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이정표

현실X망상 - 시그마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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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려한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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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처 주민들에게는 되도록이면 밤엔 자택에 있을 것을 권했고, 경찰은 온 힘을 다하여 수사에 들어갈 것이라 발표했습니다.]

"우와, 무서. 한국에도 전기톱 살인마 같은 녀석이 나오는 건가? 이번으로 7번째잖아? 사망자들도 넘치고."

"확실히 사이코패스 녀석들은 꽤 있었어도 저렇게 잔인한 살인을 저지르는 경우는 최근 들어 선 거의 없었지. 기네스북에 오른 최단시간 최대 살육사건이 한국에서 일어나기는 했지만, 옛날이야기고 말이야."

", 기네스북?"

"비교적 상식에 속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만."

", 그래, 너 잘났다."

목적지인 태백을 향하고 있는 버스 내에 장착된 TV에서 최근 단연 최고의 이슈가 되고 있는 연쇄살인마와 관련된 뉴스가 방송되자 그것을 보고 있던 두 학생이 시끌시끌하게 대화를 나눴다.

민폐로군. 하고, 난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관여할 바는 아니었기에 난 주머니에서 MP3를 꺼내 음악을 들었다. 현존하는 음악인지도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하나의 음악이라는 사실엔 변함이 없었기에 들었다.


나에겐 한 가지 병이 있다. 장애라고 해도 될 정도이지만 그 표현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망상과 현실을 구별하지 못하는 희귀병, 그게 바로 내가 가지고 있는 병이다. 사실 희귀병이라고 하기도 좀 그런 것이 아무런 전례도 없는, 나 혼자만의 병이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나는 망상과 현실을 구별할 수 없다. 내 망상은 오감을 지배한다. 망상이라고 해서 내 자신이 떠올리는 생각은 아니고, 무의식적으로 만들어지는 '무언가'이다. 나의 현실과 망상은 아무런 기점도 없이 전환되고, 난 그 무엇도 판단할 수 없다. 청량한 소리가, 아름다운 풍경이, 향기로운 냄새가, 따뜻한 감촉이, 달콤한 맛이, 진짜인지 구별할 수 없다.

그런 나에게 현실이란 부질없는 것이다. 무엇이 망상이고 무엇이 현실인지 알 방도가 없으니, 내게 있어 현실은 없는 것과 같다.

그나마 안도가 되는 것은 망상은 현실의 위에 덧입혀질 뿐이지 무에서 유로 만들어지는 건 아니라는 사실. 간단히 말해서, 망상과 현실의 형태는 달라도, 그것들이 취하는 행동과 대략적인 크기, 구조 따위는 동일하다는 것이었다. 그것이야말로 나에게 있어 유일한 진실. 한 의사가 나에게 병을 자각시켜준 이후, 믿고 살아온 모든 것이었다.


툭툭.

"다운아, 도착했어. 일어나."

"……."

실제로 존재하는 곡인지 내 망상이 만들어낸 곡인지 알 수 없는 곡들을 차례로 듣다가 결국 잠이 든 나는 옆자리에 앉아있던 수수녀에 의해서 일어나게 되었다. 수수녀는 성이 옥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수수하고 맹한, 같은 반의 클래스메이트였다. 물론 그녀의 이름은 수수녀따위가 아니다, 다른 이의 진짜이름을 알 수 없는 내가 이름 대신 지은 별칭일 뿐.

다른 학생과 같이 앉는 걸 기피하다보니 같은 자리에 앉게 된 내 옆의 존재가 정말로 내가 아는 수수녀가 맞는지에 대해선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런 건 상관없다. 중요한 건 내 옆에 있는 존재가 날 깨웠고, 학생의 모습을 한 다른 존재들이 하나 둘 버스를 내리고 있다는 사실.


내가, 내게 있어선 의미가 없는 학교에 가지 않을 수 있는 방학기간, 그것도 크리스마스에 같은 반 학생들과 태백을 온 이유는 바로 반의 한 부자 녀석, 별칭 재벌 2녀석이 우리 모두를 태백에 있는 자기 아버지 소유의 리조트에 초대하였기 때문이다. 환상과 현실을 구별하지 못하기에 자칫하다간 현실의 존재에게 그 존재와 전혀 연관이 없는 엉뚱한 발언을 할 수 있어 미친놈 취급 받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여 다른 이와의 교류에 완전히 손을 땐 나로선 별로 달갑지 않은 이벤트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참여를 거부해 아웃사이더 취급 받는 건 미친놈 취급 받는 것만큼이나 싫은 것이었기에 난 어쩔 수 없이 이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다.

내가 일반인과 어울릴 수 있을 리가 없다는 건 내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 내가 현실의 존재에게 외부인 취급을 받기 싫어하는 이유는 그저, ‘외부인라는 말 그대로, 현실이라는 이름의 틀에서 벗어나는 것이 극도로 싫기 때문이다. 아무리 내 자신이 진짜 외부인이라고는 해도 말이다.


나는 버스에서 나가는 존재들을 따라 사뿐한 발걸음으로 버스에서 벗어났다. 내리자마자 두 눈에 들어온 리조트의 모습에 같은 반 학생들의 모습을 한 존재들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워했으나, 나는 아마도 그들과는 다른 눈빛을 한 채 눈앞의 건물을 보았을 것이다.

오우, 굉장한데?”

, 여기 TV에서 선전하던 곳 아니야?”

, 그래?”

그래, 분명히 맞아! 나 이런 곳 처음 와봐!”

호들갑을 떨고 있는 두 여학생들의 잡담을 들으며 나는 내심 그 의견에 동의하였다. 확실히 이곳은 굉장했다. 저들의 눈에 나와 같은 것이 보이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아니, 아마 그럴 가능성은 없겠지만 어쨌든, 이 건물은 리조트라고 쓰고 신의 탑이라 읽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로 굉장했다.

터벅, 터벅.

구름을 꿰뚫을 기세로 솟아올라있는 거대한 탑, 현실에서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그 건물 안으로 나와 학생들은 들어섰다. 내부는 망상에 의해서 변화되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그마저도 변화되어 있는 것인지, 평범한 리조트 시설의 모습을 하고 있었고, 우리는 한 직원의 안내에 따라 숙박시설의 한 플로어에 도착하여 각자의 방을 배정받고 짐을 풀었다.

1인당 1실이라니, 호화롭기 짝이 없는 대우였으나, 재벌 2세 녀석은 과시하는 기색도 없이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것 같았다. 얼마 되지도 않는 돈을 믿고 다른 이를 업신여기는 같잖은 녀석들 보다는 훨씬 괜찮은 놈이었다. , 그 성격도 내 망상이 만들어낸 산물일 가능성이 있었지만 말이다.

뭔 물건이 뭔 물건인지 알 수 없는 나는, 그래도 어느 정도 정체를 확신할 수 있는 소수의 물건들을 제외하고는 챙겨오지 않아 짐이 적었지만 어쨌든 그것들 또한 짐이긴 매한가지였기에 대충 객실 내에 정리해두고는 더블사이즈의 침대에 털썩 드러누웠다.

앞서 말했다시피 난 다른 이와의 교류가 불가능하다. 객실에서 나가 리조트 소유의 스키장에 가봐야 함께 어울릴 사람이 없어 재미가 없고 애초에 지금 내 눈에 들어오는 하늘 위엔 뜨거운 태양이 아닌 서늘한 빛의 빙륜이 떠있어 스키를 타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객실 내에서 확인 가능한 야외 스키장의 모습은 너무나도 어두워 현실이 되었든 망상 속이 되었든 자칫했다가는 상처를 입게 될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러니 이렇게 객실 안에서 휴식을 취하는 것이 내게 있어 최선의 방도인 것이다. 기껏 태백까지 온 의미가 없긴 하지만 말이다.

그건 그렇고 한가하군.”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던 나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TV나 컴퓨터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나로선 객실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다.

이러고 있을 바엔 차라리 식사나 할까? 이런 유명 리조트라면 식사의 질은 보장되어 있을 테니. 생각을 마친 나는 곧바로 그것을 행동으로 옮겨 객실의 문을 열고 방을 나섰다.

철컥.

?”

오우, 아직까지 안 나간 사람이 우리 말고 또 있었나?”

…….”

객실을 나서자마자, 난 나와 같은 타이밍에 문을 열고 나온 옆방의 학생들과 마주하게 되었다. 확실히, 버스 안에서 살인마 관련 뉴스를 보며 수다스럽게 떠들어댔던 공부벌레 녀석과 명랑남이었다.

귀찮게 되었군, 내 지금까지의 경험에 따르면, 공부벌레는 몰라도 명랑남은 내 무반응에도 불과하고 나에게 주구장창 말을 걸어왔던 녀석이다. 여기서 엮였다가는 일이 굉장히 짜증나게 변할 수 있어. 그냥 무시하고…….

다운, 이었지? 헤에, 옆방이었어? 연인 없는 쓸쓸한 크리스마스, 남자들끼리 한번 잘 지내보자고! , 혹시 여자 친구 있다던가? 그럼 섭섭한데.”

…….”

망했다. 이건 답이 안 보이는군. 무슨 대답을 해야 좋지? 녀석은 정말로 나한테 저 말을 한 건가? 아니면 망상인가? 빌어먹을! 말 한마디 잘못 했다가는 그대로 이상한 취급을 받게 돼! 내가 이래서 이 녀석이 싫은 거야, 왜 괜히 말을 걸어서 날 혼란스럽게 만드는 거야!

침착하자, 침착해. 방법은 있다. 그냥 무시하면 돼. 그럼 그저 인간성이 안 좋은 녀석정도로만 생각하게 될 거야. 적어도 상식에서 벗어난 자취급은 당하지 않게 돼.

생각을 마친 나는 되도록 차가운 표정을 지어보이며 그들의 말을 무시하고 고개를 돌렸다.

"하핫, 전부터 생각한 거지만, 역시 쿨한데?"

"저건 쿨한게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예의가 없는 거다."

"에이, 어느 쪽이든 상관없잖아."

내 반응에 명랑남은 뭐가 우스운 것인지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고 공부벌레는 나를 날카롭게 째려보며 명랑남의 말을 정정했다. 나는 그런 둘의 말을 애써 무시하고는 식당이 있는 리조트의 2층을 향하기 위해서 엘리베이터에 다가가 아래쪽을 가리키고 있는 화살표가 그려져 있는 버튼을 가볍게 눌렀다.


그러나 엘리베이터는 반응하지 않았다.


"……?"

망상으로 인해 반응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건가 싶어 나는 망상의 영향이 사라질 때까지 연달아서 버튼을 눌렀으나 역시나 반응은 없었다.

혹시 이 위치에 있는 것이 엘리베이터가 아닌 객실의 문이고 내가 누르고 있는 건 초인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럴 리는 없었다. 나는 '내가 받은 카드로 열리는 방'과 이곳까지 올라올 때 사용했던 엘리베이터의 위치 사이의 거리감을 기억해놨기 때문이다.

나는 엘리베이터가 고장 난 것으로 판단하고는 비상계단을 이용하기 위해서 주변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주변의 모든 문은 객실의 문으로 변해 있었다.

……곤란하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후 비상구의 모습은 봤지만 그것이 진짜 비상구인지는 알 방도가 없었기에 거리를 기억해두지 않은 나로선 망상의 영향을 받은 이곳을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다. 그런 내게 명랑남과 공부벌레가 말을 걸어왔다.

"왜 그래? 엘리베이터 고장 났어?"

"……."

그 질문에 나는 평소처럼 묵묵부답으로 답했고 명랑남은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알아서 눌러보더니 뒤통수를 긁적이고는 실실 웃으며 나와 공부벌레를 향해 말했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네. 어쩔 수 없지, 계단으로 갈까?"

명랑남이 말한 것 치고는 꽤나 마음에 드는 말이었다. 이들이 내가 들은 대로의 말을 했든 안했든, 이들이 취했던 행동만으로 가정해도, 다음은 계단 쪽으로 갈 것이라는 건 예측할 수 있었고, 그 말은 즉 이들을 따라가면 2층을 향할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들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나는 곧장 뒤를 따랐다. 그들이 한 객실 문의 손잡이를 움켜쥐자 난 그곳을 비상계단구로 인식했다

철컹, 철컹.

"어라? 계단 쪽 문도 열리지 않는데?"

"……."

"으음, , 어쩔 수 없나. 곧 열리겠지 뭐."

그러나, 내가 계단으로 인식한 그곳의 문은 열리지 않았다. 나는 보다 확실히 하기 위해서 명랑남 다음으로 직접 문고리를 돌려보았지만 역시 열리지는 않았다.

내가 굳은 표정을 한 채 문을 바라보자 명랑남은 양손을 뒤통수 위에 올리고서 싱글벙글 웃었고, 그와는 달리 공부벌레는 나와 같이 상황의 심각함을 눈치 챈 것인지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오른손 검지로 자신의 안경을 고쳐 쓰고서 말했다.

"나는 그렇게 가볍게 여길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만. 우린 완전히 이 플로어에 고립된 것이나 마찬가지야. 게다가 이렇게 타이밍 좋게 갇히게 된 걸 보면, 누군가가 고의로 저질렀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어."

"에이, 설마. 네가 좀 과민반응하고 있는 것뿐이야."

"……그렇다면 좋겠다만."

"그냥 방에 가서 원카드나 하자. 어떻게든 되겠지 뭐."

'네놈은 좀 과민반응하고 있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왼손으로는 오른쪽 팔꿈치를 받히고서 오른손으로는 입가를 어루만지고 있는 공부벌레는 마치 탐정과도 같이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했고 명랑남은 별 생각도 하지 않고 공부벌레의 등을 두들기며 말했다. 공부벌레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나는 명랑남의 안일한 태도에 혀를 내두르고 속으로 그를 비난했다.

그런 나의 생각을 아는 것인지 모르고 있는 것인지 명랑남은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다운아, 너도 같이 할래?"

"……."

명랑남의 말에 나는 들을 것도 없다는 태도로 몸을 돌려 다시 내 방을 향했다. 내게 있어 카드게임은, 그 종류가 무엇이 되었든 플레이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었다. 망상에 의해 게임의 플레이 방식도 제멋대로 인식되어 나 자신만의 룰로 만들어지는 게임이 되기 일쑤였고, 카드가 제멋대로 형태를 변형했기 때문에 자신의 룰에 따르는 것조차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나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는 것 같던 두 사람은 곧, 공부벌레의 객실로 추정되는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고 난 그대로 내가 가야할 길을 걸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

한 객실의 문이 살짝 열려있는 것을 발견한 나는 무심결에 입 밖으로 소리를 내뱉으며 그곳을 향해 다가갔다. ‘언제부터 열려있던 거지?’하는 의문을 품은 채, 난 문고리를 잡고 천천히 개문하였다.

그와 동시에, 나의 전신을 불길함이 덮쳤고, 세상이 붉게 물들어갔다.

비유적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한, 원을 그리며 순식간에 붉어졌다.

이렇게 눈에 띄도록 세계가 모습을 탈바꿈한 것은 처음이었기에 나는 침을 꼴깍 삼키며 안으로 들어섰다.

"……."

그러자마자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바닥에 엎어져 방을 온통 새빨갛게 물들이고 있는 피를 전신의 곳곳에서 흘리고 있는 한 학생이었다.

뭐지? 환상인가? 내 눈에 보이고 있는 건 학생이 아닌 배게라던가, 이 피 웅덩이는 단순한 물웅덩이라던가.

……아니, 그럴 리가 없어. 무생물이 생물이 보이거나 생물이 무생물로 인식될 때는 있지만 기체가 액체로 인식되거나 하는 일은 없다. 그건 즉 이곳에 흐르고 있는 피는 액체라는 건데, 객실의 바닥에 이 정도의 액체가 흐르고 있을 이유가 없어. 멀쩡한 침대를 내버려두고 바닥에 쓰러져 잠을 자고 있는 거라고도 생각할 수 없어. 고로 이건 진실이다.

난 몸에 피가 튀기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학생의 곁에 다가가 축 늘어져있는 학생의 손목을 잡아봤다. 차갑다. 그리고 맥박이 뛰질 않는다. 하지만 이게 진짜 감촉인지 난 알 수 없다. 의미가 없군. 하지만 이미 학생이 죽어있다는 건 다른 것들을 근거하여 확신할 수 있었다.

어째서 이런 곳에 사람이 죽어있는 거지? 이 녀석, 확실히, 밀리터리 마니아라는 녀석이었지. 이곳은 녀석의 객실인가? 누가, 왜 이런 짓을 저지른 거지?

생각을 마친 나는 재빨리 주변을 수색했다. 증거를 찾기 위해서가 아니다. 증거는 내게 아무런 의미도 없다. 내가 찾는 건 객실 내에 남겨져있는 '진실들', 내가 확인할 수 있는 절대적 사실 뿐들이었다.

그러던 도중 나는 밀리터리 마니아의 손에 쥐어진 무언가를 발견하고서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주워들었다.

"……?"

'무언가'는 바로 피스톨 형식의 권총이었다. 그냥 보기엔 장난감모형 같기도 했지만, 묵직한 그림감과 차가운 쇠의 감촉은 진짜 총이라 밖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생생했다.

.

총알도, 1발뿐이긴 하지만 제대로 들어 있었다. 이 총이 진짜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방법은 한번 쏴보는 것이다. 만약 이게 진짜 총이라면 안전장치를 풀고 방아쇠를 당기면 총알이 나갈 테지만, 총이 아닌 다른 것이라면 무언가가 튀어나올 리가 없다. 하지만 총알은 한발 밖에 없고, 이것을 테스트해본 다음엔 진짜가 되었든 가짜가 되었든 이것은 쓸모가 없어진다. 괜히 테스트 해봤다가 총성으로 인해서 다른 학생들에게 의심을 받을 수도 있었고 말이다. 그렇기에 나는 일단 이 총에 대한 건 보류하기로 하고서 그것을 품 안에 넣었다.

스윽.

만약 이게 진짜라면 밀리터리 마니아 녀석은 무슨 생각을 하고 이걸 챙겨온 거고, 손에 쥐고 있던 것인지, 왜 녀석이 죽은 것인지, 죽은 사람이 정말 그 녀석은 맞는 것인지, 난 수십 가지를 생각하며 슬금슬금 객실을 나왔다.

내가 생각해도 수상해 보이는 행실이라는 건 부인할 수 없지만 어쩔 수 없다. 들키기라도 했다간 순식간에 범인으로 몰릴 테니 말이다.

지금은 빠져나가는 것이 상책이다. 그리고선 무언가 사건을 진행시킬 수 있을 상황을 기다리는 것이 좋다. 시체를 본 것 치고는 냉정한 판단이란 걸 알고 있다. 하지만, 망상으로 인해, 먹고 있던 음식이 사람의 손가락 따위로 변하는 일 따위를 계속해서 겪다보면 누구라도 나처럼 되기 마련일 것이라고, 난 생각한다.


"꺄아아악-!!"

내가 총을 품에 보관한 채 내 지정 객실로 돌아가 휴식을 취하던 도중, 복도에서부터 고막을 찢을 것 같은 비명소리가 들려왔고 뒤이어 그 비명소리를 듣고 방을 나오는 자들의 소리 또한 들려왔다.

올 것이 왔군. 하고, 난 침대에서 일어나 대충 옷가지를 정리하고서 묵묵히 방을 나섰다.

그것이 일반인의 평범한 반응이고, 내가 들은 비명소리가 진실인지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했기에.


"……보면 알잖아? 난 도착한 이후로 계속해서 이 씁쓸한 음료를 즐기고 있었다고. 크헤헷."

'씁쓸한 음료'는 개뿔이, 단순한 소주일 뿐이잖아. 정신 나간 술주정뱅이 자식.

위와 같은 생각을 하며, 난 턱을 괴고 앉아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을 살펴보았다.

방을 나온 이후, 난 최대한 자연스럽게, '시체의 존재를 모르는 학생'들의 무리에 섞여들어 그들이 진행해나가는 이야기에 따라 적절하게 행동하고 어울렸다.

시체를 발견한 그들 중 어떤 이는 공포에 떨었고, 어떤 이는 할 말을 잊었으며, 어떤 이는 미친 듯이 웃었고, 어떤 이는 이상할 치 만큼 냉정하고 무반응 했다. 나는 최대한 일반 학생처럼 행동하려 했지만, 아무래도 다른 사람이 보기엔 냉정한 측에 속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그 이후로 남아있던 학생들 중 몇 명은 침착하게 자신들의 핸드폰과 객실의 전화기를 사용하여 외부에 연락을 해보았으나 어떻게 된 일인지 전혀 신호가 가지 않았고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결국 우리들끼리 알아서 풀어가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을 내린 공부벌레 녀석은 플로어에 남아있는 모든 학생들을 불러보아 한 방에 모아두고는, 각자의 알리바이를 캐물었고, 학생들은, 별로 말하고 싶진 않지만 그렇다고 범인으로 몰리긴 더욱 싫었는지 모두 그의 말에 따라 순순히 각자의 알리바이를 말했다.

하지만 그들의 알리바이는 내게 있어선 의미가 없는 것이었기에 난 묵묵히 혼자만의 추리를 해 나가고 있었다.

현재 모여 있는 학생들의 수는 나를 포함해 총 11, 우리 반 전원의 수가 40명 전후인 것에 비하면, 적다고도 많다고도 할 수 없는 수였다. 그들은 대부분 각자의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었기에 별칭을 붙이기 쉬워서 좋았으나, 과연 내가 보고 있는 그들의 모습이 진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 중에서, 이들의 모습이 진실이라는 가정 하에, 의심이 가는 녀석은 총 4, 공부벌레와 술주정뱅이, 닭살커플()과 열혈남이었다. 이 추리는 어디까지나 그들의 체격만 따져 추론한 것으로, 그들의 평소 행실이나 성격과는 관계없는 것이다. 그것들은 진실이라 확신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밀리터리 마니아 녀석은 그런 종류를 좋아하는 만큼 꽤나 체격이 크고 운동신경이 좋았는데, 그런 녀석을 제압할 수 있을 만한 녀석들은 이 4명밖에 없었다. 물론 누구라도 갑작스럽게 달려들어 날카로운 흉기를 휘두르는 상대를 막긴 힘들겠지만 말이다.

"박다운, 네가 얘기할 차례다."

"!"

내가 혼자만의 추리를 해나가던 도중 공부벌레가 나를 향해 말했고 나는 미처 생각지 못한 상황에 당황하여 눈을 동그랗게 떴다.

녀석이 정말로 나를 향해 그런 말을 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지금 여기 있는 모두가 각자의 알리바이를 말하고 있는 상황이 진짜라면, 언젠가는 내 차례가 온다는 건 분명했으나, 난 무슨 일이 있어도 대답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엉뚱한 상황에서 나의 알리바이를 늘어놓았다가는 이상한 취급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답을 하지 않았다가는 곧바로 범인 취급을 받게 될 것이었다.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상황,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저기, 그런데……. 3자가 있을 가능성은 없는 거야? 예를 들어서…… 요즘 일어나고 있는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이라던가."

바로 그때, 시체를 본 후 기절했다가 몇 분 전에서야 일어나 얌전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수수녀가 스윽 손을 들어 올리고서는 공부벌레를 향해 물었다.

좋아! 꽤 마음에 드는 짓을 해주잖아?

난 속으로 미소를 지어보였고 수수녀의 질문엔 공부벌레가 아닌 명랑남이 씁쓸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대신 답했다.

"……안타깝지만 그럴 가능성은 없지 않을까? 알다시피 우리는 이 플로어에 갇혀 있는 신세야. 그 말은 즉 제 3자가 존재한다면 그 사람도 이 플로어 내에 존재한다는 건데, 이 플로어의 모든 객실은 우리 반 녀석들의 객실이라서 제 3자가 있을 수 있는 객실은 없어. 이 플로어 내에 있는 객실 외의 공간은 복도와 공용 화장실 밖에 없는데, 아까 살펴봤지만 아무도 없었고, 누군가가 숨을 수 있을 만한 공간도 찾지 못했어."

"……."

"……."

명랑남의 말에 대부분은 동의하는 것 같았으나, 적어도 나만은 그렇지 않았다.

명랑남 녀석의 추리는 확실히 어느 정도 타당하긴 하지만, 녀석은 눈에 보이는 것밖에 볼 줄 몰랐다. 그에 비해 나는 오감으로 느끼는 모든 것을 믿을 수 없기에 끝없이 상상하고, 의심한다. 그 상상이 내게 안겨준 가능성의 결과는, '범인은 제 3자이고, 마스터키를 가지고 있을 수 있다.'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내 추리를 다른 녀석들에게 들려주는 건 불가능하다. 내 말이 현실의 상황과 맞지 않는 엉뚱한 말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의견을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이, 공부벌레 녀석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녀석은 검지로 안경의 이음새를 밀어 올림으로서 안경을 고쳐 쓰며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아니, 가능성은 있어. 있는 정도가 아니라 나는 아마 제 3자의 소행일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어째서? 있을 만한 곳도 없잖아?”

만일 마스터키를 가지고 있다면 있을 곳이 없지도 않지. 비어있는 객실에 들어가 있으면 되니까. 그리고 최윤형의 전신이 날카로운 흉기로 난도질 된 거, 최근 뉴스에서 나오는 연쇄살인마의 살해방식이랑 완전히 동일해. 게다가 우연찮게도 가장 최근 사건이 일어났던 곳은 비교적 이 근처라고 할 수 있는 제천시야. 정말 우연일까?”

…….”

공부벌레 녀석이 내 의견을 대변해준 것은 달가웠지만, 난 살인마에 대한 것에선 귀담아 듣지 않았다. 살인마의 존재 유무 자체를 알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되도록 살인마의 존재 가능성은 배제하고 추리하는 것이 좋다. 게다가 살해 방법에 대한 건 증거 같은 게 되지 않는다. 살해 방법 같은 건 따라하면 될 뿐일 것이기 때문이다.

공부벌레의 말을 들은 명랑남은 볼을 긁적이며 조심스러운 태도로 말했다.

그래도 우리들 중에 있을 가능성이 더 높지 않을까?”

지금부터 그걸 확인해야겠지. 만약 우리 중에 범인이 있다면, 어딘가에는 반드시 흉기가 있을 테니까.”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은 공부벌레는 모인 학생들을 스윽 한 번 둘러보더니 양손을 깍지 끼고서 입가에 가져다댄 후 나직이 말했다.

"그럼 지금부터 31조로 행동을 하도록 하겠어. 조는 내가 짜도록 하지. 불만 있는 사람?"

"어이, 누구 마음대로 리더 행세를 하고 있는 거야? 맘에 안 든다고, 네 녀석."

공부벌레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열혈남은 기다렸다는 듯이 거칠게 불만을 토했고 공부벌레는 전혀 당황하지 않은 것 같은 모습으로 즉답했다.

"어쩔 수 없다. 지금 이곳에서 나보다 냉정한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이 없으니까 말이다. 내 말이 틀렸냐?"

"그러니까 그 점이 맘에 안 든다는 거야, 사람이 죽었단 말이다! 그런데 넌 어떻게 그렇게 냉정할 수 있지? 네놈이 살인자이기 때문 아닌가?"

"……멍청하고 일방적이기 짝이 없는 말이로군. 상대할 가치를 못 느끼겠어."

"뭐야?!"

열혈남의 말에 공부벌레는 무표정한 얼굴로 혼잣말을 하듯이 말했고 그 말을 들은 열혈남은 버럭 소리 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공부벌레를 향해 주먹을 휘두르려 했다.

"그만, 그만. 이런 상황에 우리끼리 싸워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일단은 우리가 안전해질 수 있는 방법부터 찾아보자고."

"……크읏."

열혈남을 말린 것은 그에 비하여 왜소한 체격의 소유자인 명랑남이었고 열혈남은 끈덕지게 자신을 공부벌레에게서부터 떼어내려 하는 명랑남의 행동에 결국 분하다는 듯이 주먹을 내리고서 '털썩'하고 자리에 앉았다.

범인으로 몬 것 까지는 심하다고 생각하지만, 확실히 공부벌레 녀석은 어딘가 맘에 들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친절한 명랑남이 아니었다면 공부벌레에게 친구는 없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간신히 열혈남을 말린 명랑남은 ''하고 가볍게 숨을 내쉬고는 마찬가지로 자리에 앉아 공부벌레를 향해 물었다.

"그런데 31조라니? 우린 10명이잖아. 수가 안 맞는 거 아니야?"

"아니, 제대로 계산하고 말한 거다. 3자의 소행일 거라 난 생각하지만, 만에 하나 우리 중에 있다면 남자일 가능성이 높아. 그런 범인을 제압하려면 비슷한 힘을 지닌 남자 한명을 붙여놔야 되겠지. 그리고 제 3자가 범인이 맞는다면, 여자를 보호해줄 남자 한명은 반드시 필요해. 그래서 31, 남자 2명에 여자 1명인 거다."

", 저기, 그래도 계산은 안 되는 거 아니야? 3인이 한 조를 이루면 한명이 홀로 남게 되잖아……."

너무나도 당당한 공부벌레의 말에 수수녀는 혹시 자신이 잘못 계산한 건가 싶은 건지 조심스레 공부벌레에게 반문하였다.

"아아, 그 한명은 나다. 3자가 범인이라면 3명이서 몰려다니는 사람들보다는 홀로 남은 누군가를 노리겠지. 그런 범인을, 내가 제압 할 거다. 이런 쪽엔 꽤나 자신이 있으니까 말이다."

"그럴 거면 차라리 전부 각자 다니는 편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강우영을 제압한 녀석을 여자 한명이 당해낼 수 있을 리가 없잖아. 31조라는 건 어디까지나 여성 보호차원에서 그런 거다. 난 지킬 여성이 없으니 개인 활동을 하겠다는 거지."

"잠깐, 그럴 거면 굳이 네놈이 홀로 있을 필요가 있나? 만일 네가 자유롭게 범행을 저지르기 위해서 개인 활동을 하겠다는 거면 어쩔 거지? 그럴 바엔 차라리 내가 홀로 다니겠다."

밀리터리 마니아 녀석의 이름이 최윤형에서 강우영으로 이름이 바뀌었군, 역시 이름 같은 건 믿을 게 못돼. 난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머리를 굴렸다.

열혈남의 반론은 꽤나 그럴 듯 했지만 치명적인 오점이 있었다. 그건 바로 홀로 다니는 누군가가 31조로 행동하는 학생을 덮칠 수 있을 리가 없다는 것. 오히려 혼자 다니는 쪽은 위험을 감수하고 함정을 파는 쪽이었다. 그 사실에 공부벌레는 조소를 금치 못하며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겠지만, 굳이 그러겠다면 그렇게 해."

", 네가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그럴 거다."

"그럼 지금부터 조를 짜도록 하지."

그 이후로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왜소한 사람은 왜소한 사람끼리, 건장한 사람은 건장한 사람끼리 짝지어졌다. 나도 차라리 열혈남처럼 개인 활동을 한다면 귀찮은 일이 생기지 않아 편할 터였으나 내 의견을 말하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난 공부벌레의 시선이 어디로 향하는지 집중해서 관찰하였다. 녀석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녀석의 눈이 나를 향했을 때 나는 더욱더 집중하였다. 많은 걸 바라진 않는다. 그저 되도록이면 말수가 없는 녀석들과 한 조만 됐으면 할 뿐…….

"마지막으로 박다운, 최유민, 이유라가 한 조를 이룬다. 그럼 지금 당장 각 객실의 탐색을 개시한다. 구석구석 샅샅이 뒤져보도록. 해산."

아니, 이봐, 잠깐. 뭐라구요? 농담이죠?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명랑남과 한 조라니!!


"으음, 유라의 방엔 아무것도 없는 건가. 하긴, 있을 리가 없지."

"……."

"……."

마지막으로 옷장의 안을 샅샅이 살펴본 명랑남은 빙긋 미소를 띠운 채 볼을 긁적이며 나와 시크녀를 향해 말했다. 하얀색과 검은 색, 붉은 색이 어우러진 고급스러운 스타일의 헤드셋을 끼고 있는 무표정한 얼굴의 시크녀는 나만큼은 아니지만 일반인 치고는 극히 말이 없는 편에 속하는 지라 상대하기 편했지만, 명랑남은 나와 시크녀가 반응이 있든 없든 말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인 마냥 쉴 새 없이 떠들어댔기에 귀찮기 짝이 없었다. 그래도 닭살커플 사이에 끼게 된 공부벌레 녀석보다는 좋은 형편이겠지만 말이다.

시크녀는 만사에 무관심한 것 같은 얼굴로 허공을 응시하며 내게 들릴 정도의 큰 음량으로 음악을 들었고 난 한쪽 눈을 가릴 정도의 긴 앞머리를 소유한 그녀의 유리 같이 투명한 느낌의 얼굴을 힐끗 보고는 명랑남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확실히 식당 같은 것이 없는 이 플로어에서 날카로운 흉기를 가지고 있을 만한 존재는 살인자밖엔 없었기에 탐색작업은 중요했지만, 내겐 사물의 정체가 불분명했기에 힘을 보태어 작업에 동참할 수가 없었다. 그런 면에서는, 탐색에 적극적인 명랑남 녀석이 나와 한 조라는 것이 다행이었다. 시크녀는 관심이 없는 것 같았지만 말이다.

"꺄아악-!!!"

다음으로 내 방을 수색하기 위해 시크녀의 방에서 나가려고 했던 그 순간, 전과 같은 음색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아직 해산한 지 40분도 지나지 않았다고? 그런데 벌써 또 일이 벌어졌다고 할 셈이냐? 농담이 아니야, 웃기지 말라고!

그렇게 속으로 외치며, 나와 일행은 다급한 객실을 뛰쳐나왔다. 다시 한 번 살인이 일어났다는 건, 밀리터리 마니아 녀석을 죽인 살인범이 지금도 이 플로어 내에 있으며 이 곳에 있는 모두를 죽일 작정을 하고 있다는 말이 되기에 그 누구도 안심할 수 없는 상황으로 일이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부디 환청이었으면 한 나의 바람이 무색하게도 복도엔 쓰러져있는 무언가를 중심으로 학생들이 득실득실 모여 있었다.

"이런 빌어먹을! 왜 이 날라리 녀석이 이런 곳에 쓰러져 있는 거야! 같이 있던 녀석들은 어떻게 된 거야!"

그 무언가의 정체는 바로 오른손에 술병을 든 채 온몸이 난도질되어 있는 술주정뱅이였다. 그 앞에 쭈그려 앉아 몸 상태를 확인해 본 공부벌레는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리며 소리 질렀다. 포효에 가까운 그 고함에 술주정뱅이와 같은 조로 배치되었었던 수수녀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벌벌 떨며 말했다.

", 그게, '난 관심 없으니까 니들이 알아서 해.'라면서 혼자 밖으로 나가가지고……."

"그러면 무슨 일이 있어도 말렸어야 할 거 아니야!"

변명은 듣기 싫다는 듯이 거칠게 수수녀를 밀어붙이는 공부벌레의 행동에 마찬가지로 술주정뱅이와 같은 조였던 찌질남은 겁에 질려 벌벌 몸을 떨며 발악하듯이 소리쳤다.

",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말 한마디 잘못 했다가는 한대 때릴 기세였다고! 애초에 그런 녀석을 나랑 같이 붙여놓은 것 자체가 잘못이잖아! 다 네 탓이야!"

"……."

듣기만 해도 절로 짜증이 샘솟는 찌질남의 말을 들은 공부벌레는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고는 휙휙 하고 빠르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무슨 짓이지? 나는 그 행동에 의문을 품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나의 의문을 해소해주듯 공부벌레는 모두에게 물었다.

"……최유진은 어디 있지? 녀석에게는 복도의 정찰을 맡겼을 텐데?"

그러고 보니 열혈남이 보이질 않았다. 어디에 있는 거지? 이런 소란이 일어났는데, 누구보다도 이 장소와 근접해있을 녀석이 없다는 건 2가지를 뜻했다.

살인범 본인이던가, 혹은 살해당했거나.

그런 결론을 내린 나는 곧바로 복도를 따라 질주했고 상황파악이 빠른 몇몇 녀석들 또한 술주정뱅이를 방치해두고 열혈남을 찾아 달리기 시작했다.

전자가 되었든 후자가 되었든 그다지 좋은 소식은 아니라는 건 확실했지만, 내게 있어선 전자는 환영할만한 소식이었다. 녀석을 제압하기만 하면 모든 일이 끝난다는 말과도 같기 때문이다.

철컥.

하지만 꿈과 현실은 엄연히 다른 것인지 공용 화장실에서 녀석을 찾아낸 나의 눈에 들어온 것은 열혈남의 머리와,

각종 고깃덩어리였다.

"……."

난도질이라기보다는 도륙에 가까운 참살. 절단된 사지는 망상으로 인해서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핏덩어리의 고깃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망상이 아니라면 피부가 깔끔하게 벗겨져있을 리가 없었으니까,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꺄악-!"

내가 그것들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 내 바로 뒤에서부터, 이젠 지긋지긋해진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낸 사람은 닭살커플()였고, 어느새 다가온 닭살커플()를 품에 안고서 눈을 가려주었다.

저 모습을 오늘만 3번을 봤다. 살인마는 뭐하나, 별 놈을 다 죽이면서 저런 빌어먹을 종자들은 가만히 내버려두고 말이야.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뒤늦게 등장한 공부벌레는 굳어지다 못해 무감정해진 눈동자로 아무런 말도 없이 '열혈남이었던 것'을 내려 보다 몸을 휙 돌리고는 모이게 된 모든 학생들을 향해 나직이 물었다.

"같이 있었던 조원 중에 조를 이탈했던 자가 있나?"

그 물음에 모두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고 공부벌레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그렇다면 수색작업은 여기서 종료한다. 의미가 없어. 범인은 우리가 모르는 제 3자다."

그 의견엔 나도 동의했다. 공부벌레가 말한 이유도 있지만, 열혈남을 해체시켜 핏덩어리의 인육을 만든 자가 이 안에 있다면 그 복장이 깨끗할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베는 것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무기를 사용하는 것이 아닌 이상 사람을 뼈째로 토막 내려면 흉기를 반복적으로 휘둘러야 했는데 그런 작업을 하며 피가 튀기는 것을 막을 방도 같은 것은 없었다.

그러나 찌질남은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한 것인지 공부벌레의 추리만을 듣고서 소리쳤다.

"만약 한 조가 단체로 우리를 속이고 있는 거라면 어쩔 거야? 아니, 너희가 단체로 나를 속이고 있는 걸 수도 있어! 아무도 믿지 않아! 난 도움을 줄 사람이 올 때까지 내 방에 있을 거야!"

그것은 과대망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한 병적인 불신이었다. 애초에 찌질남을 단체로 속일만 한 이유가 우리에겐 없었다.

이런 상황일수록 냉정해질 필요가 있다는 건 토끼가 육식동물이라는 사실 만큼 당연한 사실이었으나 모여 있던 학생들은 찌질남이 자신의 객실을 향해서 뛰어가는 것을 시작으로 슬금슬금 각자 자신들의 객실을 향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나로선 이해하기 힘든 행동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행하는 개인활동은 오히려 죽음을 자초하기 마련인데 어찌 저렇게 미련한 것인지……. 아니, 생각해보면 이것이 당연한 것일 수도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 직접적인 죽음이란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했던 낯설고 두려운 경험일 수 있었기 때문에 판단력이 흐려질 수도 있었으니까.

난 객실로 가지 않고 자리에 남은 시크녀와 공부벌레, 명랑남을 차례로 돌아본 후 내 객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바보 같은 짓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일반인이라면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 맞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쩐 일인지 공부벌레는 그 누구도 제지하지 않았고 난 아무런 방해도 없이 객실에 들어설 수 있었다.

털썩.

나는 그대로 침대 위에 드러누워 잠시 베란다 밖의 컴컴한 하늘을 보다가 눈을 감았다. 살인사건을 겪은 것 치고는 지나칠 정도의 태연함.

하지만 이게 바로 나다. 바꿀 수도 없고 바뀔 수도 없어. 차라리 이렇게 자다가 살해당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그렇게 나는, 잠에 들기로 했다.


유체이탈이라는 것을 아는가? 나는 지금 그것을 빙자한 꿈을 꾸고 있었다. 꿈이라는 사실을 본인이 자각하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하지만, 유체이탈이라는 것은 망상으로도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기에 꿈일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나는 기왕 이렇게 된 거 영혼으로서의 자유로움을 만끽해보기로 했다. 이런 경험이 흔한 것도 아니니까.

스윽.

객실의 문을 투과하여 복도에 나온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찌질남의 방문 앞을 지키고 있는 늑대 한 마리와 토끼 한 마리였다. 온순한 초식동물인 늑대와 저리 보여도 육식동물인 토끼가 한 자리에 같이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으나 난 그 두 동물을 보는 순간 공부벌레와 명랑남이 망상으로 인해 모습이 바뀐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저런 행동을 하고 있을 만한 놈들은 그 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저 둘이 복도에 존재하고 있다는 건 꽤나 믿음직한 사실이었다. 살인마가 문을 열 수 있는 어떠한 수단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저 둘이 복도에 있는 한 손쉽게 객실에 들어가는 건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난 과분하게도 그 둘의 수호를 받고 있는 찌질남의 객실 안으로 들어갔다. 서로간의 불화를 일으킨 장본인이 얼마나 마음 편히 찌질거리고 있을지 구경이라도 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녀석이 광대에게 살해당하고 있었다.

지렁이와 연가시가 동류라는 말 보다 뜬금없고 허무맹랑한 소리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하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찌질남은 광대가 들고 있는 은빛의 단검에 의해서 시체가 되어가고 있었다.

대체 얼마나 매끈한 것인지 피에 얼룩지지 않는, 검신의 길이가 약 30cm 정도 되는 그 단검을 든 광대는 찌질남의 목을 3분의 2정도 절단한 것으로도 모자라 그대로 복부 위에 올라타 찌질남의 흉부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내리찍었다. 저런 걸 당하고도 멀쩡하게 살아남는 사람이 있을 수는 없다. 그렇기에 찌질남은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죽어버렸다.

광대가 들고 있는 무기는 아마 환상일 것이다. 확실히 저런 무기가 실존한다면 살을 베어내는 것엔 제격이겠지만 저런 것으로 뼈를 절단하려고 하다가는 오히려 날이 빠질 수가 있었다.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것이 아니다. 어째서 광대의 모습을 한 살인마 따위가 공부벌레와 명랑남의 감시를 벗어나 찌질남의 방에 들어갈 수가 있었던 것인지, 그게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가능성은 2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그 둘이 저 광대를 순순히 들여보내주었다는 것.

두 번째는, 처음부터 광대는 찌질남의 방 안에 있었다는 것.

확률이 높은 것은 두 번째 가능성이었다. 살인마가 모든 문을 열 수 있는 수단이 있을 것이란 건 거의 확증된 사실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침대 아래나 옷장 속 같은 곳에 은신하고 있었다면 충분히 찌질남을 기습해 제압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그런 것을 생각하고 있었을 때 광대는 전신에 피를 잔뜩 뒤집어 쓴 채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떻게 봐도 목적지는 문 밖. 이대로 가다간 문 앞의 공부벌레와 명랑남이 위험해진다. 아무리 우월한 신체능력을 지니고 있는 공부벌레라고 해도 찌질남의 방 안에서 살인마가 나올 것이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하고 있을 터였기에 그 급습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저런 위험한 무기를 가지고 있는 녀석을 맨손으로 막을 수는 없을 터다.

막아야한다. 딱히 그 녀석들에게 정 같은 게 있는 건 아니지만 이것은 인간으로서의 도리였다. 이런 것 마저 행하지 않는다면 나는 일반인이란 틀에서부터 완전히 벗어나게 될 것이었다.

어떻게 해야 이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는 모른다. 내가 봤던 것이 진실인지, 깨어나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인지조차 모른다. 하지만, 내 전신에서부터 넘쳐흐르는 센스가 말하고 있었다.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감각, 식스센스가 말이다.

본디 유체이탈이란 것은 말 그대로 영혼이 육체를 벗어나는 것. 그렇다는 건 원상태로 돌아가려면 육체와 결합하여야 한다. 라고, 난 생각한다.

스윽.

생각을 마친 나는 그대로 나의 객실로 돌아가 비어버린 육체를 향해 돌격하였다. 그리고 그것과 충돌함과 동시에 난 눈을 떴다.

두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객실의 천장. 그것은 즉 내가 원래대로 돌아왔다는 것을 뜻했다.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곧장 복도로 향했다. 무기도 없이 가는 건 무모한 행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만 무기가 될 만한 걸 챙겨오지도 않았고, 평범한 리조트의 객실 안에 무기로 쓸만한 것이 있을 리도 없었다.

그리고, 가장 강력한 무기 '일 지도 모르는 것'이 내겐 있었다.

철컥.

복도에 나온 내가 본 것은 내 객실과는 꽤나 떨어져있는 찌질남의 객실 문 앞에 쓰러져있는 공부벌레와 명랑남이었다. 어찌된 일인지 다른 이들처럼 치명적인 상처를 입진 않았지만 그래도 그들의 피는 이미 바닥을 흥건히 적실 정도로 흐르고 있었다.

치료가 시급했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의사도, 성직자도 아니다. 의술을 펼칠 수도, 힐을 해줄 수도 없었다.

타다다다다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더 이상의 피해를 막는 것 뿐. 나는 어딘가로 사라진 광대 녀석을 찾아 복도를 질주했다.

"꺄아악-!"

저 빌어먹을 비명소리는 이젠 질리지도 않는군. 그런데 저 소리가 들렸다는 건 광대놈이 닭살커플을 다음 목표로 삼았다는 건가? 듣던 중에 반가운 소식이로군. 망할 놈의 커플들, 지옥이나 가라지.

"……."

그래도, 내버려 둘 수는 없다. 아무리 마음에 안 들더라도 같은 인간이기는 마찬가지니까.

덜컹, !

닭살커플의 방문은 반쯤 열려있었고 난 광대 녀석의 시선을 잠시라도 끌기 위해서 일부러 거칠게 문을 열어젖히며 안으로 들어섰다.

어째서인지 반쯤 나체가 되어있는, 아니, '어째서인지'라고는 해도 이유 정도는 충분히 알고 있지만, 어쨌든 그 닭살커플 중 남자 쪽은 벌써 살인마에게 당해있었고, 여자 쪽은 죽기 일보직전의 상황에 쳐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렇고 그런 짓을 하려 하다 죽임을 당하다니, 꼴사납기 그지없는 마지막이었으나 다 자신이 자초한 결말이다. 동정할 필요는 없겠지.

그보다는 닭살커플(), 아니, 이젠 커플도 뭣도 아니지만 어쨌든 저 여자를 지키는 것이 우선이었다. 남자 녀석도 진정으로 여자를 사랑했다면 그것을 바라고 있을 것이다.

스윽- 철컥.

프로 못지않게 빠른 속도로 품에서 피스톨을 꺼내든 나는 안전장치를 해제하고는 내게 등을 향하고 있는, 광대의 모습을 버린 살인마를 조준하고서 나직이 말했다

"움직이지 마, 움직이는 순간 네놈의 대갈통을 날려버릴 테니 말이야. 지금이라도 항복하면 다리 하나 정도로 봐주도록 하지."

지금 보고 느끼는 것이 환상이든 현실이든 눈앞에 살인마가 있다는 사실은 확실했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물론 허세였다. 총 같은 것과는 거리가 먼 내가 헤드샷 따위를 날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애초에 이것이 진짜 총인지 가짜인지도 알지 못한다. 일단은 행동으로 옮기고 볼 뿐. 녀석의 반응이 시원치 않다면 이것을 총이 아닌 '시원찮은 무언가'라고 인식하고서 육탄전을 벌이면 될 뿐인 이야기다. 물론 그때는 승리는 물론이고 내 목숨까지도 보장할 수 없어지지만 말이다.

스윽.

나의 위협을 들은 살인마 녀석은 여자를 찌르려던 손을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것은, 매우 익숙한 얼굴.

"그 말은 즉, '움직이던 말든 쏴버릴 테니까 차라리 움직이지 마라, 임마.'라는 건가? 그거 아주 매력적인 제안이로군. 매력적이어서 죽여 버리고 싶을 정도야."

매우 익숙한 목소리.

"……."

살인마는 나 자신이었다.

망상이로군. 하고,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현실적으로 이건 말이 되지 않는다.

"망상이라고? 정말로 그럴까? 애초에 네게 있어 현실적이라는 건 무엇을 뜻하지? 네가 가지고 있는 망상과 현실의 경계에 대한 지식은 정말로 현실인가?"

그런 나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녀석은 나를 향해 한발자국 앞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상대할 가치도 없다. 세상 모두가 나의 모습으로 변하는 상황조차 경험해보았던 나다.

"과연 그렇게 현실을 무시한다고 상황이 달라질까? 이건 현실이야. 아니, 지금까지 네가 겪었던 모든 것이 현실이지. 또한 망상이기도 해."

"……닥쳐."

녀석은 나를 향해 또다시 한 발자국 다가왔고, 난 무의식적으로 뒤로 발을 빼며 중얼거렸다. 저런 녀석과 내가 같은 존재라니, 난 저런 기분 나쁜 말투는 사용하지 않는다. 애초에 저 정도로 말을 많이 하지도 않는다. 그러니 같은 존재일 리가 없다.

"오감을 모두 지배하는 환상을 겪는 병이라니, 그것부터 이상하지 않아? 너의 현실에 대한 지식에 따르면, 그런 병은 존재할 리가 없잖아?"

"아니, 뇌가 망가져 있다면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나는 얼떨결에 녀석의 말에 대답을 하기 시작했고 녀석은 입가에 조소를 머금은 채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 그런데 뇌의 기능이 고장 나면 그런 증상이 일어날 수 있다는 지식은 과연 진실인가? 네 망상이 만들어낸 거짓일 가능성은, 정말로 1퍼센트도 존재하지 않는 건가?"

"!"

"네가 가지고 있는 지식들이 맞는 지식인지 알 방도가 어디 있지? 간단한 예를 들어보지. 네가 알고 있는 토끼와 늑대에 관한 것은 과연 진짜인가? 아니, 거짓이다. 토끼는 엄연히 초식동물이고, 늑대가 바로 육식동물이지."

"……웃기지마. 그런 모습을 한 토끼가 초식일리……."

"그런 모습? 네가 알고 있는 '그런 모습'이란 건 진실인가? 그리고 '그런 모습'을 한 생명체는 무조건 육식을 해야만 한다는 이유라도 건가? ……, 아예 틀린 지식이라고는 할 수 없지.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가 있어. 그건 바로 네가 아는 토끼와 늑대의 모습이 서로 뒤바뀌어 있다는 거다."

막힘이 없는 녀석의 말에 나는 제대로 된 반문 한 번 못하고 어금니만 꽉 물었다. 하지만, 녀석의 말이 무조건 진짜라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내 말이 무조건 거짓이라고도 할 수 없지. 넌 그 무엇도 확신할 수 없어. 애초에 너의 모든 논리는 의사가 너에게 그런 병이 있다는 걸 알려줬다는 전제하에 이루어진 거지. 하지만, 네게 그런 병이 있다면 '의사가 너에게 그런 진단을 내렸다'는 사실은 과연 진실이라고 증명할 수 있나?"

……모순되는 말이다. 그 진단이 진실이 아니라면 지금까지 내가 경험했던 모든 것이 증명되지 않는다.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차라리 모든 것을 믿어버리면 돼. 단지 그것만으로 네 세상은 바뀔 거다. 너의 모든 것은 환상이며, 또한 현실이기도 해. 너는 일종의 신이다. 너에 의해서 세상의 모든 것은 모습을 바꾸지. 어째서 그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거지?"

신이라니, 받아들일 수 있을 리가 없다. , 그저 평범한 인간일 뿐이다. 평범하고 싶을 뿐이다.

"어째서 평범한 인간에 머무르려 하는 거지? '특별함'이라는 단어가 안겨주는 달콤함을 모르는 건가?"

"시끄러워!"

난 결국 참지 못하고 녀석의 두 눈을 힘껏 노려보며 소리 질렀다. 녀석은 그런 나를 비웃듯이 여유로운 웃음을 지어보였고 난 방아쇠에 손가락을 팽팽하게 걸치고는 말을 이어나갔다.

"현실이든 망상이든 상관없어! 네 말은 지금까지의 내 인생을 모두 부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런 말을 인정할까 보냐! 내 자신의 진실은 내가 정한다! 아무도 부정할 수 없어!"

"하하하! 그거 멋진 말이로군. 그렇다면 지금 이 상황은 어떻게 설명할 거지? 내가 현실의 존재가 아닌 살인마라고 한다면 과연 너의 엉뚱한 말을 들으면서 이렇게 얌전히 대치하고 있을까?"

"그딴 건 어찌됐든 좋아, 살인마의 생각 따위 내가 알 리가 없으니까."

"그래? 그렇다면……."

녀석은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운 채 말끝을 흐리며 단검을 들어 올려 보였다.

"죽어줘야겠다."

그 말을 끝으로 녀석은 몸을 낮게 숙이고서 파고들듯이 나를 향해 돌진하였다. 녀석과 나의 거리는 결코 멀지 않았기에 녀석의 단검은 금방 내 근처에 도달하였고 나는 총을 거두고서 후방으로 발을 뺐다.

스아악!

"!"

아슬아슬하게도 녀석의 단검은 나의 복부에 살짝 스쳐 옷을 찢어냈고 난 이대로 가다간 2차 공격은 피하지 못한다고 판단하고는 복도를 향해 몸을 던져 바닥을 굴렀다.

후욱!

그 회피동작에 녀석의 단검은 허무하게 빈 허공을 갈랐고 난 팔과 다리를 튕겨 바닥에 발을 딛고는 다시 뒤로 몸을 뺐다. 그렇게 어느 정도 거리를 뒀다고 생각하기가 무섭게 녀석 또한 객실로 뛰쳐나와 세로로 단검을 휘둘렀다.

그것이 바로 내가 노리고 있던 상황이었다.

녀석의 살인행위를 봐온 결과 녀석은 주로 베기 위주의 공격을 해왔다. 본디 단검류의 무기는 별로 힘들이지 않고 사용할 수 있는 것이기에 움직임이 큰 베기 공격보단 찌르는 공격을 하는 편이 효율적인데, 그 사실을 무시하는 것 같은 행위는 녀석이 제대로 된 살인기술을 익히지 않은 존재라는 걸 뜻했다.

만일 그렇다면, 프로라면 저지르지 않을, 가장 피하기 쉬운 세로 베기를 하는 정도의 실수 한 번 정도는 저지를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빨리 실수를 저지르다니, 내게 있어선 행운이나 마찬가지였고, 난 그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생각해두었던 걸 행동으로 옮겼다.

부웅!

!

한 순간 왼발은 자리에 고정시킨 채 오른발은 미끄러뜨리듯이 오른쪽 전방으로 옮김과 동시에 상체를 틀어 녀석의 단검을 피한 나는 그대로 오른팔을 아래에부터 위로 뻗어 올려 녀석의 턱에 직격 펀치를 날렸다.

!

"크읏!"

망상으로 인해 발생하는 별의별 사고에서부터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육체를 단련한 나의 근력은 내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위력적이었고 녀석은 뇌가 흔들리는 것 같은 충격에 몸을 휘청했다.

그 틈을 놓칠 내가 아니었다.

! !

나는 녀석의 손을 내리쳐 단검을 떨어트려낸 후 몸을 부딪쳐 녀석을 바닥에 쓰러트렸다. 그 후 나는 녀석이 했던 대로 복부 위에 올라타고서 피스톨을 꺼내들어 녀석의 머리통 위에 총구를 겨누었다.

녀석은 웃으며 말했다.

"하핫, 그래, 이제 그걸로 날 쏠 건가? 네 논리대로라면 진짜 총일 리가 없는 그걸로? 그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행위지?"

그 말에 나는, 얼마 만에 지어보는 건지 내 자신조차 기억나지 않는 밝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했다.

"아아, 확실히 의미는 없겠지. '현실'에서는 말이야."

"……무슨 의미지?"

"이 총이 환상이라는 것쯤은 나 또한 알고 있다. 아무리 쏴본다고 해도 나 자신을 제외한 현실의 누군가에게 상처나 고통을 주는 건 불가능하겠지. 하지만, 너는 현실 속의 존재가 아니야."

그 말을 들은 녀석의 표정에선 점점 여유로움이 사라져갔다.

"내 예상대로라면 환상으로 이루어진 이 총의 총알은, 마찬가지로 환상 속의 존재인 너의 머리통을 꿰뚫겠지. 너의 모습을 하고 있는 살인마 녀석에게는 아무런 피해도 못 주겠지만, 네 녀석만큼은, 확실하게 죽일 수 있을 터다."

말을 마친 나는 승리자의 미소를 입가에 띠우며 방아쇠를 천천히 당겼다. 그때의 내 표정은, 웬만한 악당 못지않았을 거라 생각한다.

",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쇼타임이다."

"만약 이렇게 내가 사라지더라도, 네 녀석의 세계가 지금까지처럼 유지될 거라고 생각하나! 넌 결코 진실에서부터 벗어날 수 없어! 나에게서부터는 벗어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네 자신에게선 절대로 벗어나지 못해!"

"상관없어! 그때의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해보면 돼! 지금은 그저, 너라는 환상을 부숴버릴 뿐이다!"

타앙!

발악에 가까운 녀석의 외침을, 폭발하는 것 같은 강렬한 총성이 잠재웠다. 녀석의 머리엔 엄지손가락만 한 구멍이 뚫렸고, 그와 동시에 녀석의 모습이 점점 변형되어갔다.

"……그렇군, 너였던 건가."

그리고 나의 두 눈엔 진범의 모습이 새겨졌다.

우리들을 이 빌어먹을 리조트로 초대한 장본인, 재벌 2세 녀석이 바로 그 정체였다.

하긴, 이곳은 대형 리조트다. 관리인 정도 되는 인물이 아닌 이상 마스터키 같은 터무니없는 물건을 입수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처음부터 범인이 될 수 있을 만한 자들은 한정되어 있던 것이었다.

……언젠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번에 '꽤나 마음에 드는 녀석' 어쩌고저쩌고 했던 것 같긴 한데, 아무래도 전면철회 해야겠다. 꽃을 하나 꽂아줘야 하는 건 아닌지 고민이 될 정도로 훌륭한 미친놈이었군.

재벌 2세는, 내가 날렸던 공격 때문인지 정신을 잃고 기절해 있었다. 밉살스럽게 끊임없이 떠벌거렸던 곱등이스러운 주둥이는 내 망상으로 인해 움직였던 것 같다.

내 손에 들려있던 것은 진짜 총이 아니라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모형 총이었다. 발사되었었던 탄환 또한 실탄이 아닌 흰 색의 BB탄이었기에 녀석의 이마엔 구멍은커녕 붉은 자국조차도 남아있지 않았다. 물론, 아프긴 했을 것이다.

그렇게 내가 여러 감정이 뒤섞인 눈으로 재벌 2세를 내려 보고 있을 때였다.

덜컹덜컹, !

"빌어먹을 자식, 정말 지랄 맞게도 봉쇄해놨군."

"꼼짝 마! 경찰이다! 이재훈, 널 살인혐의로 체포하겠……."

비상계단 쪽 문이 있어야 할 곳에 존재하는 괴기스러운 문 밖에서 자신들을 경찰이라고 칭하는 자들이 다수 쳐들어왔다.

소란스럽게 등장하더니 복도에 있는 나와 재벌 2세 녀석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할 말을 잃은 듯 멈칫한 그 사람들은 대략적인 상황을 파악한 듯 또다시 소란스레 외쳤다.

"어이, 당장 병원에 연락해!"

"거기, 당신. 다친 곳은 없습니까?"

"이건 혐의가 아니라 직통으로 살인죄로군."

"……."

나는 그들의 말을 반쯤 흘려들으며 허공을 향해 시선을 돌린 후 멍하니 생각했다. 상황종료, 라는 녀석인가.


그렇게 크리스마스의 악몽은 종막을 알렸다. 재벌 2세 녀석은 그 자리에서 바로 체포되었고 나와 같이 상처 하나 없이 무사한 녀석들을 제외한 다른 이들은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다만 병원에 갈 필요도 없이 목숨을 잃은 것이 확정된 몇몇 녀석들은 그대로 사건자료로서 사진으로 남게 되었다.

그 사건이 있은 후 6일이 흐른 1231일 저녁. 나는 내 방 침대 위에 드러누운 채 천장을 향해 손을 뻗고서 멍하니 손끝을 바라보았다.


들려온 소식에 따르면 공부벌레와 명랑남은 어떻게든 살아남은 것 같았다. 물론 그 소식이 진실인지 망상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런 건 다음번에 병문안을 가보면 간단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상처를 입은 이상 당분간은 병원신세를 면치 못할 테니 말이다.

세상에 기적과 행복이 넘쳐흘렀어야 마땅한 크리스마스에 다신 기억하기 싫은 괴로운 추억 따위나 생겨버리다니, 신은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들을 보고 있다고 하는데,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이런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신이 아닌 악마가 아닌 이상 말이다.

……아니, 신은 존재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날 이후 내게 생긴 변화가 있다면, 말도 안 되는 환상을 보는 횟수가 늘어났다는 것 정도. 그래도 내 인생에 변화는 없다. 그 무엇도 믿으려 하지 않으며, 괴로운 일상을 반복해나간다.

단지 그뿐.

절대로 녀석이 말한 것처럼은 인식하지 않는다. 망상은 어디까지나 망상이고, 현실은 현실이다. 둘은 절대로 같은 것이 될 수 없다.

그것이 내가 지킬 수 있는 유일한 자존심, 신념.

"……타올라라."

그렇게 중얼거리자 허공에 뻗은 손에서부터 푸른 불꽃이 피어오른다. 뜨겁다기보다는 차가운 느낌의 불꽃. 이것은 공기가 망상으로 인해 변형된 것인가? ,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내 자신의 실체가 장애인이 되었든, 신이 되었든, 나는 나다. 그런 내가 틀을 벗어나려 하지 않는 이상 나는 변하지 않는다.

그게 바로 내가 선택한 길이다.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어.

……설령 환상이 내 의지대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해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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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려한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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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2)

ㅇㅇㅇ 10.12.02. 03:10
32개 작품 중에서 가장 이질적인 작품이네요. 무게도 무겁고요.
너무 일본색이 묻어나는 것만 없었다면 더 좋았을 것 같습니다.
하늬비
하늬비 10.12.02. 11:09
전 일본색이라기보단 모호한 게 문제 같슴.

정체불명의 병에 병 때문에 정신/신체능력이 있다는 게 생뚱맞고 내적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 같아서..

차라리 완전히 판타지로 잡고 갔으면 안 어색했을 것 같은데... 길어지는 배경설정은 연작형식으로 적당히 얼버무리는 걸로...

액션씬의 매끄러움 부족, 주인공의 반응, 엔딩의 손에 불 같은 게 분위기상 불협화음이라고 생각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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