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이정표

Last Christmas - MSK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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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려한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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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
나는 극심한 갈증을 느끼며 잠에서 깼다.
깼다라기 보다는 일어날 결심을 했다는게 정확하다고 할 수 있겠다. 정신은 아까부터 들었었으니까.
커튼을 젖히고 밖을 보니 해는 완전히 지고 가로등이 해를 대신하여 어두운 길을 밝히고 있었다.
핸드폰을 열어보니 6시였다.
오늘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 새벽4시까지 컴퓨터를 하다가 잠자리에 들었었다는 것을 감안 했을 때는 지금시각은 다분히 저녁 6시일 것이다.
근데 계획과는 다르게 아직 오늘이 마저 지나지 않은 것이다. 신생아처럼 14시간 수면한 것으로도 충분히 내가 대견하긴 하지만.
14시간동안 아무런 음식물도 섭취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확실해 지자 갈증에 허기가 더해지는듯 싶었다. 삐거덕대는 몸을 끌고 나는 주방으로 가서 습관적으로 냉장고부터 열어보았다. 평소대로 언제부터 구석에 처박혀있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김치통과 정체를 알 수 없는 락앤락 글라스들. 그 사이에서 나는 식빵봉지를 발견한다. 내가 냉장고 문을 닫자마자 핸드폰에 아버지로부터의 문자가 도착한다.
「퇴근 좀늦을것같다」
문자를 보자마자 나는 핸드폰을 닫았다.
이런 날에 늦는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닌데 왜 새삼스레 문자를 보내셨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식빵봉지에 붙어있는 라벨을 보니 유통기한이 12월 25일까지다. 아슬아슬하게 세이프. 나는 물과함께 식빵 덩어리를 씹는다. 냉장고 속에서 오랬동안 있어서 그런지 눅눅하고 또 괜히 김치냄새가 배어있는듯한 기분나쁜 느낌을 준다.
“...피시방이나 갈까…….”
나는 씹고있던 식빵을 꾸역꾸역 삼키고 돈을 챙겨 나갔다.

"Last Christmas I gave you my heart but the very next day you give it away……."
사람들로 꽉차있는 이 거리, 어느 카페에 있는 테라스의 스피커에서 들리는 익숙한 캐롤과 종소리가 어느새 크리스마스가 다가왔음을 알려준다.
12월 24일. 흔히들 말하는 크리스마스이브이다.
사람들이 흔히 알고 있듯. 크리스마스는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난 날이다. 필시 그는 누군가와는 달리 많은 사람들의 축복과 천사들의 가호 속에서 태어났을 것이다. 하기사 그러기에 모두가 그 한사람을 위해 크리스마스를 기념하고 기뻐하는 거겠지.

모두가 내일의 크리스마스를 기대하며 준비를 하느라 축제 분위기가 물씬한 이 거리에 나는 물위에 뜬 기름처럼 섞이지 못하고 있다. 소위 아웃사이더라고 할 수 있다.
많은 가게들이 이번 크리스마스라는 대목을 놓치지 않기 위해 기합이 들어가 있는 듯싶다. 형형색색 발광하는 싸구려 전구들과 플랜카드들이 가게의 벽들마다 장식되어 있고 크리스마스의 연인들과 가족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각종 문구들도 눈에 띈다. 가게마다 빠지지 않고 자신들의 상업성을 부정하고 ‘단지 크리스마스를 기념하고 싶다’라고 항변하는 듯 정갈한 푸른색의 크리스마스트리를 문밖에 내다 놓았다.

내 이름은 김준호 입시를 마친 고3이다.

‘하아…….’
나는 한숨을 쉬었다. 하얀 입김이 힘없이 바닥으로 주저앉는다. 동네 주변에 피씨방이 별로 없긴 하지만 크리스마스라 그런지 비어있는 피시방을 찾기가 평소보다 더욱 어렵다.

‘당신은 산타의 존재를 믿는가?’
이 질문을 이 길을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물어본다면 대다수는 이러한 대답을 할 것이다.
‘어릴 땐 믿었지만 지금은 믿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다르다. 어릴 때부터 산타의 존재를 믿지 못하였다. 정확히 말하면 산타에 대한 환상을 부풀릴 기회조차 박탈당했었다. 최소 내가 기억하는 범위 내에서, 아버지는 크리스마스를 단 한 번도 챙기신 적이 없었고 나에게는 산타따위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다는 사실을 누누이 말씀해 오셨었다. 그런 상황에서 산타를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지금 내 눈앞에 데리고 와 보아라.

잠시 멈춰 하늘을 본다. 언제 부터였는지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 눈이 약하게 내리고 있었다. 진눈깨비는 아니었지만 약간 추적추적하는 느낌을 주는 것이 나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화이트...라…….’
“당신은 크리스마스가 싫으신가요?”
누군가 옆에서 말했다.



01.
고개를 돌려 보니 옆에는 중학생쯤으로 보이는 기묘한 복장의 귀여운 여자아이가 있었다.
뭐랄까. ‘기묘하다’라기 보다는 ‘미묘하다’라고 해야 적당할까. 그녀는 소박해 보이는 흰색 단추와 장식들이 인상적인 붉은색 미니스커트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허벅지 중간쯤까지 오는 하얀색 니삭스와 흰 털이 달린 붉은색 어그부츠을 신고 있었다. 또 그녀의 머리에는 솜방울이 달린 붉은 모자가 씌어져 있었고 등에는 뭔가 작지만 알차게 물건이 가득 차 보이는 붉은 가방을 메고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 그 아이는 여자 산타같은 복장을 입고 있었다.
아무리 크리스마스라고 해도 정말 들떠서 산타복장을 입고 돌아다닐 정도로 기합이 들어간 사람은 없다고. 아, 혹시 유흥업소 호객꾼인가? 어린나이부터 그런 알바를 뛰다니 글러먹었군. 이럴 때는 못 들은 척 지나가는 게 상책이지. 여러 가지로 귀찮아지기 싫으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내가 향하던 방향으로 계속 걸어가려 발을 떼었다.
"당신이 준호군?"
나는 흠칫 놀라서 다시 그 여자아이를 보았다.
나는 약간 수상쩍다는 표정으로(잘은 모르지만 아마 그렇게 보였을 거다. 실제로 수상하니까.)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의 소원은 무엇인가요?"
의문문은 긍정문이든 부정문이든 반드시 평서문으로 대답을 해야 된다. 이것은 수능영어에서 반드시 지켜지는 절대 불변의 법칙이다. 하지만 만일 당신 눈앞에 처음 보는 여자아이.... 아니, 산타 옷을 입은 어떤 여자가 당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면 당신은 분명 나와 같은 대답을 했을 것이다.
“누구세요?”
그녀는 약간 당황한 듯 허둥대며 옷을 뒤지더니 작은 종이를 꺼냈다.
“제 소개부터 했어야 했는데 제가 실수했네요. 성(聖) 보나라고 합니다.”
그녀는 자신 있게 두 손으로 명함으로 보이는 종이를 내밀었다.
[산타]
[Saint. Bona]
[크리스마스 소원을 이루어 드립니다 ― 산타협회]
간명하게 세 줄만이 적혀진 그 명함은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나는 무늬들로 장식되어있었다
“그러니까 요는 심부름센터 같은 건가?”
"틀려요! 저희를 심부름센터 따위랑 비교하다니요!"
약간 자존심이 상했다는 표정.
"산타가 사는 성계(星界)에서 왔다구요! 성계라고 적으면 사람들이 못 알아듣고 이상한 눈으로 보니까 산타협회라고 적은거에요!"
아니, 성계가 뭔진 모르겠지만 산타협회도 충분히 이상하다고 생각해.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런 거는 무시하고 지나가는 게 상책이지.
"미안, 딱히 필요한 일도 없고 돈도 없어."
"네에? 당신은 크리스마스 선물의 대가로 돈을 주나요?
보나는 손가락을 아랫입술에 살짝 대고 물었다. 
"헤헤... 죄송해요, 사실은 저도 현역으로 뛰는 거는 처음이라 실정을 잘 몰라요... 지금까지는 쭉 연습생이었거든요."
뭐야 상당히 설정이 본격적이잖아.
"하여튼 소원 같은 건 없으니까 다른 사람이나 찾아봐."
내가 다시 돌아서려는 순간 보나는 내 코트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준호군은 행복해지고 싶지 않으신가요?"
"전혀 행복하지도 않고 그다지 행복해 지고 싶지도 않아."
"거짓말."
보나는 나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말하였다. 소녀의 눈빛에는 알 수 없는 묘한 위압감이 있었다. 마치 누가 보면 내가 정말 큰 잘못을 해서 그녀가 나무라는 것처럼.
"준호군은 거짓말을 하고 있어요. 전 알 수 있어요"
나는 이 아이가 무슨 꿍꿍인가 싶어 살짝 도발을 해 보았다.
"아니 도대체 어디서 오는 자신감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난 네가 누군지 알지도 못한다고."
"세상에 행복해지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어요? 게다가……."
그녀는 말을 잠시 끊고 내 바로 앞으로 다가와 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당신은 착한 아이니까 행복해지고 싶을 거예요. 착한 아이니까 제가 여기 온 거구요."
그녀는 약간 멍청해 보이게 히- 하며 웃었다.
잠시 동안 멍해있다 그녀의 얼굴과 내 얼굴 사이의 공간이 급격하게 좁아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는 깜짝 놀라서 조금 뒷걸음질 쳤다.
확실한건 이 여자아이가 나사 빠진 아이이거나 내 머리가 이상해 졌다는 사실이다. 안 그러면 내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써온 한국어를 이해 못할 리가 없으니까.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미안한데 나 지금 바빠.”
바쁘진 않지만 나는 어떻게든 이 상황을 대충 넘어가고 싶었다.
“그럼 당신이 행복해 질 때까지만 옆에 있을게요. 당신을 반드시 행복하게 해 드릴 거예요! 근데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만들 수 있을까? 흠……. 어디서 배웠던 거 같은데 교본이 어디 있지…….”
그녀는 뒤로 매고 있던 붉은 가방을 땅에 내려놓고 무릎을 구부리고 앉아서 뒤졌다.
...여담이지만 저 자세 너무 무방비한 거 아니야? 아슬아슬하다고. 내가 시선을 어디다 두냐에 따라서 상당히 위험할 수도 있는데 말해 줘야하나.
“잠깐만요. 가지 말고 기다리세요. 이쯤에 놨는데 이상하다...”
뭔가 일이 복잡해지는 듯싶다. 아, 예전에 꼬맹이들에게 산타가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하는 방법에 대해서 읽어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산타가 크리스마스 동안 다녀야하는 집의 수와 굴뚝을 통해 내려가는데 걸리는 시관을 이용해서 그 집들을 모두 다니기 위해서 필요한 교통수단의 속도를 계산하는... 뭐였지?
“산타라는 게 다 뭐야……. 산타가 혼자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어린아이들에게 선물을 전달해 주려면 산타가 도달해야 하는 최소한의 속력은…….”
“당신 바보에요?”
보나는 가방을 뒤지다 말고 나를 가소롭다는 듯이 보았다.
...네? 산타를 믿는 사람한테 산타의 부재를 증명하려다 도리어 바보라는 소리를…….
“세상에 산타가 한명일 리가 없잖아요! 그건 인간들이 만들어낸 이야기라구요. 생각해보면 기분 나빠요! 산타 할아버지라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에요? 산타한테도 은퇴라는 게 있다구요! 호호백발 할아버지 할머니가 돼서까지 크리스마스에 일해야 한다면 그건 정말 악몽일 거예요! ‘산타는 모두다 할아버지’라는 편견 때문에 사람들이 크리스마스만 되면 벽에다 할아버지 그림들만 잔뜩 붙여놓잖아요! 싫어요! 그런 취급 받는 거! 정말 나쁜 어린이들이에요 산타를 편견을 갖고 대하는 사람들은! 아, 그리고 또 소원 중에서…….”
그녀는 마치 그간 쌓인 게 많았다는 듯이 속사포로 말을 이어나갔다. 자신이 산타라는 것이 기본전제가 되어버린 그녀의 말 속에서 나는 몹시 혼란스러웠다.
뭐지 이 아이는. 신고해야하나, 산타의 존재를 믿는 순수한 영혼이라고 해야 하나.
그냥 신고해 버릴까?
...뭐……. 남는 게 시간인데 조금은 적당히 어울려 줄까.
“...그래서 ‘산타 할아버지’라는 말이 생긴 거 같은데……. 그래요, 이해는 되요 그래도…….준호군, 듣고 있어요? 앗 찾았다!”
죄송합니다. 듣고 있지 않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도 없어요.
보나는 가방에서 찾은 책을 후루룩 보더니 ‘음...음... 맞다.. 그랬지...’라고 혼자 중얼거렸다. 그녀는 책을 덮어서 다시 가방에 집어넣었다.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 바로 사랑입니다! 준호군은 사랑하는 사람이 있나요?”



02.
나는 옛날부터 타인들로부터 그다지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아마.
오히려 ‘사랑받지 못한다’라기보다는 ‘미움 받는다’에 더 가깝다고나 할까.
어렸을 때는 내가 왜 어머니가 없는지에 대해서 자세히 생각해 본적이 없다. 하지만 초등학교 입학식 때 어머니의 손을 잡고 있는 아이들 사이에서 혼자 아버지와 함께 서있다는 사실이 왠지 모르게 부끄러웠고 집에 돌아와 아버지에게 왜 나한테는 엄마가 없냐고 울면서 화를 냈었다. 그리고 그날 처음으로 언제나 이성적으로 보이셨던 아버지에게 뺨을 맞아 봤다.
입학하고 나서 처음에는 별로 느끼지 못하였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친구들이 내 옆에 있으려 하지 않음을 어렸음에도 불구하고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학년이 넘어가도 똑같은 현상은 반복되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학년이 올라갈수록 학급 속에서 내가 혼자 동떨어지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이 점점 짧아진다는 사실 뿐이었다. 처음에는 소외감을 느꼈고 슬펐다. 친구들이 왜 나를 피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 당신들의 자식들이 어머니가 없는 나로 인해 나쁜 영향을 받을까봐 미리 말해둔 거겠지. ‘저 아이와 친해지지 마라’라고.
정말 놀라운 건 인간의 적응능력이다. 나는 그러한 상황에 점점 무감각해져갔고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중학교에 가서는 내가 먼저 그들의 나로부터 먼저 소외시켰다. 그게 오히려 나에게는 편했다. 내가 무얼 하든 그들은 신경 쓰지 않았고 그들이 무얼 하든 나는 내 할 일만 하면 되니까. 하지만 중학교 때에는 초등학교 때와는 달리 나에게 다가오려고 노력하는 아이들이 있었다. 솔직히 귀찮았다. 나를 불쌍하고 도와주고 싶다고 생각하는 애들이 참 한심하고 가소로울 뿐이었다. 초등학교 때처럼 나를 가만히 둘 수 없나, 라고도 생각했었다. 그렇게 중학교를 졸업하고 이전과 같은 방법으로 고등학교생활을 하였지만 후회는 없다. 그렇게 산 덕분에 오히려 내 마음은 도리어 편했으니까.


가끔 아버지가 술에 취하면 내 어머니에 관해 이야기 하실 때가 있다.

내 아버지는 소위 운동권 출신이었다. 본인의 주장에 따르면 아버지는 민주화에 역행하는 정부의 부당한 처사나 썩은 기업들의 척결을 주장하며 여기저기서 게릴라 시위를 도맡아 이끌었다고 한다.
억척스럽게 자신의 이상만 밀어붙이던 아버지는 어느 날 갑작스럽게 사랑에 빠졌다.
그날, 평소와 같이 그는 대학교중심에서 시위대를 모았고 예상 밖으로 너무 빨리 나타난 전투경찰에 의해 시위대가 와해되어 뿔뿔이 흩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그날 왠지 모르게 국문과 강의실로 숨어들었고 거기에서 바로 그녀를 만났다고 했다.
그 여성이 바로 나의 어머니이다.
아버지는 그 후 며칠 시간이 남을 때 마다 그 강의실근처를 서성거렸고 마침내 그녀와 대화를 나눌 기회를 얻었다. 아버지가 말하기를 어머니는 대학생 시절 문학을 좋아하고 아버지와 비슷한 이상을 가진 여자였다고 하셨다.
그 후 그 둘이 어떻게 깊은 감정을 느끼고 계속 만나왔는지, 그 연정이 얼마나 깊었는지 모르겠지만 아버지는 그녀에게 결국 청혼을 하였다.
하지만 그때 비로소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작지만 그가 감당하기엔 너무나 큰 비밀을 말해 주었다.
바로 어머니가 당대 상당히 규모 있고 저명한 기업의 집안의 차녀였던 것이었다. 그 기업은 아버지가 증오하는 종류의 대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런 집안에서도 아버지와 같이 가진 것 없는 사람을 사위도 받아드릴 리가 만무했다.
고민 끝에 아버지와 어머니는 야반도주를 결정했다고 한다. 도주 중 어머니는 나를 임신하셨지만 얼마안가 집안이 고용한 사람들에게 은신한 위치가 발각되었고 결국 그들에게 잡혀버렸다고 한다. 나를 유산시키려는 외할아버지에게 어머니는 나를 낳는 조건으로 아버지를 만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였고 나를 낳은 후에 아버지는 나를 맡고 영영 어머니를 볼 수 없었다고 한다.

내가 알고 있는 내용이 틀린 부분이 있을 수도 있다. 아마 틀린 부분이 많을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우리 가족의 옛 모습에 대해 들어온 건 건 그저 아버지가 술에 취했을 때 술기운에 짤막짤막 내뱉는 토사물에 섞여 나오는 이야기와도 같은 거니까.

다만 확실한 것은 어머니가 나를 낳으신 날이 바로 빌어먹을 크리스마스라는 것이다.

그뿐이다.



03.
“사랑을 하지 않으면 사랑을 하면 되요! 고로 준호군은 저를 사랑합니다!”
....‘저를 사랑합니다!’라니. 그건 어느 나라말이야?
계속 소녀의 마이페이스를 보다보니 익숙해 질 법도 하건 만은 나는 갈수록 4차원 세계로 빠져드는 느낌만 들었다.
“준호군은 지금부터 저를 사랑하시고 그러면 저희는 연인이 됩니다! 그러니까 데이트를 합니다!”
“뭐가 ‘그러니까’야 ‘그러니까’는. 적당히 좀 하지 그래?”
나는 약간 짜증나는 투로(실제로 짜증이 났고) 그녀를 쏘아 붙였다.
그녀는 순간 흠칫하고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지금까지 계속 종알거리다가 갑자기 입을 다물고 침묵을 하자 나는 조금 심했나 싶어서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지금까지의 기세는 어디로 갔는지 그녀는 금방 눈물을 글썽거리고 있었다.
“......죄송해요. 첫 번째 일이라 꼭 성공시키고 싶어서…….”
뭐라고 말을 더하면 그녀가 정말로 펑펑 울어버릴 듯 한 표정을 지어서 나는 어떻게 대해야 할지 당황했다.
“어머 크리스마스에 여자를 울리다니 남자가 왜 저모양이야.”
“여자가 아깝다. 왜 저런 남자한테...”
“무슨 사정인진 몰라도 저 남자 정말 인간으로써 실격이네.”
주변에서 사람들이 웅성 이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은 남의 일에 왜 이렇게 참견하기 좋아하는 걸까. 나는 주변의 말소리를 무시하려고 했지만 내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무척 뜬금없었다.
“그, 그, 그래? 아, 미안. 그럼 그러도록 하지.”
... 내가 지금 이 기세에 휘말려서 무슨 돌이킬 수 없는 소리를 하는 걸까.
“정말요! 그럼 데이트하러 가요!”
눈물을 뚝 멈치고 그녀는 언제 그랬냐는 듯 나에게 팔짱을 끼고 날 끌었다.
아버지는 항상 말하셨다. 여자의 무기는 눈물이라고. 그렇다. 이건 한없이 흉기에 가깝다.


어쩌다가 내가 여기에 앉아있게 된 걸까?
입안에서 거치적거리는 팝콘 부스러기의 불쾌한 느낌을 씻어보려고 나는 콜라를 한 모금 마셨다. 여전히 찝찝한 기분이다.
옆에는 보나가 신발을 벗은 채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팝콘을 껴안고 눈앞에서 상영되고 있는 영화에 몰입하고 있다.

난 영화를 싫어한다. 그냥 단순히 좋아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진심으로 싫어하는 것이다. 영화 제작사들은 사람들의 돈을 한 푼이라도 더 짜내기 위해서 그들의 작품으로 소비자들의 최대한 단순한 감정을 자극하려고 한다. 상황을 과장함으로써 해학을, 극악무도한 적을 만듦으로써 분노를, 주인공들의 눈물을 보여줌으로써 비애를 관객들에게 얻어내려 한다. 그러한 소비를 자극하기 위한 공식 아래서 만들어진 영화다보니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어떤 내용일지가 너무 뻔하고 유치하다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실버스크린 속에서는 남녀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가지마…….」
여자가 남자를 붙잡는다. 남자는 별 말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여자는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눈물을 흘린다.
「도대체 왜 떠나는 건데! 말은 해주고 가야할거 아니야!」
「나도... 나도 가고 싶어서 가는 게 아니라고!」
남자가 여자의 눈을 애처롭게 바라보며 소리친다.
....우와... 유치해…….
「...다시 만날 수는 있는 거야?」
「아마... 아닐 거야. 그동안 즐거웠어. 이제 나를 놔줘…….」
여자는 손에 힘을 스르르 풀어서 그를 놔버린다. 그리고 그는 뒤돌아 물을 열고 나간다.
오그라든다.
영화란 현실에서 존재할 수 없는 상황을 담아내는 매체이다. 그러기에, 그런 이상만을 찾기에 나는 영화가 싫다.

사람들이 나가면서 내는 웅성거리는 소리에 나는 깼다. 아까까지만 해도 어둡기만 했던 극장 안이 어느 샌가 환해져 있었다. 나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나가려고 일어났다.
“가자 보나. 영화 끝났어.”
“아라요주노군”
나는 내 옆자리로 눈을 돌렸다.
“..........누구세요?”
내 옆자리에 앉아있었던 보나의 얼굴은 퉁퉁 불어있었다. 아마 영화를 보면서 울었던 모양이다.
“주노군이거너무슬픈거가타요이런거이런거…….”
그녀는 지금까지 운 것이 부족했는지 더 울려는 기세로 숨을 헐덕 거렸다.
“알겠으니까 일단 진정하고 나가자. 응?”
나는 그렇게 울먹거리는 그녀를 끌고 나왔다. 옆에서 사람이 울려고 하는데 이런 감상을 말하는 게 우습기도 하지만 솔직히 말해 눈망울에 울음기가 가득한 그녀는 정말 귀여웠다. 그녀를 데리고 나오면서 그녀를 찬찬히 보니 상당히 미인인걸 깨달았다. 오똑하게 선 콧날에 동글동글한 눈, 도톰하고 불그스레한 빛을 내고 있는 입술. 그리고 정말 눈처럼 하얀 피부.
보나가 갑자기 나를 돌아보자 그녀를 찬찬히 보고 있었던 나는 놀랐다.
“주노구운으헤에에에...”
그녀가 다시 울먹인다. 골칫덩어리 같으니라고.

영화관 밖으로 나오니 밖에서는 눈이 살랑살랑 오고 있었다.



04.
쪼르르륵-
“햐아……. 이게 커피라는 거군요! 처음 먹어봐요. 근데 생각보단 맛없네요.”
“내 돈으로 먹는 커피면서 그렇게 말하지 마!”
영화관 밖으로 나오니까 벌써 아홉시가 넘었고 시간이 시간인 만큼 공기가 찼다. 어디 들어가 있을까 생각을 하다가 울음을 간신히 멈춘 보나가 ‘커피마셔요!’라고 해서 이 커피전문점으로 들어오게 됐다.
하지만 태어나서 처음 카페에 들어와 본 나로서는 커피가격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자판기에서 끽해야 삼사백 원쯤 하는 쓴 물이 왜 이렇게 비싼 거야! 이건 사기야! 라고 외치고 카페를 나오고 싶었지만 옆에서 보나가 커피를 마시고 싶다는 강렬한 눈빛을 보내기에 나는 눈물을 머금고 나의 종잇장만치 얇삭한 지갑을 털어야 했다.
“근데 왜 사람들은 이렇게 쓴 물을 마시는 걸까요? 흠…….”
“단맛으로 먹는 거겠지.”
“헤에- 준호군 단거 좋아해요? 애 같아.”
“너한테 그런 소리 듣고 싶지 않거든!”
다음달 용돈을 받을 때까지 어떻게 나의 재정을 운용해야 할지 머릿속으로 잘 계산해본다. 입시도 끝났으니 알바를 시작할까. 나쁘지 않은 방법이지. 고1 때 보단 많이 쳐 주겠지. 이제 부모님 동의 없이도 합법적으로 일을 할 수 있는 나이니까. 무슨 알바를 할까? 편의점? 주유소? 전단지?
이런 식으로 머릿속에서 수만 가지의 사칙연산이 돌아가는 동안 보나는 커피를 음미하는데 열중해있다. 표정으로 보인다, 커피의 맛을 최대한 느끼려고 하는 게.
근데 이 전파녀는 몇 살일까? 대략 중학생쯤으로 보이는데 물어본다면 또 ‘산타나이로 몇 살!’ 이런 대답밖에 돌아올 것 같지 않다.
“근데 넌 몇 살이야?”
“15살이에요. 실망이에요 준호군. 연인끼리 나이도 모르는 거예요?”
생각보다 정상적인 답변. 근데 언제부터 우리가 연인이 된 겁니까?! 아까부터? 그리고 나이를 말해준 적도 없잖아!
“근데 사람들은 왜 영화 같은 걸 보는 걸까요? 이렇게 슬프기만 한데.”
나의 태클은 완전 무시하시는 겁니까.
“슬퍼도 너처럼 우는 사람은 없을걸.”
“그래도 울고 나니까 뭔가가 개운해요! 이래서 영화를 보는 걸까?”
아니라고 생각해 여러모로.
보나가 아까까지만 해도 커피로 가득 차있었던 컵의 뚜껑을 열고 빨대로 얼음을 갖고 논다.
자그락-자그락-
그녀는 별 말 없이 계속 얼음을 갖고 놀았다.
나는 별 생각 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우리 빼고는 테이블마다 모두가 남녀끼리 쌍쌍이 딱 달라붙어 낯 뜨거운 애정행각을 버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다시 보나의 얼굴을 보았다. 저거 혹시 무언가 기대하고 있는 표정인가? 아닌가? 기분 탓인가?
우와- 이거 되게 뻘쭘한데. 무슨 말이라도 해야 되나?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거지?
“준호군은 왜 가족이랑 크리스마스를 같이 보내지 않으시는 거에요? 크리스마스는 준호군의 생일이기도 하잖아요.”
다행스럽게도 보나 쪽에서 먼저 얘기를 꺼냈다.
“같이 크리스마스를 보낼 가족이 없으니까 그렇지.”
“준호군, 아버지는 계시잖아요?”
그녀가 어떻게 내게 어머니가 없는지 딱히 묻지는 않았다. ‘산타니까요!’라고 대답할 것이 뻔했기 때문에.
“매년 그랬어. 아빠는 일 때문에 늦게 들어오시고 나는 먼저 자고. 크리스마스나 생일이나 별로 기념할 만큼 대단한 날은 아니잖아.”
“틀려요 준호군. 크리스마스에는 모두가 행복해져야만 해요. 아버지가 이브 때 늦게 들어오시는 건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을 거에요.”
“내가 알게 뭐야. 자기만의 사정 뭐 그런거겠지.”
“아버지가 이브날 집에 없는 이유를 궁금하게 생각해 보신적은 없으세요?
“예전에는 몇 번 물어봤는데, 이젠 뭐 그러려니 해.”
“아버지가 뭐 때문에 말씀을 안 해주시는 거 같아요?”
보나의 이어지는 질문에 나는 가슴에 원인 모를 답답하게 느껴졌다.
“크리스마스만큼은 모두가 행복해 져야 해요. 준호군도 예외는 아니에요. 크리스마스 이브에 준호군의 아버지는 왜 준호군과 같이 있어주시는 걸까요?”
보나는 눈을 빛내며 물었다.
이런상황에 뭐라고 답해야 하는 것인가? 솔직한 마음은 ‘그다지 알고 싶지 않다’이다. 아버지의 삶은 아버지의 삶이고 내 삶은 내 삶. 내가 관여할 부분이 아니다.
“크리스마스잖아요? 가족이랑 함께있고 싶잖아요?”
나는 말문이 막혔다. 딱히 그녀의 논리에 밀렸다가 보다는 그녀의 ‘크리스마스 및 산타 이론’에 질려서 말을 그만두었다.
“에... 귀찮으신거죠? 그런 거죠?”
“아니.”
짧았지만 예상하지 못했던 작은 말싸움에 나는 기분이 약간 불쾌해져 건성으로 대답했다.
난 빨대를 입에 물고 빈 커피 잔을 쪼옥 들이켰다.
창밖에 비친 거리에는 어느새 제법 눈이 쌓여있었다.



05.
“와아... 이거 예뻐요...”
아까로부터 한 시간쯤 지났을까. 번화가로 나온 우리, 아니 보나는 한없이 펼쳐진 쇼윈도들을 기웃거리며 이 옷 저 옷들을 보고 다녔다.
“준호군 저거. 저거저거 만약 제가 입으면 잘 어울릴까요?”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가 가리키는 옷을 보니 밍크로 만들어진 세련된 코트였다.
보나야, 그런 건 자신의 머리로 생각해봐도 충분하잖아. 저건 딱 봐도 키가 크고 세련된, 귀풍스러운 분위기를 풍길법한 귀하신 분들이나 어울릴 옷이야. 너 같은 유치원생 체격으로 저걸 입어보겠다고? 풋! 단호하게 말하는데 절대로 안 어울릴 꺼다 아가야.
“응. 잘 어울릴 거 같네.”
굳이 나의 변명에 이유를 달자면 내가 나의 생각대로 말을 했다가는 분명 울먹일 것이고 울는 그녀를 달래는 게 진이 빼져서였다.
“멋있네요. 인간세계의 옷은...”
그녀는 한껏 풀이 죽은 목소리로 나를 처다 보았다.
“사달라는 거냐.”
소악마같은 녀석!! 저런 건 사줄 수도 없어!
“아니요……. 여기서 사도 저희세계로 들고가지 못해요……. 존재의 질서자체가 다른 곳이니까요.”
“또 산타 어쩌구 그거지?”
“산타 어쩌구라뇨! 산타! 정말 아직도 제가 산타라는 걸 안 믿으시는 거에요?”
“아니 일반적인 사람이 그걸 믿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못 믿는 게 아니라 안 믿는 거잖아요!”
뭔가 어디에서 들어본 듯 한 말 인건 느낌 탓이겠지.
난 이제 더 이상 그녀의 ‘산타론’에는 토를 달지 않기로 했다. 달아봤자 무의미 하다는 것을 깨달았으니까.
“나도 돈은 많지 않고... 만원 이내면 사줄 수 있어.”
“와~ 남자로써 최악이네요~”
“너가 아까 비싼 커피 먹어서 그런 것도 있거든!”
독설을 내뱉는 그녀를 나는 쳐다보았고 그녀는 내가 왜 그녀를 쳐다보는 건지 이해가 안 간다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뭘 잘못했는지 모르고 있어!? 아니 그렇다면 그 말 진심인거냐!?
가슴에 비수가 꽂혀 멀거니 서있는 ‘남자로써 최악인 나’를 뒤로 하고서 그녀는 어떤 할머니가 앉아있는 노상으로 콩콩콩 뛰어가서 쭈그려 앉았다. 그녀는 그녀의 얇은 손가락을 아랫입술에 살짝 얹고. 노상을 한참 보며 ‘음...음..!’이라고 하더니 나를 불렀다.
“준호군! 이거 어때요?”
가까이 가서 보니 5000원짜리 싸구려 커플반지였다.
...이런 거 초등학생들이나 끼고 다니는 거 아닌가?
“이쁘죠! 이쁘죠! 심플하고 이쁘죠! 꺄앗! 제 안목 어때요!”
네, 생긴 것처럼 초등학생 미만 미토콘드리아 이상 입니다.
나는 군소리 없이 그 반지를 사 주었다.
“물건 잘 파세요 할머니!”
보나는 물건을 받아들며 미소 지으며 말했다.
“자! 준호군 여기 한쪽 끼세요! 저는 나머지 한쪽! 연인들은 원래 이런 거 나눠 끼는 거죠?”
“참 보기 좋구먼 연인끼리..호호..”
우리를 지긋이 보고 있으시던 할머니가 웃으며 말하셨다.
보나는 별 말없이 히-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였다.

“근데 왜 하필 그 반지야?”
그녀는 빙글빙글 돌며 말했다.
“저 할머니는 내일을 마지막으로 인간세계를 떠나세요.”
“응?”
“에.. 쉽게 말해 ‘죽는다’라는 거죠. 그거요. 근데 저분의 소원은 두 손녀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곰 인형을 사주는 것이거든요. 만약 제가 저 반지를 사드리지 않았으면 이따 장난감 가게에 도착하셨을 때 곰 인형 2개를 사기에 돈이 정말 아주 약간 부족하시다는 걸 알게 되셨을 거에요. 그리고 아쉬운 마음에 다음 크리스마스 때 더 좋은 선물을 사주겠다고 다짐하며 집으로 돌아가 손녀들에게 선물을 주셨겠지요.”
그녀는 빙그르 도는 걸 멈췄다.
“그런데 다음번이 없잖아요. 아쉽게도.”
“....그런걸 어떻게 아는 거야?”
“그야 산타니까 알죠! 눈만 봐도 알 수 있어요. 개개인의 소원 파악은 산타의 기본소양이라고요!”
그녀는 자랑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걸었다.
나는 그녀의 약간 뒤에 서서 걸으며 그녀의 웃는 얼굴을 보았다.
만약 저게 사실이라면 그녀의 안목은 확실히 성숙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녀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기쁘게 할 수 있는 것을 사는 마음.
“꺄아아아! 저 곰인형좀 봐요! 너무 귀엽지 않나요! 제 안목 어때요!”
.....아닐지도 모르겠다.



06.
“별거 아니라니까. 그냥 전구 몇 개 매달아 놓은 나무야.”
“그래도! 그래도 보고 싶다구요! 본적 없단 말이에요! 인간 세상에 나와 본 김에 꼭 보고가야겠어요!”
보나는 나의 등을 밀며 걷고 있었고 난 별 저항 없이 떠밀려 걷고 있었다.
이 여자아이, 산타가 기어이 크리스마스트리를 보고 싶으시단다.
내가 크리스마스트리가 보기 싫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광장에 있는 크리스마스트리를 보려면 그 많은 사람들을 사이에 부대껴야 하는 게 싫었다.
“대형 크리스마스트리- 트리- 트리- 어떻게 생겼을까요? 불빛이 강한가요? 가까이서 눈은 뜨고 분수 있죠? 혹시 불이 뜨거운가요? 그럼 안 되는데... 저는 더운 거 정말 못 참는단 말이에요. 아 근데, 혹시 해서 그러는 건데, 살아있는 거 맞죠?”
너는 도대체 무슨 생물체를 상상하고 있는 거냐.

“준호야?”
익숙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아빠가 한손엔 서류 가방을 다른 한손에는 케이크상자로 보이는 물건을 들고계셨다.
아빠는 나와 보나를 몇 번 번갈아 보셨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준호 아버님.”
보나가 먼저 예의바르고 절도 있게 인사를 하였다. 정말 놀라울 정도로 빠른 보나의 상황판단능력. 그녀는 단번에 나와 자신의 앞에 있는 남자의 관계를 파악해 버렸다.
“혹시 준호의 친구니?”
“네! 준호군의 여자 친구입니다!”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내 팔에 매달렸다. 나는 당황해서 그녀를 내치지도 못하고 자연스럽게 서있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자세가 되었다.
“다행이구나...”
아버지는 보나를 보며 웃으셨다.
나는 땅을 바라보며 발로 눈을 모았다.
“왜 이렇게 일찍 오세요.”
“생각보다 일찍 끝나서. 오랜만에 네 생일 겸 크리스마스 기념이라도 하게 일찍 들어왔지.”
“뜬금없이 그런 날을 왜 챙기세요. 평소대로 하세요. 평소대로...”
나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해댔다.
끄악!
내 옆에 서있던 보나가 웃는 얼굴로 나의 발을 지긋이 즈려밟았다.
“준호군은 제가 책임지고 오늘 집에 일찍 들여보내겠습니다. 걱정하지마세요.”
너 마치 남자친구가 여자 친구 부모님께 양해를 구하듯이 말한다.
나는 지금 이 상황이 약간 우스워서 피식하고 웃었다.
아버지도 약간 벙한 표정으로 보나를 보더니 웃으셨다.
“허허... 그럼 보나양한테 우리 아들 좀 맡겨도 되나? 꼭 책임지고 일찍 들여보내주게.”
“네! 꼭 약속 지키겠습니다!”
아버지는 그럼 먼저 들어가 계시겠다고 하고 집 방향으로 향하셨다. 나는 어깨와 머리에 눈이 조금 쌓인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아버지의 뒷모습을 오랜만에 보는 거 같다. 언젠가부터 나보다 작고 왜소한 체구가 되셨을까 아버지는.
“준호군은 아버님의 소원이 뭐였는지 아세요?”
보나가 갑작스럽게 물었다.
“뭐.. 승진이나 이런 거겠지..”
“땡!” 퍽-
보나는 수도로 나의 머리를 가격하였다.
“아파! 그만 좀 때려!”
그렇게 말하고 그녀의 눈을 보니 놀랍게도 그녀는 짐짓 화나있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녀의 새로운 표정에 당황했다.
“준호군은 아버님을 좀 더 사랑하셔야 되요. 그래야 모두가 행복한 크리스마스가 될 거에요. 아버님의 소원은 준호군이 웃는 모습을 보는 거였어요. 산타니까 저는 알 수 있다구요.”
그녀는 획 돌아서 걸었다. 나는 그녀를 뒤에서 바라보았다. 뭔가 알 수 없는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아버지는 준호군의 어머니 산소에 갔다 오시는 길이었어요.”
“뭐? 어디?”
“네? 뭐가요?”
보나는 뒤돌아 보지 않고 종종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화아아아!!! 저게 크리스마스트리구나! 와 멋있어요! 근데 안 움직이네요? 그냥 모형인가?”
그러니까 크리스마스트리는 생명체가 아니라고.
아까의 모습과는 달리 보나는 다시 원래의 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아까 화내는 것 같았는데. 내가 잘못 본건가?
보나는 나를 끌고 주변의 인파를 파헤쳐 들어가서 크리스마스트리 바로 앞까지 갔다.
“호오.. 생각보다 뜨겁진 않네요..”

그것은 큰 크리스마스 트리였다. 작지만 많은 전구들이 모여서 조화롭게 빛을 내는 그런 크리스마스트리. 하늘에서 내리는 눈이 전구위에 살포시 앉아서 마치 눈에서 빛이 나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크리스마스에는 너무 뻔 하지만 그만큼 이 거리와 어울리는 트리였다.
이번 달에만 이 거리를 수십 번도 넘게 오갔건만 나는 왜 여기에 이렇게 큰 크리스마스트리를 설치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을까.
무언가 가슴속에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벅차올랐다.
나는 왠지 모르게 소녀의 이름을 작게 불렀다.
“보나.”
거리는 여러 사람들의 소리로 북적거리고 시끄러웠지만 보나는 대답이 없었다.
내가 뒤를 돌아봤을 때 보나는 거기에 없었다. 그때 나는 보나가 내게 해준 말이 기억났다.
‘당신이 행복해 질 때까지만 옆에 있을게요.’



07.
안녕하세요! 보나에요! 아직 15살, 함박눈 같은 청춘! 산타입니다!
작년까지 연습생으로써 산타교육을 받았는데 벌써 실전에 배치됬다는 게 아직까지도 믿기지가 않아 무척이나 떨립니다!

성계의 중심에 있는 광장에서 인간세상을 바라보면 여러 가지가 보여요. 공부하는 어린이들, 우는 아이들, 착한아이들, 연애편지를 쓰느라 밤을 새는 귀여운 남자아이도, 그 편지를 받고 당황해하며 얼굴을 붉히는 귀여운 여자아이도 보여요! 아, 그렇다고 어린이들만 보이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산타니까 어린이들한테 관심이 가는 거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에요!
아침부터 밤까지 저는 사람들을 보고 싶을 때 마다 광장으로 옵니다! 그들을 보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즐거워져요. 인간들이 조금 부럽기도 해요. 재미있어 보이는 게 많거든요. 저두 산타제복 말구 다른 이쁜 옷들도 사보고 싶고, 어른스럽게 커피도 마셔보고 싶고, 사람들을 만나고 싶고, 영화도 보고 싶거든요. 그 외에도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요!
근데 언제부터였을까요 제가 인간들처럼 연애를 해보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게 된 건. 잘 기억은 안 나도 아마 그 소년을 봤을 때부터였을 거 같아요.
그 사람이 누구냐고요? 저도 처음에는 몰랐어요. 평소와 같이 광장에서 인간세계를 보고 있는 중에 어떤 소년이 눈에 들어왔거든요. 왠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냥, 하는 행동들을 보니 안타깝고 누군가 저 사람을 도와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 사람을 계속 지켜봤죠. 계속 지켜보다 보니, 제가 그 사람을 보듬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왜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산타의 의무거든요!
그리고 언젠가부터, 그 사람 옆에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인간계에 내려오면서 저는 꼭 크리스마스가 끝나 다시 성계으로 돌아가기 전에 그 사람이랑 만나볼 거라고 결심했어요. 근데 놀랍게도. 제가 배정받은 첫 사람이 그 소년이었어요! 우와, 정말 가슴이 두근두근 거렸어요! 이렇게 가까이서 그 소년을 보는 건 처음이었거든요! 게다가 제가 광장에서 주시하던 사람이었으니까요. 뭐라고 말할까 서두르다가 실수로 말을 잘못 해버렸어요. ‘당신은 크리스마스가 싫으신가요?’라뇨! 세상에 크리스마스를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어요! 저는 당황해서 곧바로 말을 이었죠. ‘당신이 준호군?’이라고요.
헤... 후회했어요. 준호군이 저를 몹시 수상쩍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거든요.
준호군은 행복하지 않대요.
행복해지고 싶지 않대요.
저는 준호군을 도와주고 싶어요.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요.
그래서 저와 사랑을 하게 해줬어요.
제가 너무 이기적인 걸까요?
산타의 의무를 핑계로 준호의 소원이 아닌 제가 원하는 일을 해버린 걸까요?

그래도 오늘 좋았어요. 준호군이 행복해하는 거 같아서요. 준호군이 살짝이지만 웃었어요. 산타로써 임무를 완수한 거죠. 크리스마스의 행복을 전해줬으니까요!
준호군은 앞으로도 행복할 수 있을까요.



08.
“보나! 장난치지 말고 빨리 나와!”
나는 주변을 돌아봤다. 사람. 사람. 사람. 사람.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나는 사람들의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보나! 보나!”
주변은 사람들의 소리로 소란스러웠고 나의 소리는 힘없이 묻혔다. 옆에서 보나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당신이 준호군?’
사람들 사이에서 붉은 옷이 보였다. 분명 보나와 같은 옷. 나는 신속하게 사람들을 밀치며 그녀의 앞까지 갔다. 힘들게 팔을 올려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산타옷을 입고 있는 또 다른 여성. 하지만 뒤를 돌아본 사람은 보나가 아니었다. 
‘산타라고요, 저는.’
한참을 그 속을 헤매다 나는 결국 군중 속에서 소외돼 밀려나왔다. 확실히 이 크리스마스트리 주위의 인파에는 보나가 없다. 심장이 두근두근 거려왔다..
‘당신은 행복해 지고 싶지 않으세요?’
나는 그녀와 같이 있었던 장소를 거꾸로 돌아가 봐야했다. 혹시 아까의 할머니를 보러간 게 아닐까. 나는 닥치는 대로 찾아보겠다는 생각으로 그 곳을 향해 뛰어갔다.
줄줄이 길게 자리를 잡아 놓은 노점상들을 훑어봤다. 아직 아까의 할머니는 행복해 보이는 얼굴로 물건을 팔고 계셨다.
“저기... 할머니.”
그 할머니는 놀랍게도 나를 알아 보셨다.
“아, 아까 그 청년이구먼. 호호... 옆에 있던 귀여운 숙녀 분은 어디로 갔나?”
“혹시 그 여자 아이가 여기를 지나갔나요?”
할머니는 잘 모르겠다고 대답하셨다.
마음이 급했다. 계속 여기 있어서는 보나를 찾을 수 없을 거라는 불안감이 증폭되었다.
“감사합니다. 오늘 날씨도 추운데 일찍 들어가세요. 손녀 분들이 기다리잖아요.”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방법, 바로 사랑입니다!’
나는 오던 길을 거꾸로 달렸다. 아까 보나가 보면서 지나갔던 옷들. 혹시 이 근처에 있지 않을까.
‘당신이 행복해 질 때까지만 옆에 있을게요.’
“보나!”
되돌아오는 답이 없기는, 점점 무의미해지는 외침.
‘당신이 행복해 질 때까지만 옆에 있을게요.’
달릴수록 힘이 빠지면서 캐롤과 사람들의 소리에 섞인 나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져만 갔다.
점점 다리에 힘이 풀리다 결국 눈뭉치에 걸려 넘어졌다. 알 수 없는 허탈감이 밀려들었고 일어서고 싶지 않았다.
“보나!”
‘당신이 행복해 질 때까지만 옆에 있을게요.’
순간이나마, 나는 행복함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에게 선물을 준 보나는 나를 떠났다. 아까의 불안이 확신으로 바뀌었다.
산타니까. 산타니까 선물을 주고 가는 거지. 줬으면 다시 돌아가야 하는 거지. 당연하다. 크리스마스 이브니까 그녀는 이곳으로 온 거고 이제 내게 선물을 줬으니까 가는거지. 산타니까. 슬프지 않다. 슬프지 않다. 슬프지 않다.
내 무덤덤한 생각과는 다르게 목이 메여왔다. 넘어져있던 나는 눈물이 눈가에 맺혀서 땅으로 떨어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행복하게 해주겠다면서! 행복해지라고 했잖아! 행복해 지고 싶은데... 혼자 도망가면.. 나보고..... 어쩌라고........”
비열한 산타다 그런 산타는. 선물만 던져주고 도망가 버리는 산타는.
왜일까. 그동안 소외받고 여러 사람들한테 버림받으면서 나는 한 번도 아쉽거나 힘들어 하지 않았는데. 이런 건 이제 익숙해서 상관 안한다고 생각했는데. 고작 오늘 처음 본 여자애가 날 떠났다고 눈물이 나는 건 왜일까.
혼자가 편했다. 혼자 있는 게 남들도 편하고 나도 편하다. 혼자 있음으로써 서로의 불편함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보나는 달랐다. 비록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이었지만 그녀는 나를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나도 그녀가 싫지 않았다. 나와 너무나 다른 그녀는 사람들의 마음을 볼 줄 알았다. 사람들을 사랑할 줄 알았다. 사람들을 사랑해야 한다고 했다. 가족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 그녀를 나는 아마...
사랑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준호군!”
나는 고개를 들었다. 내 앞에는 작은 산타가 서있었다.
“이것보세요! 물고기로 만든 빵이에요!”
종이봉투에 들어있는 붕어빵을 들고 있는 보나는 내앞에 서서 나를 바라보며 히-하고 웃었다.
“왜 우세요?”
보나가 살짝 미소 지으며 고개를 갸웃 거렸다.
“......내가 행복해지면 떠나겠다고 했잖아.”
"음... 그렇게 말했었나요?“
그녀는 뒤를 돌아봤다.
“하지만 제가 없으면 당신은 더 이상 행복하지 않은 거잖아요. 그래서 여기에 남으려고요."
보나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빙글 돌아 나를 바라보았다.
“사실 당신이 아까 울면서 소리치는 거 다 들었어요.”
그녀는 혀를 살짝 내밀며 말했다.
"...잘난 척하지 말라고."
히-웃고 있는 보나의 얼굴을 보자 나는 다시 콧등이 알싸해져서 고개를 살짝 들었다.
하늘에는 별이 총총 박혀있다.
“분위기 잡고 뭐하세요! 아버지가 기다리시잖아요. 얼른 집에 가요!”
보나가 나의 팔을 잡아 끌었다.
“뭐? 우리 집까지 따라올 거야?”
“저 갈 데도 없단 말이에요! 책임지세요!”
이 여자아이가 이 조인광자중에서 무슨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말씀을!
보나는 나의 팔을 놓고 앞으로 몇 발짝 뛰었다.
“나잡아봐라!”
“미쳤냐너”
보나가 혀를 살짝 내밀며 ‘메--롱’하고 소리를 낸다. 다시 달리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내가 언제부턴가 미소를 짓고 있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이 거리는 분명 사람들의 행복한 소리로 가득하다.

Writer

수려한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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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oud.9 10.12.14. 02:40
크리스마스틱하네요. 솔로부대는 그저 눈물만.
권한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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