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이정표

내동귀 - 케세동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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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려한꽃]
님의 글을 신고합니다.

내 동생이 이렇게 귀여울 리가 없어



이번 주 들어 3번째로 겔이 털렸다.

모니터에는 여느 때처럼 성인광고에나 쓰일 것 같은 문양과 글이 뒤범벅되어 난무해 일종의 기하학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파괴신이 몇 호 홈런을 쏘아올린 모양이다.

파괴신이란 놈이 왜 홈런을 치고 있는지는 둘째 치고 그거랑 우리 겔이 털리는 거랑 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 걸까.

닫힌 방문 너머로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다녀왔습니다, 하며 등 뒤가 아련하게 밝아온다.


벌써 자정인가. 여전히 게시판은 흑백의 별들이 반짝거리듯이 올라오고 있다.


새로 고침을 몇 번 눌러보자 별이 물결치는 것처럼도 보였다.

오늘 겔 질은 틀렸나.


뒤로 드러누웠다. 언제든지 잘 수 있게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나는 파괴신을 증오하며 잠에 들었다.


다녀오겠습니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반쯤 뜬 눈이 을씨년스러운 방의 모습을 비춘다. 조금 꿈틀였을 뿐인데 겨울의 한기가 이불을 파고든다.


겨울은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별표가 난무하던 겔은 새로 고침 한방으로 원래의 상태를 되찾았다.

신기하게도 알바는 내가 보지 않을 때만 일을 하는 재주가 있는 것 같다.


거의 무의식 중에 손이 멋대로 움직여 키보드 위를 누볐다.


입게르


하루가 시작된다.



아침에는 그리 글이 올라오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디시는 잉여사이트라는 인식이 있는데 오전 시간대에는 그리 접속자가 많지 않은 걸 보면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다.


후후, 흔치 않다는 건가. 나 정도 되는 잉여는.


별로 볼 글이 없기에 다른 겔을 방문하기도 했지만 역시 다른 곳도 소위 정전 상태라 별로 볼 것이 없었다.


간간히 야구 얘기가 나오는 곳도 있어 어제의 불쾌한 기억을 되살리는 곳도 있었다.


순례를 마치고 나니 할 일이 없어졌다. 아침이라도 먹을까.

방 안도 좀 쌀쌀하다고 생각했는데 문을 열자 더한 한기가 맞이해준다. 식탁 위에는 여느 때처럼 랩에 쌓인 아침 식사가 마련되어 있다.


오늘은 유부 초밥인가. 요즘 들어 바빠진 모양인지 메뉴가 점점 간소해져 가는 느낌이 드는데.

이 정도라면 굳이 밖에서 먹을 필요도 없겠지. 접시를 들고 다시 방으로 후퇴, 모니터를 멍하니 바라보며 하나 둘 초밥을 씹어 삼켰다.


그 사이에 글이 몇몇 올라 온 게 보였다.

스파이크걸x는 좋은 게임이었습니다

여러분. 그만 잠을 잡시다 읭읭 ㅠㅠ

ㅅㅂ 글 존나 안올라 오네....’


글도 몇 개 없는 와중에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고 의미도 없는, 이른바 잉여력이 충만한 상태다. 낯이 익은 고정닉이 쓴 글에는 조건 반사적으로 리플을 단다. 뭐라 달았는지도 페이지가 넘어가면 잊어버린다.

야 오늘이 수능 성적표 나오는 날 아니냐

그러고 보니 얼마 전이 수능이었다. 매년 꾸준히 계속되는 연례행사.

글을 클릭해보니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인데 직장인 복장으로 차려입은 중년들이 웃으면서 빌딩 위에서 줄지어 뛰어 내리는 영상이 나온다. 표정은 한없이 밝고 뛰어내리는 동작도 부드럽게 흘러가 어딘지 유원지의 놀이기구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모니터를 바라보면서도 손은 기계적으로 움직여 초밥을 입안에 털어 넣는다.


달짝지근한 유부에 아직 아스라이 남아있는 밥의 온기가 곁들여져 그럭저럭 먹을 만 했다. 적당히 먹은 접시를 옆으로 밀어 놓고 적당히 뻘글을 쓰고 뻘플을 달았다.

시간이 흘렀다.

다녀왔습니다, 하며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벌써 6신가.


겔에서는 몇 시간 전에 올라온 자살 뉴스와 관련해 몇몇 학식 있다 하는 고정닉들의 고견이 이어지고 있었다.

중국산 샤프심에 대해 강한 불만을 표출하며 이 나라의 정치가 얼마나 썩었으며 올해 크리스마스는 어쩔 셈이냐며 울분을 토하고 있었다.

몇몇이 무게를 잡으려고 해도 쉽게 무마되고 주제가 산으로 가버리기 일쑤다.

아니, 오히려 디시에서 그렇게 무게를 잡으려고 드는 것 자체가 이상한 짓이겠지.


문 너머에서 소리가 들렸다.


아이스크림 사왔는데 먹을래?”

아니.”

저녁, 뭐 해놓을까?”

안 돼, 겔이 심상찮다 싶더니 아무래도 뭔 경기가 또 시작한 것 같다. 몇몇이 불안해하는 게 글에서도 느껴질 정도다. 어차피 뭐가 됐든 별 의미가 없는 건 마찬가지지만 또 겔이 별 문양으로 뒤덮이는 건 보기 싫다. 지금의 겔 상태가 의미가 0이라면 그건 마이너스다. 뭣보다 그깟 공놀이가 뭐가 그리 즐거운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뻘글은 웃기기라도 하지.

야구 하는데 야구 안 봐?”

의외로 적은 가까운 곳에 있었나. 대답이 없자 티비가 켜졌는지 야구 경기 특유의 부산한 소리가 들려와 거실 쪽이 조금 산만해진 느낌이 든다.

이러다 홈런이라도 치면 끝장인데.

, 시끄러우니까 소리 좀 줄여.”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잠깐 멈칫하는 기색 후에 티비가 꺼지는 소리가 들린다.


한동안 겔은 평화로웠다. 그러나 야구는 역시 경기가 긴 게 특징이라 앞으로 몇 시간 동안은 안심할 수 없다. 올라오는 글들도 서서히 야구 일색으로 변화되어 겔이 중계 게시판처럼 변해 버렸다.

대부분 야구는 좋아하는 모양인지 겔이 털리는 건 싫어하지만 이런 저런 야구 얘기가 슬금 슬금 나타나더니, 왕년에 감독이라도 해봤는지 알 수 없는 전문 용어를 남발하며 국가 대표 야구 감독을 질타하는 글도 근근이 보였다.


그저 뭔가 눈에 띄는 행동만 없기를, 하며 새로 고침을 누르자 다시 별무리가 출현했다.


운 좋게도 겔이 도배를 알리는 첫 글을 보게 되었는데 선봉에 선 것은 자랑스럽게도 우리 겔 고정닉이었다.


마치 축제와도 같이 파괴신을 연호하는 글들이 겔에 범람하기 시작했다.

다녀오겠습니다, 하며 현관문이 열리며 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겔이 털리면서 저녁반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시간이 흘렀다.


다녀왔습니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11시다.


글쓰기 버튼이 사라진 겔을 잠시 동안 지켜보다 자려고 드러누웠을 때였다.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저기 내일 뭐해?”

하마터면 일어날 뻔 했다. 문이라도 열리는 줄 알았다.


바쁜데.”

오늘처럼.

하루 종일?”

하루 종일.”


잠시 정적이 흐른다. 난 지금이라도 문이 열리는 게 아닌가 싶어 겁을 집어 먹었다.

잘 자.”

그 말을 받아들여 잠에 들었다. 내일도 변함없는 하루다. 그 다음날도. 언제까지 계속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시간은 여느 때처럼 느긋하게 흘러갔다. 겔도 전반적으로 나른한 분위기 속에서 연말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런 저런 크고 작은 사건들도 많았고, 나도 떡밥이 생겼을 때는 득달같이 달려들곤 했지만 내가 뭐라고 했는지 무슨 소릴 들었는지에 대해 기억나는 건 하나도 없다.

굳이 나에 대한 것 중에 기억나는 거라면 저 심야의 방문이 몇 번인가 더 있었다는 정도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때문에 나는 동생과 1년 치 정도의 회화를 다 소비해버린 것 같다.


그로부터 얼마간 흘러 디시 사이트가 푸른 바탕에서 붉은 무늬를 띄기 시작했을 때 일이다. 다녀오겠습니다, 소리에 잠이 깨 모니터 앞에 앉았다. 요즘 들어 아침에 일어나는 동작이 재빨라졌다. 근래 노크 소리가 잦아져 조금 히스테릭해진 걸지도 모르지. 어쩌면 이런 식으로 나를 길들이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무서운 아이.


여느 때처럼 적당히 아침반에 섞여들어 시간을 보내다 배가 고파졌다. 여느 때처럼 밥을 찾기 위해 문을 열었다. 문 밖은 여전히 쌀쌀 했다.

점점 더 강해져가는 추위를 저주하며 이불로 몸을 둘러싸고 방으로 가지고 들어온 오므라이스를 먹고 있을 때의 일이다.


겔이 조금 부산스러운가 싶더니 박검정이 나타나 있었다.


혜성처럼 등장해 요즘 뜨는 고정닉이다. 디시에 널리고 널린 게 고정닉이지만 이놈은 조금 다르다. 박검정 이란 것도 다른 겔에 퍼지면서 붙여진 애칭 같은 것인데 그런 게 생긴 이유도 아이디가 park1122라는 흔하디흔한 닉이라서가 아닐까 하는 게 개인적인 추측이다.


이런 애칭까지 붙은 데는 따로 이유가 있다. 설명하자면 긴데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것도 있다.

간혹 겔에 여자가 나타나면 그것만으로도 소소한 화젯거리가 되는 게 디시의 특징이다. 물론 여성 유저가 많은 겔러리도 있는 것 같지만 일반적인 겔러리라면 매우 희귀한 측에 속해, 자신이 여자라고 밝힌 것 만으로도 한차례 인증 요구가 시험처럼 지속 된다. 이 과정에서 탈락하는 사람도 적지 않으나, 시시콜콜하고 귀찮은 시험을 모두 클리어 하고 나면 영예로운 여성 겔러의 지위를 받게 된다.


이 여자임을 증명하는 인증 자체가 귀찮고 이래저래 사진을 찍어야 되는 번거로움도 있어 인증을 모두 마친, 소위 여겔러는 나름대로 미인이 많고 그래서인지 한순간에 인기인이 되기 마련이다. 남성 유저가 대다수인 특성상 그 희소가치가 더해지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나 대다수의 여겔러는 그러한 폭발적인 관심에 부담을 느껴 조금 활동하다 사라지거나 디시라는 익명성을 무기 삼은 무차별 공격에 디시를 접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애초에 이렇게 될 걸 뭐 하러 인증을 하고 익명성 짙은 인터넷 게시판에 자신을 드러내는지가 의문일 때도 있지만, 간혹 겔에 미묘한 활력을 불어넣고 인증과정에서 사용되는 사진들이 마치 셀카와 같아 흔히 보게 되는 전문적인 사진과는 다른 신선한 매력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나도 뭐 그런 정도로만 생각해 왔다.


그렇지만 박검정은 이런 신선함에 한 단계 더 높은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인증사진을 놓고 따지면 박검정은 미인이 맞다.

박검정이란 애칭이 붙은 이유는, 전신 거울에 비친 검정 스타킹을 신은 매끈한 다리가, 역시 검정 원피스에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이 그림처럼 찍힌 인증 사진 때문이다.


전반적으로 짙은 색 옷을 입은 가느다란 선이 매력적인 이 사진은 매끄러운 긴 장발과 비율상으로 보면 완벽에 가까운 크기의 두상이, 사진을 찍고 있는 휴대폰으로 거의 가려질 정도로 다소곳한 구도로 자리 잡고 있는 구도로 끝을 맺는다. 휴대폰에 거의 가려졌지만 전반적인 맵시나 살짝 드러난 눈망울만 봐도 미인인건 쉽게 상상이 된다. 오히려 그 약간 가려진 아슬아슬한 느낌이 매력을 부채질한다.


이 정도면 그냥 디시인이 놀라운 미인, 정도로 놀라고 말 문제겠지만, 한층 더 일이 꼬여 있다. 경악의 근원은 깔끔한 인증사진만 봐도 미인인건 누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그녀가, 아니 이 놈이....남자라는 사실이다.


애초에 인증이란 말도 없이 그냥 올라온 사진이었다. 자신은 남자인데 가끔 여장을 한다는 해괴한 내용이었다.


사실을 의심할 여지는 없었다. 애초에 저 정도 미인이라면 이런 괴상한 커밍아웃을 할 필요가 없고, 그렇다는 건 정말로 남자면서 저리 생겼다는 게 되리라.

초반에 일어난 실은 여자가 아니냐는 소수 의견은 별 저항 없이 사라져갔다.

눈을 의심했다. 아마 대다수의 겔러가 그럴 것이다. 그리고 일파만파로 퍼져나간 이 사진을 보고 다른 겔에서 몰려든 놈들이 겔을 털면서도(이때도 털렸다) 그 경악만은 절절하게 전해져 왔다.


많은 겔러가 놀라고 아쉬워했으며, 어떤 소수는 왠지 기뻐하는 듯 했다. 나도 처음에는 그 신선함에 놀라 관심을 가졌지만 요즘에는 차분하게 박검정으로 하여금 일어나는 각종 촌극을 관찰할 정도로 냉정을 되찾았다.

심지어는 사귀자는 말도 몇 번 나왔는데 디시 특유의 묘한 장난스러운 분위기를 타서 반은 장난이나, 남은 반이 진심처럼 들리는 글도 있어 보는 내가 민망할 정도의 글도 있었다.

여하튼 오늘도 이렇게 나타난 것만으로 겔의 화재는 박검정으로 옮겨갔다.


그는 그리 오랜 시간 겔에 남아있는 것 같지는 않다. 주로 오전반이나 저녁반에 잠깐 나타나곤 해서 아직 뭐하는 놈인지는 다들 모른다. 온 겔이 자기가 나타나면 뒤죽박죽이 되는데도 별 자각은 없는 것 같다. 흔한 악플 에도 무덤덤하다. 남자라서 이런 방향의 신경이 굵은 건지도 몰랐다.

이렇다 보니 뭐하는 놈인지 궁금해 하는 놈들도 생겨났다.


나름 호기심을 발휘한 몇몇 학식 있다 하는 고정닉들이 치밀한 심문 결과 서울 산다는 내용을 알아낸 혁혁한 전과를 올린 바 있다.


그 외에는 딱히 알려진 게 없다.

검정형 크리스마스에는 뭐해?’

그러고보니 벌써 크리스마스잖아 시발

‘zzzzz크리스마스는 검정누나와 함께 zzzzzzzz'


, 3번째 놈은 조금 진심 같은데. 이 글은 클릭 안하고 다음 글을 클릭했다.

형들 크리스마스에 내가 알바 하는데 한 번 와 볼 사람 없어?’


박검정의 글이었다.


조회 수가 한순간에 50이다. 새로 고침을 눌러보자 80이 됐다.


그 다음에는 150이었다.


너네 대체 왜 이러는데?”

기가 막혀 생각한 게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래도 글은 정독 한다. 겔 터주 대감으로서 이런 글은 하나하나 체크해둬야 한다.


요는 자기가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알바를 한다->그 곳에서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다수 동반 팀일수록 사진도 찍고 무료화 메뉴나 추첨 등 다양한 이벤트를 한다->자신은 산타 옷을 입고 호객을 하는데 손님을 많이 물어오면 점장 누나가 추가금을 선사 한다->자기가 일하는 곳은 말 그대로 패밀리 레스토랑이라(다들 레스토랑이 아니라 거금을 들이고 가는 뷔페로 이름을 알고 있는 어떤 곳이었다)가족단위 손님이 주요 고객이라 크리스마스에도 북적거리며 놀기 좋다


라는 내용이 간절하게 담겨 있었다. 글에 들어가는 짤방에는 산타 옷 사진이 있었는데 왠지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원피스 타입의 짧고 착용한(입는다는 표현은 부적절하다)사람의 선이 드러나는 여성용 복장이었다.


글이 일배가 되었다.


30분 후에는 일배가 아니라 성지 수준이 됐다.

겔도 털렸다. 이젠 왜 털리는지 터는 놈들도 이유를 딱히 모르는 것 같았다.


소란스러운 시간을 넘어서고 보니 알바가 정신이 오락가락 하는지 어느새 제 1회 크리스마스 특집 정모계획이 공지로 올라가 있었다. 이건 터주 대감으로서 좌시 할 수 없는 문제다.


뉴비들아 친목 질 하지마라


씨알도 안 먹힌다는 게 이런 거라는 걸 깨달았다.

요즘 겁 없는 놈들을 훈계하려면 직접 참가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평소보다 디시질에 힘이 들어간 하루를 보내다 보니 뉘엿뉘엿 기울던 해가 어느덧 모습을 감추고 어둠이 내리앉아 있었다. 멍하니 드러누워 있다 배가 고프다는 걸 깨달았다.

컴퓨터 시계를 보니 시간은 6시가 넘어 있었다.

오늘 늦을 일이 있다고 했던가. 딱히 기억나는 건 없다.


겔이 불안하게 부산스러워졌다. 이번엔 또 어디서 무슨 축구를 한다고 한다. 박검정은 축구를 잘할 까라는 질문에 대해 학식 있는 고정닉들이 전문 용어를 남발하며 논쟁이 시작되었다.


10시가 넘었다.

배가 고파졌다. 방문을 열어보자 거실너머는 삼엄한 냉기가 들이차 있었다.

조심스럽게 방 밖으로 나가 불을 켰다. 낯선 느낌이 든다. 어딘지 모르게 내가 알던 집이 아닌 것 같다. 고양이가 걷듯이 숨죽여 거실 식탁까지 다가갔다.


혹시나 했지만 아침에 오므라이스를 빼갔던 쟁반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동생이 제때 안 나타난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군.


그리고 사육되다 시피 정확한 시간에 식사를 지속해 왔던 내 위는 갑작스런 이변에 경악해 허기를 호소했다. 사람의 습관이란 게 무서운 건지 이걸 모의한 동생이 무서운 건지.


배달이라도 시킬까 했지만 사람을 집으로 들이는 건 싫었다.

고로 귀찮아도 배가 고프니 먹을 걸 사오기로 했다. 거실 서랍에서 카드를 꺼냈다. 그런 자신의 행동에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이러는 게 얼마만일까.


적당히 입을만한걸 걸치고 현관바닥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신발을 신었다.

신발장 옆에 설치된 거울에 수염이며 머리는 덥수룩하고 빼빼마른 남자의 모습이 비췄다.


오랜만에 보는 모습에 조금 놀랐다. 얼굴도 조금 야윈 거 같다.


괜찮아. 요즘엔 시크남이 대세라니까.


근거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생각을 하며 문 앞에 섰다. 문고리를 잡는 손이 조금 떨린다.

괜찮아. 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했던 일이다.

다행히 아파트 현관까지 마주치는 사람 없이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오래간만에 나와 본 바깥은 말도 못하게 추웠다.


걸으려니 땅을 밟는 느낌이 어색해 괜스레 웃음이 나왔다. 몸을 움직이면 상쾌하다는 말이 있는데 어느 정도 납득이 가는 것도 같다. 적당히 몸이 열을 띠자 찬바람도 그리 싫지만도 않았다. 차분하게 걸음을 즐기며 편의점에 들어서자 알바가 움찔 하는 게 느껴졌다.

아까 거울에 비친 그 몰골을 보았으니 무리도 아니겠지.


그렇지만 나도 놀랐다. 들떠서 나도 모르게 마음의 준비를 잊었던 것이다.

한 박자 늦게 어서 오세요 하고 들리는 목소리가 은근하게 낯이 익어 전에 몇 번이고 봤던 알바라는 사실은 기억해낼 수 있었다.

단지 얼굴만은 기억해낼 수 없다.

얼굴은 없으니까.


고등학교 때 일이다.

지금도 겔 내에선 시크 남으로 통하지만 거기에 더해 당시 쿨 한 시크 남이었던 나를 시크 남으로 강등시킨 사건이 있었다.

하루에도 수백건이 일어난다 하는 흔하디흔한 교통사고가 일어났다. 추돌 사고였다.


얼마간의 보상금이 들어왔다는 걸로 봐선 우리 쪽이 상대적으로 잘못을 덜한 점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한순간에 부모가 사라진 두 아이를 위한 동정표가 작용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저 살아남은 쪽은 별다른 외상이 없다는 것만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리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다.

무엇보다 내상은 지금도 이렇게 확실하게 남아있으니까.



후들 거리는 손을 추슬러 적당히 먹을거리를 찾아 나섰다.

요 몇 년 사이에 샌드위치 종류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 같다. 무엇보다 날 놀라게 한건 듬뿍 넣은 햄 샌드위치에 참치가 추가된 버전이었다. 나는 자본주의의 위대함에 다시금 놀랐다. 우리 겔에 파시즘이란 고정닉이 있는데 이러한 점에 대해 역설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손을 내민 순간, 손이 부딪혔다.


옆에는 직장여성이 흔히 입는(거라 생각되는)슈트 차림의 여자가 있었다.

물론 얼굴은 없다.

공포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

히익, 하고 비명을 지를 뻔 했다. 어떻게 간신히 소리를 삼킨 건 내가 시크남 이라서...라기 보단 과거 훈련의 성과겠지.

숨을 삼키며 고개를 꾸벅하고 뒤로 돌아섰다. 이젠 듬뿍 샌드고 뭐고 식욕이 날아가 버렸다. 우선 이 곳을 벗어나고 생각해야겠다.

문을 열려고 보자 문밖에서도 드문드문 사람이 보인다. 인적이 드문 편이지만 좀 전에 옆 횡단보도라도 잠깐 열렸던 게 아닐까.

구역질이 난다.

하하.


웃음도 난다.


이러고 어딜 나가겠다는 건지.

돌아가자. 한 끼 굶는 다고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닌데다,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확실하게 어떻게 될 기세다.

떨리는 다리를 다잡고 돌아 설 때 뒤에서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 또한 몇 년 만이었다.


무려 몇 년 만에 여자와 길을 걷게 되었다.


이게 정말 몇 년 만인지 모르겠어.”


여성용 슈트가 말했다. 난 네가 누군지도 모르겠어.

그러게, 근데 넌 하나도 안 변했네.”


여기서는 너도 그렇다고 돌아올 타이밍이겠지만 내 꼴을 보고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내 나름대로의 블랙 유머였지만 제대로 먹힌 듯 잠시 대화가 끊겼다.

그래서 요즘엔 뭐하고 살아?”

사교에 대해 특훈을 거듭한 이력이 있기에 화제를 이끌어내는 건 문제 없었다. 그제야 반갑게 다시 말을 받는 슈트.


, 올해 취직했어. xx. 연말이라 얼마나 야근이 많은지 몰라. 이런 날까지 야근 시키는 건 정말 너무하지 않아?”

xx는 세상과 담을 쌓은 나도 익히 알고 있는 기업이다. 그런데 이 시간에 야근이라고 불평이라니. 고정닉 중에 12시가 넘게 돌아오는 녀석들도 봤었는데.


고생이겠네. 남자 친구는 있어?”


그 뒤로 슈트 집에 도착할 때까지 얼마간 대화는 이어졌다. 멋대로 길을 이끄는 걸로 봐서는 같은 아파트 단지 내에 사는 것 같다. 대화 자체는 간만에 만난 동창이라는 틀 내에서는 흔해 빠진 화제가 입에 올랐지만 과거 얘기는 거의 나오지 않았다.

현재 진행형인 화제를 꺼내봐야 나로서는 거의 대꾸할 게 없기에 사교 능력치를 만 렙 가까이 찍어놨던 과거도 무색하게 대화는 번번이 끊어졌다.

아니 오랜만에 지인을 만나면 공통적인 과거 화제를 꺼내지 않나?


내가 이상한 걸까, 그녀가 이상한 걸까.

별 접점이 없는 상대일지도 모르겠다. 무슨 날벼락인지 한동안 자신의 생활이 얼마나 비참하며 회사란 곳이 얼마나 여성에게 불리한 곳인지를 역설했다. 접점이 없는 상대에게 이러진 않을 텐데.

그래도 징징대든 어쩌든 현재를 열심히 살아가는 슈트 쪽이 나보다는 나은 건 실감할 수 있었다.

난 적당히 휴학 중이라고 둘러댔지만 대학에 제대로 간 적도 없다.

경력이라면 디시 정도다. 디시 몇 년차라고 하면 겔 내에서야 잠깐 오오 하지만 밖에서는 무슨 소린지도 모르고 무슨 소린지 아는 사람이라면 필시 경멸할 것이다.

대화 거리가 떨어질 대로 떨어져 견디다 못한 내가 여장 남자가 여장을 하고 호객을 하는 레스토랑을 아냐고 물어보기 직전에 슈트의 집에 도착했다.

아파트 현관에서 그녀를 배웅했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면 흔히 그러듯 번호를 물어 오진 않았다.

뭐 이런 거겠지. 면상에 대고 욕이라도 안한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집 앞까지 돌아오는 길은 예상 외로 벅찼다. 샌드위치는 옛적에 포기하게 되었다. 간신히 현관 문 앞까지 도달했을 때에는 너무 걸어서인지 몸 곳곳에 불쾌한 땀이 남아 있었다.


현관문을 열자 온기가 느껴졌다. 땀을 흘려서인지 얼었던 몸이 간지러웠다.


부엌 쪽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 왔어? 어디 갔다 왔어?”


집을 나서기 전의 불안감이 사라짐과 동시에 묘하게 반가운 느낌으로 짹짹거리는 느낌으로 묻는 목소리가 듣기 거슬려 방으로 빨려 들듯이 들어갔다.

너는 뭐하다 이제 들어왔냐는 말도 할 기력이 없이 컴퓨터 앞에 엎어졌다. 잠에 들기 전에 엎드린 자세로 간신히 몇 마디 글을 쳐 넣을 수 있었다.

ㅋㅋ 나 지금 편의점 갔다가 여자 동창한테 번호 따임"

약간 현실과 다른 것도 같지만 이른바 화이트 라이라는 말도 있으니 문제없다.

꿈꿨냐는 리플이 달리는 걸 보면서 의식이 끊겼다.

의식은 꿈에서 계속 됐다.


한 순간에 집안이 썰렁해 졌지만 그럭저럭 세상을 이해하고 간신히 사춘기를 넘겼던 고1인 나는 어떻게든 앞가림을 할 수 있었다.

유산과 보험금과 보상금은 이래저래 짤렸지만 그래도 당시의 내가 보기엔 충분히 많은 액수가 남아 담당 변호사가 월마다 일정액을 보내주어 생활하는데 별 문제는 없었다. 때문에 생활도 그리 변하지 않았다. 그저 집에 돌아와도 맞이해 주는 사람이 없다거나 밤마다 돌아오는 사람이 없어진 정도의 차이다. 슬프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래도 원래 자신은 가족 간의 애정이라는 걸 그리 의식하지 않고 있었다...라고 생각하고 살기로 했다. 동생은 조금 달랐는지 집안에 틀어박히고 말았지만.

그러나 어쨌거나 학교는 다녀야 했다. 어릴 때부터 귀에 박히도록 들어놓은 좋은 대학이라는 목표점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걸 이루는 게 나름대로 내게 남겨진 부모님의 유지일 거라고 멋대로 생각해 학교생활을 지속해 갔다.

쿨 한 시크 남이었던 나는, 내가 봐도 상당히 모범생에 속했다. 주위에서도 그렇게 생각해준 모양이다. 때문에 안면 인식 장애인가 뭔가 하는 해괴한 정신 질환은 담임에게만 짤막하게 전해져 수면 아래에서 적절하게 나를 배려 해주는데 그쳤다.

처음에는 고생했지만 사람이란 게 의외로 굳센 건지 지내다 보니 버틸 만 해졌다.

아무도 없는 교실에서 학우가 불쑥 튀어 나오면 그거야 말로 괴기 영화의 한 장면이고 체육시간에 얼굴 없는 학생들이 줄지어 뛰어다니는 모습은 b급 영화에서도 안 쓸 것 같은 어이없고 그로테스크한 광경이긴 했지만, 참으면 참을 수 있었다.

점점 주위 사람들이 사람이라는 인식이 희박해지고 마네킹처럼 보였다.

시력이 이런 식으로 붕괴된 와중에 청력만은 발달해 목소리만으로 사람을 구분하게 되었다.

고등학교 학생은 케릭터 성을 구분하는 요소 중에 복장이 무용지물이니 이런 재주가 생겨났던 것 같다.

가끔 사람을 착각하긴 했지만 교통사고 후에 시력이 나빠진 것 같다고 사과하면 되려 미안해하는 듯 한 모습(목소리)을 보여주어 적당 적당히 넘어갈 수 있었다.

적당 적당히 넘어가는 사이에 인생의 분기점이라는 고3이 되었다. 1년 동안이 가장 편했다. 공부만 하면 됐으니까. 학생 들 간의 교집합이 가장 희미해져 가는 이 시기에 나는 가장 안도감을 느꼈다. 가끔씩 정숙해진 교실에서 고개를 돌리면 소름끼치는 광경이 보이긴 했지만 이 정도야 대화의 고통에 비하면 한결 나은 수준이었다.

기다려라, 좋은 대학.

어떤 명확한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보람찬 인생의 한 페이지였다.

수능 당일에는 별일로 동생이 현관 까지 배웅을 해줬다. 집에만 틀어박혀 있어서인지 투명한 건지 창백한 건지 판단하기 어려운 볼을 붉혀가며 힘내라고 손을 흔들었다. 한번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집을 나섰다.

장애를 딛고 기적적인 전국 1!

이라는 신문 기사는 실리지 않았다.

그냥 적당히 잘 갔다 싶은 학교에 적당한 성적으로 붙었다. 그래도 좋은 대학이라는 목적은 달성한 것 같다.

우리 학교 내에서는 상당히 상위권에 속하는 기록으로 내 비밀을 알고 있는 몇몇 선생들이 직접 찾아와 눈시울을 붉히며 격려를 해주었다. 동생도 왠일인지 자기 일처럼 신나하며 무려 학교에 등교하기를 결심해 버렸다.

그런 3류 휴먼 드라마가 연출됐던 것이 몇 년 전이다.


기껏 붙은 좋은 대학은 얼마 다니지 않았다.

호러 영화의 스케일이 내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 버렸다는 게 첫 번째 이유였고, 생활비가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게 두 번째 정도의 이유였다.

이때 즈음에 유행하기 시작한, 익명성으로 자신을 가리는 반면, 자기 생각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모 인터넷 사이트를 발견 한 것은......

아마 이유에는 없을 것이다. 아니 개인적으로는 이유에 없었으면 한다. 디시 때문에 인생을 망친다, 라는 말을 실현한 인간 1호가 되고 싶지는 않다. 어쩌다 보니 삶의 보금자리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뭣보다 목표를 이루고 나니 지쳐 버렸던 걸지도 모른다.


사람이란 의외로 나약한 구석도 있기 마련인 것 같다.



다녀오겠습니다, 하는 소리에 잠에서 일어났다.

뭔가 꿈을 꾼 것 같기는 한데 뇌 내 혈당량이 부족해서 생각이 나질 않는다.

배가 고프다. 일단 밥을 가져 오자.

이런 허기를 느낀 건 오랜만이다. 아니 식사를 거른 것 자체가 대체 몇 년만 인지도 모르겠다. 사건 전후로도 쭉 교과서적인 생활을 해왔으니.

오늘은 김밥이었다. 먹기가 편해서 기분도 좋아졌다.

형 왔다 좋은 아침이다 잉여들아

간만에 아침 인사도 해봤다.

배은망덕하게도 리플이 달리지 않았다.


오전반은 평소와 다르게 활기찼다.

오늘이 수요일인데 휴일이라는 게 이유였다. 박검정배 정모가 열리는 날이라는 게 두 번째 이유였다. 파시즘이 주최 측이 돼서 연락망을 정리하고 있었다.


어제의 외출을 떠올렸다.

그야말로 죽을 고생을 했지.


너희들 나가면 안 돼. 사진 찍힌다고. 여장 남자라고.

나는 누군가 이 촌극을 찍어 후세까지 널리 널리 퍼지기를 마음속으로 기원했다.

유입 종자들의 뻘글 들을 방어하며 크리스마스는 오전을 지나가고 있었다. 점차 박검정 원정대(이름이 결정되었다)는 그 모습을 확고히 드러내고 위용을 떨치고 있었다. 물론 우리 겔로만 이루어진 원정대도 아니다.

더러운 야겔 놈들. 이제 와서 친한 척을...”

어제의 적이 뭐라 콕 찝어 설명할 수 없는 꺼림칙한 욕망 아래 하나 된 모습을 보며 생리적인 혐오감에 몸을 떨었을 때 거실의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는 기본적으로 받지 않는 주의다.

신비주의이기 때문이다.


한동안 울리던 전화벨이 멎고, 우쭐해진 원정대가 급기야는 겔을 터는 모습을 보면서 화가 치밀었을 때 다시 전화가 울렸다.

하루에 두 번 전화가 오는 건 드문 일이다.

전화벨 소리라는 건 듣고 있기만 해도 어딘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어 짜증스럽다. 나도 모르게 키보드를 신경질 적으로 두드렸다.


야 전화 소리 안 들리니까 조용히 좀 해봐

내가 쓴 뻘글이 박검정을 연호하며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이번에는 받았다. 거실은 추웠다.

아 가족 분 되십니까?”

익숙한 동생의 이름을 사무적으로 말한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익숙한 병원의 이름을 말했다. 전에 신세를 졌던 병원이다. 잊은 줄 알았는데 들으니까 선명하게 기억이 났다.


기적 이라는 단어밖에 생각이 안 났다.

아 이게 분명히 아닌데....”

택시 안에서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단어가 떠오르질 않았다.

확률 상으로는 기적에 속하는 일이 맞는 것 같다.

교통사고야 흔한 것 같지만, 개인으로 따지면 확률 상 그리 일어나지 않는 사고다. 때문에 한 사람이 교통사고를 두 번 겪는 일은 그리 흔치 않을 것이다. 이게 기적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아니 어쨌거나 기적은 아니지.

기적은 굉장히 좋은 일이 일어났을 때 쓰는 말이다.


기적은 신에게 무언가를 빌 때 일어나는 일이다.



신에게 빌었던 과거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신앙이 부족했는지 신은 이뤄주지 않았다. 아니, 사실 어쩌면 이뤄주고 어쩌고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얼굴이 그렇게 된 사람을 구할 수는 없다.

차체가 뒤집혔다. 말 그대로 세상이 뒤집혔다.


덮쳐오는 천장을 막은 건 잔혹하게도 운전석의 두 사람이었다.


사람의 몸이라는 건 의외로 튼튼하고 질긴 것인지, 위치가 좋았던 것인지 나빴던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희생이 어떻게 뒷좌석의 어린애 두 명이 살아난 틈을 만들어냈다고 한다. 한 교통 경찰은 무책임하게도 그 사고 속에서 살아남은 자식들에게 기적이란 말은 남발했다.

좀 더 남발해서 기적이란 말이 신문에 실리지 않게 막아준 그의 선배가 있었다는 게 내게는 더 기적 같은 일이다.

그 참상을 나만 봤다는 게 더 기적 같은 일이었다.

도착했다는 목소리에 생각이 끊겼다. 대충 주머니에 잡히는 지폐 몇 개를 내던지다 시피하고 구르듯이 내려서 병원 현관을 향해 달렸다. 단지 이 정도를 달리는 데도 숨이 벅찼다.

냉정하게 말해 내가 달리고 있다고 생각해 줄 사람도 몇 없을 것이다. 어지간한 환자도 이것보다는 민첩하게 달릴 지도 모른다. 이 순간만은 그간 방안에서 썩어온 나 자신을 증오했다.


1층 로비까지 간신히 도착해 이름을 댔다.


응급실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이명이 울렸다.


또 응급실인가.


기시감이 일었다.

굳어버린 나를 재촉하듯 보다 못한 간호사 복장을 한 여자가 내 손을 이끌고 어딘가로 향했다.

넘어질 뻔하면서도 간신히 이끌려 응급실에 도착했다.


부모님을 마지막으로 전송한 장소랑은 조금 달랐다. 일단 여기 온 환자 중에서 여기서 처치가 가능한 사람은 처치를 하고 수술실로 옮긴다는 설명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냈다.

그간 단련해온 청력보다는 포기했던 안구만을 혹사시켜 사람을 찾는다.

얼굴 없는 모습에 간혹 피가 묻어 있는 모습도 있어 현기증이 일었지만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아 얼마 안 있어 찾아낼 수 있었다.

혈색이 조금 창백하긴 하지만, 몇년만에 보는 동생의 예쁘장한 얼굴이 보였다. 눈을 고이 감고 있는 게 자고 있는 것 같았다.



수염을 밀었다.


몇 년 만인지 모르겠다.


요즘 들어 갑자기 과거 회상하는 일이 많아진 것 같다.

면도를 시작한 게 중3 때부터니까.....


계산하려다가 관뒀다.


오랜만의 자극에 턱이 조금 화끈 거린다.


머리는 좀 긴 감이 있긴 하지만 단정하게 빗으면 괜찮을 것 같다.

옷은 적당히 검정색 옷을 찾아 입는다. 굳이 복잡한 옷을 차려 입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몇 년 만에 동생 방에 들어섰다.

여자 아이 다운 은은한 향이 나긴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간소한 방이다.

대학도 장학금을 위해 한 단계 아래를 고르고, 생활비를 위해


남는 시간 마다 아르바이트에 시달려 가구 하나 변변한 게 없는 방이다.

괜히 감상적이 될 것 같아 차분하게 방안을 훑었다.


찾는 물건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나는 벽에 걸려 있는 산타 복장을 집어 들었다.


, 미리 입어 봤어야 됐는데....!”

나는 원피스 타입의 짧고 착용한(입는다는 표현은 부적절하다)사람의 선이 드러나는 여성용 복장을 손에 들고 절규했다.

우여 곡절 끝에 입어보니 놀랍게도 딱 맞았다. 이건 내가 부끄러운 건가, 동생 쪽이 부끄러워해야할 일인가.

아니, 인증 사진으로 봐서는 동생 쪽에 문제는 없어 보인다.

....내가 이상하단 걸로 넘어가자. 방에 있는 전신 거울 앞에 서보자 면도를 마치고 불그스름하게 튼 다리가 눈에 거슬린다. 우여곡절 끝에 검정 스타킹을 조금 위험한 서랍에서 찾아내 입었다.


좋군.....”

우리 겔이 세상에 자랑하는 박검정이 나타났다. 쌍둥이니까 납득이 간다.


오늘 몇 번째인가의 택시를 타고 향하는 하늘에 왠일인지 낮달이 떠 있었다.


사실 달은 해와 교대하듯이 뜨는 게 아니다. 늘 거기 있는 걸 그저 우둔하고 우매한 인간이 깨닫지 못할 뿐이다.


라고 학식 있는 고정닉 들이 버로우빵 논쟁을 벌이는 걸 본 기억이 난다.

정말일까.


도착하자 역시 원피스 타입의 짧고 착용한(입는다는 표현은 부적절하다)사람의 선이 드러나는 여성용 복장을 입은 여자가 나에게 달려들었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건 목소리로 전해져 온다.


그 걱정스러워 하는 분위기에 휩싸여 나까지 그렁그렁 해질 뻔 했지만 어떻게든 괜찮은 것 같다고 잘 설명하고 넘길 수 있었다.


아까 병원에서 휴대전화로(동생은 그런 문명의 이기까지 갖고 있었다)대충 사정을 전해들은 산타녀는 이내 내가 할 일에 대해 짤막하게나마 설명해주었다.

어려운건 없다. 호객도 할 필요 없고 계산 접객 전부 자기가 해줄 테니 단지 박검정 원정대를 상대하는 시늉만 하면 된단다.

고마운 일이다.


그렇지만 순순히 고마워 할 수 만도 없다.


아니, 애초에 디시를 소개한건 너라며?

나는 산타녀의 설명을 들으며 가슴 속에서 저주를 퍼부었다.

눈앞의 산타녀가 어떤 겔러리에서 어떤 고정닉을 사용 중인지 반드시 밝혀내고 말겠다.

대체 남장 여자라는 컨셉을 어떻게 생각해낸 거지?

이렇게 잘 먹힌다는 걸 어떻게 알았냐고?!


그렇지만 어쩌면 나는 그런 넓은 오지랖과 낚시에 완전히 말려들어 박검정 원정대에 참여하고 몇 년 만에 햇볕을 보게 되었을 지도 모른다. 결과적으로는 더 심각한 꼴이 되었지만.

이 망할 산타녀의 감독 아래 내 동생은 얼굴이 새빨게 지면서도 사진을 찍고 글도 올린 덕에...몇 년 만에, 자신의 유일한 가족과 대화 비슷한 것도 나눌 수 있었다.


산타녀는 무례하게도 고인이라도 떠올리는 것 마냥 과거 회상이라도 하듯이 동생이 접객을 자주 헷갈리네, 사람 얼굴을 기억을 못 하네 추억을 떠올리듯이 악담을 입에 담았다.

내가 내 앞가림에 정신이 팔려, 내 자신의 목표를 향해 앞 뒤 없이 기계적으로 달려 갈 때 나와 같은 고통을 남몰래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야 약해 빠져서 도중에 그만뒀지만 지치지도 않고, 호러 영화 속에서 주인공을 위해 악전고투하는 히로인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눈가를 훔치며 저녁에 찾아가 디시에서 수년 동안 학식 있는 고정닉들에게 전수 받은 심문 기술을 펼치리라 마음먹었다.


그리고 적당히 훈련을 마치고 결전의 때가 왔다.

, 어때. 나 괘, 괜찮아?”

목소리가 떨리는 건 어쩔 수 없다. 화장을 한 얼굴이 굉장히 신경 쓰인다. 가발을 쓴 머리가 불안해서 죽을 것 같다.

, 듣기는 했는데 진짜 짱 예뻐요! 이 다리가 완전...!”

그만해, 고통스럽다.

정말이지 이 꼴로 남들 앞에 나서는 것만도 굴욕적인데.....그게 하물며.....분명히 짤방 감이다. 후세에 길이길이 알려질지도 모른다.

동생의 명예를 지켜야죠. 걔가 거기 사람들이랑 친해졌다고 얼마나 재밌어 했는데요.”

그래, 디시가 살갑게 구는 게 매력이긴 하지. 그렇지만 걔한테 친한 척 한건 그런 이유가 아닐 거 같은데....아니 재밌어 했다고? 제정신인가?

걔 처음 왔을 때는 완전 침울했거든요. 별로 말도 안하고. 친구도 없는 것 같고.”

아니야, 침울한 건 내 잘못이 아니야. 내가 얼마나 유쾌한 시크 남인데.

그래도 오빠 얘기 듣고 알려 준건 잘한 것 같아요. 친구 같은 사람들 생겼다면서 얼마나 좋아했는데요.”

아니야, 친구 아니야. 늑대라고. 아니, 이걸 늑대라고 해야 하나. 적당히 다른 동물이 떠오르질 않았다.

그 뭐냐, 오빠랑도 얘기도 해봤다고 얼마나 좋아하던지. 평소에도 오빠 자랑을 얼마나 하는지 아세요? 완전 우상 수준이던데. 어제도 산타 복장 들고 오빠한테 보여줄 거래나 뭐래나 밤늦게까지 얼마나 난리였는데요.”

가자, 더 이상의 대화는 불필요해.”


나는 단호하게 스탭 룸의 문을 열고 나섰다.

한쪽 구석에 척 보기에도 심상찮은 무리가 모여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얼굴은 유감스럽게도 알 수 없지만 언젠가 디시 무슨 무슨 겔 정모 사진, 이라는 데에서 본 것같은 찌질한 면상들임에 틀림없겠지.


저기에 거대 배게에 금발머리 케릭터가 그려진 걸 안고 있는 건 파시즘이로군. 전에 사진을 올린 걸 봤다. 분명해. tv에 나오고 싶은 거냐? 대체 그 꼴이 뭐야?


나는 갑작스런 환호와 박검정을 연호하는 소리에 강한 현기증을 느끼며 그들에게 다가섰다.

이런 열렬한 호의적인 분위기는 오랜만...이라기보다 태어나서 처음일지도 모르겠다.

누군가 흥분을 버티지 못했는지 기묘한 소리를 지르며 테이블 위로 뛰어올랐다.

사람들이 황급하게 끌어내렸다. 건너편에서는 글에서 봤던 점장 언니가 눈을 부라리는 게 기척만으로 느껴졌다.

조금 즐거운 것 같은 느낌이, 실로 오랜만에 들었다.


두 시간 동안의 정모는 디시로 단련된 나의 정신력도 버티기 아슬아슬한 지점까지 갔지만 파시즘이 자기가 가져온 배개에 토하는 걸로 정모가 마무리 되었다.



.

.


이번 주 들어 7번째로 겔이 털렸다.

모니터에는 여느 때처럼 성인광고에나 쓰일 것 같은 문양과 글이 뒤범벅되어 난무해 일종의 기하학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파괴신이 몇 호 골을 넣은 모양이다.


아니 파괴신이란 건 야구 선수 아니 였어? 이젠 축구까지 하는 거야?

물결치는 별의 파도를 보며 이 녀석들은 아무래도 상관없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자식들아 역습 간다 뉴비들도 다 따라와라

라고 써봤지만 이내 글의 홍수에 묻혀 사라졌다.

왠지 유쾌한 기분이 들었다. 이게 이른 바 축제 분위기라는 걸까. 축구라도 봐볼까, 마음먹은 순간이었다.

다녀왔습니다, 하며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황급히 일어나 문을 열고 나갔다.

쿨 한 시크 남인 나는 이 시간에 맞춰 보일러를 틀어놓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래서 방 문 너머의 적당한 온기가 기분 좋게 다가왔다.

Writer

수려한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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