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이정표

크리스마스로 가는 길 - 모리노 作 /2차 심사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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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려한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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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OAD TO CHRISTMAS

크리스마스로 가는 길

 

 

 

 

1.


1225일은 성탄절.

연인이 없는 사람들이 집 밖으로 나와서는 안 되는 날인 한편으로, 가족과 함께 보내는 게 타당하다는 주장이(주로 연인 없는 이들에 의해) 정설처럼 펼쳐지는 날이기도 하며, 척 노리스가 예수에게 생일축하 카드를 보낸 날임과 동시에, 사이온지 세카이의 기일이기도 한 날.

그 전날인 1224일이 바로 오늘이다.

세간에서는 크리스마스 이브(원래는 24일의 밤을 일컫는 명칭이지만)라고도 부르고, 사실 이 날이야말로 연인이 함께 하기에 적합하다고도 일컬어지기도 하며, 척 노리스가 예수에게 생일축하 카드를 보내기 하루 전이면서, 모리카와 유키의 탄생일이기도 한 날.

그리고 그런 것과는 일절 관계없이, 즉 모니터 안에서 나오지 않는 누군가를 위해 생일 케이크를 준비하거나 제사상을 차리는 일 없이, 이사노바는 한적한 주택가를 걷고 있었다.

이사노바는 작은 동아리의 부장이면서 수험을 마치고 졸업을 기다리는 고교 3학년생.

이사노바란 본명이 아니고 ‘2차원의 카사노바를 적당히 줄인 것이지만, 그를 본명으로 부르는 사람은 그의 부모님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현실에 비관하는 일은 없다.

오히려 기뻐하면서 미소녀 게임의 이름 입력란에 매번 이사노바라고 적는, 비관하는 일은 없지만 구제할 길도 없는 남자이다.

간밤에 쌓인 눈 위에 얼마간의 발자국이 찍혀 있는 길을 따라 걸으며, 이사노바는 현실 세계에 실제로 존재하는 동아리 후배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사실 모니터 밖으로 나올 수 없는 이를 위한 생일 케이크를 준비해 놓고 인증 사진을 찍어 배포하는 행위로부터도 보람을 얻는 남자이기도 하지만, 오늘은 그럴 의지가 없었다.

머지않은 졸업식을 맞이하기 전에 반드시 끝마쳐야만 할 용무가 있었기 때문에.

중요하다면 중요하고, 사소하다면 사소한.

어쩌면 반드시라는 강렬한 수식까지도 필요 없을지도 모르는, 그 정도의 용무이기도 했다.

얼마간을 걸어 온 이사노바는 맞은편 골목에서 찾고 있던 인물을 발견했다.

원래는 살고 있는 곳으로 찾아가려던 계획이었기 때문에, 예상보다 빠른 조우였다.

귀를 가리는 털실 모자와 무릎까지 내려오는 코트로 완전무장한 그녀는 장갑 낀 손으로 품에 무언가를 안은 채, 걷고 있다기보다 흐느적대는 듯한 움직임으로 이사노바 쪽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꽤나 정신이 혼미한 상태인 듯, 멀지 않은 거리임에도 이사노바를 알아챈 기색은 없어 보였다.

나노리 군, 안녕하신가.”

이사노바가 여느 때의 말투로 인사를 건넸지만 동아리 후배 나노리는 뭐라 대꾸하지 않은 채 여전히 걷는 듯 흐느적대고 있었다. 길게 땋은 머리가 몸의 움직임에 맞춰 흔들거렸다.

이봐, 나노리 군. 그러고보면 최근 미디어에서 왠지 모르게 해산물이 유행하고 있지 않나. 자네의 그 걸음걸이는 그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이는군. 흐물거리는 듯한 몸놀림이 해파리를 생각나게 하거든. 그러나 나노리 군은 그런 대중 취향에 쉽게 영합하는 인간이 아님을 알기 때문에 내가 이 순간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음을 이해하게. 자네 도대체 뭐 하고 있는 건가?”

어머나, 이사 선배. 왜 길바닥에 이렇게나 커다란 쓰레기가 버려져 있나 싶어서 깜짝 놀랐잖아요.”

그제야 눈앞의 이사노바를 인식한 나노리는, 창백한 얼굴로 오들오들 떨고 있으면서도 마치 자신의 사명을 다하고야 말겠다는 것처럼 독설을 내뱉었다. 이사노바는 그 독설을 음미하듯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나노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털실로 짠 모자 너머로 떨림이 전해져 왔다.

오랜만에 듣는 나노리 군의 독설은 과연 한겨울의 찬바람조차 우습게 느껴질 정도로군. 그런데 자네가 추위를 타던가?”

추위가 무슨 이사 선배라도 되는 줄 알아요? 타고 다니게? 탄다고 하니까 갑자기 벽난로 생각이 나네. 지금 당장 활활 타오르는 벽난로에 장작 대신 들어가서 웅크리고 있고 싶어요. , 정말 따뜻하겠다…….”

추위 때문인지 독설의 벡터가 이상한 쪽으로 향하고 있군……. 그렇게 추운 걸 싫어한다면 밖엔 왜 나왔나?”

그러자 나노리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품에 안고 있던 패키지를 꺼내 보였다. 게임 타이틀은 듣도보도 못한 것이었지만, 그 제작사는 이전에도 몇 번인가 봐서 눈에 익어 있었다.

또 막장 게임을 사러 갔다 오는 길인 모양이군.”

막장 게임 아니거든요. 미래가 없다 못해 과거마저 침식당한 결과 인생이 송두리째 트라우마라는 이름의 현재에 지배당하고 있는 막장 인생 이사 선배랑 같은 취급 하지 말아주실래요? 우주에 동화되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게임, 우동게거든요. 우동게라고 하니까 갑자기 우동 생각이 나네. 따끈한 우동 한 그릇을 머리에서부터 끼얹고 싶어요. , 정말 따뜻하겠다……

나노리의 상태를 종합적으로 진단한 결과 이대로 대화를 속행하는 것이 치명적인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는 판단을 내린 이사노바는, 일단 모든 행위를 중단하고 그녀의 귀갓길에 동행하기로 했다.



2.


자기가 살고 있는 원룸에 돌아와서도 한동안 헛소리를 연발해대던 나노리는 전기난로 곁에서 한세월을 보내고 나서야 비로소 원래의 자신을 되찾았다.

어머나, 이사 선배. 왜 제 방에 이렇게나 커다란 쓰레기가 버려져 있나 싶어서 깜짝 놀랐잖아요.”

그리 오래지 않은 과거에 같은 말을 들은 기억이 있네만, 나노리 군. 혹시 기억이 통째로 날아가기라도 했나?”

어쨌거나 저쨌거나 이사 선배가 어째서 제 방에 계신 건가요? 이건 도대체 무슨 괴롭힘이죠?”

자네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나노리 군, 나는 정신을 잃고 눈 속에 파묻혀 있던 자네를 업어들고 미끌거리는 길바닥과의 사투 끝에 여기까지 옮겨 온 거라네.”

정말요? 저는 이사 선배가 할 일 없이 어슬렁대다 문득 눈에 띈 미소녀 동아리 후배에게 추파를 던지고선 그녀가 제정신이 아닌 틈을 이용해 집 안에까지 따라 들어온 게 아닌가 걱정하고 있었는데.”

저런, 하마터면 크나큰 오해를 정정하지 못하고 넘어갈 뻔했군.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어.”

, 만약 제 예상이 사실로 밝혀지기라도 했다면 친고죄 시효인 6개월 이내이면서 이사 선배가 소년법의 혜택을 받지 못하게 되는 내년 생일을 노려 성희롱 혐의로 고소하려고 했으니까요. 정말 다행이네요.”

나노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박수를 쳤다. 이사노바도 박수를 쳤다. 사람 대신 게임과 만화가 살고 있는 듯한 원룸 안에 두 사람의 박수 소리가 공허하게 울렸다.

하하하. , 이제 자네가 사온 게임 이야기를 하지. 자네가 사온 게임은 막장 게임이 아니라 우주에 동화되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게임인 우동게에 해당하는 것이겠지?”

이사노바가 득의양양하게 말하자 나노리는 깜짝 놀란 얼굴로 돌아보았다.

선배가 어떻게 그걸?! 우동게 오타쿠들 사이에서도 마이너한 게임이라 타이틀만 보고 이 게임이 우동게라는 사실을 인식하기는 어려운 일인데! 설마, 선배도 저희 우사모에 가입하신 건가요?”

우사모가 뭔가?”

“‘우동게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그렇게 이름을 붙이니 왠지 토끼 귀를 한 특정 캐릭터를 애호하는 모임인 듯한 뉘앙스가 더 강한데?”

편견이에요.”

부원은 누가 있나?”

저 혼자인데요. 부원이라기보다 부장이지만.”

그럼 만약 내가 거기에 가입했다면 자네도 이미 알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우사모는 가입과 탈퇴를 부원의 자유에 맡기는 것이 모토니까요.”

나노리 군은 반장 해본 적 있나?”

조장도 해본 적 없어요.”

모자와 코트와 장갑을 벗어 정리한 나노리는, 이윽고 거치형 게임기를 꺼내 주섬주섬 연결하기 시작했다. 뒤에서 그녀의 땋은 머리가 흔들거리는 것을 보고 있던 이사노바가 문득 기억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자네 작년까지는 머리 땋지 않았었지?”

올해 동아리에 신입생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스트레이트였죠.”

왜 땋기 시작한 건가?”

같은 동아리에서 누군가와 캐릭터가 겹치는 건 싫으니까요. 한참 된 일인데 왜 이제 와서 거론하시는 건가요?”

나노리는 예상치 못한 반문에 변명을 궁리하기 시작한 이사노바를 무시한 채 매뉴얼을 한 번 훑은 다음 게임 소프트를 본체에 삽입했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뒤에 앉아 있던 이사노바를 돌아보더니 새삼스럽게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이사 선배, 아직 계셨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자네의 대사 2줄 사이에 내가 사라질 만한 물리적인 여유가 있었다고는 여겨지지 않네만, 나노리 군. 어쨌든 이런 때가 아니면 그런 막장……, 아니, 우동게를 접할 기회는 없을 것 같아 이참에 봐둘까 싶어서 잠자코 기다려 보았네.”

어머나, 선배도 우사모의 일원이 되시더니 드디어 우동게의 가치를 실감하신 모양이군요.”

나는 그런 모임에 가입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한 적이 없네만.”

우사모는 가입과 탈퇴를 부장의 자유에 맡기는 것이 모토니까요.”

은근슬쩍 자유를 누리는 주체가 바뀌어 있군……. 애초에 우리 학교는 두 개 이상의 동아리 활동을 허용하고 있지 않아. 한 동아리의 부장으로서 자네의 양다리는 인정할 수 없네.”

에이, 쩨쩨하긴. 그럼 관둘래요.”

노파심에서 묻겠네만 어느 쪽을 관둔다는 건가?”

이사 선배의 인생을요.”

나의 생사여탈권은 자네가 쥐고 있는 건가…….”

그 대화를 끝으로 두 사람은 잠시간 침묵을 유지했다. 한동안 전기난로가 웅웅대는 소리와 거치형 게임기의 나지막한 구동음만이 빈자리를 채웠다.

그 침묵은 기실 화제가 떨어졌기 때문이거나 의도적인 분위기 조성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이사노바가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나노리가 쥐고 있다는 사실에 경악하여 입을 다물게 된 것은 더더욱 아니다. 다만 금방 게임의 오프닝이 시작될 거라 믿고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 다 그것을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오프닝 화면은 시작되지 않았다.

참다못한 이사노바가 먼저 침묵을 깼다.

자네가 하는 게임들은 모두 이렇게 늘어지는 로딩 시간을 갖고 있나? 아니면 자네의 게임기 본체에 문제가 있는 건가?”

이 게임의 로딩이 특별히 긴 거예요, 이사 선배. 성급한 일반화는 하지 말아 주세요. 그리고 다시 한 번 제 게임기를 모욕하시면 내일은 선배의 죽음이 전 세계에 일반화될 거예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나노리는 다른 게임을 넣어 구동이 제대로 되는지를 착실하게 확인했다. 본체는 정상이었다. 다시 새로 산 게임의 로딩을 시작했다. 또 침묵이 흘렀다. 이사노바는 로딩을 기다리는 동안 바닥에 굴러다니던 만화를 주워들어 읽는다.

만화를 읽는다.

읽는다.

읽는다…….

깜짝 놀랐어요!!”

이사노바가 자신이 게임의 로딩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거의 잊어갈 때쯤, 나노리가 소리쳤다.

왜 갑자기 느낌표를 두 개나 써가며 소리를 지르나? 문장부호의 중복 사용은 문법적으로 허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었나?”

깜짝 놀랐어요!”

……아니, 올바르게 고쳐 말하라는 건 아니었네만. 우리가 활동하는 세계에서 그 정도는 분명 허용 범위 안쪽이고, 실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우리는 문법의 품을 벗어나 있는지도 모르니까. 아무튼, 캐릭터 만들기를 위해 습관적으로 독설을 내뱉긴 하지만 실은 은근히 성실한 성격인 자네가 문법적인 오류를 저질러가며 놀라움을 표해야만 했을 정도로 놀라운 사실은 대체 뭐란 말인가?”

이 게임, 구동이 되질 않아요.”

그게 그렇게 놀라운 사실인가?”

놀라워요. 놀라지 않을 수 있나요? 어떤 크림조너가 지금 이 자리에 있어도 놀라지 않을 순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자네도 크림조너 아니었나?”

비슷해 보일지도 모르지만 달라요. 속은 같지만, 종은 다르다고 할까. 저는 게임의 허술함을 진지하게 즐기려는 생각은 없고, 단지 만든 사람들의 실수로부터 우연하게 빚어진 세상의 틈을 관찰하는 취미를 가졌을 뿐이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처음부터 구동이 되지 않는다는 건 상정 밖의 일이죠. 완성된 게임일수록 틈이 적고, 그 틈이 벌어질수록 저의 취향인 게임이 되는데, 아예 구동이 되지 않는다는 건 틈새 운운할 레벨이 아니거든요.”

알기 쉽게 설명을 하게.”

선배의 입장에 빗대자면, 좋아하는 회사의 미소녀 게임을 사 왔더니 어째선지 텍스트 창으로 개발자가 취미로 쓴 판타지 소설이 흘러나오고 있는 사태라고 말할 수 있어요.”

뭐라고! 그건 놀라지 않을 수 없군! 그 정도의 사태란 말인가!”

이 대목에서 공감을 얻는 건 한편으론 짜증스러운 느낌도 없지 않지만, 아무튼 그래요. 저는 지금부터 제작사에 전화를 하겠습니다. 선배는 웬만하면 슬슬 집으로 돌아가 주세요.”

그렇게 말하고, 나노리는 전화기를 들고 매뉴얼에 쓰여 있는 전화번호대로 다이얼을 누르기 시작했다.



3.


나노리는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취향이 특이한 소녀였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훨씬 이전부터 그녀는 남들과 다른 것을 좋아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남들이 좋아하는 그것의 반대편에 있는 것들을 좋아했다.

다수에게 높은 평가를 받으며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것들의 반대편에 존재하는 것.

형편없는 영화와 형편없는 소설과 형편없는 노래와 형편없는 그림과 형편없는 만화와 형편없는 연극과 형편없는 배우, 같은.

세상이 형편없다고 평하는 것으로부터 무언가를 읽어내기를 좋아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지나치게 성실한 평소의 행실에 대한 반동이었는지도, 혹은 남들과 반대로 행동하고 싶은 단순한 충동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이유가 무엇이든,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무렵, 역사의 그늘에 존재하는 무언가에 심취하는 행위가 그녀에게 있어 떼어낼 수 없는 한 부분이 되어 있었음은 틀림없다.

그녀가 태어나면서부터 독특한 취향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을지라도, 스스로 그런 자신을 만들어 가진 시점에서는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좋아하는 그 무엇을 가지고도 남들과 공감하지 못했다.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허나 실망하지는 않았다. 실망할 것은 없다. 실망할 이유는 없다. 다른 사람과는 다른 것을 좋아하고, 그것으로부터 남들이 보지 못하는 무언가를 볼 수 있는 자신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적도 없다.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부러워한 적도 없다. 돌이킬 수 없었지만, 돌이키고 싶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면 이해하고자 노력하지 않으면 될 뿐이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누구와의 반목도 마찰도 빚어내지 않았다.

자신이 좋아하는 무언가가 타인에게 질타 받는다는 사실 자체가 그녀에게는 이미 당연한 현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그녀는 고등학생이 되었다.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신입생을 대상으로 한 동아리 권유 기간이 찾아왔다.

각 동아리가 학생들을 상대로 홍보를 할 수 있는 시간은 학교 측에서 따로 마련해 주지만 의무적으로 동아리에 들 필요는 없었고, 나노리도 굳이 동아리에 소속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다만 미소녀가 그려진 포스터를 들고 와 신입생들에게 한껏 비웃음을 산 어떤 임시 동아리의 부장이 너무 형편없어 보였기에 흥미가 생겨 부실을 찾아가 보았을 뿐이었다.

비품이랄 만한 것도 없이 휑한 임시 부실에 혼자 앉아 있던 그는, 나노리가 들어서자 환영한다는 듯 두 팔을 벌려 인사했다.

좀 이상한 사람이네.

그것이 그에 대한 그녀의 첫인상이었다.

여기는 뭐 하는 곳인가요?”

라고 그녀가 묻자,

자네 같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지.”

라고 그가 대답했다.

그녀와 그는 면식이 없었기 때문에, 그것은 틀림없이 아무렇게나 둘러댄 한마디에 지나지 않았다.

헛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아무렇게나 내뱉은 한마디였기에, 헛소리에 지나지 않았기에, 나노리에게 조금 더 이야기하고자 하는 의지가 생겼는지도 모른다.

저 같은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가요?”

자네는 나 같은 사람이지.”

그녀는 여전히 입구 근처에 선 채, 그는 여전히 자리에 앉아 양 팔을 벌린 채, 대화가 계속됐다.

선배님 같은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가요?”

그건 나도 아직 풀지 못한 숙제일세. 여기는 그 숙제를 함께 풀기 위해 만들어진 동아리인지도 모르지.”

뭔가 깊은 속뜻이 숨어 있는 듯한,

그런 것처럼 속이려는 의도가 가득 담겨 있는 듯한 헛소리였다.

그런데, 왜 그렇게 이상한 말투를 쓰시는 건가요?”

이상한 말투?”

평범한 고등학생이라면 쓰지 않을 말투니까, 이상한 말투.”

그야 평범한 고등학생이고 싶지 않기 때문에 사용하는 것이지. 한마디로 말하면 일종의 캐릭터 만들기라고 할 수 있겠군.”

캐릭터 만들기?”

남들에게 보이는 나 자신을 만들어 가는 행위일세.”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나 자신을 만든다.

그것은 그녀의 평소 가치관과는 반대되는 것이었다.

자기 자신이 특이한 취향을 가진 것이 사실이라도, 그것을 공공연히 내보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왔기 때문에.

반드시 누군가에게 이해받을 필요도 없고, 이해받기 위해 몸부림칠 필요는 더더욱 없다고 생각해 왔기 때문에.

그런 걸 하면서 시간을 낭비하는 건 너무 바보 같지 않나요?”

그녀는 평소라면 입 밖에 내지 않았을 그런 말을 내뱉고는 아차 싶었는지 손으로 입을 가렸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한 태도로 대답했다.

바보 같이 보일 수도 있고, 실제로 바보 같을 수도 있겠지. 그 사실은 부정할 수 없네. 하지만 바보 같은 모든 것에 의미 따위는 없다고 자네는 말하고 싶은 건가?”

그녀는 대답할 수 없었다. 바보 같은 것에 흥미를 느끼는 것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었다.

그는 딱히 대답을 기다리는 기색도 없이 말을 이었다.

바보 같아 보여도, 바보 같아도 상관없지 않겠나? 바보 같은 것은 어떤 형태로든 기억에 남기 마련이지. 남들이 기억하지 않는다고 해도 나 자신이 기억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해. 지금 이 순간 저질러 놓은 바보 같은 것들이 미래의 어느 순간에 반드시 보물이 되어 찾아올 테니까. 그러니까 나는 바보 같은 것과 평범한 것 중의 하나를 택하라고 한다면, 바보 같은 것을 택하겠네.”

펼쳤던 팔이 저려왔던지, 그는 팔을 거두어들여 팔짱을 끼며 덧붙였다.

평범한 건 정말로 재미없잖나?”

정말로 선문답 같은 대화였다.

그렇다기보다 선문답 그 자체였다.

그 선문답의 어느 부분이 나노리가 입부를 결정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는지는 알 수 없다. 부실 안에 존재하던 모든 부분이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고, 그 어느 것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나노리의 변덕에 의해서라는 한 마디로 정리해도 아무런 문제는 없다.

중요한 사실은, 그가 만든 동아리에 그녀가 입부했다는 것.

누군가에게 이해받고 싶다고도, 누군가를 이해하고 싶다고도 생각하지 않고, 그런 관계가 자신에게 큰 의미가 없다는 입장을 여전히 견지하면서도, 그래도 그녀가 그와 만났다는 것.

하나는 전체에게, 전체는 하나에게.

하나는 둘에게, 둘은 하나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녀는 자신이 궁리해 온 독설을 듣고 유쾌하다는 듯 웃어대던 그의 얼굴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4.


이사 선배, 아직 계셨어요?”

레퍼토리 반복은 이제 됐네. 그보다 뭐라고 하던가?”

통화를 끝낸 나노리가 말하자, 아까부터 읽던 만화의 전개가 너무 진지하게 막장으로 치닫고 있어서 덮을까 말까를 치열하게 고민하던 이사노바도 고개를 들었다.

패키지를 갖고 오면 환불을 해 주겠대요.”

디스크 쪽에 문제가 있는 건가?”

그 쪽에서도 실행해 보니까 같은 문제가 발생하나 봐요. 매장에 풀려 있는 모든 물량에 대한 회수가 결정되었다는군요. 조기에 발견해 줘서 감사하다고 인사까지 받았어요. 정말 얼간이 같은 사람들이죠? 그래서 좋아하는 거지만.”

이 추위에 다시 밖에 나가게 생겼군.”

이사노바가 염려된다는 듯 말하자, 나노리가 디스크를 꺼내 패키지에 집어넣으며 대답했다.

환불 같은 건 안 받을 거예요.”

어째서? 자네가 좋아하는 제작사의 게임이지 않나?”

그래서 더욱, 이라고 할까요? 사실 못 만드는 걸로 유명해진다는 건, 회가 거듭될수록 의도적으로 못 만들고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니까요. 제가 보고 싶은 건 무언가가 부족한 사람의 실수로부터 빚어진 균열이지, 의도적인 삽질은 아니거든요. 슬슬 손을 뗄까 싶던 참이었는데 마지막에 와서 진면목을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이 정도로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으니 아마 여러 가지 의미에서 다음은 기대할 수 없겠죠. 그렇다면 이 디스크를 추억으로 남겨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하하하. 자네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생각이군.”

이사 선배라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선배는 저 같은 사람이니까.”

자네는 나 같은 사람이고 말이지.”

이사노바는 그렇게 말하고 웃으며 전기난로 근처에서 피어오르는 일렁임을 지켜보았다.

이사노바가 혼자서 만든 동아리에 후배들이 입부하고 올해 임시 동아리에서 정식 동아리로 승격되기 전까지는 겨울에도 난로 하나 없이 동아리 활동을 했다.

그럼에도 나노리가 긴 겨울 동안 한 번도 춥다고 투덜댄 적 없었고,

정신이 나간 나머지 헛소리를 한 적도 없었다는 사실을 그는 기억하고 있다.

나노리 군.”

이사노바는, 그로서는 드물게도 뜸을 들였다.

아직도 내 말을 들을 준비가 안 됐나?”

그 물음에 나노리는 책장을 정리하던 손길을 멈췄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어온 이상, 은근슬쩍 피하는 건 의미가 없었다. 그러나 돌아보지는 않은 채 대답했다.

준비가 안 됐다고 하면 말 안 하실 건가요?”

됐다고 할 때까지 기다리지.”

언제까지요?”

내일이 되기 전까지. 내일 모두 앞에서 발표할 예정이니까.”

크리스마스라서요? 저는 그런 데에 휩쓸리는 거 싫어해요.”

휩쓸리는 게 아니네.”

이사노바는 말했다.

우리는 그 날도 부활동을 하는 거야.”

……말꼬리도 못 잡게 하시는군요.”

나노리는 그제야 이사노바를 돌아보았다.

이사노바도 전기난로에 고정하고 있었던 시선을 나노리에게로 향했다.

나노리는 선 채, 이사노바는 앉은 채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내년부터는 자네가 부장이네.”

싫어요.”

나노리의 대답은 단칼이었다. 이사노바도 그 대답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머뭇거리지 않고 재차 입을 열었다.

어째서 싫은지 물어봐도 되겠나?”

싫으니까 싫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는 이사 선배는 왜 저에게 부장을 맡기고 싶어 하시는 건가요? 그런 건 누가 해도 같은 거잖아요?”

분명 고등학교 동아리 부장 같은 건 누가 해도 그렇게 다르진 않을 테지. 게다가 우린 유서 깊은 동아리도 아니고 대단한 활동을 하는 것도 아니니 더 그럴 거야. 하지만 나는 나노리 군이 부장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네. 그것만으론 안 되나?”

자신 없어요. 반장은 고사하고 조장도 해본 적 없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불과 몇십 분 전까지 우사모의 부장이었지 않나?”

지금 농담 하고 싶은 기분 아니에요.”

그건 농담이었던 거군.”

농담으로 한 말은 아니었지만, 이제 와선 농담이라구요. 그런 건. 선배가 졸업한다는 사실에 비하면요.”

내가 졸업하면 자네도 동아리를 그만 둘 생각인가?”

이 질문에 나노리는 약간의 공백을 두고 대답했다.

그만 둘 거예요.”

그래서 부장이 하기 싫다는 거로군?”

그렇게 되겠죠. 선배 없는 동아리에 억지로 묶여 있고 싶진 않아요. 저는 동아리에 들기 전의 원래 생활에도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으니까. 아쉬울 건 없어요. 후배도 귀엽지 않은 녀석들뿐이고.”

뻔한 거짓말을 하는군……. 머리모양까지 굳이 손이 가는 걸로 바꿔가면서 후배의 영역에 신경을 쓰는 주제에. 이사노바는 그 말을 입 밖으로는 내지 않았다.

선배도 고등학교 졸업하면 캐릭터 만들기 같은 건 관두실 생각이겠죠?”

그렇겠지.”

이유는요?”

나노리 군이 없는 곳에서 그런 걸 해도 의미가 없으니까

이 말에 나노리는 약간 움찔했다.

그러면 제가 동아리를 그만두는 것도 안 될 것 없겠네요. 피차 같은 이유 아닌가요?”

안 같네. 떳떳한 졸업생으로서 쿨하고 멋지게 떠나가는 나와 받아줄 사람 없는 어리광을 부리는 자네가 어떻게 같나?”

요는 졸업을 하느냐 안 하느냐의 차이라는 말씀이시죠?”

표면적으로는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

그럼 졸업 하지 마세요.”

나노리는 이사노바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선배가 졸업을 안 하시면 만사 해결이겠네요. 부장을 새로 뽑을 필요도 없고, 제가 그만두는 일도 없고, 어리광 받아 줄 사람도 있고, 그러면 되겠네요! 안 그래요? 이건 너무하잖아요! 뒤처리라도 하는 것처럼 저한테 다 떠넘기고서 가버리는 건 너무해요!”

나노리는 악을 썼다. 맥락을 무시하고 억지를 부렸다.

고등학교 입학 이후 이렇게 큰 목소리를 낸 것은 그녀에게도 처음이었다. 소리치지 않으면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여기서 우는 건 너무 뻔하다. 너무 평범하다. 피차 평범한 건 싫어한다. 울음은 참았지만 목이 아파 와서 더 말을 잇는 건 힘들었다.

캐릭터 만들기라는 건 말이네.”

이사노바는 그녀에게 향했던 시선을 다시 난로 쪽으로 돌려놓았다.

기본적으로 자기가 갖고 있지 않은 부분을 인위적으로 끌어다 붙이는 작업이지.”

자네도 물론 알고 있겠지만, 하고 이사노바는 덧붙였다.

나는 원래부터 대범한 성격도 아니었고, 동아리의 부장 같은 걸 할 만한 책임감도 리더십도 없는 인간이었네. 그런데 무언가의 실수로 이런 동아리를 만들어 버렸고, 거의 내몰리다시피 입부 권유를 돌게 된 거야. 반응은 말할 것도 없었지. 예상하고 실행에 옮긴 거긴 하지만, 아무도 오지 않는 부실에 혼자 앉아 환영 멘트를 준비하고 있을 때의 내 마음 속은 불안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 당당하고 싶어도, 책임을 지고 싶어도, 그럴 상대가 없다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다짐에 지나지 않으니까.”

이사노바는 다시, 나노리를 보았다.

그리고, 나노리 군이 왔어. 그게 모든 것의 시작이지.”

나노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섣부르게 목소리를 내다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아서 대답할 수 없었다.

내 캐릭터 만들기는 나노리 군으로부터 시작되었고, 그리고 나노리 군에서 끝날 거야. 내 고교 졸업과 동시에 캐릭터 만들기도 끝이고, 자네가 이상하다고 평했던 이 말투도 쓸 일이 없을 것이고, 이사노바 대 나노리로, 부장 대 부원으로 만나는 일도 이제 없겠지. 그래서 섭섭하냐고? 불안하냐고? 그야 당연하지. 하지만 우리가 언제까지나 고교생인 건 아냐.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싶어서 모였지만, 영원히 바보 같은 짓만 하고 있어서야 그냥 바보일 뿐이겠지. 나는, 바보 같았던 나를 남겨두고 다음 단계로 올라갈 거야. 부원들 같은 건 이제 짐만 될 뿐이라고.”

이사노바는 손에 쥐고 있던 열쇠를 나노리에게 내밀었다. 임시 동아리였던 시절부터 쭉 맡아 온 부실의 열쇠였다.

그 짐을 네가 맡아 줬으면 한다. 너 역시 언제까지나 고교생일 수는 없지만, 아직은 고교생이니까. 남은 시간 동안 조금 더 바보짓에 어울려 줘.”

……저는, 못해요.”

할 수 있어.”

나노리에게 이사노바는 다짐하듯 말했다.

할 수 있어.”

어떻게 그렇게 무책임하게, 말할 수 있나요?”

나는 나노리를 잘 아니까. 나노리는 이런 사람이야. 세상의 그늘진 곳에서 인정받지 못한 채 남겨져가는 것들에게도 가치가 있음을 아는 상냥한 사람이고, 그 가치를 좀 더 많은 사람이 알았으면 하면서도 그럴 수는 없다는 걸 이해하는 현실적인 사람이고, 그럼에도 그것을 알릴 수 있도록 자신을 바꾸고 싶어 하는 진취적인 사람이고, 결국은 자신을 바꿔 낸 강인한 사람이지.”

그런 건 다, 이사 선배의 환상이잖아요.”

그리고 누구에게도 이해받고 싶지 않은 척 새침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 실은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어 본 적 없는 어리광쟁이이기도 했지.”

선배, ……!”

그리고 결정적으로 나는 나노리를 좋아한다. 그러니까 나노리 이외의 부장은 인정할 수 없어. 이상이다.”

이사노바는 벌떡 일어나며 선언했다.

TPO라는 표현의 존재 의의를 무색케 하는 선언이었다.

그리고 정적이 흘렀다.

화제가 떨어져서도 아니고,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게임의 오프닝을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부드럽게 튀는 듯한 전기난로 소리가 몇 번인가 반복되고,

이번에 침묵을 깬 것은 나노리였다.

저는……, 졸업한 선배는 좋아하지 않을 거예요.”

그래.”

제가 좋아한 선배는 80년대 우주인 모형처럼 조악하고 가짜 초능력자처럼 형편없는 이사노바 선배였어요. 평범한 인간이 된 선배 따위에게는 관심 없다고요. 그래도 괜찮나요?”

그녀가 가장 두려워한 것.

졸업을 하고 물리적 거리가 생긴다는 사실 자체보다도, 자신의 손을 잡고 평범하지 않은 것들의 세계를 함께 걷기로 한 사람이, 평범한 것들의 세계로 되돌아가는 것.

하지만 인간이 언제까지나 중 2병을 앓으며 살아갈 수 없는 것처럼, 언제까지나 평범하지 않음을 가장한 채 살아갈 수는 없다.

……괜찮아.”

머지않아 그녀도 스스로 깨닫게 될 그 사실을 상기하면서, 그는 대답했다.

그럼 주세요.”

나노리는 그렇게 말하며 그의 손바닥 위에 있던 열쇠를 빼앗듯 가져가고는,

그리고 받으세요.”

아까 사 온 게임 패키지를 그의 손 위에 올려놓았다.

구동도 안 되는 게임 소프트를 어디에 쓰라는 거야?”

바보 같은 것이야말로 미래의 어느 순간에 반드시 보물이 되어 주는 것, 아니었나요?”

2년 전의 말을 인용하긴 했지만, 어떤 의미로 그 패키지는 그녀에 의해 평범한 세계로 돌아가는 길을 가로막힌 피해자이기도 했다.

미련이 철철 넘치는군, 하고 그가 중얼거렸다. 나노리는 모르는 척 그의 등을 팡팡 두드리며 현관 쪽으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 나가요 나가. 그리고 내일부터는 제 얼굴 봐도 친한 체 하지 말아주세요. 부장 명령입니다.”

가차 없네……. 독설 캐릭터를 오래 하더니 성격까지 쌀쌀맞아 진 거 아냐?”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는 가까스로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그가 졸업하면 또 신입생이 들어올 것이고, 개중에는 2년 전의 자신들만큼 빈틈이 많은 형편없는 녀석들도 있을 테다. 그래도 괜찮다. 어떤 형편없는 실수라도, 어떤 바보 같은 짓이라도 눈을 돌리지 않고 지켜봐 주는 그녀가 있다면 괜찮을 것이다. 마음 놓고 전력으로 바보처럼 지낼 수 있다. 평범하지 않고자 바라는 것만으로도 평범하지 않을 수 있는 어린애의 특권을 누릴 수 있다.

이제, 괜찮다.

나노리의 손에 밀려나면서, 그는 좁은 원룸을 빙글 둘러보았다.

전적으로 그녀 취향에 맞는, 평범하게 재미없는 만화책들과 보통으로 지루한 소설들에게 작별을. 아무리 그래도 정말 볼 게 못 되었지…….

이따금씩 동아리 부실로 불려와 부원들의 놀이 상대가 되기도 했던 거치형 게임기에게도 눈짓으로 인사를. 물론 소프트는 다른 부원이 가져와야 했지만…….

그리고 무서운 추위로부터 후배를 지켜 주는 전기난로에게는, 무한한 감사를. 대화가 끊겼을 때 힘내 준 것도 고마웠다.

물론 원룸은 좁기 때문에 실제로는 아주 짧은 거리에 불과했지만,

나노리의 미는 팔에 힘이 없어서일까,

감상에 젖을 시간은 의외로 충분했다.

선배.”

문 밖으로 밀려나 신발을 고쳐 신고 있는 그를, 나노리가 불렀다.

아직 이르긴 하지만…….”

조금 쑥스러운 표정으로,

하지만 최대한의 용기를 담아.


메리 크리스마스.”


그것이, 그녀가 선택한 배웅 방식.

그는 내일 하면 될 것을이란 말을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아마도 부원들 앞에서 평범하게 시류에 편승한 인사를 하고 싶지는 않았겠지.

그래도, 평범한 삶으로 돌아가는 사람에게는 평범한 세상의 인사를.

그녀로서 그에게 빌어줄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이 아니었을까, 그는 생각했다.

그는 복도를 걸어가는 동안 뒤를 돌아보지 않았지만,

문이 닫히는 소리는 오래도록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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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수려한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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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5)

하늬비
하늬비 10.12.02. 13:04
아 간결하고 좋네요. 적절한 헛소리체에 적절한 숙련감.
드라마성에서 확 후려치는 힘은 좀 없지만 수작 느낌.
cloud.9
cloud.9 10.12.04. 18:29
지금까지 본것들중엔 제일 낫네요. 장편 라이트노벨에서 일부 잘라온 것 같아요.
Quilt 10.12.05. 22:08
재밌게 읽었습니다. 기분좋아지는 글이었어요.
MMI 10.12.08. 04:01
보통으로 (상당히) 재미있었습니다.
캐릭터 조형에 있어선 후보작들 중 독보적인 위치가 아닐까 생각되네요.
서형민 10.12.21. 12:58
나긋나긋하게 즐거워지는 느낌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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