씬 많았단다. 내 방에 더 자주 왔다면, 넌 그 모든 것들을 내게 해줄 수 있었겠지.

게다가 네가 방에는 올라오지 말라고 했잖아.

해가 지고 나서는 와도 된다고 말했잖니. 오히려 난 와달라고 했었어.

뭔가 볼일이라도 있었어?

둔하긴! 난 더 말할 기력을 잃었단다. 스스로가 아주 비참하고 소심해지는 기분이었지. 익숙함이란 참 무서운 거야. 처음에는 네가 바로 내 아래층에 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매일이 행복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뭔가가 틀어지는 기분이 들었어.

너는 차가운 판자와 공기로 단절된 내 방 아래층에서 내 곁을 떠나기 위해 날개를 만들고 있었고, 나는 네 머리 바로 위에서 다른 남자와 놀아나고 있었지. 그리고 나는 차츰 그 현실에 만족할 수 없게 되었단다. 예견되어 있었듯, 나는 너를 내 방에 가두고 더 이상 다른 남자는 들이지 않은 채, 네 날개를 부러트려버리고 싶다는 욕망에 젖기 시작한 거야…….

접시 이리 줘.

내가 치울게.

.

나는 끝내 화를 내고 말았어. 네 표정은 참 쉽게도 변하더구나. 나는 네가 내게 미안함을 느끼는 걸 넘어, 스스로를 혐오하게 될 정도로 심하게 굴었어. 하지만 오해하지 말아주렴, 그게 바로 내가 던진 승부수였단다. 나도 너처럼 다가올 미래에 자신의 발자취를 남길 필요가 있었던 거야. 실제로 그날 이후 많은 것이 변했지. 마침내 너는 우는 나를 끌어안고 내게 여러 가지 말을 해주었어. 그 모든 게 조금 늦었다는 건 그리 중요하지 않았단다. 결국 너는 네 날개를 네 스스로 부러트려버렸잖니.

접시를 가지고 나는 인사도 생략한 채 네 방을 나와 버렸어. 문을 꽝 닫다가 벗겨진 나무껍질에 손톱 아래를 찔렸지. 하마터면 접시를 떨어트릴 뻔해 호들갑을 떨며 숨을 삼켰단다.

만약 접시를 떨어트렸다면 그 소리를 들은 네가 방 밖으로 나왔을 테고, 내 검지 아래에 흐르는 검붉은 피를 보며 나보다 더 아파해주었을 텐데…….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내 방으로 돌아갔단다.

까슬까슬한 붕대에 약을 발라서 손가락 마디에 칭칭 엮고 침대 위에 쪼그려 앉았지. 내 등에 짓눌리고 있는 베개를 꺼내 무릎과 배 사이에 끼고 고개를 수그렸어. 나는 울고 싶었단다. 한 번 울고 나면 아까보다는 저 자세로, 버려진 강아지처럼 너에게 애걸복걸 매달려 네 곁에 머무를 수 있을 것 같았어.

그게 결코 좋은 방법은 아니라는 걸 알았는데도 내 눈에는 점점 더 눈물이 고였지. 지금이라도 문이 열리고 네가 뛰어와 내 품에서 베개를 빼앗고 대신 그 자리에 들어와 주기를 바랐단다. 그날 네 결심이 조금만 빨랐다면 그렇게 되었겠지…….

요한, 나는 예나 지금이나 널 책망할 맘이 조금도 없지만, 이건 네가 꼭 들어야할 뼈아픈 이야기 중 하나란다. 그날 너는 좀 더 빨리 내게 왔어야 했어. 내게 일어난 일들을 네가 정말로 들었다면 아마 무릎을 탁 치며 안타까워했을 테니까. 찰나의 순간이 꽤 많은 것을 바꿔놓았지.

물론 전부 사소한 일이었단다. 내 인생의 시계 바늘이 손톱만큼만 앞으로 나아가면 머릿속에서 연기처럼 사라져버릴, 네가 들을 가치조차 없는 시시한 일들이었지. 너와 관련되지 않은 모든 기억들이 으레 그렇듯 말이야.

그래도 요한, 이것 하나만은 말해둘게.

다음부터는 내가 울 것 같은 기분이 되었을 때, 절대 너 아닌 다른 남자가 내 방 문을 노크하도록 내버려두지 마렴…….

그 손님이 들어왔어. 노크를 두어 번하더니 난폭하게 문을 열어 제꼈지. 난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있을 때 복도 바닥의 나무들이 떨리는 소리를 들었고, 당연히 그게 너일 거라고 생각했단다. 이제야 오니, 내 귀여운 굼벵이, 정말 널 사랑해, 그런 말을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기다리고 있었다구.

내가 고개를 들었을 때 어떤 기분이었을지 짐작이 가니? 그 손님은 술에 취해 있었지. 덜 깎인 너저분한 수염이 땀인지 술인지 모를 액체에 절어 번들번들했고, 머리는 흐트러졌고, 싸움이라도 했는지 안경에는 실금이 가있었어. 그는 기분 나쁘게 흐느적거리며 내 침대에 의도적으로 쓰러졌지. 내가 자길 받아주길 바란 것처럼 말이야.

전 일몰이 지나면 영업을 안 해요, 손님.

정말 이상한 습성이지. 이런 데를 찾는 사람들은 대부분 밤에 오려 하는데.

그리고 아침까지 머무르려 하죠……. 이만 나가주세요.

나는 그의 머리카락을 중지에 돌돌 말아 잡아당기거나 그의 뺨을 소심하게 두들겼어. 자세히 보니 귀 위에 빨간 멍이 있었단다. 샌님 같은 용모니까 아마 어디서 얻어맞았 겠거니 했지.

다쳤군.

손님만큼은 아니에요. 나무에 긁힌 거니까. 밍기적대지 말고 내 침대에서 나와요!

버럭 성을 내자 놀랐는지 그는 뒤뚱뒤뚱 물러서 침대 꼬리에 등을 기댔어. 그러다 발이 미끄러져 서랍장 위의 꽃병 하나를 손으로 떨어트렸지. 우둘투둘한 바닥에 비쩍 마른 꽃줄기가 풀썩 쓰러졌고, 두꺼운 도자기 조각에 그는 굵은 손바닥을 찔렸어.

미안.

아직도 더 망가트릴 게 남았나요? 없으면, 이제 제발…….

나가란 말이지, 그래.

그는 손바닥의 상처를 꾹 쥐고 일어났어. 손가락을 빙 둘러 흘러내린 피가 깨진 꽃병에서 나온 물과 섞였지.

괜찮으냐고 물어보지도 않는군.

내 탓이 아니잖아요.

누가 뭐래? 예의상 물어볼 수도 있는 거잖아. 대체, 날 무슨 들짐승 보듯 하면서 말이야……. 너 같은 여자들은 그저 돈 줄 때만 웃어주지. 침대에서는 그렇게 잔망스럽게 굴더니만 지금은 나를, 나를……. 제기랄, 아파죽겠네! 아파, 아프다구……. 이렇게 내가 온 몸에 멍이 들어서 왔는데 넌 날 조금도 가엾게 여기지 않잖아. 아까처럼 날 사랑해주지도 않고…….

지금 당신을 가여삐 여겨줄 사람은 제가 아니에요.

그는 더 이상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 이제 돌아가나 싶었더니, 돌연 문둥병 환자처럼 절뚝절뚝 내게 다가오기 시작했어.

이쪽으로 오지 마세요.

내가 물러서자 그는 서툰 손으로 주머니에서 공처럼 뭉친 지폐를 꺼내 보였지.

다 줄게.

필요 없어요.

그냥, 받아.

부들부들 떨리는 손이 이윽고 미약하게 내게 그 지폐들을 집어던지기 시작했어. 하나는 침대보 아래로 굴러들어갔고, 하나는 내 볼을 두들긴 뒤 발치로 떨어졌고, , ……. 그는 지폐란 지폐는 다 던졌어. 하여튼 술에 취한 어른들이란 하나 같이 아주 몹쓸 어린애처럼 굴더구나!

마침내 빈털터리가 되자 그는 손을 자기 바지춤으로 힘없이 툭 떨어트렸어. 난장판이 된 내 방과 침묵만 남았지.

받을 수 없어요. 도로 가져가세요, 전부.

위로해준 값이야.

해준 적 없어요.

그는 대답 대신 바닥에 떨어진 꽃줄기에서 훌훌 유리 조각을 털어내고 한 송이를 뽑아 내게 흔들어 보였어. 그리곤 그걸 들고 조용히 떠났단다.

문이 닫히고, 혼자 남겨진 나는 이제 다 끝난 줄로만 알았어. 하지만 아니었지.

한나, 있어?

미처 내가 뭘 하기도 전에 이번엔 네가 번갈아 다시 내 방에 들어온 거야.

너는 방 안의 참상을 보고 순간 움찔거렸어.

그리고 문가에 멀거니 서서 엉망이 된 내 방을 두루 보았지.

깨진 꽃병에서, 흩어진 돈뭉치들에서, 무릎을 포개고 앉은 내게서 너는 이미 눈치 채고 있던, 하지만 믿고 싶지 않았던 비밀을 비로소 목도하고 절감한 듯했단다.

너는 복도에서 분명히 너와 마주쳤을 그 취객에 대해 단 한 마디도 내게 묻지 않았어.

그리고 한참이 지나 못 견디고 자리를 떠나려 했지.

요한!

아무 것도 못 봤어. 아무 것도.

내가 달려가 너를 붙잡자 너는 나를 소심하게 뿌리쳤어. 갓 데친 물고기처럼 부드럽고 통통한 네 팔뚝은 연약하게 떨리고 있었지. 너는 하얗게 질린 볼과 음울한 눈빛은 나를 꼼짝도 못하게 했단다. 더 이상 네게 다가갈 수 없게 만들었어…….

날 좀 봐, 요한.

「……싫어.

너는 필사적으로 네 발목이나 니스 냄새가 진동하는 문틀로 시선을 돌렸지. 내게는 빨간 과일처럼 변한 네 귀밖에는 보이지 않았어.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야. 저 사람은, 그냥, 술주정을 하러 온 거야…….

한나.

너는 눅눅한 목소리로 내 말을 끊었어. 가엾게도, 너는 너무 놀라고 충격 받은 얼굴이었지. 그래서 널 원망할 수 없었단다. 넌 그저 놀랐을 뿐이었으니까.

, 사실 전에도 목욕물을 가져다 준 하녀한테 들은 적이 있어. 네가 하는 일에 대해서……. 그때는 믿지 않았지만, 혹시 정말이면 어쩌나 해서 그동안 네 방에 갈 수가 없었어.

세상에……. 요한.

그렇게도 나에 대한 환상이 무너지는 게 두려웠니? 내 얼굴을 보는 게 부끄러워질 정도로?

그런 질문이 목울대까지 올라왔지만 나는 도로 집어삼켰단다. 나는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더 이상 어떤 말도 소용없다는 걸 이미 알아버렸기 때문이지.

너는 계속 말했어.

지금이라도 온 건 그런 내 행동 때문에 한나가 기분이 나빴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야.

그럼 왜 이렇게 도망치듯 돌아가려하는 거니?

그건…….

말하렴. 요한, 내가 역겨워졌니? 그리고 너에게 이 사실을 숨겨서 화가 났어?

아니야!

너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언성을 높이며 튕기듯이 고개를 돌렸어. 하지만 내 얼굴을 마주보더니 금세 주눅이 들어 다시 시선을 떨어트렸지.

그런 게 아니야…….

그럼?

나는 잔뜩 흥분해서 네게 캐물었어. 내가 씩씩거릴 때마다 네 비쩍 곯은 어깨는 차츰 왜소해졌고, 네 눈동자에는 고운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단다.

왜냐면…….

너는 울고 있었던 거야, 요한.

왜냐면, 왜냐면……! 한나……. 천국에는 몸 파는 여자 따윈 없기 때문이야……. 여긴, 네 방은 역시 내 천국하고는 아주 멀었던 거지. 그것뿐이야…….

그렇게 말하고 너는 흠뻑 젖은 눈으로 나를 바라봤지. 나는 가슴이 갈갈이 찢겨져 나가는 것 같았단다. 복도의 조명이 아른거리기 시작했어. 누군가의 심장 소리가, 아마도 나의 심장 소리가, 내 온 몸 구석구석을 가득 채웠지. 나는 마치 신화의 비극적인 여성들처럼 거대한 슬픔을 견디지 못해 바위로 변해버린 것 같았단다. 어떤 감정도, 어떤 감각도 없었어. 그저 한없이 어두웠지…….

잠시 후 너는 나를 남겨두고 복도를 달려 가버렸단다.

문이 닫혔지.

남겨진 나는 바닥을 끌어안고 목 놓아 울었어.”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가 지나도 너는 소식이 없었지. 아마 내 소식 또한 네게 전혀 들리지 않았을 거야. 방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것 정도 외에는.

그동안 나는 뜨개질을 하고 있었단다. 알고 있니? 나는 기다란 대바늘 두 개와 무한한 털실만 있다면 언제까지고 그 좁은 방에서 지낼 수 있다는 걸.

찾아오는 손님들을 모조리 물리친 채 침대 위에서 발목을 감싸고도는 양말이나 단추가 달린 스웨터 따위를 무작정 짰지. 침대 머리와 서랍장, 부엌의 테이블이 널어놓은 양말이나 용도를 알 수 없는 길고 푹신한 천으로 알록달록해질 때까지 나는 줄곧 손을 멈추지 않았단다.

가끔 들리는 노크 소리에는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지. 바깥에서는 한숨 소리나 발을 동동 구르는 소리, 애원하는 소리가 들렸어. 그런 소리가 들릴 때마다 나는 그게 네 목소리인지 구별해야 했고, 매번 희망은 거꾸로 뒤집혔지. 너는 내가 방에 틀어박혀 있는 동안 단 한 번도 날 찾아오지 않은 거야!

나도 딱히 오기를 부릴 생각은 없었어. 그저 방을 나가는 게 두려웠고, 모른 척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도 두려웠지.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더 이상 내 방이 네 천국에서 멀어지는 걸 견딜 수가 없었단다.

내가 이렇게 자숙의 시간을 가지며 내 손을 혹사시키고 있으면, 마침내는 네가 날 용서해주러 내 방 문 앞에, 혹은 거짓말처럼 저 테라스에 나타날 것 같았어. 어느새 나는 죄인처럼 그 좁은 방에서 네 구원만을 고대하고 있었던 거야. 그때 나는 마치 지금까지 쌓아온 내 인생의 어떤 부정적인 것들을 긍정적인 것으로 바꾸기 위한 시험 앞에 당도한 듯했단다.

길고 긴 인내였지. 하루에 한 짝씩만 만들었던 장갑의 수로 나는 날짜를 셌어. 닷새였단다. 너는 무려 닷새 동안이나 나를 무시했어! 그나마도 내가 먼저 널 찾아갔기 때문이었지. 만약 그날 저녁 내가 스웨터의 소매를 마감하기 위한 털실과 예쁜 단추들을 사러 거리로 나가지 않았다면, 골목에서 그 싸이코와 마주치지 않았다면, 너는 대체 얼마나 더 내 얼굴을 안 볼 생각이었니? 얼마나 더 내게 쓸모도 없는 양말을 짜게 만들 생각이었어?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나는 목덜미가 따끔거린단다.

닷새째의 저녁 나는 가장 애용하던 붉은색 털실이 다 떨어진 것을 알고 나갈 채비를 했지. 아래층에서도 이미 내게 빌려줄 털실이 없다고 말해왔고, 오히려 빌려준 것들의 반이라도 돌려받고 싶은 눈치였으니 어쨌든 나는 밖으로 나가야 했어.

오랜 만에 나온 거리는 서리와 악취로 얼어붙어 있었고, 발 디디는 곳마다 습한 어둠이 권태롭게 꿈틀거렸단다.

나는 바깥에 오래 머물고 싶지 않았어. 필요한 가게의 진열대 이외에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지. 이윽고 들어간 가게에서도 손대중으로 고른 단추 몇 개와 크기가 제각각인 털실만 뭉텅이로 가지고 도망치듯 빠져나왔단다.

양 손 가득 털실이 든 봉투를 든 채 추운 거리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을 때, 문득 나는 거리가 언제나보다 훨씬 적막하고 침체되어 있다는 걸 느꼈어. 나는 길 끄트머리에 있었지. 오른편에는 지붕이 낮고 평평한, 입구에 오렌지색 차양이 달린 초라한 술집이 있었고, 왼편에는 그보다 더 초라한 건물들이 늘어서있는 거리와 그 거리로 이어진 석교가 있었단다. 나와는 아무런 연고도 없는 낯선 곳이었지.

나는 뭔가에 홀린 것처럼 몸을 부르르 떨며 내 골방이 있는 여관으로 다시 걸음을 돌렸어. 내가 지나온 길들조차 기억나지 않아 호수가 있는 방향을 길잡이 삼아 거리를 헤치고 나갔지.

그리고,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니?

막 생긴 토사물들이 김을 뿜고 있는 어느 술집 뒤의 골목을 지날 때, 아마도 여관에서부터 쭉 나를 따라온 듯한, 나를 오랫동안 기다려온 사람과 만났단다.

안타깝게도 그 사람은 네가 아니었어.

조용해. 소리 지르지 마.

예의 손님이 그림자처럼 골목의 어둠에서 튀어나와 내 앞을 가로막은 거야. 한손에는 끝이 몽톡하고 빛이 바랜 칼을 들고서 굵직한 목소리로 나를 위협했지.

그 골목은 사방이 벽이었어, 요한, 사방이. 도망갈 엄두조차 나지 않는 곳이었지. 어둠과 섞인 그의 몸뚱이는 실제보다 몇 배는 더 거대해보였고, 텅 빈 눈동자는 나를 똑바로 쳐다봤어. 그는 콧김을 씩씩거리며 끊임없이 무어라 중얼거렸지. 그중 내가 이해할 수 있었던 건 오로지 그가 닷새 전부터 이 일을 벼르고 있었다는 것뿐이었어.

그가 나를 해할 거라는 걸 단숨에 알았단다. 하지만 나는 그 한 자루 칼 앞에서 너무나 무력했어. 오금이 저려 말도 제대로 못할 지경이었지.

그만…….

닥쳐!

가까스로 꺼낸 말마저 그의 뻣뻣한 위협에 도로 되삼켜지고, 그는 내 앙상한 목을 부여잡고 벽으로 밀어붙였어.

!

머릿속에 섬광이 터지고, 오른쪽 눈꺼풀 위가 불에 댄 듯 뜨거워졌어. 내 시야는 무언가에 의해 방해를 받는 것처럼 노이즈로 가득 찼단다.

그래도 나는 어떻게든 버둥거리며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내 목덜미에 서늘한 것이 닿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버렸어. 그는 있는 힘껏 나를 벽에 짓눌렀고, 어설픈 동작으로 칼을 휘둘러 내 치마를 조각내기 시작했지.

나쁜 년, 나쁜 년 같으니…….

차츰 우리 둘 다 숨이 거칠어졌어. 벽에 쓸린 내 이마에서는 솜으로 찍어 바르듯 간간히 피가 흘렀고, 잡힌 목은 화상을 입은 듯 뜨거웠지.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좀처럼 진정하지 못하고 내 치마에 서툰 상처만 남겼단다.

나는 어느새 내 목을 붙잡은 그의 손아귀가 널찍이 벌어진 걸 눈치 챘어. 그리고 그 손이 얼마 전 깨진 꽃병에 찔렸던 손이라는 것도.

그 순간, 내 짧은 인생 중 유난히 많은 용기가 필요했던 그 순간, 나는 마음속으로 네 이름을 불렀지. 그리고 손을 목 뒤로 뻗어 그의 손바닥 우묵한 곳에 난 상처를 있는 힘껏 눌렀어. 그는 새되고 가냘픈 비명을 질러댔지. 그가 놀란 말처럼 내 정강이를 걷어차는 바람에 눈물이 찔끔 났지만, 나는 어떻게든 그를 밀쳐내고 골목을 뛰쳐나왔단다.

뿌옇게 번진 시야에 먼 곳의 가로등 불빛이 흔들리는 게 보였어. 그곳까지 달려가는 그 시간이 어찌나 길었던지, 어찌나 끔찍했던지. 미처 내가 빠져나가기도 전에 괴물의 아가리처럼 골목의 입구가 나와 그를 남겨둔 채 꽉 닫혀버릴 것만 같았어.

가까스로 익숙한 거리로 나왔을 때, 나는 그만 근처의 석조 계단에 걸려 쓰러져버렸어. 떨리는 다리를 손으로 주물러 봤지만 나는 오랫동안 일어날 수 없었지. 다행히 쫓아오는 기척은 없었단다. 만약 그가 나를 따라왔더라도 이제 내 주위에는 나를 연민과 희열이 담긴 시선으로 바라보는 많은 눈이 있었으니 더 이상 어찌할 수도 없었겠지마는.

숨을 들이키자 그립던 호수의 내음이 폐를 적셨고, 내 가쁜 숨은 아련하게 겨울의 거리로 흩어졌지. 나는 차디찬 돌바닥 위에서 등을 굽힌 채 그 행복을 만끽했고, 그러자 차츰 골목에서 있었던 일이 전부 꿈처럼 아득하게 느껴지기 시작했어. 그제야 나는 비로소 다시 무릎을 딛고 일어날 수 있었단다. 어느 샌가 내 손에는 털실이 든 봉투가 사라져 있었지.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단다. 나는 이제 그것들이 필요 없었으니까.

나는 유령 같은 걸음으로 여관에 돌아왔지. 내 꼴을 보고 수근 대는 수많은 사람들은 그저 종이 꼭두각시에 불과했어. 나는 그들을 무시한 채 이름 모를 초상화들이 즐비한 층계의 난간에 매달려 2층으로 올라왔고, 네 방 앞에 홀연히 섰단다.

그날 난 아마 노크도 하지 않았을 거야, 요한. 그렇지 않니? 난 전혀 그럴 힘이 없었거든. 그냥 자연스레 손잡이를 돌렸어. 문은 저절로 열렸고, 너는 불이 꺼진 깜깜한 방 안에서 달빛과 마주하고 있었지…….

그날 내가 찢어진 캔버스처럼 조각난 폐품 치마를 걸치고, 머리가 봉두난발이 된 채, 화장과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에 시퍼런 멍까지 달고 네 방에 나타났을 때, 네 눈에 나는 어떻게 보였니, 요한?

또 한 번 내게 실망했니? 아니면…….

한나? 어떻게 된 거야?

내가 매춘부라서 싫으니, 요한?

아니면, 그런 내가 아주 가엾고 사랑스러워 보였니?

그래도……. 네가 날 아주 싫어한다 해도……. 난 지금 네가 날 안아주기를 원한단다…….

이윽고 나는 울기 시작했지, 요한. 그 처참한 꼴로 시내를 가로질러 오는 내내 참았던 눈물이 어째서인지 네 앞에 선 순간 마개가 뽑힌 수도꼭지처럼 줄줄 흐르기 시작했단다.

네가 날 안아주길 바랐어.

네가 나를 계속 싫어하더라도, 그 순간 내비쳐진 내 가여움만은 소홀히 여기지 않았으면 했어…….

너는 마치 머리를 아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았지. 툭 불거진 눈으로 한참 동안 내 성치 않은 몸 이곳저곳을 더듬더듬 살펴봤어. 내 멍든 정강이를, 붉고 우둘투둘해진 이마를, 찢어진 입술을, 천천히, 차례차례.

한나…….

그리고 너는 바람처럼 달려와 나를 끌어안았지. 어찌나 기세가 좋던지 나는 등이 활처럼 휘어진 채 방 바깥까지 떠밀려나갔단다.

세상에, 한나……. 이게 다 뭐야……. 이 상처들이 다 뭐냐구…….

너는 네 눈을 믿을 수 없었는지 엄지로 조심스레 내 눈꺼풀 위의 상처를 쓰다듬고 키스를 했어. 요한, 네가! 네 입술은 너무 부드러워 내 눈동자를 녹여버리는 듯했고, 나는 그만 너무 행복해져서, 점점 더 볼썽사납게 울기 시작했어.

우리가 떨어져있던 닷새는 아주 긴 시간이었지만, 그게 우리의 관계에 어떤 구심력으로 작용하는 일은 결코 없었단다. 너는 그때 한 치의 망설임조차 보이지 않았잖아. 벌떡 뛰어와 나를 끌어안기까지 말이야. 그건 네가 이미 오래 전에 결심을 내렸다는 걸 의미했어. 한참 뒤 네 어깨 너머로 네 방을 다시 봤을 때 나는 비로소 그걸 눈치 챘지.

항상 창가의 서랍장 위에 펼쳐져있던 네 철사 날개가 그날만은 맨 처음 봤을 때처럼 쪼그라든 채 구석에 처박혀있었던 거야. 그게 무슨 의미인지 나는 너무나 잘 알았단다.

너는 말했지.

한나, 미안해. 나 거짓말을 했어.

네 상냥한 손가락이 아직 얼어붙어있던 내 머리카락을 헤집고 보듬었어.

그날 했던 말들은 다 거짓말이야. 나는 이제야 알았어. 내 천국은 네가 없는 곳 어디에도 없다는 걸. 정말 미안해…….

괜찮아, 괜찮아, 요한. 괜찮아. 너는 지금 이렇게 날 안아주고 있잖니. 바스라질 정도로!

네 등 뒤로 둘러진 내 손이 네 오목한 날개뼈를 어루만지고 토닥였지. 너는 네 코를 내 정수리 부근에 파묻은 채 나를 호흡했고……. 우리는 세계가 아주 천천히 멈추는 걸 두 눈으로 보았지.

나는 이제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야. 계속 네 곁에 있을래. 영원히.

영원히! 네가 그날 얼마나 쉽게 그 말을 입에 담았는지, 그리고 나는 또 얼마나 쉽게 그 말에 감화되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조금은 후회가 되는구나.

사실 그때는 그랬단다. 우리가 닷새 만에 각자의 골방에서 뛰쳐나와 서로를 부둥켜안고, 마침내 한 껍질 안에 깃든 연인이 되었을 때, 다가올 미래 따위는 그저 하찮게 여겨졌어. 종종 우리들은 지금이라는 영원하고도 무한한 반복에 묶여 먼 곳을 보지 못하곤 하지. 내 눈은 특히나 일찍 멀고 말았어.

알고 있니? 우리는 일평생을 마치 깃털처럼 정처 없이 헤매다가 아주 짧은, 찰나의 순간에 서로의 몸을 부대끼고 다시 각자의 하늘로 날아가 버린 것 같아. 이 별 위에 존재하는 수많은 죽음과 탄생 앞에 한낱 우리는 얼마나 덧없고 아련한지.

대체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지 모르겠구나, 요한.

널 너무 사랑한단다. 그리고 네가 너무 보고 싶단다.

그러나 가엾게도, 요한, 우리가 서로 사랑을 나누기에 우리는 너무나 짧고 가련한 생을 살았구나.

너무나 짧고 가련한 생을…….”


언젠가 널 여기서 데리고 나갈 거야.

어느 날 불쑥 너는 그렇게 말했지.

, 바로 이 창문으로.

마을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고, 너는 서리가 낀 창틀에 걸터앉아 유리창에 네 손바닥을 대보고 있었어. 아주 추운 날이었지. 난로의 불꽃이 못생긴 아기처럼 딱딱 울어댔어. 쟁반 위에 얹어진 네가 먹다 남긴 사과는 표면이 얼어붙은 채 새파랗게 질렸고, 우리 둘 중 아무도 손을 대지 않은 식빵은 바위덩어리처럼 딱딱하게 굳어있었어.

우리는 하루 종일 아무 것도 먹지 않았지. 너는 원래도 하루 종일 거의 아무 것도 먹지 않았는데 말이야.

그맘때쯤 너는 마치 떠날 때를 알고 있는 늙은 개처럼 굴었어. 입맛이 없다며 먹을 것을 기피하고, 의자를 가져다놓고 하루의 많은 시간을 창가 앞에서 보냈지. 내리는 눈이, 네 세계를 단절시킨 호수가 네게 무슨 말을 해주던? 너를 다시 딱딱한 날개와 기름 냄새가 있는 창공蒼空으로 유혹하던? 그리고 너는 그런 그네들에게 네가 선택한 장소가 이번에는 틀림없었다는 걸 말해주었니?

나와 함께한 마지막이 아주 보람차고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고, 너는 한 번이라도 자답한 적이 있니……? 그렇다면 나는 조금이나마 널 여기에 붙잡아둔 것에 대한 죄책감을 덜 수 있겠구나.

네가 어느덧 비스킷과 굴 구이, 칠면조를 멀리하고 한 번만 우린 내 자스민 차를 줄창 마셔대기 시작했을 때, 나는 우리의 겨울에 종말이 다가오고 있다는 걸 알았단다. 마치 신탁처럼 나는 그걸 받아들였어. 네 에메랄드빛 눈을 봤기에, 네 홀홀한 뺨을 봤기에, 그것이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란 걸 아는 게 가능했단다.

너는 그분이 계신 달로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었던 거야! 바로 너의 본분대로 말이지.

네가 인간이자 나의 연인으로 지냈던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고, 나는 어느새 네가 그분의 어여쁜 종이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었단다. 월계관을 쓰지 않고 하프를 옆구리에 끼지 않았어도 네게는 저 달에 돌아갈 장소가 있었으니, 결국 모든 건 그분의 뜻이었지.

너는 죽어가고 있었어, 요한.

네가 내게 매춘부 일을 그만두게 했을 때부터, 네가 여관방을 떠나 내 골방에서 함께 살기 시작했을 때부터, 네가 더 이상 너의 날개를 고치기를 포기했을 때부터, 네가 미완성인 활공기가 있는 산골 마을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선언했을 때부터, 네가 마을의 바지 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네가 나를 사랑한다고 처음 말했을 때부터, 네가 내 테라스에 홀연히 나타났을 때부터, 어쩌면 그 전부터……. 너는 죽어가고 있었던 거야.

공장에서 네가 쓰러졌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나는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단다. 처음엔 너무나 무서웠어. 한밤중의 골목에서 싸이코에게 칼로 위협을 받았을 때보다 더.

너는 올이 다 일어난 모포 한 장에 둘러싸인 채 공장 안의 벤치에 방치되어 있었지. 김이 날 정도로 뜨거운 얼굴에는 물에 적시고 제대로 짜지도 않은 축축한 원단이 올려져있었고, 머리맡에는 식어 빠진 빈 주전자가 있었어. 너는 정신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채 미친 듯이 기침만 했단다. 목에선 걸걸한 소리가 났고, 너는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했어.

공장 안은 텁텁한 공기와 톱밥 냄새로 가득했지. 그게 원래부터 상할 대로 상해 있었던 네 폐를 마구 쪼아댄 거야.

어느 순간 너는 잠에서 깨어 나를 봤지. 모포 위로 흉터 가득한 네 손이 빠져나왔어. 나는 그걸 놓칠세라 붙잡았고, 너는 속삭이듯 말했어.

한나, 나 아파…….

괜찮아, 요한. 내가 왔잖니. 불쌍한 아가……. 일단 집으로 가자. 의사 선생님이 널 치료해주실 거야.

너는 곰살궂게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리고 다시 잠들었지. 내가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자 까무잡잡한 피부의 네 동료 한 명이 너를 모포 째로 들쳐 업었어. 그가 너를 우리 집까지 바래다주었단다.

돌아오자마자 곧장 너를 침대에 뉘이고 주전자에 물을 끓였어. 하녀가 문을 두드리고 미지근한 물이 담긴 양동이와 수건 몇 장을 가져왔지. 나는 이불 속에서 네 옷을 벗기고 물에 적신 수건으로 네 몸을 꼼꼼히 닦았단다. 찐 계란 같은 네 피부는 온통 불덩이처럼 뜨거웠어.

옷을 갈아입고 다시 누운 너는 한결 편안해진 얼굴이었지만, 내 마음은 전혀 성치 않았어. 요한, 네 상태는 심상치가 않았단다. 사람 몸에서 그렇게 열이 많이 나는 걸 나는 처음 봤으니까. 마치 증기기관처럼 네 맥박은 요동쳤고, 해열을 위해 이마에 올린 수건을 몇 번이나 갈아도 열은 전혀 내려갈 생각을 하지 않았어. 나는 발을 동동 구르며 그런 널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지.

이윽고 의사 선생님이 도착했을 때, 나는 잠깐이지만 기쁨에 젖어 그를 반겼단다. 하지만 그는 그저 무능하고 우리와 아무 관련도 없는 인간에 불과했어. 그는 널 도저히 고칠 수 없을 것 같다는 말을 당연한 진실처럼 반복해 말할 뿐이었지.

물론 조금 돌려 말하긴 했지마는.

너무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너무 늦었어요…….

고개를 조아리는 그를 보며 나는 역시 그가 우리와는 하등 관련도 없는 타인이고, 우리를 싸구려 동정의 대상 이외의 무엇으로도 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단다. 그는 내게 있어 널 잃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전혀 몰랐을 테니 그 말을 그렇게 쉽게 할 수 있었던 거야. 너무 늦었다는 말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지. 담배를 피우기는커녕 말아본 적도 없는 내 천사가 헐어빠진 폐 때문에 겨울을 넘기지 못할 거라니. 널 데려가려는 그분은 대체 얼마나 얄궂은 분이니?

네가 쓰러진지 며칠이 지나고, 내가 곳곳에서 불러온 의사들은 전부 손을 놓고 너를 바라보기만 했단다. 그들의 태도는 한결 같았지. 모두 내 어깨를 토닥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딘가 싸늘하고 건조한 시선으로 우리를 보고 있었어.

나는 전부 혼자 견뎌야 했단다. 너를 포기하기까지 걸렸던 긴 시간을, 전부.

다행인 건 모든 게 그랬듯 내 고통도 영원하지는 않았다는 거야. 절대 그럴 수 없다고 믿었던 것과 달리 차츰 나는 받아들이기 시작했단다. 나는 너를 잃게 되겠지만, 너에게는 여전히 돌아갈 장소가 있다는 걸 깨닫자 한결 마음이 가벼웠어.

그때부터 나는 밖으로 나가는 걸 그만두었단다. 검불밭에서 바늘 찾듯 내게 희망을 건네줄 의사를 찾는 일도 그만두었어. 그냥, 더 이상 아무도 찾아오지 않게 된 우리들의 골방에서 너와 줄곧 함께 있었지.

너는 때때로 용태가 좋아지면 난로 앞에 나와 마주 앉아 차를 마실 수 있었단다. 그를 위해 나는 마을 변두리의 대목大木에게서 요의자를 하나 사왔지. 너는 의자 등받이에 잠기듯 누운 채 내게서 뜨개질을 배우거나 멍하니 창문을 응시하곤 했어.

우리의 겨울은 그랬지. 아기처럼 보드랍고 가냘픈 너에게 나는 스튜를 떠먹여주고, 밤에는 같은 침대에서 팔다리를 꼭 붙인 채 잠을 잤어.

우리는 뒤늦게 많은 얘기를 하기도 했단다. 나는 이제 네 작은 고향의 이야기들을 눈 감고 외울 수 있을 정도가 되었어. 너의 어머니는 네가 걸음을 뗄 무렵 돌아가셨고, 너는 줄곧 할머니와 아버지 곁에서 양을 돌보며 자랐지. 너는 한때 도시에서 커다란 공장을 운영했던 아버지를 존경했고, 그의 작업실에서 지내는 걸 좋아했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는 직접 그 작업실에서 비행기를 만들기도 했지. 네 집에는 양치기 개와 훌륭한 말이 두 마리씩 있었고, 그들은 네 아버지가 손수 만드신 울타리와 집 안에 살았단다. 마을에는 네 친척들과 조금 둔하지만 심성은 고운 네 여자 친구들이 있었고, 그중 몇몇은 너를이건 순전히 내 생각이란다. 하지만 분명 그랬을 거야좋아했어. 네 집 뒤에는 넓은 초원과 뾰족한 봉우리 안으로 수렴된 청아한 하늘이 있었고, 산 끝에는 항상 깨끗한 눈이 쌓여 있었어.

너는 그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살았던, 아름다웠던 애란다, 요한. 하지만 넌 얘기가 끝나면 항상 이렇게 말했지.

그래도 역시 난 여기가, 네가 있는 네 방이 좋아, 한나.

어느 날은 네가 거짓말처럼 건강해지기도 했단다. 분명 몸에는 큰 변화가 없었을 거야. 하지만 네 정신은 평소보다 가다듬어져 있었고, 무척 깊은 눈매를 하고 있었지.

그날따라 새벽 일찍 일어난 너는 창틀에 다리 한쪽을 기대고서 앉아 창문에 네 뺨을 붙이고 있었어. 유리에 서린 네 입김 위에 그림을 그리고 있다가, 내가 일어난 걸 보고 웃으며 손짓을 했지.

춥지 않아?

괜찮아. 거기 앉아.

나는 난로에 불을 댄 다음 네 요의자에 얌전히 앉았단다. 너는 부스스한 눈으로 내 조신한 행동을 보고 있다가, 한 번 싱긋 웃고는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지.

그리고……. 너는 아주 오랫동안 그러고 있었어. 마치 번데기가 깨지기 전의 침묵처럼 성스럽고 위대한 시간이었단다. 어쩐지 그 순간만큼은 네가 아주 멀고 흐릿한 존재로 보였어.

한참이 지나 박명薄明도 사그라질 무렵, 너는 짓이겨진 눈보라가 이끼처럼 달라붙은 창문에 손바닥을 댄 채 입을 열었지.

언젠가 널 여기서 데리고 나갈 거야.

한낱 꿈처럼, 겨울이 내게 스치듯 보여준 그런 꿈처럼 덧없던 그날의 네 뒷모습을 나는 영영 잊지 못할 거야.

, 바로 이 창문으로.

너는 무언가를 붙잡으려는 듯 창문에 올린 손가락을 오므렸어. 그러나 네 손에는 아무 것도 잡히지 않았단다. 나는 감정이 북받쳐 울기 시작했지.

그래……. 부디 그렇게 해주렴, 아가…….

나는 달려가 네 목을 끌어안았어. 너는 울지도 웃지도 않고 그저 텅 빈 표정으로 내 손등에 입을 맞췄지.

마침내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고, 눈보라를 녹이며 떠오르던 그날의 일출은 그렇게도 장관이었단다. 기이하게도 널 앗아간 그 빛이 내게 네가 여기 실제 했음을 일러주는 듯했어. 그건 사라져가던 너의 온기였고, 너의 영혼이었단다.

요한, 지금은 내가 널 보내지만, 약속한 대로 너는 훗날 반드시 나를 데리러 와야 해.

내 테라스는 그때까지 항상 비어있을 테니, 그때는 네 두 날개로 나를 우리의 영원이 있는 장소로 데려가 주렴.

태고에 맺어진 운명처럼 그곳에서 다시 사랑하자꾸나.

마지막 순간, 너는 커튼처럼 네 얼굴을 드리운 햇빛을 향해 미소 지은 듯했단다. 너는 잠잘 때만 하던 인사를 내게 속삭였고, 올가미처럼 내 손에 깍지를 꼈어. 그리고 이내 잠들 듯 눈을 감았지, 요한. 다시는 눈을 뜨지 않았어. 나를 여기에 남겨두고 너는 마침내 저 하늘을 향해 그렇게 가버렸단다…….

한참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어. 나도 널 따라 눈을 감았던 것 같기도 해. 육중한 암흑이 나를 짓눌렀고, 내 안의 모든 것들이 차갑게 메말라가는 걸 느꼈어.

영혼이 떠나간 네 빈 몸은 착각인지 평소보다 가벼웠고, 네 표정은 아주 홀가분했지. 너는 마침내 그분 곁으로 돌아갈 채비를 모두 마친 거야.

이윽고 창밖을 봤을 때 나는 내 눈을 믿을 수 없었단다.

시간이 된 거야.

요한, 믿을 수 있겠니?

네 겨드랑이 아래에 돋아난 못생긴 날개를.

믿을 수 있겠니?

네 곁을 맴돌며 코넷을 부는 아기 천사들을.

믿을 수 있겠니?

여전히 저 호수 위에 어른거리는 영롱한 낮달을……. 요한, 너는 믿을 수 있겠어?

모두 네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단다. 그 모든 게 너의 것이었어.

그걸 깨달은 순간 나는 번뜩 떠오른 어떤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났지. 눈이 잠시 그치고 해가 암운暗雲 뒤에 숨자 나는 그 생각을 행동에 옮겼어. 침대 아래에 손을 뻗자 오래 전 나설 기회를 잃었던 네 철사 날개가 여전히 그곳에 있었고, 그건 내 기억 속의 모습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단다. 나는 빙그레 웃었지.

네 짐들을 모조리 꺼낸 나는 그것들을 아직 식지 않은 네 몸에 하나하나 입혔어. 재킷 위에 벨트를 주렁주렁 달았고, 달걀 모양의 가죽 모자를 씌웠고, 눈보라가 새어들어 오는 걸 막기 위해 보안경을 끼웠고, 등에는 커다란 철사 날개를 달았단다. 잠시 후 네가 내 그리운 테라스의 천사로 변모했을 때, 나는 너를 등에 업고 호숫가로 나왔어.

청명하고 광활한 대지의 거울 앞에서 우리는 잠시 모진 바람을 맞았지. 때가 무르익자 나는 스틱스 강물에 아들을 담구는 테티스처럼 조심스레 너를 물 위에 띄웠어. 수면이 찰랑찰랑 흔들리며 네 귀를 적셨지. 너의 차가운 죽은 얼굴은 여전히 사랑스러웠고, 물에 살짝 잠긴 네 고운 머리칼은 꽃잎처럼 호숫가에 퍼졌단다.

나는 먼 길을 떠날 너에게 기도를 시작했어. 바람이 내 목을 움츠리게 만들었지만 악착 같이 견뎠지.

그 정도는 견뎌야 했단다. 너는 그보다 더 춥고 외로운 길을 이제부터 혼자서 가야 했으니.

너는 잘해낼 거야, 요한.

그분이, 그리고 철사로 된 네 날개와 그분을 향한 너의 열망이 너를 그분께 인도할 거란다.

나는 여기서 기다릴게. 언젠가 네 날개의 밀랍이 녹아 네가 다시 이 찌든 땅으로 돌아오게 되면, 그때는 내가 널 꼭 안아줄게.

달을 향해 가렴.

그리고 돌아올 때는 네 꿈을 거기에 두고 오렴. 네 심장도, 네 눈물도, 네 재킷도, 네 모자도, 네 안경도, 네 성경도, 네 신도, 네 하늘도 전부 거기에 두고 오렴.

있어야할 자리에 그것들을 두고 오렴, 요한…….

지금은 잠시 헤어지지만 우리는 운명이란 거대한 인력에 의해 다시 만나게 될 거란다. 우리는 미친 듯이 서로를 끌어당길 거야. 그래서 지금처럼 원치 않는 이별을 하는 일도, 눈물을 흘릴 일도 결코 없겠지. 우리는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서로에게 입을 맞추지 않고서는 도저히 못 배길 거야. 반드시 그렇게 될 거란다.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 아가.

마침내 나는 너를 호수 반대편을 향해 힘껏 밀었단다. 아아……. 네가 점점 멀어져갔어. 그 순간 나는 너무 놀라 심장이 덜컥하고 내려앉는 듯했지. 이실직고하자면, 막상 그 순간이 오자 나는 무언가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기도 했단다.

그러나 앞으로 더 거대하고 날 것 그대로인 풍파에 맞서야 하는 네게 내가 무얼 해줄 수 있었겠니? 창공을 동경했던 이카로스에게 다이달로스는 무얼 해줄 수 있었니?

그저 가만히 뒤를 바라보고, 너무 높게도 낮게도 날지 말라고 충고해주는 것뿐이었지. 그래서 나는 호수를 활공하는 네 발목을 붙잡지 않은 거란다. 그냥 네 깡마른 몸이 호수를 가르는 모습을 걱정과 뿌듯함이 뒤섞인 맘으로 줄곧 지켜봤어. 그게 바로 내 역할이었지.

요한, 앞으로도 너는 자유로운 새처럼 망설임 없이 하늘에 나아갈 테니, 매정하다 싶을 만큼 단호히 내 배웅과 눈물은 모른 척하려무나. 네가 돌아보지 않아도 나는 쭉 너를 보고 있을 테니, 너무 높지도 낮지도 않게, 그렇게 날아가려무나.

뭍에 다가온 물이 내 발목을 삼키고 치맛자락의 주름을 살며시 적셨어. 구름을 헤치고 나타난 태양이 네가 호수에 일으킨 파문을 금빛으로 물들였고, 내가 지켜보는 가운데 너는 잘게 부서진 햇살 속으로 이윽고 모습을 감췄단다.

나는 손을 흔들었지.

잘 가렴, 잘 가렴, 나의 요한.

그리고 사랑해, 사랑해! 나의 이카로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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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려한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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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1)

하늬비
하늬비 10.12.03. 17:25
야... 재밋게 읽었습니다.
약간 다른 (혼잣)말이지만, 문장은 손으로 쓰는 게 아니라 머리로 쓰는 건데 자칫하면 착각하기가 쉽죠.
요는 안 그러고 재밋게 잘 쓰셨다고요 '_';

다만 어휘나 상징들이 다소 흩어진 감이 드네요. 독백형식의 한계도...
어, 다른 독자들의 감상을 흐릴 것 같으니 직접적인 언급은 피하고;

단순, 단조로운 구조와 소재로 재밋게 잘 쓰셨네요.
사건이 너무 단순한 감도 듭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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