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이정표

325kcal - 피덕후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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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려한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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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스크림 사줘.”
 당돌한 목소리로 내 지갑의 개봉을 항상 갈구하는 이 여자애의 이름은 이아연. 소박하기에는 이로 말할 수가 없는 내 이야기를 하려면 일단 이 친구의 이름을 꼭 기억해야 한다. 키가 작아서인지 아직 철이 덜 든 건지 아이스크림을 사달라며 오늘도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닌다. 고등학교에 올라와 개학식 날 다시 이 녀석을 보았을 때는 경악을 금치 못했으나 뭐, 어릴 적부터 친하게 지냈으니 웃는 얼굴로 인사를 했다. 그러나 귀여웠던 얼굴이 뭐랄까, 성숙하게―아직도 어렸을 때의 얼굴은 그대로지만― 변한 얼굴에서 나온 그녀의 한 마디는 나를 우주 밖으로 쫓아내기에 충분했다. 

 “뭐야, 이 로리콘.”
 조그마한 아연의 체구에서 나오는 눈빛은 강렬했지만, 움찔하는 주변 친구들과 나를 보고서 다시 얼굴을 저쪽으로 돌렸는데, 창피해서 그랬겠지. 

 다들 소꿉친구라고 한다만, 초등학교가 끝나고서 바로 연락이 끊어졌었다. 중학교에나 와서 휴대전화를 샀으니 연락처라고는 집 전화밖에 없었으나 그마저도 바뀌었었으니. 아, 이야기가 딴 데로 새나갔다. 
 여하튼 아연은 어릴 적부터 아이스크림이라면 사족을 못 썼다. 이상하게도 아연이 우리 집에서 놀고 있노라면 어머니는 냉동실에 혼자 외로이 두어 썩었을 법도 한 아이스크림을 내오셨었다. 나는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그 아이스크림의 맛에 대해 별로 감흥도 느끼지 못했었는데, 아연은 맛있게 잘만 먹었고 그 아이스크림을 먹기 위해 이후에는 매일 오기도 했었다. 그러다가 배탈이 난 적도 여러 번 있었지. 
 예전에는 가계의 부담을 증폭시켰던 쬐끄만 친구는 이제 와서는 내 지갑의 사정은 아랑곳하지도 않고 매일 사달라고 조르는데, 내가 배탈 난다고 그만 먹으라고 해도 자신은 이제 튼튼하다며 바보같이 배탈 나는 일은 절대로 없단다. 내가 예전 추억을 회상하고 있을 때, 아연이 옆에서 내 허리를 툭툭 쳤다. 아프다기보다 간지러워 옆으로 빠졌다.

 “무슨 생각하냐? 입은 헤 벌리고서.”
 나는 내가 미소를 짓고 있는 줄도 모르고서 집에 가고 있었다. 길에서 걸어 다니던 사람들은 나를 바보로 생각했겠지.

 “아, 아니야.”
 “변태. 로리콘. 너, 내 생각했지!”
 아연은 자꾸 날 ‘로리콘’이라고 부르는데, 사실 난 로리콘도 아닐뿐더러 사실 아연은 ‘로리’까지의 체형은 아니다. 그래서 항상 ‘넌 로리도 아니거든?’이라고 말해도, 전혀 듣지 않고 오히려 까치발까지 하고서는 내 귀에 대고 로리콘, 로리콘 하는데, 정말 고막에 들러붙어 떨어지지를 않는다. 

 “아이스크림이나 사줘, 이 변태야.”
 “로리콘 아니래도!”
 “변태라니까 무슨 로리콘이야.”
 매번 아연에게 당하는 나다.

 결국, 동네 슈퍼로 가기 위해 발을 돌렸다. 하지만, 아연은 내 옷깃을 잡고서는 반대방향으로 손가락을 뻗었다. 그곳에는 나는 31년에 한 번 갈까 말까 한다는 그 아이스크림 집이 있었다. 나는 손바닥을 내 이마에 올렸다. 끈끈한 땀의 질감이 느껴졌다. 그리고는 내 지갑에서 초록색 종이쪼가리가 날아가는 것을 목격했다. 정말이다. 
 가게 문을 열자 ‘어서 오세요~’라는 귀를 간질이는 목소리와 함께 에어컨의 찬 공기가 피부를 자극했다. 몸에 소름이 돋았고, 지갑 생각에 다시 한 번 소름이 돋아났다. 아연은 웃으며 계산대로 달려갔다.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 생각은 하지도 않았나 보다. 즐겁게 휴식을 취하고 있던 젊은 여인이 나를 째려보았다. 연인으로 추정되는 옆의 젊은 청년은 아연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로리콘인 듯하다.
 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아연의 곁으로 갔다. 아연은 뭐가 그리도 좋은지 싱글벙글 웃으며 많은 차가운 고체 앞에서 혼을 빼앗기고 있었다. 내가 만약 능력이 있다면 그 혼들을 전부 다시 아연의 몸속으로 넣을 텐데 말이다. 내가 자신의 뒤에 서 있다는 걸 어떻게 느꼈는지 내 오른손을 붙잡아 자신의 옆에 세웠다. 하마터면 중심을 잃고 쓰러질 뻔했다. 

 “어떤 게 맛있을까?”
 매번 들를 때마다 먹는 게 있으면서도 굳이 물어본다. 아마 ‘예의상’ 묻는 것이겠지.
 “난 가볍게 초콜릿으로 하지.”
 아연은 왼쪽을 바라봤다가 다시 나를 향해 쳐다보았다. 설마 내가 어디 있는지 까먹은 거야?! 하지만, 절대로 부끄러운 기색을 보이지 않으며 나를 째려보더니 이내 정면에 있는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향해 소리쳤다.

 “나, 나도!”
 “의외네, 난 네가 내 의견은 만날 무시하는 줄 알았는데?”
 나는 미소를 지으며 아연을 향해 말했다. 그러자 정수리만 보이는 소녀는 입이 비쭉 나와서 나에게 말했다.

 “됐어. 다른 거 먹을 게.”
 나는 아연의 어깨를 건드리며 웃었다.

 “아냐. 그냥 먹어, 장난이야.”
 그러나 아연은 심각했다. 아마 다음에 그녀의 입에서 나올 말은 분명히 나를 충격에 빠뜨릴 것이다.

 “초콜릿 제일 큰 걸로 주세요. 두 개.”
 아…
 “나는 왜!”
 점원이 나를 조금이나마 구원해 줄 한 마디를 날렸다.

 “오늘은 한 사이즈 업을 해 드리고 있어요.”
 그러자 아연은 꼭 자신의 옆에 있는 누군가가 들으라는 듯 말했다.
 “체, 아쉽네. 돈 좀 쓸 수 있었는데.”

 엄청난 지출을 해버리고는 문을 빠져나오자 아이스크림과 함께 내가 녹아 저 높은 구름 위로 날아오르는 기분이 느껴졌다. 나는 오른손과 왼손에 각각 1.2kg짜리 아이스크림 두 통을 들고 있었고, 아연은 간단히 가방만 어깨에 걸쳤을 뿐이었다. 그러자 나를 한 번 쓱 보더니 대뜸 이렇게 말했다.
 “하나 줘. 내가 들고 갈게.”
 나는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이 자신밖에 모르던 꼬마가 이상하리만큼 고맙게도 나를 걱정해주고 있었다. 나는 왼손에 들고 있던 1.2kg짜리 아령 하나를 건네주었다. 그녀는 신음을 내며 어깨높이만큼 들어 올려 가슴에 안았다. 그 모습이 마치 인형을 안고서 좋아하는 다섯 살 된 소녀 같아 보여 혼자 웃고 있었는데 아연은 괜히 볼이 빨개지며 화를 냈다.

 “너 좋으라고 들어주는 거 아니거든?!”
 “그럼?”
 “더, 더워서!”
 나는 한숨을 쉬며 걸음을 재촉했다. 어느새 저만치 가 있는 아연은 나를 향해 소리쳤다.
 
 “나 이거 너희 집에서 먹고 갈래!”
 “그러시던가!”

 집에 돌아온 우리는―얼마 전에 옆집으로 이사 온 아연은 거의 우리 집에 살곤 한다.― 한 통은 식탁에 내려놓고 한 통은 냉장고로 들여보내려 했지만, 냉장고에 공간이 없어 결국 둘 다 꺼내 놓았다 둘 중에 어느 하나가 녹던 아연이 슬프지 내가 슬프지는… 엄청 슬프겠군. 결국, 우리는 창고에서 아이스박스를 꺼내어 아이스크림을 집어넣었다.

 소파에 앉아 TV를 켠 나는 물었다.
 “넌 왜 아이스크림이 좋아?”
 정말 진지하게 물었다.
 “넌 왜 아이스크림을 안 좋아해?”
 아연의 역공이었다. 숟가락을 찾는 모양인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심했다. 그러나 이내 그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멈추더니 아연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무언가 중얼거렸다. 나는 그 소리를 듣기 위해 TV의 음량을 낮췄다. 그제야 약간 들리기 시작했다. 조금씩 들릴 때쯤 아연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다가가자, 아연은 집에 있는 가족들은 신경도 안 쓰고 소리쳤다.

 “너도 아이스크림 좋아했었잖아!”
 그리고는 나와 식탁 사이의 공간을 비집고 도망쳐 버렸다. 신발을 주섬주섬 신더니 ‘나 갈 거야.’라는 몸집에 걸맞은 작은 목소리와 함께 현관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다음날, 아연은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이스크림을 사달라는 말조차도.

 어제와 같은 불상사를 염려해 오늘은 돈을 더 잔뜩 가져왔다는 말을 하며 아이스크림을 사 주려 했던 나의 마음은 무시한 채로 아연은 온종일 내 근처 1m도 오지 않았다. 내가 먼저 가기라도 하면 콧방귀를 뀌며 피하기까지 했는데, 친구들은 어제까지만 해도 엄청 친해서 떨어질 줄 모르던 녀석들이 왜 갑자기 저런 사이가 되었느냐며 수군거렸는데, 나도 모르는 걸 그들이라고 어찌 알 수가 있으리오. 종례 시간에 고개를 돌려 아연을 보았는데 선생님의 이마를 뚫어버릴 기세로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나의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저쪽으로 돌렸다. 나도 하는 수 없이 선생님을 보기로 했다.
 집에 갈 때라도 뭔가 말을 걸기 위해 순식간에 가방을 챙겨 아연에게로 갔으나 이미 아연은 수많은 인파 사이를 헤집고 저 복도 끝까지 가 있었다. 나는 결국 아연을 쫓기를 포기하고 터덜터덜 힘없이 걸어가고 있는데 매일 등하교할 때에 걸어 다니는 골목의 중간에 아연이 서 있었다. 나는 그녀를 향해 달려갔는데 의외로 아연은 가만히 잠자코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아연은 고개를 내 쪽으로 돌렸다. 나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내가 ‘어제 한 말이 무슨 뜻이야?’라는 말을 하려고 하는 순간 아연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온몸에 힘이 빠진 채로 울고 있는 소녀를 나는 정성을 다해 토닥였다. 내가 고작 이 바보의 어깨를 토닥이기 위해 하루 종일 쫓아다녔단 말인가. 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쯤 아연이 입을 열었다.

 “저리 가, 이 바보.”
 갑자기 날 밀쳐내며 빠르게 뛰어갔다. 아직도 그녀가 흘렸던 눈물은 내 발밑에 선명히 자국으로 남아 있었다.

 왠지 찜찜한 기분이 들어 어제 갔던 그 죽음의 아이스크림 가게로 갔다. 어제 한 번 먹은 초콜릿보다는 그전에 매번 먹었던 크런치 초콜릿이 들어간 열량이 상당한 아이스크림이 낫겠지 싶어 그 녀석을 가장 큰 사이즈로 사버렸다. 아쉽게도 오늘은 사이즈 업을 안 해준단다. 
 하도 땀을 많이 흘려 샤워라도 하고서 갖다 줘야겠다는 생각에 아이스크림을 식탁 위에 놓고 욕실로 들어갔다. ‘너도 아이스크림을 좋아했었잖아’… 내가 아이스크림을 좋아했던 시절이 있었던 건가. 하긴 그랬을 수도 있겠다. 내가 먹고 싶다고 했으니 엄마가 아이스크림을 사다 놓으셨을 것이고, 가끔 먹다가 남긴 걸 아연이 처음 먹고 반해버렸다. 이런 구성이라면 얼핏 맞아떨어지기는 한다. 아!

 어릴 적 우리 집은 남부러울 것 하나 없는 집안이었다. 아연을 처음 만났던 게 세 살 때였다고 가족들이 알려줬었다. 정말 친했던 우리는 양쪽 가족에서 ‘좋은 사위, 며느리 얻었네!’ 하며 그때로써는, 아니 지금도 듣기 거북한 놀림을 하셨고, 그 때마다 우는 건 왠지 모르게 나였다. 아연은 항상 날 위로해줬었다. 
 어느 날, 나는 그 죽음의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아이스크림을 사 오시는 엄마를 유치원에서 자랑했었고, 아연이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날 유치원이 끝나고 아연은 처음으로 나에게 ‘나 너희 집에 놀러 갈래!’라고 말했었다. 내가 아연의 집에 놀러 가기만 했지, 아연이 놀러 온 것은 처음이었다. 그때는 아연이 단순히 집을 구경하고 싶어서 온 줄 알았다. 심지어 엄마까지도. 그러나 다음날 아연은 심히 삐쳐 있는 상태였다. 소심했던 나는 도저히 왜 그러냐고 물어볼 수가 없었다. 시종일관 침묵이었고, 눈빛도 매서웠다. 서로 아무 말도 안 했고, 아연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그 오라는 선생님도 겁먹게 하기 충분했다. 싸늘했던 유치원의 일과가 끝이 나고 드디어 집에 가는데 아연이 수줍은 듯 입을 열었다. 

 “나, 너희 집 또 갈래.”
 “어, 응.”
 얼떨결에 긍정의 답을 해버렸던 나다.
 그날 엄마는 내가 사흘이나 먹지 않았던 아이스크림을 내오셨다. 블록을 가지고 나와 뭔가 어색하게 놀고 있던 아연은 아이스크림을 보자마자 나를 보던 얼굴과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반겼다. 얼른 숟가락을 받아 들고 뚜껑을 열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나는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엄마는―사실 나도 무슨 상황이었는지는 몰랐으나― 그저 웃으며 아연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셨다. 

 아마도 내가 자랑한 내용을 내가 아이스크림을 좋아한다고 들었던 게 분명하다. 나는 수도꼭지를 잠갔다. 물줄기가 끊겨 화장실이 한산해졌다. 나는 그 길로 잽싸게 몸을 닦아 옷을 챙겨 입고 식탁 위에 놓인 아이스크림 통을 들고서 5m 옆에 있는 아연의 집 앞에서 소리쳤다.

 “이아연! 나와! 아이스크림 사왔어!”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만약 부모님께서 계셨다면 소리를 듣고 나오셨겠지만, 지금은 두 분 다 직장에 계신 상태니까 아마 일부러 기척을 안 하는 듯하다. 나는 거기서 약 30분을 기다렸다. 분명히 2층에 쳐져 있는 커튼 뒤로 아연이 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의도적으로 열리지 않는 그 커튼 뒤의 아연은 이전의 아연이 아니었다. 친구로부터 PC방에 가자는 문자가 왔으나, 아연과의 문제가 훨씬 시급하기 때문에 간단히 거절했다. 원래 이러면 안 되지만 작은 돌멩이 하나를 집어 창문을 향해 던졌다. ‘챙’ 하는 소리와 함께 커튼이 흔들렸다. 나는 그 틈 사이로 아연의 머리카락을 보았다. 아마 커튼을 등지고 앉아 있다가 돌멩이가 부딪히는 소리에 놀랐을 것이다. 
 나는 결국 포기하고 집에 가기로 했다. 그러나 PC방에 갈 생각은 없었다.

 “아이스크림 두고 간다! 네가 항상 먹던 거야! 간다!”
 40분 동안 1.2kg짜리 아령 하나를 들고 있던 나는 드디어 짐 하나를 내려놓고 집으로 돌아왔다. 

 한 시간 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다음날. 나보다 먼저 등교해 버린 아연의 앞에서 상냥하게 물었다.
 “맛있었어?”
 “…먹고 싶어서 먹은 거 아니야!”
 “그럼?”
 “노, 녹기도 하고… 거기다가 두면 누가 훔쳐 갈 거 아니야!”
 아연은 얼굴이 붉어지면서 말했다. 쑥스러워하는 소녀들의 모습은 언제나 귀엽다. 나는 ‘알았어. 먹어줘서 고마워.’라는 말을 하고서 자리로 돌아왔다. 때마침 담임선생님이 조회를 하기 위해 앞문을 열며 들어오셨다. 열심히 조회를 듣는데 휴대전화에 진동이 울렸다. 조회 시간이니만큼 확인을 하지 않고 그냥 두고 있는데 대각선 뒤에서 누군가가 헛기침을 했다. 나는 그 소리가 아연의 것임을 단번에 알아차리고 혹시 아연이 보냈나 싶어 확인했다. 나는 문자의 내용을 보자마자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From 이아연
 - 잘 먹었다. 조금 녹기는 했어도 맛있었어.
 
 나는 뒤를 바라보았다. 또다시 소녀의 발그레한 볼을 볼 수가 있어 좋았다. 담임선생님은 피식 피식 웃고 있는 나와 얼굴이 빨개진 아연을 보며 사귀는 것 아니냐며 놀렸다. 덩달아 친구들까지도 우리를 놀리기 시작했다. 

 아연은 담임선생님의 종아리를 걷어차 생활지도부에서 반성문을 써야만 했다.

 방과 후에, 우리는 나란히, 또 조용히 골목을 걸어가고 있었다. 귀에는 오직 바람이 움직이는 소리와 참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마치 남들이 보면 풋풋한 한 쌍으로 착각할 만한 거리로 달라붙어 가는 우리의 적막을 깬 것은 아연이었다.

 “매번 사주기만 해도 괜찮은 거야? 너 요새 힘들지 않아?”
 “힘든 걸 아는 사람이 사달라고 조르는 거냐. 게다가 내가 안 사주면 넌 귀찮아서라도 네가 안 사 먹잖아. 좋아하는 걸 그냥 포기해 버리는 건 바보 같은 짓이라고.”
 “바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아연은 멈춰 서서 나를 바라보았다. 한 번 미소를 짓더니 이내 가던 길을 가기 시작했다. 덩달아 멈춰 있던 나도 따라가기 시작했다.


 한가하기 짝이 없는 일요일에 아침 예능 프로를 보고 있자니 아연에게서 놀자는 문자가 왔다. 나는 곧바로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분명히 내가 문자를 무시하면 현관문을 두드리며 나오라고 난리를 피울 것이다. 그때 엄마는 내가 잔다고 나중에 오라고 하면 모든 계획은 성공!
 예상대로 엄청난 소음을 내며 현관을 두드렸다. 나는 이불을 뒤집어썼고, 엄마는 현관문을 열었다. 내가 아연의 표정을 보지 못한 게 아쉽다. 아마 잔뜩 화가 나 있겠지. 하지만, 나는 보는 것과 같이 자는 사람이라고. 아연은 엄마에게 내가 어디 있는 지 물었다. 나는 웃음을 참으며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저기 자는 척하고 있어.”
 엄마!

 터벅터벅 발소리가 들렸다. 나는 숨을 죽이고 이불을 꽉 쥐었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몸에서 땀이 나고 있었다. 약간 열려 있던 문이 활짝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나는 아연인 것을 확신하고 더욱 가만히 있었다. 그런데,

 “야!”
 라는 굉음에 나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하, 잘 잤다.”
 나는 아연에게는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하며 태연하게 이불을 박차며 일어났다. 나는 살짝 아연의 눈치를 살폈고, 하하, 웃어넘기려던 찰나에 아직 하반신을 덮고 있는 이불을 아연이 직접 걷어버렸다. 그리고 아연은 ‘꺅!’ 소리와 함께 뒷걸음질쳤다. 이유인즉슨, 나는 집에 있을 때는 항상 민소매에 트렁크를 입고 있다. 민소매까지는 어떻게 참을 수 있는 아연이었지만, 아마도 트렁크는 충격을 금할 수가 없었나 보다.

 “야, 이 변태야!”
 “네, 네가 걷어버렸잖아!”
 뒤에서 웃고 계시는 엄마였다.

 내가 씻을 동안 아연은 평온한 자세로 누워 우리 집에서 TV를 보고 있었다. 아무리 오랫동안 알고 지내왔다고 해도 남의 집에서 저렇게 누워 있다니… 게다가 내가 머리를 말리기 위해 헤어드라이어를 켰을 때는 TV 소리가 안 들린다며 선풍기로 말리란다. 

 시끄러운 한 시간을 보내고, 드디어 제대로 아연과 마주할 수 있었다. 나는 TV를 보고 있는 아연에게 뭐 하고 놀 거냐고 물었으나 대답은 ‘몰라.’였다. 나는 아연이 모든 집중을 쏘아 붓고 있는 그 42인치짜리 거대 전파수신기를 끄며 무슨 정신인지 놀이공원에 가자고 말했다. 그러자 아연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좋아!’라고 답했다. 또 엄청난 지출이 예상된다.

 “나 옷 좀 갈아입고 나올게.”
 아연은 현관을 나오자마자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뭐, 그거 입고 나가는 거 아니었어?”
 “바보야, 보면 몰라? 평상복이라고, 이건!”
 “하긴, 다리가 짧아서 어울리지도 않는 핫팬츠를 입고 놀이공원에 갔다간 욕만 먹을……”
 나는 내 등에 따갑게 무언가 달라붙는 것을 느꼈다. 아연의 손바닥이었다.

 또 20분이나 기다린 끝에 나온 아연은 미소를 띠며 나왔다. 그녀는 더운 여름에 잘 어울리는 시원한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놀이기구 탈 거잖아, 어이. 하지만, 나는 정말 잘 어울린다고 말을 해줬고, 아연은 기뻐 어쩔 줄 몰랐다. 그리고 이어진 놀이기구 탈 건데 괜찮으냐는 질문에는 속바지를 입었으니 괜찮단다. 의외로 치밀한 면이 있는 녀석이다. 
 작렬하는 태양과 시원한 바람이 교차하는 이 모순 같은 날씨 속에서 우리는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으로 가고 있었다. 11시 32분. 나는 가는데 한 시간은 족히 걸릴 테니 점심을 먹고 놀이기구 하나 타면 끝이겠지, 하고서 무슨 초등학교 소풍마냥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연은 나에게 오늘은 웬만하면 야간에도 놀다가 오자고 했다. 데이트는 한 번도 해보지 않는 나이기 때문에, 아, 놀이공원으로의 데이트. 여하튼 내 체력이 그때까지 버텨줄지 아주 궁금했다. 그러나 아연은 쌩쌩했고, 아주 날아갈 수도 있을 것만 같은 상태였다. 아마 금전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힘든 하루가 될 것이다. 매우.
 가는 도중의 지하철 내에서 나는 사람이 서서도 졸 수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내 옆에서 아연이 그러고 있었다. 딱하게 여기신 할머니 한 분은 아연에게 자리를 양보하셨다. 아연은 어쩔 줄 모르며 일단은 앉았다.  

 “어떻게 서서도 잠을 청할 수가 있는 거냐?”
 “놀려면 체력을 보충해야 할 것 아냐!”
 그리고 아연의 눈은 한숨을 쉬고 있는 나의 눈과 마주치더니, 아연은 순식간에 일어나 할머니께 다시 자리를 드렸다. 그리고 내 옷깃을 잡고 서서는 잠을 쫓기 위해 손바닥으로 볼을 때렸다. 한껏 빨개진 볼을 보니 자신도 아픈 모양이다. 

 예상대로, 사람이 형광등 주위에 모인 벌레들처럼 많았다. 어떻게 자유이용권을 끊어버린 나와 아연은 벌레들을 헤집고 들어갔다. 나는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을 지경이었지만, 아연이 놀고 나서 먹자 하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연이 처음에 손가락으로 가리킨 것은 보기만 해도 아찔해지는 회전목마였다. 처음에는 준비운동삼아 쉬운 것부터 타야 한다는 아연이었지만, 누가 나보다 그녀를 잘 알까. 아연은 무서운 걸 잘 못 탄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3분을 의미 없이 흘려보낸 후에 아연은 식당을 가리켰다. 

 “도시락! 도시락 같은 거 없어?!”
 아연은 손을 귀에 댔다. 아마 옆을 지나간 롤러코스터의 소음에 제대로 듣지 못한 모양이다.

 “도시락 말이야!”
 “아하!”
 나는 아연에게 집중했다. 사실 아연의 손에 들린 것은 가방밖에 없었으므로, 별 기대도 안 하지만.
 “네가 놀이공원 가자고 했잖아!”
 아… 그렇지.

 결국, 오늘의 첫 끼니를 집 밥이 아닌 이상한 식당에서 해결했다. 고기를 좋아하는 아연은 포크커틀릿을 먹었고, 나는 조금이라도 돈을 아끼기 위해서 라면을 먹었는데, 그마저도 아연이 뺏어 먹어버렸다. 불쌍한 내 인생.
 롤러코스터를 한 번 타 보자는 나의 말에 아연은 기겁했다. 자신은 괜찮으니, 나만 타고 오라한다.

 “무서워서 그런 거라면 나도 양보할게. 근데, 자유이용권을 끊었으면 놀아야 할 거 아니냐.”
 “그러니까 회전목마를 탄 거잖아!”
 “너무 뻔뻔한 거 아니야?”
 “…”
 아연은 새침하게 반대쪽으로 몸을 돌리더니 갑자기 표정이 밝아져서는 또 무언가를 가리켰다. 뭐 애들이나 타는 그런 거겠지, 했지만 그곳에는 포토존이 있었다. 아연은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내더니 내 손에 쥐여주고는 잽싸게 달려갔다. 언제나 가방에 카메라가 있었던 것 같은데, 연예인이라도 만나면 찍으려고 그러나.
 얼른 달려간 아연은 거북이 그림이 그려진 판 뒤에 서서 얼굴을 집어넣고 환하게 웃었다. 찍어준다고 동의도 하지 않았는데, 막무가내로 웃고 있다. 내가 카메라를 켜고 렌즈를 갖다 대는 순간, 아연은 뛰어나오더니 기다리란다. 그리고 순식간에 옷매무새를 정리하더니 단아한 자세를 취했다. 웃음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고 셔터에 손가락을 갖다 대는데, 아연의 분홍색 옷에 어울리는 아름다운 웃음에 넋을 잃었다. 나는 눈을 깜빡이다가 몸에 힘이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아연이 이렇게 예뻐 보이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화사한 여름의 색 아래에 더 화사한 아연은 나를 보고 웃고 있었다. 웃고 있다. 웃을 것이다.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려 정신을 차려보니 아연의 입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미안하다고 말하고 다시 셔터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아름다운 소녀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리고 빨리 안 찍었다며 맞았다.

 밤까지 버틴다던 아연은 5시를 기점으로 체력이 다했고, 나도 때마침 아주 힘들어 있었다. 다시 생각해보았다. 아연은 나에게 어떤 사람인가, 나는 아연에게 어떤 사람인가. 그저 아이스크림을 매개로 주고받는 사이인가. 평범한 친구일까, 아예 처음부터 끝까지 남이어야 했을 사이일까. 또는 정말로 한시도 떨어져서는 안 될 사이일까. 그냥 말벗일까. 아니면…… 사랑하는 사이여야 할까.
 오늘도 내일도 붉을 노을 아래 빛나는 긴 머리카락을 가진 아연은 나로 하여금 천사를 보는 게 아닐까 착각시키기에 충분했다. 나는 걸음을 멈췄다. 언제나 걷던 그 골목이었다. 계속해서 걸을 그 골목이다. 비가 와도 눈이 와도 걸을 그 골목이다. 아연도 내가 멈췄다는 걸 알아차리고서 멈췄다. 한 번 숨을 크게 들이마신 나는 아연에게 말했다.

 “나, 사실 로리콘이야.”
 아연의 눈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무, 무슨 소리야?!”
 
 나는 아연에게로 다가갔다. 아연은 가만히 있었다. 사실 무슨 상황인지 모르는 거겠지만.
 
 그리고서 아연을 꼭 껴안았다. 처음이었다. 이런 포근한 감촉. 
 “좋아…한다고.”

 옷의 가슴 부분이 촉촉해지는 걸 느꼈다. 아연의 눈물이었다. 감격한 것인지, 놀라서 울어버린 것인지는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나는 아연을 좋아하고 있고, 쭉 좋아했었나 보다.
 아연은 나를 강하게 밀쳐내 빠르게 반대쪽으로 달려갔고, 나는 멍하니 있었다. 그러더니 아연은 이 세상 어느 꽃보다도 아름답고 태양보다도 눈 부시고 그녀가 언제나 먹는 325kcal의 커피 향의 아이스크림보다도 달콤한 미소를 보였다. 멀리서나마 보이는 그녀의 볼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려 하자 아연은 이렇게 말했다.

 “아이스크림 사줘!”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에필로그.

 “만날 먹던 거?”
 아연은 수줍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스크림을 테이블에 올려놓은 나는 아연에게 말했다.

 “나 참, 너 아니면 한 번도 안 올 이 아이스크림 가게를 대체 몇 년씩이나 오는 건지.”
 아연은 아무렇지 않게 숟가락으로 퍼먹고 있었다. 그녀는 커피를 홀짝거리고 있는 나를 향해 물었다. 입에 있는 것 좀 다 먹고 말하지.

 “근데, 이거 열량이 얼마나 돼? 이렇게 단데 꽤 높지 않아?”
 “몰랐던 거야? 난 항상 네가 그걸 먹으면서도 살이 안 찌는 게 신기했는데?”
 “몇 칼로리인데?”
 “325칼로리.”
 내 앞에 있는 바보 소녀는 먹던 것을 멈추고 숟가락을 아이스크림에 꽂았다. 그리고서 대뜸 나에게 밀더니

 “너 먹어.”
 열량이 얼마나 높은지 알고 나니 먹기 싫어진 거야?! 하지만, 속으로 웃어넘긴 나는 웃으며 다시 말했다.

 “아냐, 지금까지 괜찮았는데 설마 살이 찔까. 게다가 네가 제일 좋아하는 거잖아.”
 “좋아하기는 하지. 근데 있잖아.”
 나는 그녀의 더 이어질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난 네가 이 아이스크림보다 좋은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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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려한꽃

수려한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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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3)

위래
위래 10.12.02. 05:10
들여쓰기는 띄어쓰기 두 번 입니다. 웹에서라도 행 나눔은 규칙적인 모양새가 좋다고 생각합니다.
글의 갈등이 지지부진하고 구조가 단순하며 인물의 성격이 평면적인데가 있습니다. 글로 승부를 본다기 보다는 감성적인 부분에 치중한 탓이 크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덕분에 라이트노벨의 성격은 살아나지만, 그것 뿐이라 아쉽네요.
로리콘을 언급하는 부분은 쿈의 포니테일이 생각나는군요. 잘 읽었습니다.
cloud.9
cloud.9 10.12.02. 20:47
잘 읽었습니다. 마지막의 고백 장면은 괜찮네요.
ㅁㅁㅁ 10.12.03. 15:24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먹는 기분입니다. 부드럽고 달달한게 느낌이 좋네요. 다만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할 때는 부드럽고 달달한 것 말고도 소년소녀의 풋풋하고 아기자기한 맛이 있어야하는데 그게 살지 못해서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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