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이정표

그 밤에 기억 - 판타지얼 作

Write

Article Menu

facebooktwittergoogle pluspinterestkakao storyband

[수려한꽃]
님의 글을 신고합니다.


하, 더럽게 춥다. 영하로 떨어진 겨울 날씨는 크리스마스가 되서야 느릿느릿 눈송이를 떨어트렸다. 화이트 크리스마스.
새하얀 눈송이가 모든 걸 뒤덮었다. 지붕, 자동차, 도로 심지어 사람까지. 보기 좋은 광경이지만 직접 그 한기를 체험하는 건 사절이다.
"역시 집에 있을걸. 그랬나."   
잘 입지도 않는 두꺼운 코트를 껴입었건만 살 어린 추위는 끊인 없이 나를 괴롭혔다. 이런 추위면 밖에 나가기 싫을 텐데 내 예상과는 다르게 시내 거리는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 대부분 짝이 있는 커플, 뜨거운 사랑의 힘이 그들의 몸을 녹여주기라도 했는지 잔뜩 몸을 웅크린 나와 달리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거리를 돌아다녔다.
"쳇, 가슴도 추워지네."
내 나름 착하게 살았다고 자부하는데 왜 산타할아버지는 내게 선물을 주시지 않는 것인지. 지금껏 안준 선물을 한꺼번에 몰아서 여자라도 내려줬으면 싶다.
"…….범죄 일려나."
순간 빨간 복장에 산타할아버지 선물 보따리 대신 여자를 어깨에 걸치고 창문을 넘어오는 모습을 상상해버렸다. 하하, 내 동심은 여기까진가.
"하~ 그만 가볼까?"
쓸데없는 상상도 여기가지. 뿌연 입김을 내보내며 머리에 쌓여가는 눈을 털어냈다. 
후드득 발치로 떨어지는 눈 덩이, 우와, 엄청 쌓였네. 멍하니 떨어지는 눈덩이를 따라 밑은 내려 보다 내 앞에 서있는 갈색의 발을 발견했다.
"……."
신발이 아니고 발?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려 그 발의 주인을 쳐다봤다. 
"안녕. 루돌프."
루돌프의 상징인 빨간 코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 다음으론 아무렇게 뻗은 나뭇가지 같은 뿔과 커다란 눈방울. 내가 상상하는 바로 그 모습이었다.
"뭐가 안녕이냐 멍청아."
말했다. 루돌프가! 내 상상 속에 말 못했는데, 하긴 사슴이 두발로 서있을 때부터 이상했지.
"오래 기다렸냐?"
"응. 그런데 산타는 어디에 두고 혼자 있냐."
"……. 죽을래?"
이런, 이제 그만 놀려야겠다. 좋아서 저런 인형 옷을 입은 게 아니니깐. 하지만 나 이 추운 날 여자 친구 없이 꽤나 기다렸다. 한참 나를 쳐다보던 루돌프가 자신의 머리를 잡고 위로 들어올렸다. 가짜 인형 머리가 올라가고 그 안에서 내 친구, '상철'의 못생긴 얼굴이 나타났다. 
"다시 써라."
"눈에 파묻혀 볼래?"
"사양하지."
날씨에 맞지 않게 추워 보이는 짧은 스포츠머리에 군바리 같은 녀석인데 생긴 대로 말 한건 반드시 지키는 열혈 사나이다. 아쉽다는 듯 혀를 차는 상철에 재빨리 사양하기 잘했다.
"이 근처였냐? 알바 한다는 곳이."
"그래, 저기 보이지. 아이스크림 가계."
상철은 뒤를 가리켰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보이는 아이스크림 가계가 보였다. 
"이렇게 추운데 아이스크림 팔려?"
"아이스크림은 추운 날 먹어야 제 맛이야."
"그럼 북극에 가서 팔지 그러냐?"
"시끄러, 그보다 좀만 기다려라 곧 끝나니깐."
슬쩍 손목시계를 쳐다보니 저녁 8시, 어차피 집에 가봐야 할 것이 없기에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참, 이것 좀 들고 있어라."
다시 인형 머리를 쓰고 가계로 돌아가려 상철은 무언가 생각난 듯 어깨에 메고 있던 아이스박스에서 아이스크림 두개를 꺼내 내게 건네주었다. 역삼각형 과자 위에 하얗고 둥근 어렸을 때 운동회에서 볼만한 추억의 아이스크림이었다. 
"하나는 너 먹어, 나 올 때까지 내꺼 잘 들고 있어라."
아이스크림을 넘겨주고 황급히 자신의 일터로 달려가는 망할 녀석. 이걸 들고 있으면 주머니에 손을 못 넣잖아. 장갑을 끼지 않은 맨손이라 그런지 몇 초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부터 손에 감각이 없다. 이럴 땐 둘 중 하나를 빨리 먹어치우고 한쪽 손이라도 주머니에 집어넣자.
"앙~"
크게 아이스크림을 베어 물었다. 추위에 너무 오래있었는지 입속에 아이스크림이 미지근했다. 그러면서 달콤한 맛.
"…….맛있네."
상철 말대로 아이스크림은 추운 날 먹어야 제 맛인가.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그렇게 덥석덥석 먹으니 어느새 과자 부분만 남았다. 마지막 과자를 통제로 입에 집어넣고 재빨리 손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조금만 늦었으면 동상으로 손가락을 자를 뻔했다. 주머니 속에서 서서히 녹아가는 두 손.
"두 손?"
들고 있던 두 개의 아이스크림 중 내 것인 하나만 먹었는데 두 손이 주머니에 들어있다.
"이런."
바닥에 떨어진 아이스크림 하나가 처량한 모습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미안, 고의가 아니었어."
추위에 감각이 둔해져서 들고 있는지도 몰랐다. 황급히 떨어진 아이스크림을 집어지만 이미 중요한 내용물은 하얀 눈과 융합해버렸고 남은 과자 부분만이 외롭다.
"어쩐지."
슬쩍 가계 쪽을 바라보니 방금 알바가 끝났는지 인형 탈을 벋고 두꺼운 잠바를 입은 체 주인아저씨에게 인사를 하는 상철의 모습이 보였다.
시간이 없다. 무언가 대체 할 만한 게…….
"…….많구나."
바로 눈앞에 아니, 다리 밑에 잔뜩 있는데 괜히 고민했다. 
아이스크림은 하얀색. 눈도 하얀색. 아이스크림은 차갑다. 눈도 차갑다. 맛은……. 모르겠지만 두개나 같지 않은가. 상철이 오기 전에 재빨리 과자에 눈덩이를 쌓아올렸다. 그래도 양심이 있는지라 아이스크림을 떨어트린 지점을 중점으로, 마무리로 손으로 토닥토닥 두들겨 모양을 잡으니 그럴듯한 아이크림 완성!
"아, 끝났다……. 그런데 왜 쭈그려 앉아있냐?"
"아무것도 아니야. 자, 여기 네 아이스크림."
자연스럽게 웃어라 나의 얼굴아, 떨지 말거라 나의 손아. 필사의 연기가 통했는지 상철은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고 아이스크림을 받아 들었다.
"아아~ 춥다. 어서 가자."
"으응."
앞장서서 걷는 상철이 드디어 아이스크림을 먹는다. 먹었다. 그 모습이 내겐 초고속 카메라처럼 매우 느리게 보였다. 
"어라, 이거 맛이……."
들킨 건가. 미묘한 표정으로 들고 있던 아이스크림을 쳐다보는 상철에 난 미리 도망칠 거리를 벌려놓았다.
"맛이…….괜찮은데."
"뭐?"
"시원하면서 입에서 사르륵 녹는 게 마치 눈을 먹는 거 같네."
"…….그래." 
마치가 아니고 진짜 눈이다. 이 바보야, 다행이 잘 넘어간 거 같았다. 상철의 둔한 혀에 감사한다. 우리 둘은 목적지 없이 얼마나 걸었을까.
"어디라도 가는 게 좋지 않겠냐."
생각 없이 걷는 도중 나는 왠지 주변에 커플들이 잔뜩 인데 그 사이 칙칙한 사내 둘이 거리를 걸어 다니는 게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철도 그걸 느꼈는지 슬쩍 나를 쳐다봤다.
"어디 갈 때라도 있냐?"
"집."
"…….집 말고는."
"pc방."
"……."
"……."
정말 갈대로곤 없었다. 크리스마스? 그거 별거 없다. 그냥 춥고 눈 내리는 빨간 날. 커플들은 이런 날이 뭐가 특별하다고 나와서 돌아다니는지.
"어쩔 수 없네."
결국 우린 pc방으로 합의를 보았다. 결국인가……. 크리스마스, 눈 내리는 거리에서 우린 pc방을 찾아 걸었다.
 
-
 
…….이놈에 pc방은 찾을 때면 보이지 않는다. 복잡한 시내잖아, 그리고 30분쯤 걸었고 이때쯤이면 나와도 되잖아! 
"야 나 춥다. 아무데나 들어가자."
"동감."
끝까지 나오지 않는 pc방을 포기하고 우린 '아무데나' 추위를 피할 곳을 찾았다. 일단 눈에 보이는 영화관 패스, 카페 패스, 레스토랑 패스……. 무슨 데이트 코스냐? 전부 패스, 패스, 패스! 계속된 패스 행렬에 나는 진지한 눈빛으로 상철을 바라보았다.
"왜, 왜?"
"너……. 여장 해볼 생각 없냐?"
"죽어."
다행이도 상철은 애인 역할을 거절했다. 만약 받아 드렸다면……. 우리의 우정을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봐야 했지. 
추위에 뇌가 마비가 됐었는지 어처구니없는 생각이 마구 떠올랐다. 그때 상철이 톡톡 나의 어깨를 두들겨주지 않았다면 정말 위험할 뻔했다.
"저기 어떠냐?"
상철이 가리킨 곳은 평범한 건물이었다. 새까맣게 코팅된 유리벽에 요즘 보기 힘든 낡은 나무 문. 그 앞에는 어두운 밤에 전구 하나 달리지 않은 입간판은 홍보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고 서있었다.
"카페인가?"
이 묘한 분위기의 홀린 듯 우리는 천천히 건물을 향해 걷고 있었다. 가까이 와서야 보이는 입간판의 글씨.
"낮달? 이게 무슨 뜻인지 알겠냐?"
"몰라. 왠지 기분이 안 좋은데."
"이 추위보다 나쁘기야 하겠어. 들어가자."
과감하게 문을 열고 '낮달'이라는 정체불명의 건물에 당당하게 들어서는 상철을 따라 나는 조심스러운 발걸음을 옮겼다.

안은 밖에서 봤던 거랑 달리 아늑하고 따뜻해보였다. 카페인지, 술집인지. 
한쪽 벽을 차지한 긴 카운터와 그 뒤에 진열 돼 있는 다양한 종류의 총이 무척 인상 깊었다. 그 외에는 목재 원형 탁자와 의자가 넓은 자리를 매워주고 있었다.
"저거 진짜일까?"
권총, 샷건에서 저격총, 머신건 심지어 바주카까지 요즘 군대에서도 구경하기 힘든 병기가 벽한 쪽을 가득 달려있으니 죄진 것도 없는데 괜히 긴장되었다. 역시 함부로 들어오는 게 아니었어.
"나가자."
"그러는 게 좋겠다."
누군지 몰라도 지독한 인테리어다. 들어오자마자 손님을 겁주기나 하고 분명 이 건물 주인은 험상궂은 외모의 아저씨일게…….
"어서 오세요!"
단정하게 포니테일로 묶은 머리와 평균 여자보다 큰 키와 그에 어울리지 않는 어린 외모가 그녀를 독보이게 만들었다. 그녀는 이 살벌한 인테리어의 건물에 직원인지 빨간색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두 분이신가요?"
"아, 네."
얼떨결에 대답해버렸다. 방긋 웃음을 지은 여직원은 우리를 자리로 안내했다. 안내고 뭐고 다 빈 자리었으니 어정쩡하게 서있는 우리에게 손짓한 게 전부지만.
 자리에 앉은 뒤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긴 뭐하는 데죠? 카페인가요?"
"비슷해요."
카페면 카페지 비슷한 건 무슨 소리인지. 
일단 맘 편히 카페라고 생각했다. 그럼 커피라도 시킬까.
"저기 진열된 무기는 진짜야?"
내가 주문 판을 펼치려는 순간 상철이 자연스럽게 여직원에게 반말을 하며 물어보았다. 나도 궁금한 부분이기에 잠시 주문 판에서 시선을 때고 여직원의 대답을 기다렸다. 여직원은 상철의 반말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친절하게 질문에 답해주었다. 
"네, 전부 진품이에요. 요즘 세상이 험해서요. 하지만 걱정 마세요. 탄창은 빼놨거든요."
"……."
앞치마 주머니에 권총 탄창을 꺼내 흔들며 말한다. 이봐, 우리 대한민국은 그렇게 험하지 않다고! 그러면서 바주카 탄환이 궁금한 건 왜일까?
"하하. 사장님의 취미인가 보죠."
"취미처럼 보이나요? 여성 혼자는 위험할거 같아서 놓아둔 건데."
"…….사장이세요?"
"네."
이 카페 직원이 아니고 댁이 사장이었습니까?! 걱정스러운 얼굴로 무기 진열대를 보지 마! 혼자인 게 불안하면 무기보단 남자 직원을 고용하라고! 어떤 의미로 위험한 그녀였다. 
뭐 사소한건 신경 쓰지 말고 주문이나 하자. 주문 판으로 시선을 돌린 난 매우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족히 백가지는 넘을 거 같은데?"
"그러니깐. 일식, 한식, 중식, 간신…….후식 등등."
못하는 음식을 찾는 게 빠를 정도로 주문 판 가득 적혀있는 깨알 같은 음식명들. 전 세계 요리사들을 모아둔거야?! 이 카페의 정체는 점점 미궁 속에 빠진다. 
"정말 다 되는 건가요?"
"물론이죠. 말만하세요!"
팔을 걷어붙이고 자신만만하게 대답하는 여사장이 전혀 믿음이 가지 않았다. 앞에서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 카페의 직원이 없다. 오직 무기 수집이 취미인 별난 여사장만 있을 뿐.
"그럼 난 자장면."
"난 초밥."
나는 자장면, 상철은 초밥. 서로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음식을 주문시켰다.
"주문받았습니다."
수첩에 두 음식이름을 적은 그녀는 당당한 걸음으로 주방…….이 아닌 구석진 자리에 놓인 공중전화로 걸어갔다. 설마 아니겠지요? 능숙하게 번호를 누른 그녀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장면 하나 가져다주세요."
주소도 말하지 않고 주문만하고 바로 끊었다. 그리고 다시 수화기를 들더니
"초밥 가져다주세요. 네? 어떤 초밥이요?"
슬쩍 상철을 바라보는 그녀가 소리 없이 물었다.
'어떤 거요?'
"차, 참치."
"참치로 주세요."

-

멍하니 우린 눈앞에 놓인 자장면과 참치 초밥을 내려다보았다.
계산도 우리가 했다. 물론 시킨 건 맞지만 왜 돈을 배달원에게 줘야 하는 것인지. 배달원도 익숙한 일인지 자연스럽게 우리들한테서 돈을 받았다.
"드세요."
언제 들고 왔는지 쟁반을 가슴에 안고 말하는 그녀가 한 것이라곤 배달 음식을 식탁으로 옮겨준 것 밖에 없었다. 
"…….먹자."
"그래."
저녁을 가볍게 먹은 게 다행이다. 혹시나 해서 자장면으로 주문한 건데 배달시킬 줄 누가 알았겠는가. 나와 달리 초밥을 시킨 상철의 얼굴은 좋지 않았다.
"왜?"
"양이 적어."
그러고 보니 이 녀석 저녁을 먹었던가, 초밥이라 그런지 양은 적은데 비싸긴 더럽게 비싸다.
"바꿔먹자."
"그럼 고맙지."
많이 배고팠는지 상철은 음식을 바꾸자마자 비비지도 않은 자장면을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그 옆에선 나는 초밥을 씹었다. 큭, 오랜만에 먹어서 그런지 와사비가 무척 맵다.
"물……."
"물은 셀프에요."
"……."
정말 가지가지 하는 카페다. 물을 마시기 위해 불성실한 그녀를 지나쳐 카운터에 보이는 정수기로 걸어갔다. 컵은? 당연히 종이 컵이지.
'더 이상 이곳에 기대를 하지말자…….어!'
정수기로 걸어가는 도중 꽤 많은 책이 꽂힌 책장을 발견했다.
"기다리는 동안 읽으라는 건가."
그러기엔 책이 너무 많다. 도대체 뭐하는 곳이야 여긴. 손님도 우리뿐인 거 같고, 그러니깐 이곳 이름이……. 아! 기억났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지만 '낮달'이라고 적혀있었다.
"앞에 놓인 입간판을 보니 '낮달'이라고 적혀있던데 무슨 뜻이죠?"
"네? 네!"
남몰래 초밥을 먹으려다 들킨 그녀가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이젠 손님 음식에 손대는 거냐?
"낮달은 '낮에 보이는 달'이에요."
"헤~ 단어 그대로네."
뭐야 별거 아니었잖아. 이른 새벽이나 늦은 저녁때 태양 반대편에 희미하지만 둥근 달을 몇 번 본적 있었기에 낮달이라는 이해가 빨랐다.
'보기와 달리 꽤 좋은 카페 이름이잖아' 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그걸로 끝이 아닌지 그녀가 추가 설명을 덧 붙였다.
"참고로 카페 이름을 낮달이라고 지은 이유가 빛나는 태양의 커플 옆에서 희미한 달빛의 솔로가 모이는 곳이라는……."
"나가자, 상철아."
"에에?! 왜요?"
그녀가 괴상한 비명을 지르며 나의 팔을 붙잡았다. 왜냐고? 방금 여기가 뭐하는 곳인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깐 정리하자면 여긴 크리스마스 거리를 빛내는 커플을 피해 솔로들이 찾아오는 그런 음침하고 우울한 곳이라는 거잖아! 내가 솔로는 맞지만 이런 곳에 올 정도로는 아니라고! 당장 나가겠어, 이딴 곳은! 
"뭐해, 가자니깐."
"이거 다 먹고."
"…….지금까지 내 설명 들긴 들은 거냐?"
"뭐?"
저 분위기 파악 못하는 녀석, 입가에 가득 자장면 소스를 묻히고 멍청히 나를 쳐다보는 꼴을 보니 이곳이 솔로 전용 카페라고 해도 계속 있을 판이다.
"가지마세요~ 손님!"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그녀의 눈동자와 마두 쳤다. 내가 작은 키가 아닌데 나와 얼굴 위치가 비슷한 그녀. 도대체 키가……. 그보다 그녀가 잡고 있는 팔이 아파왔다. 
"아, 알았어. 안 갈 테니깐 놔달라고!"
"생각 잘했어요. 밖은 춥다고요."
그녀는 나에게 여기 있겠다는 다짐을 받아낸 후에야 쥐고 있던 내 팔을 놓아줬다. 잡힌 팔이 욱씩 거리지만
'설마 여자에게 잡혔다고 어떻게 되겠어?'라는 건 내 착각이고
"피, 피부가 죽었어!"
심각하다. 손자국의 파란 멍, 그게 서서히 퍼져나갔다. 독이냐?! 하하, 갑자기 추워지네. 
그렇게 세상이 기울고 눈앞은 깜깜해졌다. 
쿵!
"으음……."
잠시 잠들었나, 왠지 술에 잔뜩 찌들어 잠들다 10분 만에 깨어난 미묘한 정신 상태다.
"아, 일어났냐?"
눈앞에 상철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어보았다. 걱정하는 건 고마운데 다음부터 입에 물린 족발을 빼고 말해주기 바란다.
"웬 족발이냐?"
"주문했어."
'정확히 말하면 시켰겠지.' 
상철이 옆에서 같이 앉아서 족발을 시식중인 그녀도 보였다.
"갑자기 기절해서 깜작 놀랐어요." 
"…….댁도 입에 족발이나 빼고 말해."
내가 이젠 대놓고 음식을 먹느냐? 는 추궁의 눈초리를 보내자 그녀는 상철이 옆에 가까이 붙으며 당당하게 말했다.
"반은 제가 냈어요!"
"맞아, 인마! 우리 미연씨 노려보지 마."
뭐? 미연씨~? 나 기절한 동안 아주 사이가 좋아지셨어요. 한마디 해주려 지대고 있던 의자 등받이에서 머리를 때니 무언가 내 등 뒤로 뚝하고 떨어졌다. 딱딱하고 네모난 물체.
"책이 왜 여기 있어?"
"앉아서 잠들기 불편하실까봐 제가 베개 대신 끼워났어요."
어떻게 갑자기 쓰러지는 게 잠들었다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인지. 그녀, 솔로 카페 주인장인 미연의 행동에 이젠 헛웃음 밖에는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책을 베개로 쓰면……."
무심코 책 제목을 보았다.
[그의 남자친구] 
여기서 '그'는 남자를 칭할 때 하는 단어, 남자친구는 여자가 연인에게나 쓰는 단어다. 그럼 '그의 남자친구'는 뭔 소리일까, 낌새가 좋지 않다. 머릿속으론 '열지 마!'를 소리치지만 손은 이미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
젠장, 이건 그 말로만 듣던 BL 소설! 여기서 BL은 (Boys Love) 남자의 사랑, 즉 동성애를 뜻한다. 내 눈이 더렵혀졌어! 마이 아이!
"어때요? 재미있죠?"
"재미는 개뿔!"
순진하게 묻는 미연을 한번 째려봐준 뒤 성큼성큼 책장으로 걸어갔다. 설마 이곳에 꽂힌 책 전부가 BL은 아니겠지? 다른 책을 꺼내보았다.
[그녀의 여자친구]
"…….백합 물도 취급하는 거냐?"
"네! 외로운 솔로들에게 위로라도 될까 하고 모았어요."
"이딴 게 위로가 될 리 없잖아!" 
위로는 고사하고 위험한 길에 들어설 거다. 100%로! 벽에 무기를 진열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당장 이 곳에서 도망치자. 그전에…….
"나도 나무젓가락 좀 줘봐."

-

족발로 포만감 가득 찬 배를 문지르며 식탁에 엎어졌다. 상철이도 만족한 듯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나와 같이 식탁에 머리를 지댄 체 말했다.
"우리 이제 가봐야 하는 거 아니냐?"
"그렇지, 몇 시더라."
카페에 시계가 없는지라 손목시계를 바라봤다. 9시, 1시간을 이 카페에 죽치고 있었다. 
"밖은 춥겠지?"
"겨울이니깐."
"밖은 커플들로 가득하겠지?"
"크리스마스니깐."
"밖은 행복하겠지?"
"애인이 있으니깐."
"밖은……."
"그만, 그만하자."
갈수록 크리스마스 날 애인 없는 솔로인 우리가 슬퍼지는걸. 왜 모르니, 그냥 여기 있자. 그전에 카페 주인, 미연이 허락해줘야 가능 한 일인데
"후식 먹을래요?"
우리들 옆에서 같은 자세로 생글생글 웃으며 묻는걸 보니 여기서 산다고 해도 걱정 없을 거 같았다. 수입은 있는 거야? 
"후식? 그것도 시켜먹게?"
"만날 시켜먹는 줄 알아요! 좀만 기다리면 올 거예요."
올 거라……. 마지막까지 자기가 직접 만든 다는 소리는 안하는군. 그때 부르르, 바지 뒷주머니에 진동이 느껴졌다.
"누구지, 이 시간에."
전화가 아닌 문자였다. 그런데 발신인이……. 상철? 슬쩍 엎어져있는 상철을 쳐다본 뒤 문자 내용을 확인했다.
[미연씨 예쁘지 않냐?]
"……."
대체 무슨 의도냐, 신경질적으로 버튼을 눌렀다.
'너 미쳤냐?'
부르르, 곧바로 오는군. 식탁 밑에서 누르는 거 같은데 안보고도 빨랐다. 난 아직 버튼을 봐야 치는데.
[충분히 제정신이다. 아무래도 첫눈에 빠졌나봐.]
'아아, 그래서 고백이라도 할 거냐?'
[부, 부끄럽잖아~♥]
'…….망할 하트 집어치워라.'
이 녀석이 원래 이렇게 징그러웠나, 군바리처럼 생긴 거랑 다르게 꼴값을 떤다. 아주~
"누구랑 문자하세요? 혹시 여자친구?!"
미연이 눈치 없게 나를 떠보았다. 이보셔요, 여자 친구가 있으면 이런 날, 이런 시간에 내가 여기 있겠어? 괴짜인 미연을 좋아하는 상철도 바로 옆에서 그걸 모르는 미연도 짜증났다. 나중에 한턱내라 인마.
"미연씨, 상철이 좋아한데요."
"네?"
[야! 이ㅈ ㅣ ㅅ]
"야! 이 자식아!"
문자와 목소리가 동시에 도착했다. 당황해서 그런지 문자 쪽은 엉망진창이다. 
"저 미,미연씨. 그게 장난이에요. 하하, 장난!"
"장난?"
"네! 이 녀석이 장난치는걸. 좋아해서."
"바보 같은 녀석, 멍석을 깔아줘도…….윽!"
미연 몰래 내발을 밟는 상철, 그와 동시에 핸드폰이 부르르 떨렸다.
[닥치고 있어. 더 말했다간 죽는다.]
…….언제 적은 거냐? 진심으로 너의 문자 실력에 감탄, 또 감탄한다. 그동안 상철의 필사적인 설득 끝에 어찌어찌 장난으로 넘어가는 분위기였다. 
"호호, 깜작 놀랬어요. 상철 씨가 저를 좋아한다니요."
"그렇죠? 하하……. 그런데 만약 제가 미연씨를 좋아한다면……."
호, 상철 이 녀석 고단수인데. 은근슬쩍 미연을 찔러본다. 미연은 상철의 의도를 모른 체 진지한 눈으로 상철을 바라봤다.
"상철 씨가 저를 좋아한다면……."
난 '포기해.'라는 문자를 상철에게 보냈다. 빨간 앞치마 주머니에 손을 넣고 미소를 짓는 미연, 저곳엔 탄창 밖에 없다.   
"그런데 ……. 누구에요?"
"윽."
잊은 거 아니었어? 미연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내 핸드폰을 바라봤다. 이 여자는 남의 프라이버시에 왜 이렇게 관심이 많은 거야.
"그냥 친구야."
"여자친구~?"
"아니야."
이 사람아, 여자 친구였으면 여기 이러고 있지도 않는다니깐, 이미 여자 친구로 확신하는지 미연의 눈동자가 장난스럽게 빛을 냈다.
"확인해볼게요!"
"안 돼!"
먹잇감을 낚아채는 독수리와 같은 손놀림으로 나의 핸드폰을 뺏으려하는 미연을 본능적으로 피했다.
"으음~, 왜 피하는 거죠? 역시 여자친구?"
"신경 꺼! 내가 알거 없잖아."
"아니요, 솔로 카페 주인으로서 알아야 되요!"
"……."
이제야 본심이 나오는군, 배신자는 용납 못한다는 거냐? 장난스럽던 분위기는 사라지고 무거운 긴장감이 나와 미연의 사이에서 발생했다.
'귀찮은데 그냥 뺏겨버릴까.'
어차피 숨길 내용도 아니고 들켜서 골란 한건 상철이 뿐이니깐……. 라 생각할 때 귀신같이 문자가 도착했다.
[목숨 걸고 사수해라. 뺏기면 너 죽고 너 죽는 거다.]
"…….빌어먹을."
쳇, 이렇게 된 이상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텨보는 거다.
"또 문자가…….역시 여자 친구군요."
오해 좀 하지 말라고! 위험한 포스를 풍기며 미연이 움직였다. 너무 빨라, 한순간 미연의 모습을 놓쳤고 나는 반사적으로 핸드폰을 든 오른손을 있는 힘껏 위로 치켜들었다.
"우~ 치사해."
"헉, 언제 뒤로……."
조금만 늦게 손을 들었으면 분명 뺏겼다. 미연은 내 등 뒤에서 우는 소리를 내며 위로 손을 뻗었다. 아슬아슬한 차이로 핸드폰에 미연의 손이 닿지 않았다. 하지만 오래는 못 버틸 거 같다. 
"포기해!"
"싫어요! 조금만 더……."
미연이 손을 높게 뻗으려 다가올수록 등에 부드러운 감촉이 선명해졌다. 생, 생각보다 크잖아……. 감탄하는 것도 잠시 상철의 살기어린 눈빛에 생각을 급히 접었다. 
'내가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인데.'
"좀 더, 조금만 더……."
"어, 어이. 앞으로 밀지 마!"
"이 자식, 너 미연씨한테서 떨어져!"
"그런 거 따질 때냐?! 어어!"
꽈당! 나는 등에 매달리다시피 붙어있는 미연과 그걸 떨어트리려는 달려든 상철에 나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우리 셋은 사이좋게 넘어졌다. 
"큭, 숨 막혀."
중학교 때 놀았던 '햄버거' 놀이가 생각난다. 방법은 간단했다. 한명을 쥐어 패 바닥에 넘어트린 뒤 그 위로 우르르 올라타는 것이다. 지금 상황이 그렇다. 맨 밑에 깔린 나, 그 위에 미연, 마지막으로 상철이 엎어져 깔려있는 덕분에 난 죽을 지경이다. 
"우우, 무거워요."
"아! 미, 미안 비켜줄게."
그래, 어서 비켜주기 바란다. 숨 막힌 것도 문제지만 지금 상황을 다른 누구에게 들키기라도 한다면…….
"미연아~ 나왔다!"
"……."
신이시여, 타이밍 한번 참 죽여주십니다. 맨 위에 있던 상철이 막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카페 문이 벌컥 열리면서 여인이 등장했다. 친근하게 미연을 찾는 거 보면 아는 사람 같은데 지금 우릴 보면 뭐라고 생각할까?
"변태다!!!"
제길!

-

"인사하세요, 여긴 저희 카페 단골이신 '이수진'씨~"
"……."
"……."
"……."
이 분위기에 무슨 소개타임이냐. 미연 혼자 싱글벙글 멋대로 나와 상철 그리고 이수진이라는 그녀를 같은 자리에 앉혔다. 오해는 풀었지만 아직도 '더러운 벌레'를 보는 듯 한 그녀에 쉽게 말을 걸기가 힘들었다.
"저……."
"힉!"
"……."
심하잖아, 말 한번 걸었다고 힉! 이라니. 갈색 머리의 긴 웨이브 머리카락 사이로 두 눈을 질끈 감은 그녀, 수진의 모습에 마음에 상처받으면서 묘한 쾌감에 휩싸인……. 일리가 없잖아! 
"이 녀석 방금 위험한 생각했습니다."
"내, 내가 언제!"
"왜 말을 더듬을까?"
상철과 나누어 받던 수진의 '더러운 벌레'를 보는 듯 한 시선이 나에게 집중됐다. 너만 살겠다 이거냐!
"언니, 그만해요. 제 잘못이니깐."
미연이 되지도 않는 애교를 떨며 수진의 기분을 노력했다. 그런데 언니라니, 누가 봐도 미연이 수진보다 훨씬 커 보이는데…….
'아차차, 미연이 평균보다 큰 거였지.'
이러고 보니 미연의 키가 크긴 컸다. 뭐 나쁜 건 아니지만, 키 큰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는 얼마든지 있다. 예를 들어 애교를 떠는 미연에 해벌에 침을 흘리는 상철처럼.
"자~ 이럴게 아니라 우리 케이크 먹어요!"
분위기 전환 겸 미연이 식탁에 올린 것은 수진이 사온 포장 된 케이크였다. 온다던 간신이 이거였냐?
"미연아! 이건 너하고만 먹으려…….산건데."
깜작 놀라 소리치던 수진의 목소리가 우리의 눈치를 보며 점점 작아졌다. 
"우린 불청객이라는 거네."
"그렇지."
"아, 아니 그게 아니라……."
"괜찮습니다. 저희들은 케이크 아~주! 싫어합니다."
정말 싫어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좋아하지도 않다. 우리들 앞에서 먹는 게 살짝 배 아프겠지만 사온 당사자가 싫다는데 어쩌겠어.
"그게 아닌데……."
"아, 우리가 보는 게 부담스러우신가 보군요. 상철아, 나가자."
"그럴까?"
"저, 저기!"
나쁜 여자 만들기 한순간이다. 졸지에 불쌍한 남자 둘을 카페에서 쫒아내는 나쁜 여자가 되어버린 수진은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나는 나의 옷깃을 붙잡았다.
"왜요?"
"…….같이…….요."
"네? 뭐라고 하는지 잘 안 들리는데……."
"같이 먹자고요!"
그럼 잘 먹겠습니다. 후후

초밥, 족발을 그렇게 먹었건만 신기하게도 케이크가 넘어갔다. 주식 배와 간식 배가 따로 있다는 건 정말 사실인가보다.
"그래도 이렇게 먹다간 살찔지도."
"큭!"
나도 모르게 혼자 생각한다는 것이 입으로 튀어와 버렸다. 그 혼잣말에 상철을 제외한 두 여성분들은 움찔 몸을 떨었다. 역시 여자들은 이런 쪽으로 민감한 모양이다.
"호호, 배가 불러서 못 먹겠네."
"나도……."
"음? 아직 많이 남았는데."
"그건 상철씨 다 드세요."
국어책 읽기 대사, 누가 봐도 억지인 게 티가 났다. 슬며시 포크를 내려놓는 미연과 수진에 상철은 머리를 갸우뚱 기우렸지만 단지 그뿐, 욕망을 참는 그녀들 앞에서 맛있게 케이크를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쩝쩝, 넌 왜 안 먹냐?"
"나도 배불러."
이 화상아, 그만 쩝쩝 대며 먹어라. 네놈 눈앞에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속으론 피눈물을 흘리는 여성들이 보이지 않냐? 
"쩝쩝."
"……."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멍청한 녀석, 네가 좋아하는 미연씨한테 찍혔다. 
"저 수진 씨라고 했죠?"
"네? 네……."
멍하니 상철이 먹는 케이크의 마지막 한 조각을 보고 있던 수진은 내가 말을 걸자 화들짝 놀라면서도 약간 주눅은 태도로 대답했다. 본래 겁이 많은 건지 아님 아직 오해가 풀리지 않은 것인지.
"이 카페에 자주 오시나 봐요?"
"자주는 아니지만……."
"어머? 언니, 매일 같이 오면서 왜 숨겨?"
"얘!"
"……."
미연과 상철, 눈치 없는 건 둘이 잘 어울린다. 하긴 알리고 싶지 않겠지. 솔로 카페에 단골이라니, 나 같아도 숨기고 싶겠다. 부끄러운 듯 고개를 푹 숙인 수진에 왠지 괜한 질문을 한 죄책감이 들었다.
"하하, 부끄러운 것도 아닙니다. 솔로가 뭐 어때서요."
"흑……."
울렸다. 여자를 울렸다.
"수진 씨를 울렸다."
"언니를 울렸다."
"……. 말 안 해줘도 알거든요."
저 얄미운 두 바보, 꼭 저렇게 말해야 되겠어. 그보다 이를 어쩌지……. 본의 아니게 수진을 울리고 말았다. 여자라서 달래주기도 난처했다. 솔로 인생, 어디 여자를 위로해 본적 있어야지. 
"저기…….울지 마시고요……."
"흐흑, 그래! 나 솔로다! 보태준거 있냐?!"
"네?"
"나쁜 자식! 우리 미연이를 덮칠 때부터 알아봤어!"
"이봐요……."
"죽여 버리겠어."
"진정하시고…….에?"
좀 험한 말을 들은 거 같은데 착각이겠지…….는 아니었다. 독기를 품고 나를 노려보는 수진에 본능이 위험하다 소리쳤다. 지금 카운터를 향해 달려가는 수진을 막아야했다. 
"잠깐만요!"
"윽, 이거 놓으세요."
세, 세이브……. 조금만 늦게 수진을 잡았으면 위험할 뻔했다. 카운터 벽 쪽에 걸린 아담한 크기에  권총을 집은 그녀의 한손과 다른 손에 들린 탄창. 요즘 탄창을 들고 다니는 게 유행이냐!
"언니, 그 탄창은 그 총이 아니고 그 옆에 총이에요."
"너였냐!"
"선물이에요~"
"정상적인 선물을 주라고! 어어, 수진씨. 그 총 잡지 마요!"
"이, 이거 놔요!"
"싫습니다! 이거 놓으면 죽일 거잖아요!"
"네! 죽일게요! 놔줘요."
"이럴 땐 빈말이라도 안 죽인다고 말해야 놔주는 거예요."
내 말에 잠시 멈칫하던 수진은 매서운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는 한마디씩 끊어가며 말했다.
"안 죽일게요. 놔주세요."
"……. 잘못했습니다. 살려주세요."
"용서 할 테니 놔달라니깐요."
수진, 내가 그녀를 놓아주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

"하~ 무슨 남자가 그렇게 겁이 많아요."
"전 진짜 죽일 줄 알았단 말입니다."
"아무리 제가 화가 나도 그렇지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요?"
"……."
그럼 제가 느낀 그 살기는 뭡니까? 황당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수진에 나는 따지지도 못하고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풋, 바보."
"넌 조용히 있어라."
"예예~"
옆에서 약 올리는 상철에 이제 이 녀석과 인연을 끊어야 할 때가 온 건지 진지하게 고민해보았다. 이런 나의 고민을 방해하는 미연의 밝은 목소리. 
"커피 드세요."
"아, 땡큐."
그런데 미연씨, 당신이 이 카페에서 하는 일이 먹는 거 빼고 있습니까? 적어도 자판기에서 뽑았다는 걸 숨기려는 노력 좀 해줬으면 합니다. 종이컵 그대로 커피 넉 잔을 식탁에 내려놓는 미연에게 태클걸기도 귀찮아졌다.
"케이크도 다 먹었는데 이제 뭐할까요?"
"뭐하다니……."
현재 시간은 10시, 우리가 이 카페에 온지 2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한 거라곤 먹고 떠들다 다시 먹고 떠들고……. 무슨 아줌마 동호회냐?!  
"여긴 보드게임이나 카드는 없어?"
"없는데요."
"그럼 평소에 뭐하는데?"
"사격 게임……."
"미안, 괜히 물어봤다."
사격 게임이라니……. 역시 미연답다. 그런데 수진씨, 그걸 왜 부럽다는 듯 쳐다봅니까? 아무튼 뭐라든지 할 걸 생각해야겠다. 사격 게임 빼고
"그럼 독서라도."
얌전한 수진에 의견다웠다. 약간의 과격한 면을 보긴 했지만 독서라면 나도 좋아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읽을 책이라면
"저쪽에 있는 그걸 읽자는 건가요?"
이 카페에 책은 많다. 무지, 하지만 그 장르가 전부 동성애라는 게 약간 사소한 문제가 있었다.
"생각보단 재미있어요."
"…….보셨군요."
"……."
수진은 조용히 내 시선을 피했다. 분명 미연이 꼬드겼겠지, 독서도 제외다. 이제 할 게 뭐가 남았을까?
"먹자."
"넌 그만 좀 처먹어."
혼자 케이크를 다 처먹어 놓고 배가 고프냐? 이로서 미연, 수진, 상철에 의견까지 전부 불합격이다. 남은 건 내 의견뿐인가, 막중한 책임감이 나의 어깨를 짓눌렀다. 뭘 할지 생각해라, 생각해내라.
"369."
"……."
"……."
"……."
나름 최선을 다했다. 369 만큼 시간 때우기 좋은 놀이도 없다고 그러니 다들 뭐라도 말 좀 해줘! 침묵 속에서 가장 먼저 상철이 입을 열었다.
"괜찮은데?"
"재미겠다."
"좋아요."
"……."
이봐, 당신들은 뭐든 좋다 이거야! 좀 반대를 외쳐달라고 무조건 흔쾌히 받아드리지 말고.
"벌칙은?"
"딱밤."
"에~ 약해. 꿀밤 3대!"
"얌마, 여성분도 있는데."
"남녀차별 하는 거예요?! 질 수 없다! 꿀밤 5대!"
"콜!"
남녀차별하고 상관없잖아. 불타오르는 눈으로 서로를 노려보는 상철과 미연. 
상철, 넌 미연이 정말 좋아하는 거 맞지? 그 사이에서 나와 수진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 둘이 잘해봐라. 
"팀전가죠."
"남남, 여여! 봐주기 없기!"
"울기 없기다." 
"그쪽이야 말로."
왜 우릴 끌어 들이는 거냐! 
"나하고 수진 씨는 좀 빼……."
"369! 369!"
갑자기 시작한 게임. 나와 수진은 거절도 못해보고 격렬한 분위기 속에 1시간 동안 369를 외쳐야 했다.

"으……. 머리야."
"아파."
1시간 뒤, 머리를 붙잡고 울먹이는 두 바보들. 팀전으로 같이 게임은 했지만 실질적인 게임은 저 둘뿐이었다. 차마 쌔게 때리지 못하고 살짝 주고받은 우리와 달리……. 상철과 미연은 무식하게 머리를 쥐어박았다 .
"언니~ 나 혹 났어."
"어휴, 바보같이 왜 그런 짓을 했어."
아프긴 많이 아팠는지 수진에게 안기는 미연의 눈에 살짝 눈물이 고였다. 
"친구야~ 나 혹……."
"닥쳐, 남자의 수치야."
따라할걸 따라 해라, 징그러운 녀석아. 어떻게 여자를 무식하게 때릴 수가 있는 거냐? 그러니 네가 애인이 없지.
"……."
나도 남 말 할 처지가 못 됐다. 여기 솔로 카페에 있는 우리들 전부 애인이 없으니깐. 잊었던 사실이 떠오르니 갑자기 기분이 침울해졌다. 
"술이 땡기네."
"무슨 술이요?"
"왜 술도 배달시키게?"
"아뇨, 술이라면 여기 얼마든지 있어요."
미연은 한쪽에 치워둔 메뉴판을 펼치고 구석에 가리켰다. 맥주, 와인, 소주. 
"카페야 술집이야. 하나만 정해."
"카페에요."
"어딜 봐서?"
"사소한건 넘어가요."
어디가 사소하다는 거냐? 진열돼 있는 총, 배달식 음식, 동성애 소설, 이젠 술까지 이미 카페의 영역을 넘어섰다고. 
"마시고 죽자."
술이라는 말에 상철이 비장하게 말했다. 누가 보면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인줄 알겠다.
"수진씨도 마실래요?"
"네, 소주로요."
거침없다. 귀여운 외모와 다르게 독한 소주를 고르는 수진이지만 내숭을 떠는 다른 여자들보단 솔직하고 좋았다. 
"그럼 소주로 4병!"
한국인이라면 감칠 나게 소주지. 내 주문에 미연은 콧소리 흥얼대며 카페 안쪽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익숙한 초록색 병과 소주잔을 들고 나타난 미연. 이번에도 종이컵을 들고 올 줄 알았던 내 예상과 달린 미연이 가져 온 크리스털 소주잔은 무척 비싸보였다.  
"비싸 보이는데……."
"걱정 마세요. 꽤 튼튼하거든요."
내구성까지, 정말 비싸 보인다. 이런 거 살 돈으로 카페를 꾸몄으면 싶었다. 
"안주는 없어도 되겠지?"
"진정한 술은 안주 없이 먹는 거다."
"네네, 그러시겠죠."
오늘 먹은 게 많아 속은 좀 쓰리겠지만 안주 없이 먹는 게 좋을 거 같다. 성질 급한 상철은 벌써 소주병 마개를 열고 자신의 술잔에 가득 따랐다. 누가 술고래 아니랄까봐.
"너만 마시냐? 나도 줘."
"저도……."
"나도!!!"
나, 수진, 미연의 순으로 잔을 채워가는 맑은 소주를 보니 옛 추억이 떠올랐다. 
"처음 이 쓴 액체를 마셨을 때 기억 나냐 상철아."
"그래, 한잔에 뻗어버렸지. 크크."
"어머~ 남자가 그게 뭐에요."
"남자랑 무슨 상관이야. 아무튼 그때 생각난다."
"그땐 왜 마셨어요?"
수진의 물음에 난 쓴웃음을 지었다. 그때도 지금도 같은 이유다. 
"솔로였거든."
"……."
"……."
"……."
내 대답에 세 사람은 안쓰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어이, 이 사람들아, 당신들도 솔로잖아. 재수 없는 눈빛 치우고 술잔을 높이 들자.
"마시자!"
"솔로 만세!"
"커플들 따윈 하나도 안 부럽다!"
"정말?"
"……."
상철 저 자식 끝에 가서 자꾸 초칠래. 그래도 혼자보단 둘, 둘보단 셋. 동료가 많으니 확실히 외롭지는 않았다. 동시에 원샷을 외치며 우리는 술잔을 비웠다.
"캬~!"
다른 술과 다른 소주의 독특한 쓴맛이 온갖 잡생각을 지워주었다. 이래서 사람들이 소주를 마시는 군아. 헤헤, 왠지 기분이…….
쿵!
"에~? 벌써 쓰러지는 거냐?"
의외로 술고래 상철이 먼저 식탁에 머리를 처박았다. 이상하다. 이런 녀석이 아닌데.
쿵! 
"음?"
그 다음으론 수진이 쓰러졌다. 오늘 처음 봐서 수진의 주량은 모르겠지만 한잔으로 뻗을 줄은…….
"어라?"
쿵!
이번엔 내가 식탁에 쓰러졌다. 나 쓰러진 거야? 단 한잔에! 의식은 말짱한데 온몸에 힘이 없다.
"으으으……."
"흠~ 역시 물을 섞을걸. 그랬나?"
흐릿해지는 시아에 미연의 모습이 보였다. 소주병을 들고 머리를 긁적이는 미연. 
"뭐, 뭐야?"
"아! 죄송해요. 이게 좀 도수가 높거든요."
"며…….몇인데?"
"잠시 만요……. 여기 98도라고 적혀있는데……."
"석유냐?"
불똥만 튀어도 카페를 불바다로 만들 것 같은 어마어마한 도수였다. 갑자기 속이 무진장 쓰려오면서 숨쉬기가 두려워졌다. 배속에서 터지진 않겠지?
"아침에 일어나면 숙취로 죽을지도……."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미연의 말에 나는 몸을 흠칫 떨었다. '죽을지도'가 아닌 진짜 죽을지도 모랐다. 정신을 차려보려 노력했지만 눈꺼풀은 무겁게 내려가고 감각이 사라져 갔다. 
'젠장, 정신을 …….'
나는 원망스러운 눈으로 미연을 바라보다 문득 이상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너도 마시지 않았냐?" 
분명 같이 술잔을 원샷한 미연은 우리랑 다르게 멀쩡했다. 설마 마신 척?! 
"전 술 못하거든요."
'이런 술은 나도 못해!'
배신자! 몰래 술을 마시지 않은 미연에 치를 떨며 나는 마지막 정신을 잃었다. 제발 숙취로 죽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

"헉!"
물에 빠진 사람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나는 숨을 헐떡이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반사적으로 주위를 둘러보지만 사물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니, 사물은 보이지만 그것이 가구라고 인식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작은 방, 낡은 옷장, 책상 위에 놓인 노트북.
모든 게 익숙하다. 익숙할 수밖에 없었다. 여긴 바로…….
"집이잖아."
내가 사는 자취집이기 때문이다. 남자만 사는 집에 독특한 향수, 어떻게 잊을 수가 있을까.
"어떻게 된 거지?"
머리를 부여잡고 몸을 누웠다. 다시 누운 이불은 축축했다. 자는 동안 식은땀을 많이 흘린 듯 했다. 
'그러니깐 내가 왜 집에 있는 거지?' 
눈을 감고 나 자신에게 물었지만 대답은 당연했다. 내 집이니깐.  
"……. 그건 나도 알아."
좀 더 구체적인 질문을 던져 보았다. 
'내가 어떻게 집으로 왔는가?'
……. 답을 구하지 못했다. 자물쇠라도 걸린 마냥 그 부분에서 백지처럼 새하얗다. 잠깐! 새하얗다?
"크리스마스……."
무언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분명 새하얗고 추웠다. 그리고 맛있었다.
"아이스크림."
크리스마스와 아이스크림. 겨우 생각해낸 두 가지의 단서, 이제 모든 수수깨끼는 풀릴…….리가 없잖아.
"내가 무슨 코난도 아니고."
이 빌어먹을 나의 뇌야. 하나만 더 힌트를 줘! 다시 한 번 어젯밤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나와 상철은 눈 내리는 밤, 어딘가를 갔다. PC방? 아니, 그보다 더 음침한 곳을……. 
"음침한 곳?"
왠지 좋은 곳 같지는 않았다. 그냥 여기서 생각하는 것을 멈추는 게 좋을 거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무리하게 기억해 낼 필요도 없겠지." 
어차피 크리스마스 날, 솔로인 내가 갈 곳이라면 그리 많지 않으니…….젠장!
"낮달!"
생각났다. 모든 게 떠올랐다. 
"그놈의 술 때문에……. 맞다! 숙취는?!"
다행이도 깨질 듯 한 두통과 속 쓰림은 없었다. 오히려 푹 쉰 것처럼 몸이 개운했다. 쓸데없는 걱정이었나, 하긴 숙취로 사람이 죽는다는 게 가능한 일인가.
"그렇다 해도 전혀 없다는 게 이상한데."
꿈? 그렇다면 모든 게 설명되었다. 지금처럼 그 독한 술을 먹고 숙취가 없는 것도,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 집으로 돌아온 것도. 정말 그런 거면 좋겠지만……. 핸드폰에 이 문자는 어쩔 거야?
[깨어나면 낮달로 달려와라.]
"상철, 이 녀석."
지우자, 지우는 거다. 크리스마스에 혼자인 것도 서러운데 솔로 카페에 갔다는 사실을 인정할 것 같으냐! 떨리는 손가락으로 천천히 삭제 버튼을 선택했다. 하지만 끝내 문자를 지우지 못했다.
"……."
내가 왜 망설이는 모르겠다. 지우면 모든 게 편해질 텐데 나는 망설였다. 난 잊어버리고 싶은 걸까? 낮달도 미연도 ……. 수진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내야겠다.
"젠장! 집에 어떻게 온 거냐고!"
되지도 않는 변명을 중얼거리며 겉옷을 챙겨들었다. 나도 참 멍청하다. 고작 한다는 게 현실 도피라니.
"미안, 잊으려고 해서."
방문을 나서며 멍청한 내 행동에 대해 용서를 구했다. 낮달도 미연도 수진도 모두 잊고 싶지 않다. 그때 나는 분명 즐거웠으니깐. 밖의 날씨는 추웠다. 어젯밤처럼  


Writer

수려한꽃

수려한꽃

돈을 모두 녹여버린 회원

comment (1)

cloud.9
cloud.9 10.12.14. 02:07
주제 3개를 우겨넣었네요.
권한이 없습니다.
서버에 요청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