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이정표

소년의 크리스마스 - moke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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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려한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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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의 상점가는 비용적 문제를 무시하고 한껏 틀어놓은 난방과 안팎에서 북적거리는 사람들로 인해 오히려 더울 지경이었다.
 로잘린은 구석에 숨어 꿀꺽꿀꺽 이온음료를 마셨다. 그러고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즐거운 크리스마스이브지만 아침부터 로잘린의 기분은 좋지 못했다. 시리얼에 우유를 부으려다 손이 미끄러져 바닥을 엉망으로 만든다든지, 핸드폰이 떨어져서 먹통이 된다든지, 혼자 길을 걷다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넘어진다든지, 그런 좋지 않은 일들이 소시지처럼 줄줄이 일어났던 것이다.
 무엇보다 그녀를 짜증나게 한 것은, 이브날에 자신이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원래는 그녀도 알렉스라는 이름의 남자친구와 함께 오늘내일을 낭만적이면서도 화끈하게 보낼 예정이었다. 그러려고 10월서부터 콘서트 티켓을 예매하고 근사한 식당에 자리를 잡아두었던 것이다. 그런데 대망의 크리스마스를 6일 앞둔 날, 그녀는 솔로가 되었다. 누가 먼저 싸움을 시작했는지는 기억나지도 않는다. 어쨌든 그녀와 알렉스는 사소한 문제로 실갱이를 벌이다가 점점 에스컬레이트하여 상대의 인격을 모독하는 발언을 서로에게 퍼붓기 시작했고, 결국 사귄 지 1년 만에 갈라서고 말았다.
 그날 밤 로잘린은 가장 친한 친구, 마틸다와 바에서 만나 밤새도록 울었다. 그리고 이튿날, 알렉스와 관련된 모든 물건을 내다버렸다. 핸드폰에서 번호를 삭제하고 홈페이지에서도 그의 흔적을 모조리 지웠다. 예약도 취소했다. 아무리 화가 났기로서니 자신을 '매춘녀'라고 욕한 남자 따위는 두 번 다시 받아주지 않을 작정이었다.
 알렉스에 관한 건은 그렇게 정리가 됐다. 문제는 갑자기 비어버린 이브와 크리스마스의 스케줄을 어떻게 채우느냐 하는 거였다.
 마틸다를 비롯해 친한 애들은 몇 명 있다. 하지만 그와 그녀들에게는 모두 애인이 있었고, 미리 짜둔 크리스마스 계획이 있었다. 자기가 할 일이 없어졌다고 해서 친구들의 개인적인 시간까지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가족과 함께 보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지 몰랐다. 그러나 그들은 십중팔구 알렉스와 어떻게 된 것인지 캐내려 할 터였다. 꽤 오래 전부터 크리스마스는 알렉스랑 놀 거라고 광고하고 다녔으니까. 쪽팔려서라도 집에는 오래 못 있을 성 싶었다.
 남은 선택지는 혼자 싸돌아다니며 새 남자를 찾거나, 크리스마스 기간 동안 임시 아르바이트를 구하는 정도였다. 남자친구와 깨진 지 얼마 안 되어 당분간 솔로로 지내고 싶은 심정이었기 때문에, 마음은 자연히 돈도 벌 수 있고 건설적인 아르바이트 안(案)으로 기울었다.
 케이크가게나 편의점, 대형마트 등은 이미 인원이 찬 상태였다. 포기하려던 찰나, 마을 서쪽의 상점가에 있는 소규모의 크리스마스트리 전문점에서 기적적으로 일거리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로잘린은 오늘, 산타의상을 입고 마이크를 장착한 채, 별로 값비싸 보이지 않는 트리에 둘러싸여 있다.
 처음 몇 시간은 그래도 의욕적이었다. 손뼉을 치기도 하고 근처로 사람이 지나다닐 때마다 인사하기도 하고 목청껏 호객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상점가 외곽의 가게로는 좀처럼 발길을 옮겨주지 않았다. 이미 대부분이 트리를 장만했거나 여기보다 더 규모가 크고 다양한 종류의 트리를 구비한 전문점으로 가버리는 듯했다.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지 4시간 가량이 지나자 서서히 지쳐서, 호객도 하지 않고 주변을 멍하니 쳐다보는 일이 많아졌다.
 맞은편의 진열대에는 각양각색으로 포장된 초콜릿이 쭉 늘어서 있었다. 그 옆에선 지팡이 모양 사탕, 별 모양 쿠키, 화려한 무늬의 양말, 멀리서 봐도 푹신푹신한 느낌이 나는 곰 인형, 각종 크리스마스카드가 눈에 띄었다. 조금 더 옆을 보니 텔레비전에서 몇 번 광고한 적이 있는 중저가 장난감과 가전제품이 사람들의 발길을 모으고 있었다.
 스피커에서 쏟아져 나오는 경쾌한 캐럴을 한 귀에서 한 귀로 흘려 들으며, 로잘린은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상점가에는 가족으로 보이는 무리들, 그리고 그 이상으로 팔짱을 끼거나 손을 잡고 걸어가는 연인들이 많았다. 별 생각 없이 계속 보다 보니 알렉스와의 일들이 생각나 로잘린은 점점 우울해지기 시작했다.
 '나도 저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는데…….'
 이브에 일을 하고 있는 것도 알렉스 때문이다. 오늘 안 좋은 일이 자꾸 생겼던 것도, 그와 헤어진 충격이 아직 가슴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애당초 크리스마스라는 건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이 아니던가. 왜 연인끼리 선물을 주고받고 데이트하는 게 룰이 되어버린 건지 모르겠다. 즐거운 건 자기들이지 예수가 아니잖아.
 그런 시답잖은 생각들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온음료를 마지막 한 방울까지 입안에 털어 넣은 후, 그녀는 눈을 감고 잡념을 떨쳐냈다. 지금은 잡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크리스마스 기간에 아르바이트를 하는 게 뭐 어떻단 말인가. 웬만한 사람보단 훨씬 충실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게 틀림없다고 스스로를 위로하기로 했다.
 로잘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본래 위치, 즉 가게 앞으로 돌아갔다.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신사숙녀 여러분~."이라는 말로 호객행위를 재개할 생각이었다.
 "시……."
 그러나 그 말은 시작되자마자 어중간하게 꼬리를 흐리고 사라져버렸다.
 바로 뒤에서 누군가가 산타옷을 잡아당겼던 것이다.
 돌아보니 가게 안에 꼬마 한 명이 서 있었다. 금갈색의 짧은 머리카락을 가진 백인 소년이었다. 로잘린이 미심쩍은 시선을 보내자, 소년은 싱글거리는 웃음을 만면에 띠며 산타옷을 놓았다.
 그녀는 마이크를 끄고 나지막하게 물었다.
 "……꼬마야, 언제 들어왔니?"
 "조금 전에요. 누나가 눈 감고 저기서 음료수 마시고 있을 때."
 만약 여기가 구멍가게였고, 소년에게 도둑질을 할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자신은 돈을 벌기는커녕 변상금만 잔뜩 물고 쫓겨났을 지도 모른다. 자기가 인기척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내심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로잘린은 재빨리 입가에 영업용 스마일을 띄웠다.
 "그렇구나. 손님을 빨리 못 알아봐서 미안하네."
 그리고 소년의 키높이에 맞춰 허리를 살짝 굽혔다.
 "뭐 사고 싶은 트리 있니?"
 이렇게 물어는 봤지만, 사실 큰 기대는 없었다.
 소년은 아동용의 검은색 정장을 입고 그 위에 검은 블레이저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그럭저럭 비싼 브랜드의 옷이었다. 얼굴에서도 태도에서도 부유층 자제 특유의 오오라가 느껴지기는 했으나, 왠지 트리에 관심이 있어서라기보다는 길을 가다 점원이 뻗어 있기에 궁금해서 들어온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소년은 가게에 진열된 트리에는 거의 눈길도 주지 않고 로잘린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적당히 상대하다 보면 엄마나 아빠가 들어와서 소년을 데려가지 않을까 하고 로잘린은 생각했다.
 소년은 몇 초 침묵한 뒤 반문했다.
 "크리스마스에 꼭 트리가 필요해요?"
 "음……."
 여기서 로잘린은 잠시 고민했다.
 그녀 개인적으로는 크리스마스철이라 해서 굳이 트리를 장만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거기에 쓰이는 나무가 아깝고, 재료가 아깝고, 배송비가 아깝고, 장식할 시간이 아깝다. 어차피 12월 25일이 끝나면 퇴물 취급 받고 버려질 게 뻔한데 뭐하러 돈 주고 사냐는 생각까지 든다. 트리 따윈 돈 낭비고 개성 없고 자리만 차지할 뿐이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트리 전문점의 아르바이트생이었다. 아무리 어려도 손님은 손님이고, 손님에게 위와 같은 자신의 견해를 늘어놓을 수는 없었다.
 결국 그녀는 '필요하다'는 입장에 서서 말하기 시작했다.
 "물론이고말고. 크리스마스가 되면 트리 하나쯤은 장만해두는 게 상식 아니겠어?"
 "왜요?"
 내가 알 리 있나. 속으로 뇌까리면서도 로잘린은 응답했다.
 "원래 크리스마스트리란 건 에덴동산의 생명의 나무를 상징하는 거래. 거기 다는 장식은 선악과나 크리스트를 가리키는 거고. 그렇게 중요한 게 크리스트의 탄생을 축하하는 내일 같은 날에 빠져서는 안 되잖아? 물론 지금의 트리는 옛날에 비해 좀 비싸지만 말이야."
 "……흐음."
 소년은 감탄이라기에도 한숨이라기에도 애매한 소리를 냈다. 로잘린은 여전히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확인하듯 말했다.
 "손님 집에도 한 번쯤은 트리 놔봤을 걸?"
 "아뇨, 없어요."
 소년이 즉답했다.
 "아빠도 그렇고 엄마도 그렇고, 크리스마스니 추수감사절이니 하는 행사를 좋아하지 않아서요. 그런 날들이 만들어진 유래 같은 걸 들어도 별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고요. 왜, 크리스마스라는 것도 누나 말대로 크리스트의 탄생을 축하하고 기념하기 위해 생긴 거잖아요? 그런데 그게 왜 친밀한 사람끼리 선물을 주고받는 날이 됐는지 모르겠다네요. 저도 그 생각에는 동의하지만……."
 놀랍게도 아까 자기가 했던 생각과 거의 비슷했다. 의외로 많이들 크리스마스에 회의심을 느끼며 살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고 로잘린은 생각했다.
 갑자기 조용해진 그녀를 보고, 소년은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거렸다. 자기가 한 말이 이상해서 그녀가 당황했다고 지레짐작한 모양이었다.
 "아빠도 엄마도…… 물론 나도 그렇지만, 이 나라에 온 건 처음이거든요. 그래서 붕 뜨는 느낌이 있는 것도 사실이에요. 하지만 이제부터라도 익숙해져야죠. 여기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하는 건 일단 힘닿는 데까지 해보려고요."
 "……좋은 생각이야, 손님."
 로잘린이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여긴 작지만 의외로 실속 있고 괜찮은 트리가 많아. 지금이라면 배송비도 저렴하구. 처음이니까 괜히 비싼 데서 바가지 쓰는 것보다는 가격대비 효율이 뛰어난 이 가게의 트리들을 사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해. 내가 여기 점원이라 그러는 게 아니라 정말 진심에서 추천하는 거야."
 물론 점원이라 그런 것이었지만 거기에 대해서는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다.
 로잘린은 크지 않은 가게 내부를 돌아다니면서 소년에게 여러 종류의 트리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트리를 꾸미는 데 사용되는 방울, 종, 모루, 별, 눈 모양 장식 등도 소개했다.
 하지만 소년의 반응은 대체로 시큰둥했다.
 그가 유일하게 오래 머무른 곳은 은색의 인조 크리스마스트리 앞이었다.
 줄기도 가지도 온통 은색으로 뒤덮여 있는 그것을 보고 소년은 뭔가를 중얼거렸다. 그리고 로잘린에게 양해를 구해 방울, 모루, 하트를 달아본 다음, 턱에 손을 대고 침묵했다. 트리 주변을 세 바퀴쯤 돌며 상하좌우 360도를 훑어본 소년은 이윽고 턱에서 손을 뗐다. 힐끔 보자 그의 얼굴은 조금 전보다 훨씬 밝아져 있었다.
 "……좋군요."
 감탄하듯 소년이 말했다.
 "이런 색깔이면 아빠랑 엄마도 마음에 들어할 것 같아요. 크리스마스트리라는 걸 다시 보게 될지도 모르겠네요."
 로잘린의 얼굴에도 화색이 돌았다.
 "그럼……."
 "하지만,"
 머릿속에서 신속하게 트리+장식품+배송비를 계산하기 시작한 그녀를 향해, 소년은 담담하게 말했다.
 "이 정도론 좀 부족해요. 좀더 화려하고 생생하지 않으면……."
 로잘린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늘어뜨리고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소년의 말은 요컨대 트리 자체의 모양은 마음에 들지만 싸구려라서 화려하고 생생하지 못하므로, 다른 곳에서 비슷한 종류의 다른 트리를 사겠다는 것이었다. '장식 다는 것까지 봐줬는데.' 라고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로잘린은 또다시 얼굴에 영업용 스마일을 띄웠다.
 "어떡하지? 이 가게에 은색 트리는 그것밖에 없는데. 상점가 안쪽으로 들어가면 여기보다 큰 전문점이 있거든? 거기에는 손님이 원하는 게 있을지도 모르겠다."
 "기대하게 해서 미안해요."
 소년이 고개숙여 사과했다.
 "아니야. 나야말로 멋진 트리를 찾아주지 못해 미안한 걸."
 로잘린도 엉겁결에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난처한 듯이 웃고는,
 "이 문제에 관해서 내가 조금이라도 도움 줄 일이 생기면 말해줘."
 라고 말했다. 소년의 눈이 조금 커졌다.
 "정말인가요?"
 "으응……."
 로잘린은 머리를 긁적였다.
 적어도 100% 겉치레인 것은 아니었다.
 이맘때가 되면 일반적으로는 아이들이 양말을 걸어두고 산타… 정확히는 부모의 선물을 기다리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소년은 선물을 바라기는커녕, 오히려 '크리스마스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부모를 위해 뭔가를 해주려 하고 있다. 그 모습이 젊은 로잘린의 눈에도 기특하고 대견하게 보였던 것이다.
 '꽤 특이한 집 애인 것 같아.'
 소년을 바라보며 로잘린은 문득 생각이 나 물어보았다.
 "트리 말고 다른 건 준비했니? 케이크라든지."
 "아뇨, 아직요. 이제부터 찾아보려고요. 마음에 쏙 들어 할 만한 건 찾기 어렵겠지만… 트리를 구하면 어떻게든 될 것 같네요."
 그리고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누나를 찾을게요." 라는 말을 끝으로 소년은 손을 흔들고 가게 밖으로 나갔다. 손을 마주 흔들던 로잘린은 소년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맥이 빠진 표정으로 천천히 손을 내렸다.
 별 생각 없이 내뱉은 '도와줄게'라는 말을, 소년은 아무래도 진지하게 받아들인 듯했다. 오늘 막 트리 전문점에 들어온 것에 불과한 자신이 뭘 어떻게 도와줄 수 있다는 건가. 살짝 거북하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고개를 저어 그것을 떨쳐냈다.
 소년은 어른스러운 아이로 보였다. 자신의 말이 반 이상은 그냥 해본 소리였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설령 진담이라 생각했다 해도 어쩔 수 없다. 어차피 로잘린은 트리에 대해선 거의 아무 것도 모른다. 더군다나 25일까지는 가게에 쭉 붙어 있어야 했다. 자신에게 트리 건을 도와줄 여력이 없다는 걸 알게 되면, 소년 쪽에서도 과히 자기를 탓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을 한편으로는 다행이라 생각하고 한편으로는 미안하게 생각하면서, 로잘린은 뺨을 가볍게 톡톡 때렸다. 마이크를 다시 켜고 얼굴에 웃음을 띄웠다. 그리고 가게 앞의 정위치에 서서 "신사숙녀 여러분~."을 외쳤다.

 이브가 끝나려 하고 있었다.
 로잘린이 와플을 먹으며 상점가를 나왔을 때, 시계바늘은 이미 밤 12시에 가까웠다. 아르바이트는 10시께에 끝났지만, 그대로 집에 들어가기 싫어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보니 어느새 이 시간이 되어 있었다.
 이브라서인지 거리에는 여느 때보다 사람이 많았다. 로잘린은 비교적 밝고 오가는 사람이 많은 곳을 골라 길을 걸었다. 이럴 때는 듬직하고 따스한 연인의 팔이 정말로 그립다.
 방심하면 떠오를 것 같은 전 남자친구 알렉스의 얼굴을 로잘린은 고개를 휘휘 저어 쫓아냈다.
 대신 아직 반이나 남아 있던 와플을 모조리 입에 털어놓고 우물거렸다. 너무 급하게 넣는 바람에 목이 막혔다. 가슴을 치며 켁켁거리던 그녀의 눈꺼풀에 문득 차가운 게 닿았다. 간신히 와플을 목구멍으로 넘기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 얼굴 위로 하나 둘씩 하얀 결정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싸락눈이었다. 그나마도 기온이 따뜻해서 그런지 반쯤은 비가 되어 내리고 있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다.
 주위의 커플 몇몇이 눈을 알아차리고 그 자리에 멈춰섰다. 하늘을 가리키며 시끄럽게 뭔가를 떠들고 있다. 로잘린은 고개를 휙 돌려 흰색 더플코트를 두 손으로 움켜쥐고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부럽지 않다. 부럽지 않다. 눈 같은 건 하나도 신기하지 않다. 우산이나 가져올 걸 그랬다. 마음속으로 이런 말들을 주문처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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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자기 알아들을 수 없는 말과 함께 더플코트가 뒤쪽으로 쫙 잡아당겨졌다. 누군가가 뒤에서 코트를 잡고, 그녀가 앞으로 못 가게 막고 있었다.
 로잘린은 짜증을 숨기지 않으며 등 너머를 돌아보았다. 여차하면 분풀이 상대로 삼아줄 심산이었다.
 "누나?"
 상대의 얼굴을 보고 그녀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넌 아까……."
 "또 보네요. 이제 집에 가세요?"
 밤색 머리의 소년이 기쁜 듯 웃었다.
 "응. 나야 그렇다 치고, 넌 왜 이렇게 늦었어?"
 "트리 좀 알아보느라."
 소년은 고개를 저었다. 결국 이 근처의 상점가에서 '화려하고 생생한' 트리는 찾지 못한 모양이었다. 괜시리 미안해진 그녀가 어깨를 움츠렸다.
 "이 밤늦게까지? 부모님이 걱정하시겠다."
 "괜찮아요. 아빠랑 엄마는 내일에나 여기 오니까."
 "그래도 위험하잖아."
 "여기 온 지 얼마 안 되긴 했지만, 그래도 제가 보기에 이 나라치곤 치안이 좋은 마을 같은데요."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아."
 "그럼 누나라도 위험한 건 마찬가지 아니에요?"
 "난 여기 토박이니까…… 집도 가깝고."
 "그랬구나."
 어느새 소년은 로잘린의 옆에서 걷고 있었다. 잠시 텀을 두고 그는 화제를 전환했다.
 "누난 늘 그 가게에서 아르바이트 해요?"
 "오늘이 처음이야."
 "그래요? 트리에 대해 잘 설명해주시길래, 꽤 오래된 줄 알았는데."
 "아냐. 아까는 잘난 척 떠들었지만…."
 그녀는 멋쩍게 웃으며 갈색 앞머리를 왼손으로 꼬았다. 일찌감치 이 얘기가 나와서 차라리 잘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별로 아는 것도 없어. 네가 그렇게 열심히 찾는 줄은 모르고 그냥 섣불리 도와주겠다고 말한 것 같아서… 미안해."
 로잘린은 솔직하게 고백했다. 이걸로 빈 말이 완전히 취소가 되는 건 아니겠지만,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소년은 몇 초간 입을 다문 뒤,
 "그렇겠죠. 그래도 도와준다는 말은 기뻤어요."
 담담히 말했다.
 소년의 발이 멈추었다. 로잘린도 소년을 따라 자연스럽게 그의 맞은편에 멈춰섰다. 가로등의 밝은 불빛 속에서 비 같기도 하고 눈 같기도 한 흰색 입자가 사뿐히 낙하하고 있었다. 침묵이 불편해 주위를 살피던 로잘린은, 어느 틈엔가 사람들이 보이지 않음을 알아차렸다.
 "전 성격이 이상해서 남한테 도와달라는 말은 잘 못 하거든요. 겉치레건 뭐건, 저한테 그렇게까지 말해준 사람은 누나가 처음이에요. 그래서 말하는 건데요."
 소년은 아래로 시선을 떨군 채 조금 웃었다.
 "실은… 전 아빠랑 엄마가 크리스마스를 좋아하게 되길 바라요. 이 마을도요. 저야 나이가 어려서 적응하는 거엔 문제가 없겠지만, 아빠랑 엄마는 아직 거부감이 심한 것 같아요. 그걸 조금이라도 없애주기 위해선 역시 특별한 걸 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빠도 엄마도 마음에 들어할 만한 걸로요."
 소년의 시선이 위로 올라가 로잘린의 얼굴에 고정되었다.
 "지금 누나가 절 위해 해주실 수 있는 게 하나 있어요. 무척 간단해요. 지금 여기서 허락해 주신다면 금방 끝날 일이에요. 허락하지 않으시면…… 그냥 단념할게요."
 로잘린은 이유 없이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영문도 모른 채, 그런 얼굴로 말하면 거의 협박이지 않냐고 속으로 중얼거리면서도,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은 환하게 웃으면서 고맙다고 말했다.
 그리고 로잘린의 얼굴을 향해 가느다란 두 팔을 뻗었다. 소년의 희고 섬세한 양손이 그녀의 턱을 쓰다듬더니, 귀 뒷부분과 목 언저리를 부드럽게 감싸 쥐고 고정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소년의 눈동자에 그녀의 얼굴이 비쳤다. 하늘하늘 내려오는 눈이 두 사람의 머리카락과 코트를 부드럽게 적셨다. 로잘린은 당황했다.
 이건 입맞춤을 하기 위한 포즈가 아닌가.
 어째서 나한테? 왜 이 애가?
 '어떡하지…….'
 저도 모르게 가슴의 고동이 빨라져 있었다. 이 자세가 왠지 부끄러워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린 소년에게 두근거리는 자기 자신이 한심해서 그녀는 얼굴을 사과처럼 붉혔다. 그런 그녀를 올려다보며 소년은 깊게 미소지었다.
 그리고 그녀의 귀와 목을 감싸고 있던 손을, 있는 힘껏 치켜들었다.

 소년의 힘은 강했다.
 쭉 뻗은 팔을 위로 들어 올린 순간, 길고 매끄러운 갈기를 뒤로 늘어뜨린 인간 암컷의 머리가 통째로 뽑혀 나왔다. 붉은 혈액이 단면에서 콸콸콸 쏟아져 내렸다. 그와 동시에 암컷의 검은자위가 눈 뒤쪽으로 돌아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
 혈액으로 검붉게 젖은 몸통이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완전히 바닥과 격돌하기 직전, 소년은 재빨리 오른손을 뻗어 우아하게 몸통을 안아들었다. 그 모습은 마치 인간들이 탱고라고 부르는 춤의 한 동작 같았다.
 소년은 몸통을 바닥에 내려놓고 왼손에 옮겨든 것을 잠시 관찰했다. 머리만 남은 암컷은, 살아 있을 때는 결코 짓지 않았던 추악한 표정을 떠올린 채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암컷의 머리와 몸통에 떨어진 눈이 아직 남아 있는 온기에 녹아 물이 되었다. 암컷이 입고 있던 새하얀 겉옷은 윗부분부터 새빨갛게 얼룩져 있었다. 단면에 입을 대고 뚝뚝 떨어지는 혈액을 몇 모금 빨아먹은 뒤, 소년은 그것을 몸통 옆에 가지런히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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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년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 즉시 암컷에게 말을 걸기 전 쳐두었던 결계가 풀렸다. 주변은 평범한 거리에서 소년의 음침한 거주구역으로 변화했다. 결계에는 그 안에 든 개체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개체를 다른 곳으로 전이시키는 능력이 있었다.
 익숙한 거주구역에 도착한 것을 확인하자마자 소년은 암컷의 옷을 벗기고 몸통을 해체했다.
 먼저 가죽을 조심조심 벗겼다. 그 안에 통통하게 들어찬 살을 발라내 피를 꼭 짠 뒤 미리 준비해놓은 바구니에 담았다. 뼈는 하나씩 뜯어내 살과 찌꺼기를 깨끗이 발라냈다. 심장, 폐, 간은 분리해서 옆에 놓고, 길게 꼬인 장은 반듯하게 풀었다. 나머지 장기는 살이 들어간 바구니에 넣었다. 물을 받아와서 심장, 폐, 간, 뼈에 묻은 피를 말끔하게 닦고, 훼손되는 부분이 적도록 유의하며 내장의 불순물을 제거했다.
 다음으로 소년은 단단한 척추를, 암컷의 구강에 푹 꽂고 단단히 고정시켰다. 안정감 있게 균형을 잡을 수 있도록 위치와 각도를 계산하면서, 충분한 시간을 들여 척추에 자잘한 뼈를 붙여나갔다. 뼈들은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쭉 퍼지는 형태로 고정되었다.
 토대가 완성되자 이번에는 페와 간을 적당한 크기로 잘라 뼈 사이사이에 달았다. 그리고 내용물이 빠져 한결 가벼워진 장을 등분해 둘러주었다. 다음으로 암컷의 갈기를 잘라 곳곳에 뿌리고, 꼭대기에 심장을 얹었다.
 "……됐다."
 조금 흥분한 목소리로 소년이 중얼거렸다.
 하루 내내 찾아 헤맸던, 화려하고 생생한 크리스마스트리다. 가지도 줄기도 하얗고, 달아놓은 장식 역시 아름답다.
 이 정도면 아빠도 엄마도 '예쁘다'고 생각할 것이다.
 사실 소년 자신은 오늘 마을에서 봤던 '끔찍한' 트리로도 만족할 수 있었다. 암컷에게 말했던 대로다. 그러나 아직 인간계에 뿌리 깊은 반감을 갖고 있는 아빠와 엄마는, 그 '끔찍함'을 소년처럼 유연하게 받아들이지 못할 터였다. 인간의 미적 감각과 풍습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둘의 입버릇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지만 우리는 오늘부터 인간계에서 인간과 함께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의 미적 감각을 이해하고 그들의 풍습에 따를 필요가 있다. 계속 일족의 방식만 고집하며 인간과 담을 쌓고 살다간 머지않아 일족은 파멸하고 말 것이다.
 그래서 준비한 것이 이 특제 트리였다.
 소년은 검붉은 피로 더러워진 옷을 벗었다. 그리고 바구니에 따로 모아둔 암컷의 살과 장기의 일부분을 뭉쳐 '케이크'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제 2시간쯤 지나면 아빠와 엄마도 수속을 마치고 이 마을로, 지금 소년이 있는 거주구역으로 돌아온다. 빨리 케이크를 만들고 거주구역을 청소해서 둘을 맞이할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겨우 오늘 하루 못 봤을 뿐인데, 아빠의 근엄한 얼굴과 엄마의 상냥한 얼굴이 몇 달은 못 본 것처럼 그립게 느껴졌다.
 아빠랑 엄마는 자기가 만든 트리랑 케이크를 보고 어떻게 생각할까. 기뻐했으면 좋겠다. 멋대로 이런 걸 준비했냐고 화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이것들이 암컷의 동의하에 평화적으로 만든 거라는 걸 알면 금세 기분을 풀어줄 것이다. 더러운 인간에게 손을 댔다며 겉으로는 못마땅해 하는 척하면서도, 인간을 원료로 이렇게까지 노력한 소년이 대견해 입가를 일그러뜨리는 아빠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엄마는 그런 아빠를 보면서 웃음을 참느라 고생할 테지.
 쉬지 않고 손을 놀리면서 소년은 바랐다. 이 특별한 크리스마스 선물을 통해, 아빠도 엄마도 인간계의 풍습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게 되기를. 진심으로 크리스마스를 즐길 수 있는 날이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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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려한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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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7)

ㅇㅇㅇ 10.12.02. 01:53
라노베라는 느낌이 적게 묻어나는 글이네요.
ㅁㅁㅁ 10.12.02. 20:06
뭐랄까, 단편 공포만화를 본 기분인데요. 라이트노벨이 아니고요. 이야기가 밋밋하고 마지막 부분에만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마지막이 좋았냐면 글쎼요. 소년의 정체에 대한 복선이 없어서 갑툭튀한 느낌입니다. 좀 더 소년과 로잘린 간의 묘사를 넣고 복선을 뿌려뒀어야했는데 아쉽네요. 거기에 왜 크리스마스 이브에 알바를 했는지, 왜 남자친구와 했는지는 사실상 사족에 가깝습니다. 필요 없는 군더더기죠. 만약 이게 로잘린의 불행을 강조하기 위한, 암시하기 위한 의도적 장치라도 잘못 사용된 것 같습니다. 불행한 놈이 계속 불행해지는 내용은 장편에서나 어울리지, 단편에서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왜냐면 독자가 그런 것에 대해서 동감을 하지 못하니까요. 그런 고로 단편에서는 행복한 놈이 나락으로 떨어지는게 더 설득력이 있죠.
하늬비
하늬비 10.12.03. 13:41
부왘!!!

아, 앞부분대로 그냥 이어갔어도 동화스러운 분위기가 나쁘진 않았을 것 같은데 말이죠 ㅋㅋㅋ
복선없는 반전이 단편이라기 보다는 엽편, 소품적인 구성이라 평가기준상 악영향이 있을 것 같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 즐겁게 읽었습니다!
남자한테 차이고 우울모드에서 건성으로 대하다가 살짝 양심의 가책 + 쇼타 도키도키에서 다시 확 뒤집힌 게 적절했습니다.
뭐 호오가 취향을 탈 것 같습니다만. 앞부분에 힘이 안 실리면 뒷부분도 못 살아나는데 이 앞부분이 사느냐 마느냐가 바로 취향을 탈 것 같슴.
검은빛 10.12.03. 14:44
뭐랄까..처음부분의 느낌을 그대로 살려나갔으면..장편 라노베라는 느낌이 났는데...

중간에 반전을 터트리시네요..ㅎㅎ...
cloud.9
cloud.9 10.12.03. 15:22
엌ㅋㅋㅋㅋㅋ 반전잌ㅋㅋㅋㅋㅋ 로잘린 안습 ㅠㅠ
요마 10.12.06. 21:05
개인적으로 반전에 마이너스점을 주고 싶네요.

차라리 초반분위기를 끝까지 이어가 동화처럼 끝냈는게 더 좋았을 글인 것 같습니다.
MMI 10.12.08. 03:10
저도 윗분 의견에 동감합니다.
일말의 설명도 복선도 감정의 이입도 없는 반전을 반전이라 부를 수 있을까요.
독자를 전혀 의식하고 있지 않을뿐더러 심지어 '한번 당해봐라'는 식의 어떤 악의마저 느꼈습니다.
이런 식으로 독자의 기대를 '나쁜쪽으로' 배신하는 반전은 독자에게 불쾌감만 심어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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