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이정표

그녀의 탄생 - 하늬비 作 /2차 심사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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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려한꽃]
님의 글을 신고합니다.

너의 모습은 오직 기억 속에만 남아있어.

그래서 나는 손끝에 기억을 적셔, 하얗게 흘러가는 세계 위에 너의 이름을 한 자 한 자 적어 넣었어.

크리스마스이브의 밤, 추위로 빨개진 너의 볼.

주황색 나트륨등에 너의 입김이 하얗게 부서지고 있지만.

너는 손에 닿지 않아. 앞으로도 닿을 수 없겠지. 영원히.


* * *


[내가 괴성을 지르며 나를 향해 유리병을 휘둘렀다]

뭐 이딴문장도 안 되는 상황이 다 있어?

말을 다 잇지 못하고 지하도의 구석으로 몸을 날렸다. 덕분에 유리병은 피했지만 쿵! 소리와 함께 타일 벽에 어깨를 부딪치고 말았다.

악문 잇사이에서 비명이 새어나왔다. 어깨의 수술자국에서 끔찍한 통증이 번져 나왔다. 다리가 풀려서 바닥에 주저앉으며, 간신히 위를 올려다보았다.

후우…… 후우……

유리병을 들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또 다른 나가 코앞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영등포로터리 앞 1호선 철도 아래를 지나는 영등포지하도. 마른 귤껍질 색 조명이 어둠을 띄엄띄엄 밝히고 있었다.

또 다른 나’. 그래, 주황색 불빛 아래 서있는 이 남자. 그저 닮았다고만 하기에는 내 특징들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다. 우리학교의 교복을 입고 있고, 163센티미터 밖에 안 되는 작은 키와 체격도 나와 똑같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저 안경.

남자는 오른쪽 렌즈만 검게 칠한 묘한 안경을 끼고 있다.

반년 전 사고로 오른쪽 눈을 실명하고 왼쪽 눈도 난시가 된 내가 줄곧 끼어 온 반() 선글라스다. 당연한 거지만, 나 말고 저런 걸 낀 사람은 처음 본다.

도플갱어(Doppelganger)라니까?”

보라색 코트를 입은 인형. 그런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작은 단발머리 소녀가 또 다른 나의 뒤에서 불쑥 나타났다.

도플갱어는 생령(生靈)이나 유체이탈라는 설이 있어. 다른 차원에서 온 자신이라는 식의 영화도 있고.”

영은 어린이용 장갑을 낀 두 손을 가슴 앞으로 모아 쥐고 들뜬 목소리로 재잘거렸다.

난 도플갱어가 타임머신을 타고 온 미래의 자신일 것 같아. 그럼 어떻게 행동할지도 아니까 도망칠 수도 없잖아? 만나면 반드시 죽는다는 법칙도 설명이 되지? ? ?”

저렇게 허무맹랑한 얘기로 어린아이처럼 눈을 반짝이는 영의 키는 반올림을 해야 간신히 140센티미터. 내가 사준 저 보라색 코트도 원래는 반코트인데 영이 입으니 옷자락이 무릎 아래까지 내려간다. 그런데 초등학생도, 중학생도 아니고, 나이가 무려 19살이다. 철들기 전부터 알고 지내던 소꿉친구가 아니었다면 나도 믿기 힘들었을 일이다.

그런데 겉모습만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도 저렇게 어린아이 같아서, 보고 있자니 픽 웃음이 나온다. 그래서 나도,

타임패러독스는 어디다 팔아먹고 내가 날 죽이는 건데? 아니, 것보다 나 이미 죽는 걸로 결정 난 거야?’ 라고 딴죽을 걸 말들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말할 수 없었다.

나를 웃게 했던 영의 그 눈이, 플라스틱으로 빚은 것처럼 무감각하게 변한 채 주저앉아있는 내 왼손을 내려다본다.


또 없애버릴 거야?’


시선의 의미를 깨닫자, 관자놀이가 짓눌리는 것처럼 아파오기 시작했다.

……아니. 아니야. 이번에는 수첩은 펼칠 필요도 없어. 그리고 아직 수첩에는 뭘 적지도 못했어.

다시 왼쪽 절반뿐인 시야를, 씩씩거리며 나를 내려다보는 도플갱어에게로 돌렸다.

나와 꼭 닮았다……고는 해도 지하도 안은 무척 어둡고, 조명은 눈이 아픈 주황색 불빛뿐이다.

도플갱어로부터 동물원냄새 같은 지린내와 술 냄새가 풍긴다. 손에 들고 있는 저 유리병은, 아마 소주병이겠지.

도플갱어는 내가 지하도로 뛰어 들어왔다가 뭔가를 밟고 넘어질 뻔 한 직후에 나타났다. 그때 영이 준이랑 똑같아! 도플갱어야!’라고 소리쳤는데, 아무래도 그것 때문에 닮았다는 인상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래. 모든 것은 명료하다.

나는 수첩을 쥐고 있던 왼손이 아니라 오른손을 도플갱어에게 내밀었다.

, 자는데 밟아서 죄송해요. 이거, 가지세요.”

도플갱어는 내 손에서 지갑을 탁 소리가 나게 가로챘다.

역광을 받으며 서있던 도플갱어가 밝은 빛 아래로 한 걸음 물러나자 교복은 누렇게 찌든 누더기로, 나와 닮은 것 같았던 얼굴은 기름때로 화장한 추레한 중년의 얼굴로, 반 선글라스는 한쪽 알이 빠진 안경으로 변했다.

……아무리 어둡다지만, 왜 나랑 닮았다고 착각했던 걸까?

지갑을 열고 돈이 들어있는 것을 확인한 노숙자, 절룩거리는 걸음으로 지하도를 빠져나갔다.

영등포엔 노숙자가 많잖아. 대개 영등포역이나 고가도로 아래에 있지만. 크리스마스라 멀리 나왔다가 취해서 잤나?”

연말엔 자선행사가 많아서 노숙자들도 많이 돌아다니더라.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사람 다니는 길목에서 자냐.

나는 이렇게 애써 투덜대는 말투로 덧붙였다. 영도 거기에 맞장구치거나 웃어주기를 바랐다. 그랬던 것인데.

영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보라색 코트로 몸을 감싼 인형 같은 단발머리 소녀의, 꽉 깨물린 입술만이, 앞 머리칼로 가려진 얼굴의 밑동에서 희미하게 드러나 있을 뿐이었다.

그녀의 침묵이 가슴을 예리하게 저며 왔다.

아니야. 널 슬프게 하려던 게 아니었어. , 그런……


준아. , ‘마견(魔犬)’한테 쫓기고 있지 않았니?”


깨물려 있던 입술이 즐거운 것처럼 달싹였다. 그러자 마치 거기에 대답하는 것처럼――

사나운 울음소리가 지하도 안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고개를 홱 돌렸다. 내가 뛰어 들어왔던 지하도의 입구, 그 계단 위에, 황소만한 그림자가.

숨이 턱 막혔다.

영의 말 대로였다. 나는 저것으로부터 달아나다가 지하도로 뛰어들었던 것이다.

깨달은 순간,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젠장! 발이 엉켰잖아!

간신히 균형을 되찾고, 몸이 숙여진 그대로, 달렸다. 달렸다. 지하도의 반대쪽 출입구로. 지하도가 이렇게 길었던가. 등 뒤에서 타닥타다닥, 타닥타다닥, 짐승의 발톱이 돌바닥을 차는 소리가 들린다.

계단 앞에 와서 또 다시 고꾸라질 뻔했 - 제기랄! - . 오른손으로 계단을 짚자 어깨뼈에서 통증이 불꽃처럼 튀어 올랐다. 하지만 비명을 지를 시간도 사치다. 숨도 안 쉬고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아니, 뛰어 올라갔는지 기어 올라갔는지도 잘 모르겠다.

심장이 터질 거라는 확신 속에서 지하도를 뛰쳐나와서, 화려한 밤의 거리, 바로 앞의 불 켜진 작은 식당으로 뛰어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유리문을 힘껏 닫자, ! 요란한 소리와 함께 진동이 문손잡이를 쥔 손을 후려쳤다.

유리문을 들이박은 것은 새까만 짐승의 머리통이었다. 짐승은 유리문에 달라붙어서 발톱으로 바득바득 문틈을 긁기 시작했다.

세상에! 저게 뭐야!”

왼쪽 어깨로 문을 받친 채 식당 안을 돌아보니, 참이슬 로고가 찍힌 앞치마를 두른 식당 아줌마가 딱 내 기분을 대변하는 듯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깨로 받친 유리문이 크게 덜컹거렸다. 다시 앞을 보니 짐승이 머리통으로 문을 밀어대고 있었다. 그 머리의 높이가, 나도 세상에!’, 무려 내 어깨 높이와 맞먹는다.

누런 이빨들이 툭툭 불거진 주둥이에서 끈적하게 침이 흐른다. 새까만 몸체는 밤거리의 틈새에서 흘러나온 어둠 같다. 그것도 황소만한 어둠.

구루루루루룰!

저음의 울음소리가 심장을 움켜쥐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눈매를 꽉 채우는 동공은 파란 빛으로 번뜩이고, 주둥이에서는 검은 안개가 스멀스멀 흘러나온다.

글쎄 마견이라니까?”

목소리에 다시 식당 안을 돌아보았다.

롯데월드 매표소에서 어린이요!’라고 외쳐서 함께 데이트를 하던 나를 졸지에 로리콘으로 만들어버린 적도 있는 초미니 19세가 의기양양하게 웃고 있었다.

나는 영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유리문을 받친 왼손에서 오른손으로 수첩을 옮겨 쥐었다.

나달나달하게 닳아서 앞부분을 금속 서류집게로 고정시킨 수첩. 거기서 제일 최근에, 그러니까 15분쯤 전 영등포공원을 지나오다가 영이 저것 봐! 마견이야!’라고 소리치기 직전에 메모했던 곳을 펼쳐서 읽었다.

[묘한 차림의 외국인. bitch. 에스트레스?]

문장도 되지 못한 단어들의 나열을 본 순간, 생각났다.

갈색머리에 배가 나온 외국인 남자였다. 팔에 가죽토시를 하고 기다란 쇠사슬을 든 채 공원 안을 허겁지겁 돌아다니고 있었다. 나는 그 외국인이 웅얼거리는 말 중에 몇 마디를 알아듣고 이렇게 수첩에 메모했었다.

영이 그 남자를 보면 또 무슨 해괴한 초현실을 찾아낼까 싶어서 영의 시선을 가린 채 계속 영에게 말을 걸었었는데, 그 남자 자체가 이미 복선적 장치였을 줄이야.

나는 유리문 너머로 마견의 뒷다리 쪽을 내려다보았다. 예상대로, 아스팔트 일부가 피에 젖어 있었다. 아이고――

마견이 다시 머리통으로 유리문을 밀쳐서 문 채로 몸이 덜컹덜컹 떠밀렸지만, 나는 한숨을 쉬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bitch. 하도 욕설로 많이 쓰여서 그렇지, bitch의 본래 뜻은 암캐. ……뭐 어쩌면 그때 그 외국인 남자도 욕설로 말했던 건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에스트레스estrus. 발정일 것이다. 그러니까.

발정 난 암캐.”

어쩐지 적나라한 말이 되었다. 아니아니, 욕설로 말한 게 아니라고. 확실히 적나라하긴 하지만.

고개를 들어 유리문 너머로 마견을 보았다. 그것은 더 이상 푸른 안광도, 검은 안개도 내뿜고 있지 않았다. 단지 사타구니에서 축축한 생리혈을 떨어뜨리고 있을 뿐이었다.

발정기에는 신경이 예민해지지. 저런 녀석을 시내 한복판의 공원에 끌고 나오는 건 완전히 민폐잖아.”

초현실적인 현상이란 결국 다 이런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맞닥뜨렸을 때 보이는 것보다 생각하는 것이 앞서가 버리면 무엇이든지 초현실이 되고 만다.

그러니 대상을 그저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논리의 기반 위에서 종합하는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냉정한 판단을 내릴 수 없을 때도 있다. 그러니 가능한 한 기록을 남기고, 시간이 흐른 뒤에 그것을 다시 돌이켜보는 것이다. 단지 그것뿐이다.

마견의 새까만 털과 거대한 덩치도, 내가 가진 기억들 속에서 그와 같은 종을 찾을 수 있었다.

그레이트데인. 멧돼지 사냥에 쓰였던 세계 최대의 견종. <명견 실버>에도 나왔지. 잡티 없이 완전한 블랙인 걸 보니 몸값이 꽤 나가겠네.”

‘bitch’는 내 말이 맞다고 하는 것처럼 머리통으로 유리문을 쿵! ! 들이박았다.

?”

없어지지…… 않아? .

당연한 일이었다. 마견이 아니게 되었을 뿐이니까.

나는 발정기의 예민해진 암컷 그레이트데인에게 공격당하고 있고, 그레이트데인은 충분히 사람을 물어죽일 수 있다.

, 경찰에 전화를……!”

한심하긴! 정체를 밝히는데 정신이 팔려 뒷일을 생각하지 않다니.

왼손으로 유리문의 손잡이에 매달리며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탁자에 둘러 앉아 삼겹살을 굽던 손님들도. 입이 쩍 벌어진 채 서있던 식당 아줌마도.

다만, 리볼버 권총 한정이 코앞에 들이대어 져 있었다.

……?”

그 안의 강선조차 들여다보이는 총구 너머로, 권총을 쥔 채 고개를 숙인 자그마한 소녀가 서있었다.

……?”

참이슬 로고가 찍힌 앞치마를 두른 초미니 소녀에게 미처 의문을 전할 시간조차 없었다.

총성이 귀청을 찢었다.

찢겼다, 맞았다, 박살났다. 머리가.

연달아 터져 나오는 굉음들은 내 멱살을 잡고 의식을 반년 전으로 내동댕이쳐 버렸다.


균형을 잃고 튕겨져 나간 스쿠터.

덮쳐오는 아스팔트.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고, 이마에서 피를 흘리며 고개를 들자, 삼킬 것처럼 거대하게 다가와 있는 트럭의 헤드라이트.

그때, 내 곁에 있었던 영은……


의식을 되찾았다.

눈앞이 부옇다. 안경이 벗겨진 걸까.

나는 바닥에 볼을 댄 채 쓰러져있었다. 안경을 찾아 바닥을 더듬다가, 새빨갛고 끈적한 웅덩이에 손이 닿았다. 등골이 얼어붙는다.

피다. …… 피인가? 난 총에 맞은 건가?

반 선글라스 안경을 찾아서 쓰자, 피 웅덩이 위에 별 조각처럼 뿌려진 유리문의 파편들을 볼 수 있었다. 박살난 유리파편과 새빨간 웅덩이 한가운데에 길게 누워있는 것은.

총탄에 파 먹혀 반만 남은 개의 머리통이었다.

장난감처럼 혓바닥을 길게 빼물고, 눈알과 시신경이 흩어진 뇌수 속에서 아무렇게나 굴러다니고 있다.

준아, 내가 인터넷에서 본 건데――

남의 옷처럼 헐렁한 스웨터에 참이슬 로고 앞치마를 두른 자그마한 소녀는, 한 손에 리볼버, 다른 손에는 뭔가 커다란 뭉치를 든 채로, 웃었다. 나를 픽 웃게 만들었던 그 반짝이는 눈으로.

그런데 영은 언제 식당 안으로 들어온 걸까?

――물에 적신 신문 40부를 겹치면 총알도 막을 수 있대.”

영은 들고 있던 신문지 뭉치를 내 가슴으로 던졌다. 풍선이라도 던지듯 가벼운 손짓이었으나, 나는 몸이 휘청이며 주저앉고 말았다. 두께가 한 뼘이 넘는 젖은 신문뭉치는 정수기의 생수통처럼 묵직했다.

한 번 해보자? ? 해보자?”

영의 콧소리 섞인 목소리와 함께 총구가 신문뭉치에 깔린 내 가슴으로 향했다.

고도 난시의 왼쪽 눈과 시력을 상실한 오른쪽 눈에서, 마른 눈물이 소리 없이 흘러나왔다.

영아…… 넌 어떻게 돼버린 거니. 모습은 전혀 변하지 않았는데. 함께 지냈던 초등학교 시절 모습 그대로인데.

왼쪽뿐인 시야가 눈물로 흐려져서 영의 손가락이 방아쇠에 걸리는 것은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어렴풋이, 커다란 누군가가 나와 영의 사이로 빠르게 끼어드는 것은 볼 수 있었다.


작작 좀 하란 말이야!”


억센 손이 앞치마를 두른 영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기다란 팔로 힘껏 끌어당기더니, 한 바퀴 돌며 그대로 영을 식당 밖으로 집어던져버렸다.

영이 작긴 하지만 그렇게 인형처럼 집어던져지는 모습이, 놀랍지는 않았다. 주월과는 처음 만났을 때도 이랬었으니까.

주월……이야?”

눈물로 번진 반쪽짜리 시야에, 180센티미터가 넘는 키와 불안할 정도로 얇은 윤곽이 비춰졌다.

그러나 주월은 대답대신 내 멱살을 그러쥐었다.

내가 이렇게 될 거라고 했지!”

멱살이 잡힌 채 단숨에 일으켜 세워졌다.

고슴도치처럼 삐죽삐죽한 금발 머리. 그 아래에서 사나운 눈들이 나를 노려본다.

. 바보냐? 저 녀석을 똑바로 보라고 했잖아! 수첩은 뒀다 국 끓여먹었어!”

끓여먹지 않았어. 지금도 왼손에, 언제나처럼 쥐고 있다고.

호통을 치는 주월에게, 나는 반박의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영은…… 어떻게 됐어?”

식당 밖으로 던져진 영의 모습이 어느새 보이지 않았다.

! 어떻게 됐을 것 같아?”

주월이 코웃음 치며 말했을 때였다. ! 하는 진동이 발밑을 뒤흔들었다. ! 진동은 몇 번이나 이어졌 - ! - .

주월은 내 멱살을 놓고 식당 밖으로 뛰쳐나갔다. 주월은 고개를 조금 들어 먼 곳을 바라보더니, 히스테리를 터트리는 것처럼 깔깔거리며 웃었다.

아하하핫! 뭐야 저거! 크리스마스트리가 걷고 있네? 백화점 앞에 세워놓는 그런 큼직한 거! 불이 빤짝빤짝 빛나는데, 그 사이에서 커다란 눈 두개가 막 여기저기를 노려보잖아!”

주월은 얇은 허리를 젖힌 채 크게 웃어대다가, 살갗을 벨 것 같은 눈으로 다시 나를 돌아보았다.

니 여자 친구, 그 꼭대기에 서있는데?”

…….”

? 수첩에 안 적어? 저것도 적어놓고 나중에 보면 판단할 수 있잖아?”

주월의 말은 비꼬는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영이 무언가 초현실을 발견해서 내게 들이밀었을 때 나는 늘 그런 식으로 실체를 간파하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 말도 못하고 무겁게 서있는 나를 보고, 주월은 콧등에 기다란 주름을 만들었다.

주월의 억센 손이 다시 내 멱살을 잡아서 식당 밖으로 질질 끌고 나왔다. 주월은 검은 개의 시체 옆에 세워둔 자신의 스쿠터로 나를 이끌었다.

이걸 타고 여의도 성모병원으로 가.”

? 갑자기, ……

가보면 알아. 그게 싫으면 수첩을 써서 저 녀석을 똑바로 보든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있는 내가 답답한 듯, 주월은 나를 스쿠터 쪽으로 떠밀고는 영등포 로터리 쪽으로 돌아섰다.

바닥을 울리는 진동과 함께 작은 건물들의 머리 위로 전나무의 꼭대기가 들썩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색색의 장식들로 치장된 거목이 뿌리를 흐느적거리며 걸음을 옮길 때마다, 도로를 빽빽하게 매우고 있던 차들은 짓밟혀서 박살이 나거나 황급히 인도로 뛰어들었다.

그야말로 3류 괴수영화…… 그렇게 생각했지만, 웃음 따위는 나오지 않았다.

모든 차도가 교차하는 로터리의 한복판에서 크리스마스트리가 빙그르 회전했다.

크리스마스트리에 앞이나 옆이 따로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쩐지 그것이 내 쪽으로 돌아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그 증거처럼, 반짝이는 전구 장식과 녹색 침엽들을 헤치며 커다란 두 개의 안구가 나타났다.

눈동자들이 뒤룩뒤룩 굴러서 똑바로 나를 응시한다.

3류 영화 같은. 바보 같은. 문장도 안 되는.

빨리 가랬잖아! 저건 내가 붙들고 있을 테니까!”

주월이 버럭 소리쳤다. 엉겁결에 스쿠터의 핸들을 쥐었다가, 어처구니없는 기분으로 다시 주월의 등을 바라보았다.

저걸 어쩌겠다고? 키가 좀 크고 힘이 세긴 하지만, 그래도 겨우 너 혼자서?

내 시선을 느낀 주월은 코웃음을 치며 나를 돌아보았다.

? 이제 와서 여자 취급이라도 해주시려고?”

삐죽삐죽한 금발머리의 여자가 비웃는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주월은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로터리 쪽으로 달려갔다. 180센티가 넘는 장신답게 커다란 보폭으로 성큼성큼 멀어져간다.

……나한테 뭘 어쩌라는 건데? 지금 거기로 가는 게 대체 의미가 있는데?

내 물음에 답해줄 여자는 이미 달려가 버렸다. 어깨를 짓누르는 말만이 내 곁에 남았다.

가보면 알아. 그게 싫으면……

욕설을 삼키며, 부러져버리라는 심정으로 스쿠터의 슬로틀을 힘껏 당겼다.


* * *


잠시 키보드에서 손을 떼었어.

오랫동안 타자를 쳤더니 손이 저리네.

하지만 지친 것은 손뿐. 마음은 쉬지 않고 야이기를 계속 써내려가길 바라고 있어. 손끝에서, 아직 문장이 되지 못한 기억들이 방울방울 떨어지는 것만 같으니까.

근데 기억이라곤 해도…… 좀 허무맹랑하지?

그래. 사실 얘기 자체는 그냥 꾸며낸 거니까.


* * *


버들 류에 옥돌 영 자를 쓰는 류영柳瑛은 영등포경찰서장 류성환 총경의 무남독녀 공주님이다.

초등학교 5학년 무렵, 그녀의 아버지를 딱 한 번 본 적이 있다. 사람 좋게 웃고 있지만 어딘가 차갑고 딱딱한 느낌이 드는, 2미터 가까이나 되는 거구를 가진 사람이었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했다는 17대조 할아버지 이후 영의 가문은 대대로 무관으로 이름을 날렸다고 한다. 특히 영의 증조할아버지는 일제시대 때 의용군 대장으로 싸우다가 일제 붙잡혀 교수형을 당했고, 그 공로로 박정희 때 개국공신국민장 훈장을 받았다는데, 지금도 영의 집 거실에는 그 훈장이 모셔져 있다.

그러니까 아버지를 닮았거나 가문의 기질을 이어받았다면 웬 고릴라처럼 생긴 여자가 죽도를 어깨에 걸쳐놓고 목을 뚜두둑 꺾는 모습 정도가 어울릴 것 같다만, 실제로는.

이름 뒤에 자 붙이지 말랬잖앗! 촌스럽다니까!”

라고 비음 섞인 목소리로 불평을 터트리는 미니어처 과()의 생물이다.

아니아니, 나도 내 이름이 철수라면 기분이 나쁠 것 같긴 하다만, 그래도,

지금 건 주격 조사거든요? 체언이 서술어의 주어임을 표시하는 격 조사?”

물론 주격 조사 를 최대한 활용해서 영이라고 부르고 있다는 티는 내지 않았다.

내가 이런 식으로 약을 올리면 영은 금방 토라졌다가도, 이내 다시 내 곁에 달라붙어서 하준아라고 내 이름을 부르는 간간이 은근슬쩍 서방님이라고 부르며 재잘거린다.

우왓, 손발이…… 누가 오그라든 내 손발 좀 펴주세요……!

머리털이 다 곤두설 정도로 닭살이 돋아서 진짜로 싫다는 말을 몇 번이나 했는데, 그러고 나자 내가 영이라고 부를 때마다 보복성으로 나를 서방아라고 부르곤 했다. 넌 낯간지럽지도 않느냐고 따지자 하는 말이,

날 구해줬잖아. 그렇게 큰 사고가 났는데 난 이렇게 하나도 안 다쳤으니까. 준이 넌, 내 생명의 은인이야.”

어어이. 그게 처음부터 끝까지 사고의 원인을 다 만들어낸 장본인이 할 말이냐.

어느 날 갑자기 스쿠터를 구해서 같이 타자고 말한 것도 영이었고, 그때 스쿠터를 운전했던 것도 영이었다.

영은 끝까지 아니라고 우기지만, 분명 팔다리가 스쿠터에 안 맞게 짧았던 게 사고의 주원인이었을 거다.

그리고…… 많이 다쳤는데…… 나한텐 화도 안 냈잖아.”

영은 고개를 폭 숙였다. 나는 웃어버렸다.

화낸다고 다친 게 나아?”

오른쪽 눈 실명. 왼쪽 눈은 외상으로 인한 고도 난시. 오른쪽 견갑골과 팔뼈는 으스러져서 교정용 철심을 박았다.

사고 직후에는 흉골이 내려앉으며 대동맥을 압박해서 그야말로 아슬아슬했다고 한다. 응급수술로 흉골을 들어 올려 철판으로 임시 고정한 후에야, 비로소 다른 부분의 수술을 시작할 수 있었다던가.

혼수상태로 닷새. 깨어나서는 입원 석 달. 현재도 통원치료 중. 쉽게 말해서, 진짜로 갈 했습니다.

……군대는 안 가겠네.’

이제는 기억도 안 나는데. 의식을 되찾은 내가 몸 상태를 알게 되자 처음 한 말이 그거였다고 한다.

물론 완전히 무덤덤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시력도 남아있고 신경계도 올 클리어. 모 연예인처럼 마비가 오지 않은 것만 해도 어딘가. 이 정도면 문명사회에서 사는 한 그렇게까지 큰 불편은 없을 것이다. 어차피 몸을 격하게 쓰는 일을 할 예정도 아니었고.

……낙천적인 게 아니라, 그게 있는 그대로의 나다. 굳이 감정에 휩쓸려서 괴로워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고마워. 너무 좋아……서방님.”

자그마한 체온이 내 허리를 감았다. 나도 163센티미터 밖에 안 되는 작은 키지만, 영의 머리끝은 그런 내 어깨 언저리에 간신히 닿는다.

그런 큰 사고를 당했는데, 영은 긁힌 상처 하나도 나지 않았다. 내가 영을 감쌌기 때문이라던가. 그것 역시 나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스포츠를 즐기는 편도 아니고, 평생 몸을 격하게 쓸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길 한가운데 쓰러져서 코앞에서 트럭이 덮쳐오는 그런 활극은 두 번 다신 없겠지. 그 한 번 뿐인 활극의 결과가 지금 이것이라면, 충분히 만족스럽다.

그래그래. 다 좋으니까, 제발 좀 그렇게 부르지만 마라.”

내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영의 뒷머리를 손으로 꾸욱 눌렀다. 작은 찐빵을 안은 것 마냥 따끈따끈했다.



――영은 그런 애란 말이야! 알겠어!”

주월의 멱살을 잡아서 얼굴 앞까지 끌어당겼다. 나보다 힘이 센 그녀는 저항할 수 있었을 텐데. 골목 벽에 삐딱하게 기대 서있던 주월은 순순히 내 코앞으로 끌려왔다.

, 함부로 하지 마.”

지금껏 살면서 내가 이렇게 사납게 말한 적이 몇 번이나 있었을까. 그런 내 면전에서 주월은.

함부로 하면? 어쩔 건데. 깨물 게?”

주월은 비웃는 눈으로 내 목깃 안을 내려다보았다. 나보다 한 뼘은 큰 그녀의 그림자와 식당가 골목의 침침한 어둠이 드리운 내 쇄골 언저리에는, 작고 동그란 딱지가 앉아있다.

영의 목덜미에 붙어있던 스티커 문신의 거미가 튀어나와서 깨문 상처다. 물론 영이 목에 있던 스티커 타투는 빗물에 녹은 화장품 때문에 지워진 것뿐이다. 손바닥만한 검은 타란툴라는 데이트 중에 내린 겨울비를 피해 들어갔던 팻숍에서 가방 속으로 숨어들었다가 딸려 나왔던 것뿐이고. 수첩에 적었던 경로를 따라 돌아가 보니 팻숍 주인이 처음에는 도둑이라며 화를 냈지만, 물린 상처를 보여주자 180도 돌변해서 손이 닳도록 싹싹 빌었다.

전부 다 우연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코앞에서 주월이 비위를 긁으며 웃었다.

설명은 된다. 사건의 전말은 일목요연하다. 하지만 왜. 왜 이런 초현실처럼 보이는 일이 자꾸만 내 주위에서 일어나는 걸까.

걔 때문이라는 걸 꼭 내 입으로 말해줘야 알겠느냐고.”

하지 말랬잖아!”

크게 소리치며 주월을 밀어붙였다. 그러나 단단한 벽처럼, 주월은 조금도 밀려나지 않았다.

압착기가 손을 쥐어짜는 것 같았다. 어느새 주월이 내 손목을 쥐고 있었다. 내가 멱살을 놓치자, 주월은 반대로 나를 밀어붙였다. 빗물 웅덩이를 걷어차며 젖은 시멘트벽에 어깨를 세게 부딪쳤다. 번쩍, 눈앞에서 불똥이 튀었다.

그 애가 그렇게 소중해? 똑바로 쳐다보지도 않으면서?”

주월의 목소리는 으르렁거리는 것처럼 사나웠다.

매서운 눈초리에 나도 모르게 시선을 내리자, 주월의 입술이 먹잇감을 조롱하는 맹수처럼 이죽거리고 있었다.

그 입술이, 삼켜버릴 것처럼 다가왔다.

……

물컹한 감촉보다 먼저 텁텁한 담배 냄새가 혀끝에 감겼다. 그리고 뒤를 이어 미지근하고 매끈한 것이, 입안으로.

두 손으로 어깨를 밀어냈다. 키에 비하면 얇은 주월의 어깨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발을 걷어찼다. 주월의 닳은 운동화가 내 발등을 꽉 밟아서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 뿐이었다.

주월의 입술이 스스로 떨어질 때까지,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뒤늦게 손을 휘둘렀다. 짜악 소리와 주월의 고개가 옆으로 젖혀졌다.

말랑하기만 한줄 알았는데 손도 뻗을 줄 아네?”

따귀를 맞고도 대수롭지 않게 히죽거리는 주월의 말투가, 나 자신을 밑도 끝도 없이 한심한 기분으로 몰아넣었다.

주월은 맞은 쪽 눈을 감은 채 다시 얼굴을 바싹 붙여왔다.

감긴 눈꺼풀 위에서, 피처럼 빨간 눈동자가 나를 노려본다.

영이 했던 스티커 타투 따위가 아닌 다른 바늘로 살갗에 새긴 진짜 문신.

그래. 지금처럼 똑바로 하란 말이야. 그 애를 똑바로 봐.”

검은 눈동자와 빨간 눈동자가 나를 노려본다. 똑같이 일그러진. 똑같이 알 수 없는 분노로 가득 찬 두 눈.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녀석이잖아. ? 안 그래? 근데 왜 그 녀석은 똑바로 보지 못하는 건데?”

모르겠다. 이 여자는 도대체 나한테…… 뭘 원하는 거야? 대체, ……

왜 이렇게 날…… 괴롭히는 거야.”

문신이 아닌 검은 눈동자가 순간 흔들렸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표정으로 구체화되기 전에, 주월의 손이 내 머리를 잡아서 아래로 찍어 눌렀다.

버티지 못하고 고개가 숙여졌다. 주월의 얇고 긴 손가락들이 머리뼈에 자국을 새길 것만 같다. 힘을 주고 있기 때문일까. 그 손은 얕게 떨렸다.

괴롭다고?”

짧은 침묵이 지나고, 주월은 속삭이듯 나지막하게 말했다.

아직 멀었어. 넌 훨씬 더 고통에 익숙해져야만 해.”


* * *


너의 품. 내 머리를 누르는 너의 손. 입술의 감촉까지도 생생하게 느껴져서, 다시 키보드에서 손을 들었어.

모니터의 스크롤을 되짚어서 지금까지 쓴 이야기를 다시 읽어봤어.

아하하. 이게 뭐람. 내가 너랑…… 와아, 볼이 화끈거린다.

진짜 바보다. 하하…… 이 계집애가 바보처럼 무슨 망상을 적어놓은 거야.

나 자신이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다 나왔어. 정말 눈물이 쏙 나올 만큼 웃었어. 왜 이럴까. 눈물을 닦고 또 닦아도 웃음이 멈추질 않아.

……그냥 그만둘까?

너무 울어서 머리가 띵해진 채 키보드 옆을 내려다보았어.

눈물을 닦느라 키보드 옆에 벗어놓았던 검은 가죽 안대.

보고 싶었어. 이렇게 해서라도, 널 다시 보고 싶었어.


* * *


골목길 안으로 스쿠터를 몰았다가 골목을 돌아서 로터리의 가장자리 쪽으로 빠져나왔다.

크리스마스트리가 거리를 휘젓고 다닌 탓에, 그렇지 않아도 북새통이었던 차도는 완전히 주차장이 되어있었다.

차도 끄트머리와 인도를 오가며 로터리의 오른쪽으로 돌아서 바로 옆에 있는 서울교로 진입했다.

영등포 로터리에서 300m 남짓한 서울교만 건너면 바로 여의도다.

만약에 반대쪽, 영등포 로터리에서 서쪽으로 500m만 간다면 영등포역과 역 건물에 연결된 롯데백화점이 나오고, 포장마차와 노점이 줄지어 선 거리를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면 신세계 백화점이 있고, 신세계 백화점과 같은 블록에는 국내최대의 쇼핑몰이라는 타임스퀘어가 있다.

그런데 영등포역은 예전부터 유명한 노숙자 밀집지역이다. 이른바 정육점으로 불리는 사창가이기도 해서, ‘국내최대의 쇼핑몰코앞에서 지금도 보란 듯이 영업을 하고 있다.

그런 안 어울리는 것들을 한데 몰아넣은 듯한 웃기는 동네지만, 바로 거기 있는 타임스퀘어가 영과 함께 가려던 원래 목적지였다.

크리스마스고, CGV의 커플석도 예매했고, 돈만 있으면 타임스퀘어는 그럭저럭 좋은 데이트장소다.

그런데 지금 영은 말 같지도 않은 괴물을 불러내서 폭주하고 있고, 나는 목적지와 정반대 방향으로 스쿠터를 달리고 있다. 대체 뭐가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된 걸까.

상념에 빠져있는 동안 서울교를 지나 여의도로 들어섰다.

여의도공원과 고층건물들이 늘어선 정면으로 가지 않고, 바로 오른쪽으로 꺾어 여의도의 외곽을 따라 달렸다.

섬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 작은 하천의 뚝방길 같은 왕복4차선도로.

크리스마스라 거리 곳곳에는 일루미네이션과 전구장식이 밝혀져 있을 테지만 이 좁은 도로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저 가로등이 밝혀진 기다란 뚝방길을 차들만이 바삐 달려가고, 오른쪽 뚝방의 가로수들이 뒤로 스쳐 지나고, 왼쪽의 풍경이 고층건물, 아파트 단지, 삼거리 등으로 바뀔 뿐이다.

떠들썩한 축제에서 딱 한 발짝 물러난 듯한. 단지 그뿐인데 누구의 관심도 받지 않는, 그런 위치에 서 있는 것 같은 감각.

허허하고 홀가분하다. 스쿠터의 엔진소리만이 귓속에서 웅웅거린다. 살갗을 비비는 밤바람이 묘하게 상쾌하다. 그리고 나와 살갗이 맞닿아있는…….

멍한 상념 속에서 문득, 이 감각이 지금 느끼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은 반년 전에 느꼈던 감각이다.

사고가 나기 직전, 영과 함께 달리던 때 느꼈던 감각.

지금 나는 반년 전처럼 스쿠터를 달리고 있다. 그리고 내가 향하고 있는 여의도 성모병원은 반년 전, 사고를 당한 후에 내가 입원했던 곳이다.

머릿속으로 벼락이 떨어졌다.

…… !”

관자놀이가 머리 안쪽으로 구겨져 들어오는 것 같았다.

갑작스런 두통에 하마터면 다시 사고를 낼 뻔하고, 가까스로 스쿠터를 뚝방 쪽 인도 옆에 멈춰 세웠다.

스쿠터의 핸들에 팔꿈치를 괴고 머리를 감싸 쥐었다.

반쪽뿐인 시야가 번쩍번쩍 빛난다. 아무 것도 볼 수 없고,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다.

그런데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와중에, 무언가가 보였다.

마치 본 게 아니라 누군가가 보여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시계추처럼 대롱대롱 흔들리는 눈알.

그 위로 이어진 기다란 시신경.


조금 전에 보았던 검은 개의 눈인가? ……아니다. 다른 눈이다. 머릿속에 떠오른 장면 속에서는 기다란 핀셋이 시신경을 집어서 안구를 들고 있다.

핀셋이 안구를 쇠 접시 위에 내려놓는다. 이윽고, 핀셋은 시신경을 쇠 접시에 단단히 눌러서 안구를 고정시킨다. 날카로운 은빛 메스가 다가와서 안구를 베어내기 시작한다.

나는 깨달았다. 그리고 기억해냈다. 모든 것을.


* * *


작작 좀 해!”


여자의 목소리였다.

짧은 순간, 다른 누군가가 소리를 지른 게 아닌가 하는 기분이 들었다. 저 삐죽삐죽한 금발의 꺽다리는 독서실에서도, 영과 내가 독서실을 나와서 깜깜한 버스정류장에 서있었을 때도, 그리고 막차 버스에 올라탔을 때도, 마치 미행당하는 것처럼 계속 시야 한구석에 밟혔다. 하지만 정면에서 얼굴을 보지는 못하고 그저 남자라고만 생각했는데.

하지만 남자인지 여자인지는 지금 중요한 게 아니다.

금발머리는 그렇게 소리를 지르며 영의 뒷덜미를 거칠게 끌어당겼으니까.

깨닫고, 막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을 때는 이미, 금발머리는 영을 붙잡은 채 뒤로 빙그르 돌고 있었다. 내가 손을 뻗었을 때는 완전히 한 바퀴를 돌아서 다시 이쪽을 향했고, 그 원심력으로 영을 앞쪽으로 내던져버렸다.

영의 자그마한 몸이 부웅 떠올라서 심야의 시내버스 안을 가로질렀다. 붙잡기는커녕 손을 쓸 틈도 없었다.

텅 빈 좌석들 사이로 날아간 영은 버스 한가운데에 서있던 괴인(怪人)’과 충돌했다.

괴인. 괴물. 도저히 그렇게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

멍게처럼 흐물거리는 주황색 살점이 얼굴을 뒤덮고 있고, 벌거벗은 뱃가죽은 뻥 뚫려서 내장이 드러나 있다.

부후……! 부후……!”

영은 금방이라도 내장이 흘러나올 것 같은 괴인의 배에 삐딱하게 기대고 섰다. 괴인이 듣기 거북한 소리로 숨을 쉬며 영에게 손을 뻗으려 한다.

나는 소리를 지르며 앞으로 뛰어들려 했지만 그 순간 버스가 브레이크를 밟았다. 몸이 앞으로 쏠리며 쇠기둥에 어깨를 부딪쳤다. 기절할 것 같은 통증으로 내가 굳어진 사이에, 삐죽한 금발머리가 내 옆을 스치고 날듯이 뛰어나갔다.

금발 여자의 손이 괴인의 얼굴을 움켜잡았다. ‘찌익이라든가 뚜둑같은 소리도 없이 괴인의 얼굴에서 흐물거리는 살점들이 뜯겨 나가고――

그 아래에서 술에 취한 20대 남자의 얼굴이 나타났다.

잘 봐.”

금발 여자는 남자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남자의 덩치도 작은 편은 아니었는데, 남자는 멱살이 들려져 까치발을 하게 되었다.

여자는 이빨을 드러내며 사납게 말했다.

보고 있냐?”

여자의 눈빛에 질린 걸까. ‘괴인이었던 남자는 어떻게 대답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하지만 여자의 물음은 남자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 너한테 하는 말이야.”

여자의 고개가 나를 향했다. 눈이 마주친 순간 무릎 뒤가 떠밀린 것처럼 후들거렸다.

설마, 눈빛 때문에?

하지만 확인하기 위해 시선을 맞출 엄두는 나지 않았다.

여자는 남자의 멱살을 내 쪽으로 들어 보였다. 그 손을 향해 괴인이었던 남자의 뱃가죽과 내장이 말려 올라가 있다. ……아니. 아니다. 저건.

내장 티셔츠.

살색 바탕의 티셔츠에 수술 장면인지 해부도인지 모를 그림이 만화 같은 색체로 프린트 되어 있다.

여자는 반대쪽 손도 들어 보였다.

그 손은 괴인의 흐물거리는 얼굴 가죽을 쥐고 있다. 그런데 괴인의 얼굴 가죽에 왜 실 보푸라기가 돋아 있지?

…… 실 보푸라기가 아니었다. 털실. 주황과 빨강 털실의 니트 모자. 그걸 그저, 얼굴까지 뒤집어쓰고 있었던 것뿐.

넋이 나간 표정으로 서있는 나를 향해 금발의 여자가 툭 쏘듯 말했다.

. 잠 제대로 못 잤지?”

여자는 뭐가 묻은 것처럼 불그스름한 한쪽 눈썹을 치켜뜨며 덧붙였다.

한심한 자식.”

딱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석 달 입원하고 나와 보니 고3의 여름이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입원기간 중에 방학이 끼어있어서 출석일수가 부족한 건 아니었지만 그 사이 공부는 당연히 한자도 못했다. 성적이 떨어지는 것도 당연한 수순. 그래서 나는 퇴원한 후에도 통원치료를 핑계로 등교 후 곧장 조퇴해서 독서실에 틀어박혔다. 퇴원 후 한 달. 그 정도만 내 페이스로 바짝 공부하면 전교 5등쯤은 금방 회복할 수 있다. 몸이 둔하면 머리라도 좋아야지.

그러고 나서 이제 다시 제대로 학교를 다녀볼까, 라고 생각했지만.

학교 가지 마. 나랑 놀자.”

내 독서실 칸막이 안에 들어와 있던 영이 조르듯 말했다.

, 3이라고, 3. 무슨 놀자 타령이야?”

이렇게는 말했지만, 학교에서 야자까지 하고 나면 다른 학교에 다니는 영을 만날 시간이 거의 없어진다. 이대로 수능공부도 독서실에서 하는 편이 내 스타일에 더 맞는 것도 사실이었다.

근데 넌 학교 안 가?”

라고 물었더니, 영은 휴학했다며 배시시 웃었다. 정말인지는 모르겠다. 학교가 다르니 알 도리도 없고.

괜찮아. 어차피 아빠엄마는 나한테 신경도 안 써.”

어째 묵직한 대사를 참 생글거리면서도 말하는구나 싶어서, 오히려 내가 한숨이 나왔다. 아무튼 영은 거의 하루 종일 내 옆에 붙어있었으니 학교를 안 가는 것은 분명했다.

영은 독서실의 내 바로 옆 칸에서 엎드려 자거나 만화책을 보거나 이따금 내게 놀자고 졸라댔다. 하지만 공부에 몰두하느라 내가 건성으로 대답하자 어느새 영이 일방적으로 얘길 하고 내가 대충 대꾸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이것 좀 봐라! 아빠 걸 슬쩍 해왔다?”

6연발 리볼버 권총을 보고 후다닥 물러나다가 책상 칸막이에 머리를 부딪쳤다.

, 아무리 경찰서장이라도 집에 권총을 갖다 놓을 리가……!”

영의 자그마한 손에서 뺏어서 들고 보니, 아니나 다를까. 모델건이었다.

내가 그저 듣기만 하자 영의 장난기는 점점 더 심해졌다. 이야기의 소재도 귀신이나 외계인처럼 엉뚱한 것으로 흘러갔다. 도플갱어라든가, 마견이라든가.

내가 그런 얘기 안 믿는 거 알면서.

한번은 내가 자기를 무시한다면서 영이 울었던 적이 있다. 어떻게든 싹싹 빌어서 화해는 했는데, 영은 벌이라며 독서실 화장실에 적혀있는 번호로 전화를 걸라는 억지를 부렸다.

[뼛속까지 짜릿하게! 아가씨 찾는 분 사절. 010-XXXX- XXXX]

머리털 난 홍석천처럼 생긴 아저씨가 독서실로 찾아와서 내 핸드폰에 전화를 했을 때는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진작 핸드폰을 꺼놨어야 했는데. 그 아저씨가 나를 끈적거리는 눈으로 한참동안 쳐다보다가 돌아가자 바로 핸드폰 번호를 바꿨다. 영은 깔깔거리며 내 왼쪽 어깨를 두드려댔다.

그런 쓴웃음 짓게 만드는 두 달이 흘렀다. 그리하여 수능이 코앞으로 다가온 시점에서, 내 모의고사 등급은……

……우와.

난생 처음으로 시험 결과를 보고 등골이 오싹해졌다.

몸이 둔한 대신 머리 쓰는 데는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이 정도로 했는데도 왜 성적이 안 오르는 걸까? 역시 영 때문인가? 옆에서 영이 방해해서?

나는 그런 생각을 떨쳐버리려고 자는 시간을 4시간 아래로 줄이며 더욱 공부에 몰두했다. 그리고 마치 그런 내게 호응하는 것처럼, 영의 장난도 한층 더 심해지던 11월 초순이었다.

수면부족과 압박감에 몰릴 대로 몰린 상태에서 영과 함께 탔던 막차 버스. 나와 영이 맨 뒤에, 그리고 눈에 밟히는 삐죽삐죽한 금발머리는 우리 바로 한 칸 앞에 앉았다.

그 외에는 단 한 명, 버스 앞쪽 좌석에 코트를 얼굴까지 덮어 쓴 채 코를 골며 자는 사람이 있었다.

영이 장난기로 눈을 반짝이며 그 사람에게로 다가가더니 얼굴을 덮고 있던 코트를 홱 젖혔다. 그런데 그 아래에서 나타난 얼굴은――



아하핫! 다앙~연하지. 세상에 괴인 같은 게 어딨냐?”

금발머리의 여자는 24시간 맥도널드의 플라스틱 의자에 등을 기댄 채로 웃어댔다.

그런 거 안 믿는다는 놈이 잠 좀 못 잤다고 그걸 괴물로 봐? 어이구, ~피하셔라.”

, 진짜. 짜증나게 하는 여자네.

내가 꿈틀거리는 눈썹을 억누르는 동안에도 여자는 손으로 입을 가리는 시늉을 하며 능글능글하게 웃었다.

여자는 거의 눕다시피 비스듬히 앉았는데도 맞은편에 앉은 나와 눈높이가 비슷했다. 삐죽삐죽한 머리는 단발도 되지 않을 정도로 짧고, 왼쪽 귀에는 링 피어스. 껄렁껄렁하신 분위기로 보아 코나 입술에 뭐가 더 박혀있어도 어색하지는 않을 것 같……지만, 그런데도 보고 있으니 확실히 여자애라는 느낌이 드는 얼굴이다. 하는 짓도 밉상인데 거 신기하네.

뭘 그렇게 쳐다봐?”

찌푸린 여자의 눈과 마주쳤다.

아차 싶었다. 정말 왜 이렇게 멍하니 들여다보고 있었을까.

허둥거리다가, 여자의 얼굴에서 둘러댈 거리를 발견했다.

눈에 그거. 뭐야?”

여자는 움찔하더니 자랑하는 것처럼 미소를 지었다.

얼룩이 묻은 것처럼 불그스름한 왼쪽 눈꺼풀이 살며시 감겼다.

어때.”

잠시 동안 할 말을 잃었다.

선이 얇은 눈썹과 긴 속눈썹 사이로 보석 같은 붉은 눈동자가 그려져 있었다. 동공과 홍체가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고 색체가 뚜렷해서, 마치 진짜 눈처럼 생생했다.

다만 뭐랄까. 너무 사실적이라서…….

…… . 예쁘네.”

여자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미쳤구나?”

억지로 했던 아부가 단칼에 목이 잘렸습니다.

, 아니, 자기가 좋아서 새긴 거 아니야? 그럼 뭐라고 해야 되는데?”

어엉? 네 느낌대로 말하면 되지 왜 그걸 나한테 물어.”

여자는 도리어 매서운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한심하게도, 단지 그 눈과 마주친 것만으로도 어깨가 후들들 떨렸다.

이리저리 시선을 돌리다가, 바보 같은 기분이 들어서 고개를 푹 숙였다.

아니다…… 그냥 예쁜 거 맞아. 내가 미친 것도 맞고.”

겁먹었으면서 끝까지 한마디 쏘아준다고 한 말이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여자는 갑자기 킷킷킷킷 하고 웃으며 내 머리를 손으로 마구 헝클어뜨리기 시작했다. 아니, 이건 또 무슨 만담이냐.

뭐가 그렇게 재미있어?”

여자의 손을 밀쳐냈다. 그래도 여자는 계속 킥킥거리며 웃는다. 좀 전까지는 험악하더니 정말 기분이 쉽게도 바뀌는 모양이다. 게다가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며 웃어서, 단지 그것만으로도 서너 살은 어려진 것처럼도 보였다.

―― 한참 웃었네. 기분 이상하다. 좋아서 한 거지만 예쁘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는데. 이게 그렇게도 보이나.”

아니. 솔직히 말하면 눈깔 셋 달린 괴물 같아.”

히죽거리던 여자에게 한 마디 쏘아주고 잽싸게 고개를 돌렸다.

하하, 이번엔 내가 웃어주마. 얼굴만 안 맞추면 암만 겁나는 표정을 지어도 소용없다고.

…… 그러는 지는 하나밖에 없는 주제에.”

한동안 나를 노려보다가, 여자는 비웃듯 말했다.

너도 하나 그려보지 그래. 혹시 아냐, 세상이 똑바로 보일지.”

여자의 손이 반 선글라스 너머로 내 왼쪽 눈을 가리켰다.

정말이지…… 짜증나게 하는 여자다.

버스에서 도와준 건 고마워. 그래서 이렇게 답례를 하는 거지만. 그래도 그렇게 사람을 집어던지는 거 하며, 지금도 대체 무슨……으로 시작해서 여자에 대한 온갖 꼬투리를 잡아 인격을 깃털이나 아가미 달린 생물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비난을 퍼부어주려던 찰나였다.

배달 왔습니다――!”

빨대를 꽂은 콜라 컵이 펄쩍 뛰어오를 정도로 힘차게 쟁반이 떨어져 내렸다.

비켜봐 봐, 쪼옴.”

영은 나와 여자의 시선이 맞부딪치던 테이블 위에 햄버거 쟁반을 내려놓고는 엉덩이로 나를 밀어내며 내 의자의 절반을 차지해버렸다.

커다란 빅맥을 당근 갉아먹는 토끼마냥 오물거리는 영과 찰싹 붙어 앉은 채로 진지한 표정을 지어봐야, 나만 우스워지겠지.

한숨처럼 입을 다물자, 여자가 히죽거리며 말했다.

둘이 잘 어울리네.”

어머? 고마워.”

영은 입술을 핥으며 환하게 웃었다. 여자도 환하게 웃으며 나를 향해,

둘 다 쬐끄만 게 꼭 초등학생이랑 중학생 같다?”

두 달 지나면 20대야.”

표정을 팍 구기며 쏘아주자 여자는 다시 킬킬거렸다.

꼬맹이~땅꼬맹이~

상대하질 말자, 상대하질 말어.

부글거리는 속을 누르며 콜라빨대를 물었다. 내가 잠자코 있자, 영이 환하게 웃는 표정 그대로 여자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근데 너. 뭐 하러 왔어.”


나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차가운 물방울이 목덜미로 흐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뭐지?

? 너 때문이잖아. 몰라서 묻는 거야?”

여자는 다시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영은 대답하지 않고 햄버거를 아삭, 한 입 베어 물었다.

토끼처럼 두 손으로 햄버거를 쥔 채. 입을 오물오물. 오물오물. 오물오물 움직인다.

알 수 없는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영은 환하게 웃고 있다. 영은 여자를 똑바로 올려다보고 있다. 그런데.

오물오물. 오물오물. 오물오물. 영의 입이 움직인다. 아니. 입만…… 움직인다.

영은 웃고 있다. 영은 여자를 올려다본다. 딱딱하게 굳어진 채. 눈조차 깜빡이지 않는다.

오직 턱이. 턱만이 기계처럼 움직인다.


. 이름이 뭔데.”


씹던 것을 삼키고 나서, 가면처럼 웃는 영이 말했다.

나도 모르게 숨을 흡 들이마셨다. 답답했다. 호흡은 절반밖에 폐로 흘러들지 않는다. 흐읍. . 흐읍. 목구멍이 뭔가에 죄어진 것 같았다.

이름? 그걸 지금 말하라고?”

금발여자가 퉁명스럽게 대답한 순간, 나는 터지듯 숨을 토해냈다. 온몸을 들썩이며 거칠게 숨을 쉬었다. 가슴이 무거웠다. 설마 숨을 멈추고 있었나?

다시는 안 나타날 거야? 그럼 말 안 해도 되.”

영은 입술에 묻은 소스를 휴지로 닦으며 다시 환한 웃음으로 대답했다.

바로 옆에 붙어 앉아있으면서 영은 헐떡이는 나를 돌아보지 않았다. 맞은편에 앉아있던 여자도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자는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여자가 말했다.

주월…… 낮 주 자에 달 월. 이름이 아니라 이메일이랑 자주 쓰는 아이디야.”

여자, 주월의 눈은 불만스럽게 찌푸려져 있었지만 어딘가 지금까지와 달랐다. 깊은 물속처럼 가라앉아 있는 것 같았다.

예전에 한참 겉멋 들었을 때 있으나마나한 인간이란 뜻으로 지었던 건데…… 뭐 지금도 딱 그 꼴이긴 하네.”

주월은 농담 같은 말투로 말을 이었다.

오늘 같은 일은 앞으로도 계속 생길 거란 말이야. 그러니까 괜히 찐따처럼 허둥대지 말고 손에 들고 있는 그걸 써.”

주월의 시선은 내 왼손으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그 시선을 따라 내려갔다. 주월의 시선이 닿은 내 왼손에 어느새 수첩이 쥐어져 있었다.

이게 뭐지. 내가 언제부터 이런 걸 쥐고 있었던 거야?

뭔 소리야? , 그거 원래부터 갖고 있었어.”

주월의 말에 다시 왼손에 쥐어진 수첩을 내려다보았다.

오래 써서 표지가 나달나달하게 닳고, 앞부분을 금속 서류집게로 고정시킨 수첩.

그녀의 말 대로였다. 이것은 나의 수첩이다. 나는 처음부터 수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 원래부터 갖고 있었다니까?”

주월은 눈꺼풀을 닫고 보석 같은 빨간 눈으로 웃었다.

바로 옆에 붙어 앉은 영에게서 작은 한숨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 * *


진부한 극적 장치야. 수첩이라는 기억의 매개물, 그걸 통해 현실을 깨닫는 거지.

자기 혼자 살아남은 현실을.

……그래. 이건 주인공만 너로 바뀌었을 뿐, 실은 나의 이야기니까. 네가 죽고, 혼자 살아남은 내가 너를 생각하며 쓰는 이야기니까.

아아, 바보 계집애. 기껏 이야기 속에서 널 되살려냈는데. 좀 무책임해도 그냥 둘은 행복했다로 끝내면 될 텐데.

그게 가짜라도. 아니, 가짜만이라도.

그런데 왜 그렇게 하지 못하고, 이런…….


* * *


왜 이런데 쭈그리고 앉아있어?”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 , 울었어?”

고슴도치 같은 금발. 서있었어도 올려다봐야 했을 큰 키. 주월은 가는 허리에 손을 짚은 채 어느새 내 앞에 서있었다.

나는 뚝방길 가장자리에 스쿠터를 세워둔 채 주저앉아있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고, 나를 내려다보는 주월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시야가 젖어있어서 눈을 감아 눈물을 짜냈다. 그리고 몇 번이나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을까.

기억나버렸어…… 전부 다.”

왼쪽 눈을 감았다. 세상이 검게 사라졌다. 반 선글라스를 벗고 눈을 뜨자, 난시를 가진 왼쪽 눈이 밤에 묻힌 모든 것을 부옇게 비췄다.

난시가 있는 이 왼쪽 눈은…… 영에게 받은 눈이야.”

그랬다. 검은 개의 눈알을 보고 그 장면을 연상했고, 기억해내고 말았다.

각막이식.

내 눈이 원래는 양쪽 다 실명됐었다는 말을 병원 침대에 누운 채로 들었다. 왼쪽 눈은 각막이식을 하면 시력이 돌아올 수 있는 상태였지만 그나마도 수술결과가 시원치 않아서 평생 안경을 껴야한다는 얘기도. 그런데 어떻게 내가 사고가 나자마자 딱 맞춰서 각막이 구해졌느냐고 내가 묻자.

각막은…… 기증자의 안구를 적출한 다음 채취해. 그런데 지금의 영은 두 눈이 다 있어. 아니, 그 전에. 살아있는 사람 눈에서…… 각막을 잘라낼 리가…… 없잖아.”

가슴을 움켜쥐었다. 손끝에 칼자국이 만져지는 것 같았다. 손에 흥건히 피가 묻어나왔는지도 모른다. 가슴이 난도질당한 것처럼 아팠으니까. 하지만 손등을 적신 것은 눈물이었다.

수술 장면을 본 건 아니지만…… 영에게서 각막을 이식받았다는 얘기는 분명히 들었어. 그리고 지금껏, 일부러 잊고 있었어. 영이 죽었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반년전의 사고. 그때 영은 죽었다. 그래서 실명된 나는 영의 각막을 이식받을 수 있었다. 통원치료도 대부분 이식수술을 받은 왼쪽 눈 때문에 갔던 것이었다. 각막이식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자, 그 기억들도 물길이 트인 것처럼 되살아났다.

그러나 반년 동안, 나는 그것을 일부러 잊어버리고 있지도 않은 영의 환상을 만들어내서 얘기하고, 데이트하고, 껴안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병신새끼…… 뭐가 있는 그대로야. 뭐가 논리고 이성이야! 허공에다 혼잣말을 중얼중얼, 반년이나 그러고 다녔으면서!”

눈물을 섞어 비명처럼 소리쳤다. 견딜 수가 없었다. 영이 없다. 이 세상에 그 아이가 없다. 나 혼자 살아남았다. 어째서. , 이런……!

왜 기억나게 만든 거야!”

바닥에서 튕기듯 일어났다. 무릎이 웃는 것처럼 바르르 떨렸다. 말없이 서있는 주월의 멱살을 붙잡았다.

아아…… 이럴 순 없어. 이래선 안 된단 말이야. 말도 안 돼! 안 돼! !”

목이 쉴 정도로 소리를 질렀다. 범벅이 된 눈물과 땀이 안경 코를 타고 흘렀다. 주월의 멱살을 흔들다가 마지막에는 지쳐서 매달렸다. 그래도 주월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기억나게 만든 거야. 네가 뭔데. 네가 뭐라고…….”

아니야. 넌 아직 기억이 돌아오지 않았어.”

주월이 목소리는, 굳건하게 서있는 그녀의 발 디딤만큼이나 단호했다.

? 반년이나 계속 환상을 봐?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미친놈들이나 그러지. 넌 꼬맹이지만 미치진 않았어.”

그녀의 말투는 비웃는 것 같았지만 표정은 담담했다.

나는 그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내 왼쪽 눈은 영에게서 각막이식을 받았다. 그러니 영이 환상이 아니라면 말이 안 되는데.

제대로 기억이 돌아오지 않아서 그러는 거야.”

딱딱하게 나를 내려다보던 주월의 얼굴에, 안개처럼 흐릿한 웃음이 떠올랐다. 주월의 손이 내 손목을 잡았다.

그러니까 계속 하는 얘기잖아. 읽으라고.”

주월은 내 왼손을 눈앞으로 들어올렸다. 그 손에는 어느새 수첩이 쥐어져 있었다.

…… 읽으라는 거야. 아무 것도 적은 게 없는데.”

아냐. 적었어. 원래부터 적혀 있었어.”

주월은 나달나달한 수첩의 앞부분, 금속 서류집게로 찝힌 부분을 가리켰다.

집게를 빼고 읽어봐.”

수첩의 앞부분은 종이가 닳아서 보들보들했다. 집게를 떼어내자 바람에 날리듯 저절로 첫 번째 페이지가 펼쳐졌다.

조명도 거의 없는 한밤중의 뚝방길인데도, 어째선지 펜으로 쓴 얇은 글씨의 문장들을 또렷하게 읽을 수 있었다.

[오늘 믿기지 않는 일이 있었다. 영을 만났다. 영이 전학을 간 후로 처음이다]

이건 영과 재회했던 날의 얘기인 것 같다. 나와 영은 이웃이자 소꿉친구로 자랐다. 하지만 우리가 초등학교 6학년에 막 올라갔을 때 영이 전학을 가서 헤어지고 말았다.

[거의 6년 만에 만난 거지만 나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런데 영은 놀라며 어떻게 알아봤느냐고 되물었다.

당연히 알아보지. 옛날이랑 하나도 안 변했는데?”라고 내가 말하자, 영은 어이없다는 듯이 얼굴을 팍 찡그렸다.

미쳤구나?”]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시선을 들었다. 그러나 주월은 뚝방길의 어둠 속에 서서 그저 담담하게 나를 보고 있었다.

수첩의 페이지를 넘겼다.

[이메일 아이디의 뜻이 뭐냐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영은 머뭇거리다가, ‘있으나마나한, 갈 곳 없는 인간이라고 말했다. 그 의미를 짐작할 수 있었기에 더 이상 묻지 않았지만, 영은 짐을 털어버리려는 것처럼 스스로 설명했다.

우리 아빠엄마, 두 양반 다 진작에 바람이 나 있었어. 6학년 때 전학가기 전부터도…… ? 그때 너한테도 말했었던가? , 아무튼. 누가 먼전진 몰라도, 나 중학교 입학할 때쯤엔 우리 가족은 벌써 다 박살나 있었어. 근데, 박살났으면서 갈라서질 않더라고. 아빠가 경정에서 총경으로 진급하냐 마냐 하던 때였거든. 제엔장. 경찰간부는 그런 걸로 진급에 영향을 끼칠 수 있으니까 그냥 사는 거야. 엄마도 그 편이 이익이니까 이혼 안 하는 거고. 정말 돌아버리겠더라. 차라리 마주보며 고함을 지르는 게 낫지. 같은 집에서 살면서 서로를 없는 사람 취급하는 거야. 어떤 여자랑 놀아났는지, 어떤 남자랑 뭘 했는지, 관심도 없어. 경멸할 가치도 못 느낀데. 날 낳았다는 사람들이. . 그딴 집구석에 무슨 정신으로 앉아 있어? 당연히 나도 집밖으로 나돌았지. 변명 같지만, , 그러다 보니까 어느새 나도 이렇게 됐더라고.”]

2미터에 가까운 체구에 일이 바쁘다며 얼굴도 거의 안 비추는 아버지. 마찬가질 늘씬한 키에 화려한 미인인 어머니.

나는 그런 상황을 영이 전학가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영은 기억 못하는 모양이지만, 당시 영은 내 앞에서 자주 울었고 그럴 때마다 나는 그 작은 소녀를 달래느라 발을 동동거렸다. 그리고 그 기억 때문에 영은 내 머릿속에 더욱 강하게 각인되었다. 즐거웠던 추억도 있었지만, 유치할 정도로 밝고 천진했던 소녀가 그렇게 슬픈 모습인 채로 떠나게 했다는 부채감도 마음에 남아있었다.

그러나 재회한 영과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런 구실은 사라져갔다. 그저 함께 있는 것이 즐거웠다.

[밤의 서울 근교를 영의 스쿠터 뒷자리에 탄 채로 달렸다.

귀가 먹먹할 정도로 조용했다. 엔진소리만이 귓가에 웅웅거렸고, 밤바람이 묘하게 상쾌했다. 떠들썩한 축제에서 나와 영 두 사람만 살짝 빠져나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영의 얇은 허리를 두 손으로 감았고, 영은 이따금 어깨 너머로 나를 내려다보며 나보고 왜 그렇게 키가 작냐고 투덜거렸다.

나도 작지만 너도 너무 커.”

내 말이. 진짜, 이래갖곤 중학생한테 수작부리는 여자로 보일까봐 모텔방도 못 잡겠네.”

영이 잡겠까지 말했을 때 나는 히꾹, 하고 딸꾹질을 터트렸다. 히꾹. 히꾹. 뭘 먹던 중이 아니라 다행이다. 히꾹. 틀림없이 분수처럼 뿜었을 거야. 히꾹.

내가 딸꾹질을 다섯 번 하는 동안에 영은 어떤 말을 하지도, 뒤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어두웠다. 영의 볼이 빨개져 있어도 알아볼 수는 없겠지만, 내 볼은 확실히 화끈거렸다. 영과 부딪친 밤바람의 파편들이 그녀의 어깨를 타고 내게로 흘러들었다. 영의 가죽자켓과 머리카락의 젤 냄새. 영의 벨트버클 아래로 느껴지는 허리는 놀랄 만큼 가늘고 부드럽게 느껴졌다.

열 번이나 열세 번, 혹은 삼백 번 쯤 딸꾹질을 한 후에야 나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바보야, 이 싸한 분위기 어떡할 거야? (히꾹!) ‘헛소리해서 죄송합니다.’라고 사과하면 못들은 걸로 쳐줄게.”

내가 투덜거리듯 말하자 그제야 영도 조금 긴장이 풀린 얼굴로 돌아보며 말했다.

준이 너. 지인――짜 멋없다. 확 그냥 길에다 던져버리고 싶어.”

, , 누가 할 소린데, 라고 받아치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할 수 없었다.

스쿠터는 서울로 향하는 큰길과 합쳐지는 곳을 달리고 있었고, 영은 하필 그때 뒤를 돌아봤다.

플라스틱 중앙분리대인지, 과속방지턱인지, 혹은 도로에 떨어져있던 무엇인지와 부딪쳤다. 스쿠터가 요동쳤고, 나와 영은 튕겨져 나가 아스팔트 위를 데굴데굴 굴렀다.

이마에서 피를 흘리며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새 화물트럭의 헤드라이트가 삼킬 듯이 거대하게……]

그때…… 넌 정말로 날 집어던졌지.”

입술이 떨렸다. 뚝방길 위에 담담하게 서있던 주월은. 아니, 영은.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으으음―― 근데 방향이 안 좋았지. 뭐 어차피 차가 쌩쌩 달리는 길 한가운데긴 했지만 말이야. 던지고 보니까 딱 다른 차가 달려오더라고. 그 뒤에 어떻게 됐는진 못 봤지만, 아마 내가 널 달리는 차에다 메다 꽂은 꼴이었을 걸?”

팔짱을 끼고 눈을 감은 영의 눈꺼풀 위에서 붉은 눈동자가 겸연쩍게 나를 바라본다. 나는 쥐어짜듯 손으로 입을 가렸다.

반년 전의 사고. 그때 영은, 금발머리와 180센티가 넘는 키를 가진 소녀는, 쓰러져 있던 내 뒷덜미를 잡아서 나를 단숨에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그대로 빙그르 돌며 나를 인형처럼 집어던졌다.

내가 그녀의 손을 떠난 순간, 화물차의 거대한 헤드라이트가 그녀를 삼켰다.

그럼 지금까지의 작은 영은……

눈앞에 서있는 키가 큰 영은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준의 힘으로 구해내려면그렇게 작아야 되기 때문인가? 아니면 그쪽이 더 네 이상이었든지. ‘11살 때의 영.”

눈앞에서 그렇게 말하는 19살의 영도, 11살 때의 영도,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기억 속에만 남아있다.

에이, 아무렴 어때? 어차피 다 꿈인데.”

. 기억이 만들어내는 환상. 19살의 영이 11살 때 모습을 하고 있어도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고, 필요 없는 부분은 멋대로 생략하기도 하는 편리한 세계.

그럼 이건…… 지금의 너는……

자기 스스로 꿈이라고 말한 영은 세 개의 눈으로 나를 답답하다는 듯이 쏘아보았다.

몰라. 아무렴 어떠냐니까? 내가 유령인지, 환상인지, 이제 그만 꿈에서 깨어나라고 말하려는 네 무의식인지. 내 입으로 내가 뭐다, 라고 하면 넌 믿을 수 있어? 증거가 있어?”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영은 말없이 서있는 내게로 불쑥 다가왔다.

증거가 있다면 이것뿐이지.”

나보다 큰 키로, 나보다 긴 두 팔로, 영이 내 몸을 감았다. 이마에 그녀의 턱이 닿았다. 코끝에 그녀의 목과 가슴팍이 닿았다. 입을 맞췄던 적도, 이렇게 정면에서 껴안았던 적도, 실제로는 없다. 영은 크고 가늘고 부드럽고, 따뜻했다.

그녀와 나의 틈사이로 흘러든 12월 밤의 찬 공기가 서로의 체온을 더 선명하게 했다.

나는 죽었어. 너도 그걸 알고 있어.”

생경한,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속삭이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놀랍도록 그녀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고 너는 나를 무시할 수 있어? 지금 이 순간이 아무 의미도 없다고 말하면서 고개를 돌릴 수 있어?”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팔을 들어 영의 가는 등과 허리를 힘껏 껴안았다. 꿈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금방이라도 사라질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더 힘껏 매달렸다.

키득거리는 영의 웃음소리가 차가운 어둠속으로 흩어졌다.

그래……. 적어도 지금 이 감촉과 온기는 가짜가 아니야. 네가 느끼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나도 가짜가 아니야. 네가 날 느끼고 생각한다면, 정체가 뭐가 됐든 간에 나는 영이야.”

알았어. 알았으니까 더는 말하지 마. 상황을 정리하지 마. 제발.

영의 손이 내 뒷머리를, 목덜미를, 등과 허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영을 올려다볼 용기조차 나지 않아서 그녀의 체온 속에서 눈을 감았다. 영은 그런 내가 고개를 들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고개를 들자, 영은 웃으며 말했다.

영의 이름으로 말할게. 이젠 그만 일어나라구.”

싫어. 간신히 만났는데. 이렇게 눈앞에 있는데. 그런데 다시 네가 없는 세상으로 돌아가라니.

하지만 거부의 말은 할 수 없었다. 다시 만나기 위해 꿈을 꾸고, 세상을 만들어내기까지 했던 그녀가 하는 말이었다.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체념하는 것처럼. 다시 태어나는 것처럼.

눈을 떴다.











하얀 벽과 천장. 포도당 팩이 매달려 있는 링거 스탠드. 그리고 희미하게 소독약의 냄새가 났다. 쇠 난간이 둘러쳐진 하얀 침대 위에, 나는 누워있었다.

――! 일어났잖아!”

그리고 바로 눈앞에 털 달린 가죽자켓과 청바지를 입은, 키가 껑충한 금발머리가.

내가 기껏 눈까지 떼어서 줬는데 안 일어나서…… 내가 얼마나 어이없었는지 알아!”

그녀가 삐죽한 금발머리 아래에 있는 자신의 눈을 가리키며 고함을 질렀다.

화를 내는 것 같지만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방울방울 맺혀 있었다. 하지만 오른쪽 눈뿐. 그녀의 왼쪽 눈 위에는 멋들어진 검은 가죽 안대가 덮여 있었다.

아하하. 뭐야, 이건. 어이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어. 정말이지, 눈물이 쏙 나올 만큼 웃겼다. 눈물을 닦고 또 닦아도,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 웃어? 니가 뭘 잘했다고 웃는데!”

영은 울먹이며 환자복을 입은 내 멱살을 움켜잡았다.

하지만 멱살의 그 감촉도, 몸이 당겨지는 느낌도, 사실은 느껴지지 않았다.

앞으로도 그런 걸 느끼는 일은 영영 없겠지.

눈을 감고 눈물을 짜내자, 영의 목소리가 눈물과 함께 어딘가로 밀려나갔다.

뺨으로 눈물을 흘려보내고서.

눈을 떴다.

막 깨어나 안경을 끼지 않은 왼쪽 눈이 사방을 간 유리처럼 부옇게 비췄다. 이런 시야로는 사람의 얼굴은커녕 아무 것도 알아볼 수 없겠지. 하지만 고요한 공기가, 이 공간에는 나 말고 다른 누구도 없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영이 없는 텅 빈 병실 속으로 내 혼잣말이 사그라졌다.

그래…… 꿈처럼 편리하게 될 리가 없지.”


* * *


꿈처럼 편리하게 될 리가 없지.”

모니터 위에 내가 쓴 마지막 문장을 소리 내서 읽었다.

해피엔딩을 만들어 보려던 마지막 시도도 그렇게 수포로 돌아갔다.

미안해. 이럴 수밖에 없었어. 억지스럽게 둘은 행복했다라고 끝낼 수는 없었어. 그럴 수는…… 없는 거잖아.

하지만 그럼 어떻게 해야 좋은 걸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내가 쓴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나는 사그라지는 혼잣말처럼 키보드를 두드렸던 것뿐이니까.

다시 눈물이 북받쳐서, 키보드 위에 엎드려 엉엉 소리 내서 울었다.


* * *


꿈처럼 편리하게 될 리가 없지.”

몸을 일으켜 병실 침대 위에 앉으며 다시 한 번 말해보았다. 하지만 말을 맺자, 입가나도 모르게 웃음이 스몄다.

꿈에서 깨어나고도 다시 영의 환영을 보았다. 그러나 그녀가 꿈밖으로 한 발짝 걸어 나와 마지막으로 마중을 해준 것 같아서. 그래서 기뻤다.

나는 꿈속에서 영을 다시 만들어냈다. 그런데 꿈속의 영은 나를 현실로 돌려보냈다. 죽은 사람에게 위로나 받다니, 정말 한심해서.

영에게 도움이 되는 내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난 꿈속에서 대체 뭘 한 걸까. 영이 죽었다는 것도 잊은 채, 영의 모습도 잊은 채, 끝까지 한심하기만 했다. 아니, 애초에,

남녀역할도 바뀌었잖아?”

누나한테 안겨있는 것 같은 그 꿈의 마지막은 대체 뭐였담. 그러고 보니 재회한 영과 사귀는 동안에도 스쿠터는 항상 영이 몰았고, 마주볼 때도 항상 내가 올려다봐야 했다. 그러니 스킨십을 하려고 해도 영의 말대로 그림이 안 나와서 의욕이 안 생길 게 뻔하잖아.

……그러니까 적어도 그때만이라도. 영 대신에 내가 죽는 편이, 차라리 나았을 것이다.

하아――……

정말로 그랬다면 어땠을까. 내가 죽고, 영이 살아났다면.

문득 상상해보았다. 영도 나와 같았을까? 날 기억하고, 다시 만들어 냈을까?

그래. 어쩌면 영도 나처럼 꿈을 꿨을지도 모른다. 내가 살아있는 가상의 이야기를 만들어냈을지도 모른다. 영은 그렇게 키도 크면서 은근하게 엉뚱한 면이 있었으니까. 눈꺼풀에 문신을 하질 않나(대체 뭔 생각으로 그딴 짓을 한 거야?!) 이메일 아이디도 겉멋이나 들어서는(대놓고 말해주려다 말았었다고).

그러니 나대신 살아남은 영은, 그래서 내 각막을 이식받은 영은, 어쩌면 검은 가죽 안대를 끼고 키보드를 두드리며 내가 살아있는 이야기를 컴퓨터에 써내려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이야기가 흘러 내가 꿈에서 깨어나는 대목까지 왔는데, 결말에서 억지스러운 해피엔딩은 만들 수가 없어서 어쩔 줄 몰라 하다가 키보드에 엎드려서 엉엉 울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상상하고 보니까 꽤 그럴싸하잖아?

그래. 그러니까, 이왕 더 상상해 보면.


* * *


어떻게 생각해?”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크리스마스이브의 밤. 경찰서장인 아버지에게서 반 협박으로 갈취하는 돈과 되는 대로 하는 아르바이트로 생활을 꾸려나가고 있는 좁고 살풍경한 자취방. 노트북 컴퓨터를 올려놓은 앉은뱅이책상. 그 옆에.

환자복을 입고 반 선글라스를 낀 소년이 서있었다.

숨이 턱 막혔다. 나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꼬장꼬장하고 왠지 남을 깔보는 것 같은 눈빛. 하지만 힘들거나 괴로워하는 사람을 보면 자기 일처럼 안절부절 못하는 성격이라는 걸, 나는 알고 있다. 나와 달리 공부 잘하는 좋은 머리로 곧잘 베베꼬인 말장난을 하고, 앳된 얼굴에 키는 중학생처럼 작지만, 나이는 나와 같은 19.

어떻게 생각해? 이런 구조 말이야. 혼자 살아남은 류영은 자기 대신 하준이 살아남은 이야기를 썼다. 그 이야기 속의 준은 꿈을 꾸고 깨어나서, 자기 대신 영이 살아남은 세계를 상상해 보았다. 그러자 그 상상 속의 영은 슬퍼하다가 자기 대신 준이 살아남은 이야기를 썼다. 그런데 그 이야기 속의 준은 자기 대신 영이 살아남은 것을 상상했다. 그래서 그 상상 속의 영은 자기 대신 준이 살아남은 이야기를 썼다. 그랬더니 그 이야기 속의 준은 자기 대신 영이 살아남은 것을 상상했다. 그러고 나니까 그 상상 속의 영은………………. . 안 말릴 거야? 더 이상 갖다 붙일 접속사도 없단 말이야.”

3류 영화 같은. 바보 같은. 문장도 안 되는.

어떻…… 아하. 어떻게 된 거냐고? 네가 했던 말 그대로 되돌려주지. ‘아무렴 어때?’”

목이 매여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준은 허리를 굽혀, 앉은뱅이책상 앞에 앉아있는 내 얼굴을 두 팔로 끌어안았다. 감촉도, 체온도, 이겼다! 역시 이래야지.”뭔가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목소리도, 분명히 그였다. 준이 말했다.

나는 네가 살아남은 세계를 상상했어. 그러니까 넌 그저 내 상상 속의 존재인지도 몰라. 하지만 어쩌면 내가 네 이야기 속의 존재인지도 모르지. 혹은 네가, 혹은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지도 모르고. 하지만 아무렴 어때? 그런 건 지금 아무래도 상관없잖아.”

나지막하게 말하는 그의 호흡이 볼을 간질였다. 달리는 맥박이, 점점 뜨거워지는 얼굴과 목덜미의 열기가, 맞닿아있는 그와 섞여 합쳐졌다. 앉은 채 두 팔로 그의 허리를 힘껏 끌어안자 체구가 작은 그가 조금 휘청거렸다. 이런 것까지도. 정말로 내가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

나를 만들어낼 정도로 날 그리워해 줬구나.”

…… 네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가 조금 뒤로 물러나며 오른손을 내 얼굴로 가져왔다. 반 선글라스로 한쪽 눈을 가린 그가, 가죽 안대로 한쪽 눈을 가린 내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주었다.

난 더 이상 괴롭지 않아. 꿈속에서 너한테 위로를 받았으니까. 그러니까 나도, 너한테 괜찮다는 말을 해주고 싶었어.”

그가 말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말했다.

아아, 다행이다.”

준이 말했다.

아아, 다행이다.”

내가 말했다.

내가 죽고, 네가 살아나서.”

준이 말했다.

내가 죽고, 네가 살아나서.”

우리는 서로를 마주보며 웃었다. 바보처럼. 그저 너무나 기뻤다.

우리…… 이젠 다시는 못 만나겠지?”

글쎄? 모르지. 한 번 눈을 떠 볼래?”

그것이 내가 들을 수 있는 그의 마지막 목소리일 거라는 것을 직감했다. 하지만 동시에, 마지막이 아니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슬픔과 두려움이 걷혔다. 나는 웃을 수 있다. 네가 없는 세상에도 너는 여전히 곁에 있을 테니까.

나는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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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려한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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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oud.9
cloud.9 10.12.13. 02:45
해한가 3권 비스무리한 몽중몽 구성인가요? 좀 어렵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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