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이정표

하팀장 님의 우울 - 쿠키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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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려한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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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클로스는 처음부터 믿지 않았다. 산타할아버지는 우는 아이는 선물을 안 주신대~. 다시 말하면 산타클로스는 피해자와 가해자, 승자와 패자에 있어서 철저하게 전자만을 고려한 전형적인 현실적인 캐릭터가 아닌가? 그런 것은 나중에 커가면서 알아도 좋을 것들이련만, 이 오지랖 넓은 늙은이가 전세계 모든 아이들에게 세상의 진리를 조기교육하러 다니는 그 꼴이 내게는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 내가 머리맡에 양말을 올리고 잔 것은 산타를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 거짓선물을 바라는 동심과 아직 자식이 순수하다는 걸 부모님에게 알리고 싶은 위선과 중국제에 밀려 설 곳을 잃어가는 국내 섬유업계의 부흥을 바라는 소망이 모여서 만든 거짓된 행위였다. 생각해보면 산타클로스를 처음 보았을 때, 할아버지치고는 너무 목소리가 여려서 이상했던 데다가 나눠주는 선물이 너무너무 사소하고 싸구려에 작은 것들뿐이라서 저 빨간 늙은이는 분명히 가짜라는 것을 어린 나이에도 직감했다. 아니, 애초에 그림책에서 본 것과 해바라기반 선생님의 말과는 반대로 늙은 할아버지 대신에 허름한 산타복을 입고 수염만 붙인 젊은 여자라니 티가 나도 너무 나지 않는가. 속아주고 싶어도 속아줄 수 없었다. 그래도 좋아하는 척은 했지. 선물은 받아야 하니까. 다만, 앞서 말했듯이 선물이 너무나도 초라한 무언가여서-연필 2자루였던지, 3자루였던지 확실하게는 기억은 안 나지만-어린 마음에 상처를 받은 일이 있다. 그래도 선물을 받으러 산타 앞까지 갔을 때, 그 얼굴에 붙은 인조섬유로 만들어진 가짜 수염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던 것은 지금도 확실히 기억한다.

저 수염이 솜사탕이면 진짜 맛있겠다.


전 세계에서 콘돔이 가장 많이 팔린다는 1225일 밤.

남들이 많이 팔아준다는데, 굳이 나까지 나설 필요는 없겠지.’

나는 게임화면의 로그인 버튼을 마우스의 왼쪽버튼으로 클릭했고, 곧 오그리마 은행의 정경이 보였다. 수많은 커플들이 모텔이라는 종점을 향해 달리고 있을 때, 나를 비롯한 많은 솔로들은 리치왕을 잡기 위해 달리고 있었다. 사실 내 캐릭터는 얼왕 파밍을 다 끝낸 상태였기에 골드를 벌기 위해서라면 모를까 딱히 할 것은 없었다. PvP는 손이 고자라서 이미 왕년에 포기했다. 오그리마 앞마당에는 외로움을 증오심과 컨트롤로 연성한 수많은 마법사들이 깃발 주변에서 놀고 있었다.

세상에는 커플도 많고 솔로도 많구나…….’

굳이 따진다면 내게는 와우가 여친이나 다름없었다. 와우와 함께 설날, 추석, 크리스마스 그리고 수많은 휴일을 몇 번이나 같이 보냈는지 모른다. 흐규우우우. 잠깐 눈물 좀 닦고. 경매장, 우체통, 인벤과 은행 정리 등은 어제 다 했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말이지. 하여 너무너무 할 일이 없자, 그것이 슬퍼서 타나리스에 노겐포저 물약이나 사러 가기로 했다. 캐릭터를 오그리마 꼭대기의 와이번에 태운 다음 담배 1대를 물고 방을 나왔다. 다행히 고시촌이라 크리스마스의 들뜬 기운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조용했다. 2어 달 뒤면 대부분 고시의 1차 시험이 있으니 공부하는 고시생에게 크리스마스는 사치겠지. 그래도 크리스마스라고 느낄 수 있었던 건 고시촌 아래로 보이는 수많은 붉은 십자가들이 평소보다 조금 더 붉게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 내 안구가 붉어진 탓인가?

방으로 돌아오니 와이번은 이미 가젯잔에 도착해있었다. 물약을 사러 가는데 얼라 성박휘 만렙 한 놈이 쪼렙 블엘사제를 학살하는 것이 보였다. PvP는 젬병이라 무시하려는데, 미친 인간 대머리 성기사가 나까지 건드렸다. 천만다행으로 만렙만 찍고 템은 허접한 성기사였으므로, 별로 힘들이지 않고 무적 귀환시키는데 성공했다. 탄력템 좀 입은 애였으면 나도 도망쳤을 것이다. 싸워봤자 템도 안 되고, 컨도 안 되는 내가 발릴 건 뻔하니까.

그래도 크리스마스인데 얼라놈들은 개념이 없네. 항상 없었지만.’

크리스마스에 할 일이 없어서 쪼렙사냥이나 하는 얼라 놈들을 욕하면서 조용해진 가젯잔에서 물약을 사고 있으려니 귓말이 들어왔다. 아까의 쪼렙사제였다.

[붕특사제]님의 귓속말: ㄱㅅㄱㅅ

[붕특사제]님에게 귓속말: ㄴㄴ

[붕특사제]님의 귓속말: 님 템에 컨 좀 쩌시는 듯? 기코 ㅎㄷㄷ

[붕특사제]님에게 귓속말: ㅎㅎ

[붕특사제]님의 귓속말: 님 물약사러 오신거져?

[붕특사제]님에게 귓속말: ㅇㅇ

[붕특사제]님의 귓속말: 크리스마스에 얼왕도 아니고 이런 곳에 오시다니 ㅎㅎ 님이나 저나 같네여ㅠㅠ

[붕특사제]님에게 귓속말: ㅠㅠ

사실 나는 이런 종류의 대화를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싫어했다. 그냥 고맙다는 인사 정도면 충분하지, 쓸 데 없는 신변잡기까지 처음 보는 사람과 이야기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게다가 보나마나 저 랜선 너머에 있을 누군가가 예쁘고 귀여운 여대생일 리가 없지 않은가. 나와 같은 할 일없는 백수 아저씨겠지. 평소 같았으면 그냥 바로 차단리스트에 올렸을 터인데, 날이 날이니만큼 모질게 대할 수가 없어 그냥 어울려주었다.

[붕특사제]님의 귓속말: 저기 근데 님 뭐 부탁 하나해도 되나여?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붕특사제]님에게 귓속말: 뭔데요?

[붕특사제]님의 귓속말: 저기 줄파락 버스기사 구하고 있는데, 오늘 날이 크리스마스라서 그런지 같이 갈 사람도 없고 기사분도 없네요 ㅠㅠ

[붕특사제]님에게 귓속말: 그럼 부캐 접종하고 본캐로 놀면 되죠

[붕특사제]님의 귓속말: 이게 본캐라서요ㅠㅠ

[붕특사제]님에게 귓속말: 레알?

[붕특사제]님의 귓속말: 레알 ㅇㅇ

[붕특사제]님에게 귓속말: ...................

[붕특사제]님의 귓속말: 저기 죄송한데 시간 남으시면 줄파락 좀 돌아주실 수 있으세요?ㅠㅠ

……. 역시 차단했어야 했어. 한 번 놔두면 끝까지 기어오르려고 한다니까. , 그런데 크리스마스지. 그래도 난 파밍 완료된 본캐라도 있잖아. 저 불쌍한 인간이 이런 날에 혼자 줄파락 돌겠다고 여기서 얼라한테 썰리고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나는 행복한 것이 아닐까? 사실 할 것은 없었으니까 그 정도의 호의는 보여줄 수도 있겠지. 요금만 제대로 낸다면.

[붕특사제]님에게 귓속말: . 1-2바퀴는 돌아드릴 수 있는데.

[붕특사제]님의 귓속말: ? 진짜요?ㅠㅠ 너무너무 감사합니다.ㅠㅠㅠㅠ

[붕특사제]님에게 귓속말: , 요금은 얼마 내실래요?

계산은 확실하게 해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붕특사제]님의 귓속말: , 그게 제가 골드가 없어서요. 다른 걸로 드리면 안 될까요?

……진짜 불쌍하다. 이건 연기라도 해도 진짜 불쌍해.

[붕특사제]님에게 귓속말: 뭘루요?

[붕특사제]님의 귓속말: 말씀드릴 수는 없는데, 진짜 좋은 거에요. 그거 드릴게요. 1바퀴만 돌아주시면…….

[붕특사제]님에게 귓속말: 좋은 게 뭔데요?

[붕특사제]님의 귓속말: ㅎㅎ진짜 좋은 거에요. 저 사기 안 쳐요. 믿어주세요. ㅠㅠ

이 때 문득 든 생각이 정말로 저 붕특사제라는 인간이 먹튀를 할 생각이었으면 그냥 몇 골이라고 구체적인 요금을 말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금이야 기사 맘대로 선불, 후불이니까 내가 선불을 요구한다고 쳐도 일부만 조금 나에게 준 다음에 나중에 정산할 때 튀면 사기에는 어려움이 없다. 후불이야 말할 것도 없고. 그런데 굳이 골드가 없으니 다른 걸로 주겠다, 그런데 뭔지는 말을 못한다는 것을 보면 뭔가 줄 거는 있는데, 자기 딴에는 비싼 것이지만 나에게는 크게 가치는 없는 거라서 저렇게 말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불쌍한 인간이었다.

난 정말 행복했구나.’

그래서 그냥 사기여도 1바퀴 정도는 공짜로 돌아줘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축창에서 호토바이(2인용 탈 것)를 누르고 붕특사제에게 파티 신청을 했다. 신청을 수락한 붕특사제에게 파티창으로 말했다.

! !”

붕특사제가 호토바이에 올라타서 말했다.

오빠! 달료~~~! >_<”

그래, 이 정도 대꾸도 안 해주면 재미가 없지.


줄파락은 오랜만에 와보는 인던이었다. 너무 오랜만이라 처음에는 길도 헷갈렸지만, 검은바위나락같은 미로형 인던은 아니라서 쉽게 진행할 수 있었다. 붕특사제는 인던에 들어온 이후로는 말없이 열심히 템과 돈을 주우면서 내 뒤를 따랐다.

너무 말이 없는 게 불안하네.’

그래도 내가 먼저 말을 걸기에도 귀찮아서 그냥 가는 대로 광으로 몹을 잡을 뿐이었다. 그렇게 해서 진행해나가니 마지막 네임드인 족장까지 잡는 데에 길게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봉사차원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사실 버스 요금에 대해서는 인던을 도는 도중에 잊고 있었다.

, 정말 감사해요.ㅠㅠ 님처럼 친절하신 분 처음 봤어요.”

, 걍 시간 남아서 돌아드린 거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그럼 전 가볼게요.”

? 잠시만요. 요금 받으셔야죠.^^”

붕특사제는 나에게 거래를 신청해서 거래창을 띄웠다. 대체 뭘 주려고 이러나하고 보니, 아무 것도 안 올린 채로 거래요청 버튼을 누르는 것이다. 처음에는 실수인 줄 알았다.

님 거래확인 해주세요.^^”

장난인지 진짜 초보라서 그런지 알 수가 없었다. , 설마 거래 버그 같은 게 있나? 그런 소리는 못 들었는데.

님 장난쳐요? 아무 것도 없잖아요. , 됐어요. 어차피 요금 안 받을 테니까, 걍 마음만 받을 게요.”

하고 거래창을 취소하고 귀환석을 클릭했다. 그러자 붕특사제는 다시 나에게 거래를 걸더니 또 아무 것도 거래창에 안 올린 채로 거래요청을 하는 것이었다.

님 진짜 고마워서 그래요. 그러니까 거래완료 해주세요.ㅠㅠ

암것도 없는데 뭘 거래해요?”

그럼 그냥 속는 셈치고 거래완료 버튼이나 한 번 눌러주세요.ㅠㅠ 제발요. 제 크리스마스 소원이에요.ㅠㅠ

…….”

크리스마스 소원이라. 나도 아저씨. 저쪽도 아저씨(추정). 이런 우울한 두 사람에게 소원을 이루어줄 산타 따위가 올 리가 없다. 어릴 때 받았던 쿠폰은 이미 기간 만료. 사실은 받자마자 찢어 버렸지만. 그래, 누군가는 이 크리스마스에 연인과 가족과 함께 멋진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나는 우울하게도 게임이나 하는 인생이지. 정말로 산타 같은 게 있다면. 그래, 정말 있다면 말이지.

남들은 다 소원을 들어주는데 왜 나는 안 이루어줄까. 내가 바란 건 로또 1등도 아니고, 쭉쭉빵빵 미녀 여자친구도 아니고 정말 사소한 것들, 학관 점심메뉴가 육개장이었으면 좋겠다거나, 과모임에 복학생인 나에게도 빈말이라도 와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해주거나, 이번 학기 평점이 3.5만 넘기를 바란다거나 그런 것들 정도였는데. 사실 이런 건 소원도 뭣도 아니다. 굳이 말한다면 목표겠지. 먹고 싶은 게 있다면 학교를 나가서라도 먹을 수 있는 거고, 내가 돈이 많고 멋지다면 후배들은 알아서 부르겠지. 학점도 내가 좀 더 공부했으면, PPT를 조금이라도 더 화려하게 만들었다면, 억양도 강세도 없는 출처 불명의 영어 대신 네이티브 발언으로 울렁증 없이 멋지게 영어로 발표했다면 학점 때문에 벌벌 떨지는 않을 테지.

이런 것들은 목표다. 내가 노력하면 언젠가는 닿을 수 있는 것들. 노력을 안 해서 문제지만, 불가능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 외모는 돈을 상당히 투자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만. 손에 닿을 듯한 거리에 있어서야 소원이라는 것도 싸구려가 된다. 모름지기 소원이라면 정말 무슨 짓을 해도 내가 이룰 수 없는 그런 것이어야 한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정말로, 정말로 내가 바랐던 소원이라고 해봐야 대체 무엇이 있을까? 간절히 무언가가 이루어지기를 원했던 걸 생각해봐도 목표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 없었다. 굳이 하나 따지자면 어릴 때 처음 본 산타의 수염이 솜사탕이었으면 좋겠다는, 정말 어린 애 같으면서 이뤄질 리가 없는 소원이었다.

그런데 이 붕특사제라는 아저씨는 0원과 0원을 거래하는 버튼을 내가 한 번 눌러주는 게 크리스마스 소원이란다. 싸구려도 이런 싸구려가 없다. 인생이 싸구려가 되어가니 소원도 싸구려가 된 것일까? 나도 불쌍하지만 이 아저씨도 불쌍하다. 그에 걸맞게 내 동정심도 크리스마스 한정 대 바겐세일 중이었다.

그럼 거래완료 누를 테니까, 대신에 더 이상 귀찮게 하지 마세요.”

. ㅠㅠ 감사합니다.”

어찌 되었건 이 귀찮은 아저씨를 빨리 떼어 버리고 달라란으로 귀환하려고 했다. 바로 거래완료 버튼을 눌렀다. 원래는 그냥 거래창만 사라지는 것이 정상이었다. 그랬어야 할 터인데……. 갑자기 와우창이 꺼지고 크리스마스에 걸맞지 않는 푸른 초원과 파란 하늘의 바탕화면과 내 눈이 마주쳤다.

낚였구나…….’

, 0원끼리 거래하면 튕기는 버그가 있었던 것 같다. 버스를 요구한 걸로 봐서는 이 버그가 인던 내에서만 일어나는 것일 수도 있다. 낚였다는 분노보다도, 고작 이런 것 따위가 소원이었던 어떤 아저씨에 대한 동정심이 가슴 속에서 솟아났다. 동정심은 내가 상대보다 우위에 있지 않으면 결코 발현되지 않는 감정이다. ‘나는 그래도 이 정도는 되는데 저 인간은…….’이라고 느끼게끔 하는 게 동정심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 붕특사제란 인간은 정말로 불쌍했다. 나에게 동정 받을 정도였으니까. , 불쌍한 인생이다. 당신이나 나나. 담배나 한 대 더 태워야지. 담배갑과 라이터를 손에 들고 다시 방을 나서려 의자를 돌렸는데,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보증금 300에 월 28, 공과금 별도 3평짜리 내 방 안에 깔아둔 이불을 밟고서 빨간 산타클로스 옷에 산타 모자, 하얀 눈썹과 하얀 수염을 붙인 웬 여인네가 있었다. 마치 방금이라도 백화점 앞이나 지하철 역 앞에서 화장품 샘플이나 전단지를 나눠주고 있었다고 해도 믿을 그런 모습이었다. 모자 때문에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키는 165정도로 보였고 얼굴은 수염으로 가려져 있어도 미인이란 걸 알 수 있었다. 머리는 한쪽을 틀어 올렸는데 모자로 가려져서 무슨 리본이나 액세서리로 묶었는지 알기가 어려웠다. 다만 다른 한 쪽은 생머리 그대로 흘러내려서 어깨까지 오는 것으로 보아서 머리 길이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사실 눈길을 끈 건 얼굴보다도 가슴이었다. 옷으로 가려져있는데도 상당한 볼륨감을 자랑하고 있었는데, 아니 이런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갑자기 밀폐된 내 방에 어떻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 여자가 들어왔는지 그것부터 알아야 했다.

여자를 처음 보고 놀라서 소리를 지르거나 의자를 집어 들지는 않았다. 비상식적인 상황이었음에도 이상하게도 눈앞의 여자가 수상하다거나 위험하다거나하는 기분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데자뷰처럼 언제 어디선가 이 여자를 만난 것 같았다. 기시감은 추측이라기보다 거의 확신에 가까울 정도여서 이 무단침입자에 대해 누구였나를 곰곰이 생각했지만 도저히 생각이 나지 않았다. 대체 누구지?

뉘신지?”

내 질문에 그 여자는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너무 갑작스러웠죠? 죄송합니다. 전 이런 사람인데요…….”

그리고는 여자는 가슴 안쪽 주머니에서 명함을 1장 건넸다. 건네받은 명함에는 거칠고 울퉁불퉁한 빨간 종이 위에 부직포 조각으로 보이는 작은 녹색 트리가 오른쪽 여백에 붙여져 있었고, 눈 결정을 닮은 하얀 폰트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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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클로스 연합회 (Society Of Santa claus)

동아시아 대한민국지부 제1팀장 (East Asia Korea Division, 1st Team Manager)

하 루 희 (Ha Ru Hui)

팩스 번호 없음, 폰 번호 없음, 이메일 없음, 홈페이지 없음

(No Fax, Phone, E-mail and Home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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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나 하고 돌려본 뒷면에는 그냥 빨간 종이뿐, 아무 것도 인쇄되어 있지 않았다. 이 수상한 명함에 온 신경을 빼앗기고 있자니, 그 여자가 먼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앞으로는 하팀장이라고 불러주세요.”

그래, 지금은 명함에 신경쓸 때가 아니다. 먼저 해야 될 일이 있다.

하팀장씨, 제가 지금 상황이 전혀 이해가 안 되거든요? 조금 설명해주실래요? 육하원칙에 따라서 왜 여기에 무슨 일로 당신이 내 방에 있는지 말입니다. 아니 문은 닫혀 있는데 어떻게 들어왔죠? 당신 강도에요? 크리스마스에 빈 방이 이 동네에 얼마나 많은데 일부러 강도짓하려고 내 방에 들어온 거에요? 아니, 강도가 아닌 것은 느낌으로 알아요. 어디서 당신을 본 것 같긴 한데, 기억은 안 나네요. 아니, 그래도 말이 안 되잖아요? 어서 설명해봐요!”

내 혀를 떠난 수많은 단어들은 내 앞의 여자를 향해서 빠르게 날아가 제발 대답을 말해달라고 그녀의 고막을 진동시켰다.

……하하하.”

여자는 가벼운 헛웃음을 지었다.

하나하나 설명해 드릴 테니까 너무 그렇게 한꺼번에 묻지 말해주세요, 지훈씨. 숨김없이 모두 말씀해 드릴 테니까요. 그럼 하나하나 물어봐주실래요?”

역시 내 이름을 알고 있잖아? 분명히 어디선가 본 사람인데……. 하지만 하루희라는 이름은 처음 듣는 이름이다. 우선은 궁금증부터 풀자.

당신 누구?”

명함 보셨잖아요? 하루희에요.”

나 알아요?”

.”

나이는?”

지훈씨보다는 많죠. , 하팀장 대신 누나라고 불러주셔도 되요.”

내 방에 어떻게 왔죠?”

지훈씨가 거래완료 버튼을 누르셨잖아요? 그 덕분에.”

내 방에 왜 왔죠?”

왜긴 왜에요. 선물을 주려고 왔죠.”

무슨 선물?”

아까 말씀드렸을 텐데요. . . . 라고요.”

설마?

내 방에 언제 왔어요?”

지훈씨랑 눈이 마주치기 한 3초 전? 지금으로 치면 3분 정도 전이겠네요.”

이 명함 진짜에요?”

그럼 가짜 명함도 있어요?”

쓰리 사이즈는?”

비밀입니다. 원하신다면 3개 중에 1개 정도는 가르쳐 드릴게요.”

가슴.”

“88.”

키는?”

“166.”

몸무게는?”

우우. 우울한 연말이라 조금 폭식했더니 3킬로나 쪘어요. 여기까지만.”

생리주기는?”

, 생리한지 얼마 안 됐어요.”

남자 친구는?”

없어요. 있으면 오늘 같은 날 와우하고 있지는 않았겠죠.”

성적 취향은?”

헤테로 섹슈얼(아니, 그게 아니라 어떤 남성이 취향인지 물어본 건데…….).”

요즘 하는 게임은?”

와우.”

와우 서버명이랑 레벨 본캐이름 종족 성별 다 말해봐요.”

아즈샤라 40렙 붕특사제 블엘 여자, 참고로 방금 전까지 줄파락을 돌고 있었답니다. 친절한 버스기사분을 만나서.”

연봉은 얼마?”

여자 혼자 먹고 살 만큼은 되요.”

이젠 물어보기도 지친다. 만약 저 하팀장이라는 여자가 말하는 것이 모두 사실이라면 붕특사제라는 캐릭으로 와우를 하던 중에 친절한 버스기사--를 만났고, 그 은혜를 갚기 위해 무슨 마법이나 텔레포트 등을 이용해서 내 방에 왔다는 말이 된다. , 충분히 현실적이군.

………….”

이제 더 이상 물어보실 거 없으세요?”

그런 것 같은데…….”

그럼 이젠 제가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제발 보험, 보증, 교회, 다단계 이 4가지만 아니라고 빌면서 대답했다.

뭔데요?”

산타클로스를 믿으세요?”

다행이군. 아니다.

요즘 그런 걸 누가 믿어요. 전 어릴 때부터 아예 안 믿었어요.”

, 제가 알고 있는 그대로네요. 그럼 한 가지만 더.”

알면서 왜 물어봐?’

마음속으로 투덜대는 나에게 하팀장이 물었다.

한 번이라도 믿은 적이 없으시죠?”

.”

혹시 지금 원하시는 소원 같은 게 있으세요?”

글쎄요. 특별한 건 없는데.”

내 대답에 하팀장의 얼굴에 급격히 화색이 번졌다. 너무 기분이 좋아서 표정을 감추려야 감출 수 없는 그런 얼굴이었다. 대체 뭐가 그리 좋은 걸까?

정말이지. 크리스마스라고 우울한 일만 있는 건 아닌가 봐요. 이렇게 지훈씨를 만날 수 있게 되다니 너무 기뻐요! 아하하하.”

그러고서는 갑자기 나를 부둥켜안았다. 그 손힘이 워낙 강력해서 숨이 쉬기 어려울 정도였다. 아니, 이런 호흡적인 문제보다도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이 겨울날에 속옷과 다른 옷들은 어디 갔는지 산타복 사이로 가슴 속살과 계곡이 그대로 보였고, 그 가슴이 내 가슴에 밀착되어서 시각적인 문제와 촉각적인 문제와 심장박동적인 문제와 다리 사이의 입체적인 문제와 뇌 속의 리비도적인 문제를 동시에 유발했다.

, 잠깐만요.”

하팀장을 밀치고 내가 말했다.

, 죄송해요. 저 갑자기 너무 기뻐서 그만…….”

아니 그건 됐는데, 저 갑자기 소원이 생각났어요!”

무슨 소원?”

하팀장이랑 섹스하고 싶어요!”


요즘 사회에 마법이니 텔레포트니 하는 것은 세기말이니까 당연한 거다. 이상할 것도 없지, . 크리스마스에 은혜를 입은 한 여자가 혼자 사는 남정네 집으로 날아온다. 은혜를 갚고 싶은데, 돈은 없다. 애초에 저 하팀장이라는 여자는 아무런 짐도 없고 선물 주머니도 없다. 그럼, 결론은 하나. 선물은 하팀장 자기 자신! 브라도 하지 않은 저 차림새는 더욱 내 추리가 신빙성이 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하팀장의 갑작스런 포옹도 내가 그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게 정답이겠지? 여자에게 부끄러운 대사를 말하게 하느니 내가 말하는 게 남자로서의 도리일 것이다.

, 괜찮긴 한데, 콘돔 있으세요?”

없는데요.”

없으시면 그 소원은 안 되겠는데요.”

사 올게요.”

글쎄요. 지금 시간이…….”

하팀장의 말에 책상 위의 휴대폰을 열어 시간을 확인했다. 1225PM 11: 53. 크리스마스는 7분이 남아 있었다.

편의점까지 달려갔다 오면 10분이면 충분한데요.”

그러니까 안 되죠. 소원은 크리스마스 한정이거든요.”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줄 것처럼 이야기하다가 정작 본론에 들어가면 안 된다니, 이건 보험이랑 마찬가지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준다고 광고하고서는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지급 거절. 에효. 내 인생이 원래 그렇겠지, .

좌절해있는 나에게 하팀장이 말했다.

그런데 잘도 그런 소원을 말하시네요. 아하하하. 소원 성취 주간 중에 그런 소원은 처음이에요.”

이상한 단어가 포함되어 있는 것 같은데.

소원 성취 주간이 뭐죠?”

할당량을 채우는 기간이죠.”

무슨 할당량이요?”

말 그대로 소원성취요. , 시간이 얼마 안 남았으니까 간단하게 설명해 드릴게요.”

요약하면, 요즘은 애들이고 어른이고 산타를 안 믿는단다. 예전부터라도 안 믿었지만, 요새는 특히나 그런 게 심해서 산타의 존재성이 부정될지도 모른다고 한다. 그래서 산타의 존재성이 부정되지 않도록 직접 방문해서 소원을 이루어주고 그 사람이 산타를 믿게 한단다. 이상한 이야기다.

믿든 안 믿든 산타는 유명인이니까 존재성하고는 관계없잖아요?”

혹시 척척박사라는 단어를 아세요?”

척척박사라. 정말 오랜만에 듣는 말이다. 뭐든지 알고 있는 사람. 인터넷이 등장하고 지식인이 등장하면서 의미 없는 사어(死語)가 된 낱말. 뜻은 알고 있지만 이젠 거의 접할 기회가 없는 단어.

척척박사 같은 거에요. 지금은 산타를 믿든 믿지 않든 유명하니까 어떻게든 버티지만, 조금만 지나면 정말 어떻게 될지 몰라요. 나중에는 다 잊어버릴 거에요. 그럼 없어지는 거죠.”

그 조금이 얼만데요?”

저희 협회 계산으로는 한 500.”

조금치고는 조금 많은 감이 드는 조금이었다.

그래서!”

하팀장은 갑자기 활기에 찬 소리로 상기된 억양으로 말했다.

지훈씨 같이 처음부터 아예 산타를 안 믿은 분의 소원을 이루어주면 그만큼 산타의 존재감은 강해지죠. 지훈씨 같은 분을 찾아서 소원을 이루어주는 게 제 일이고, 산타클로스 협회의 일이기도 하지요. 개인마다 최소 할당량이 정해져 있는데, 한국에서 요새 지훈씨 같은 분을 찾기는 정말 어려워요. 지훈씨를 못 찾았으면 이번 연말에 시말서 쓸 뻔 했어요. 사실 시말서 각오하고 와우나 하고 있었지만. 아하하.”

이상한 이야기다. 산타를 요즘 누가 믿지?

요새 산타 안 믿는 사람은 널려 있을 텐데요?”

그렇죠. 하지만 산타는 나쁜 아이와 우는 아이에게는 못 간답니다. 착한 아이에게만 갈 수 있거든요.”

전 아이가 아닌데요.”

아뇨. 아이에요. 지훈씨는.”

나보다 나이가 많다고 했었지.

전 안 착한데요.”

아뇨. 착해요. 방금도 저 버스 태워주셨잖아요?”

설사 그게 착한 일이라고 해도, 내가 아이라고 해도 이래도 되는 걸까? 수능 1방에 인생이 결정되듯, 고작 동정심에 베푼 버스기사 1번으로 착하고 나쁘고를 판단한다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 지훈씨가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알겠어요. , 이건 정말 중요한 기밀인데, 특별히 지훈씨에게는 말해드릴게요. 산타와 선물 받을 사람에 있어서 말이죠. 선물 받을 사람이 착한 아이여야 하잖아요? 근데 그 착함은 산타 기준이에요. 나쁘게 말하면, 아무리 좋은 일을 많이 해도 그 대상 중에 산타가 없으면 선물은 못 받아요. 너무 늦어도 아이가 아니니까 타임 오버. .”

하팀장은 두 손으로 X표를 하면서 입으로는 퀴즈 프로그램에서나 나올 부저소리를 흉내 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산타에게 잘 보여야 산타가 선물을 준다 이 말이죠?”

, 바로 그거에요. 지훈씨 이해력이 좋으시네요. 아하하.”

엄청 쪼잔하네요.”

……, 너무 그렇게 직설적으로 말하지 마요. 이게 다 악순환 때문이에요. 사람들이 안 믿으니 그 만큼 산타의 수도 줄고, 산타의 수가 주니까 선행을 해도 그 중에 산타가 없고, 그러니 산타의 선물을 사람들이 못 받고, 선물이 없으니 사람들은 산타를 계속 안 믿고…….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 아차, 시간이! 지훈씨 어서 소원 하나만 말해줘요. 꼭 이뤄줄 테니까요. 근데 아무거나 되지는 않아요. 제가 가능한 것만 되니까……. 일단 생각나는 대로 소원을 말해주세요!”

휴대폰의 액정시계는 크리스마스의 끝이 이제 3분밖에 남지 않았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크리스마스가 가기 전에 내가 무언가의 소원을 말하고, 하팀장이 그것을 이루어 준다면 서로에게 윈-윈 일 것이다. 나도 좋고 산타도 좋고. 그런데 딱히 소원이라고 할 만 게 없는데 말이지. 만만한 게 돈 정도인가…….

“10.”

안 돼요. 돈이나 금, 보석류는 인플레 유발한다고 금지됐거든요. 허용되는 게 로또나 복권 정도인데 그건 대기 줄이 엄청 길어서 지훈 씨 생전에 된다는 보장이 없어요. , 보험금으로 10억 나오는 것도 되긴 되는데요.”

마음만 받겠습니다.

그럼 건강.”

자기 몸의 건강은 자기가 직접 챙기셔야죠.”

여자친구는?”

여자친구도 알아서 하셔야죠. 저한테서 찾으시면 곤란하죠.”

그럼 대체 어떤 소원이 가능한데요?”

제가 이뤄줄 수 있는 것이면서 지훈씨가 바라는 것.”

고등학교 수학책을 펴면 제일 처음에 나오는 단원이 집합이고, 그 집합 가운데 교집합이라는 것이 있다. 하팀장이 가능한 소원들의 집합A와 내가 바라는 소원들의 집합B의 교집합 에 있어서 B는 알고 있는데, A는 모른다. 설명하기에는 남은 시간이 빠듯한 것 같다. 아니, B를 알고 있는지도 의심스럽다. 돈이니 여친이니 하는 것들도 내가 평소에 소원이 아니라고 생각하던 것들이 아니었던가? 교집합을 구할 수가 없다. 정말 간절했던 거라면, 그거 하나밖에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진심으로 바란 거라고 해봐야 솜사탕뿐이에요.”

솜사탕이요?”

어렸을 때, 유치원에 온 산타 할아버지도 아닌 산타 아가씨가 붙이고 있던 가짜 수염요. 지금 하팀장이 붙이고 있는 것과 비슷한 거에요. 그때, 배가 고파서 그 수염이 솜사탕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간절하게 한 기억이 있어요. 선물도 연필 몇 자루로 최악이었거든요. 간절한 소원이라고 해봐야 이런 것뿐인데요.”

아하하하하하하하하!”

하팀장은 여자답지 않게 아주 호쾌하게 웃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이런 데서 만나네요. 아하하.”

원수?”

저 한국지부에 처음으로 발령이 난 게 20 년 정도 전인데요. 수습사원 기간 중에 아르바이트생으로 위장해서 유치원에 갔는데 결과가 최악이었어요. 애들에게 믿음을 주기는커녕, 의심만 키워 버려서. 제가 그 이후로 성격이 우울해졌어요. 일도 잘 안 됐고. 그 덕에 남들 다 편한 곳에서 일할 때, 저 혼자 한국에 남아서 지금까지 일해왔어요. 말은 팀장이지만 제 위로도 밑으로도 1명 없는 외톨이에요. 그 원수를 여기서 만나네요.”

그렇게 말하는 하팀장의 얼굴은 글쎄 분노라기보다는 가지고 놀기 좋은 장난감을 찾은 얼굴에 가까웠다.

뭐에요? 그게 어째서 제 책임이죠? 하팀장이 위장을 어설프게 하고 목소리도 여자 목소리 그대로 내니까 그런 거잖아요?”

누구든 처음에는 실수하는 법이에요!”

아니 그러니까 실수는 하팀장이 했잖아요. 근데 제가 왜 원수에요? 그리고 전 그 때 어린 애였다고요. 아무 것도 모르고, 그냥 느낀 대로 생각한 것뿐이라고요!”

비굴하게 변명은 그만하세요. 어린애라도 관용은 필요한 법이에요.”

………. 적어도 대한민국 안에서는 산타를 애들이 안 믿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복수는 일단 나중에 하겠어요. 그럼 시간도 없으니 그거로 합시다.”

그게 뭔데요?”

수염을 솜사탕으로 바꾸는 능력.”

……그런 건 됩니까?”

돼요.”

나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존나 짱인데?’


하팀장이 내 손을 잡았다. 작고 따뜻한 손이었다. 10초 정도 내 손을 잡고 있더니 손을 놓았다.

, 다 됐으니까 시험해보세요. 아슬아슬하게 시간 안이었던 것 같네요.”

어떻게 하는 거죠?”

그냥 아무 수염이나 잡고 솜사탕이면 좋겠다고 생각하면 되요.”

나는 하팀장의 가짜 산타 수염을 잡았다. 생각과 달리 수염은 너무나 쉽게 가볍게 내가 쥔 만큼만 떨어졌고 손가락에는 끈끈한 촉감이 묻어났다. 그리고 수염은 내 입안에서 샤르르 녹았다. 20년 만에 먹어보는 솜사탕은 아주 달고 맛있었다.

낼름.

할짝.

츄베릅.

부레릅.

지금 뭐 하시는 거죠?”

하팀장의 일갈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하팀장의 턱수염과 눈썹을 모두 내가 먹은 뒤였다.

……, 그게 너무 맛있어서…….”

남의 밥벌이 도구를 없애 버리기까지 하시다니 정말 대단하시네요.”

하팀장이 화를 냈다. 가짜 수염과 눈썹을 벗기고 드러난 맨얼굴은 꽤나 미인이라서 화난 얼굴도 귀엽게 느껴졌다. 수염 너머로도 미인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럼 이제 제 차례네요. 저 예전부터 그때의 애들을 만난다면 꼭 복수해주고 싶었어요.”

어떤 복수인데요?”

하팀장의 말에 되물으며 자세를 고쳤다. 싸우는 건 군대 이후로는 처음인가. 그것도 상대가 여자라니. 하지만 정당방위다. 남자, 그것도 예비군의 이름을 걸고 질 수는 없다.

당연한 거 아녀요? 이젠 지훈씨가 제 소원을 들어줘야죠.”

?”

무슨 말이지?

저 산타지만 남들 소원만 죽어라 들어주러 다니고 정작 제 소원은 아무도 안 들어줬다고요. 그러니 지훈씨가 제 소원을 들어주게 하는 걸로 복수할 생각이에요.”

저 그런 능력이 없는데요?”

괜찮아요. 지훈씨도 가능한 소원이니까.”

내가 가능한 게 대체 뭘까. 신장제공. 연대보증란에 서명. 대포통장 개설. 다단계 피라미드 회사의 하위 회원으로 가입. 기코 7000까지 버스.

제 부하가 되세요.”

다단계 피라미드 회사의 하위 회원 가입 당첨.

?”

한국지부엔 저 뿐이라서 혼자서 힘드니까 제 부하가 되시라고요. 남들 다 가지고 있는 루돌프 1마리 정도는 있는 산타가 되고 싶다 이 말이에요.”

루돌프는 사슴이잖아요? 아니 순록인가? 하여튼 사람이 아니잖아요?”

산타한테 채찍질 맞으면서 일하면 그게 루돌프죠. 사슴이든 순록이든 사람이든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나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존나 짱인데?’

예쁘고 채찍을 휘두르는 여자상사 밑에서 산타클로스의 꿈을 퍼트리는 일이라니, 정말로 멋진 일이다. 인생에 있어 3번은 온다는 기회가 바로 지금 찾아온 것이 틀림없었다.

………, 좋아요, 하팀장 님. 대신에 저도 조건이 있어요.”

뭐죠?”

겨드랑이를 보여주세요.”

겨드랑이는 갑자기 왜요?”

저 사실 겨드랑이 모에거든요. 겨드랑이를 보여주시면 하팀장 님의 부하가 되겠습니다.”

알았어요.”

하팀장은 뒤로 돌아서 산타복의 상의를 벗었다. 하얀색의 등이 그대로 보였다. 브래지어 끈 모양을 따라서 있어야 할 살색의 차이가 없어서 조금은 충격을 받았다. 설마 이 사람 평소에도 속옷을 안 입나? 하팀장은 산타복 안에는 아무 것도 입고 있질 않아서 수건으로 앞만 가리는 형식으로 옷으로 앞을 가린 뒤에 오른팔을 위로 들어올렸다.

이제 됐어요?”

두꺼운 솜옷을 입고 있었던 하팀장의 오른 겨드랑이에서는 조금 땀 냄새가 났다. 겨드랑이는 처음에는 매끈해보였지만, 자세히 보니 짧은 겨드랑이 털들이 이곳저곳에서 머리를 내밀어 나에게 인사를 하고 있었다.

아저씨, 안녕?”

이런 것은 나의 미학과 모에에 반하는 것이다.

안 되죠, 하팀장님. 제모는 확실하게 해주시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면서 나는 손가락을 하팀장의 겨드랑이로 가져갔다. 겨드랑이를 훑자 손가락 끝에 걸린 짧은 털들이 솜사탕이 되어 내 손가락에 달라붙었다.

간지러워요! 아하하하! 그만! 아하하하하! 지금! 아하하하! 뭐하는! 아하하! 그만! 아하하하하하하하!!!”

왼손으로는 옷으로 가슴을 가려야 했기에 내 손가락에 하팀장은 어찌 할 바를 몰랐다. 겨드랑이가 성감대인지 자지러지는 하팀장을 위해서 단번에 깔끔하게 겨드랑이를 훑었다. 그걸 입으로 가져가려는데, 하팀장이 고개를 돌리더니 내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가서 빨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입술이었다.

. 쪼옥……. 쪼오오옥오옥…….

하팀장의 입술과 혀와 침이 내 검지손가락을 유린했다. 하팀장은 다시 허리를 들어서 뒤로 돈 다음 옷을 입기 시작하며 내게 말했다.

내 것이에요.”

………아깝다. 먹을 수 있었는데.


옷을 다 입은 하팀장 님이 말했다.

그럼 나중에 연락할 테니까 기다려요.”

나중이 언젠데요?”

내년 1225.”

1년 뒤에나 발령이라니, 대기 시간이 너무 긴 것 아닌가? 하팀장 님을 1년 뒤에나 볼 수 있다니, 너무 아쉬웠다.

좀 더 같이 게임하고 싶다.

좀 더 같이 이야기하고 싶다.

좀 더 나를 안아줬으면 좋겠다.

좀 더 겨드랑이를 보여줬으면 좋겠다.

좀 더 나에게 채찍질을 해줬으면 좋겠다.

크리스마스 말고는 일 안하세요?”

산타가 크리스마스 말고 다른 날에 선물 주는 것 봤어요?”

방금 겨드랑이 보여주셨잖아요.”

그건 산타의 선물이 아니라 상사의 선물.”

나는 무릎을 꿇었다.

하팀장 님, 1년이나 금단 증상 견딜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요. 흑흑. , 그렇게 예쁘고 매끈하고 매력적인 겨드랑이는 처음 눈으로 봤거든요. 이젠 세상 어떤 다른 여자의 겨드랑이로 제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아요. 흑흑.”

입으로만 거짓눈물을 흘리는 나에게 하팀장 님이 말했다.

그래요. 그럼 어쩔 수 없죠. 가끔 제 제모나 도와주세요. 저 올해 할당량을 채웠으니 연말보고서나 쓰러 가야겠어요. 나중에 연락할 테니까 기다려요.”

나는 마음속으로 외쳤다.

올레!’

나중이 언젠데요?”

새해 첫 주정도? 그 정도면 겨드랑이 털도 좀 자랐겠죠?”

그리고 하팀장 님은 홀연히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내 방은 여전히 보증금 300에 월 28짜리 방이었고, 그 안에 나만이 홀로 남겨졌다.

……………….”

아직 입안에는 솜사탕 향과 맛이 남아 있었다. 하팀장 님이 떠난 자리에는 향수인지, 샴푸인지 알 수 없는 좋은 향기가 남아 있어서 나의 망상심을 자극했다. 곧 그 향기가 내게 말을 걸었다.

지훈아, 짧은 시간이나마 부귀를 누렸더니 과연 어떠하더뇨?

좋았습니다. 하팀장 님.


시간이 흘러 새해가 되었고 2월이 되었다. 계약기간이 다 되었기에 같은 동네의 다른 원룸으로 이사를 가야 했다. 꾸릴 짐을 챙기자니, 바닥에 던져진 작년의 탁상달력이 눈에 들어왔다. 한장 한장 넘기니 아버지와 어머니의 생신, 예비군 훈련, 여러 과목의 레포트 마감일과 시험날짜가 붉은 색연필로 그려져 있었다. 마지막 장은 12월이었다. 빨간 25일에 큼지막한 빨간 동그라미가 있었다.

취직한 날.

솜사탕 처음 만든 날.

쪼렙 무료 버스 태워준 날.

하팀장 님 겨드랑이 처음 본 날.

등등. 뭐가 그리 기념할 일이 많았는지 동그라미 안에 이것저것 적혀있었다. 이렇게 중요한 물건을 버릴 뻔 했다니. 나는 이 소중한 추억의 달력을 박스 안에 집어넣었다.

그러고 보니 얼마 뒤면 팀 미팅이 있다. 일주일에 적어도 1번은 열리는데, 뭐 사실 팀 미팅이라는 것은 그냥 간판이고, 하팀장 님과 서로 사는 이야기나 하고 ,같이 게임하고, 맛집이나 찾아서 놀러다니고, 채찍이나 맞고, 겨드랑이, 허벅지, 장딴지 제모 정도나 하는 게 일이다.

고작 그 정도의 일이지만 남들이 이 취업대란 속에서 허우적거릴 때 나는 벌써 당당히 SOS협회 동아시아 한국지부 제1팀이라는 어엿한 소속이 있으니 뿌듯하지 않을 수가 없다.

, 그런데 중요한 연봉이랑 복리후생을 안 물어봤네. 다음 미팅에 가련한 겨드랑이를 내놓고 자지러지는 하팀장 님을 괴롭히면서 물어봐야지. 일이 정말 정말 마음에 드니까 연봉은 적어도 상관없으니 복리후생은 4대 보험 정도만 됐으면 좋겠는데 말야.

Writer

수려한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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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4)

ㅁㅁㅁ 10.12.02. 01:58
나쁜 건 아닌데 뭐라고 해야할까요. 하루희란 캐릭터는 아무리 봐도 야겜이나 망가 속에서 튀어나온 히로인 A 같은 느낌입니다. 그래서 대놓고 패러디한 스즈미야 같은 느낌도 없고 캐릭터만의 무언가도 없습니다. 이야기 전개도 야겜과 망가의 스토리를 따르고 있는데 마지막을 비튼거고요. 마지막을 비튼게 잘됐다고 한다면 글쎄요. 썩 좋지는 않습니다. 이런 참신함보다는 예상가능한 재미가 더 나을 것 같습니다만 개인차겠죠. 제 말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쎾쓰씬이 있어야 했다고요!
ㅇㅇㅇ ㅁㅁㅁ 10.12.02. 18:55
어이 잠깐ㅋㅋ 마지막 말ㅋㅋㅋㅋ
cloud.9
cloud.9 10.12.02. 21:08
ㅋㅋ 첫문장부터 대놓고 하루히 패러디네요.
ㅁㄴㅇㄹ 10.12.06. 21:38
낄낄거리면서 보긴 했지만 이건 좀...;;
권한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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