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이정표

제9입자의 사용방법 - 밑개 作 /2차 심사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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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려한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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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국적불명의 남자가 저희 집 지하실에 쓰러져 있는 걸 봤던 것이 반년 전 일이었어요. 그때 너무 당황한 모양인지 경찰에 신고할 생각도 안 하고 그대로 내버려 두었죠. 그리고 그 남자는 1시간 정도 지나서 깨어났고요.

눈을 뜬 남자가 제일 먼저 한 건, 그 광경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저의 머리통을 부여잡는 것이었어요. 그러더니 다시 눈을 감고 이상한 말로 한참을 중얼거리더니, 공포에 휩싸여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던 저에게 우리나라 말로 물어보았죠.

“여기가 어디야?”

저는 대답했어요.

“도, 도봉구 쌍문동인데요….”

 네, 저도 상당히 멍청한 대답이었던 건 알고 있어요. 어쨌든 남자는 갑자기 다짜고짜 저에게 자기소개를 하기 시작했어요. 자신의 이름은 시르크며, 라셀라에서 제9입자를 연구하고 있었던 마법사라고 했죠. 그런데 누군가의 음모에 휘말리는 바람에 아직 제대로 연구하지 못한 공간이동 마법을 자기 자신에게 사용해서 여기에 왔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더니 다시 돌아가기 위해선 시간이 꽤 걸릴 것 같다고, 당분간 여기서 있으면 안 되겠느냐고 부탁했죠. 

사실 그 소릴 들었을 땐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어요. 다만, 이 거지 같은 꿈에서 깨어나 올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을 뿐이었죠.

아직 6개월째 그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있지만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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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같은 크리스마스 같으니라고…….”

 틀린 말은 아니었어요. 그때 제가 하고 있었던 건 할 일 없는 어느 집 강아지처럼 소파에 드러누워 하품만 하는 것이 전부였으니까요. TV에는 온갖 성탄절 특집 프로그램들이 신 나게 방송되고 있었어요. 저는 크리스마스의 기적이 이런 건가 싶었죠. 왜, 거의 모든 방송이 크리스마스만 되면 똑같은 성탄절 특집이라는 접두사가 달리고, 똑같은 성탄절 이야기를 하는 그런 신기한 마법 있잖아요. 

문득 TV 위 벽에 걸려 있던 시계를 바라보았어요. 아직 오전 10시도 안 지난 상태였죠. 불과 두 달 전 수능에 쫓길 때만 해도 눈 한 번 깜빡이면 한두 시간씩 휙휙 지나가더니, 오늘은 왜 이렇게 시간이 굼벵이같이 느리게 가는지 잘 모르겠더라 고요. 무료함을 참다 못한 저는 결국 소파를 박차고 자리에서 일어났어요. 그렇다고 별 달리 할 일이 생기는 건 아니지만 말이에요.

그렇게 멍하니 집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다가, 거실 건너편에 있는 제 방 책상에 어느 적갈색 머리의 덩치 큰 남자가 앉아 있는 게 보였어요. 그 인간이 바로 이 집에서 반년째 저에게 들러 붙어사는 시르크였죠. 시르크는 흔히 PC방에서 볼 수 있는 여느 아저씨들처럼 양다리를 책상에 걸친 체, 노곤한 표정으로 컴퓨터에 집중하고 있었어요.

“뭐하냐?”

시르크는 저보다 9살이 많은 형이지만, 아직 한 번도 존댓말이나 존칭을 써 본 적이 없었어요. 이 인간의 평소 성격이나 하는 짓을 보고 있자면, 제가 아는 제 또래의 어떤 녀석이 떠오르곤 하거든요. 그래서 차마 그런 게 입에서 떨어지지가 않더라고요. 어쨌든 시르크도 별로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라서 거리낌 없이 반말로 대화를 나누곤 했어요. 

“실험 준비.”

모니터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시르크는 저도 아직 제대로 다룰 줄 모르는 포토샵 프로그램으로 무언가를 능숙하게 만들고 있었어요. 언뜻 보기엔 별생각 없이 그린 그림처럼 보였지만, 그것이 시르크가 살던 세계에서 사용하는 일종의 마법진 이라는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죠. 이 인간이 가르쳐줬거든요. 한편으론 여전히 이 낙서 같은 걸로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게 의아했지만 말이에요.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내 머리로는 이해하기 어렵다니까.”

그렇게 말하자 시르크는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저를 쳐다봤어요. 며칠째 면도도 제대로 하지 않은 지저분한 턱수염을 쓰다듬으면서 말이에요. 

“그거야 애초에 제9입자라는 것도 고전 마법 학이 정립된 지 55년 지난 다음에야 발견되었으니까. 그것도 펠릭스가 나머지 8개 입자를 통해서 유추한 드로니언 순환의 도식화를 이끌어내서 간접적으로나마 그 존재를 증명한 것이 전부거든.”

“…….”

“그러니까 기초적인 일반적 결정화 원리에서부터, 제9입자의 차원분리화 현상까지의 전체적인 마법 학을 이해하기 위해선 일단 나머지 8개 기본 입자를 가지고 충분히 연구되어야 하는데, 이곳의 마나 분포는 거의 99.9%가 비활성 제9입자로 되어 있어서 말이지. 어떻게 보면 마법 같은 걸 전혀 모르고 살아왔다는 게 당연한 거야.”

솔직히 말해서 시르크가 지껄이고 있는 말이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지만, 이때까지 경험상 여기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그냥 알아들은 척 얼렁뚱땅 넘어가는 것이었어요. 그게 제일 뒤끝도 없고 속 편한 방법이기도 했고요.

“뭐, 그거야 그렇다 치고, 한동안 그런 거 잘 안 하더니. 갑자기 왜 하는 거야?”

시르크가 처음 이곳에 오고 나서 두 달 정도는 대부분 지하실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어요. 실험이니 뭐니 하면서 애꿎은 지하실만 쑥대밭으로 만드는 게 예삿일이었죠. 그런데 어느 샌가부터 조금씩 이쪽 문명의 맛을 알기 시작하더니, 요즘엔 도통 지하실로 내려가는 일이 없어졌어요. 그 대신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시간만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갔죠. 누구든지 인터넷 중독은 피할 수 없는 건가 봐요.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니까.”

처음에는 잘 못 들은 건 줄 알았어요. 반년 전만 해도 예수 그리스도가 언제 어디에서 살았던 아저씨인지도 모르는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거든요. 아니, 그 이전에 크리스마스 이브가 무슨 상관이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에요. 

“그게 무슨 상관이야?”

시르크가 그 말을 듣고는 숨을 한 번 몰아 쉬었어요. 전 당연히 이게 뭘 의미하는 것인지 알고 있었고요. 

“당연히 상관이 있지. 오늘은 연인들 끼리 즐거운 데이트 하거나, 무언가 추억이 될 만한 선물을 주거나, 기억에 남을 근사한 곳에서 저녁을 먹거나, 아니면 단 둘이서 밤새도록 같이 있다가 아침에 인터넷으로 질내사정으로 인한 임신가능성을 심각하게 물어보는 크리스마스 이브니까. 물론 이 모든 것들이 너와는 상관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고.”

“안 물어본 것까지 대답하지 마.”

시르크는 방금 막 프린터에서 인쇄된 따끈따끈한 자신의 결과물을 자세히 훑어보더니, 별 이상이 없는 듯 씩 웃으며 책상 위에 올려놓았어요. 그리곤 책상에서 일어나 자신의 옆에 있던 커다란 외투와 가방 하나를 대충 걸친 채 현관문 쪽으로 걸어갔죠.

“어디 가?”

“잠깐 밖에 뭐 좀 사러.”

저는 집에 혼자 남겨졌고, 결국 다시 거실로 돌아와 TV 리모컨을 찾기 시작했어요.

“아니 그러니까 그게 크리스마스랑 무슨 상관이냐고….”

그렇게 혼잣말을 하던 도중, 그나마 연관성이 있는 무언가가 머릿속에서 떠올랐어요. 자주는 아니었지만, 시르크는 종종 라셀라에 남아 있는 자신의 여자 친구 이야기를 하곤 했어요. 하지만, 그다지 그녀에 대해 말할 땐 즐거워하는 건 아니었기에, 그 사람이 단지 라셀라 상업지구라는 곳에서 조그만 책방을 운영하고 있다는 것 외에는 그 이상 물어볼 수가 없었지만 말이에요. 시르크는 그녀를 둔 채 이곳으로 온 걸 굉장히 후회하고 있는 듯 보였어요.

 하지만, 저에게 지금 중요한 건, 시공간과 차원을 초월한 그런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따위가 아니었어요. 제가 부모님하고 떨어져서 혼자 생활한 게 벌써 4년 짼 데, 그 시간 동안 크리스마스랍시고 뭔가 즐겁게 놀아본 기억이 없었거든요. 또 이렇게 고등학생으로서의 마지막 크리스마스가 지나가는 건가 싶었어요. 올해는 시르크 때문에 아주 약간 상황이 달랐지만, 아주 약간 더 쓰레기 같다는 것 빼고는 변한 게 없었죠. 

“왓 어 퍽킹 홀리데이….”

유창한 한국어 발음으로 허공에다 외치고 있을 즘에, 소파 틈새에 처박혀 있었던 휴대전화가 울리기 시작했어요. 늘 그렇듯 대출 광고 전화겠거니 생각하며 별 기대 없이 수신자번호를 확인해 보았죠. 하지만, 휴대전화 화면에는 어디선가 익숙한 전화번호와 함께 서지은이라는 이름이 찍혀 있었어요. 

“서지은?”

좀 전에 시르크가 제가 아는 어떤 녀석이랑 많이 닮았다고 했죠? 그 녀석이 바로 이 녀석이에요. 지은이는 3년 동안 같이 어울려 지낸 친한 친구이자, 지금은 같은 반 반장이기도 한 여자아이예요. 그리고 공부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여도 막상 모의고사든 학교 시험이든 최상위권을 놓친 적도 없으며, 얼굴도 반반하게 생긴 편이라 학교에서 꽤 인기도 많은 녀석이죠. 표면적으로는 귀여운 외모의 모범생이니까요.  

그래서 녀석과 오랫동안 자주 붙어 다니는 저를 보고는 부러워하거나 질투하는 남정네들이 정말 많았어요. 하지만, 그럴 때마다 전 그들에게 가운뎃손가락을 살며시 올리는 것이 전부였죠. 다들 알고 있는 말이긴 하지만,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잖아요. 

왜냐면 정상인 코스프레를 하는 이 극단적 좌뇌형 인간은 말이에요. 정말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덴 세계최강이라고 확신할 수 있거든요. 솔직히 전 아직 이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슨 말을 하는지,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 아예 모를 때가 훨씬 많아요. 그저 녀석에게 질질 끌려갈 뿐이죠.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모른 채 말이에요. 그래서 그런지 전 이때까지 이성적인 감정을 느껴본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저한텐 이 녀석이 여자이기 전에 너무나도 큰 정신병자거든요. 제가 아까부터 왜 여자에게 녀석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이것 때문이에요. 그녀가 너무 아깝기 때문이에요. 

그래도 녀석과 있으면 재미있는 일도 꽤 많아서, 하루하루가 고달팠긴 했지만, 후회 같은 걸 해 본 적은 없었어요. 형이라도 부르기도 짜증이 나는 시르크가 저희 집 지하실에서 발견되기 전까지는 말이에요. 학교에선 이 녀석에게 시달리고, 집에선 저 녀석에게 시달리면서 조금씩 인생이 황폐해져 가기 시작했죠.

순간, 이 전화를 받을까 말까 상당히 망설였어요. 이 녀석은 전화만으로도 사람을 녹다운 시키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거든요. 실제로 당한 적도 많은 편이었고요. 하지만, 고민 끝에 결국 통화버튼을 눌렀어요. 어쨌든 녀석은 친구니까요.

“여보세요.”

“어, 그래. 오랜만이야. 연석아.”

그래도 이 녀석의 밝고 경쾌한 목소리는 꽤 듣기 좋은 편이에요. 듣고 있으면 그래도 왠지 기분이 편해지거든요. 그냥 잠자코 듣고만 있으면 말이에요. 그리고 이 목소리만큼이나 지은이는 외향적은 성격을 가진 녀석이에요. 특히 장난치는 걸 아주 좋아했죠. 그리고 단언컨대, 제가 제일 많이 당했을 거에요.

“오늘 같은 날에 무슨 일이냐?”

오늘이 크리스마스 이브라는 것을 의식한 모양인지, 저도 모르게 ‘오늘 같은 ’날이라는 구절에 힘을 넣어버리고 말았어요. 그랬더니 가볍게 코웃음 치는 소리가 스피커 너머로 들려왔죠. 

“네가 왜 그런 불필요한 강세를 넣었는지는 잘 알겠는데, 나는 단지 수학능력시험이 끝난 지 25일이 지난 지금 세영고등학교 3학년 4반 반장으로서 반 아이들의 근황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한다는 판단 아래 27번째로 너한테 전화한 것뿐이거든.”

지은이는 시를 읽는 것 같은 낭랑한 말투로 수십 단어나 되는 문장을 불과 5초 만에 나열하고 있었어요. 이게 처음에 접하면 신기한데, 계속 듣다 보면 피곤해지는 말투에요. 그러고 보니 3학년 초 반장 선거에서 이 녀석이 뽑힌 이유도 이것 때문이었어요. 폭풍처럼 몰아치는 연설에 반 아이들이 전부 감탄하고 있었죠.

“아, 그러세요?”

아까도 말했듯이 뭔가 말을 많이 한다 싶으면 그냥 넘어가는 게 제일 좋아요.

“네 그렇고 말고요. 그래서 말인데 요즘 어떻게 지내니?”

“집에서 그냥 있는데.”

녀석이 듣기엔 다소 무성의한 대답일 수도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정말 그게 전부였어요.

“공부는?”

“뭐라고?”

분명히 공부라고 알아들었긴 했는데, 혹시나 잘 못 들었나 싶어서 다시 물어본 거였어요. 이제 막 수능시험이 끝난 고등학교 3학년인 저에게 공부하라는 끔찍한 말이 나왔다는 것을 믿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죠.

“네 수능 점수를 보고 있자면 강원도 산골 어딘가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거나, 지금이라도 기술을 배워서 취직하거나, 아니면 다시 정신 차리고 재수하는 것 말고는 별다른 길이 없는 것으로 보여서.”

수능 점수라는 말에 몸이 반사적으로 움찔거렸어요. 저희 부모님마저도 수능 점수는커녕, 어디다 입시 원서를 넣었다는 것조차도 모르거든요. 사실 절 이렇게 자유롭다 못해 무관심할 정도로 내버려 두시는 걸 보면 안다고 해도 별 관심은 없으실 것 같지만 말이에요.

“네가 내 점수를 어떻게 알아?”

“학교 데이터베이스시스템 백도어로 들어가서 네 성적 보는 것 정도야, 네이버 로그인하는 것만큼 쉬우니까.”

이 녀석은 컴퓨터도 잘 다루는 편이었어요. 몇 달 전 누가 학교 서버 트래픽을 몰래 훔쳐 쓰다, 그만 서버를 터트려 버리는 바람에 며칠 동안 학교 홈페이지가 먹통이 된 적이 있었죠. 그때 학교 방송에 나와 전교생에게 사과하던 바로 그 목소리가 바로 지금 휴대전화에서 들리는 이 목소리였어요.

“마침 모니터에 띄워 놨는데 한 번 읽어 볼까?”

녀석은 이런 식으로 사람을 갈구는 것에 대해 상당히 능숙한 편이에요. 처음에는 화가 자주 났던 것에 비해선 지금은 그냥 무덤덤한 편이긴 하지만, 그래도 공부 잘하는 녀석이 성적으로 자신을 비꼬는 건 여간 기분이 나쁜 게 아니었죠. 그리고 그것보다 더 짜증이 나는 건 그런 소리를 들어도 별 달리 받아 칠 말이 없다는 것이었어요. 어찌 되었건 내가 재수를 심각하게 생각할만한 점수인 건 사실이니까요.

“시끄러워, 남의 개인정보나 뒤지는 나쁜 자식 같으니…. 어쨌든 난 집에서 밥 잘 먹고, 똥 잘 싸고, TV 잘 보고, 게임 잘하고, 잠 잘 자고 있으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다소 불만이 섞인 퉁명한 말투로 말했지만, 지은이는 그런 제가 오히려 귀엽다는 듯이 웃음이 터졌어요.

“미안, 미안. 근데 너 아직도 자취하고 있니?”

“그래.”

차마 정체불명의 떡대랑 동거 중이라는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진 않았죠.

그런데 저의 대답을 끝으로 잠깐의 정적이 흐르기 시작했어요. 이런 일이 있을 땐, 대부분 지은이가 무언가 제가 할 말을 기다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죠. 아직 자기가 기대하는 반응이 안 나왔거든요. 하지만, 이제 진짜로 더는 할 말이 없는 걸 어떡해요? 결국, 눈치싸움을 참다 못한 내가 먼저 입을 열었어요.

“도대체 무슨 말을 더 원하는 거야? 세영고등학교 3학년 4반 27번 정연석은 크리스마스 연휴를 현재 집에서 혼자 보내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예정입니다. 됐냐?”

그러자 지은이가 한숨을 크게 쉬더니, 곧이어 혀를 끌끌 차는 소리가 들렸어요.

“누가 자신에게 안부를 물어보면, 그쪽도 예의상 한 번 물어봐 주는 게 보통 아니니?”

‘내가 왜 네 안부까지 궁금해야 하는데’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고는, 그냥 예의상 물어봐 주기로 생각했어요. 안 그러면 제 안부가 상당히 피곤해질 테니까요.

“하아, 진짜 가지가지 하는구먼…. 그래서 요즘 지은 양께서는 어떻게 지내고 계십니까?”

“그게 원래 가족들이랑 크리스마스 때 3박 4일로 제주도에 갈 예정이었거든. 근데 오늘 갑자기 동생이 감기몸살로 드러눕는 바람에 여행도 취소되고 그냥 집에 있어. 그렇다고 특별한 약속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녀석은 기다리기라도 한 듯 그대로 말 들을 쏟아내기 시작했어요.

“참 안되셨네요. 동생분의 쾌유를 빕니다.”

저는 예의상 짧게 감상평을 말했죠. 그러더니 또다시 두 번째 침묵이 시작되었어요. 이번에 먼저 입을 연 건 녀석이었어요.

“그것뿐이야?”

“그럼 위문편지라도 적어 보낼까요?”

“아니, 뭐, 그런 건 아니고…. 하여튼 그냥 심심해서…. 그러니까 이런 짓을 하는 거겠지만. 그렇다고 딱히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지은이가 우물쭈물 거리며 말끝을 흐리는 걸 듣고 있자니, 이제야 녀석이 왜 나한테 전화했는지 알 것 같았어요. 결국엔 자기가 심심하니까 놀아달라는 말이었거든요. 이 녀석은 머릿속 회로가 뭔가 엄청나게 꼬여 있는 모양인지, 직접적으로 말을 하지 못하고 항상 빙빙 돌려서 이야기하는 편이에요. 그게 얼마나 심한 정도냐면, 저번에 자기 생일 때 선물 대신 현금으로 달라는 말을 현대 사회 화폐의 의미니 뭐니 하면서 생일 일주일 전부터 밑밥을 깔기 시작할 정도니까요. 전 뭔가 아주 어려운 문제라도 푼 것 같은 뿌듯한 기분으로 녀석에게 물어보았어요.

“그럼 오늘 우리 집에 올래?”

녀석은 잠시 망설이는 척했지만, 어차피 대답이야 뻔했죠.

“뭐, 그것도 나쁘진 않겠네.”

1시간쯤 지나서 도착할 거라는 말을 남긴 채 지은이는 전화를 끊었어요. 그래도 오늘 같은 날 피곤할지 연정 심심하게 보내진 않겠다고 생각했죠.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어요.

“아.”

그리고 그걸 듣고 나서야 내가 지금 어떤 마법사와 한집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죠.

지은이가 만약 집에서 시르크와 부닥치게 됐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상상도 할 수도 없었고, 하기도 싫었어요. 무슨 짓을 해서라든 그것만은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지금 갑자기 녀석에게 밖에서 만나자고 하면, 의심 많은 그 녀석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집으로 쳐들어올 게 분명했어요. 결국은 시르크 쪽에서 해결을 봐야 했죠.

그렇지만 특별히 볼일이 없는 이상 절대로 밖으로 나가지 않는 시르크의 성격상, 이 인간을 집에서 내쫓는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어요. 결국, 생각할 수 있는 차선책이라고는 저희 집 지하실에 시르크를 반강제적으로 가두는 것뿐이었죠. 어차피 시르크도 여기서 할 일이 있으니까, 그다지 불평을 하진 않더라고요. 아니, 솔직히 인간적으로 양심이 있으면 불평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그 인간 먹여 살리고 있는 게 지금 몇 달째인 데 말이에요.

"알겠지? 부탁이니까 절대 위로 올라오지 마. 무슨 일 있으면 반드시 문자로 하고. 밥은 시간 되면 넣어줄게."

저는 방금 한 말을 포함해서 지금 똑같은 걸 5번째 반복하고 있었어요. 단지 달라진 건 분명히 처음에는 강압적인 태도로 세게 나갔었는데, 어느샌가 이젠 거의 애걸복걸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죠. 시르크가 지긋지긋한 모양인지 손사래를 치며 말했어요.

“알았으니까 그만 좀 해! 솔직히 난 네가 그 여자애랑 같이 비디오 게임을 같이 하던, 같이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나눠 먹던, 아니면 설사 네 방 침대에서 새로운 생명의 역사를 이룩한다고 해도 관심 없으니까"

"마지막 말은 무슨 의미냐?"

"그러니까 음… 웬만해선 보험으로 콘돔은 꼭 준비하는 편이 좋다는 말이야."

저 인간이 원래 처음에는 안 저랬는데, 인터넷을 하기 시작하더니 거기서 뭘 배우고 있는 모양인지 약간 말하는 게 바뀌고 있었어요. 확실히 인터넷 같은 건 너무 자주 하면 안 되는 것 같다고 생각했죠.

“이상한 소리 하지 마. 하여튼 간다.”

솔직히 지금도 시르크가 별로 못 미더운 상태였지만, 할 수 없이 지하실 계단을 천천히 올라갔어요. 그렇다고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에요. 그러다 문득 시르크가 하려고 하는 게 궁금해져서 뒤를 돌아보았어요.

“근데 지금 하는 게 무슨 실험이야?”

“차원분리화 현상에서 발생하는 비세레나이트적 동기화 반응의 증폭을 이용한 좌표 설정이 가능해진 소규모 공간이동.”

확실히 알 수 있었던 건, 제가 방금 질문 했던 게 쓸데없는 짓이라는 것이었죠.

시르크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더니 기분이 좋은 듯 휘파람을 불었어요. 저 인간은 이 집 지하실을 좋아했어요.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어두컴컴한 조명이 라셀라 지하에 있는 자신의 작업실이 생각나게 하기 때문이라고 시르크는 말하곤 했죠.

저는 그 모습을 보는 걸 마지막으로 지하실 문을 닫았어요. 그리고 미리 손에 가지고 있었던 자물쇠로 지하실 문을 잠갔죠.

“그렇다고 감금까진 할 필요는 없잖아!"

시르크가 볼멘소리로 외치는 것이 들렸어요.

“보험이야!”

그리고 말하고는 주변을 한 번 둘러보았어요. 누가 남자 혼자… 아니, 둘이서 사는 집 아니랄까 봐 집안 꼴이 완전 개판이었죠. 여기저기 너부러져 있는 수컷들의 허물들을 보면서 입에서 나오는 건 한숨뿐이었어요. 일단 지은이가 오기 전까지 간단한 집 정리 정도는 해야 하겠다고 생각했죠. 시르크의 물건들을 어디론가 숨기는 것도 중요했지만, 적어도 녀석에게 여기가 사람이 사는 곳이라는 것 정도는 어필할 수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어요.

“참나, 크리스마스 이브에 별 쇼를 다하고 있네….”

그렇게 시작한 집 정리가 거의 마무리 되어갈 무렵, 초인종 벨 소리가 울렸어요. 저는 손에 들고 있던 시르크의 옷가지들을 일단 제 옷장 서랍 깊숙한데 대충 쑤셔 넣은 후, 서둘러 현관으로 나왔죠.

“안녕.”

문을 열자 지은이가 반가운 표정으로 인사를 보냈지만, 전 순간 녀석을 보고는 황당한 나머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분명히 녀석은 녀석이긴 한데, 항상 묶은 머리에 체육복 차림으로 학교를 돌아다니던 그 녀석과는 달랐으니까요.

허리까지 길게 늘어뜨린 천연 갈색으로 염색한 생머리 정도는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어요. 수능 끝난 고3이니까요. 쌍문동 주택가하고는 뭔가 어울리지 않는 난해한 상의 후드 패션도 괜찮았어요. 수능 끝난 고3이니까요. 하지만, 녀석의 하체 쪽은 약간 문제가 있어 보였어요.

“너 바지가 그게 뭐야?”

제 입에서 인사말 대신 나온 말이었죠. 녀석이 입고 있는 건 허벅지가 반 정도가 아니라, 아예 거의 전부가 드러나는 핫팬츠였기 때문이었어요. 밑에서부터 매끈하게 올라오는 검은색 스타킹 라인이 뭔가… 솔직하게 말해서 보기는 좋았어요. 네, 그건 인정하는데, 어쨌든 시선 처리하기가 정말 난감하더라고요. 일단 시야를 90도 밑으로 내릴 수가 없었으니까요.

“이게 어때서?”

녀석이 되물었어요.

“그게 지금 친구 집에 올 때 입는 바람직한 복장이냐?”

“그러면 정장이라도 입고 와야 하는 거니?”

“됐고, 입은 이유라도 한번 물어보자.”

“원래 가족여행 갈 때 입으려고 했던 건데…. 막상 사놓고 가만히 두고 나가기도 그래서, 그냥 한번 입고 나와 봤어.”

녀석이 쑥스러운 듯 이야기했어요.

“그런 걸 가족여행에 입고 나갈 생각을 하다니…. 너희 부모님은 꽤 개방적이신 분들인가 보구나.”

“남의 가족사까지 이러쿵저러쿵 말하지 마.”

“남의 수능 점수 보는 건 괜찮으시고요?”

그리고선 다시 지은이를 훑어보았어요. 자세히 보니 얼굴도 약간 뭔가 화사한 기운이 도는 게, 평생 그런 거 안 하고 다닐 것 같았던 녀석이 화장도 조금 한 듯싶었어요. 볼 터치 같은 건 기본이고 눈이 좀 커진 걸 보니 아이라인까지 그린 모양이었죠. 저는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녀석의 얼굴을 뻔히 쳐다보았어요.

“뭘 그렇게 신기하게 쳐다봐? 나 외계인 아니거든? 야동도 가끔 몰래 보고, 수다도 몇 시간씩 떨어보고, 가게 물건도 한번 훔쳐보고, 뷔페에서 무전취식하고 도망도 가는 그런 평범한 사람이란 말이야.”

얼굴을 붉히며 조금씩 시선을 피하던 녀석의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어요. 그래도 이 녀석도 여자인데 한번 쯤 꾸며보고 싶었던 모양이에요. 

그런데 잠깐 녀석의 말을 가만히 듣고 보니 뭔가 이상한 게 있었어요.

“네가 말한 것 중에 몇 개는 범죄가 들어 있는 것 같은데.”

“괜찮아. 계산상 내가 저질렀다는 증거 같은 건 없을 테니까.”

“자랑이냐?”

그때 지은이의 손에 들고 있던 포장된 상자 하나가 눈에 띄었어요.

“그건 뭐야?”

“크리스마스 케이크. 오는 길에 사왔어.”

“훔친 건 아니지?”

“응.”

“들어와.”

집 안으로 안내하자, 녀석은 신고 있던 어그부츠를 아무렇게나 내팽개치고는 안으로 들어갔어요. 벌써 시작이었죠. 저는 한숨을 쉬며 녀석의 신발을 정리하고는 뒤따라 들어갔어요.

그런데 녀석이 신발을 벗어서 그런지 전체적인 다리 라인이 아까부터 훨씬 더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갑자기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죠. 녀석은 그런 저의 상황을 아무것도 모른 채 집안 여기저기를 둘러보더니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어요.

“너희 집은 지금이나 예전이나 똑같네. 딱 사람이 살 수 있는 최소한의 환경 정도만 유지되어있으니.”

“그래도 남자 두, 혼자 사는 집치고는 깔끔한 편이잖아.”

정확히 칭찬인지 욕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후자로 받아들였죠.

“그나저나 우리 집에 놀러 온 것도 꽤 오랜만이지?”

작년까지 만해도 저희 집에서 둘이 자주 놀곤 했었는데, 3학년이 되고 나선 꽤 뜸해진 상태였어요. 물론 제가 수험생이 된 것도 이유가 될 수 있겠지만, 당연히 결정적인 원인은 시르크가 이 집에서 눌러살았기 때문이었죠.

“아마 5월쯤에 숙제하러 온 이후로 한 번도 없었을걸. 난 또 네가 이상한 취미 같은 게 생겨서 일부러 안 부르는 줄 알았더니, 오늘 보니까 그런 건 아닌 모양이네.”

별 수상한 점을 찾지 못한 녀석이 한 번 떠보는 듯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저를 흘겨보았어요. 가슴이 철렁하긴 했지만, 곧 평정심을 되찾았죠. 굳이 따지자면 이상한 취미가 생긴 건 아니고 이상한 사람이 생겼으니까요.

“믿어주셔서 감사할 따름이네요.”

“그래도 혹시 모르지. 지하실에 뭔가 엄청난 것을 숨겨 놨을지도… 남모르게 숨겨놨던 이상한 만화나 비디오라던가.”

지은이는 이번엔 지하실 문을 잠그고 있는 자물쇠를 유심히 쳐다보았어요. 그래도 속으로는 괜찮다고 끊임없이 대뇌였죠. 제가 지하실에 숨겨 놓은 건 이상한 만화나 비디오가 아니라 이상한 사람이었으니까요. 

녀석은 거실을 한 바퀴 휙 돌더니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어요. 그리고는 긴 다리를 앞으로 내밀어서 살짝 꼬았죠. 안 그래도 부담스러웠던 녀석의 다리가 미친 듯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어요. 그쪽으로 시선을 두지 않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며 버텼지만, 오히려 그게 더 부자연스러워 보일 정도였어요.

“너 화장실 가고 싶어?”

그런 저의 표정을 보더니 녀석이 고개를 갸우뚱거렸어요. 얘가 진짜 모르는 건지,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건지 헷갈리기 시작했죠. 제가 저희 집에서 화장실 가고 싶으면 그냥 가면 되지 왜 이러고 있을 이유가 없으니까요.

“아니.”

“근데 표정이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에요.”

도저히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제 방 책상에 널브러져 있는 작은 담요 하나를 녀석에게 건네주었어요.

“자, 이거.”

“이게 왜?”

“무릎 담요잖아.”

“그러니까 왜?”

“추우니까.”

사실 지하실에 있는 시르크가 얼어 죽지 않기 위해서 보일러를 펑펑 돌리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춥지는 않았어요. 저도 겉옷 하나만 입고 있었고요. 솔직히 말해서 춥지 않다기보다는 조금 더웠다가 더 알맞은 표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지경이었죠.

“별로 안 추운데?”

“잔말 말고 덮기나 해, 좀!”

결국, 저는 담요를 막무가내로 녀석에게 던졌어요. 녀석은 저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뭔가 구시렁거리더니, 결국엔 무릎에 살며시 덮었죠. 그걸 보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어요. 하마터면 오늘 하루 동안만 제 수명이 한 달 정도 줄어버릴 뻔했으니까요.

TV에서는 때마침 수능 입시 지원 경향에 대한 뉴스가 하고 나오고 있었어요. 서울대부터 시작해서 각 상위권 명문대학의 평균 경쟁률이 차례대로 나열되고 있었죠. 예, 알고 있어요. 저랑은 상관없는 이야기라는 거 말이에요.

“넌 원서 어디 넣었냐?”

막상 물어보긴 했지만, 사실 지은이에게도 의미 없는 내용이긴 했어요. 이 녀석 정도면 우리나라 어디에 있는 대학교라도 골라서 갈 수 있는 성적이니까요. 경쟁률 같은 건 아무래도 괜찮겠죠.

역시 예상대로 녀석은 별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말했어요.

“전부 집 가까운데 넣었어.”

그러면서 녀석은 자신이 원서를 넣었던 대학교를 몇 개 알려주었죠. 저는 그걸 듣고는 약간 의아해했어요. 물론 녀석의 집에서 가기도 편하고 학교 그 자체도 꽤 이름도 있었지만, 지은이의 수준에는 약간 못 미치는 대학들이었거든요.

“학교마다 프로그램을 다른 걸 쓰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똑같은 컴퓨터에 똑같은 키보드로 똑같은 걸 배울 텐데, 뭐 때문에 기숙사 들어가서 밥 해먹고 빨래하고 그런 생고생을 내가 왜 하겠니? 학교도, 사람도 집 가까이 있는 게 제일 좋은 거야.”

“그래, 사람도 가까워야 나처럼 부려 먹기 쉽겠지.”

“부려 먹기는 무슨, 불쌍해서 놀아줬더니….”

“예 예, 어련하시겠습니까.”

“근데 넌?”

아무렇지도 않은 듯 가볍게 물어본 녀석과는 달리 제 얼굴은 꽤 심각한 표정이었어요. 전 마감일까지 계속 고민하다가 겨우겨우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원서를 넣었거든요.

“후우, 뭐, 대충 어떻게 억지로 밀어 넣었는데 잘 될지는 두고 봐야겠지. 뭐, 안 되면 그냥 네 말대로 재수나 해야 할지도….”

전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어요. 녀석이 그런 절 보더니 어깨를 토닥여 주더라고요. 역시 아무리 귀찮게 굴어도 친구가 이래서 좋은 것 같았어요. 위로라도 받을 수 있으니까 말이에요.

“재수하면 연락해, 과외 정도는 싼 가격에 해줄 용의는 있으니까.”

착각이었나 보네요.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설사 재수를 한다고 해도 녀석에게 과외를 받을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제가 왜 제 돈까지 내면서 이 녀석에게 시달려야 할 이유를 모르겠으니까요.

“근데 우리 계속 이러고 있을 거니? 나 말인데, 여기서 TV나 보려고 20분 동안 걸어온 건 분명히 아니었다고 생각하거든.”

나란히 소파에 앉아서 TV를 보는 것도 10분 정도가 지났을 때였어요. 지은이가 심심한 모양인지 칭얼거리기 시작했죠. 저는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저번 주에 산 좀비 게임 타이틀 하나를 집어 녀석에게 보여주었어요.

“이거 해볼래? 이번에 나온 신작인데.”

“좋아.”

어차피 저희 집에서 노는 건 뻔했어요. 특별히 뭔가 신기한 게 있는 것도… 아니 ‘누구에게 보여 줄 수 있을 만한’ 신기한 게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그냥 같이 비디오 게임이나 하는 게 다였죠. 저는 게임기 패드 하나를 녀석에게 건네주었어요.

“저거 뭐야.”

로드 화면에서 슬롯 하나가 채워져 있는 것을 보고 지은이가 그것을 손으로 가리켰죠.

“뭐긴 뭐야, 세이브 파일이잖아."

그건 며칠 전에 시르크와 같이 한 끔찍한 세이브파일이었어요. 분명히 플레이 시간은 6시간이 넘었는데 진행은 아직 2스테이지 중반 정도였죠. 갑자기 그 지옥 같았던 6시간이 조금씩 떠오르기 시작했어요. 저는 그 기억 때문에 얼굴이 서서히 굳어져 갔죠,

"근데 어째서 기록된 플레이어가 2명인 거야?”

왜 이렇게 진행이 느렸냐면, 그 인간은 이것만 할 때마다 데드라이징 주인공이 빙의 되기 때문이었어요. 2, 3대만 맞으면 그대로 사망하는 게임에서 그 인간은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좀비 무리에게 뛰어들어갔죠. 오죽하면 전 그때 차라리 게임 속 내용이 현실이었으면 더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였어요. 적어도 현실에서의 시르크는 죽어도 다시 컨티뉴가 불가능할 거니까요. 만약 그 인간이 좀비가 된다면, 제일 먼저 그 정신병자를 죽일 거 에요.

“친구랑 같이 했으니까 그렇지.”

“누군데?”

“네가 모르는 사람이야.”

그렇다고 누군지 가르쳐 줄 생각도 없었고요.

“남자야, 여자야?”

“남자.”

“진짜야?”

“그래.”

“하긴, 네가 여자랑 단둘이 있을 리가 없지.”

“한 대 맞을래?”

그렇게 같이 게임을 하기 시작했는데, 확실히 녀석이 머리가 좋다 보니 이런 쪽에 센스도 꽤 있는 편이더라고요. 저는 그때야 알았죠. 이건 단순히 무서운 게임이 아니라, 무섭고 재미있는 게임이라는 걸 말이에요. 시르크와 같이 할 때는 사실 공포밖에 못 느꼈거든요. 어쨌든 그 인간하고는 차원이 다른 속도로 진행해나가기 시작했어요.

벌써 2스테이지 거의 막바지쯤 왔을 때였죠. 클리어하기 직전 문 하나만을 남겨둔 상황이었어요.

“문 연다.”

저는 다소 긴장 섞인 말투로 지은이에게 말했죠.

"빨리하기나 해. 스테이지 흐름으로는 여기에 극적 효과를 넣어야 하는 게 당연한 거니까."

그냥 아무 말 없이 참았어요. 아마 녀석이 이렇게 맥을 끊는 건 앞으로도 몇 번 더 일어날 일일 테니까요. 저는 목구멍에 침을 한 번 넘기면서, O 버튼에 살며시 손가락을 갖다 대었어요.

-펑!

“꺄악!”

무언가 폭발하는 소리와 함께 어느 여성의 비명이 거실 전체에 울러 퍼졌어요. 하지만, 두 개다 TV에서 나오는 효과음은 아니었죠. 전 아직 버튼을 누른 게 아니었거든요. 화면에는 아직 문이 여전히 닫혀 있었고요. 그리고 분명히 그 2개 중 하나는 제 왼쪽 귀 바로 옆에서 다이렉트로 들리는 소리였어요.

"지금 뭐하세요?"

전 제 몸 전체에 문어처럼 엉겨 붙어 있는 지은이를 밥 위에 앉아있는 날파리 보듯 쳐다보았어요. 극적 효과니 뭐니 잘난 척할 때는 언제고 막상 무서우니까 들러붙는 녀석을 보고는 혀를 끌끌 찼죠.

그렇게 손에서 놓친 패드를 찾기 위해 고개를 밑으로 숙이는 순간, 갑자기 얼굴이 불타오르는 것처럼 달아올랐어요. 제가 잡고 있었던 건 게임기 패드가 아닌 지은이의 허벅지였거든요.

“저리 가, 임마. 무슨 일인지 확인하고 올게.”

재빨리 들러붙은 녀석을 떨쳐내고는 서둘러 거실 밖으로 나왔어요. 허벅지의 부드러운 감촉이 계속 손에 아른거렸죠. 

예, 맞아요. 저 사실 여자 다리에 대한 페티… 아니 관심이 조금 있는 편이에요. 하지만, 그게 비정상은 아니잖아요. 이제 막 성인이 되는 남자에게 그런 것들에 대해 흥미가 없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니에요? 물론 그걸 강제로 막 어떻게 하려고 하면 그게 범죄는 되겠지만, 전 순수하게 그것에 대한 단순한 시각적 효과에만 관심이 있는 거라고요. 뭐, 한 번 만져보니 그렇게 나쁜 건 아닐 것 같아 보이지만 말이에요. 

어쨌든 방금 들었던 폭발음의 정체도 확인할 겸, 뭔가 이 복잡한 기분이나 진정시키기 위해서 현관문을 열었어요.

그런데 문을 막상 열고 보니 제 시야에 보이는 건 제가 익히 봐왔던 보통의 동네와는 상당히 거리가 멀었죠. 저희 집을 둘러싸고 있던 주택들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고 주위에는 개미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어요. 사방을 아무리 둘러봐도 끝도 없는 지평선만 보였을 뿐이었죠. 드넓은 보랏빛 황무지에 저희 집 하나만 달랑 세워져 있었어요. 저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문을 닫고 다시 집안으로 들어갔죠.

“씨발, 저게 도대체 뭐야?”

 문을 닫고 나서야 깜짝 놀란 저는, 갑자기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가슴이 터질 듯이 쿵쾅거리기 시작했어요. 제가 본 게 무엇인지 도저히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죠. 저는 서둘러 제 기억하고 있는 이미지들과 방금 제가 본 이미지를 매칭시키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아무리 떠올려 봐도 제가 본 건은 이 지구 상에선 존재할 리가 없는 것이었죠. 그리고 그 사실이 저를 더욱더 쇼크 상태로 몰아넣고 있었고요.

 “후우….”

 가까스로 심호흡하면서 침착을 되찾고, 지금의 상황을 정리해보기 시작했어요. 용의자를 추리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죠. 

“저 또라이 새끼가….”

전 당장 지하실의 자물쇠를 열고는 그 밑으로 내려갔어요.

지하에는 시르크가 뭔가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지하실 바닥에 페인트로 그려놓은 마법진을 바라보고 있었어요. 마법진 중앙에는 조그마한 상자 하나가 올려져 있었죠.

“지금 뭐하는 거야?”

“과정을 원해, 결과를 원해?”

“결과만.”

그 인간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말했어요.

“실패했어. 아니, 실패라기보다는 뭔가 다른 것이 성공하고 말았지. 어쨌든 반응은 일어났으니까.”

“그래 어쩐지 바깥세상이 아주 성공적으로 변해있더라.”

제가 비아냥거리자 시르크가 저를 쳐다보았어요.

“무슨 소리야?”

“따라와.”

저는 지은이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시르크를 바깥으로 끌고 나왔어요.

“지금 이 상황 좀 설명해줄래?”

시르크는 집을 둘러싼 끝없이 펼쳐진 보라색 평원을 보고는 처음엔 약간 놀라는 표정을 지었어요. 그러더니 한참을 뭔가 생각하더니, 발밑에서 굴러가고 있던 돌멩이 하나를 집었죠. 그 인간이 뭔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하자 돌멩이에서 푸른 색 빛이 감돌며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어요. 그걸 보더니 시르크가 고개를 끄덕였죠.

“아마 여긴 반계일꺼야.”

“반계?”

“펠릭스의 반위상 공간이라고도 하는데…. 일단 설명은 나중에 하고. 전화기 한번 꺼내볼래?”

전 주머니에 있던 휴대전화를 꺼내보았어요. 별 이상은 없어 보였죠.

“송수신은 계속 잘 되고 있지? 아마 집 안에 전기도 잘 통하고 있을 거야. 단지 집 전체의 위상만 바뀌었을 뿐이니까. 보기에만 다를 뿐이지 여긴 여전히 도봉구 쌍문동 114-1번지니 걱정하지 마.”

시르크는 그렇게 말하곤 신기한 듯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어요.

 “그나저나 펠릭스도 결국 찾는 걸 포기한 반계를 여기서 직접 보게 될 줄이야…. 완전 소 뒷걸음치다 쥐 잡은 격이잖아. 난 역시 될 놈일지도 몰라.”

그 인간은 뿌듯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쥐라기보다는 오히려 잘못 건 전화에 가까웠어요.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 번호는 통화 중이 아니었고요.

“그래서, 제대로 되돌릴 수는 있는 거야?”

물론 역사적인 발견을 한 건 축하해줘야 할 일이 맞겠죠. 하지만, 문제는 왜 하필 지금 그런 걸 찾았냐는 것이었어요.

“처음 보는 거긴 하지만, 별문제 없을 거야.”

시르크는 자신 있다는 표정으로 빙긋 웃으며 저에게 말했어요.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해요. 웃는 얼굴에 침을 뱉을 수는 없잖아요.

“알았어. 일단 다시 지하실로 들어가.”

어쨌든 별수 없이 이건 그 인간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고, 이제부터는 이 상황을 어떻게 지은이에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가 문제였어요. 저 녀석 상대로 납득할 수 있을 만한 적당한 대체물을 찾는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죠. 조금 전 폭발음이 꽤 큰 편이었거든요. 

하지만, 사실대로 말하는 것 외에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어요. 저는 일단 숨 호흡을 한 번 하고 비장한 기분으로 거실 안으로 천천히 진입했죠.

“무슨 일이야?”

“아, 그게…. 옆집에서 그, 뭐냐, 인테리어 공사 중이더라고.”

“인테리어 공사하는데 왜 굉음이 들려? 너트에 폭탄이라도 설치된 모양이니?”

솔직히 방금 제가 한 말이 개소리인 건 저도 알고 있었어요. 누가 단순히 인테리어만 바꾸는 데 건물 철거하는 소리를 내겠어요. 하지만, 애초에 저에겐 말이 되고 안 되고는 아무런 상관없었어요.

“글쎄?”

“밖에 뭔가 있지?”

“그냥 공사라니까.”

제가 대충 계속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하자, 녀석이 냄새를 맡은 모양인 듯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말했어요. 예전 같으면 지금 이 상태에서 녀석을 막을 방법은 없었지만, 지금은 딱 한 가지가 있긴 했어요.

“네가 계속 그러니까 더 이상하잖아. 내가 한 번 확인해봐야….”

전 그때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녀석의 어깨를 잡고 강제로 소파에 밀어붙였어요. 그리고는 서로의 얼굴이 거의 닿을락 말랑한 거리에서 진지한 표정으로 녀석의 눈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죠. 깜짝 놀란 지은이는 입술을 잔뜩 오므린 채 숨도 안 쉬고 버티고 있었어요.

“내 말을 믿어.”

솔직히 그런 녀석의 표정과 방금 내뱉은 멘트가 상당히 부담스러웠지만 여기서 물러나면 끝장이었어요. 어떻게든 지금 기선을 제압해놔야 앞으로도 상황을 통제하기가 그나마 수월해질 테니까요. 결국, 얼굴이 새빨개진 지은이가 참지 못한 듯, 시선을 황급히 옆으로 돌리며 거친 숨을 토해냈어요.

“하아, 하아….”

이게 알아낸 지 얼마 안 된 사실이긴 한데, 녀석의 얼굴에 엄청나게 가까이 붙은 다음에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으면, 한동안은 제가 시키는 대로 군말 없이 고분고분 따르더라고요.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누가 자기 얼굴 가까이에서 숨소리 내는 게 싫어하는 모양인가 봐요.

“알았어.”


해냈다는 안도감이 솟아오르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방금 넘어간 건 겨우 첫 번째 고비일 뿐이었고, 이제부터가 시작이었어요. 시르크가 여길 원상태로 돌려놓기까지 얼마가 걸릴지도 모르고, 전 그때까지 지은이를 묶어놔야 했으니까요. 전 다시 녀석에 옆자리에 앉아서 다시 게임기 패드를 잡았죠. 지은이는 아직 정신을 못 차린 모양인지 멍한 표정으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어요.

“하던 거나 계속하자. 엔딩은 봐야지.”

“어? 그래….”

그나마 전기가 통하고 있다는 게 다행이었어요. 어쨌든 뭐라도 하면서 시간을 보낼 수 있으니까요.

그렇게 또다시 시간이 꽤 흘렀고, 어느새 TV 화면에는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있었어요. 시간은 저녁 7시였죠. 끝까지 깨는데 6시간 정도 걸린 거에요. 그리고 이제 앞으로 시르크하고는 협동심을 요구하는 게임 같은 건 다시 하지 않기로 결심했어요. 그건 확실히 시간 낭비라는 걸 알았거든요.

“나 잠깐만….”

전 일단 화장실에 간다는 핑계로 스리슬쩍 거실에 나왔어요. 바깥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서요. 그래도 시간이 꽤 지났는데 지금 정도면 해결이 되어 있지 않을까 생각했거든요. 기대감 반 두려움 반으로 현관문을 살며시 열어보았죠.

“아나….”

사실 두 번째로 보니까 별로 놀랍지도 않았어요. 어차피 저에게 보이는 거라고는 지평선 너머로 땅을 가득 채우고 있는 밋밋한 보라색 돌덩어리들뿐이었으니까요. 눈알 3개에 팔다리가 6개인 괴생명체가 돌아다니는 것도, 땅이 갈라지고 뒤틀리는 엄청난 지각활동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었어요. 시간이 멈춘 듯 그대로 있었을 뿐이었죠.

다시 집안으로 돌아왔어요. 게임 하나를 한 번에 처음부터 끝까지 해서 그런지 무척이나 피곤했지만, 그렇다고 마냥 쉬고 있을 수만은 없었어요. 어쨌든 지은이가 절대로 집 밖으로 나갈 생각을 하지 않게 만들기 위해서 주도권은 제가 잡고 있어야 하니까요. 마침 시간도 저녁때고 하니 밥이나 먹으면서 버텨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밥 먹을 거지?”

부엌에서 목만 내밀고는 녀석에게 물어보았어요.

“어? 응.”

지은이의 표정을 보니 아직 정신줄을 잡지 못한 모양이었어요. 전 앞으로 더욱더 이 방법을 자주 써먹어야겠다고 생각했죠. 저렇게 가만히 있는 녀석을 보니까 속이 다 편해지니깐 말이에요. 

“나도 도와줄까?”

 하지만 그렇게 다시 부엌으로 가려는 걸 지은이가 붙잡았어요. 현관문이 바로 보이는 부엌에 녀석을 두는 건 위험한 일이었죠. 잠시 뜨끔하긴 했어도, 곧 적절한 대답이 머릿속에서 떠올랐어요.

 “그냥 가만있어. 네 녀석 요리 실력 정도야, 그때 그 실습수업 이후로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으니까.”

다소 억지스런 대답이었긴 하지만, 그건 정확히 진실을 바탕으로 한 대답이었어요. 그날의 그 참사를 잊는다는 건 그것에 사용된 재료에나 그것을 먹은 시식 자에게나 예의가 아니었으니까요. 

냉장고 앞에 선 저는 무엇을 만들어 먹어야 할지 상당히 고민했어요. 되도록 아주 천천히 만들고, 아주 천천히 먹었어야 하니까요. 하지만, 막상 냉장고를 열어보니 그러기엔 조금 어려울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사실 자취생에게 슬로우 푸드는 엄청난 사치거든요. 결국 ,그 안에 있는 모든 음식재료를 전부 꺼내서 싱크대 위에 올려놓았어요. 이 많은 걸로 뭔가를 만들면 어쨌든 오래 걸리겠죠.

“아직 안 끝났나….”

저녁 준비를 하면서 수시로 현관문을 열어보았지만, 하지만 저 빌어먹을 보라색 돌덩이들은 좀처럼 제 시야에서 사라질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결국, 시르크를 재촉하기 위해서 다시 지하실로 내려갔죠.

“왜 아직 그대로인지 설명 좀 해줄래?”

시르크는 지하실 구석에 처박혀 진지한 표정으로 뭔가를 열심히 계산하고 있었어요.

“좀 더 끈기를 갖고 기다려봐. 나도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그래도 뭔가 빼곡하게 적혀 있는 종이들이 지하실 여기저기에 쌓여 있는 것을 보니, 시르크도 꽤 노력을 하고 있는 모양인 것 같았어요. 그래도 저렇게 진지한 표정을 보고 있자면 , 그나마 뭔가를 연구하는 학자로 보이는데, 평소에는 왜 그렇게 정신병자 같은지 모르겠네요.

“나는 며칠이고 기다릴 수 있겠는데, 누구는 안 될 것 같아서 하는 말이잖아.”

저야 집에서 며칠이고 먹고 싸고 자기만 해도 별 상관없었지만, 이제 밥이라도 먹으면 저는 더 이상 녀석을 붙잡아둘 방법이 없었어요. 녀석이 차라리 남자였다면 여기서 자고 가라면서 묶어놓으면 되지만…. 도대체 왜 이렇게 쓸데없는 것들에만 저 녀석이 여자라는 걸 느끼게 만드는지 미칠 지경이었어요.

그렇게 원망 섞인 눈빛으로 시르크를 쳐다보자, 그 인간이 두 번째로 숨을 크게 들이쉬었어요. 왠지 이번에는 장난이 아닐 것 같았죠.

“그래, 물론 지금 이 지경이 된 게 내 잘못인 건 알아. 그건 사과할게. 근데 이 마법이라는 게 말이지, 그냥 낙서 좀 해주고 ‘호이호이얍’하면 ‘뾰로롱’하면서 막 먹을 게 생기는 그런 게 아니야. 너 말이야, 마법으로 불 한번 붙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지 가르쳐 줄까? 일단 불을 붙이는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게 이론적으로 가능한 환경인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서 그 공간 안에 있는 2,3,5,6,7번의 입자의 분포농도를 측정해야 해. 그런 다음 3,6번 입자의 공멸화현상을 이용해서 발화점까지 온도를 높인 다음에 2,5,7번 입자의 인공적 강제결합으로 생기는 아주 약간의 스파크로 불을 붙이거든. 물론 그동안 머릿속으로는 그 과정에서 필요로 하는 14번의 거지 같은 연산을 필사적으로 하고 있어야 하는 게 제일 중요해. 거기서 하나라도 뭔가 잘못되면 목표물이랑 같이 내가 통구이가 될 수 있기 때문이야. 솔직히 생각해보면 아주 쓸데없는 일이긴 해, 아무 생각 없이 라이터 부싯돌 한번 돌리면 끝날 일이거든. 어쨌든 불 한번 붙이는데 그 번거로운 짓을 하나부터 끝까지 전부 다해야 하는데.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알겠지?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해도 거기에 같이 움직이는 수십 개의 변수를 일일이 전부 체크해야하니까 말이야. 그리고 넌 크리스마스 이브에 여자애랑 단둘이서 오붓하게 즐거운 시간이라도 보내기라도 하지, 난 지금 지하실에 처박혀서 돈 받고 실험 하청이나 받는 애들처럼 닥치고 계산이나 해야 하는 내가 더 불쌍해 보이지 않아?”

저는 일단 잠자코 시르크의 연설을 감상했어요. 이미 ‘사과할게’라는 말은 저 앞에 어디론가 사라져 존재감이 없어진 뒤였어도 말이에요.

“알았으니까, 빨리 좀 해주라. 진짜 미칠 것 같으니까.”

어쨌든 이제 시르크를 압박하는 건 그만둬야 할 것 같았어요. 이 인간도 이 인간 나름대로 뭔가 열심히 하려고 있으니까 말이에요. 그러던 중 시르크가 시계를 확인했어요.

“그러고 보니 벌써 8시가 다 되어가잖아. 빨리 밥이나 가져와.”

“지금 밥이 넘어가냐?”

또다시 이 인간을 갈구고 싶어졌지만, 미리 준비해두었던 도시락을 시르크에게 건네주고는 다시 부엌으로 올라갔어요. 그리고 서둘러 저녁상을 차리기 시작했죠. 이미 부엌에서 있었던 시간도 1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어요.

“왜 이렇게 늦게 오는 거야?”

“내가 자판기냐? 툭 하고 누르면 억하고 나오게.”

저는 녀석의 말에 대꾸하면서 수저를 건네주었어요. 

“이거 만드는 데 1시간이나 걸린 거야?”

“먹기나 해, 그냥.”

저희는 배가 많이 고팠던 모양인지 아무 말 없이 밥을 먹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한참을 오물거리기만 하던 녀석이 입을 열었죠. 

“솜씨가 꽤 괜찮은 편이네.”

“당연하지. 이래봬도 자취 생활이 몇 년째인데.”

하지만, 사실 부쩍 요리 실력이 늘어나게 된 건 최근 일이었어요. 정확히 최근 6개월 동안 말이에요. 이곳 음식에 익숙하지 않고, 입까지 짧은 그 인간을 상대하려면 보통 반찬 가지고는 어림도 없었거든요.

 “그러고 보니 네가 만든 밥 먹어보는 것도 처음이네.”

“그러게.”

생각해보니, 이 녀석이 우리 집에서 놀았던 적은 많았는데, 막상 제가 한 밥을 먹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았어요. 대부분 배달 음식을 시켜먹었었죠. 솔직히 다행이었어요. 그나마 녀석이 처음으로 먹은 제가 만든 밥이 상태가 좋았을 때니까요. 

“나중에 가끔 밥 먹으러 와도 되니?”

굳이 안 되는 건 아니었지만, 그럴 때마다 시르크를 다른 곳으로 처리해야 할 것을 생각하니 약간 귀찮은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그리고 안 그래도 지금 식비가 2배씩 드는 바람에, 추가비용까지 걱정하고 싶지는 않았죠. 

“공짜로 먹을 생각만 안 한다면야.”

“그만큼 과외 가격 깎아주면 되잖아.”

“죽을래?”

그렇게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하며 한참을 웃고 떠들었어요. 정신을 차리고 보니 시야에 보이는 건 그릇들이 텅 빈 밥상뿐이었죠.

“나 이제 가볼게.”
 
두 번째 위기는 저녁 식사 이후의 포만감 속에서 찾아오고 말았어요. 약간 방심하는 바람에 주도권을 유지할 타이밍을 놓쳐버렸죠.
 
“벌써 가려고?”
 
“지금 시간이 몇 신데…. 부모님 걱정하시니까 이제 가볼게.”
 
지은이는 서둘러 자신의 짐들을 챙기며 밖으로 나갈 채비를 하기 시작했어요. 제가 미처 다른 방법을 생각할 결음도 없이 거실에서 빠져나와 신발을 신고 있었죠.
 
“잠깐만 기다려!”
 
전 막 현관문을 열고 나가려는 녀석의 몸을 돌린 후, 양팔을 세게 부여잡았어요. 그리고 두 번째 무력진압을 시도하기 시작했죠. 이번에는 거의 잡아먹을 듯할 기세로 지은이의 눈을 노려보았어요.
 
“나 너한테 할 말이 있어.”
 
나도 모르게 입에서 제멋대로 나온 말이었지만, 녀석이 흠칫 놀라며 얼굴이 달아오르기 시작하는 걸 보니 최소한 반응을 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죠.
 
“일단 앉아봐.”
 
전 이 기세를 놓치지 않고 다시 녀석을 거실로 데려와 소파에 앉히는 데까진 성공했어요.
 
“뭐, 뭔데…?”
 
“60초 뒤에 공개됩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재빨리 거실 밖으로 빠져나왔어요. 이제 이 60초 동안 또다시 시간을 벌 수 있는 무언가를 생각해야 했죠. 그렇게 머리에 피가 날 정도로 긁으면서 고뇌에 빠져 있던 도중, 문득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어요. 일단 곧바로 지하로 내려갔죠.

그곳에서 시르크가 절 반겼어요.
 
“조금만 기다려봐…. 이제 수치 확인만 하면 되니까.”
 
“알았으니까 다 끝나면 문자나 보내. 문 열어보는 것도 이제 지긋지긋하다.”
 
하지만, 전 이 인간을 재촉하려고 온 건 아니었어요. 이미 엄청난 계산에 시달려 반나절 사이에 폭삭 늙어버린 시르크를 보자니 가슴이 아팠거든요. 저는 그 인간을 뒤로하고 창고 구석을 뒤지기 시작했어요.
 
“찾았다.”
 
제가 지하실 잡동사니 사이에서 찾은 건 샴페인이었어요. 원래는 수능 시험이 끝나고 자축도 할 겸 한번 마셔보고 싶어서 부모님께 부탁한 것이었죠. 근데 이게 왜 아직도 그대로냐고요? 샴페인 같은 건 원래 좋은 날에 먹는 거잖아요. 네, 좋은 날에만 말이에요.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이젠 미성년자에게 술까지 먹어야 하는 상황에 한숨이 나왔어요. 하지만, 어쩔 수 없었죠. 일이 해결될 때까지 지은이는 무조건 아무것도 모른 채 저희 집에 있어야 하니까요. 전 녀석이 사온 케이크와 함께 샴페인을 가지고 거실로 들어갔어요.
 
“하, 할 말이 뭐야?”
 
지은이가 물어보았지만, 깜박하고 할 말은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들어간 뒤였죠.
 
“일단 이거부터 마시고 얘기하자. 도저히 제정신으로는 말 못 할 것 같아서 말이야.”
 
이런 식으로 말하면, 왠지 녀석이 이걸 다 마실 때까지는 여기서 기다릴 것 같았어요.
 
“근데 그거, 우리가 마셔도 되는 거야?”
 
녀석이 샴페인 병을 가리키며 약간 불안한 표정을 지었어요. 저는 슬쩍 샴페인의 도수를 확인했죠. 12%라고 적혀 있긴 한 데, 술을 마셔본 적이 없어서 이게 높은 건지는 잘 모르겠더라고요.
 
“괜찮아,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니까.”
 
사실 이제 크리스마스 이브고 나발이고 그런 건 아무런 상관이 없었지만 말이에요. 그렇게 저희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해보는 음주를 맞술로 배우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약간 술에 대한 거부감이 있어서 그런지 마시기가 힘들었는데, 어느새인가 부턴 저희 둘 다 홀짝홀짝 잘 넘어가더라고요. 먹다 보니 왠지 머리가 약간 멍해지면서 기분이 살짝 좋아지는 것 같았어요.
 
“너 나랑 처음 만났을 때 기억나니?”
 
녀석이 저에게 물었어요.
 
“당연하지. 그 재앙의 시작을 내가 어떻게 잊겠냐.”
 
“재앙?”
 
“분명히 둘이서 같이 보충수업 땡땡이쳤는데 다음 날 나 혼자만 담임에게 혼나고 있고, 분명히 둘이서 같이 시험기간에 공부 안 하고 놀았는데 내 성적만 개판이 되어 있고…. 이게 재앙이 아니고 뭐냐? 왜, 다른 것도 말해줘? 아직 수천 수억 가지가 남아 있는데 말이야."
 
“됐거든.”

녀석이 정색하며 말렸어요.
 
“그래도 전부 그렇게 추억이 되는 거니까. 나중엔 즐거운 기억으로 남게 되겠지.”
 
“이제 대학교 입학하면 자주는 못 만나겠구나….”

전 녀석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죠. 확실히 지난 3년 동안 지은이에게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못한 게 비정상일 수도 있다고 느꼈어요. 하지만, 전 이대로가 좋았어요. 그냥 아무런 복잡한 생각 없이 웃고 즐거워할 수 있는 지금처럼요. 친구로서의 지은이도 제가 매우 좋아하는 녀석이니까 말이에요.
 
“아마 예전만큼은 힘들겠지.”

그래도 만약에 시간이 흘러서 이 녀석과 연락이 뜸해지다보면, 후회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이 녀석도 돌이켜보면 상당히 아까웠던 사람이었다고, 그땐 왜 그러지 못 했을까라고 하면서 말이에요. 그런 생각들을 하며 저는 살며시 웃었어요.

“왜 웃어?”

“그냥, 술 먹으니까 자꾸 쓸데없는 생각하게 돼서.”

“무슨 생각?”

“아무 것도 아냐.” 
 
어느새 샴페인도 전부 비워졌고, 전 아무런 문자가 오지 않는 휴대전화를 바라보며 거의 반쯤 포기한 상태였어요. 슬슬 녀석에게 현실을 가르쳐줘야 되겠다고 결심했죠. 그렇게 생각해보니 술을 먹인 게 나쁜 선택은 아니었던 것 같았어요. 단순히 시간 버티기 용일 뿐만 아니라 충격완화제로도 쓰일 테니까요.
 
“근데 너 할 말이 있다는 게 뭐야.”
 
술기운에 양 볼이 붉게 상기되어 있던 녀석이 물어보았어요. 하지만, 이제 할 말이야 아무래도 상관없었죠.
 
“뻥이야.”
 
“뭐?”
 
“뻥이라고. 하아, 잠깐 보여줄 게 있는데…. 따라와 줄래?”
 
“야, 정연석.”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지은이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저를 심각한 톤으로 불러 세웠어요. 드디어 올 게 왔구나 싶었죠. 사실 이 상황에서 더 이상 눈치를 채지 못할 녀석이 아니었어요. 솔직히 11시까지 버텨왔던 것도 기적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이제 전 녀석에게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정리하고 있었어요. 그토록 상상하고 싶지 않았던 일들을 기대하면서 말이에요. 뭐, 피할 수 없다면 기대라도 해봐야죠.
 
“왜?”
 
일단은 태연한 표정으로 녀석을 쳐다보았어요. 혹시 모르니까요.
 
“너 지금 일부러 그러는 거지?”
 
“응?”
 
일단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녀석을 쳐다보았어요. 혹시 모르니까요.
 
“반 애들 핑계로 전화한 것도, 동생 아파서 가족여행 취소됐다는 것도 전부 거짓말 이라는 거 알고 있었지?”
 
그때야 저는 제가 예상했던 대화 방향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는 것을 느꼈어요. 하지만, 어쨌든 상황이 심각해지고 있는 건 마찬가지였어요. 지은이의 목소리가 조금씩 격앙되고 있었거든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너 항상 성가시고 피곤하게 굴었다고 지금 나한테 이러는 거야? 다 알고 있으면서…. 괜히 나 놀리려고 이렇게 시간 질질 끄면서 집에 못 가게 하는 거 맞잖아.”
 
녀석은 자기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모양인지, 말이 조금씩 핀트가 엇나가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전 그 말까지 듣고 나서야, 지금 지은이가 하고 있는 말이 지하실에 있는 시르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잠깐만요, 지은아.”
 
“이 나쁜 새끼야….”
 
지은이의 눈가에 뭔가가 그렁그렁거리기 시작했어요. ‘저게 설마 눈물이겠어?’하고 생각하자마자 오른쪽 눈부터 또 뭔가가 주르륵 떨어지더라고요. 저건 확실히 눈물이었죠. 전 생각지도 못한 전개에 머릿속이 서서히 백지가 되기 시작했어요.
 
“다 알고 있으면서….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아니 내가 뭘….”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던 지은이가 마침내 폭발하고 말았죠.
 
“그래, 나 너 좋아한다고! 근데 왜!, 왜 자꾸….”
 
좋아한다는 말 이후로는 울음이 섞이기 시작하더니,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을 지경이 됐어요. 결국엔 순도 100% 울음소리로 바뀌었긴 하지만요. 전 그저 그렇게 울고 있는 녀석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어요. 전 아직도 녀석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거든요.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울음소리가 조금 잦아졌을 무렵에, 전 지은의 옆으로 가서 녀석의 어깨를 툭툭 쳤어요.

“야, 울지 마.”
 
솔직히 이 무뚝뚝한 말 말고는 지은이에게 달리해줄 것이 없었어요. 사실 저도 엄청나게 당황했었거든요. 3년 내내 같이 지내는 동안 녀석이 우는 걸 본 게 이번이 처음이었으니까요. 뭐, 그만큼 제가 이 녀석은 눈물 한 방울 안 나오는 정신병자라고 착각한 거겠죠. 아까도 말했다시피, 전 지은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 잘 몰랐으니까요. 그리고 앞으로도 마찬가지 일 거고요.
 
그래도 녀석에 대해 몇 가지는 건질 수 있었어요. 녀석을 보면서 제가 왜 이때까지 무감각했었는지 이제는 어느 정도 알 것 같았거든요. 왜냐하면, 그 때까지는 이 얼굴을 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지금 지은이가 울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적어도 녀석이 정신병자라기보다는 귀여운 여자아이에 가까웠거든요. 이제 앞으로 이 얼굴을 몇 번을 볼 수 있을지 장담은 하지 못하겠지만 말이에요.
 
그때 휴대전화 알람 음이 들려왔어요. 지하실에서 시르크가 보낸 문자였어요.
 
‘OK’
 
저는 문자를 보자마자 거실 밖으로 달려나갔어요. 그리고는 현관문을 활짝 열었죠.
 
바깥세상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저희 집 앞 풍경이었어요. 마당에 눈이 소복하게 쌓였다는 것을 제외하곤 말이죠. 하지만, 눈은 더 이상 내리지 않고 이미 그쳐 있었어요.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이미 끝나있었죠. 제가 이 집 속에 반강제적으로 갇혀있는 동안에요. 문득 지하실 문을 굳게 잠군 자물쇠가 눈에 띄었어요. 뭐… 저건 보험이었죠.
 
저는 고개를 돌려 아직 훌쩍거리고 있는 지은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어요.
 
“서지은.”
 
그리고 그녀에게 물어봤어요.
 
“오늘 우리 집에서 자고 갈래?”
 

2


라셀라에서 책방을 한다는 건, 상당히 힘든 일이기도 해요. 매일 같이 이른 시간에 밖으로 나와 필요한 것들을 몽땅 산 다음에, 다시 연구실에 처박혀서 하루를 보내는 마법사들을 상대하려면, 적어도 새벽 4시에는 일어나서 문을 열어야 하거든요. 오늘도 마찬가지였고요.
 
그렇게 늘 똑같이 진열장들을 다시 밖으로 꺼내던 도중, 제 발에 무언가가 부딪히는 걸 느꼈어요. 땅바닥에는 처음 보는 조그만 상자 하나가 뒹굴고 있었죠. 전 그것을 집어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어보았어요.
 
상자에는 ‘Merry Christmas’라고 적힌 붉은색 카드 하나와 함께, 백금으로 만들어진 목걸이 하나가 들어 있었죠. 그런데 제 눈에 들어온 건 카드뿐이었어요. 빨간 옷을 입고 있는 노인이 그려진 조그마한 엽서 말이에요. 

사실 전 그 글자가 어느 나라 말인지, 무슨 뜻인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게 누구의 필체인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죠.
 
저는 책방을 개점하는 것도 잊은 채, 한참 동안 그 글자를 바라보고 있었어요.

Writer

수려한꽃

수려한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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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5)

cloud.9
cloud.9 10.12.04. 22:36
재미있는데 뭔가 평범하네요.
xester
xester 10.12.05. 00:15
...? 혹시 중간에 짤린 거 아닌가요?
서형민 10.12.21. 12:18
센스가 톡톡 튀는게 딱 내 취향이네요 잼있네 ㅎㅎ
ㅇㅅㅇ 10.12.21. 14:23
재치 넘치는 글이네요. 재미있어요.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은 글이라는 게 아쉬워요.
다만 조금 더 차분하게 글을 구상했으면 하는 아쉬움도 있네요. 기본적 발상은 아주 좋은데 지은을 방안에 잡아둬야 하는 곤란함과 해프닝, 티격태격하는 모습이 좀더 부각됐으면 훨씬 좋았을 거예요.
하늬비
하늬비 10.12.21. 17:03
와, 좋네요
문장 몇 개가 비문인 게 걸렸지만;
가둬야 하는 당위성과 '지은의 감정을 알아채지 못함'이라든가가 그렇게 강한 반전으로 드러나진 않았지만 아마 의도한 것도 같네요. 분위기가 무리가 없어요.
권한이 없습니다.
서버에 요청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