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이정표

Ashes to ashes - 백란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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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려한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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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릴적 잠을 잘때 항상 문을 조금씩 열어두고 잤다. 문을 닫아놓으면 문 밖의 세상과 내 방이 끊어져 홀로 떨어질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영화를 보면 문을 닫자 네모난 방이 위아래로 움직이며 막 섞이던데, 내 방도 그렇게 되는거 아닐까 해서 항상 방문을 열어두어 바깥과 뭔지모를 선을 연결해두고자 하였다.
 
 "이렇게 방문 제대로 안 닫는 사람보고 꼬리가 길다고 하잖아."
 
 이서는 가볍게 타박을 주고 문을 닫았다. 이서가 꼬리 얘기를 해서 그런가, 그 선은 아마 꼬리였을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하니 엉덩이 부문이 뭔가 움찔한다. 아마 문 밖에는 지금쯤 끊어진 꼬리가 팔팔거리며 뛰어오를지도 몰…… 왜 아침부터 잘 일어나놓고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걸까. 

 "그러니까 밤새도록 게임 같은거 하지 말고 일찍 일어나라니까."
 
 그래도 잠깐 얼굴을 찡그리고 있으니 한결 나아졌다. 그나저나 방학이고 부모님도 며칠 시골에 내려가 계신다고 했고 모처럼 게임삼매경에 자유로울 때라 생각했는데 얘는 왜 내 방에 갑자기 쳐들어와서 이러는거지.
 
 "뭐 그건 그렇다치고 여긴 왜 온건……잠깐 너 어떻게 들어온거야?"
 
 이서가 내 눈 앞에 열쇠를 하나 흔들어보였다. 열쇠고리가……엄마거다. 엄마가 주고 갔구나. 어머니, 아무리 고등학생이 되었다고 해도 이건 좀 무리가 아닙니까! 어쨌든 중요한건 그게 아니다. 얼른 이서를 보내고 할 일을 해야하는 것이 급선무다.
 
 "오늘 하루종일 있다갈 생각은 아니겠지?"
 
 "아, 하루종일 여기 있진 않을거야."
 
 그거 불행 중 다행이군.
 
 "너 데리고 나갈거니까."
 
 뭐?
 
 "설마 방학에 휴일인데 하루종일 집안에만 있으려고 했어?"
 
 잠깐, 지금 내 머릿속에는 온갖 창의적인 게임 공략 방식이 한가득 있는데 여기서 끌려나갔다간 분명 오늘 밤 누군가 올려놓은 공략을 보고 엄청나게 후회하고 말거야, 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나 오늘 바뻐."
  
 "어차피 또 게임이나 만화 같은거 할거 아냐. 얼른 밥먹을 준비나 해. 점심때까지는 도착할거니까."
 
 무의미한 저항이었다. 어릴적부터 난 얘가 가자는 곳에 가고, 하자는 것 하고, 놀자는 것을 하며 놀았다. 언제부터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떻게 한 번을 거절하지 못하고 계속 끌려다닌다. 어릴적에 코끼리 다리를 묶어놓아 못 풀게 하면 다 자라도 그것을 풀려하질 않는다고 하더니만 지금 내가 딱 그 경우다. 궁시렁대지만 결국 기지개를 이리저리 키면서 하라는대로 하게 된다. 

 어릴적부터 만났는데 어떻게 만났는지 모를 정도로 어릴적부터 알고 지냈다. 학교도 같은 학교를 다니고 같은 학년이다. 나이만 한 살 이서가 많은데, 왜 같은 학년인지는 모르겠다. 반은 다르지만 워낙 친하게 지내는게 보였기에 학교에 가면 대놓고 사귀라는 말을 듣고는 하지만, 뭘 모르고 소리. 소꿉친구 여자라고 다 똑같은 캐릭터만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오늘은 서점에 가볼까 해. 우리 동네에 얼마전에 큰 서점이 하나 생겼거든. 그래서 가서 책이나 좀 보고, 그러다가 옆에 공원있는데 가서 좀 놀다가……."
 
 비몽사몽인 상태에서 결국 끌려나왔다. 밖으로 나서며 이것저것 떠들기도 했는데, 기억나는 대화 내용은 이 정도이다. 이서의 동네에 내가 사는 동네는 지하철 두 정거장 정도로 떨어져 있다. 가까운 동네에 살기는 하는데, 어릴적부터 난 이서의 집에 가본 적도 없고, 가족에 대해 물어본적도 없고 해서 별 의미는 없다. 엄마는 알라나. 뭐, 관심없다. 
 
 사람이 많아야 할 지하철 역이지만, 우리 동네는 출퇴근 시간만 제외하고는 번잡할 일이 없다. 지금 정도의 시간대면 역 안에서 내 발소리 울리는 것도 들을 수 있을 정도다. 그런데 오늘은 그 발소리 속에 다른 소리가 들어오기 시작햇다. 노랫소리다. 갑자기 나는 걸음을 멈추고 노래를 계속 듣고 있었다.

 "뭔 일 있어? 왜 가려다가 말아."
 
 이서는 못 들었다는 듯 날 계속 끌고 갔지만, 나는 저도 모르게 그 노래의 박자를 따라 발걸음이 옮겨졌다.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노래다. 아름답거나 매력적인 건 아닌데, 오히려 그 평범함이 나를 잡는다. 계속 날 끌고가려던 이서도 이내 손을 놓고 따라오고 있었다.
 
 지하철역 한 구석에는 노래를 부르는 여학생이 한 명 있었다.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는 있었지만 어느 학교인지는 모르겠다. 벙거지 모자를 쓰고 기타를 들었다는 것만 빼고 그냥 평범한 학생이었다. 노래도 그렇게 특별하게 잘 부르는건 아니었는데, 마치 스피커를 달아놓은 듯 무심하게 부르는게 특이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있는 듯 없는 듯 그 자리를 지나가고, 관객은 나와 이서 둘 뿐이었다. 그 중 노래가 끝나자 박수를 친 사람은 나 혼자였다.
 
 "아, 그……노래 좋았어요."
 
 뭔가 멋진 말을 해줘야 할거 같은데, 결국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은 상투적인 표현이었다. 실수한 거 같았는데, 달리 할 수 있는 말도 없었다. 이 여고생 가수는 내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기타케이스에 기타를 집어넣으며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이 사람 앉아있던거, 아이스박스였다. 기타 케이스에 아이스박스라니, 알 수 없는 조합이다.
 
 "저, 그 뭔가 잘못 말한게 있으면……."
 
 난 계속 말을 걸어보려 했는데, 그녀는 갑자기 내 말을 끊으며 지하철역 안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일단 도망치죠."
 
 지하철 직원이 나오는 모습이었다. 뭐야, 이거 허락 안 받은 거였어? 그녀는 자기 짐을 들고 도망치기 시작했으며, 나도 이제까지 옆에 가만히 서있기만 하던 이서의 손을 잡고 뛰었다. 워낙 도망치는 때가 좋아서, 별로 뛰지도 않았는데 더 쫓아오는 사람은 없었다. 세 사람은 잠시 숨을 돌리고, 가까이에 있는 버스정거장으로 가서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숨을 돌리고 보니, 이 여학생은 기타케이스와 아이스박스를 지고 있었다. 그제서야 들어줬어야 했다는 후회가 들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여기에 그보다도 더 이상했던건, 나를 사이에 놓고 좌우로 앉은 두 사람의 신경전이었다. 나는 뭔가 이상해 분위기라도 풀어보려고 했지만, 이서가 먼저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일단 자기소개부터 하죠."
 
 "좋아요."
 
 적지않이 화가 나있는 모양인데, 그 화살이 내가 아니라 내 오른편의 사람에게 향해있었다. 다행……인가? 허나 대답하는 사람의 표정이나 말투가 어른스러운게 나나 이서보다도 나이도 많은 것 같다.

 "일단 제 이름은 유하주라고 해요. 보시다시피 평범한 고3이에요."
 
 "아, 네. 저도 평범한 고등학생이고, 이름은 신이서."
 
 원래 아는 사이는 아닌 모양인데, 처음부터 이렇게 분위기가 싸늘해지고 있었다. 빙긋 웃는 하주……누나라고 해야하나? 뭐, 그냥 부르자. 그런 하주의 여유와 달리 이서는 아까부터 베베꼬인 심사였다. 일단…… 내 소개라도 해야지.
 
 "에, 그러니까 저는……."
 
 "잠깐 있어봐."

 이서가 내 소개를 막았다. 오늘따라 이서가 묘하게 예민하다. 나를 사이에 둔 두 사람은 그렇게 묘한 눈싸움을 계속하고 있었다. 분위기는 모르겠지만, 일단 신경쓰이는건 하주가 매고 있는 저 짐들이다. 힘들어하는 기색은 없지만 두고볼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내가 짐을 들어주려고 하주에게 다가서는데, 이서가 먼저 내 팔을 잡으며 툴툴거렸다.
 
 "뛰었더니 목 말라. 마실 것 좀 사줘."
 
 "으, 응."
 
 얼떨결에 답해버렸다. 평소에도 이런 부탁은 종종 받고 또 군말없이 다 하지만, 지금처럼 뒤틀린 상황에서 나오는 부탁은 절대로 거절할 수가 없을 것이다. 얼른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니, 우측으로 멀지 않는 곳에 편의점이 보였다. 얼른 가야겠다는 생각에 의자에서 일어나 두 사람의 앞을 지나가는데, 하주가 내 손을 잡으며 멈춰세웠다.
 
 "아, 전 탄산 안 마셔요. 그보다 이거요."
 
 그녀는 나에게 무언가를 전해주었다. 왠지 옆에 있는 이서가 신경쓰여 이서를 쳐다보았는데 아니나다를까, 얼른 그 손 놓고 갔다오라는 호통이 표정으로 전해졌다. 난 얼른 그녀가 준 것을 확인했다. 그것은……파란색 지폐 한 장, 돈이었다. 난 뭘 생각했던거지?

 얼른 그 자리를 벗어나 편의점 안으로 들어섰다. 왠지 서둘러야만 할거 같아서 적당히 커피 두 개를 꺼내 계산하려는데, 그제서야 난 내 손에 쥐어진 지폐 밑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잇었다. 처음보는 물건이었지만, 어떻게 쓰는건지는 알 수 있을것 같았다. 오늘 정말 무슨 날이길래 이런거까지 보게 되는거지?
 
 손에 있는 것을 귀로 가져가 끼우니 역시나 소리가 들렸고, 그것은 예상했던대로 하주와 이서의 대화였다. 난 계산하려던 물건을 들고 다시 가게 안쪽으로 들어가 적당히 아이스크림을 고르는 척하며 귀를 기울였다. 악의는 없었지만, 최소한 그 의도는 궁금했다.

 허나 그들이 나누는 대화는 의도를 커녕 의미도 모를 그런 말들이었다.
 
 "당신이 요즘 적합자들을 찾아다니며 관계를 끊고 다닌다는 사람이죠?"
 
 "어머, 전 그냥 동족을 만나 반가울 뿐인데 이상한 말을 하시네요."
 
 "왜 그러는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람은 건들지마요. 절대로."
 
 "의심도 많으시네. 제가 그 사람을 찾은게 아니라 그 사람이 저를 찾은거잖아요."

 "웃기지마요." 
 
 그리고 또 적막이 흘렀다. 잠시 그렇게 시간이 흐르자, 적막을 깨는 하주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난 이해는 둘째치고 상황의 심각함에 얼른 가봐야 할 것 같았다. 적당히 아이스크림 몇 개를 집어들고 계산대에 가서 계산을 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다시 대화는 시작되었다.
 
 "웃지마요. 지금 희희낙락 하고 싶지 않으니까."
 
 "당신이 뭐라고 하든, 난 저 사람에게 모든 것을 알려줄거에요." 
  
 내가 들은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얼른 편의점 문을 열고 나가려는 순간, 귀청이 떨어지는 듯한 큰 소리가 났다. 무의식중에 이어폰을 빼내고 잔돈과 함께 적당히 쑤셔넣은 뒤, 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허나 내가 문을 여는 순간 정거장은 박살이 나 있었고, 이서는 한 쪽 구석에 쓰러져 있었다.

 순식간에 하주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지만, 하주는 나를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떨결에 따라갔는데, 힘과 속도가 사람의 그것이 아니었다. 내가 속도를 이기지 못해 넘어지려고 하자, 갑자기 하주가 나를 들어 안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나 지금 여자한테 안겨서 가고 있다. 다급한 중에도 민망함이 밀려왔다. 

 하지만 그런건 아무의미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니 정거장 주변의 사람, 차, 심지어 나가떨어진 정거장의 간판까지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정말로 시간이 느리게 흐르고 있었다. 큰 짐을 두 개나 지고 거기에 동년배의 남자 하나를 안으며 뛰고 있는 이 여자 정도는 너무도 당연할 정도로 세상이 변했고, 하주는 그런 세상 속에서 나를 안고 골목 안으로 사라졌다.
 
2.
 
 한동안 느려졌던 시간은 점점 제 속도를 찾아가고 있었다. 그와 함께 어느 건물 옥상으로 피한 우리 두 사람, 그러니까 한 사람과 그 여자에게 안겨서 온 한 남자는 숨을 돌리고 있었다. 그러니 난 힘들것도 없었지만 하주는 옆에서 주저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너무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면 되려 침착해진다. 난 꿈에서 깨라며 내 뺨을 양 손으로 쳐댔다.
 
 하주는 매고 있던 아이스박스를 내려놓고 무언가를 꺼냈다. 뭔가 까만 실과자 같은 건데 뭔지는 모르겠다. 그녀는 그것을 두어개 허겁지겁 먹고는 또 다시 정신을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뭐라도 알고 싶어서 물어보려 했는데, 그녀도 그런 상황이었고 나도 뭘 물어볼 수 있을 정신은 아니었다. 

 두 사람 다 진정되어 평범하게 대화를 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꽤 시간이 필요했다. 무엇부터 물어봐야 하나. 막막한 생각에 그냥 되는대로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당신 대체 누구에요?"
 
 아까와 같은 여유는 이제 없을 줄 알았는데, 하주는 다시 아까와 같은 여유로 돌아왔다. 싱글싱글 웃는게 무엇이 그리 좋은 것인지 보는 사람이 어이가 없어 나도 같이 웃고 말 정도다. 헛웃음의 의미지만.
 
 그렇게 긴장이 풀리자, 아까 내가 편의점에서 사온 음료수가 생각났다. 원래 있는 것은 이서와 하주 두 사람의 음료수였는데 어쩌다보니 딱 숫자가 맞게 되었다. 그리고 보니 얼떨결에 사왔던 아이스크림도 몇 개 같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지금은 좀 녹았을거 같아 건네기가 뭐하다. 
 
 어쨌든 비닐봉지 속에서 음료수를 꺼내는데, 하주는 그 안에 있는 아이스크림을 보고 나에게 말을 건넸다.
 
 "그거 이리 주세요."
 
 난 내가 마실 음료수 하나만 빼고 봉지째로 하주에게 건넸다. 그녀는 그것을 받더니만 자신의 아이스박스 속에 넣으려 뚜껑을 열었다. 아까는 경황이 없어서 못 봤지만, 이번에는 그것을 보니 안에 뭐가 있나 궁금해졌다. 몰래 곁눈질로 그 안을 들여다 보려했는데, 딱 그녀와 눈이 마주쳐 버렸다. 그녀는 황급히 아이스박스의 문을 닫고 반대편으로 숨겼으며, 나도 얼른 고개를 돌려 다른 곳을 쳐다보았다. 그……이럴때는 뭐라고 사과를 해야하나.
 
 "미, 미안해요. 그거, 일부러 보려고 한건 아닌데……."
 
 맞잖아. 어쨌든 그녀는 잠시 당황한 듯 고개를 숙여 눈길을 피했다. 만난 후 줄곧 여유있던 이 아가씨에게 처음으로 당황의 빛이 보였다. 그래봐야 2살 차이에 같은 고등학생이라 그런가, 왠지모르게 그러는 모습이 귀여워 보였다. 어디 아저씨 같은 생각같지만.
 
 하주는 그렇게 고개를 푹 숙이면서 잠시 생각을 하다가 이윽고 다시 웃음과 여유를 찾았다. 회복이 빠르다는게 아쉬웠지만, 지금 그런 잡상을 부릴때가 아니다. 하주는 반대편으로 옮겨놓은 아이스박스를 잘 보이게 내 앞으로 놓은 뒤, 뚜껑을 열며 말했다.
 
 "이쪽이 이야기가 더 빠를거 같네요."
 
 난 그녀의 눈치를 살짝 살피며 내부를 보았다. 그렇게 크지는 않은 아이스박스는 세 칸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하나는 아까 보았던 검은 실 말아놓은 듯한 과자가 있었고 다른 한 쪽에는 뭔가 피같은 음료가 있었고, 나머지 한 공간은 어떤 상자가 있었다. 

 여자의 비밀을 알게 거기까지 궁금해하는게 인지상정이라. 나는 손을 뻗어 그 상자를 열어보려고 하였다. 적당히 눈치를 봤지만, 그래도 손가락 끝이 닿을랑 말랑하는 순간까지는 갈 수 있었다.
 
 "그, 그건 안돼요!"
 
 그 순간, 하주가 황급히 아이스박스를 닫았다. 그럼 내 손은? 어느새 번개같은 속도로 허리 뒤로 옮겨져 있었다. 명승부였다. 예전에 이거랑 비슷한 놀이가 있었던거 같은데 이게 실전에서 응용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쨌든, 이번에도 사과해야 하나? 그런 의문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전에 하주가 먼저 나에게 물었다.

 "두 개는 보셨죠?"
 
 봤다. 봤는데, 의문은 커져갔다. 그러니까 알 수 없는걸 자꾸 얘기하지 말았으면 하는데……라는 마음으로 대답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우리는 이걸 먹어야 해요."
 
 우리라고 하니, 아무래도 이서도 그 우리에 들어가는 모양이다. 대략 짐작은 갔지만, 직접 들으니 이제는 뭐 어디까지 거슬러가야 할지 모르겠다. 좋다. 어디 끝까지 한 번 가보자. 본게 있는데 속아봐야 얼마나 속겠나. 하주는 안의 두 물건들을 하나씩 꺼내며 나에게 일일히 설명해주었다.
 
 "이것은 머리카락, 이것은 피. 보면 아시겠죠? 이해하기 쉽게 종족의 특성이라고 해야할까요? 주기적으로 먹지 않으면 안돼는 그런거에요. 대개 머리카락이면 되고 피는 정말 급하거나 오래가는 거라서 별로 쓰지는 않고요. 뭐, 이런 얘기는 복잡하니까 넘어가죠."
 
 그거 피였구나. 일단 받아들이자.
 
 "그런데 이걸 먹어야 하는데 조건이 있어요. 정확히 말하자면 한 명당 해당하는 사람이 한 명씩 있어요. 그것도 종족 사람이 아닌 일반인 중에서요. 그 사람이 아니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거에요. 그래서 우리는 그 사람을 꼭 찾아야 하는데, 대부분 특이한 체취라고 할까 본능적으로 이끌리는게 있어서 얼마 안 돌아다니면 금방 찾을 수는 있다고 하더라요."
 
 그렇단다. 다음은…….
 
 "그렇게 찾은 사람은 우리끼리 그냥 적합자라고 불러요. 적합자인 사람은 대신이랄까 그만큼의 대가가 있어요. 좀 많이 커요. 뭐라고 할까, 과거의 기억이라고 할까요. 그런게 우리에게 제공한 만큼 빠져나가요. 특히 능력을 과도하게 쓰는 사람의 적합자일수록 심하게요. 개개인마다 차이는 있지만."
 
 ……
 
 " 그러니까 적합자인 사람을 계속 곁에 두어야 하는데, 이게 깊은 관계가 아니면 좀 힘들어요. 평생 붙어다녀야 하고, 여기에 강제나 억지가 들어가 어떤 증오심이 생긴다면 소용이 없어지기도 하고. 그래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잘 구슬려야하는데, 적합자가 항상 이성으로 생기므로 연애감정이 중요하게 작용하고 그쪽으로 접근할 수 밖에 없어요."
 
 ……저기.
 
 "그래도 이것만 빼면 우리들이나 당신과 같은 보통 인간들이나 다를거 하나도 없어요. 비록 신체적인 능력이 많이 높고, 거기에 각자 특수능력이랄까 그런게 하나씩 있어서 아까처럼 좀 비상식적인 장면들도 보일 수 있긴 하지만, 그래도 보통 사람과 똑같이 먹고, 잠도 자야하고, 감기에도 걸리고……. 아, 슬프게도 살은 잘 찌는 편이에요. 근데 적합자가 없으면……."
 
 "갹!!!"
 
 못 참겠다! 나는 머리가 터질거 같은 괴상한 비명을 질렀다.
 
 "그거, 하나도 모르겠어요. 하나도 모르겠고, 이해도 안 가고, 무엇보다 납득이 안되요. 그러니까 그……, 아니 이거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할지. 지금 나보고 이걸 믿으라고요?"
 
 "그래도 꽤 잘 설명했다고 생각하는데. 그래도 무슨 말인지는 알아들으셨나 보네요."
 
 "네?"
 
 "믿느냐 안 믿느냐의 문제로 가면 얘기는 간단하죠. 정보는 다 전달되었다는 거니까."
 
 아니 그러니까 믿지 못하는데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는거잖……에라이, 맘대로 해라.
 
 "나머지 말은 간단하게 정리할께요. 이서 씨가 우리 쪽 사람이고, 당신이 이서 씨의 적합자에요."
 
 아, 네. 워낙 예상되었던 결론이라 놀랍지도 않다. 단순히 이상한 사람 취급하기에는 내가 이상한 걸 너무 많이 봐버렸다. 무슨 말을 못하고 그저 입만 뻥끗뻥끗 거리며 마른 침만 꿀꺽 삼킬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머릿속이 멍청해지면서 밀린 잠만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크게 하품을 하였다, 후우.
 
 "하나만 물어볼께요."
 
 나는 대답할 정신도 없어 반쯤 눈이 감긴채로 고개만 끄덕였다. 
 
 "당신은, 자신의 인생이 통째로 누군가의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적 없나요?"
 
 그거야 이 나라 모든 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겠지. 아, 난 레일 위를 무의미하게 달리는 철도야. 전국 9백만의 아이들의 머릿속에 똑같은것만 집어넣고 있다고 하지 않는가. 지금 생각하면 차라리 그런 세상이 나았지, 그런 세상이…….
 
 '퍽!'
 
 갑자기 하주는 주먹으로 내 배를 쳤다. 워낙 경황없이 맞아서 순간 아프다는 감정도 들지 않을 정도였지만, 이윽고 난 고통에 허리를 굽힌채 낑낑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정신 좀 차려봐요!"
 
 그녀는 아파하는 나를 억지로 일으키며 흔들어댔다. 아, 진짜 오늘 뭔가 엄청나게 이상한 날이다. 정신을 못 차리고 몽롱히 하늘을 보니, 달이 보였다.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구나. 이때쯤 되자 그냥 이서를 따라서 책 구경 갔다가 공원에서 놀다오는 계획이 그토록 그리울 수가 없었다. 시간 참 어이없이 가는구나. 시간 참……. 그렇게 난 그냥 힘없이 딴 소리를 읖조렸다.

 "벌써 낮달이 보이는거 보니 오후가 지났네요. 오늘 참 시간 한 번……"

 하주는 다시 주먹을 쥐었다. 난 얼른 정신을 차리고 똑바로 앉았다. 폭력반대!

 "근데 잠깐만요."

 하주가 갑자기 주먹을 풀고 하늘을 둘러보더니만 나에게 묻기 시작했다.
 
 "……낮달이요?"
 
 "낮달 몰라요? 흔히 보잖아요."
 
 하주는 다시 하늘 여기저기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난 또 그 틈에 어디 적당히 기대어 앉았는데, 갑자기 하주가 손뼉을 치며 나를 또 흔들어댔다.

 "그래요, 이거에요."

 나 좀 살려줘. 나 안 자, 안 잔다고. 그렇게 정신을 차리고 하주를 보니, 그녀는 갑자기 얼굴을 붉히며 말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뭔가 깨달은 것에 비해서 머뭇거림의 시간이 길다. 잠시 그렇게 침묵이 흐른 뒤, 그녀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조, 좋아요. 지금 낮달 보이시죠?"
 
 나는 몽롱하게 하늘을 한 번 쳐다본 뒤, 당연한 것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뭐 어쩌려는거지? 그런 생각이 들때쯤, 그녀가 갑자기 내 어깨를 잡아당기며 입을 맞추었다. 온 몸에 전율이 일어나는 것과 동시에 머릿속으로 오만가 감정이 다 몰려들고 있었다. 순간 얼어서 좋다든지 당황한다든지 이런거 생각도 못하고 있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본능적으로 그녀를 밀쳐냈다. 
 
 "뭐, 뭐……그……이거……."
 
 화, 화도나지 않는다. 제대로 말도 하지 못하는 나처럼 그녀도 잠시 바보처럼 벽에 머리를 부딪히며 후회하고 있었다. 아니 그러니까 후회할 일을 왜 하는건데! 몇 번 머리를 박은 그녀는 새빨개진 얼굴로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내가 상기된 얼굴로 격앙되어 따지려고 하자. 그녀는 대답대신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그러니까 나보고 어쩌라는거야. 무슨 하늘에서 천벌이라도 내린다는건……. 보이지 않는다. 아까까지만 해도 당연하게 있던 낮달이 그냥 파란 하늘로만 보인다.

 "그, 그거……알겠어요?"
 
 착각할 이유는 없다. 잠시 눈을 감고 고개를 흔들어본 뒤에도 보이지 않는다. 아까도 그랬듯이, 믿을 수 없는 일이 생기니 더욱 침착해진다. 갑자기 내가 보는 하늘이 어딘가 달라졌다는 생각까지 들기 시작한다. 플라네타리움처럼 화면이 바뀌었다. 나는 영문을 모른채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하주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지금 당신의 상태가 이런거에요."
 
 믿을 수는 없다. 하지만 아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모두 거짓이 아니다. 갑자기 세상이 만화처럼 되어버렸다. 나 어떡하지? 이런 어린애같은 질문마저 튀어나왔다. 결국 하주에게 물어보는 수 밖에 없고, 하주의 말을 믿는 수 밖에 없다.
 
 "설명해 드릴께요. 이번에는 믿어주시기까지 했으면 좋겠네요."
 
 믿지는 못하겠지만, 집중은 할 수 있을거 같다.
 
 "앞에서 말했지만 적합자는 그만큼 과거의 시간을 잃어요. 그런데 사람의 기억이라는게 무작위 같으면서도 체계라는게 있어서 일부가 빠져나가면 그 자리를 메꾸러 다른 기억이 오기 때문에 순서가 엉켜요. 그러다보면 과거의 것과 지금의 것이 겹쳐서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과거에 기억된 내 모습이 현재의 내 눈에 보이는 경우도 있어요. 당연히 한낮에 해와 달이 함께 떠있는 경우도 있고요."
 
 역시 이번에도 알 수 없는 소리다.
 
 "낮달은 자연현상이지만, 당신이 낮달을 본건 자연현상이 아니라 과거의 왜곡된 기억이 현재로 흘러들어오는 것이죠. 역류한다고 할까요. 그래서 우리들은 적합자가 기억의 혼란을 가져오지 않게 항상 적합자에게 붙어있어야 해요. 기억상의 혼란으로 인한 과거의 모순을 가짜 기억으로 정리해주고, 현재의 기억을 계속 넣어서 과거의 혼란스러운 부분을 지워버리는거죠."
 
 "그러니까 당신말은, 이서가 날……뭐라해야하나."
 
 이해는 하겠는데, 표현이 안되었다.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왠지 내 머리가 하드디스크가 된 거 같기도 하고.
 
 "이런 말 하시면 불쾌하실지 모르겠지만, 농부가 과수원의 나무를 기르면서 가지치기를 해주는 거죠."
 
 하주의 정리에 나도 모르게 욱했다. 하주는 그런 내 모습에 만족했는지, 아까 아이스박스 속에 넣어놓았던 아이스크림을 하나 꺼내 입에 물었다.
 
 "그럼 방금 전의 그 일도……"
 
 "그, 그건 그러니까 아까 말했지만 현재의 강렬한 기억을 주어 현재의 기억만 남겨놓아 과거의 혼란스런 기억이 흘러들어오지 못하게 한거죠. 하하, 그 특별한 의도 같은건 없었으니까요, 뭐라할까 그……."
 
 괜한 질문이었다. 하주는 당황하며 말하느라 먹던 아이스크림을 흘렸고, 나도 민망해서 더 이상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갑자기 생각난 것이, 그럴거면 그냥 아까처럼 때린다든가 그런걸로 대신할 수도 있었을거 같…… 지만 왠지 그걸 말했다간 뒷감당이 안될거 같아서 그만두었다.
 
 어쨌든 혼란은 정리되었다. 하주 말대로 믿느냐 안 믿느냐의 문제고, 일단은 믿을 수 밖에 없다. 하주는 아이스크림을 다 먹고 남은 막대를 옥상 구석에 던지며 일어났다.
 
 "다시 물어볼께요. 내 인생이 누군가의 것인지 생각해본적 없어요?"
 
 "아직은……모르겠어요."
 
 하주는 내게 선택까지 요구하였지만, 나는 거기까지는 왜인지 주저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죠. 그렇다면 확인하러 갈 수 밖에."
 
 그녀는 옥상 밖으로 나갔다. 난 그녀를 따라 계단을 내려가며 물었다.
 
 "어디 가는건데요?"
 
 "일단, 확인하러 가야겠죠. 이서 씨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했는지……."
 
 "어떻게 찾는 방법이라든가 그런건 있는거에요?"
 
 "별로 노하우랄건 없어요. 난 당신에 대해서도, 이서 씨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모르니까."
 
 어이, 당신도 모르면 안돼지.  
 
 "그럼 나와 이서는 어떻게 찾은건데요? 뭔가 그 노래라든지 그런걸로 찾는거 아니었어요?"
 
 "아뇨. 이건 그냥 제 취미에요. 동족은 어느 정도 떨어져도 알 수 있지만, 일반인은 자신의 적합자 말고는 몰라요."

 그러면서 하주는 나를 향해 돌아보며 말했다.

 "당신이 내 노래에 따라와준건 정말 운명같은 일이었어요."
 
 왠지 모르지만 나는 하주의 이런 말에 갑자기 움찔했다. 
 
 "그럼 우리가 여기 살고 있는건 어떻게 알았는데요?"
 
 "그건 뭐, 인터넷의 힘일까요? 그래봐야 시군구까지가 한계지만."
 
 뭐야 그건. 뭔가 더 물어보려고 하는 순간, 건물을 나와 거리로 나섰다. 인근 가게에 달린 시계를 엿보니 대략 오후 1시를 향해 가고 있는 듯 하다. 두 사람만 옥상에 있을때에는 몰랐지만, 그래도 사람이 좀 있는 거리로 나오니 안심이 된다. 현실로의 복귀라고 할까. 이미 엄청나게 멀어져 버렸지만.
 
 우리는 버스를 타러 정거장으로 갔다. 어디로 갈지 모르겠는데, 일단 하주가 가자는대로 따라가고 있다. 아까 그 난리가 난 정거장과는 한 2정거장 쯤 떨어져 있는거 같다. 이서는 뭐하고 있을까. 쫓아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별 일 없는거 보니 아까 쓰러져서 어디로 실려가든가 했나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괜시리 걱정되었다.
 
 난 그냥 아무 생각없이 지나가는 차만 구경하고 있었고, 하주는 그런 내 옆에서 버스 안내도를 보고 있었다. 여기 지리야 내가 그녀보다도 더 잘 알고 있겠지만, 어디를 갈지 모르니 방해하지나 않는게 좋겠지.
 
 "근데 이제와서 물어보기도 좀 우스운게 하나 있는데……."
 
 "뭐요?"
 
 그녀는 돌아보지도 않고 답했다. 
 
 "누나 아니에요?" 
 
 사실 아까 물어봤어야 했는데, 그 난리통을 겪으면서 이런 잡담을 나눌 틈이 없었다. 잡담할 틈이 생기자 생각없이 물어봤는데, 지도를 보던 하주의 몸이 갑자기 굳어니면 고개만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그거 그렇게 충격적인 말이었나?
 
 "몇, 몇 학년인……데요?"
 
 나는 멋쩍이 손가락 1개를 펼쳤다. 그녀는 갑자기 힘없이 정거장 의자에 앉더니만 중얼중얼거리더니만, 갑자기 나에게 달려들듯 따져들었다.
 
 "너 나보다 어렸어?"
 
 나, 그렇게 잘못한거야? 어쨌든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잠깐 분위기를 회피해보려 했지만, 그녀는 내 눈을 원망스레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걸 말할 시간도 없었고, 그 사이에 우리는 너무 많은 대화를 나눴다는게 문제긴 하지만. 어쨌든 내 잘못이 아니면 안될거 같다.
 
 "죄, 죄송합니다."
 
 난 시선을 외면하며 사과했다. 근데 이렇게 말은 해도, 이럴때 보면 두 살 많은 누나라는걸 알았는데도 참 귀엽다. 생각같아서는 이 상태를 좀 더 유지하고 싶었는데, 더 장난치다간 무슨 사단이 날거 같아서 그냥 헤헤거리며 웃음을 보였다. 그런 나를 한참 노려보던 하주는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하아, 또 연하라니."
 
 그리고 그녀는 다시 버스 안내도를 보면서 나에게 말했다.
 
 "기왕 이리된거 이대로 말하죠. 이쪽이 더 깔끔해 보이기도 하고."
 
 네, 네. 다행히 이 문제는 끝난 듯 하다. 잠시 후, 그녀는 버스를 하나 찾더니만 나를 데리고 버스에 탔다. 짐이 많아 타는데 고생하는 그녀를 보며 나를 향한 주변의 시선에 앗차 싶었지만, 이미 난 매너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이제 이런 정도의 부담은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사람은 많지 않아 우리는 앞뒤로 앉아서 갈 수 있었다. 근데 이 버스, 어딘가 익숙하다. 버스 번호와 노선도를 살펴보니 학교에 가는 버스가 아닌가. 나는 설마 그건 아니겠지 싶어서 물어보았다.
 
 "지금 우리 학교가는거에요?"
 
 "네."
 
 그럼 진작 물어봤어야지 아까부터 왜 그렇게 노선도를 본건데, 이 사람아. 확실히 이서와 나 사이에 유일하게 있는 접점이라고는 학교 뿐이다. 뭐가 잘났든 이 사람들도 학교에 학생으로 다니고 있을테니까 주소 같은건 당연히 있겠지. 근데 뭔가 특수한게 있을 줄 알았는데 이래가지고서는 그냥 뒷조사가 되어버린거 아닌가. 예상 밖이다.
 
 "의외로 평범하네요."
 
 이 말을 듣더니 창 밖을 보며 대화하던 하주는 갑자기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럼 뭔가 엄청난게 있을 줄 알았어요?"
 
 아까 엄청난 거 보여줬잖아. 그렇지만 그녀는 뭔가 좀 기분이 상한 모양이다. 그녀는 다시 창 밖을 보며 야속한 듯 말했다.
 
 "정말 몇 가지 빼고는 보통 사람과 다를게 없는데, 사람들은 이상하게 한 가지만 보면 또 다른게 있을거라고 지레짐작한다니까요."
 
 확실히 내가 본 이상한 것들이 워낙 그게 너무 보통 사람과 달라서 문제지 그것만 빼면 정거장에서 지도를 찾아 헤메고, 누나라는 사실에 당황하는 듯한 모습에 지금처럼 살짝 뾰루퉁해진 표정 등 충분히 인간적인 모습이 많이 있다. 근데 그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앞의 것이 너무 크다.
 
 "근데, 제 생각에는 아마 학교에 가면 엄청난걸 또 볼 수 있을거 같아요."
 
 "무슨 일이 있는데요?"
 
 그녀는 나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빙긋 웃으며 일어나며 말했다. 버릇과도 같이 웃는 그 모습이었다.
 
 "뭐, 그건 그때의 재미로."
 
 창 밖을 보니 버스가 다 도착해 있었다. 버스에서 내릴때에도 난 주변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 했다. 이번에는 좀 부담이다.
 
3.
 
 머리가 아파왔다. 재미라는게 이걸 말하는 거였나. 학교는 사람 하나 없이 텅 비어있었고, 정문에는 이서가 잡아먹을 듯 하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도 설마 싶었지만, 내 눈 앞에서 이서가 장검을 들고 있는 것을 보니, 하주의 허리에 무엇이 달려있는지 납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까 하주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혼자 어디에 갔다온다며 잠시 자리를 비웠다. 올 때보니 짐은 어디가고 허리춤에 칼집만 하나 채워왔는데, 그 안에 있는게 단검이라는 것을 난 애써 부정하고 있었다. 이제 받아들이고 말고 어떻게 수습해야할지가 걱정이다. 평소에 공부나 열심히 할걸.

 멋있게 두 사람 사이로 들어가 말려보고 싶었는데, 지금 그런 객기를 부렸다간 진짜 맞을거 같았다. 아무 말 없이 노려보던 두 사람의 살기에 말은 커녕 입도 뻥끗 못하던 나는 정말 눈 딱 감고 옆에 있는 하주에게 말을 걸어보았다.

 "저, 내가 할 일은 없는건가요?"
 
 하주는 허리춤에 있는 단검 두 자루를 빼며 가벼운 웃음을 지어보였다. 

 "부탁이라면 하나 있어요."
 
 "뭐요?"

 일단 나라도 여기를 벗어나게 해줬으면 좋겠다는 부질없는 바람이 머릿속을 지나갔다.
 
 "거기서 함부로 움직이지 마세요."
 
 말이 끝남과 동시에 하주는 내 등 뒤로 움직였다. 그와 동시에 이서도 무시무시한 속도로 내 쪽을 향해 칼을 들어 찌르고 있었다. 이 번개같은 두 사람의 움직임에 나는 정말로 움직일 수 없었다. 손도 까딱할 수 없는 사이, 내 뒤에서는 하주가 칼날이 내 목에 닿아있었고, 이서의 칼 끝이 내 어깨 위를 살짝 지나 하주의 이마를 향해있었다.
 
 멀리서봐도 무서운 이서의 표정이었지만, 가까이서 보니 정말 야차같다는 표현이 생각났다. 야차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모르지만. 불행 중 다행인건, 그녀의 그런 독기를 내가 전혀 느낄 수 없을 만큼 모든 적의가 하주에게 집중되어 있는 것이다. 한 쪽에서는 그렇게 살기를, 한 쪽에서는 그에 맞서 냉기를 뿜으며 잠시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먼저 말할게요."
 
 하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말해."
 
 이서는 이제 말도 놓는다. 누가보면 나보다 더 친하게 지내는 줄 알겠……. 하하, 목 주위에 칼날을 두 개나 놓고 있다보니까 이제 농담도 제대로 안 나온다. 그저 운동회 1등상품마냥 옆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래도 표정은 웃어보이려 노력중이지만.
 
 "난 이미 말해놨어요. 이제 당신이 어떻게 할 수 없을거 같은데요."
 
 이서는 가뜩이나 무서운 표정에 더해 얼굴을 찌푸렸다.

 "알았으니까 이 사람부터 내놔. 그럼 더 이상 아무말 없이 끝낼테니까."
 
 "어머, 전 그걸로 끝낼 생각이 없는걸요. 순순히 받아들이시는게 어떨까 하는데요."
 
 내 뒤에 있는 하주의 표정을 볼 수 없었지만, 등 뒤에서 전해져오는 차가운 목소리가 내 뒷덜미를 계속 싸늘하게 만들었다. 보이는 이서의 분노가 명백하게 하주만을 향하는 것과 달리 보이지 않는 하주의 냉정함에는 나도 포함되어 있는 듯 했다. 이 여자는, 정말 마지막의 순간에서는 내 목숨도 빼앗지 않을까하는 의심이 든다.
 
 그래도 조금 머리를 굴려보면 알 수 있는거지만, 결국 패를 쥐고 있는 쪽은 하주였다. 이서는 검끝이 흔들릴 정도로 분노에 차있었지만, 이내 칼을 거두고 한숨을 쉬며 하주에게 물었다.

 "대체 원하는게 뭐에요?"

 처음에 내뱉은 반말은 다시 존댓말로 돌아가 있었다. 
 
 "Ashes to ashes. 모든 것이 있어야 할 곳으로 가면 되요. 간단하죠?"
 
 하주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고, 이서는 그 말에 답을 하지 못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하주에게는 그렇게 적의를 내보이면서도 나를 향해있을 때에는 평소로 돌아오는 그녀의 모습이었다.
 
 "좋아요. 그건 우리 문제니까 우리끼리 알아서 해결하기로 하고, 그 사람은 상관없으니까 빼죠."
 
 "안되죠. 당신이 뭘 어떻게 하는지 이 사람도 알아야 할 텐데요."
 
 하주는 차갑게 잘라말했다. 불꽃이 사그라지듯 이서는 처음 보이던 적의마저 서서히 잃어가고 있었다. 그럴때마다 이서는 나를 한 번씩 쳐다봤지만,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내가 직접 말할게요. 그걸로 안되나요?"
 
 이제는 부탁이 되었다. 그만큼 나라는 열쇠를 하주가 쥐고 있었고,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결국 이 사람이 정할 일이겠지만, 당신에게 넘겨주면 무슨 일을 할 지 몰라서 말이죠."
 
 이서는 말을 끝까지 듣지 못하고 '큭'하는 소리와 함께 이를 악물었다. 하주는 나를 데리고 고개를 숙여버린 이서의 옆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내가 있는 한, 그녀는 움직이지 못한다. 난 왜 지금 상황이 이리도 미안한건지 모르겠다. 원래대로라면 화내야 할 건 나인데.
 
 "……?"
 
 이서가 무언가를 말했다. 무언가 말을 하고 있었지만 그게 말이라는 것만 알 뿐 너무 소리가 작아 무슨 내용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왠지 나를 부르는거 같아 돌아보았다. 이서는 계속 그 자리에 서 있는 채로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있었다. 
 
 "……부탁이야."
 
 좀 더 목소리가 커지면서 무슨 말인지 들리기 시작했다. 내 옆에 붙어있는 하주는 관심없다는 듯 나를 데리고 들어가려 했지만, 나는 무슨 말인지 그녀에게 물어보려 하였다. 그러나 그 전에 이서가 먼저 나를 돌아보며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부탁이야. 나중에 내 얘기를 들어줘, 꼭."
 
 이서의 말이 끝나면서 나와 하주를 향해 차가 한 대 오고 있었다. 설마 우리말고 또 여기에 있는 사람이 있는건가? 그런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이서는 하주를 향해 달려들었다. 달려오는 자동차에 잠시 신경을 팔린 하주는 내려치는 이서의 공격을 급하게 단검 두 자루를 겹쳐 막아내었다.
 
 하지만 다가오던 자동차가 하주의 몸을 '쿵' 치었고, 하주가 다시 거기에 정신을 팔린 사이 이서는 무릎을 하주의 배에 정확히 질러넣었다. 자동차가 고속으로 다가오거나 한건 아니었지만.갑작스런 등장에 당황하였을 뿐 아니라 몸의 움직임이 제약되어버린 탓에 일격은 제대로 들어갔다. 하주는 정문 건너편의 화단으로 튕겨져 나갔다.
 
 내가 이 많은 일들이 일어나는 순간 할 수 있었던 일은 단지 몇 발자국 물러나는 일 뿐이었다. 이서는 하주를 돌아보지도 않고 그런 내 쪽으로 다가왔다. 왠지 겪어본 일이 또 벌어질것 같다. 역시나 이서는 날 안고 순식간에 그 자리를 벗어났다.
 
 하지만 하주때와 달리 이서는 학교 밖이 아니라 인기척 없는 학교 뒤 언덕 쪽으로 길을 잡고 산 속을 마구잡이로 질러나갔다. 왜 이렇게 고생하나 싶을 정도의 험한 길의 연속이었다. 아까 하주와 비슷한 종류의 놀라움을 겪었지만, 이건 이거 나름대로 믿기지 않는 광경이다. 그렇게 이서는 능선을 따라 내가 사는 마을 뒷 언덕까지 내달렸다.

 언덕을 내려오자 사람들이 하나둘씩 눈에 띄이기 시작했다. 이서는 안고 있던 나를 내려놓았다. 아마 하주와 같은 편리한 능력은 쓰지 못하는가 보다. 그래서 어떻게든 그 자리를 벗어나볼까 생각도 해봤는데, 어림없는 소리라는 듯 이서가 먼저 내 팔을 꽉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억세게 잡은 손이라 좀 아팠다.
 
 "아, 안 도망갈테니까 일단 놓고 얘기……."
 
 나는 그렇게 돌아보며 약간 짜증섞인 말을 하려고 했지만,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흘리는 이서의 옆모습을 보고 말을 잇지 못했다. 이서는 나의 말에 대답하기는 커녕 이쪽에 시선 한 번 주지 않으며 걸음만 재촉하고 있다. 누가 보면 싸우고 있는 연……아, 아니 어쨌든 따지거나 저항같은건 할 수가 없었다.
 
 아무말도 없이 집으로 끌려 왔다. 하주가 그랬듯이 이서 또한 걸어오면서 유달리도 힘들어하고 있었다. 눈에 익은 광경이었다. 아마 하주는 그 때……설마? 설마대로, 집에 도착하자마자 이서는 나를 강제로 끌고 식탁 의자위에 앉힌 뒤 내 쪽을 보며 허벅지 위에 걸터앉았다.
 
 하주의 말대로라면 지금 나에게 무엇이 벌어질지 대략 상상이 되지만, 난 아무것도 못하고 그냥 제물처럼 가만히 앉아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서는 망설이고 있었고, 거친 숨소리만이 내 목덜미를 흐르고 있었다. 주저하고 있는 것일까?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나는 팔을 들어 그녀의 등을 감싸주었다. 이서는 잠시 떨더니만 이내 안심하고 내 목덜미를 물기 시작했다. 
 
 항상 자신감에 넘쳐 나를 끌고다니던 이 아이가 유달리도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러면서도 자기 할거 다하는거 보니 뭔가 미안하다 말하면서 때리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내 눈을 한 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할 정도로 뭔가 미안해하고 있었다는 것에 신경이 쓰일 수 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그냥 화도 나고 궁금한 것도 많았는데, 이제는 별로 그 생각도 나지 않고 이대로 잊고 싶다. 하주의 노래를 들었던 그 순간 이후로는 어제를 그대로 가져다 붙이고 싶다. 그때의 나를 없애버리고 싶다. 지금이 현실이고, 앞으로 이 현실이 이어진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아프다는 내 감정은 점차 희미해져갔다.

4.
 
 잠시 내 피를 마시고 난 뒤, 그녀는 가쁜 숨을 몰아쉬지도 않았고, 급하게 나를 재촉하지도 않았지만, 계속 긴장하고 있었다. 내 앞에서 어쩔 줄을 몰라하며 주위를 서성거리고 있었다. 뭔가 말을 하려다가도 말을 하지 못해 더듬고 있었다. 나는 약간 정신이 몽롱한 상태였지만, 일단 신경쓰였던건 목의 이상한 기분이었다.
 
 "일단, 이거 괜찮은거야?"
 
 내가 목의 상처를 가리키며 말하자 이서는 깜짝 놀라 집안에서 구급상자를 꺼내 내 상처를 치료해주었다. 왜 이서가 나도 어딨는지 모르는 우리집 구급상자까지 알고 있는건지 모르겠지만, 지금 그런 질문은 눈 앞에 놓인 일들에 비해서는 그야말로 사소한 것일 뿐이었다. 

 상처까지 치료가 되자 우리는 거실에 마주보며 앉아 있었다. 하지만 겁을 먹고 있었다. 그녀가 겁을 먹고 있었다. 하주의 말대로라면 난 그녀에게 많은 배신감을 느껴야 하고, 그녀는 죄를 시인하듯 앉아있다. 당연한 모습인거 같으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어색하다. 이서가 먼저 조심스럽게 나에게 말을 건네었다.
 
 "… 알고 있는거야?"
 
 나는 말없이 끄덕였다. 그리고 내가 고개를 드는 순간, 난 처음으로 이서와 눈을 마주쳤다. 이서는 그렇게 고개를 들어 내 눈을 바라보다가, 다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참으로 이상하다. 원래는 이러려는게 아니었는데, 막상 그녀가 내 앞에 얌전히 앉아있는걸 보니 다른 종류의 감정들만 솟구쳐 올라 억누르느라 바쁘다.
 
 "정말, 정말 어쩔 수가 없었어. 정말……."
 
 그렇게 울면서 말하니 난 또 올라오는 감정을 억누를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올라갔다 내려갔다하는 감정을 다스려놓고 보니, 어떻게 해야할지 더욱 모르겠다. 일단 하주에게 이것저것 들은만큼, 이서에게도 이것저것 들어야 할까. 그래, 물어보자. 그 다음에 생각하자.
 
 "일단……좀 더 알고 싶은게 있는데."
 
 "응, 응."
 
 그녀는 눈물을 닦으며 안도하듯 대답했다. 죄책감 속에서도 이렇게 대화를 할 수 있다는게 그녀에게 용서가 되는건지 모르겠다. 아니면 당장 얼굴도 안 마주칠거 같았던 내가 먼저 대화를 청하는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여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난 그녀가 그렇게는 생각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어쨌든 그렇게 말이 통하게 된건 좋은데, 막상 물어보려니 무엇을 물어봐야 할 지 전혀 모르겠다. 무엇부터 물어봐야 할 지 모르겠다고 해야할까? 질문이 없으니 대답도 없다. 그렇게 서로 복잡한 생각이 침묵으로 연결되는 동안 먼저 소리를 낸 것은 전화기였다. 난 일어나 아무 생각없이 전화를 받았다. 
 
 "아, 운이 좋았네요. 당신이 전화를 받다니."
 
 하주의 목소리에 난 놀라 전화기를 놓칠 뻔했다. 이서가 그런 나를 보더니만 갑자기 다가온다. 뭔가 수화기를 뺏을거 같은데, 갑자기 손가락을 입에 가져가라고 한 뒤, 조용히 내 옆으로 귀를 가져다 대었다. 몰래 들으려는 심산일터이다. 일단 난 멀리 있는 사람보다 가까이 있는 사람의 말을 들을 수 밖에 없었다.
 
 "지금 이서 씨랑 같이 계시나요?"
 
 "아뇨. 서로 문제가 있어서 전 지금 다른 방에서 전화를 받고 있어요."
 
 "그렇군요. 그럼 잘 들으세요. 이서 씨 집주소라든지 이것저것 다 알아냈으니까 데리러 갈게요. 거기서 어떻게 빠져나오실 수는 없는건가요?"
 
 옆에 듣고 있던 이서가 깜짝 놀라 수화기를 뺏었다. 
 
 "당신 그걸 어떻게 알아낸건데?"
 
 "아, 듣고 계셨나요? 그럴거 같기도 했지만 아쉽네요. 기왕 이리된거 같이 얘기하죠."
 
 이서는 얼른 나를 쳐다보았다. 아까처럼 멋대로 하기에는 이제 내가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녀는 갑자기 약해졌다. 지금 수화기를 뺏은건 너무 순식간의 일이어서 그런것이고 어떻게 해야할지 나에게 묻는 것 같았다. 나는 대답 대신 전화기의 스피커 버튼을 눌렀다.
 
 "아, 이제 다 들으시는거죠? 그럼 얘기 계속 할게요. 그러니까 정확하게 거기 주소랑 연락처랑 이서씨 주소랑 연락처, 가족관계, 거기에 두 사람 성적이랑 신체검사기록도 알 수 있네요. 참, 이렇게 평범한 사람들끼리 왜 다투는지 말이죠. 아까 지하철에서 같이 도망갈때만 해도 좋은 분위기였는데 말이죠."
 
 하주는 잡담을 섞어가며 수다를 떨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 그럴 여유가 있는 하주가 대단하다 해야하나.
 
 "아, 지금 생각난건데 아까 음료랑 아이스크림 살 때 돈 드리고 잔돈을 받지 못했는죠. 혹시 그거 확인 해주실 수 있……."
 
 "쓸데없는 잡담은 그만하죠."
 
 결국 참지못한 이서가 말을 끊었다. 나도 이런 대화를 원했던건 아니었다. 하지만 무의식적으로 아까 받은 잔돈을 확인하러 주머니에 손을 넣은 순간, 난 내 주머니에 잔돈 말고 다른게 들어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서는 이걸 모를 것이다. 그렇다면 하주의 잡담은 이것을 위한것이 된다.
 
 "그래요. 본론을 얘기하죠. 일단 당신, 교무실을 아주 박살을 내놨던데요? 컴퓨터란 컴퓨터는 고물이 되었고, 캐비닛 안에 1학년 자료들은 다 어디론가 사라져버렸고."
 
 그러니까 아까 하주와 내가 건물 옥상에서 이런저런 잡담을 하는 동안 이서는 학교에 와서 그 안에 있는 사람을 다 내보내고 교무실을 다 부순 뒤에 우리들을 맞이했다는 말이다. 이서는 자신이 했던 일을 곱씹어 보는 듯 했다. 그런 이서의 눈을 피해 나는 주머니 속에서 손을 빼고 있었다.
 
 "그런데 요즘 세상이 너무 좋아져서, 학교에서 선만 꽂으면 바로 DB에 접속이 된단 말이죠. 비번같은거야 책상에 떡하니 적어놓고 있는 사람도 많고. 넷북 하나에 몇 가지만 챙겨가면 그런건 아무 문제가 안되요. 그러니 요즘은 서버실인가 거기도 부숴야 하나봐요."
 
 이서는 '칫'하는 소리와 함께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이서가 자신의 실수를 더듬는 동안, 나는 주머니 속의 이어폰을 빼 귀에 꽂을 수가 있었다. 무언가 속이는게 미안했지만, 하주가 무엇을 말하는지 또한 이서의 말만큼 중요했다.
 
 "전 지금 당신 집으로 가볼거에요. 왠만하면 그 사람도 같이 데려왔으면 하는데, 그럴리는 없……."
 
 하주가 여기까지 말하자 이서는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리고 이서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의미인지 짐작이 간다. 이서는 지금 나를 두고 그곳에 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하주는 이곳이 어딘지도 알고 있다. 하주가 말은 그렇게 하고 이곳으로 와 나를 데리고 갈 가능성도 있다.
 
 1/2의 도박이다. 얼른 정해야 하는데, 이서는 마음이 급한 와중에도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안절부절하고 있었다. 그만큼 그곳에는 내가 보아서는 안될 것들이 있기는 한 모양이다. 거기까지 생각하니, 아까 미뤄두었던 화나 배신감 같은게 다시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을 부추기는 하주의 목소리가 내 귓속에 울리고 있었다.

 "듣고 계시죠? 지금 그쪽으로 갈테니까 기다리시고요. 왠만하면 이서 씨가 얼른 갈 수 있도록 해주세요."
 
 하주는 내가 이서에게 말하지 않는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나도 이서가 나에게 숨기는게 있는 만큼 모든것을 말해주기 싫다. 이서는 나의 이해를 바랄테지만, 지금으로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으려하는 이서보다는 하주를 기다리는 편이 나을지 모른다.
 
 열쇠는 내가 쥐고 있다. 끌려다닐 필요 없다. 난 그 자신감을 바탕으로 우왕좌왕하고 있는 이서에게 핵심적인 것을 물었다.
 
 "그냥 나를 거기로 데려가줘."
 
 "……싫어."
 
 "다른건 다 말하겠다면서 왜 거기는 못 데려가는데?"

 "……."

 "그러면 난 네가 무슨 말을 해도 싫어하게 될거야."

 내가 그녀를 미워하게 되면 적합자로서 아무 의미가 없어진다. 무슨 의미인지 알아챈 이서는 원망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지만, 허나 그 표정은 무섭지도, 아프지도 않았다. 진심과는 달리 그저 압박을 위한 말이었지만, 생각보다 그녀에게는 충격적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서는 계속 버티고 있었다. 이렇게 됨에도 주저할 될만큼 숨기고 있다. 무언가 변명을 하려해도, 지금 나에 대한 한 마디 한 마디는 이서에게 전부 모험과도 같은 것이다. 그런 고민 끝에 아무것도 울먹이는 이서의 모습을 보니, 나에게 이렇게까지 하는 이서가 안쓰러웠다.

 내 과거를 통째로 잘라가고 지금도 무엇을 숨기는 사람에게 어떤 정을 주기는 싫지만, 이렇게 그녀를 벼랑으로 내몰고 싶진 않다.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귀 속의 이어폰을 빼 이서에게 보여주었다.
 
 "하주 씨가 이리로 오는 중이야."

 이서는 아무 반응도 하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이런 배신은 그녀가 먼저 한 것이기에, 내가 그녀에게 미안해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난 그녀를 도와주고 있는 셈이다. 이서가 자리를 비운 사이 내가 하주를 따라가버리면 하주는 절대로 이서에게 기회를 주려하지 않을테니까.

 허나 이렇게 시작된 어색함은 나도 그렇게 반가운게 아니다. 차라리 여기로 오고 있는 하주가 빨리 오기를 바라고 있었다.

5.
 
 기다림은 오래지 않았다. 잠시 후 이서가 일어나 자신의 칼을 들고 현관으로 다가갔다. 하주가 도착한 모양이다. 이서는 나에게 내지 못한 적의를 다 쏟아부을 것이다. 의도한건 아니었는데, 이렇게되니 두 여자를 이용한 내가 가장 나쁜 놈이다.
 
 "당신같은 사람이 처음인건지, 이서 씨가 대단한건지 모르겠네요"
 
 하주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는 이서를 쳐다보지도 않고 나를 향해 말했다. 
 
  "다른 적합자들은 의외로 쉽게 믿었거든요. 자기 목적을 가지고 만나는건 그만큼 틈이 많으니까요."
 
 내 옆에 있는 이서는 하주의 말을 기다리지도 않고 칼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하주 역시 올 때 이미 두 자루의 단검을 뽑아들고 들어왔다.  칼날이 격하게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현관은 난장판이 되어가고 있었다. 좁은 현관은 싸우기에 극히 불편한 곳이었기에, 그것은 검술의 대결이라기 보다 그냥 힘자랑의 모습을 띄고 있었다.
 
 "개중에는 거의 사기에 가깝게 대하는 사람도 있던데, 이서 씨는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닌가봐요."
 
 단순한 싸움이어서 그런지, 하주는 그렇게 싸우는 와중에도 계속 할 말을 이어갔다. 눈은 이서를 보고 있지만, 나에게 하는 말이다. 이서는 그런 하주의 입을 막으려는 듯 칼을 찔러들어 갔지만, 장소가 이서의 장검을 쓰기에 매우 부적합한 곳이었다. 하주는 점점 여유롭게 이서의 칼을 받아가기 시작했다.
 
 "내 말을 이서 씨에게 전한거죠?"
 
 난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은 긍정이다.
 
 "좀 이상했어요. 자신이 배신당했다거나 속았다 느끼는 사람 같지가 않았거든요. 이서 씨도 당신에게 아무런 원망도 가지지 않고 나에게만 이빨을 드러냈고요. 그만큼 서로 순수하다고 할까. 이상적으로 행동하고 있다고 할까. 세상에 당신과 이서 씨와 같은 관계만 있었다면 나같은 사람이 없었을지도 모르겠네요."
 
 항상 보여주었던 하주의 여유가 이번에는 어딘가 모르게 쓸쓸해보였다. 하주는 이번에는 아예 내 쪽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당신이 좀 탐나요. 당신같은 적합자를 가진 이서 씨가 부럽기도 하고."
 
 하주의 말을 듣자 광기에 넘쳐 공격하던 이서가 갑자기 흔들렸다. 그와 함께 이서의 칼은 무뎌졌고, 하주는 이서의 틈을 찔러들어갈 수 있었다. 어느덧 이서는 균형을 잃고 흔들렸고, 하주의 단검이 이서의 장검 안쪽을 찔렀고 이서는 자신의 칼을 놓치며 넘어졌다. 하주는 이서의 장검을 들고 이서에게 겨누었고, 이제는 아예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래도 있어서는 안되는거니까요. 어쨌든 당신은 진실을 알았고, 한 번 무너진 신뢰는 다시 회복하기 어렵겠죠."
 
 이리저리 꼬였지만, 어쨌든 완전한 하주의 우세로 끝났다. 이서는 전의를 상실했지만 그 눈은 하주를 계속 노려보고 있었다. 하주는 그런 이서에게 차갑게 잘라 말했다.
 
 "당신에게 선택권을 줄께요. 이대로 저 사람에게 모든 것을 다 알리고 관계를 끝낼지, 아니면 지금 여기에서 피를 볼지."
 
 잠깐, 피를 본다고? 난 갑자기 망설여졌다. 믿을 수 없는 일들의 연속이었지만, 적어도 죽고 사는 문제는 아니라 생각했던 나에게 진검을 주고받는 다. 진검을 주고받으며 죽을 듯이 달려들기는 했지만, 적어도 피를 보지는 않았다. 그렇게 상황이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분위기가 다시 살벌해지고 있다.

 "저기, 피를 본다는게 무슨 말인건지……."
 
 "적합자가 없이 우리 종족은 며칠 버티지 못해요. 예외적인 경우도 좀 있긴 하지만, 이후 급속도로 약해지죠. 제가 그건 말 안했나 보네요. "
 
 당연한 말이었다. 내가 필요한 만큼 없으면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니. 하지만 난 그것을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약해지는 자신을 이기지 못해 결국 이전의 적합자나 다른 사람들을 공격하는 경우가 있어요. 그럴 때 제가 처리해야죠."
 
 "처리……요?
 
 "맞아요."
 
 하주는 웃으면서 말했다.
 
 "제 손에는 생각보다 많은 피가 뭍어있답니다. 그래봐야 동족 너덧 정도고, 일반 사람들은 안 건드리니까 걱정마시길."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아니 어쩌면 내가 너무 막연하게 생각해왔다. 워낙 정신없는 하루라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었지만, 이것은 엄연히 생과 사를 가르는 전쟁이었다. 난 갑자기 뭐에 맞은 듯 멍해있었다.
 
 "넌 우리들이 어떤 생각으로 사는지 모를거야."
 
 이서가 차가운 말을 내뱉었다. 그렇다. 나는 그냥 내 입장으로만 생각했다. 나를 둘러싼 것들이 궁금했을 뿐이었고, 다른 이들이 어떻게 사는지에 대해 몰랐다. 하주가 왜 그렇게 동족을 절멸시키려는지, 왜 이서가 하주에게 그렇게 적의를 드러내는지 알려하지 않았다.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세요. 어찌되었든 이제 당신은 어제와 다른 삶을 살 수 있으니까요."
 
 하주의 말대로 간단하게 끝날 문제다. 하지만 이서는 어떻게 되는걸까. 난 이서에게 궁금한게 많았을 뿐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을 못하지만, 이렇게 끝나버릴 일이 아니다. 나는 해방될지 모르지만, 그녀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 난 그게 싫다. 그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 난 아직 믿고 있다. 이건 아니다.
 
 "선택할 수 없으시면 제가 저 사람 데리고 갈테니까 그렇게 아세요."
 
 하주는 이서에게 마지막으로 통보하였다. 이서는 체념하며 마지막이라는 듯 내 쪽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 짧은 시간동안 다시 이서를 도울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다.
 
 아까 이서가 하주를 쓰러뜨릴 때, 갑자기 어디에서 자동차가 나타났다. 내 시간을 가져가서 생기는 능력이라면, 아까 하주가 그랬듯 시간을 어떻게 하는 것일터이다. 그 상황에서 없던 자동차가 갑자기 생기게 하려면……잘라붙이는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아까 자동차는 과거의 시간 속에서 가져와 현대에 돌려놓은게 아닐까? 

 여기까지만 정리한 뒤, 나는 검토할 틈도 없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있는 것은 내 몸뚱이 하나 뿐이다. 하지만 하주의 경우를 생각하면 적합자인 내가 이서의 능력에 반응하지 않을 것이므로 소용없는 일이다.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던 내 눈에 하주 오른편에 서 있는 책장이 하나 들어왔다.
 
 이 난장판 속에서도 아직 멀쩡한 책장에는 평소 보지 않는 무거운 장서들과 이런저런 잡동사니들이 올려져 있었다. 그러자 위험하지만, 유일한 생각이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칼을 겨누고 있는 하주의 옆으로 달려들었다. 하주는 미처 피하지 못하고 두 사람은 그대로 책장에 내동댕이 쳐졌다.

 하주는 당황하여 칼을 놓치거나 하지 않고 이내 나를 옆으로 밀쳐냈다. 그와 동시에 하주의 머리 위에 장서 몇 권이 떨어지고 있었지만, 하주의 칼 끝은 앞으로 향해 있었다. 하주의 칼 끝에는 맨몸으로 달려들던 이서가 있었다.

 "아야, 이번에는 안 당한다 생각하긴 했는데, 하필 떨어져도 모서리로 떨어지느냔 말이죠."
 
 하주는 한 손으로 책을 치우며 투덜거렸다. 난 책장에 부딪혀 숨이 막힐 것 같은 고통에 뒹굴면서 간신히 상황을 지켜보는 것이 전부였다.
 
 "그래도 이렇게까지는 안 할 줄 알았는데, 당신 좀 너무하네요."
 
 하주는 나를 돌아보며 원망섞인 웃음을 보냈다. 소란이 있었지만 상황은 변한게 없었다. 아니, 이제 나도 움직일 수 없는 처지였다. 하지만 하주의 칼 끝에 있던 이서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이서의 미소를 본 하주는 잠깐 뭔가 잊은게 떠올랐다는 듯 표정이 굳어졌다.
 
 "늦었어."
 
 하주는 위를 힐끗 보았다. 하지만 그보다 빨리 큰 상자 하나가 하주의 머리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하주는 이번에도 피하지 않고 이서를 노리려고 했지만, 상자가 하주 위로 떨어지면서 찢어져 버린 탓에, 그 안에 있던 크리스마스 트리 장식들이 우수수 떨어지고 있었다. 하주는 갑자기 시야를 잃었고, 이번에도 이서는 그것을 놓치지 않고 칼을 빼앗을 수 있었다.

 다행히 예상이 맞았다. 아까 부딪혔을 때 책과 함께 떨어졌어야 했던 것인데, 내 생각대로 이서가 순간 그 곳의 시간만 잘라내어 하주가 방심하고 있었을 때 다시 붙여넣은 것이다. 그 상자 아마 얼마전에 얼마전에 엄마가 저거 너무 불안하게 있다고 안쪽으로 넣으라고 했다가 둘 다 까먹은건데 이렇게 도움이 된 듯하다. 그래도 상자가 찢어질 줄은 몰랐다.

 잠시동안 고통에 움직이지 못했던 나는 간신히 일어날 수 있었다. 이서는 칼을 겨누고 있으면서도 나를 부축해 일으켜 주었다. 하주가 한숨을 쉬며 나에게 말했다.
 
 "아까 이서 씨가 잠깐 능력을 썼던거 같았는데, 이것 때문이었군요."
 
 "정확히 예상하고 한 건 아니지만."

 여러가지로 불확실하고 운에 맡겨야 하는 행동임에도, 망설일 수 없었다. 이서가 처음 나를 봤을때의 마음이었을까. 내 옆에 이서는 웃고 있었다. 나에게는 궁여지책이었지만, 이서에게는 그렇게 마음이 통한게 무척이나 기뻤던 모양이다. 하주가 그런 이서를 보며 나에게 물었다.
 
 "이게 당신의 선택인가요?"
 
 "아니, 그건 지금부터 들어봐야 알겠지."
 
 솔직한 심정은 아무래도 좋았다. 허나 어찌되었든 어제처럼 아무것도 모르고 살 수는 없을 것이다. 하주가 그걸 다시 확인시켜 주었다.
 
 "그녀는 당신을 이용했어요. 당신은 이제 그걸 알았고요."
 
 "그렇지, 거기에 아직도 뭔가 숨기고 있지."

 "계속 피할 수는 없을거에요."
 
 "적어도 오늘 일을 잊기 전까지는."
 
 서로 그렇게 담담히 몇 마디를 나누고 난 뒤, 하주는 웃음을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래요. 그럼 괜찮겠죠. 한 번 균열이 일어났으니 비가오면 언제라도 갈라질테고. 서두를 필요는 없겠죠."
 
 하주는 몸을 털고 떠나려 하였다. 이서가 칼 끝을 들이밀며 차갑게 내뱉었다.
 
 "내가 당신을 놔줄거 같아요?"
 
 하주는 살짝 웃고는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서 씨는 아니겠지만, 이 사람은 그럴거에요."
 
 이서는 나를 쳐다보았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나에게는 은인이니까."
 
 이서는 반박하지 못하고 칼을 내려놓았다. 하주는 마치 친구 집에 놀러왔다 떠나는 듯 편하게 현관으로 나섰다.
 
 "아, 그리고."
 
 문을 나서면서 하주가 잠깐 나에게 말했다.
 
 "나, 키스는 그게 처음이었어요."
 
 그녀의 충격 발언에 깜짝 놀라 '잠깐!'이라고 외치려 했지만, 내가 뭐라기도 전에 하주는 사라졌고, 내 옆에는 다시 분노에 차있는 이서의 모습……을 보지 않아도 알것 같다.
 
 "야."
 
 아, 이제 이서의 반말은 무섭다. 빨리 수습해야겠다.
 
 "……양심고백하겠습니다."
 
 설마 죽지는 않겠지.
 
 "웃기지마!"
 
 위험하다. 위험하다. 하지만 이서는 이내 아무말도, 행동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삐쳤다는 생각까지 들지 않을 정도였다. 극도로 감정을 억누르고 있다고 해야할까. 아아, 잠시 지금 상황을 잊고 있었다. 이제 이서는 나에게 어떤것도 할 수가 없는 처지가 되었구나. 
 
 이제 정말 나없이 못 살게 되었고, 그것을 이제 내가 알아버렸다. 여기에 그만큼 내가 잃는게 많기에 난 언제라도 그녀를 버릴 수 있다. 너무도 슬픈 관계 아닌가. 연민이라고 할까, 난 그런 이서를 안으며 나도 모르는 말을 뱉어버렸다.
 
 "미안해."
 
 ……미안하다니. 내가 왜? 무의식적으로 한 말이 갑자기 고백 비슷한게 되었다. 아니 그걸 떠나 갑자기 왜 이런 분위기지?
 
 "아니야, 내가 미안해. 내가……, 내가……."
 
 이서는 그렇게 내 품에 안겨 울었다. 그런걸 떠나 미안하다는 말 자체가 이서의 어딘가를 먼저 건드린 모양이다. 어쩌면 내가 듣고 싶었던 말도 이런 말이었는지 모르겠다. 이제 어떻게 해야할까. 뭔가 더 추궁하지 못하고 말려들어 간 기분이지만, 지금은 이런 손해가 즐겁다.

 이 사람은 나를 대체 어떻게 한 것일까. 알고 싶은건 많지만, 일단 지금 그녀의 마음은 진심이다. 그것이 있기에 난 끝까지 그녀를 믿을 수 있었다. 언제까지 이대로 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당분간은 이 정도로만 생각하고 싶다.

 그나저나, 이제 난장판이 된 집을 어떻게 정리한다. 

6.

 몇 주가 지났다. 오늘도 이서는 내 방으로 쳐들어와 나에게 영화를 보러가자며 나를 끌고 나왔다. 몇 주동안 난 그녀에게 아무것도 묻거나 캐들어가지 않고 있다. 일종의 유예기간이라고 해야할까. 얼마나 계속될지는 모르겠지만, 아직은 예전의 모습과 달라지고 싶지 않다.

 그래도 예전에는 시간을 바꿔 몰래 가져갔던 내 머리카락이나 피를 이제는 대놓고 부탁하고 있다. 이거 하나만 빼면, 두 사람에게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시간이 흐르고 우리 두 사람은 어제와 다른 사람이 되었지만, 난 아직도 이렇게 과거회귀적이다. 그런 내가 기억을 점점 잃어가고 있으니 이것을 필연이라 해야할지 모순이라 해야할지.

 지하철 역으로 들어서자 익숙한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오늘 우리는 다른 사람인데, 어제의 노래가 들려오고 있다. 난 예전처럼 그 노래에 끌려가지 않고, 멀리서 그 노래를 듣고만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노래가 나에게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이번에도 나는 예전처럼 피할 수 있을까? 

 노래가 끝나고, 이번에도 나는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Writer

수려한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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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1)

ㅁㅁㅁ 10.12.03. 15:55
한 편의 잘써진 라이트노벨이네요. 이용하는 자와 이용당하는 자 간의 자기파멸적인 애틋한 사랑이랄까, 연민이랄까, 그런 게 잘 표현된 것 같아서 좋았습니다. 다만 뿌렸던 떡밥이 전부다 회수가 된 것도 아니고, 본작 자체만으로 완결성을 갖는다고 하기에는 좀 무리네요. 어떤 이야기의 인트로 부분만 떼서 써놓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번 파라대의 소재였던 아이스크림, 낮달도 단순한 언급에 불과한 점도 아쉽고요.
권한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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