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이정표

기다리기 - moke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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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려한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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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혀에 지나치게 달콤한 맛이 퍼졌다.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메론이라는 과일을 먹어본 적이 없다. 그러니까 껍데기에 메론 모양이 그려져 있지 않았더라면, 이걸 메론맛 아이스크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파파야나 자몽 같은 과일도 먹은 기억이 없으니, 누군가가 "먹어봐라, 자몽맛이다?"라고 하면서 이걸 줬다면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자몽맛 아이스크림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뭐, 메론맛이라고 써져 있으니까 그런가보다 해야지.
 네모난 막대 아이스크림을 혀로 할짝할짝 핥으면서 나는 그 맛을 다시 한 번 음미했다.
 역시 너무 달다. 전에 먹었을 때보다도 심해진 것 같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달지 않은 커피맛으로 고르는 건데. 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아이스크림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아이스크림은 배탈 나니까 아무리 땡겨도 하루 한 번이 한계. 참는 수밖에 없다. 다음에 메론맛 안 고르면 되지 뭐.
 "아~ 망했다!"
 불평하는 사이에 아이스크림이 입에 닿았던 부분부터 녹아들어가고 있었다. 끈끈한 초록색 국물이 뚝뚝 떨어져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기 시작한다. 나는 얼른 몸이랑 먼 쪽으로 팔을 뻗고 국물이 흐르는 부분을 이빨로 뜯어냈다.
 오늘의 실수에 추가. 녹기 전에 냉큼 깨물어 먹었어야 했는데 늑장피우다 손을 더럽히고 말았다.
 오늘 따라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냐.
 아무에게나 따져 묻고 싶은 기분이었다.
 혀에서 전해지는 달달한 맛이랑 이빨에서 느껴지는 차가움에 이중으로 얼굴을 찌그러뜨리면서, 나는 허겁지겁 아이스크림 처리작업에 들어갔다.
 반쯤 먹었을 때, 옆에서 낮게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제야 일어나냐."
 소리의 진원지를 내려다 보며 나는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달라 그래도 안 준다."
 내 오른쪽, 벤치 밑에는 땅딸막한 개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세 살쯤 된 녀석이다. 아비가 어떤 개인지도 알 수 없는, 좋게 말해 잡종견, 나쁘게 말해 똥개. 둘 다 나쁜 말인가? 아무튼 유서 깊은 혈통과는 어마어마하게 거리가 먼 놈이다. 성별은 수컷, 이름은 누렁이. 잡식성이라 주는 대로 다 먹는다. 밥 먹고 퍼질러 자는 게 하루일과고 취미다.
 녀석에 대해 이렇게 잘 아는 이유는 뭐, 간단하다. 내가 기르는 개니까.
 참고로 목에 걸려 있는 '누렁이'라는 이름표도 내가 만든 거다.
 "안 준다니까!"
 아까까지만 해도 잠만 잘 자더만, 달콤한 냄새를 맡고 잠기운이 싹 달아난 모양이다. 앞다리를 무릎에 올리고 헐떡거리는 누렁이를 오른손으로 밀어젖히면서, 나는 왼손에 든 막대 아이스크림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달달함과 차가움이 입안으로 꽉꽉 들어차 조금 괴로웠지만 일단은 참기로 했다. 아이스크림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다. 개한테 주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지.
 누렁이는 내 입으로 들어간 막대를 원망스러운 듯 쳐다보더니, 앞다리를 내리고 벤치 밑에 도로 몸을 웅크렸다.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린 폼이 조금 토라진 것처럼 보였다.
 "츠~ 츠~."
 얼얼해진 입을 바보처럼 벌렸다 닫았다 하며 나는 입에 물었던 막대를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그리고 종종걸음으로 10m쯤 앞에 있는 수도까지 달려가, 초록색으로 범벅이 된 손과 팔을 흐르는 물에 씻었다. 어느 정도 깨끗해지자 이번에는 손바닥으로 즉석 그릇을 만들어 물을 담고, 그것으로 입을 헹구었다. 적당히 미지근한 물이 기분 좋았다. 팔도 입안도 한결 깨끗해진 느낌이다.
 자리로 돌아와 보니 누렁이가 조금 전 버린 아이스크림 막대에다 코를 대고 킁킁거리고 있었다. 혀로 몇 번 막대를 핥아 맛을 보던 누렁이는 내가 다가가자 흥이 식은 듯 고개를 돌리고 원위치로 돌아가 버렸다. 나는 작게 한숨을 쉬고, 벤치에 털썩 주저앉아 오른손으로 그의 목덜미를 쓱쓱 쓰다듬어 주었다.
 "뭔놈의 개가 그렇게 먹을 걸 밝히냐?"
 그것도 아이스크림 같은 걸. 아무리 잡식성이라지만 그렇게 차갑고 자극적인 음식을 먹었다가 탈이라도 나면, 골치 아파지는 건 나다. 주인의 깊은 뜻을 모른 채 아이스크림 하나 안 줬다고 삐지다니 개는 역시 개군. …내가 좋아하는 걸 개랑 나눠먹기 싫었다는 이유도 물론 있지만.
 "이따 더 맛있는 거 사줄 테니까 기분 풀어라."
 누렁이는 눈에 띄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다시 한 번 한숨을 쉬고 누렁이의 등을 살짝 때렸다.
 그리고 그 손을 거두어들여, 목걸이 식으로 걸어두었던 악어지갑을 열고 내용물을 확인해봤다.
 천 원짜리 지폐가 다섯 장. 동전이 여러 개.
 한숨이 절로 나왔다.
 충동적으로 아이스크림을 사버린 건 역시 실수였을지도 모른다.
 이 정도 돈을 갖고, 나와 누렁이는 앞으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어른들을 상대할 때하곤 묘하게 태도가 다른 알바생 누나한테 내심 불쾌해 하면서도, 나는 계산을 마치고 편의점에서 나왔다. 밖에 대기시켜두었던 누렁이가 나를 보자마자 일어나서 짧은 꼬리를 흔들어 주었다. 나는 누렁이의 목덜미를 가볍게 문질러주고 왼손에는 목줄을, 오른손에는 검은색 비닐봉지를 든 채 발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해가 기울어 우리 둘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누렁이도 나도, 건물도 담도, 하늘도 콘크리트 바닥도, 모든 것이 오렌지색으로 물들어 있다. 시계가 없으니 정확하지는 않지만 여름이라는 걸 감안하면 못해도 일곱 시는 넘었을 것이다.
 평소 같으면 진작에 돌아가고도 남았을 시간인데.
 새벽부터 이상한 꿈 때문에 가위 눌리지를 않나, 부딪히고 사과도 제대로 안 한다고-먼저 부딪힌 건 그쪽이면서- 혼나지를 않나, 잘못해서 넘어지는 바람에 기껏 산 아침밥이 흙투성이가 되지를 않나, 기분 풀려고 오랜만에 사 먹어본 아이스크림은 별로 맛도 없는 데다 손까지 더럽히지를 않나…… 하여간 오늘은 안 좋은 일 투성이였다. 울적해서 그런지 시간감각마저 미쳤었나 보다. 누렁이가 배고프다고 채근하지 않았더라면 정말로 어두컴컴해질 때까지 공원에 앉아 시간만 축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번이 몇 번째인지 기억조차 안 나는 한숨을 쉬었다. 비닐봉지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누렁이를 목줄로 끌어 제지하며 골목길을 걸었다.
 웬만한 일이 없으면 식사는 꼭 집에 가서 할 것. 다른 집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난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배웠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것을 충실히 지켜오고 있다.
 집은 공원을 나와 쭉 직진하다가 편의점을 끼고 오른쪽으로 돌아서, 샛길을 쭉 걷다 보면 나온다. 위치를 확인하고 이제 다 왔다는 것을 누렁이에게 알리기 위해 나는 별 생각 없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순간, 오싹한 느낌이 들어 멈춰 섰다.
 누렁이가 이상하다는 듯 내 쪽을 보고 낑낑 울었다. 뭐 하고 있어, 빨리 가자. 그렇게 재촉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내 눈동자는 내가 서 있는 위치에서 왼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거기에 서 있는 것은 빌딩이라 불러주기도 민망할 만큼 허름한 3층짜리 건물이었다. 본래 오피스텔로 쓰일 예정이었는데, 건물주가 죽기라도 했는지 어중간한 단계에서 공사가 중단되었다는 모양이다. 선뜻 건물을 이어받겠다는 사람도 없어 결국 20여 년간 방치된 모양이라는 이야기를 언젠가 엄마한테서 들은 적이 있었다.
 또래 아이들의 비밀기지로조차 쓰이지 못할 정도로 볼품없는 곳이니 당연한 일이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엄마가 맞장구를 치며 웃었던 기억도 난다. 자기도 학생 때 어찌어찌해서 가본 적이 있는데, 그때도 저 건물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볼품없었다고.
 아무튼 건물 자체는 꼬꼬마였을 때부터 쭉 보아오던 거니까 별달리 눈여겨볼 것도 없었다. 내가 주목했던 건 그 건물 옥상에 걸터앉아 있는 사람이었다.
 저녁해를 등지고 앉아 있어서 얼굴까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 사람은 무릎부터 밑부분을 공중에 늘어뜨린 채 교대로 올렸다 내렸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한 손을 난간 위에 걸친 것 말고는 일체 생명줄이 없는, 위험한 자세였다. 아무리 3층짜리라곤 해도 떨어져서 무사할 거라 생각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죽지도 않겠지만.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나와 옥상 위의 사람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의 등 뒤에서 날개가 돋아나듯 머리카락이 펼쳐졌다. 혹시 잘못해서 떨어지지는 않을까 하고 조마조마해 했지만, 그 사람은 바람에 흩날리는 긴 머리카락을 귀찮다는 듯 누르고 고개를 비스듬하게 숙였을 뿐이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 사람의 무릎이라 여겨지는 부분에서 펑퍼짐한 무언가가 바람의 움직임에 따라 봉긋 솟아올랐다.
 "…음…."
 나는 희미하게 신음했다. 그렇구나. 옥상 위에 앉은 사람은 머리카락이 길고 치마를 입고 있는 모양이다. 남자라고 해서 머리 기르고 치마 입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십중팔구는 여자일 것이다.
 멍하니 서 있는 나를 보고 누렁이가 책망하듯 큰 소리로 "멍!" 하고 울었다.
 그 소리에, 옥상 위의 여자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머리카락을 누른 채 전광석화처럼 다른 한쪽 손을 뻗어 치마 위에 얹는 모습을, 노을로 다소 어두워진 시야 속에서도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녀는 한동안 그 자세로 경직해 있더니,
 "뭘 봐!"
 조금 큰 소리로 으름장을 놓았다. 여자 치고는 많이 허스키한 목소리였다.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이럴 때는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려 달아나거나 "미안합니다!" 라고 외친 후 달아나거나, 하여간 재빨리 여자 앞에서 꺼져주는 것이 속 편하다. 평소때의 나였다면 잠깐도 망설이지 않고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 '이대로 가버린다'는 선택지는 마음속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묘하게 사람을 진정시키는 힘이 깃들어 있는, 낮고 털털한 목소리. 좀더 들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대로 지나치면 틀림없이 후회할 것 같다. 무엇이든 좋으니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충동을 느꼈다.
 역시 오늘의 나는 이상한 것 같다. 나는 두 손을 모아 간이 확성기를 만들고 그녀를 향해 말했다.
 "미안해요! 일부러 본 건 아니었어요! 근데 어차피 여기선 잘 보이지도 않아요!"
 "뭐야."
 그녀는 멀리서도 알 수 있을 만큼 어깨 힘을 뺐다.
 "애잖아."
 저리 가라는 듯 쉬쉬 손을 흔드는 모습에 발끈할 뻔했지만, 꾹 참고 말을 계속했다.
 "저기, 그쪽으로 올라가도 돼요?"
 "뭣 땜에."
 "정식으로 사과하고 싶은데요!"
 "뭘."
 "그… 치마 본 거."
 나는 말끝을 우물거렸다. 끌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릴 듯한 어조로 그녀는 "됐네요." 라고 말했다.
 "애한테 보여준다고 뭐 닳는 것도 아니고."
 실제로 그녀는 자기 말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치마에서 손을 떼고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아까만큼 바람이 센 건 아니니까, 어차피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겠지만 말이다. 그 말을 들으니 아무리 애라도 여자애들 아이스께끼를 할 정도의 성적 호기심은 있다는 것을 주장하고 싶어졌지만, 그녀를 상대로 얘기해봤자 의미가 없을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대신 나는 아까 하던 이야기를 마저 했다.
 "사과하고 싶다니까요! 남한테 사과할 때는 그 사람하고 가까이에서 마주보고 하라 그랬어요!"
 아쉽게도 그런 교육을 받은 기억은 없다. 유치원이나 1학년 때쯤엔 배웠을 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그냥 그녀의 얼굴을 가까운 데서 보기 위해 되는 대로 지껄인 말이었다.
 그녀는 조금 생각하는 듯 하더니 어깨를 들썩였다. 아마도 웃은 듯했다.
 "나이도 어린 게."
 어이없어서 나온 웃음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손짓했다.
 "당분간 여기 있을 거니까 올라오고 싶으면 올라와!"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나는 부루퉁해진 얼굴로 올려다보는 누렁이를 가슴에 안아들었다. 그리고 제대로 잠기지도 않은 문을 열어 3층 건물로 들어갔다.
 어둡고 먼지가 자욱한 계단을 총총 올라가 옥상으로 향하는 문을 열어젖혔다. 그때 좀전에 느꼈던 오싹함이 등줄기를 타고 머리까지 전해져서 나는 잠시 비틀거렸다.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등을 돌리고 있던 그녀가 상반신을 반쯤 틀어 이쪽으로 눈길을 주었다. 불그스름함을 더해가는 노을에 곱게 채색되어 있는 그녀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면서, 나는 숨을 삼켰다.
 곱슬끼가 있는 기다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나를 바라보는 그 모습은-노을과 바람의 효과도 있겠지만- 그런대로,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젊고 예뻤다.
 눈썹은 나보다 얇고 눈초리는 나만큼 쳐져 있다. 손이 닿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서자 그녀의 오른쪽 눈 밑에 작고 귀여운 점 하나가 나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나는 바보처럼 입을 벌리고 눈을 둥그렇게 뜬 채 그녀를 관찰했다.
 가장 의외였던 것은 그녀가 곳곳에 체크무늬가 들어간 하복을 입고 있다는 점이었다.
 "교복 처음 봐?"
 웃음기를 머금은 그녀의 말에 나는 황급히 도리질했다.
 "음… 어… 누나, 고등학생이야?"
 "그러는 너는 초딩이냐?"
 나는 또다시 발끈할 뻔했지만 어른스러운 평정심을 발휘하여 억지로 감정을 추슬렀다.
 "이제 4학년."
 "좋을 때다."
 "누나… 는 고등학생이야?"
 "이제 고3."
 "이름은?"
 "…알아서 뭐하게."
 다짜고짜 이름을 물어본 건 너무 성급했던 것 같다. 여기까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던 그녀가, 갑자기 제정신으로 돌아온 듯 목소리 톤을 높였다.
 "근데 너 갑자기 반말이다?"
 "아, 미안… 요."
 그녀는 풀이 죽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몸을 빙글 돌려서 다리를 옥상 바닥에 내려놓고, 내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사과하러 온 거 아니었어?"
 사과만 받으면 쫓아내겠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안고 있던 누렁이를 내려놓고, 앞에 앉은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요. 일부러 볼 생각은 없었어요."
 "……아니……."
 갑자기 그녀의 표정이 멋쩍어졌다. 정말로 내가 고개 숙이고 사과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었나 보다.
 "나도 기분 안 좋은 거 괜히 화풀이했다 싶기도 하고."
 이때다 싶어 나는 말꼬리를 잡고 늘어졌다.
 "왜 기분 안 좋았는데요?"
 "그냥 이것저것…."
 반쯤 예상했던 대로 그녀는 애매모호한 말로 자기 일을 얼버무리려 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공략해 보기로 했다.
 "근데 누난 고3인데 왜 이런 데 있어요?"
 "…어…."
 "방학이라?"
 "고3한테 방학이 어딨냐."
 "그럼 왜요?"
 왜 느닷없이 심문을 하고 난리야. 그렇게 화낼 것도 각오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예상과 달리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면서 대답했다.
 "학교 간다고 하고 도망쳐서 계속 여기 있었으니까."
 "우와."
 "…네가 그렇게 보니까 어째 무지 열 받는다." 
 "아뇨… 말은 들었는데 진짜 스트레스 심한가 봐요."
 "안 겪어봤으면 말을 말지?"
 "방학 때까지 늦게 공부해야 돼요?"
 "거의 그렇다고 봐야지 않나. 얼마 안 남았잖아."
 그녀는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내가 뭐라 하기 전에 재빨리 말을 돌렸다.
 "넌 방학이야?"
 "네."
 "좋을 때다."
 그녀의 눈이 아득해졌다. 거북해진 나는 허리를 숙여 시선을 피했다. 누렁이가 봉지 주위를 왔다갔다 거리며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나는 한손으로는 누렁이를 달래며, 다른 손으로 그녀를 향해 봉지를 쑥 내밀었다.
 "나눠 먹을래요?"
 "이게 뭔데? 간식이야?"
 "저녁밥이요."
 "…이게?"
 얼결에 봉지를 받아들고 안을 열어본 그녀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거기에는 천 원짜리 참치김밥 한 줄이랑 오백 원짜리 생수 하나, 그리고 싸구려 소시지 몇 개가 들어 있었다.
 "소시지는 누렁이 줄 거니까 안 되고, 김밥은 줄 수 있어요."
 나는 진지하게 대꾸하며 누렁이 쪽을 가리켰다. 저 개는 김밥을 더 먹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라고 입속으로 중얼거리면서 그녀가 다시 나에게 물었다.
 "이거 갖고 저녁 때워? 집에 아무도 없어?"
 "지금은요."
 소시지의 비닐 껍질을 벗겨 누렁이의 입에 물려주었다. 어지간히 배가 고팠던지 누렁이는 순식간에 그것을 식도로 밀어넣어 버렸다.
 "그래서 당분간은 밖에 나가서 때워야 돼요."
 가능한 한 아무렇지 않게 설명한 다음, 나는 누렁이를 보고 있던 고개를 위로 들었다.
 "낮에 간식 먹어서 밥 쪼금 먹어도 되는데… 괜찮으면 줄까요?"
 "너 먹어."
 "계속 여기 있었다면서요? 배 안 고파요?"
 "당연히 고프지."
 그녀는 작게 웃었다.
 "저녁까지 먹을 만한 건 챙겨왔어."
 그러면서 그녀는 허리를 숙이고 뭔가를 들어올렸다. 지금까지 그녀한테 정신이 팔려 알아채지 못했었는데, 발치에 초록색 책가방을 놓고 있었던 것 같다. 자크를 열고 뒤적거리던 그녀는 가방 밑바닥에서 귀여운 모양이 그려진 도시락 주머니를 꺼냈다.
 "지금 먹을 거지? 고기반찬도 있는데 좀 줄까?"
 "…난 참치김밥이 더 좋아요."
 "배고프면 말해."
 그녀와 나는 조금 거리를 두고 옥상 바닥에 앉아 각자 먹을 것을 집어 들었다. 거의 동시에 그녀는 도시락 뚜껑을 열어 하얀 쌀밥을 입에 물고, 나는 호일에 싸인 김밥을 꺼내 오물거렸다.
 우리는 그렇게 얼떨결에 저녁식사를 시작했다. 말은 거의 하지 않았다. 우리 옆에서는 누렁이가 기분 좋게 꼬리를 흔들면서 세 개째의 소시지를 먹어치우고 있었다.
 "여기 김밥 맛있다."
 내 김밥을 하나 집어먹고 우물거리던 그녀가 불쑥 혼잣말처럼 말했다. 나는 나무젓가락을 뻗어 그녀의 도시락에 있는 김치반찬을 집어먹으려다 멈칫했다.
 "이 근처에 안 살아요?"
 "좀 멀어."
 "…혹시 xx동?"
 그녀가 기분 나쁘다는 듯이 나를 보았다.
 "어떻게 알아?"
 "감이요."
 "학교랑도 집이랑도 먼데……."
 "감이요. 찍었는데 맞아서 나도 놀랐어요."
 여전히 의심스러워하는 그녀를 무시하고 나는 생수를 몇 모금 들이켰다.
 "이 동네는 이 참치김밥이 젤로 맛있어요. 그 다음이 김치참치찌개."
 "그냥 네가 참치 좋아해서 그런 거 아냐?"
 "그런가."
 "근데 저 개, 저거만 먹여도 괜찮아?"
 "누렁이요? 쟤는 다이어트 좀 해야 돼요."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지도 않고 즉석에서 답변한 순간,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이 누렁이가 "멍!" 하고 짧게 울었다. 그녀가 피식 웃었다.
 "이름이 누렁이야?"
 "내가 지은 거 아니에요, 아빠가 지었지."
 "좀 불쌍하다."
 "가족들도 말렸어요. 소용없었지만요."
 물로 축축해진 입가를 적당히 훔치고 빈 생수통과 음식물 쓰레기를 비닐봉지에 담았다. 그녀도 비슷한 시기에 식사를 마치고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원래 청소 같은 건 잘 안 하는 성격인 모양인지, 귀찮아 죽겠다는 오오라가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아마 고등학생이나 되어 가지고 초딩 앞에서 비매너 행동을 해선 안 된다며 마음을 고쳐먹은 듯했다.
 어쩌다 내가 얘랑 같이 저녁을 먹게 됐지. 정리가 끝나고 힐끔 보니, 그녀는 그런 회의심 섞인 중얼거림을 내뱉기라도 할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모르는 척하며, 아직도 미련을 못 버린 것처럼 그녀와 내 주변을 얼쩡거리던 누렁이를 무릎 위로 안아 올렸다.
 나와 그녀는 각각 가방과 편의점 봉지를 든 채 말없이 옥상 난간에 기대앉았다.
 주위는 어느새 어두스름해져 있었고, 오렌지색 구름이 떠 있는 하늘은 마치 물감을 떨어뜨려놓은 듯 빨갰다. 늦여름이 되어 동료가 줄어들자 소심해진 매미들의 울음소리와 이따금 지나가는 차의 경적소리를 제외하면, 나와 그녀가 있는 3층 건물의 주변에서는 어떤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누렁이는 어느 틈엔가 쌔근쌔근 잠들어 있었다.
 "이 근처는 사람이 안 다녀서 좋아."
 그녀가 나른한 어조로 불쑥 입을 열었다.
 "거의 10시간 넘게 앉아 있었는데 진짜 아무도 안 오더라. 오늘 이 동네에서 본 건 네가 처음이었어."
 "정말요?"
 목소리가 조금 뒤집어졌다.
 "몇 년 전에 공원이 생겨서 사람은 그런대로 많을 텐데."
 "어, 난 왜 한 번도 못 봤지?"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딨는데 공원이?"
 "저기쯤에."
 일어서서 손가락으로 공원이 있는 곳을 가르쳐주었다. 턱을 치켜들고 그쪽을 본 그녀는 "안 보이는데. 나 놀리는 거 아냐?"라고 낮게 중얼거리며 팔짱을 꼈다. 공원에 대한 설명을 덧붙여줄까 했지만, 그녀는 금세 흥미를 잃은 듯 난간에 등을 맡기고 턱을 뒤로 젖혔다.
 "나중에 들러보면 알겠지. 저 근처 지나서 갈 거니까. …아무튼 오늘 같으면 다음에도 또 땡땡이 치고 오고 싶다."
 나는 다시 바닥에 앉았다.
 "좀 힘들지 않을까요."
 "왜."
 "거짓말 한 게 들통나서……."
 "재수 없는 소리 하지 좀 말래."
 "미안해요. 그냥 감이었어요."
 "…너 아까부터 계속 감, 감, 그러는데,"
 그녀가 턱을 원위치로 되돌리며 따지듯이 말했다.
 "네가 무슨 무당집 아들이냐? 그런 쪽으로 재주 있어?"
 "…조금은요."
 재주 같은 게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그녀에 대해서는 왠지 다 알 수 있을 듯한 기분이 든 것도 사실이었다.
 그녀는 "그래?"라고 응수하면서 여태껏 본 것 중에 가장 짓궂은 표정을 짓고 씩 웃었다. 왼쪽 눈썹은 미묘하게 올리고 오른쪽 눈썹은 미묘하게 내린 얼굴.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누렁이의 갈기를 쥔 손에 살짝 힘을 주었다. 누렁이가 움찔 반응했지만, 눈을 뜨지는 않았다.
 "그럼 앞으로 내가 어떻게 될 거 같냐?"
 "음……."
 일부러 뜸을 들인 다음, 다음과 같은 '예언'을 속사포처럼 늘어놓았다.
 "우선 학교 핑계대고 노닥거린 게 부모님한테 들켜서 뒤지게 혼날 거 같아요. 그래서 여기로 못 오게 되고, 수능은 망치겠네요. 재수하다가 변변찮은 연하남 만나 결혼해서 이 동네 저 동네 전전할 거 같아요."
 "야."
 "미안해요."
 나는 신속하게 태도를 바꾸었다.
 "그냥 감이었어요."
 "이게 그냥 아주 사람을 놀리네."
 그녀는 진심으로 분한 듯했으나 내가 계속 용서를 빌며 저자세로 나가자 화를 누그러뜨렸다. 연장자니까 내가 참아야지. 그런 말이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아도 귓속에 들려오는 태도였다. 그녀는 짧게 한숨을 쉬고는 시선을 돌려 말없이 누렁이의 등을 가볍게 빗어주었다.
 그 후로 아까 했던 예언의 입바른 정정-누나는 이번 수능 대박 잘 볼 거 같아요. 일류대는 못 가겠지만 기대했던 거 이상의 성적은 나오겠는데요-과 몇 마디 시시껄렁한 잡답을 주고받고 나서, 그녀는 손목시계를 힐끗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슬슬 집에 가봐야겠다."
 단순히 착각이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녀의 목소리에는 옅은 아쉬움이 묻어나 있었다.
 "넌 집에 안 가냐?"
 "조금 이따가요."
 나는 누렁이를 쓰다듬으며 그녀를 올려다보고 짧게 대답했다.
 "집이 이 근처라."
 "너무 늦게 돌아다니진 마라."
 "누나도요."
 "나야 이 정도는 다반사니까."
 그녀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리고는 치마 주머니를 잠시 뒤지더니 뭔가를 꺼내 나한테 던졌다. 손바닥을 펼쳐 안을 들여다보자 오백 원짜리 동전 하나가 들어 있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새 동전이었다.
 "나도 학생이라 차비 빼곤 돈 없거든."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고 자조하듯 웃는 그녀.
 "슈퍼 가서 아이스크림이라도 사 먹어. 내일 먹어라, 배탈 나니까."
 나는 고맙다고 대답하고 잠자코 동전을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요즘 이 근처에선 오백 원으로 아이스크림 한 개조차 사먹기 힘들지만, 그런 말을 해서 일부러 그녀를 무안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오늘은 그런대로 재밌었어."
 "나도요."
 붉은 노을 속에서 개운한 어조로 작별인사를 건네는 그녀의 모습을 머릿속에 새겨두려고 노력하며, 나는 대답했다.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녀는 '예언' 이야기를 했을 때 보여주었던 특유의 표정을 다시 한 번 짓더니, 두 주먹을 치마주머니에 집어넣은 채 말했다.
 "무지 아쉽다는 얼굴인데."
 나는 그에 대해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알 수 없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히히 웃었다. 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준 뒤, 아직까지 꿈나라에 있는 누렁이의 등을 툭 치고 등을 돌렸다.
 "그럼 난 간다. 운 좋으면 또 만나자."
 조금 멍해져 있던 나는 다급해져서 누렁이를 안고 일어섰다.
 "저기!"
 "왜."
 "…아까 물었던 거, 가르쳐주실 수 없어요?"
 멈춰 서서 등 너머로 이쪽을 바라보던 그녀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숨을 한 번 고른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누나 이름이요."
 "나?"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히죽 웃었다.
 "은휘란."
 "……은… 휘란."
 "특이하지? 넌?"
 그녀는 완전히 몸을 돌리고 내 눈을 쳐다보며 되물었다. 나는 한순간 당황했지만 누렁이를 안은 손에 꼭 힘을 주고 작게 심호흡한 뒤, 이름을 말했다.
 "기억해둘게."
 그녀는 하얀 이빨을 드러내면서 처음으로 환하게 웃었다.
 이 건물 옥상에서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오싹함이 다시 한 번 전신을 타고 흘렀다. 갑자기 가슴이 턱턱 막히는 듯한 기분이 들고, 어째서인지 코끝이 시큰거렸다. 나는 얼른 고개를 숙이고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그녀의 얼굴을 계속 보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요."
 "뭔데."
 "이 동네로 돌아와 주세요."
 나는 눈을 내리깐 채 말을 이었다. 저녁해로 붉게 물든 시야 끝에 그녀의 후줄근한 운동화가 보였다.
 "…언제든지…."
 난 계속 이 동네에 있을 테니까.
 그 말은 부끄러워서 차마 입에 담지 못했다.
 더 다른 말을, 더 구체적인 말을, 더 절실한 말을,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도 깨달을 수 있을 만큼 확실한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혀가 굳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결국 나는 힘겹게 거기까지만 말하고 말을 끊을 수밖에 없었다. 그게 한계였다. 나는 누렁이를 안고 그녀의 답변을 기다렸다.
 "……알았어."
 한참 후, 그녀가 입을 열었다.
 "기회가 되면 다시 올게. 집에서 좀 멀긴 하지만."
 나는… 아마도 고맙다고 했던 것 같다.
 스스로도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아무튼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대답을 하고, 얼굴 아래쪽을 누렁이의 등에 묻고, 차갑게 식어가는 저녁공기를 온몸으로 느끼며, 나를 향해 한 손을 가볍게 흔들고는 계단으로 걸어 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눈동자로 쫓았다.
 낡은 운동화가 더러운 옥상을 헤집고 망설임 없이 나아갔다.
 하얀 손이 손잡이에 닿아, 천천히 그것을 돌렸다.
 길고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이 문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녀는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팔 안에 축 늘어져 있던 누렁이가 그제야 일어나 코를 씰룩씰룩 거렸다. 나는 누렁이의 등에서 얼굴을 떼고 그동안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그리고 그 자세 그대로 난간에 털썩 주저앉았다.
 공원이 잘 보이는 방향으로 옮겨 그녀의 모습을 계속 쫓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결국 그만두었다. 왠지 무서웠고, 장거리 달리기를 하고 난 것처럼 온몸에서 진이 빠져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쓰러질 듯 허름한 집안은 밖과 다르지 않을 정도로 어두컴컴하고 조용했다. 나는 짧게 인사를 하고 신발을 벗었다. 누렁이한테는 골판지로 만든 전용 개집이 따로 있기 때문에 집안으로 들어올 때는 항상 나 혼자였다.
 물론 지금은 이 집에 사는 사람도 나밖에 없다.
 한 달 새 버릇이 되어버린 한숨을 내뱉고 양말을 대충 벗어 아무렇게나 집어던졌다. 목에 걸고 있던 악어지갑을 내팽개치자 낡은 동전들이 짤랑짤랑 소리를 내며 밖으로 나와 바닥에 떨어졌다.
 평소 같았으면 불을 켜서 어설프게라도 주변을 정리한 다음 적당히 몸을 씻고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갔겠지만, 오늘은 도저히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나는 전엔 거실 겸 가족 전체의 침실로 쓰였지만 지금은 내 전용이 되어버린 곳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등에 벽을 기대고 엉덩이부터 주저앉았다.
 어지러워 눈을 감았다.
 그녀와의 만남, 그녀와의 대화, 그녀의 표정이 멋대로 뇌속에서 재생되기 시작했다. 노을을 배경으로 그녀의 모습 하나하나가 실제로 보고 있는 것처럼 선명히 뇌리에 떠올랐다.
 곱슬거리는 머리카락, 굵은 눈썹, 살짝 쳐진 눈, 체크무늬가 많이 들어간 하복, 낡은 운동화, 투박한 손목시계, 초록색 가방, 도시락 주머니.
 그녀가 준 동전, 그녀가 해준 약속.
 등이 오싹해지고 머리가 아파왔다.
 갑작스러운 만남에 당황해서 말을 빙빙 돌리거나 이상한 소리만 하고 말았지만 조금 더 침착하게, 확실하게 행동했어야 했다고 지금은 생각한다. 그녀와 만난 뒤부터 한 거의 모든 행동이 후회스러웠다. 그녀는 누구인지, 어떻게 여기에 있는지, 어떻게 우리가 만날 수 있었는지.
 날 알고 있는지, 내 생각이 정말로 맞는 건지.
 혹시나 착각한 건 아닌지.
 단순한 환상은 아닌지.
 언제 다시 만날 수 있는지를 확인해두었어야 했다고 나는 스스로를 책망했다. 그녀 자신조차 대답할 수 없는 질문뿐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상한 애 취급을 받더라도 나는 물어봤어야 했다. 확실히 밝혔어야 했다.
 그렇지만 나는 결국 그녀로부터 '운이 좋으면 다시 돌아오겠다'는 애매한 대답과 그녀의 이름을 들어내는 정도밖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나는 눈을 떴다. 어둠에 익숙해진 두 눈동자가 지저분하고 공허한 거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바로 앞의 벽에는 학교에서 얻은 상품권으로 찍은, 하나밖에 없는 사진이 덩그러니 걸려 있었다.
 나는 사진 속에서 어색하게 웃고 있는 나, 내 무릎에 앉은 강아지 시절의 누렁이, 내 오른쪽 어깨에 손을 얹고 비교적 자연스럽게 웃고 있는 망나니, 그리고 그의 옆에서 희미하게 미소짓고 있는 여자의 모습으로 차례차례 눈을 굴렸다.
 웨이브진 머리카락을 어깨 높이로 다듬고 반듯하게 서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여자의 얼굴은, 학교 핑계대고 노닥거린 게 부모님한테 들켜서 뒤지게 혼나고, 그래서 집에 감금당하다시피 하게 되고, 수능도 망치고, 재수하다 망나니 같은 연하남을 만나 결혼해 이 동네 저 동네 전전하게 될 거라 내가 예언했던 옥상 위의 수험생과 똑같았다. 다른 것은 시간의 무게와 숨길 수 없는 피로감이 더해졌다는 것뿐이다.
 나는 한동안 사진 속 여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런 일은 역시 있을 수 없다.
 오늘은 정말로 이상한 날이다. 얼마 전까지 이 동네를 괴롭혔던 폭염 때문에, 지쳐서 미쳐버린 걸지도 모른다. 저녁노을을 등지고 옥상에 앉아 있던 하복 차림의 그녀는 이상해진 뇌가 만들어낸 환상일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려 했다. 아니면 지나치게 닮은, 전혀 다른 사람이었을 거라고. 하지만 잘 되지 않았다.
 그녀는 고3 때 한 번 이 동네에 왔다가 돌아간 뒤, 재수 중에 망나니 같은 아빠를 만나 결혼했다. 그리고 여기로 돌아와 나를 낳았다. 아빠가 실종되고 보름 후, 오늘 안에 돌아오겠다며 짐가방을 들고 나갈 때까지, 이 다 쓰러져가는 집에서 나와 함께 살았다.
 은휘란이라는 이름을 가진, 날 낳아준 사람은.
 낡은 건물에 대한 얘기가 잠깐 나왔을 때, 고등학생 시절 이 동네에 들렀다가 다시 돌아오기까지 2년 정도 걸렸다는 일화를 그녀는 나에게 들려주었었다. 이상한 꼬마하고 만나 이상한 약속을 했고, 그 후 주변이 시끄러워져서 까맣게 잊고 있다가 아빠 일 때문에 이 동네로 돌아오니 딱 생각나더라는 일화도. 지나가는 이야기처럼.
 그녀는 그 이상한 꼬마가 누구였는지 끝내 알아내지 못한 듯했다. 하지만 꼬마와 한 약속만은 뒤늦게나마 기억해 주었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을까.
 지금은 날 알아봐줄까.
 이상한 꼬마가 아들과 같은 이름인 이유를 알고 있을까.
 그렇다면 두 번째로 돌아오기까지 걸릴 시간은 대체 얼마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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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려한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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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3)

하늬비
하늬비 10.12.03. 13:20
'라이트노벨'이 발랄한 분위기만을 말하는 건 아니지만, 이 작품은 라이트노벨이라는 느낌이 안드네요;
제한된 분량 안에서 무리하게 우겨넣는 것 만큼이나 흐릿하게 퍼져있는 것도 좋지 않은데, 쉬운 소재인데다 전체적으로 단순해서, 결말이 이렇다 할 힘을 받지 못한 것 같습니다.

라이트노벨의 시작이 강렬하게 눈길을 끄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라고 할수만은 없지만 다른 이유에서라도 딱딱 맞아떨어지게 작용을 해야하는데... 초반부의 아이스크림 맛과, 누렁이와, 사러 가는 것과... 이렇다 할 역할을 못하고 그저 퍼져있다는 인상입니다. 그게 전체적인 분위기로 이어가기 위한 것이라고 해도, 그렇다면 차라리 그런감각을 느낄 수 있게 읽는 맛이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것 같은데...
ㅁㄴㅇㄹ 10.12.06. 21:16
순환적 타임 패러독스네요. 많은 작품에서 쓰이니까.. 약간 식상한 느낌을 줄 수도 있는 듯 하네요. 대표적으로 최근의 '스즈미야 하루히의 소실' 이라든가... 하지만 암튼 잘 봤습니다.
cloud.9
cloud.9 10.12.13. 02:22
중간까진 좋았는데 막판에 반전 들어가면서 뭔가 어디서 많이 본 듯한 김샌 결말이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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