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이정표

해피 크리스마스 - 별바람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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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려한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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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로 열흘째 그한테서 연락이 없다. 언제나 제멋대로, 정신 없게, 땅을 침대삼아, 하늘을 이불삼아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는 인간이라서 이런 일이 한두번은 아니었지만 오늘은 좀 심했다. 명색이 연인의 날, 크리스마스인데 연락도 없다. 벌써 전화기를 꺼내 통화버튼을 누른게 수십번이고,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된다는 말을 들은게 수십번이다. 망할 놈. 아무리 내가 먼저 고백해서 사귀자고 했지만 이건 너무 심하잖아. 핸드폰을 보며 그렇게 투덜거리니

 "포기해, 포기하면 편해. 매일 그런다며? 얘도 참 새삼스럽게…."

 란다. 지영이는 무심한 듯 시크하게 커피를 홀짝이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린다. 네가 정녕 내 친구 맞니? 응, 다시 무심한 듯 시크하게 답하고 커피를 마신다. 망할 년.

 "오늘 크리스마스잖아. 이러면 안되잖아."
 "그래서 내가 뭐랬니, 사귀지 말랬지. 꼴좋다."
 "님 나랑 지금 깊은 외적 갈등을 겪어보자, 이거죠? 이쯤 되면 막나가자는 거지요?"
 "뭐래니, 언제적 참여정부 유행어를 치고 있어? 지금은 실용정부거든. 이거 다 오해인 것 아시죠. 허허허. 닥치고 오륀지나 먹어, 이것아."

 그러면서 오륀지 한덩이를 까서 내 입에 넣어줬다. 상큼한 게 맛있, 아니 지금 이게 아니지.

 "너 나 지금 무시해? 하,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 이렇게, 이렇게 전화가 와야하는데 전화가 와야 하는데 왜 전화가 오지 않는거야. 난 햄볶고 싶은데 햄볶을 수가 없어! 하, 참 개같은 세상!"
 "헐, 진짜 뭐래니. 어? 잠깐만 전화왔다."

 그러니까 닥치고 이거나 먹으렴, 하며 다시 오륀지를 내 입안에 넣어줬다. 그리고 지영이는 핸드폰을 붙잡고 코맹맹이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웅, 그랬떠영. 지녕이는요, 자갸 밖에 없떠영. 알았떠영. 좀 있다가 봐영. 나도 사랑해여, 하며 전화를 끊었다. 헐, 이것이 지금 내 앞에서 염장을 지르나. 지영이가 내 얼굴을 외면하며 말했다.

 "연애하기 힘들다. 그치?"
 "그게 무슨 배부른 돼지의 투정이란 말이냐! 이 배고픈 소크라테스는 지금 핸드폰만 바라보는데! 브루투스 네마저~!"
 "그리스와 로마를 오가는 드립이냐? 배고프면 이거나 먹으셔."

 그러더니 다시 오륀지를 내 입안에 넣어줬다. 음, 역시 상큼한게 맛있다. 오륀지의 맛을 만끽하고 있는데 지영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야? 설마 이 배고픈 소크라테스를 버리고 갈셈이냐? 그건 아니겠지. 우리 의리 빼면 시체잖아. 그렇지? 응? 제발 그렇다고 말해줘, 라고 말하니

 "당연히 너 버리고 가야지. 세상에 Love&Peace는 있어도 Friendship&Peace는 없더라. 이 말이 뭔 말인지 알아? 의리보단 사랑이라 이거야."
 "뭬야? 그 입 다물라! 이 더러운 배신자! 너 지금까지 나 가지고 논 거야? 우리 엔조이였던 거야? 그동안의 우리들이 함께했던 아름다운 나날들을 떠올려봐. 이래선 안되잖아. 우리가, 정녕 우리가 이것 밖에 안되는 사이였어? 응?
 "응, 그런가보지. 나는 사랑과 평화를 위해 떠나마."
 "제발, 제게 자비를!"
 "자비는 네 지갑에서 찾으시고요. 진짜로 간다. 그리고 그놈한테 연락 오면 실컷 욕이나 해줘. 망할 놈, 크리스마스에 이게 뭐하는 짓이래니? 내가 뭐랬어? 그놈 만나면 고생할거랬지. 어휴~ 답답하다, 답답해."

 마지막으로 진짜 안돼?, 하며 지영을 붙잡으니 지영이는 무심한 듯 시크한 얼굴로 응, 하며 카페 밖으로 나가버렸다. 망할 년, 진짜 망할 년. 아무리 남자친구가 좋다지만 친구를 버리고 가! 그러고도 네가 친구냐! 나라면, 나라면…. 아…나도 저랬겠구나. 이래서 여자의 의리란 훗~ 

 그.래.도 지영아 네가 이러면 안되지. 네가 소개시켜줬잖아! A/S는 당연히 해줘야 되는 것 아니니? 응?, 라고 물으면 무심한 듯 시크하게 아니야, 라고 하겠지. 망할 년, 고객센터에 신고해버릴까 보다! 에휴~ 지영이 탓을 해서 뭐할까. 내가 진우랑 사귄다고 했을 때, 가장 먼저 뜯어말린 게 지영이였는데. 뭐랬더라? 걔는 원체 자유분방한데다, 역마살이나 방랑벽이라도 있는지 365일 중에 반절 넘게 밖에서 보내는데다, 연락은 더럽게도 안돼서 365일 중에 연락이 되는 날이 손에 꼽을 정도랬다. 그래서 사귀면 내가 진짜로 고달파질 거라 했다. 당시에는 귓등으로도 듣질 않았다. 그런게 귀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진우는 매력적이었으니까. 어딘가의 소설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행동 하나, 하나가 멋있고, 쿨했다. 거기다 얼굴은 강동원 뺨칠 정도로 잘생겼고-이 말을 들은 지영이는 뭐 강동원? 강동원? 너 눈이 어떻게 된 거 아냐? 가까운 병원이라도 소개시켜줘?, 라고 갈궜었다. 그러면 어떠랴, 내가 사랑한 걸. 그래서 고백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비오는 날 거리한복판이 아니었으면 아마 매정하게 거절했을 거다. 그게 올해 3월의 일이다.

 처음에는 마냥 좋았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점점 힘들어졌다. 지영이의 말은 진짜였다. 그는 언제나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녔다. 어떤 때는 외딴 산골에 들어가 연락이 두절되기도 했고, 어떤 때는 말없이 외국으로 나가기도 했다. 또 어떤 때는 돈을 벌어야 한다면서 한달동안 전화하지 마라며 연락을 끊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365일 중에 연락이 되는 날에 내게 연락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언제나 내가 먼저 연락을 했고, 내가 먼저 그가 있는 곳으로 갔다. 언제나, 언제나 그랬다. 한번은 그게 너무 싫어서 따지려고 했었다. 근데 사랑한 게 죄지. 진우의 얼굴을 보는 순간 아, 뭐 상관없어. 아무래도 좋아, 가 돼버린다. 그래도 오늘만큼은, 적어도 오늘만큼은 먼저 연락할 줄 알았다. 아니 먼저 연락하는 건 바라지도 않는다. 최소한 연락이라도 될 줄 알았다. 그래야 되는 것 아니야? 우리 연인이잖아. 한숨을 내쉬며 전화를 꺼냈다. 이것도 팔자지, 싶었다. 번호를 누르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뚜우우, 뚜우우, 뚜우우, 상대방이 전화를 받지 않아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됩니다. 망할 놈. 다시 전화를 한다. 돌아오는 건 역시나 뚜우우 소리와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된다는 말 뿐이었다. 모든 걸 포기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냥 집에서 잠이나 자야겠다. 너무 피곤했다.

 밖에 나오니 온통 커플이다. 여기도 커플, 저기도 커플, 이쪽도 커플, 저쪽도 커플, 커플, 커플, 커플! 모두 다 커플이다. 신경질나! 나 솔로 아니야, 커플이야, 나도 남자친구 있단 말이야! 너희들만 커플이 아니라구! 그래서 어딨는데? 옆에 없잖아. …어딘가에서 살아있을 거야. 그래, 어딘가에는 있겠지. 근데 그러면 뭐해? 없는 거나 같잖아. 그게 남자친구야? 널 사랑하기는 한데? 가슴에 비수가 꽂힌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입술을 깨물어 참아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모든 게 뿌옇게 흐려졌다. 주변에서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날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고개를 푹 숙이고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갔다. 그러다 문득 내 스스로가 한심해졌다. 이렇게 울고 있는 내가, 그를 사랑하는 내가.

 전화벨이 울렸다. 자동반사적으로 핸드폰을 들어 이름을 확인했다. 진우는…아니었다. 지영이였다. 망할 놈. 울음을 꾹 눌러 참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너 지금 어디야? 괜찮으면 우리랑 같이 있을래?]
 "괜찮아. 오늘 같은 날 너희 사이에 껴서 무슨 욕을 들으라구. 나는 신경 쓰지 말고 둘이서 햄볶으며 놀아."
 [어? 수영아, 너 지금 울어? 우는 거지? 너 지금 어디야? 응?]
 "버스 왔어. 다음에, 다음에 연락하자. 재밌게 놀아."

 전화를 끊고 버스에 탔다. 두 눈이 빨간 날 기사아저씨가 바라봤다. 아가씨, 힘내. 힘내서 어쩌란 걸까? 힘내봐야 아무 것도 할 수 없는걸. 자리에 앉아 고개를 숙였다. 그친 줄 알았던 눈물이 다시 펑펑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망할 놈, 진짜 망할 놈. 욕하며 눈을 감았다. 지영이한테서 몇 번 더 전화가 왔지만 받지 않았다.

 집 근처에 도착하니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지영이겠지. 그런 생각에 핸드폰을 꺼냈는데 진우였다. 멍청히 액정에 뜬 진우의 이름을 바라봤다. 흐르던 눈물이 뚝 그친다. 만면에 미소가 떠오른다. 전화를 받으려다 멈칫했다. 이런 내 꼴이 우스웠다. 내게 관심도, 사랑도 없는 남자한테 매달리는 꼴이라니. 수영아, 너 언제부터 이렇게 됐니? 휴~ 받지 말자. 자존심이란 게 있지. 오늘은, 오늘만큼은 받지 말자. 그래, 그러자.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갔다. 진우한테 계속 전화가 왔다. 한번, 두번, 세번…어느새 열번이 넘었다. 바보 같은 심장이 콩닥거린다. 지, 지금이라도 전화를 받을까? 아냐, 그래도 내가 자존심이 있지. 받지 말자. 받지 말자. 이수영! 정신차려. 심장아, 너도 그만 콩닥거리고! 근데 이러다가 얘가 화내면 어떡해? 아니, 아니지. 지금 화를 내야할 건 나라고! 흥, 몰라. 망할 놈. 너도 한번은 당해보라지. 너도 나처럼 맘 졸이며 그래야 좀….

 "전화를 하는데 왜 전화를 안 받아."

 깜짝 놀라 고개를 드니 진우였다. 진우의 얼굴을 보는 순간 자존심이란 놈이 순식간에 사그라진다. 아, 아무래도 좋아. 내가 사랑하면 됐지. 그리고 앞을 보는데 진우가 보이지 않았다. 돌아보니 진우가 멍한 얼굴로 날 보고 있었다. 꺄악! 진우가 오해하면 어떡해?! 지금이라도 돌아가자, 그러는데 진우가 갑자기 내 팔을 붙잡았다. 그게 뒤돌던 내 움직임과 맞물려 진우의 팔을 뿌리친 게 돼버렸다.

 "…"
 "…"

 꺄악!! 실수야. 이건 실수라구. 으아앙! 어떡해! 

 무의식적으로 이 자리를 피하고 싶다는 생각에 몸을 돌려 도망쳤다. 이걸 어떡하지? 나중에 뭐라고 해야 하는 걸까? 이러다가 헤어지자고 하는 것 아니야? 아니겠지? 지금이라도 돌아가서 미안하다고 해야 하는 것 아닐까? 지금 가서 어허허, 이거 다 오해인 것 아시죠?, 라는 개드립이라도 칠까? 머릿속이 뒤죽박죽이다. 이게 뭐야!

 "진짜 미안해. 전화하려고 했는데…."

 전파가 안 터지는 어디의 산골짜기여서 전화를 못했다느니, 내려와서 하려했는데 배터리가 없어서 못했다느니, 그래서 서울에 오자마자 충전해서 전화를 했는데 계속 받지 않아서 걱정했다느니, 어쨌느니, 저쨌느니. 어머나, 엄마! 이 남자가 지금 내게 사과하며 변명하고 있어요. 내 눈치를 보고 있다구요! 이런 날이 오다니 어쩜 좋아. 사과를 받아들이는 거야. 그리고 데이트를 하는 거지. 크리스마스에 데이트라니! 포기하고 있었는데 아, 행복해~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뒤를 도는데, 내 어깨에 올린 진우의 손을 쳐낸 게 돼버렸다.

 "…"
 "…"
 
 아까부터 왜 이러는 거야! 으아아앙! 예수님, 부처님, 알라님, 지금 나랑 깊은 외적 갈등을 겪어보자는 거지요? 막가자는 거지요? 제게 왜 이러세요! 으으, 이럴 때가 아니지. 네가 싫어서 그런 게 아니니까 오해하지 말라고 말하자. 조금이라도 빨리!

 "네가 싫어…."

 순간 목이 메서 더 이상 말이 나오질 않았다. 다시 말을 이으려는데

 "…내가, 싫어?"

 이미 늦은 뒤였다. 아~ 망했어요. 답이 안 보여요. 이럴 때 캐리어 가아죠. 근데 미네랄도, 가스도, 프로브도, 스타게이트도 없어요. 아~ 망했어요. 광민도, 코큰 놈이 와도 답이 없어요. 하, 개 같은 세상. 세상은 똥이야, 똥이라고! 으히히힛, 오줌 발사!

 "뭐라고 말 좀 해봐!"

 뭐라고 말하니. 할 말이 없는걸. 지금도 너만 보면 가슴이 콩닥거리는데, 널 사랑하는 건 변함이 없는데, 그런데 지금 와서 이게 다 실수고 오해라고 할 수는 없잖아. 그러면 내가 너무 비참해지잖아. 그렇잖아? 그러니까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이렇게 헤어질 거야? 왜 아무 말도 없어? 말 좀…어, 어? 우, 울지 마. 수영아, 울지 마."

 헤어지자는 말에 눈물이 나왔나보다.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나중에 얘기하자. 오늘은 힘드네."

 피곤했다. 이제는 정말 쉬고 싶었다. 모든 게 귀찮아졌다. 가려는데 진우가 다시 내 팔을 잡았다. 나를 품에 끌어안으며 눈물을 닦아주었다.

 "미안해, 진짜 미안해. 전화 안해서 미안해, 문자 안해서 미안해, 연락 주지 않아서 미안해, 그러니까 울지 마, 아니 울어. 어디 가지 말고 다 나한테 풀어."

 진우의 목소리가 너무 자상해서일까? 내 멋대로 입이 열리며 응어리 진 감정을 토해냈다.

 "진우야, 나 너 사랑해. 근데, 넌 아니잖아. 처음에는 나만 사랑하면, 나만 좋으면 될 줄 알았어. 근데 지금은 너무 힘들어. 널 만나고 나서 매일이 그랬어. 매일, 매시간, 매분, 매초! 날 사랑하지 않는 널 기다리는 내 맘이 어떤지 알아? 어떤지 아냐고!  이렇게 힘들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고백하지 않을걸 그랬어. 그랬다면 이렇게 아프지도 않을 거잖아."

 진우의 품에 얼굴을 묻고 속삭였다. 그러니까 이제 우리 헤어져. 처음부터 잘못된 만남이었어. 우리 그냥 친구로 지내자. 아니, 그냥 모르는 사람 하자. 친구의 친구, 어색한 관계. 그래서 상처 받지 않는 관계. 그런 관계로 돌아가자. 그러자 진우가 긴 한숨을 내셨다.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누가 그래? 누가 너만 사랑한다고 그랬어? 처음 만났을 때부터 반했어. 지영이한테 정식으로 소개시켜 달랬는데 나는 여자를 힘들게 하는 남자라고 하더라. 생각해보니까 맞더라고. 그래서 단념했지. 그런데 네가 나한테 고백한 거야. 그때 내 기분이 어땠는지 알아? 행복했어. 그 어떤 때보다도. 그러니까 그런 이유라면 못 헤어져. 네가 날 사랑하는 만큼 나도 너 사랑하니까."

 기쁨에 흐느끼며 진우를 꼭 끌어안았다. 그러다가 문득 투정을 부리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근데 왜 전화 먼저 안했어? 네가 먼저 전화한 적이 거의 없잖아. 눈을 흘기며 바라보니 어색한 얼굴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에, 뭐랄까, 전화가 익숙하지 않달까? 음, 현대기기에 대해서 일종의 알레르기가 있달까, 뭐 그렇달까, 저렇달까, 하다가 한마디로 압축시켰다. 전화와 문자를 하는 게 사실 조금, 아니 엄청 귀찮거든, 이란다. 뭐? 뭐어? 귀찮아서 안 했다고, 너 나 사랑한 것 맞니? 그런 거 아니지? 우리 이제 그만 헤어져.

 "미안, 진짜 미안해. 앞으로는 전화하고 문자 자주할게. 네가 싫어할 정도로 자주할게. 그러니까 헤어지자는 말은 이제 그만~ 진짜 미안해."

 진우가 사과를 하며 품에서 상자를 꺼냈다. 상자를 열자 목걸이가 보였다. 녹빛 보석이 달린 예쁜 목걸이였다. 걸어줄게, 진우가 내 목에 목걸이를 걸어주었다. 녹빛 보석을 만지작거리며 진우를 올려다보았다. 고마워, 하고 말하니 진우가 내껀?, 하고 장난스레 물어온다. 당연히 있지, 가방에서 준비한 선물을 꺼냈다. 별건 아니고 지갑이었다. 괜찮은데?, 진우는 헌지갑에 있던 걸 새지갑으로 옮겨 넣고 헌지갑은 그대로 쓰레기통에 버렸다.

 "우리 이제 어디 갈까?"
 "어디라도 좋아."

 진우가 웃으며 내 손을 잡고, 다른 손으로 스마트폰을 꺼내 검색한다. 그 모습이 어찌나 멋진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보는데 입술에서 시선이 멈춘다. 진우의 입술이 탐스럽게 느껴졌다. 꿀꺽, 자동반사적으로 침을 삼킨다. 어떡해, 어떡해. 왜 지금 갑자기 입술이 보이는 거야! 워~ 이수영, 진정하자. 진.정.해! 마음 속 외침과는 달리 시선은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멀리 지나가는 행인을 빼고,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나이스 타이밍!

 …

 뭐가 나이스 타이밍인데!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상한 생각하지 말자. 그래, 키스라던가, 키스라던가, 키스라던가, 꺄악! 계속 키스 생각만 하잖아. 차분하게 심호흡을 하고 동요를 부르며 머릿속의 망측한 생각을 떨쳐내려는데 

 "어디 아파? 열나는 것 같은데?"

 진우가 내 머리에 손을 얹었다. 열나는 것 같은데? 너 괜찮아?, 하며 그윽한 눈길로 날 바라본다. 내 여리디 여린 하트가 폭발해버렸다. 본능에 충실해~, 라는 마음 속 목소리가 서라운드 입체음향으로 울려 퍼졌다. 에잇, 모르겠다.

 "진우야."
 "응? 왜? 많이 아파?"

 눈을 감고 입술을 내밀었다. 키스해줘, 진우가 어, 뭐?, 응?, 한참을 머뭇거리다 내 입에 키스해주었다. 찌르르, 전기가 허리를 타고 온 몸을 감전시킨다. 수많은 생각으로 가득했던 머릿속이 텅 비어버린다. 몇 초가 지났는지, 몇 분이 지났는지, 몇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시간감각이 제멋대로 어긋나버린다. 그저 이 순간이 영원해지길 바랬다. 황홀한 첫 키스였다. 엄마, 나 이 순간을 위해 태어난 것 같아요. 

 *

 "너 그러는 거 아니다."

 지영이는 무심한 듯 시크하게 뭐래니, 하며 커피를 홀짝인다. 그러다 뭐가 생각이 났는지 아, 하는 탄성과 함께 말했다. 그래, 너도 찔리나 보구나!

 "예전에 네 집에서 귀걸이하고 머리띠 몇개 가져간 거?"

 …어쩐지 내가 아끼던 귀걸이하고 머리띠가 안보이더라니. 네 짓이었냐! 하지만 지금은 이걸 따질 때가 아니지.

 "그거 말고. 찔리는 게 있을 건데." 
 "음, 아무리 생각해도 없는데? 귀걸이하고 머리띠 내가 계속 써도 되지?"
 "안되거든? 빨리 돌려주셔. 그거 내가 제일 아끼는 거란 말이야!"
 "진짜 안돼?"
 "안돼."
 "돼."
 "누구 맘대로!"
 "당연히 내 맘대로지."
 "됐으니까 빨리 돌려줘!"

 지영이는 무심한 듯 시크하게 어깨를 으쓱이며 알았어. 생각해볼게, 란다. 망할 년, 누가 보면 그게 네 건줄 알겠다. 한바탕 쏟아 붓고 싶었지만 그런 게 통할 리 만무하지. 어휴~ 이건 친구가 아니라 왠수다, 왠수. 한숨을 쉬며 본론으로 들어갔다.

 "진우가 나 정식으로 소개시켜달라고 했다며, 첫눈에 반했다고 했다며. 근데 왜 나한테 한 마디도 안한 거야? 그것 때문에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지영이가 난 또 뭐라고, 라고 말하며 무심한 듯 시크하게 커피를 홀짝였다.

 "음~ 역시 여기 커피는 맛있어."
 "말 돌리지 말구! 왜 말 안한 거야."
 "안 물어봤잖아."

 …너 지금 나와 깊은 외적 갈등을 빚어보자는 거지요. 이쯤 되면 막나가자는 거지요? 그런 거지요? 말하려는데 지영이가 그리고, 하고 말을 이었다.

 "그게 뭐가 그렇게 중요해서 네가 힘들어 했는데?"
 "진우가 날 사랑한지 몰랐단 말이야."
 "헐, 뭐래니. 그게 말이 돼? 너희 둘이 사귄 게 9개월이다. 장장 9개월 동안 진우, 걔가 한번도 표현을 안했을까? 아니, 아니지. 진우가 표현해도, 너 혼자 사랑한다는 생각에 삽질했겠지. 표현을 해도, 이수영 착각하지 말자. 얘는 나 사랑하는 거 아니야. 이랬을 것 아니야? 안 봐도 동영상이다, 동영상이야. 진우 걔는 9개월 동안 이봉사랑 연애했구만."

 지영아, 너 어디서 작두타니? 뭐라고 반박할 수 없었다. 100% 사실이었으니까. 으으, 부끄러움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지영이가 이런 날 보고 무심한 듯 시크하게 웃는다. 화끈거리는 얼굴을 진정시키며 지영이에게 말했다.

 "고마워."
 "뭐가?"
 "크리스마스 때, 네가 진우한테 전화해서 나 힘들어하니까 빨리 가서 나 달래주라고, 그리고 나 더 이상 힘들게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했다면서. 고마워. 진짜."
 "난 또 뭐라고. 당연한 일 가지고, 무슨. 너도 그럴 거잖아. 왜 이래, 닭살 돋게."

 지영아, 너는 정말 내 인생 최고의 친구야. 너를 만난 건 내게 있어 최고, 아니 두번째 행운이야. 첫 번째는 당연히 진우를 만난 거고. 음, 음. 뭐 그런 거지. 우정보단 사랑이잖아. 안 그래? 이런 내 눈빛에 지영이가 무심한 듯 시크하게 커피를 마시며 말했다.

 "그렇게 고마우면 귀걸이하고 머리띠 내가 가져도 되지?"

 …방금 전에 한 말 전부 취소다. 내 인생 최악의 웬수덩어리다. 지영이를 두번째 행운이라 표현했던 조금 전의 나는 없는 거다. 지워버리자. 그런 끔찍한 생각을 하다니 나도 참. 데헷. 그러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진우였다. 

 "여보세요?"
 [나 지금 시낸데 어디야?]
 "지금 시내야. 카페에 있어."
 [그래? 그럼 우리 자주 가는 식당 있지? 거기로 올래? 기달리테니까 천천히 와. 알았지?]
 "응, 알았어."

 전화를 끊으니 지영이가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본다.

 "전화셔틀을 한 게 엊그제 같은데 이수영, 장족의 발전인데?"
 "나라고 매일 전화만 하는 줄 알아? 아니다, 뭐."
 "그래서 허구한 날 나한테 징징거리셨어요?"
 "앞으로 그런 일 없을 거니까 신경 끄셔."
 "앞으로? 오호라, 너희 크리스마스 때 뭔일 있었구나, 그렇지?"
 "이런저런 일이 있었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영이가 너 설마 날 버리고 가는 건 아니겠지? 남자친구 외국 가서 혼자란 말이야. 내가 오늘 밥까지 산다고 했잖아. 친구여, 우리 이런 사이가 아니지 않은가? 우리의 지난 날들을 떠올려보게, 라고 재잘거린다. 나는 씨익, 입술을 비틀며 말했다.

 "누가 그러는데 세상에 Love&Peace는 있어도 Friendship&Peace는 없데. 그래서 나도 의리보다 사랑이라 이거지."
 "내가, 내가 호랑이 새끼를 키웠어. 자식새끼 키워봐야 소용없다더니 그 말이 진짜일 줄이야! 원통하도다."
 "헐, 뭐래니. 이 언니는 사랑과 평화를 위해서 이만 갈테니 잘 있어라."

 일어서 나가는데 뒤에서 지영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행복해?"

 단 한 마디에 너무나 많은 의미가 담겨있었다. 쉽게 답을 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그러다 진우의 얼굴이 떠올랐다. 난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응, 행복해."












 …근데 지영아, 너 왜 따라오니?

Writer

수려한꽃

수려한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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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2)

ㅁㅁㅁ 10.12.02. 01:44
이야기가 드립에서 시작해 드립으로 끝나네요.
ㅇㅇㅇ 10.12.02. 01:48
드립력 최강 인정.
나머지는 어떠냐고 물으신다면...
권한이 없습니다.
서버에 요청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