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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노페디(Gymnopedie) - 한신견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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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려한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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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노페디(Gymnopedie)



 1
 고등학교에는 도서관이 있다. 자그맣고 조용한 도서관이. 책장이 삼십여 개, 탁자는 대여섯 개 쯤 들어서 있다. 한쪽 벽면이 긴 창(窓)으로 되어 있어서 싱그러운 공기가 방안에 맴돌았다. 나는 이곳을 내 아지트로 삼았다. 카운터에 혼자 앉아서 창문 밖을 바라보면, 벚꽃 나무가 조용히 옷을 한 겹씩 벗곤 했다.
 내게 고등학교란 요상한 장소였다. 입학식 때, 교문 앞에는 '서울대 2명 합격'이라 쓰인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그만큼 학생들을 훌륭하게 키워낸다는 거다. 게다가 학교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면 “소월 고등학교는 개교 이래 무수히 많은 창의적 인재를 교육시켰습니다”라는 문구가 뜨는데, 나참, 이야말로 똥같은 거짓말이다. 교육이라니! 다른 학교들과 마찬가지로 소월에서 교육이란 물건은 코빼기도 찾아볼 수 없다. 물론 선생들은 대부분 좋은 어른이다. 하지만 그들의 수업엔 미친 구석이 있다.
 새로 받은 교복은 또 얼마나 어색한가. 회색옷을 껴입은 내 모습을 보고 나래(마이 시스터ㆍ중학생)는 “아주 신사가 다 됐네, 잘 어울려” 하고 칭찬했지만, 글쎄 녀석의 미적 감각이 썩 믿음직해야지. 동생은 처키 인형을 보고 귀엽다고 말하는 아이니까.
 그래도 고등학교 생활에 곧 익숙해졌는데, 친구를 새로 사귀거나 시간표를 외우는 것들은 매년 겪어온 일이었기 때문이다. 무슨 어려운 일이 있겠는가. 다만 이런 귀찮은 일들에선 이제 벗어나 조용히 살겠다고 미리 다짐해둔 터였으므로, 나는 도망치다시피 도서관에 눌러앉은 것이다.
 이곳에 여학생들이 없어서 다행이다. 녀석들은 책읽기를 아주 우습게 여길 뿐더러 꼭 서너 명씩 몰려다니기 일쑤다. 요컨대 그 생물이……나는 내 여성관이 삐뚤어져 있다는 걸 알고 있다……이 보금자리를 노린다면 여긴 순식간에 시장바닥처럼 시끄러워질 거다. 다행히 오월이 되어도 여자들은 이곳을 침범하지 않았다. 아마도 이렇게 조그맣고 낡은 공간은 그네들 취향이 아니겠지.
 나는 담임선생한테 말씀드려 사서(司書)가 되었다. 마침 도서부에 신입부원이 들어오지 않았는지 선생님은 내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도서부의 선배란 작자들이 죄다 얼간이라는 것이다. 아니, 정말로 도서부엔 멍청이들밖에 없다.
 언젠가 이런 일이 있었다. 부원들 모두가 탁자에 둘러앉아 서류를 정리하던 때, 어느 선배가 “야아, 오뒷세이아를 쓴 작가가 누구더라”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맞은편에 앉은 선배가 “어 셰익스피어 아니야?” 하고 대답했고 그 자리에 있던 선배들 전원이 근엄한 표정으로 고개를 한 번씩 까닥인 것이다. 젠장, 정말 골 때리는 농담이 아니고 뭔가. 난 그놈들 똥구녕에 필통을 쑤셔 박고 싶었다.
 그런 바보들과 똑같은 장소에서 숨을 쉴 순 없었다. 나는 놈들을 내쫓기로 했는데, 마치 성실하고 똑똑한 후배인 양 연기한 것이었다. 선배들 입장에서야 만만한 후배 하나 들어왔겠다 싶어 좋아라 했겠지. 결국 그들은 서고(書庫) 돌보는 일을 내게 몽땅 떠맡겼다. 멍청하고 게으른 인간만큼 속이기 쉬운 인종도 없지.
 나는 그렇게 도서관을 오롯이 차지했다. 나는 경비병이자 주인이었다. 누구도 이곳에 침 흘리거나 발붙이려 하지 않았다. 선반에 가라앉은 연한 먼지, 창가에 놓인 화분, 책표지의 낡은 가죽; 그것들이 방과후의 저녁놀이랑 섞이면서 풍기는 희미한 냄새. 그 모든 것을 독차지했던 것이다.  
 “더 이상 바랄 게 없어, 완벽해” 하고 중얼거렸다. 내겐 이곳이 꼭 발명품처럼, 홀로 재료를 모아서 이리저리 끼어 맞춰 만들어낸 작품으로 여겨졌다. 어느새 계절은 여름으로 접어들어 창문 바깥에선 나무가 새싹을 돋우었고―――나는 김지수와 만났다.


 2
 무엇이든 처음엔 새롭지만 나중엔 지루하기 마련이다. 늦봄엔 참 반가웠던 매미 소리가 슬슬 지겨워질 무렵, 여자애 한 명이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도서관의 창가 자리를 점령했다. 책상엔 두꺼운 외국책과 캔커피를 올려놓은 채.
“…….”
 도서관은 여전히 조용했다. 하지만 그녀의 숨소리가 섞인 것만으로도 이곳의 공기가 달라졌다. 마치 친구집에 놀러왔는데 녀석의 부모가 있어서 행동거지 하나하나에 신경 써야 하듯이, 나는 조마조마하며 카운터에 앉아 있었다. 어차피 변덕이겠지, 곧 오지 않겠지, 하고 속으로 바랐지만 그 여자애는 계속해서 이곳에 발도장을 찍었다.
 말 한마디 없이 조용한 아이였다. 캔커피에 입술을 댈 때마다 새까만 머리칼이 가볍게 들썩였다. 교칙에는 어깨선까지만 두발을 기를 수 있다고 명시되어 있는데, 어찌된 일인지 그녀의 머리카락은 등허리까지 내려와 있었다. 혹시 노는 여자인가 싶었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나는 그런 여성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눈짓을 알고 있는데……내 동생이 그쪽 부류다……저 여자애는 뭐랄까, 눈동자가 너무 또렷했다. 항상 눈을 게슴츠레 뜨고 있는데도 ‘무언가를 보고 있다’라는 느낌이 전해져 왔다. 그런 눈빛은 처음이었다.
 초여름이 되서 그녀와 나는 처음으로 말을 나눴다. 어느 날인가 책 하나를 찾고 있었다.『하녀들(Les Bonnes)』이라는 희곡이었는데, 도서 목록에 기재된 곳을 뒤져도 온데간데없었던 것이다. 이십 분이나 헤매고 책을 간신히 발견했다. 녀석은 도서관 맨 구석의 책장에 꽂혀 있었다. ‘빌어먹을 선배들. 도서관 정리를 아주 개판으로 해놨어.’ 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오른손을 뻗었고, 누군가의 손등과 서로 마주쳤다.
“어라.” “어.”
 두 목소리가 화성을 이루었다. 그 여자애였다. 가슴 언저리에 '김지수'라는 글씨가 주황색 실로 꿰매어 있었다.(그때서야 그녀의 이름을 알았다) 나는 가만히 있다가, 그녀의 시선을 느끼고 얼른 손을 빼었다.
“어, 그러니까― 미안. 저기, 이거 내가 먼저 빌려도 될까?”
 여자애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녀는 등을 돌려, 책장들 틈을 천천히 빠져나갔다. 나는 가볍게 이맛살을 째푸렸다. ‘가만, 김지수?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 기억을 더듬어봤다. ‘혹시 옛날에 만나본 적이라도 있었나? 그건 아닌 거 같은데.’
 나는 카운터로 돌아와서도 생각에 잠겼다. ‘그래, 들어봤어, 어디선가 들어봤어. 그런데 어디서 들었더라. 초등학교 때 김지수라는 짝꿍이 있었지만 얼굴이 전혀 달랐지. 게다가 걘 눈동자가 시커멨고. 저 아이의 눈은 밤색이잖아.’ 나는『하녀들』의 겉표지에 코드번호 스티커를 새로 붙이고, 그녀에게 책을 갖다 주었다. 여자애는 노트에 무언가를 적고 있었는데 나를 슬쩍 스쳐보기만 했다. 그때 비로소 왜 그녀의 이름에 기시감을 느꼈는지 깨달았다.
“아― 아아――!”
“……?”
“아, 아무것도 아니야. 미안해.”
 나는 서둘러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래, 기억났다. 저번 식목일에 열렸던 교내 글쓰기 대회, 거기서 대상을 받은 학생이 바로 김지수였다. 내가 써낸 글은 2등에 그쳤었다.
 이 대회에서 가장 유력한 우승후보는 나라고 생각했었다. 옛날부터 전국 소설·희곡 대회에서 곧잘 수상했기에. 마치 살갗에 들러붙어 어디든 따라다니는 고름처럼, 내게 글쓰기란 지병이나 마찬가지였다……그런데 공립 고등학교 대회에서 2등이라니. 동생한테는 상 탔다는 말조차 꺼내지 못했었다.
 나는 슬금슬금 창가 쪽을 곁눈질로 쳐다봤다. 노을빛 때문에 눈이 부실 텐데도, 여자애는 가만히 책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딘지 이상하게도 익숙하단 말이야.’ 그렇게 생각하고 시선을 거두었다.


 3
 알고지낸 지 1주일이 지났다. 여름이 다가왔다. 에어컨도 없는 도서관은 무더웠다. 그마나 한 대 있던 선풍기도 여자애쪽으로 돌린지라 나는 한창 더위를 맛보고 있었다. 손님보다 주인이 더 편할 순 없는 노릇이지 않는가.
 내겐 새로운 생활이 시작됐다. 무언가 큰 변화가 일어난 건 아니었다. 나는 예전처럼 점심시간이나 방과후 시간을 도서관에서 보냈고 여자애도 그곳에 왔다. 다만 날이 지나갈수록 그녀와 얘기를 나누고픈 마음이 강해졌다. 내 일상은 겉으론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지만 속으론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이전에 도서관을 도피처로 사용했다면 지금은 희미한 기대감을 품은 채 오가고 있다. 이 기대감이 부풀어 오를 때마다 여자애한테 말을 걸어보려 했다. ‘글쓰기 대회로 화제를 만들어서 그녀에게 무엇이든 물어보자, 그러면 뭔가라도 얻을 거야’ 하고 예감하며 언제나 그녀와 대화할 준비를 갖추었다. “안녕, 오늘도 날씨가 좋네”까진 손쉽게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이상 입을 열려고 하면, 그녀의 눈동자에 목이 턱 매여서 이미 꺼내둔 인사말을 주어담기에 바빴다. 마치 너에게 관심 없지만 아는 척은 해둔다는 듯한 말투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이런 말투로는 하고 싶은 대화를 나눌 수 없었다. 그렇게 나는 여름방학이 될 때까지 시간을 허비하고 말았다.
“오빠 진짜 한심하다.” 결국은 어느날인가 동생한테서 핀잔까지 들었다.
“어떻게 살았길래 고등학생이 그렇게 바보야? 정말 숙맥이네. 오빠가 어수룩하단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숙맥인 줄은 몰랐어. 숙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지만 정말 숙맥인 줄은 몰랐어. 어디에나 있기 마련인 숙맥이 내 주위에도 하나쯤은 있을 거라곤 생각했지만 그게 내 오빠인 줄이야! 막상 숙맥을 보면 그 사람이랑 상종하는 게 용납이 될 것도 같았는데 용납이 안 되네.”
“숙맥이라서 되게 미안하다!”
 우리 남매는 마룻바닥에 앉아 있었다. 우리는 저녁식사를 마치고 항상 거기에 앉았다. 특히 그날은 마루에서 할 일이 있었는데, 다 떨어져 가는 김치를 새로 담그는 참이었다. 우리는 분홍색 고무장갑을 낀 채, 큼직한 플라스틱 바구니에 들어있는 배추 무더기에 고춧가루를 묻혔다. 나래가 배춧잎을 살짝 뜯어내더니 내게 내밀었다. 나는 덥석 물었다.
“어때?”
“음.” 김치를 삼키고서 말했다. “조금 맹한데.”
“그래? 젓갈을 더 넣어야 되나.”
“반 숟갈만 더 넣자.”
 나래는 내게서 새우젓갈통을 넘겨받았다.
“하여튼, 오빠는 좀 심해. 나랑 똑같은 핏줄인 사람이 이렇게 멍청하다는 게 신기하네. 혹시 우리 배다른 남매 아니야?”
“그러면 오죽이나 좋겠냐.” 나는 말을 돌리기로 했다. “인마, 심한 건 내가 아니라 오히려 너겠지. 언제나 말하지만 넌 네 몸을 너무 함부로 놀린다고. 딱히 동생 사생활에 간섭하고 싶진 않지만……혹시 모르잖아. 돼먹지 않은 놈이 꼬일지. 너 어젯밤도 '알바'했지? 이번엔 어떤 아저씨야.”
“박 사장님. 어제 한 탕으로 오십이나 벌었지. 통이 커서 좋다니까.”
“또 그 대머리군.” 나는 손바닥으로 배추를 탁하고 내리쳤다. “난 그 녀석 머리통을 볼 때마다 뒤통수를 수세미로 확 밀어버리고 싶어.”
“나참, 박 사장님은 좋은 어른이라니까. 이번 달에도 직원 한 명 자르지 않느라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셨대도. 로리콘 기질이 심하긴 하지만, 한번도 이상한 요구를 한 적은 없는걸. 하여튼 오빠는 머리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살짝 있어. 사람은 직접 만나봐야 아는 거야. 알았어? 언제까지고 숙맥이어서야 만날 허상만 좇게 될 걸.” 나래는 혀를 낼름 내밀었다. “뭐어, 그게 오빠 취미면야 어쩔 수 없지만.”
“됐어. 그런 게 아니야.”
 나는 우울하게 대답했다.
 삼사 주일 쯤 지나면 김지수가 기억에서 희미해져서, 어머니나 아버지처럼 꿈에서나 나타날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렇지만, 한 달이 지나고 여름방학이 거의 끝나가도, 뇌리 속에서 김지수는 꼭 방금 도서관에서 헤어진 것처럼 또렷이 떠올랐다. 기억은 더 생생해져 갔다. 한낮의 무더위 속에서 초등학생들이 뛰어노는 소리가 창문 너머로 들려올 때면, 시계의 초침이 유난히 시끄럽게 똑딱일 때면, 멀리서 매미가 울 때면, 머릿속에서 도서관의 풍경이 되살아났다. 창문에서 비치는 구름의 그림자에 드리워진 채, 책장을 천천히 넘기는 여자애의 손가락이. 어쩌다가 눈길이 마주쳤을 때 그녀의 눈동자에서 발견한 차분함이. 나는 그러면 하던 일을 멈추고 눈썹을 잔뜩 찡그렸다. 마치 누군가가 등뼈를 살살 간지럽히고 있는데 막상 뒤돌아보니 아무도 없는 것처럼, 싱숭생숭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불쾌한 감정이 든 것이었다.
“그래, 어쨌든 얘기를 나눠봐야지.” 나는 별안간 중얼거리곤 했다. 하지만 대체 무엇을 말한다는 건가? 날씨에 대해, 수업에 대해, 취미에 대해?……사실 이건 좀 미친 짓거리다. 내가 그녀를 특별하게 여길 이유가 없다. 마음속에서야 이 감정을 가리켜서 애정이니 뭐니 지껄이고 있었지만, 나는 그걸 사랑이라고는 도저히 부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막연하게나마 사랑에 관한 소설책들을 뒤졌지만, 어떤 책도 내 감정을 시원하게 풀어주진 못했고, 오히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자기 자신을 속이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답답함만 더해갔다. 동생은 그런 내 심정을 헤아렸는지 한 마디 충고를 던질 뿐이었다.
“만약 오빠가 그 여자랑 사귀게 되면, 그러니까 굳이 이성적으로 사귀진 않더라도, 자기가 가진 비밀들은 모두 털어놓도록 해. 그편이 좋을 거야.”
 새 학기가 다가왔다. 개학식이 끝나자 나는 도서관으로 향했다. 다급하지도, 너무 느긋하지도 않게끔 발걸음 속도를 조절했다. 복도를 한참 걸어가자 흰색 플라스틱으로 된, 볼품없는 문이 보였다. 바지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문고리를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쌀쌀한 공기가 뺨을 쓰다듬었다. 창가 자리는 비어 있었다. 나는 여느 때처럼 카운터 의자에 앉았다. 엉덩이 부근이 차가웠다.
 요 며칠 간을 그녀에 대해 조사하는 데 보냈다. 그래봤자 친구들한테 “김지수라는 여자애 알아?” 하고 슬쩍 캐묻는 정도였지만. 내가 간신히 알아낸 것은, 그녀의 아버지가 중소기업 회사원이고 어머니는 주부이며, 그녀 혼자서 학교 근처의 빌라에서 자취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어떤 친구의 말을 떠올렸다.
‘걔 약간 이상해. 동급생한테도 꼬박꼬박 존댓말을 쓴다고. 수업 시간에도 만날 이상한 책만 읽고. 머리에서 나사가 빠졌달까…….’
 그때, 출입문이 드르륵 열리면서 김지수가 방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내 쪽을 힐끔 쳐다보고 예의 창가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두꺼운 양장본과 캔커피를 책상에 놓았다. 두 달 전과 똑같은 광경이었다. 그녀의 머리칼이 조금 더 길어지고, 유리창 바깥의 수풀들 색깔이 조금 탁해졌다는 것만 빼면.
 나는 미리 가방에 넣어온 커피포트를 꺼내서 콘센트와 연결했다. 역 앞의 카페에서 산 원두커피를 갈색 여과지(紙)에 두 스푼 넣고서, 포트에는 생수를 세 컵 쯤 부었다. 곧이어 물이 끓는 소리. 묽은 커피 향기가 공기와 섞여서 서재 구석구석에 스며들었다. 나는 머그컵 두 잔――이것 역시 집에서 가져온 물건이다――에 커피를 조심스레 따랐다. 그리고 양손으로 컵들을 들고 그녀 곁으로 다가갔다. 여자애의 표정과 손짓에서 나는 그녀가 내가 다가오길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맞은편 자리에 앉으면서 말했다.
“커피가 좀 남았는데, 마실래?”
 이 말을 뱉자마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제기랄, 동생 말마따마 나는 정말로 숙맥이었나보다. 하지만 이렇게 마주앉는 것만으로도 가슴속에서 부끄러움이 치미는 것이다. 어떻게 다른 말을 꺼낼 수 있었겠는가? 다행히도 여자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에게 또 무슨 말을 건넸는지 모르겠다. 이런저런 얘기를 주절거렸다는 것만은 기억하고 있다. 일정한 흐름 없이 횡설수설하는 내게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거나 “응” 하고 짧게 대답했다. 그녀와 나는 그날 늦저녁까지 도서관에 있었다.
 이후 집으로 돌아온 나는 그녀를 떠올리며, 내일도 틀림없이 그녀와 만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마루의 소파에 누워서 그녀가 이야기를 들을 때에 무척이나 말수가 적었던 것을 되새겼다. 나는 누구도 발견하지 못하고, 혹은 발견했는데도 무심코 지나가버린 보물을 알아본 사람처럼 들떠 있었다. 그녀의 가느다란 목덜미와 선명한 밤색 눈동자를 떠올렸다.
 밤늦게 집으로 돌아온 나래가 내 모습을 보고는 피식 웃었다.
“아주 입이 찢어지네, 찢어져. 이제 근엄한 척은 그만 하시기로 했어?”
 나는 그 핀잔에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4
 그녀와는 기묘하면서도 유쾌한 관계를 이어갔다. 내가 커피를 타고, 머그컵을 건네고, 대화를 나눈다――그런 일상이 몇 달이고 계속됐다. 거리에선 단풍이 들고 있었다. 학생들은 하나둘씩 겨울옷을 꺼내 입었다. 그렇게 구월과 시월이 금방 흘러갔다.
 토요일이었다. 도서관에는 난방 시설이 없는지라 점점 발끝이 차가워졌다. 그래서 동대문 상가에서 오래된 전기난로를 하나 사왔다. 가끔 치직거리는 소리를 내긴 해도, 난로는 문제없이 잘 작동했다. 삼십 분 정도가 지나서 방안이 포근해졌다.
 저녁이 되어 바람이 좀 잦아들자, 나는 그녀에게 바깥으로 산책을 나가자고 제안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학교 근처를 적당히 걸어 다녔다.
 우리는 뒤뜰에 멈춰 서서 풍경을 감상하며 말이 없었다. 수풀에는 붉은색과 노란색, 초록색이 울긋불긋 물들여 있었다. 공기 위쪽에서는 바람이 불고 있는지 나뭇잎들이 흔들리며 파도처럼 울었다. 햇볕이 다 지나가고 남은, 투명하기만 한 하늘에 달이 떠 있었다. 낮달이었다. 낮이든 밤이든 저 자그마한 위성은 언제나 우리 주변을 돌고 있다. 다만 인간의 눈에 보이느냐 보이지 않느냐에 따라서 낮과 밤이 구분되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뭐래도 달은 밤을 좋아하거나 낮을 싫어하진 않는다. 오히려 그 두 시간대의 경계, 바로 지금과 같은 시간이야말로, 우리는 달의 진짜 모습을 바라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낮달이란 아직 우리에게 익숙지 않은 것이므로.……산줄기와 단풍과 넓은 하늘이 펼치는 광경 속에서 점차 주홍색으로 번져가는 세상을 바라보며,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사실 나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익숙한 것으로 취급하며 무시하고 있는가. 점차 일기 시작하는 미약한 바람에, 내 몸에 배어든 땟물을 모두 흘려보내고 싶었다.
 노을이 졌다. 구름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나는 내 눈가가 느닷없이 축축해진 걸 깨닫고는 당황했다. 눈물이라니! 부모님 장례식 날에도 끝끝내 울음을 참은 나였다. 그 후로 한번도 마음속이 울컥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특별한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 지금, 바로 이 순간에 눈물이 고인 것이었다.
“울고 있구나.” 김지수가 물었다. “계속 여기 있을까?”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갑자기 그녀를 껴안았다. 마치 어릴 적에 처음으로 초대받은 친구집의 문을 두들기듯이, 서투르고 어색한 몸짓으로 양팔을 그녀의 허리에 둘렀다.
 거기에는 지금껏 상상해오던 낭만일랑 없었다. 멀리서 누군가가 스키를 타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 멋들어져 보이지만, 막상 스키를 타보면 그것은 참 흥분되면서도 불안불안한 일이다.――꼭 그처럼 나는 김지수를 끌어안았다. 그렇게 십 여초가 지나고, 나는 죄라도 지은 듯이 얼른 뒤로 물러섰다.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차분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한번도 보지 못한 감정이 그녀의 얼굴에 나타나 있다는 걸 알았다. 그건 체념이었다.
“도서관으로 가자.” 김지수가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되돌아갔다.
 난로를 켜둔 채로 나간 탓인지 서재는 거의 무더울 정도로 따뜻했다. 유리창에는 물방울이 몇 개 맺혀 있었다. 그녀와 나는 도서관 구석에 놓인 소파에 올랐다. 실내화를 벗고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아마도 내가 먼저였겠지만――입을 맞췄다. 물기 머금은 풀내음이 코를 간질였다. 입술을 붙이고서 나는 그녀가 결코 서투르지 않다는 걸 눈치 챘다. 문득 그녀가 가족과 떨어져 산다는 걸 상기했다. 하지만 그런 정보에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잇몸에, 쇄골에, 가슴에, 배에, 무릎까지, 온갖 곳에 내 흔적을 새겼다.
 김지수는 하얀 숨을 내쉬며 내 쪽을 올려보았다.
“응, 괜찮아…….” 누군가를 위로하는 것 같았다. 나를? 아니면, 누구를? “괜찮아.”
 그녀와 나는 그대로 포개졌다.


 5
 눈꺼풀로 빛이 스며들었다. 의식이 서서히 맑아지고 눈앞의 풍경이 선명해졌다. 지수는 내 품에 안겨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이마에 내 이마를 갖다 댔다. 그렇게 우리는 소파 위에서 엉겨 붙어 있었다.
“너한테 고백할 게 있어.” 김지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니까……난,” 나는 말을 뚝 그쳤다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녀에게 알려야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일들이었다. 진작 김지수한테 얘기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있었다. 하나는 내가 순결하지 않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이다.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아니, 조금만 있다가 말할게.”
“응.”
 나는 이 관계가 쉽게 끝나지 않으리란 걸 직감했다. 그리고 우리에게 깨끗함 따위가 있기를 바라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하다는 것도 알아버렸다. 나는 그녀의 가느다란 어깨를 힘껏 껴안았다.
 나는 우리가 서로의 부끄러웠던 과거들,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이미 용서했다는 걸 깨달았다. 예전에 나는 울적해질 때면 책에서 배운 논리로 내 처지를 위로했다. 그러나 이젠 더 이상 논리에 기대지 않아도 되었다. 스스로 솔직해질 수 있는 상대를 드디어 만났기에.
 나는 내가 동생과 동침했었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속삭였다. 그리고 예상한 대로 그녀와 나는 진심으로 공감할 수 있었다.
 우리는 소파에 앉아서, 서로에게 몸을 기댄 채 창문 밖을 바라봤다. 이제 곧 단풍잎이 떨어져내려 나뭇가지들은 그 앙상한 골격을 드러낼 것이다. 그리고 차갑기 그지없는 눈송이를 옷으로 삼을 수밖에 없을 거다. 우리는 서로의 새로운 생활이 막 발을 뗐다는 것을 누구보다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Writer

수려한꽃

수려한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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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1)

cloud.9
cloud.9 10.12.04. 18:42
막판 반전이 좀 뜬금없네요 중간에 밑밥좀 더 깔지. 그리고 말줄임표를 좀 잘못 쓰는 것 같네요.
권한이 없습니다.
서버에 요청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