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이정표

소녀와 악마와 크리스마스 - 신애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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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려한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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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이브도 지나고 크리스마스도 막바지다.

난로 앞에서 악마와 함께 크리스마스 밤을 보내게 된 것도, 크리스마스 선물로 계약 따위를 요구하게 된 것도 모두 예상치 못할 일은 아니었다. 올해 초에 처음 그를 불러냈을 때부터 내심 품어왔던 소망을 감추며, 나는 이어지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야 악마니까요. 교회에서 기도 따위 하라는 소원도 참기는 힘들지만, 대체로 불가능한건 아닙니다.”

매끄러운 구릿빛 이마 위로 흩어진 은발 고수머리를 희극적인 손놀림으로 튕겨내면서, 그는 말을 이었다.

혹은 유성처럼 빠르게 날게 해 드릴 수도 있지요. 그런가하면 어떤 숙녀나 신사라도 유혹할 수 있고, 용의 이빨에서 천 명의 군대를 만드는 것도 어렵진 않습니다.”

빙긋 웃고는 코끝으로 검지손가락을 대어 온다. 물론 나는 짐짓 도도한 척 하며 콧방귀로 응수해줬다.

곧 새침하게 그의 손가락을 쳐내며 말했다.

돌려 말하지 말아요. 그래서 뭐죠? 결국 크리스마스 선물로 뭐든지 다 해줄 수 있다는 얘기인가요?”

그가 웃으며 쳐내어진 손가락을 미간 옆에서 빙글 돌렸다. 그리곤 관자놀이를 쿡 찍고, 표정을 장난스럽게 찌푸리며 대답했다.

진부하지만, 굳이 말하자면 그렇게 되겠지요.”

흐응.”

바로 지금일까? 아니면 조금 더 기다려야 할까? 좀 더.

아니지, 숙녀의 공수역전에 망설임이 있어선 안 된다.

나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빠르게 내뱉었다.

그럼, 시간을 빠르게 돌려주는 것도 가능한가요?”

?”

빙빙 돌던 검지손가락이 멈칫하는 것이 보였다. 표정도 살짝 굳어진 듯 했다.

그는 손가락을 내려 팔짱을 낀 뒤, 한쪽 팔로 턱을 문질렀다. 마치 생각에 잠긴 듯이.

악마의 권위가 걸려있으니 무리라고 할 순 없지만, 굳이 권해드리고 싶진 않군요.”

그건 저를 위해서인가요? 아니면 그쪽의 무능함 때문?”

! 당신은 상상도 할 수 없겠죠. 우주의 법칙을 뒤틀기 위해, 어느 정도의 마력이 필요한지. 어떤 부작용이 일어날지. 게다가 준비 없이 간단하게 할 수 있는것도 아닙니다. 당신 같은 풋내기 꼬마 마녀들에겐 이해하기 힘든 일이겠지요.”

호오오.”

순간 풋, 하고. 나도 모르게 달콤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눈앞의 남자는 항상 이렇다.

짐짓 자유로운 척, 얽매이기 싫어하는 척 유들유들 하다가도 악마의 권위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금세 태도를 바꾸어 진지해지는 것이다.

물론, 적어도 난 그 갭이 싫진 않았다. 적어도 나는.

정말 이해를 못 하시는군요. 전 진심입니다.”

그러나 정작 지금은 비웃음 당했다고 생각했는지, 조금 미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말을 정정했다.

잘못 알아들으신 모양이네요.”

그가 아미 한쪽을 산뜻하게 치켜 올리는 것이 보인다. 그 밑의 에메랄드빛 눈동자는 짙게 의문을 표하고 있다.

, 제 자신의 시간을 말한 거에요.”

다른 한쪽마저 치켜올라갔다.

이어서 그의 눈동자가 말했다. 뭐라구요?

시선을 피하며 작게 숨을 들이마시고, 단번에 내뱉었다.

어른이 되게 해달란 얘기죠.”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가 팔짱을 풀고는 길게 늘어뜨렸다.

표정은 그냥 멍한 것이,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살짝 뛰어오른 가슴 한쪽을 억누른다.

……푸훗.”

이윽고 그가 작게 웃었다. 잠시 눌러 참듯이 배위로 손을 가져다 대더니,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숙인 고개 너머로 눈은 보이지 않았다. 매끄러운 앞머리가 곱슬거리며 흘러내려 가려주었다.

후훗, 후하하핫! 이거, 이거제가 아주 큰 실례를 범했군요.”

그가 말하며 고개를 들었다. 눈꼬리 끝에는 작게 물기마저 어려 있었다.

항상 다양한 변화를 보이는 눈매가 정말로 즐겁다는 듯이 가늘어졌다가, 이내 손끝에 의해 쓸려나간다. 물기가 방울져 튀었다. 그저 넋놓고 바라보고 있었기에 하나하나 전부 볼 수 있었다.

전부 쓸어내자 이내 다가오기 시작했다. 깜짝 놀랄 만큼 부드러운 미소를 띈 채 느릿느릿하게, 반응을 즐기기라도 하듯이.

알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애꿎은 발치만 내려다 보며 안색을 감출 수밖에.

하지만, 숙여 가린다 해도 벌개진 귓볼만은 감출 수 없었을 터였다. 나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제발 모른척 해 주기를…….

후후.”

이윽고 경쾌한 소리를 내며 멈춰섰다.

시선 끝으로 윤기 나는 구두굽이 보인다. 그의 머리칼과 같은 색이다.

이어서 길게 두드러진 손마디가 보였다. 그 손등이 서서히 내게 다가오고, 그리고…… .

……!”

턱을 잡혀 들어올려졌다.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쳤다. 손대면 옥빛 물이 묻어나올 것처럼 진한 눈동자가 가쁜 숨결을 빨아들이는 것만 같았다. 표정은 즐거워 보였지만 그 눈동자만은 진지했다.

적어도 비웃으며 놀리는 건 아닌 듯 싶었다. 다행스럽게도.

사랑스런 꼬마 아가씨. 시간을 굳이 악마에게서 사들이는 인간은 없답니다. 가만있어도 자연히 갖게 될 것을 구태여 거래까지 해가며 얻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죠.”

순간 그가 악마라는 것을 깨끗하게 잊어버릴 정도로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귓볼과 턱 사이를 손끝으로 부드럽게 쓸어가 준다. 목 뒷덜미가 짜릿하게 술렁였다.

그런데도 아가씨가 굳이 시간을 사들여 어른이 되려는 이유는. ? 흐흠……?”

덜컥 내려앉으려는 가슴을 억누른다.

아니야. 알 리가 없어. 이건 분명 악마의 협상법그러니 조용히 하렴제발…….

제발 그렇게 뛰지 말아 줘, 심장아.

후후정말이지.”

그가 턱을 쓸어주던 손을 거두어 갔다. 일말의 아쉬움이 남아 맴도는 것만은 어찌 할 수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소원을 들어드리도록 하지요.”

스륵, 하고 다가오는 소리가 들린다고 생각했다. 정말로 순식간이었다.

그의 눈동자에 나의 놀란 얼굴이 비추어 다가오고 있었다. 시뻘건 것이, 매우 우스꽝스러웠다.

그 이후론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그대로 시간이 멎은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것이 짧은 입맞춤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비로소 그가 떨어져 입가를 손끝으로 훔치는 모습을 본 뒤가 되었다.

혀를 내밀어 점성을 함유한 액체를 음미하듯 쓸어 삼키고, 그는 여느 때처럼 흐드러지는 듯한 미소로 웃었다.

악마의 계약엔 자비란 것이 없지요. 혀를 넣어 휘젓는 것은 대체로 다 자란 인간들만의 방식이니, 아가씨는 지금 이 순간 어른이 되신 겁니다.”

그가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어 온다. 쳐내야 했는데, 쳐내며 화를 내야 했는데……. 왠지 그럴 수가 없었다. 그저 아직도 달콤한 꿈속을 헤매고 있는 것만 같았다.

대가는, 아가씨가 스무살이 되는 바로 그 날. 성인식을 치른 직후에 받기로 하지요.”

한 걸음, 두 걸음. 쓸어주던 손을 거두고 그가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여전히 나를 바라보는 채로, 장난스런 표정 그대로 난로 쪽으로 뒷걸음질만을 치면서.

그 땐 더 이상 나이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을테니, 오늘의 것 정도론 끝나지 않을 테지요. 각오해 두는게 좋으실 겁니다.”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가며 그의 모습도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난로 속으로 사라지기 직전, 내게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럼 이만. 굳이 계약이 아니더라도 종종 지켜보러 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메리 크리스마스.”

스르륵. 그가 사라지는 소리였다.

그리고 나 자신이 무너지듯 주저앉는 소리이기도 했다.

호르르 한숨을 내쉬자 그제야 꾹 눌러 참았던 열기가 숨결 사이로 새어나왔다.

아직 채 식지 않은 공기가 가늘게 떨려오기 시작했다.

미처 닦아 훔쳐내지 못한 입술 끝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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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려한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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